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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 인도사로 본 한국사회
이광수 지음 / 이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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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에게 일본혼을 심어줘야 하다. 그렇지 않고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일이므로 영구적이며 근본적인 사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곧 조선인의 심리연구이며 역사연구이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말이다. 역사가 핵무기보다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라는 이광수의 책은 인도사를 바라보는 통찰력으로 한국사의 아픈 곳을 꿰뚫어 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가 서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들어진 인도'라는 사실에 놀라고, 인도의 다르면서도 비슷한 한국의 모습에서 다시한번 놀란다. 책장을 읽으며, 연신 핵폭탄을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도에 대해서 한국 사회에 대해서 고민했다. 인도사학자 이광수가 전해준 충격을 함께 나눠보자.

 

1. 만들어지는 역사

 '역사는 과거의 객관적인 사실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번 지나간 역사는 똑같이 재현될 수 없다. 과거 사실을 카메라로 똑 같이 찍어 놓지 않는 이상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설혹 카메라로 과거 사실을 찍는다 하더라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이 어떠한 관점에서 사실들을 찍고 편집하는가에 따라서 과거 사실은 새롭게 창조된다. 인도의 역사도 역사의 재창조, 재해석 작업이 끊임 없이 진행되었다. 자신들에 의해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된 인도사는 인도인의 마음을 올가 메고 있다.

  인도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를 떠올릴 것이다. 저자 이광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교를 설명하면서 '피자 효과'를 언급한다. 신혼여행을 로마로 갔을 때 맛보았던 담백한 이탈리아 피자는 다시 미국으로 전해져서 미국식 피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번화한 중심상점에는 미국식 피자가 즐비했다. 반면, 전통 이탈리아 피자를 먹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서민들이 살고 있는 골목을 찾아가야했다.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식 피자' 처럼, 인도의 힌두교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한번 굴절되었다.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에 의해서 왜곡되었고, 다시 인도가 이를 역수입하면서 '미국식 힌두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힌두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 속에는 서로 상반된 주장과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불살생과 소숭배, 정신적 안정의 추구를 핵심으로하는 힌두교만이 서구에 의해서 확대 재생산되었고, 이를 힌두교의 전부라 믿는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인도의 슬픈 현실은 우리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이미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서구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신경쓰며,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국의 이미지를 통해서 한국의 것을 찾는 어리석음을 우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려할 때, 강력한 제국즤의의 군화발에 짓밟혔던 약소국들!! 그들은 스스로의 문화를 고민해볼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많은 고유문화들이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사라졌다. 타국의 시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에 대한 다른 선입견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인도는 종교의 나라이다.' 혹은 '인도는 종교 때문에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세 인도에 침입한 무슬림들이 인도의 사원을 약탈했으며, 이것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저자 이광수는 정면 반박한다. 소미나타 사원 약탈 사건을 살펴보면, 무슬림의 기록에는 대대적인 약탈 사건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힌두인들의 기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상을 파괴했다는 자랑꺼리로 소미나타 사원 약탈을 과장했을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연구성과라 이광수는 주장한다. 그런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종교로 분할 통치하려했고, 서구 역사학자들은 충실히 제국주의자의 의도에 복종했다. 이슬람인들만의 기록을 토대로 힌두와 무슬림의 대립은 필연적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역사는 현재 인도를 종교 분쟁의 사회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서 마들어진 역사의 족쇄는 다시 인도인들을 분열과 대립의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서울 수 있다. 역사라는 무기를 수구세력이 잘알고 있었다. 뉴라이트세력들은 뉴라이트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만들었으며, 국정 한국사교과서를 만들려했다. 친일파 중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분열과 대립, 좌절과 노예근성을 심어주려했던 그들의 노력은 다행스럽게도 촛불혁명으로 좌절되었다. 수구세력이 역사라는 무기의 중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진보라는 사람들은 역사에 무관심했다. 역사를 수능 선택과목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우리의 역사를 말하는 것을 쇼비니즘적인 생각으로 몰아붙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해야할 때에 역사라는 배타적 민족의식을 기르는 과목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역사는 평화를 지키는 수호천사가 될 수도 있으나, 세상을 아마게돈으로 몰고갈 수 있는 핵무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할 것이다.

