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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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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라는 지역에 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보다 뒤떨어진 지역, 열대지역이라는 조건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지역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동남아는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지역이라는 시실을....


  그렇다면 우리는 동남아로부터 무엇을 배워야할까? 그것은 외교에 있다. 동남아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풍족한 자원과 향신료는 동남아에게 축복이기보다는 재앙이었다. 신이 동남아인에게 준 선물은,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수완나부미(황금의 땅)'을 찾아서 인도인 이슬람인들이 동남아로 왔고, 그 뒤를 이어서 유럽인도 왔다. 그들은 동남아를 식민지로 삼으며 수탈했다. 식민의 아픔을 겪었기에 그들은 깨달았다. 약자가 강자에게 짖밟히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현명한 외교술을 터득했다. 

  약자의 힘은 단결이라고했다. 미국과 소련의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동남아 국가들이 제3세계 외교에 참여한 것도, ASEAN을 결성해서 미국을 초대한 것도 약자로서 살아 남기 위한 현명한 외교술이었다. 강대국의 외교 논리에 휩쓸려가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판을 만들어 강대국을 자신의 판으로 초청하는 탁월한 외교술이다. 

  싱가포르의 라자라트남장관은 "태양이 여러개일 때야 말로 작은 행성들은 항해의 자유를 더 확보할 수 있다."(323쪽)고 말다.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ASEAN을 구성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가얇픈 개미가 무리를 이루어 강하게 생존하는 모습을 떠올리게한다. 

  특히, 싱가포르는 작지만 강한 나라이다. 경제력만이 강한 나라가 아니다. 외교에서도 강소국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ASEAN을 주도하며, 필요하면 새로운 협력체를 만들고 이슈를 이끌어간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에 끌려다니며 의탁하는 외교 행태를 보여주는 우리 현실과 너무도 대비된다. 

  싱가포르가 강소국 외교의 모범을 보여준다면, 인도네시아는 한나라의 외교가 어떠해야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독립적 행동 외교"(Bebas dan Aktif), 즉 외부 강대국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국제 사회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인도네시아의 외교는 자주 독립 국가의 외교는 어떠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일본과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외교를 펼치고 있는 사이, 문재인 정권시기 드높았던 외교적 위상은 추락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수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며 경제적으로 추락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동남아의 싱가포르와 인도네이사가 보여주는 외교력은 우리의 외교가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상의 3분의 2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었지만, 타이는 독립을 지켰다. 타이의 피분이 친일노선을 걸었기에 패전국의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타이는 패전국의 대우를 받지 않았다. 쁘리디를 주축으로한 '자유타이(세리티아)'는 OSS를 통해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전투없이 종전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분단을 맞이했다. 부러움에 타이를 바라보았다. 라마4세와 라마5세의 개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유능한 국왕들 덕택에 지금도 왕실은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선입견이 진실일까? 자혜로운 국왕의 통치 밑에서 외세의 침략없이 타이인들은 행복하게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아니었다. 1976년 10월 탐마삿대학에 왕실 근위대와 경찰,군대, 우익청년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대학생들일 학살했다. 피흘리는 학생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의자로 내리치는 장면을 AP 통신 기자 닐 율레비치는 사진에 담았다. 자혜롭고 유능한 국왕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었다. 민주 공화국을 바라는 학생들에게 국왕은 자혜롭지 않았다. 

  태국 정치사를 전공한 저자 현시내는 타이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푸미폰 왕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내린다. 


  "결국 이는 30년에 가까운 군부 독재에 대항해 시민들이 피흘려 쟁취한 민주화운동의 승리를 가로체는 일이었다. 푸미폰 왕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나선 것이다."(287쪽)


  1973년 10월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군경은 탱크와 헬리콥터를 투입해서 해산하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77명 사망 800여명 부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날 푸미폰 왕이 "군부가 사퇴할 것이며, 새로운 총리를 임명해 의회를 재구성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납치되었다. 이것이 타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근원적 이유였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렇게 자란 자유는 때로는 납치당하기도한다. 타이처럼.....

