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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이야기 - BBC 한 권으로 읽는 인도의 모든 것
마이클 우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살림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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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문명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찾는다. 수 많은 히피들이 그러했듯이 신비의 나라 '인도'를 상상하며 인도를 찾아 떠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인도와 현실의 인도는 다른다. 머릿속에 상상하는 인도의 모습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그들에게 인도는 자신의 수많은 모습중에서 일부만 보여준다. 마이클 우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인도를 세상에 알렸다. 그가 만난 인도는 어떤 모습일까? 영국인이라는 한계를 그는 뛰어 넘어 참다운 인도의 모습을 발견했을까?


  세상은 넓은면서도 좁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서구의 언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1786년 콜카타에 살던 영국인 판사 윌리엄 존스 경은 발견한다.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 라팅어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이들 언어가 동일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왔다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인도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윌리엄 존스 경 처럼 인도의 언어를 공부하며 스스로 의문을 품고 이 질문에 답하려할 때만이 자신의 모습을 조금 보여준다. 

  인도의 참모습을 보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인도의 참다운 모습을 보려고하기 보다는 없애버리려고하는 자도 있다. 우리가 세계사 교가서에서 배운, 쿠샨 왕조의 카니슈타왕의 석상이 2001년 4월 카불 박물관에서 탈레반의 손에 박살냈다. 극단적 종교 중심주의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를 우상으로 규정하고 훼손했다. 머리가 사라져버린 카니슈카왕의 석상은 우리에게 극단적 종교중심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같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굴제국의 아크바르는 달랐다. 그는 이슬람교를 비롯한 힌두교 등의 다양한 종교의 화합을 추구했다.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관용과 화합이라는 탁월한 정책으로 무굴제국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 샤 자한을 황금 감옥에 가둔 아우랑제브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휩싸여 제국을 병들게 했다. 


  "나는 혼자 와서 이방인으로 떠난다. 내가 누군지, 지금껏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 어떤 처벌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구나!"-355쪽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저지른다면, 그 죗값은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저지르면서 죄를 짓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종교가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를 폭력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라는 색안경으로 인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인도의 일부분만 볼 수 있듯이, 국가라는 색안경을 쓴자도, 인도의 일부분만 왜곡해서 바라보게된다. 저자 마이클 우드는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죄악을 정면으로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도 영국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영국이 인도를 200년 동안 식민지배하면서,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중에서 가장 최악의 만행은 인도인을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계획이다. 뱅골분할령은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갈등이 심화되도록 했다. 비록, 뱅골분할령이 당시에는 실패했을지라도, 이후의 영국의 인도 식민정책의 근간은 힌두와 이슬람교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간계는 성공해서, 인도가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독립되도록 했다. 만약 마이클우드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영국의 뱅골 분할령을 언급하며 통렬한 반성을 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며, "분할이 영국의 현실정책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도의 분할은 여러 번에 걸친 실패의 결과였다."라며 영국의 책임을 회피한다고,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만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라는 안경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영국인 마이클우드는 인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아무리 가족과 인도를 많이 찾고,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할지라도, 그는 제국주의 영국이라는 저질 안경으로 인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인도를 전공한 학자가 적고, 인도 관련 서적이 적기 때문에 인도에 관한 정보를 얻기 힘들다. 비록 무더운 여름철 시워한 냉수 같은 시원함을 선사하지는 못하지만, 마이클우드의 '인도 이야기'는 인도에 대한 지식에 목말라하는 우리에게 한모금의 김빠진 사이다의 맛을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문자의 한계는 분명했다. '살림'출판사가 이책을 다시 출판하려한다면, 부록에 이책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담아 출판하기를 기대한다. 적어도, 유튜브에 관련 다큐멘터리를 올려 놓고, 이책에서 안내를 해준다면, 책과 다큐멘터리가 조화를 이룬 재미있는 인도 여행이 될 것이다. 


ps. 흥미로운 사료를 첨부한다. 