 500년 후,  '전두환은 평화주의자다.'라는 기록을 학생들이 배우게 된다는 상상을 당신은 해보았는가? 저자 이광수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와 비슷한 일이 인도사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쇼카왕은 인도 대륙을 정복하고 전쟁의 비극을 깨닫는다. 그리고 평화주의자가 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믿고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아쇼카가 평화주의자라면 깔링가 정복 후, 15만 명의 포로를 풀어주었어야했다. 그러나 아쇼카는 15만 포로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가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더 이상 추가적인 대외 팽창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대외팽창보다는 충분히 팽창된 영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제대로된 사료 비판을 하지 않고, 아쇼카가 남긴 글들만 그대로 믿는다면, 전두환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반포한 글들을 그대로 진실로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러한 이광수의 지적은 나의 머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료비판!! 이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위한, 깨어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아쇼카가 만들어 놓은 아쇼카식 역사를 바로보지 못한다면, 500년 후, '전두환은 평화주의자다.'라는 왜곡된 역사를 우리 후손들이 배우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2. 인도사를 통해본 한국의 민낯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저자 이광수의 날카로운 인도사에 대한 통찰에 놀라고, 그의 한국사에 대한 송곳 같은 비판에 아파한다.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인도를 바라보았다. 그러한 잘못은 우리가 우리를 바라볼 때도 반복된다. 진정한 자아를 찾이 못한 인도와 한국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 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도와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자.

  '네루왕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네루를 비롯해서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 인디라 간디의 큰아들 라지브 간디로 이어지는 네루 혈통들이 인도의 수상직을 역임했다. 네루의 후광을 등에 업고 검증보다는 혈통을 중요시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은 한국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버지 박정희가 18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정치를 시작한지 18년만에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인간은 왜이리도 어리석을까?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라면, 혈통보다는 능력을 보아야한다는 진리를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무당에게 연설문을 수정받고, 세월호 7시간 동안 머리 올리기에 정신없었던 지도자를 아직도 추종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박근혜 통치시기, 국민은 좌와 우로 분열되었다. 박근혜는 한국인 모두의 대통령이기 보다는 보수의 대통령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Divide and rule(분할하여 통치하라)"의 통치방식은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사용한 방식이다. 힌두와 무슬림을 분리하여 인도인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물론, 일제가 문화통치시기 친일파를 양성하여 우리민족을 분열시키려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다.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야하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일 터인데, 자신의 권력을 쥐려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비열한 통치는 인도와 한국에서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학습지를 만들지 않아, 인터넷에 보면, 나보다 더 잘만드는 사람들이 많은데뭐!" "SKY 나온 애들이 나보다 잘하잔아. 그네들을 믿어"라는 말을 젊은 시절에 선배 교사로부터 들었다. SKY 출신이라면 주눅부터 드는 나약한 선배교사!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선배교사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많이 느꼈다. "SKY는 최고"라는 신화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나는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을 내재화하고, 한국사회의 주인으로 살기보다는 노예로 살려는 자들이 우리주변에는 너무도 많다. 한편, 한국사회의 "SKY 출신"이라는 신화는 다시 수구 신문에 의해서 합리화되고 있다. 수구신문은 한국사회의 평화와 자주를 싫어한다. 일본자위대의 위협비행을 수구신문은 일본의 편에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한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제한을 일본의 입장에서 변호한다.

   이러한 모습을 인도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브라만 세력을 약화시키려했던 아쇼카왕의 노력은 그가 죽자 실패로 끝났다. 결국, 브라만과 왕은 타협한다. 브라만은 현실 세계의 왕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댓가로 브라만은 경제적 풍요를 누린다. 브라만은 자신의 특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신화'를 만들고, 그 신화에 자신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왕의 족보에 삽입해준다. 견고한 브라만의 '신화'는 현대 인도사회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다. 다른면서도 비슷한 인도와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씁슬함을 감출 수 없다.

  인도농민의 자살 쓰나미가 밀려왔다. 2006년 한해 동안 1만 7060명의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국적 농업회사의 횡포속에 나약한 농민들은 죽음의 길을 택했다. 개방화 신자유주의의 높은 파고를 헤쳐나가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농민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더이상 농민의 죽음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지는 못한다. 개방화 속에 농촌에는 젊은이가 없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사라진지 오래다. 농촌은 공동화되고 있다. 인도보다 더 심각한 농촌문제를 보면서 사라지는 농촌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괴롭다.