  그런데, 어찌하여 푸미폰 왕을 타이인들은 존경하고 사랑하는가? 이는 푸미폰 왕의 어머니 상완의 이미지 메이킹 덕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어머니(매팔루앙)'라고 불리는 상완은 산간 벽지의 가난한 소수민족을 헬리콥터로 돌아다니며 보살핀다. 소수민족에게 상완은 하늘에거 내려온 어머니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그녀의 아들 푸미폰 왕에게 이어져 자혜롭고 서민적인 국왕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부모를 사랑한다. 생존을 위해서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푸미폰 왕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국왕을 모독하면 최고 15년 동안 감옥에 갖혀 살아야하는 상황 속에서 국왕을 자혜로운 분으로 존경하며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마치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를 살면서 박정희를 자혜로운 어버이로 생각하는 우리의 7080세대처럼 말이다. 


  동남아는 고통을 통해서 생존의 방법을 찾았다. 강대국에 맹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고 강대국을 자신이 유리한 판으로 초청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식민의 아픔을 겪고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가 동남아에게 배워야할 교훈이다. 또한, 피의 댓가 없이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피로 키운 자유는 언제나 납치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지만은 않는다. 현명한 시민이 깨어있을 때만이 정의는 승리할 수 있다.




ps.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은 학자라는 사람들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책의 6쪽과 278쪽에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백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해서 대동아시아 공영권을 만드는 전쟁이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만든 용어이다. 적어도 학자라면, 대한민국의 학자라면, 황국사관에 젖어있는 어용학자가 아니라면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는 사용해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필자들에게 간곡히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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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600년사 - 1299~1922
이희철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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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중심의 역사를 넘어서 우리의 눈으로 세계사를 바라보아야한다는 과제를 무겁게 느끼고 있다. 이슬람 지역에 대한 한국의 역사연구가 일천하다보니, 서구의 시각이 담긴 역사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눈으로 이슬람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고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이슬람의 역사를 바라보았다. 빈을 포위 공격하며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제국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눈에는 야만적인 제국이자 하렘의 궁중 암투라는 도색적인 이미제와 유럽의 병자로서 강대국의 이익에 의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로 오스만을 그렸다. 내가 읽었던 오스만에 대한 책들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책이 거의 없었다. 이희철이 쓴 '오스만 제국 600년사'는 나의 갈증을 해결해주었다. 


  이책은 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 역사 속의 튀르크인, 2장 건국시기, 3장 세계 제국, 5장 격랑의 시대, 5장 변화와 외교의 시대, 6장 개혁과 근대화로 나누어 600년 오스만의 역사를 한국인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짧은 전성기 후에 긴 쇠퇴기를 맞이했다는 면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를 연상케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비교적 긴호흡에서 차분히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메흐메드 2세에 대한 평가였다. 국방티비에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전쟁사를 깊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임용한 박사님과 이세환기자님의 깊고 폭넓은 설명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무라드 2세가 술탄직을 아들 메흐메드 2세에게 이양했다가 자신이 다시 술탄직에 오른 이유를 메흐메드 2세의 난폭성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600년사'에서는 무라드 2세가 아들에게 술탄직을 양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럽이 다시 십자군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라 서술했다. 당시 정세로 보았을때, 저자 이희철의 설명이 더 합당해보인다. 

  그뿐이 아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메흐메드 2세의 폭압성을 강조하며 수박이 사라지자 이를 시종이 먹었을 것으로 예상한 메흐메드 2세는 시종의 배를 갈라서 확인해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이렇게 폭압적인 지도자가 어떻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두개 대륙과 대개의 바다를 지배하였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희철의 설명을 달랐다. 이희철은 메흐메드 2세를 '정복자'라고 부르면서도 법령 작업으로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했으며,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위대한 군주로 서술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메흐메드 2세를 악마로 묘사했다면, 이희철은 서구의 안경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눈으로 메흐메드 2세를 서술했다. 

  

  오스만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에 저자 이희철의 '오스만제국 600년사'가 얼마나 정확한지, 얼마나 유럽의 시각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쓰여졌는지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천한 나의 지식으로 보아도 이희철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애정과 지적 탐구욕은 바다처럼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계사를 가르치면서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전후 맥락을 이해하며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한 책이 우리 주변에는 없었다. 이희철의 책이 그러한 갈증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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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인 이야기 - 흉노.돌궐.위구르.셀주크.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타산지석 21
이희철 지음 / 리수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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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국이 있다. 기록도 주변국에 의해서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 그런 제국도 있다. 바로 유목민족들이 세운 제국이 기록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신기루와 같은 제국들이다. 그래서 이희철의 '튀르크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이 책에는 흉노 제국에서부터 돌궐제국, 위구르 제국,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를 서술했다. 흉노, 돌궐, 위구르, 셀주크 제국은 한국사와 동아시아사, 세계사 교과서에서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제국이다. 그러하기에 이들 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 보고 싶었다. 그들은 어찌하여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서는 홀연히 사라졌을까?