"왕으로 봉해진 지 8년이 지나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왕-'신드의 사랑을 받는 자'-은 칼링가를 공격했다. 15만 명이 생포되었고, 10만 명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그 뒤에도 거의 같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칼링가를 무릎 꿇린 뒤 왕의 마음속에서 투쟁심 또는 갈등, 법을 향한 갈망이 싹텄다. 정복에 대한 후회도 생겼다. 자유민을 정복한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학살하고, 노예로 만든다는 듯이다. 이제 왕은 이런 일에서 고뇌를 느꼈다. 대단히 심각한 일있다."-아소카 석주 8

 

"위대한 구원의 건축가인 쿠샨의 카니슈카, 올바른 분, 정의로운 분, 전제군주, 신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 나나를 비롯한 모든 신에게서 왕의 자리를 얻으셨다. 왕은 첫 번째 해에 즉위하셨다. '''' 그리고 그리스어로 '칙령'을 발표하신 뒤 아리아어로 번역하셨다. '''''' 왕의 영토는 사케타시, 카우삼비시, 파트나시, 스리캄파시까지 이르렀다. '''' 왕의 의지에 굴복한 모든 왕과 그밖에 중요한 인물들에게 까지, 왕은 인도 전체를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켰다.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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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07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이책 찜!!☝
장바구니로~~@@

강나루 2021-05-07 17: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초딩 2021-05-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강나루 2021-05-08 19: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두서 없이 쓴글이 당선되어 쑥스럽고요
축하까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초딩 2021-05-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이야기의 근원이 여기 인것 같군요 ㅎㅎㅎㅎ

서니데이 2021-05-08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강나루 2021-05-09 05:1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5-09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행복한 날 되세요^^

강나루 2021-05-09 09:27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님도 행복하고 사랑 넘치는 하루 보내세요.^^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 - 세계사를 뒤흔든 중동의 거대한 바람
류광철 지음 / 말글빛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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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의 눈으로본 세계사'를 읽고, 이슬람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 책을 읽은지 꾀 오래되어 이슬람에 대한 역사도 희미해져갔다. 이슬람 역사에 대하서 다시한번 빠져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전직 외교관 출신이라 그런지, 이슬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막에 떠돌아 다니던 유목민을 이슬람교는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리고 그 힘은 대단했다. 이베리아 반도까지 팽창하며 유럽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 것이 이슬람이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빈을 포위 공격하며 유럽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이슬람의 역사를 이슬람인들은 잊지 못한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슬람인들은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는 정치인들과 과거 영광스러운 순수 이슬람시대로 돌아가자는 종교인들로 양분된다. 이에 대해서 유광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에 생긴 문제는 이 시대의 중지를 모아 현대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187쪽


  영광스러운 과거가 오늘의 족쇄가 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것을 잊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을 설계해야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고집하며 과거를 오늘에 재현하려고 한다면 이는 과거의 노예일 뿐이다. 우리가 과거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교훈을 얻고, 과거의 승리와 패배의 요인을 알아내어, 오늘을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인 과거의 성공 이야기에 취해서, 과거에 했었던 모든 것을 재현하면 과거의 영광이 돌아올 것으로 착각한다. 역사는 변화와 발전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일이 현재에 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변화된 환경과 발전된 사회라는 조건 하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할지라도, 과거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패배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이슬람은 중세 유럽인들이 이슬람의 발전된 문물을 배워 근대를 이끌어낸 점을 교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특히 탈레반에서 자행되는 여성 억압과 IS에서 이뤄지는 반인륜적인 행동은 이슬람교의 전통에도 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 이슬람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싶다면, 이책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책에도 몇가지 오류들이 있다. '알라신'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알라'는 '신'을 의미한다. '알라신'은 '신신'의 뜻이니, 너무도 황당한 표현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120쪽에 "오스만이 진출하는 곳에는 언제나 예니체리가 앞장섰다."라는 표현이다. 물론, 예니체리를 미화시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사실과는 다른다. 예니체리는 다른 군대를 보내고,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투입해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부대이다. 그들을 총알받이로 앞장세우는 일은 없다. 