  저자 이광수는 냉철하게 인도역사를 읽어내려간다. 인도 고대사를 전공한 그가 인도의 현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있다는 점에서 연신 감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우리는 우리를 제대로 보고 있었던 것일까?

 

3. 과연 그럴까?

  날카로운 이광수의 글들을 읽으면서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저자 이광수와 나의 역사관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어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이광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굽타 시대를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인가? 저자 이광수는 굽타시대 브라만을 5.18 후 전두환을 위해서 기도한 목사들에 비유한다. '마누법전'에 브라만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내용이 있다는 내용은 카스트에 저항하는 조짐이 빈발했다는 반증이라 주장한다. 이시기 발달한 언어학과 천문학은 신을 위한 것들이라 주장하며,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고 보기 보다는 '브라만 문화의 황금기'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라 주장한다. 이광수는 브라만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심하다는 생각이든다. 문학, 천문학, 언어학이 신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발전했다면 그것은 인도문화의 한부분이다. 따라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고대의 문화들은 지배층의 문화가 아니었던가? 그리스로마의 문화도 수많은 노예 노동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진배층의 문화였다. 중세의 성당들도 농노들의 경제력을 찾취해서 만들어진 기념물들이었다. 조선 세종시대의 문화도, 조선의 농민들을 수탈해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문화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그시대 그 사회의 생산력의 한계가 분명히 있었기에 그것 나름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둘째, 민족주의는 반역일까? 저자 이광수는 "민족주의가 강할 수록 다른 의제는 위축된다."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 담론만이 지배될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비타민C를 과다 섭취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주의의 과다는 분명 심각한 문제를 유발시킨다. 그러나, 인간이 생존하는데 비타민C가 필요하듯이, 인류가 생존하는데 민족주의는 필요하다. 이광수가 지적하듯이 거대한 인도가 작은 나라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인도인에게 '민족'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말했듯이, 사피엔스가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의 공동체를 믿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강력한 '민족'이라는 무기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파괴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망이 될 수도 있다. 서구의 강대국들은 민족주의라는 무기를 선업혁명과 결합시켜 대외 팽창의 에너지로 활용했다. 그들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민족이라는 개념을 수입했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히틀러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경험한 서구는 민족주의를 반역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서구의 이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학자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한국도 서구와 같이 원초적 민족의식이 없었다고 규정한다. 사실 유럽은 근대에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 그러니 민족이라는 원초적 개념이 근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부터 '삼한일통'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타민족을 지배하면서 팽창해간 역사가 아니기에, 좁은 한반도에서 동류의식을 키워갔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을 버리고 일본군에게 세금을 바치면 될텐데도, 조선의 백성들은 왜군에 맞서 싸웠다. 못난 지배층을 버리지 않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땅을 지켜낸 민초들을 보면서 묻는다. '무엇이 당신들을 싸우게 만들었냐고?' 왜군이 이해못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성의 주인이 바뀐 것은 백성들에게 세금낼 대상이 바뀐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조선의 백성들을 달랐다. 원초적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땅을 지켜올 수있고, 통일을 이끌수 있는 원동력이 '민족'에 있다. 민족이라는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민족주의에 가려 의제화되지 못하는 의제를 발굴한다면, 민족주의는 반역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이념과 사상은 존재할 수 없기에 '민족'을 수선해서 인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셋째, 변혁인가! 안정인가! 저자 이광수는 말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사회에서 방치되어 있는 계층이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나라는 없다. 총기가 난무하는 5.18때도 전당포 한 곳 털리지 않았고, 전국에서 백만명이 모여 촛불을 밝히면서도 사건 사고 한건 터지지 않았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박노자가 '평화적인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쓴적이 있다. 그들에 눈에는 한국인들이 평화적인 방법만을 고수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평화적 3.1운동에서 평화적 촛불집회가 이상해보일 수도 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냉정한 비판도 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안정이 사회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알고 있지 않은가?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명예혁명을 비롯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는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국가의 에너지를 국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소비했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연기에 있었다. 평화적 방법을 통해서 정권을 교체시킨 우리의 저력은 비판의 대상이기 보다는 타국이 배워야할 교본이 아닐까?