 


  초원의 최강자 흉노 제국은 중국을 괴롭히며 세력을 과시한다. 중국 한나라는 화평을 위해서 공주를 흉노 선우의 아내로 바친다. 그녀들을 화번공주라한다. 매년 비단을 비롯한 수많은 물품이 한나라에서 흉노로 바쳐진다. 이러한 모습은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으로 이어진다. 

  강대한 제국도 내부에서 시작된 균열에 의해서 순식간에 무너진다. 흉노제국은 한무제의 공격으로 지쳐가기 시작했다. 서흉노와 동흉노로 분열되더니, 동흉노는 다시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다. 

  흉노의 뒤를 이어 제국을 건설한 돌궐제국도 제1 돌궐제국의 경우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열하고 내부 부족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물론, 수나라 장손성이 돌궐의 내부 분열을 획책한 면이 있다. 제2 돌궐 제국도 중국의 이간책과 유목부족의 이탈과 반란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결국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 

  위구르 제국 또한 지배 씨족 간의 갈등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다. 한번 제국이 세워지면 5백년 동안 지속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일반적인 모습인데 반해서 튀르크 계열의 유목제국은 흉노 제국을 제외하고서는 우리처럼 장기간 국가를 유지한 경우가 드물다. 물론 중국의 내부 분열책이 작동하기도 했지만, 외부의 분열책에 너무도 쉽게 분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목제국의 태생적 한계로 때문으로 보인다. 

  유목제국의 태생적 한계란 무엇일까? 유목민이 세운 제국이기에 이동할 수밖에 없다. 잦은 이동은 문화를 축적하기가 농경민족보다 어렵다. 더욱이 유목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민족적 자각을 이루기가 너무도 힘들다. 부족단위로 이동하며 생활하기에 민족의식보다는 부족의식이 강하고, 국가의 이익보다는 부족의 이익이 더 중요시된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가 중국의 분열책에 쉽게 균열되는 이유이다. 

  그래서일까? 튀르크 계열의 유목민들은 돌궐문자와 위구르문제를 만들며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하기도했다. 특히, 위구르족은 정착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구르 제국은 멸망했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셀주크 제국도 짧은 대제국 시기를 지나서 여러 셀주크국으로 분열한다. 

  이러한 유목제국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며 600년 대제국이 건설된다. 바로 오스만 제국이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가 당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돌궐계 유목민의 도움 때문이다. 탈라스전투의 승리로 이슬람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아아시아 내류으로 전파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고, 튀르크 세계에 이슬람교가 퍼진다. 슬람교를 받아들인 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 시기에 화려한 제국의 꽃을 피운다. 서아시아에 정착한 튀르크족은 티무르제국의 공격으로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슬람교로 제국을 하나로 묶고, 탁월한 그들의 전투력으로 서아시아를 비롯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유럽을 위협한다. 

  강대한 세계 제국 오스만이 쇠퇴한 원인은 무엇일까? 학자마다 다양한 원인을 제시하겠지만, 나는 제국의 전성기에 쇠퇴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 쇠퇴의 씨앗은 무엇일까?

  첫째, 제국의 강력한 군대 예니체리가 쇠퇴의 씨앗이었다. 씨앗을 뿌리면서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날지 알 수 없다. 햇빛과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며 탐스런 꽃을 피울 수도 있지만, 폭풍우와 가뭄에 꽃을 피울 수 없을 수도 있다. 더욱 심각한 일은 그 씨앗이 내가 원하는 꽃을 피울 수 없고 독초로 자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니체리라는 군대를 만들었을 때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청소년들을 개종시켜 술탄의 충실한 군대가 되길 기대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제국의 팽창이 중지되자 전리품이 사라지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보수만으로는 살 수 없어 부업을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마다 보수를 올려받기를 원했고 풍부한 보너스를 바랬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술탄을 죽이고 마음에 드는 새로운 술탄을 앉히기도했다. 예니체리라는 씨앗이 제국의 독초로자랄지 누가 알았겠는가!