  분쟁이 지금도 계속되는 서아시아 지역(중동)을 바라보며, 이제는 알라의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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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4-13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광스러운 과거가 오늘의 족쇄가 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는 교훈을 배워갑니다. ^^
 
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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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인들의 역사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때 마침 '오스만 제국사'라는 책이 눈에 띄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과 전쟁터를 누비는 예니체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서문에서부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가났다. 저자의 의도는 오스만 제국 입문서로 이책을 저술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오스만 제국사를 알고 싶었던 나로서의 적잔히 실망했다. 그러나, 단행권으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서가 거의 유일하기에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오스만 제국 입문서이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예니체리가 생각난다.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라고 불리는 어린이 공납제도에 의해서 충원되었다. 기독교 지역에서 어린이를 충당하여 교육시키고 관료와 예니체리로 선발하였다. 그런데,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만 본다면 데브시르메가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잘 운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을 갖게한다. 그러나, 제국의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데브시르메 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세습의 방식으로 예니체리는 충원되었다. 수박 겉핥기식 역사교육으로 빚어진 오해를 이책이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3악장 KV331 '터키행진곡'을 들으면서도 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이러한 음악이 작곡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에서 사용된 청동대포를 기억하는 나는 오스만의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사력으로만으로 유럽을 위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음악은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적대 여성 리더가 공중에 던지는 지휘봉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영국 합스브르크의 군악대도 오스만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병자'가 아니라, 문화 대국이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 '압제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널드 쿼터트는 이를 민족주의 논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흔히 민족이 만들어지고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국가가 먼저 만들어지고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규정한다. 1차 세계 대전 후, 서아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한다. 그후, 분리 독립한 국가들은 국가 정체성 확보가 당면과제였다. 그들은 튀르크인의 악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조했다. 청년 튀르크당이 튀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일어났다. 홉스봄의 '만들어진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도널드 쿼터트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사'를 서술했다. 보통의 서양 학자들이 서구의 시작에서 제국주의적 편견에 휩싸여 제3세계 국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그러하지 않았다. 한예로 1915~19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을 서술하면서 그리스인이 저지른 1821년 오스만 무슬림 학살, 1876년 불가리아 기독교인들이 1000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사례를 지적했다. 학살은 비인간적인 행동이지만, 이것이 오스만 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즉, 무슬림인 오스만은 악마, 기독교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서술이 돋보인다.

  6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었고, 커피와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유럽에 전해준 오스만 제국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보다 많은 책이 번역되거나 쓰여진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이다. 그날을 그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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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 본 이란 현대사
유달승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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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에 대항한 국가는 비극을 면치 못한다. 세계 초강대국 앞에서 무력하기만한 약소국들을 바라보며 냉혹한 국제질서의 무자비함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의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이중 이라크는 미국의 공격으로 친미 국가가 세워졌다. 북한은 미국과 종전 선언을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이란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자존심하나를 내세우며 미국과 날선 대립을 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란의 역사는 너무도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시험에도 잘 출제되지 않는다. 세계사 교과서만으로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이란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현대 이란을 만든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 현대사를 살펴보는 '이슬람 혁명의 아머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그래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서울과 테해란은 자매도시이다. 이란에는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고, 수도 서울에는 '테해란'로가 있다. 멀고 먼 나라 나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무도 가까웠던 나라가 이란과 한국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디나-아케메네스 페르시아-파르티아-사산왕조 페르시아사파비왕조는 이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란인의 조상이 세운 왕조이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을 때, 이란을 통치하고 있었던 카자르왕조는 너무도 부패했고 무능했다. 1891년 담배 이권을 영국에 넘긴 것에 분노한 이란인들은 담배 불매운동을 전개한다. 담배 불매 운동이 성공하는데 성직자의 역할이 컸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이 이미 이때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1921년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1925년 팔레비왕조를 창건한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근대화의 방식은 너무도 폭력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근대교육제도를 실시했고, 여성의 베일 착용을 금지시켰다. 이는 종교인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어 모사데크 수상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석유국유화 조치를 이행한다. 결국 파레비왕조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진다. 이때 미국이 팔레비왕조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어 일명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친미 노선을 견지하자, 자주의식이 강한 이란인들의 강한 저항을 얻게된다. 미군의 치외 법권과 미군주둔, 서구화정책은 수많은 시위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팔레비 왕조는 유혈진압을 했다. 인권 외교를 펼쳤던 카터 행정부는 인권탄압을 하고 있는 팔레비왕조를 열열히 지지했다. 이란은 '중동의 헌병'이라 불리며 충실한 친미국가로 거듭났다. 