  저자 이광수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관점이 다를 뿐이다. 그의 탁월한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주장에 반문을 던지는 경험 자체가 나로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 이광수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겨울의 세계사 연수에서였다. 인도사의 권위자를 만나 인도사에 대한 편견을 수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으며, 인도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우리 사회와 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인도는 왜 매국노가 없을까?'라는 주제였다. 세계사 연수에서는 한국에서는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인도는 그러하지 않았다고 규정한다. 이 책에서는 여기에 "인도에서는 대영제국의 지배에 찬성하는 이들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식민지배를 했지만, 한국에서는 친일 세력이 존재의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식민지배를 했다."라고 말한다. 한국사의 맥락에서 인도사를 이해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오류들! 인도사는 인도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함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인도사와 한국사를 비교함으로서, 그 대비를 통해서 한국사를 분명히 알게되기도 했다. 그래서 일국사를 뛰어넘어 세계사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바라보자는 말이 설득력을 얻나보다.

  부처는 자신을 신으로 신봉하라 말하지 않았다. 그져 먼저 깨달은 사람일 뿐이다.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철저히 부정했고, 한곳에 머무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는 부처의 말을 어기고 불교 교단을 형성했다. 인도에서 불교가 융성할 수록 불교의 퇴보는 시작되었다. 발전이 퇴보로 이어져 인도사회에서 불교가 힌두교에 포섭되었다. 서구의 일직선적, 단선적 발전 사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인도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는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화두를 던져준다. 사고의 확장을 바라는 독자, 인도사를 바로보는 것을 뛰어넘어 한국사를 꿰뚫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ps.  이책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오류 몇가지를 지적한다. 인도사 전공자이다보니, 한국사에 대한 설명에서 오류가 몇가지 보인다.

144쪽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이 함께 만든 나라"라는 표현은 '거란족'을 '말갈족'으로 수정해야한다. 거란족은 발해를 멸망시킨 족속이다.

157쪽 "5세기경 고구려에서는 차별을 기초로한 율령적 신분제가 나타났다. " 고구려는 4세기 소수림왕때 율령이 반포되었다. 5세기를 4세기로 수정해야한다.

265쪽 "쇄국"이라는 용어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수정해야한다. 한국사 용어가 바뀌었다.

75쪽 "항일 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왕조의 복원을 주장했다. 그들이 꿈꾼 것은 평등사회건설이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라는 서술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물론 왕정복구를 추구한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공화정으로 대세가 바뀌었다. 3.1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부분은 반드시 수정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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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근현대사 -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최병욱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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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쓴 베트남사'와 '베트남사'를 읽고서 베트남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베트남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특히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베트남 근현대사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서가를 찾아 헤매다가 '최병욱 교수와 함께 읽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보게 되었다. 목차를 보니 연대기적 서술방식이아니라, 주제중심의 서술이었다. 기존에 읽었던 연대기적 서술 방식의 베트남사와는 분명 달라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베트남의 역사와 우리와 너무도 비슷하지만, 너무도 대비된다는 사실을 새삼알게되었다. 그럼, 한국과 베트남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책을 읽은 소감을 정리해볼 까한다.

 

우선, 이책은 베트남의 근대사에서 부터시작한다. 그 시작은 응우옌왕조의 최고 공신 보 따인에서 부터 시작된다. "나를 불태워라"며 자신을 희생해서 북진을 추진하고 이를 통해서 통일 베트남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것이 베트남 근대의 시작이다. 보통 서양세력의 충격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베트남과의 차이이다. 우리는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물론, 1880년대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강력한 설득력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밖에 중국은 아편전쟁을, 일본은 미국의 페리제독의 포함외교를 강력한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베트남식 근대화의 관점을 수용한다면, 베트남 근대의 시작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근대보다 확실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럼, 공통점은 없는가? 중국의 오른쪽과 왼쪽 팔뚝에 해당된는 곳에 자리잡은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베트남이 황제를 칭했다면, 우리는 원간섭기 이후, 중국의 제후국으로서의 지위를 갖는데 만족해했다. 두나라가 중국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을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문화의 영향 속에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방식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띈다. 우리나라에 의병운동에 해당되는 운동이 베트남의 근왕운동이다. 왕을 중심으로 외세를 배격하는 운동을 처절하게 추진한 것은 비슷하지만, 그속에서도 다른점이 너무도 많다. 베트남의 황제들은 수도를 탈출하면서까지 항불항전을 독려하였으며, 프랑스에 의해서 황제가된 바오다이 조차도, "식민지의 황제로 사느니 독립국의 평민으로 살겠다."며 절대독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대한제국의 황실은 어떠하였는가? 왕자 이강을 제외하고서는 일제에 제대로된 저항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친왕의 경우에는 일제의 볼모로 사는 것에 만족해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철저한 항일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대한제국과 응우옌왕조의 질적 차이이다.