  둘째, 오스만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대제의 황후 휘렘 술탄이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휘렘 술탄은 자신의 아들을 술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총리 이브라힘파샤를 처형하고 차기 술탄으로 지목된 무스타파를 죽였다. 아무리 탁월한 군주라할지라도 자신의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그는 탁월한 군주라할 수 없다.

  조선의 세종과 정조를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과 정조의 가장 큰 차이는 세종 이후에 조선은 계속해서 발전하였지만, 정조 사후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왕권에 걸림돌을 미리 제거한 태종이 세종에게 있었으나, 정조에게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할아버지 영조가 있을 뿐이다. 영조는 정조에게 정치적 족쇄를 채워 놓았고, 정조는 그 족쇄를 벗어 던지기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조선은 쇠퇴해갔다. 

  술레이만대제는 앞선 탁월한 술탄의 기반위에 나라를 운영하며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제국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면 후계자를 잘 세웠어야했다. 그는 그러지 못했고 제국은 쇠약해져갔다. 

  셋째, 무리한 원정으로 제국의 피로도가 높아졌다. 술레이만대제시기 제국은 최대 판도를 자랑했다. 급속한 팽창과 이로인한 피로도는 싸여만 갔다. 제국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내부 산업을 활성화시켜야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외부에서 수입했다. 서구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내부의 산업을 발전시키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그러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제국의 팽창과 이렇게 얻은 부를 외국에서 필요한 물품을 수입해서 해결했다. 

  그리고 제국의 팽창이 멈추자 제국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재정이 악화 되었다. 예니체리에게 충분한 급료와 보너스를 줄 수 없었다. 무리한 원정에서 오는 피로도를 낮추면서 경제적 내실을 다지는 전략을 선택했다면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팽창에서 오는 이익을 생각하며 앞만 보며 달려온 제국은 팽창이 멈추자 쇠퇴의 길을 걷는다.

 


  "북방 유라시아의 주인공은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남긴 '튀르크'족과 '몽골족'이었다. 튀르크족으로 북방 유라시아에서 최초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흉노였다."(21쪽)


  몽골 다문화학생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그 학생은 나에게 몽골에서는 흉노의 역사를 몽골의 역사로 배운다며 그것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나로서는 몽골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남긴 역사기록이 없기에 흉노를 몽골의 역사라 단언할 수 없었다. 이희철 자자의 '튀르크인 이야기'에서는 흉노의 역사를 튀르키예의 역사로 규정하며 역사서술을 하고있다. 그리고 현재 '예니 튀르크예 전략 연구원'에서는 튀르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역사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역사를 흉노 제국과 돌궐제국으로 확장하며 자신의 뿌리를 재조명하고 있다. 어쩌면 흉노의 역사는 몽골의 역사이기도하면서 튀르키예의 역사일수도 있다. 튀르키예와 몽골의 흉노 역사에 대한 치열한 뿌리찾기를 바라보며, 역사는 기록하는자, 기억하는자의 것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실감난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떠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올바른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새로 정립하는 것은 제국 발전의 기초임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ps. 좋은 책이지만 옥의 티가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E.H카의 말"(8쪽)

   =>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은 크로체가한 말이다. 수정해주길 바란다. 

   책에 지도한장 없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도가 수반되어야한다. 힘들겠지만, 튀르크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지도를 첨부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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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왕의 머리가 이미 한 왕조 복궐에 걸렸다. 선우가 한 왕조와전쟁을 하겠다면 한 나라의 천자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변경까지 출병하여 기다릴 것이다. 선우가 만약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응당 한왕조에 신하로 복속해야 할 것이다. 어찌 멀고 먼 곳까지 도망쳐 막북 추운 곳에 숨어 있는가?-무제가 흉노에게 전한 말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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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 - 대사가 바라본 튀르키예의 과거와 현재
조윤수 지음 / 대부등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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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튀르키예의 역사에 관한 책을 몇권 읽어 보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학술적인면에 치우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학술적인 깊이가 없는 책도 있었다. 대사가 바라본 튀르키예의 모습은 어떠할까? 너무 학술적이지도 않으면서도 재미와 깊이를 안겨줄 수 있을까?