  서아시아에 이란이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한국이 있지않은가! 모함마드 레자 샤가 폭력을 사용하여 반정부 시위를 짓밟았다면, 박정희 정권도 자신의 반대파를 잔인한 고문으로 짓밟았다. 이 두 정권이 친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 '테해란로'가 생긴것도, 테해란에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는 것도 이러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었다. 

  이란과 한국과의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팔레비왕조의 폭압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시위가 계속된다. 민중시위의 핵인 호메이니를 터키로, 이라크로 보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있는 동안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정치 이론을 완성했다. 호메이니의 사상은 이란으로 흘러들어왔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그를 멀리 프랑스로 보냈다. 호메이니의 영향력은 파리에서 세계 언론을 통해서 더욱 커졌다. 결국, 무함마드 레자 샤는 망명길에 올랐고 이란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란은 호메이니가 제시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팔레비왕조가 친미정권이었기에 호메이니는 미국을 좋아할리 없다. 1979년 11월 4일에 발생한 미대사관 인질 사태는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란은 반미노선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989년 하메이니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으며, '조선-이란 친선주간'이 설정되기도 했다. 이란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과 남한이 친선관계를 맺었다면, 이란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과 이란의 관계가 좋아졌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따라서 이란과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좋아지기도 했고 나빠지기도 했다. 남한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정권이 들어섰지만, 이란은 아직까지 호메이니를 이맘으로 여기는 이슬람 공화국이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란은 얼마전 우리의 배를 환경오염을 시켰다는 이유로 나포했다. 이란의 속마음은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원화자금을 사용하지 못한것에 대한 항의적 성격이 농후하다. 과연 이란과 한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2.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나쁘기만할까?

  호메이니는 미국을 너무도 싫어한다. 자신을 핍박했던 팔래비왕조를 지지했고, 이란을 떠난 무함마드 레자 샤의 입국을 미국이 허락하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고, 젊은이들은 분노하여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런데,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가장 좋았을 시기는 친미정권 팔레비왕조시기였다. `1978년 이드 알 피트르의 시위에서 잘레 광장의 출굴르 막고 탱크와 헬기 사격으로 2000명을 사망시킨 무자비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함마드 레자 샤의 어리석은 광기가 빛을 발한 이 사건을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비난했을까?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에 기대를 걸었다면, 우리는 너무도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을 방문한 레자 샤의 환영회 만찬 자리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을 "국민들이 샤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정의 섬"이라고 불렀다. 자국의 이익에 인권은 없었다. 오직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발생했다. NSC에서 이라크를 상태로 전쟁하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했다. 이란과 미국의 중간 무역을 이스라엘이 담당했다. 이란과 미국, 이란과 이스라엘은 견원지간이다. 철천지 원수들 사이에 이러한 밀거래가 행해졌다. 

  이란 콘트라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 이란은 이라크를 상대로 전재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의 적국인 이라크를 지지했다. 미국은 팔래비왕조가 이란을 지배했을 시기에는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로 규정했다. 그러나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를 반대했다. 이어서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에서 삭제했으며, 미국의 무기를 이라크에 보내주었다. 

  자신의 적의 적을 친구로 삼는 것은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원하고 있는 이라크의 적국에게 다시 무기를 판매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이라크와 이란이 전쟁을 하는 사이에 양쪽에 무기를 팔아서 미국이 엄청난 이익을 얻는 모습은 세계 대전 시기 미국이 연합군과 추축국에게 했었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미국의 선택적 정의에 실망하고,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오직 영원한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이란 현대사와 냉혹한 국제질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호메이니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팔레비왕조의 폭압정치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정치 형태를 탄생시킨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그를 평가해야할까? 아니면, 카자르왕조와 팔래비 왕조에서 부족하지만 진행되었던 근대화를 '문화혁명'을 통해서 무효로 만들고, 아직도 차도르와 터번을 두루고 다니는 중세시기로 시간을 되돌린 인물로 평가해야할까? 