 

한편, 우리에게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약점과 강점을 알고, 서로의 약점을 서로의 강점으로 보충하려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있다. 그리고 신민회의 독립전쟁방략은 이후 독립운동 방략에 계승되었다. 일제에 대항할 강력한 독립군을 기르고, 일제가 타국과 싸우는 최적의 시기에 독립전쟁을 일으킨다는 전략이 '독립전쟁방략'이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방략과 괴를 같이한다. 그리고 나를 되찾고나서는 '공화제'국가를 세우려했다.

 

그럼, 베트남에는 누가 있을까? 바로 판보이쩌우가 있다. 판보이쩌우는 근왕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고,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공화제'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투쟁까지 추진하려했다. 그러니 호치민 보다 판보이쩌우를 베트남 근대사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판보이쩌우가 가택연금으로 그의 정치적 활동이 마감된 상황속에서 동향 친구의 아들인 호치민이 그 바톤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일제가 패방하려는 결정적 순간에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한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려했던 독수리 작전을 연상케한다. 우리의 독립전쟁방략이 계획단계에서 일제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면, 베트남은 결정적 순간을 잘이용하여 스스로 독립하였다. 그리고 그후 30년 동안의 1,2,3차 인도차이나전쟁, 즉 베트남전쟁을 한다. 우리가 외침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우리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전후 200년 동안 이렇다할 외침이 없었다. 실로 엄살이다. 그런데 베트남은 그 역사속에서 수많은 외침에 시달렸다. 시련은 베트남을 단련시켰다.

 

반면 우리는 분단되었다. 베트남이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아직껏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있다.

 

베트남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베트남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의 역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베트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시켜준다.

 

도이모이정책을 추진하는 베트남을 보면서, 이제 우리가 베트남의 쇄신에 손을 내밀며 친구가 되어야할 시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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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 9.11 테러 10년과 달라진 이슬람 세계
이희수 지음 / 청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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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을 다니면서 무하마드 깐수라는 교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슬람 사람이래", "이슬람 사람이 한국말을 잘한데"라는 선배들의 말에, 무하마드 깐수 라는 교수가 궁금해졌다. 그는 무슨 이유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왔는가? 동서문화 교류가 그의 전공이었다. 대학 도서관 서가에서 그의 책 머릿글을 읽었다. "한국은 하늘도 아름답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2천년전 신라의 땅에 왔던 어느 무슬림의 말같이 들리기도 했다. 그와 대화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떠한 감상을 갖고 있는지 직접 묻고 싶어졌다.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날,  "반납 완료되었습니다."라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리던 그 교수의 수업 '아시아지역사'를 수강신청했다. 그리고 그와 강의실에서 만나 진솔한 동서문화 교류의 역사를 배우고 토론하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기숙사에서 신문을 펼쳤다. "단국대학교 무하마드 깐수 간첩으로 드러나"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겉으로 보아도 무슬림으로 보이는 그 사람이 간첩이었다니... 더욱이 북한에도 아내가 있고 남한에도 아내가 있었다. 설마하는 생각과 속았다는 생각이 교차해다. 나에게 이슬람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사람은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나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을 흘렀다. 대학에서 기나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나의 진로를 두고 수많은 고민으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세웠다. 그리고 역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역사를 가까이에서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그리고 역사관련 직업을 얻기 위해서 취업재수를 하면서 부단히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시험을 보았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여행가로 '여행기'를 남긴 사람의 이름은?"이라는 시험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이븐 바투타였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코폴로'라고 답을 섰다. 이슬람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 문제로 많은 사람들의 당락이 결정되었다. 서구의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폴로는 알아도, 이슬람의 유명한 여행가 이븐바투타는 모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시험에 합격하고 신문을 펴들었다. 오래된 기사속에서 '정수일 세계에서 2번째로 '이븐바투타 여행기'를 완역하다'라는 기사가 눈에 띄였다. 시험문제에 '이븐 바투타'가 나온 이유를 알게되었다. 그리고 '동서 문화는 대립의 역사가 아니라 교류의 역사이다. 시대적 소명을 이루고 싶다.'라는 정수일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사뮤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에서 이슬람 문명과 크리스트교 문명을 대립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면, 그는 문명을 교류의 역사로 바라보있다.