  이 책은 두장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장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이라는 제목으로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600년 오스만 제국의 빛나는 영광과 유럽의 병자로 쇠락해가는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11개 주제로 구성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복자 메흐메트 2세와 셀림 1세의 잔혹성이다. 유교의 왕도정치를 강조하는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은 너무도 잔혹하다. 술탄이 된자는 형제를 죽였다. 심지어는 조카까지 죽인자들도 있다. 세조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되었고, 사육신 사건 이후에 단종을 죽인 것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유교적 왕도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있어서는 있어서는 안될 폐륜적 행태가 계유정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역사 속의 비극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폐륜에 비하면 애교수준이다.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는 아버지 베아지드 2세를 내쫓고 아버지 베아지드 2세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낙향하는 길에 죽었다. 아마도 셀림 1세의 명령으로 독살된 것으로 추청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내쫓고, 독살로 생을 마감하게한다는 것은 유교적 관점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폐륜중에서도 아주 극악한 폐륜이다. 

  유교가 망해야 조선이 산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한때 그러한 생각을 했다. 완고한 노인들이 자신의 보수성을 유교로 합리화했다. 그런데, 세계의 역사를 살피면서 우리의 역사가 타국에 비해서 잔혹하지 않은 이유는 유교의 역할이 컸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폭군이 등극했다할지라도 신하들은 백성을 하늘로 여겨야한다며 군주에게 간언했다. 연산군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한 내시 김처선은 연산군에 의해서 액사했다. 예전에는 문약한 붓의 문화를 가진 조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바라보며, 강한 칼 문화의 잔혹성을 보면서 부드러운 붓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두번째 장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이라는 두명의 정치인을 통해서 튀르키예 공화국를 바라보고 있다. 저자 조윤수가 대사 출신이다보니, 튀르키예의 과거 역사보다는 현재의 역사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오스만 제국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탄생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라질뻔한 오스만 제국을 그가 살려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설했다. 이슬람교와 현실 정치를 분리시키고 서구화 개혁을 추진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서아시아 지역에서 그래도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국가 튀르키예를 건설했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그를 가슴 깊이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역사에 비유한다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쳐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건설해 놓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치인이 등장했다. 에르도안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 권력에 오른 것은 이명박과 비슷하다. 이명박은 서울시를 하느님에게 봉헌한다는 말을 하여 빈축을 산적이 있다.(이명박 시장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재임 시기에 다스 실소유주 논란을 시작으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자원외교 비리 등등 수많은 구설수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는 정권에서 물러나고 몇년 후에 감옥에 갔다. 

  에르도안은 이명박보다 더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총리가 되어 튀르키예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정체체제를 바꾸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다. 20여년이라는 장기간 권력을 장악한 그를 보며 이명박 보다는 성공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에르도안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만들어 놓은 튀르키예 공화국를 뒤집어 엎기 시작했다. 우선, 아타튀르크가 중요시한 정교분리에 손을 데기 시작했다.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다시 강화시키고, 박물관으로 쓰이던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어 이슬람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아타튀르크의 서구중심 외교에서 탈피해서 이란과 러시아에 무게 중심을 둔 외교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에르도안의 행보를 보면 그는 술탄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한다. 이승만, 박정희와 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에르도안이 현명한 처신을 하길 바란다. 


  과거의 화려한 역사에 매몰된다면 역사를 발전할 수없다.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역사를 부활하려는 에르도안! 그러나 그는 정교일치의 오스만 제국의로 돌아간다면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튀르키예 공화국은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 오늘의 튀르키예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오스만 제국이 600년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핵심적 이유를 제대로 파악해야한다. 능력 있는 자가 술탄이 되었으며, 종교적 관용정책을 실시하여 탁월한 인재를 선발했다는 오스만 제국의 장점을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에 적용할 방법을 찾아야할 것이다.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튀르키예 사회를 옥죄로한다면 영광의 오스만 역사를 재현하기 보다는 유럽의 병자를 부활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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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01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튀르키예의 미래 발전 열쇠를 에르도안에게 맡긴 국민들은 과연 만족하고 있을까요?

강나루 2023-10-08 10:32   좋아요 0 | URL
윤통에게 미래를 맡긴 우리와 비슷하겠죠.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0-01 0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말씀 해주신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보면서 모든게 일장일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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