 

  사회에 나와서 이슬람에 대한 강의와 이슬람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리고 9.11테러가 일어나고 파리 테러가 일어나면서 이슬람에 대한 공포가 하늘을 치솟았다. 나에게 이슬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슬람과 한반도의 기나긴 교류의 역사 처럼, 나와 이슬람과의 인연은 좁은 실개천이지만,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내가 이슬람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을 주변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의 교류'로 이행할 수 있는 첩경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책을 집어들었다.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한 개설서라고 하면 딱 좋을 책이다. 내가 과거에 읽었던 책들이 주로 이슬람의 역사와 관련된 책이었다면, 이책은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슬람과 우리와의 교류, 종교 분쟁의 원인과 치유책 에 대한 종합 보고서와 같은 책이었다.

 

이 책을 내려 놓는 순간 나에게 밀려든 이슬람에 대한 이산은 '슬픈 이슬람'이라는 단어다. 한때 너무도 찬란한 역사를 이룩하였던 머나먼 문명 '이슬람'! 그러나 지금은 서세 동점의 시기에 제국주의 서구에게 철저히 짖밟히고, 억눌리며 20세기를 보내야했다. 특히 유대인들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받았던 수모와 박해를 팔레스타인의 주인들에게 앙갚은 하듯이 폭력으로 짓밟고 있다.

 

'슬픈 이슬람' 지금의 파리 테러는 슬픈 자들의 추악하고 처절한 절규이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죄없는 영혼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슬픈 이슬람'의 눈물을 닦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악의 구렁텅이로 우리를 끌고 갈 것이다. 종교의 대립과 반목속에서 자신의 종교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타 종교에 배타적인 종교인들은, 이슬람이 과거 보여주었던 '관용'의 모습을 떠올리며, '슬픈 이슬람의' 눈물을 닦아 주길 바란다.

 

피의 보복은 또 다른 피의 보복을 가져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깨닫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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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역사기행 - 서해컬처북스 4
요시무라 사쿠지 지음, 김이경 옮김 / 서해문집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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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하면 피라미드와 미라 그리고 사자의 서를 생각한다. 그러나 피라미드와 미라 그리고 사자의 서가 같은시기 같은곳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집트를 잘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나도 있었다. 이집트 문명에 대해서 제대로 된 소개를 해줄 수 있는 책에 목말라했다.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너무 얕지 않은 그런책을 갈구했다.

 

  요시무라 사쿠지의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역사기행'이라는 책은 이러한 나의 갈증을 잘해결해 주었다. 우선, 이집트 문명을 30년 동안 연구해온 학자의 깊이가 있었고, 이집트 유적지를 같이 여행하며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친절함이 있었다. 그리고 한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함이 있었다.

 

1.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다.!!

 피라미드를 파라오의 무덤으로 잘못아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피라미드에서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한명의 파라오가 5개 정도의 피라미드를 만들 정도였으니, 피라미드를 무덤으로 사용하려했다면, 그렇게 많이 만들 이유가 없다. 또한, 피라미드는 이집트 역사 내내만든 것이 아니라, 주로 고왕국 시대의 4,5왕조에서 많이 만들었으며, 사자의 서는 신왕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피라미드, 사자의서, 미라는 같은 공간에 같은 시기에 있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는 재미 중에서는 기존에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잡고 새로운 진실을 알게될 때에 쾌감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쾌감을 나에게 선사했다.

 

2. 영화 '액소더스'와 비교하기

 '람세스'라는 책과 '액소더스'라는 책을 보면, 출애굽기 시기가 이집트의 람세스2세 때라고 소개된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던 중에 서양사를 전공한 형이, 출애굽을 하던 시기에 람세스2세 재위때가 아니라는 말을 나에게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위키피디아와 '람세스'라는 책, 그리고 영화 '액소더스'에서는 람세스2세가 이집트를 탈출하는 모래를 뒤쫓는 모습이 나온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사실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이책이 해결해 주었다. 이 책에는 람세스 2세 이후, 메렌프타하가 그 주인공으로 소개된다. 특히, 메렌프타하로 보이는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아주 하얀 것이 꼭 이갓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메렌프타하가 모세의 출애굽 시기의 파라오였다는 것이다. 영화 '액소더스'에서는 람세스2세의 아들이 1명있는데, 아들은 신의 분노로 죽게된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후궁이 500명이었으며, 수백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이점도 무척 흥미로웠다.

 

3. 빛은 동방으로 부터

 제왕절개 수술을 우리는 로마의 카이사르가 제왕절개 수술을 받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안다,  cesarean section 이라는 부르는 이유도 카이사르(시이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제왕절개술이 이집트의 의술에서 전래된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 이집의 '카'와 '바'라는 관념이 플라통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될까? '바'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가는 혼령이고, '카'는 성령으로 번역되며, 일종의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본 플라톤이 그리스를 떠나 이집트에 와서 이집트학을 배웠고, '바'라는 관념을 배우고서는 '이데아론'으로 이를 체계화시켰다는 이야기를 일고서는 나는 '아!'하는 탄성을 질렀다. '빛은 동방으로 부터 왔다.'라는 서양의 속담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인터넷 문명 속에서, 정보의 홍수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정보의 홍수에서 제대로된 '성수'를 얻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잘못된 정보를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이것이 확대 재생산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다.  평민들에게 나일강의 범람기에 일종의 뉴딜정책처럼 피라미드 건설에 그들을 참여시키고 빵과 맥주를 주었다는 사실을 모른체, 아직도 노예가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아는 사람들에게 제대로된 이집트 문명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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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미술에 홀리다 - 미술사학자와 함께 떠나는 인도 미술 순례 처음 여는 미술관 1
하진희 지음 / 인문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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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역사는 너무도 다이나믹하면서도 신비롭다. 문자기록을 제대로 남겨놓지 않은 인도인들의 특성상 그들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도신화에 대한 기본적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이해는 인도 미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무굴제국의 세밀화를 접하면서 나는 인도미술에 대해서 보다 체계적으로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1. 아직도 살아 숨쉬는 인도의 미술

이 책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것이있다. 아직도 그들의 삶속에서 살아숨쉬는 인도 미술의 생명력이다. 우리의 미술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 물질문명의 광풍속에서 우리 일상속에서는 사라졌다. 우리의 미술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박물관에 가서 박제화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러나, 인도는 그렇지 않다. 인도의 미술은 지금도 살아숨쉬고있다. 인도에서 미술은 그들의 삶 그자체였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 저자가 아쉬워하듯이, 상업화의 물결 속에서 예전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인도에도 도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200년 지배속에서도 살아 남았듯이, 현대문명의 광풍속에서도 그 강인한 인도 미술의 생명력이 살아 숨쉬기를 바란다.

 

2. 거대한 용광로 인도 미술

인도는 거대한 바다이다. 이 거대한 바다는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들을 품어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아리아인이 왔고, 그들이 카스트제도와 신화를 인도에 가져왔다. 이슬람인이 왔고 그들이 이슬람교와 페르시아풍의 세밀화를 인도에 가져왔다. 영국인이 왔고, 그들이 현대문명의 광풍을 인도에 선사했다. 인도는 그 모든것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인도화했다. 그리고 현대문명의 광풍속에서도 자신의 문화를 잃지 않았다. 다양한 재로로 다양한 그들만의 문화를 그들의 정서를 담아 아직도 표현하고 있다.

 

3. 신화의 나라 인도

인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힌두인들의 종교, 즉 힌두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해야한다. 미술도 마찬가지이다. 인도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힌둑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인도의 신화와 종교를 알 수록 다이나믹한 인도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인도의 신화는 또다른 청량제와 같다. 이 책을 통해서 인도 미술에 대한 이해와 인도 신화에 대한 이해를 깊이할 수 있어 좋다.

 

책을 잡고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그리고 삶의 여유를 갖길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추천한다. 잠시 인도미술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자,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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