  나는 호메이니를 나쁘게만 평가할 수 없다. 이책의 들어가는 글에 저자 유달승은 이란사회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도서관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저자에게 몸이 불편하면 사원에 가서 자라고 친구가 제안한다. 사원에 가서 잠을자라? 신성한 사원에서 잠을 자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사원은 힘들때 쉬는 곳"이기에 사원에서 낮잠을 자기도하고 아이들이 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과장에게 청소원이 당당히 자신의 보조를 채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이를 관철한다. 학과장도 청소원에게 예의를 표하고 정당한 요구를 받아준다. 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좀더 시간을 두고 내려야겠다. 호메이니가 제시하고 성립시킨 '이슬람 공화국' 이란의 실험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호메이니는 탁월한 성직자이자 정치가, 혁명가로 평가될 수도 있으며, 헛된 실험으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이란인들이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디, 호메이니가 탁월한 정치가이나 성직자미염 혁명가로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ps.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사산'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사산'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던 '사산'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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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3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는 호메이니가 무슨 악마처럼 묘사되지만 이란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영웅적인 인물이겠죠? 하지만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또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종교적 지배의 과거로 회귀시킨 인물이기도 하고 참.... 선악의 개념으로 인물이나 역사를 볼 수 없다는게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강나루 2021-02-13 07:18   좋아요 0 | URL
한인물을 무자르듯이 말할 수 없네요 바람돌이님 말처럼 선악의 개념으로 호메이니를 평가하기 힘드네요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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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연기'라는 말이 있다. 이말을 쉬운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인연이라는 그물로 연결되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태균 교수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역사라는 그물에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포획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전쟁,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하기에는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는 기록하는 민족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1.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나비의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는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사실들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의 비극인 6.25전쟁의 날개짓은 바다건너 베트남에 커다란 폭풍을 일으켰다. 

  6.25전쟁의 전쟁 전개 양상은 베트남 전쟁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흔히,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전선을 형성하여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을 것으로 상상한다. 6.25전쟁에 대한 교육을 받은 우리로서는 '전쟁'이란 당연히 전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는 전선이 없다.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뤄야하는 기이한 전쟁이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이 전선이 없는 기이한 양상을 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6.25전쟁의 날개짓 때문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자, 중국군이 참전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후 전개되는 지루한 공방전의 아픈 기억을 미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군도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북위 17도선을 돌파하면 중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것을 미국은 두려워했다. 중국도 미군이 북위 17도선을 돌파하지 않기를 바랫을 것이다. 결국, 북위 17도선을 유지한채,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전투개 전개되었다. 밀림 속에서, 구찌터널에서 출몰하는 베트공은 미군을 괴롭혔다. 

  뗏대공세와 펜타곤 페이퍼가 공개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민낯이 보여지자, 반전운동이 들불처럼 일이났다.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전쟁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의 곳간은 비어있었다. 결국 닉슨은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안한다. 이는 6.25전쟁에서도 보았던 모습이다. 남북의 전쟁에 중국군과 소련군,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개입하면서 6.25는 국제전쟁화하였다. 휴전협상에 남북한이 마주앉지 않고, 북한군과 중국군 VS 미군이 마주앉았다. 강대국들의 휴전협상이 이뤄지면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무수한 소모전 속에서 알토랑 같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무수한 화력을 쏟아부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얇팍한 생각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계속되었다. 6.25전쟁의 휴전협상 시기에 쏟아진 화력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판단한 미국이 선택한 협상전략이었다. 이시기 우리의 한국군의 젊은이들도 많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6.25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화'라는 6.25전쟁의 교훈을 배우기 보다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얕은 방법만을 그들은 배우려했다. 진정한 교훈을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댓가는 이길 수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했을 때, 특히 미국에서는 전쟁범죄자 취급을 받도록했다. 전쟁에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평화'라는 가치란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2. 전쟁에서 배워야할 것.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 어느 여군의 회고담이 있다. 끔찍한 전쟁이 끝나자, 그 여군은 이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며 살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녀에게 장난감 무기를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미워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 나오는 소련 여군의 느꼈던 아이러니를 역사에서 흔하게 목격한다. 끔찍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과연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할까? 

  6.25 전쟁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듯이, 베트남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서 민간인 학생이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정권의 대통령이 베트남에 사과를 했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승리한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미국의 용병으로 온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저자 박태균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 미군에 노근리 학살의 사과를 요구하면, 그들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며 반박한다. 한국도 그러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니, 우리에게 반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나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일본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듯이, 미국에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듯이,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용기있게 사과해야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해야 우리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고통과 직면해야만 우리는 과거의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다. 

  저자 박태균이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의 교훈은 무엇일까? 박태균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한다. 그것이 곧 암보다."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지지한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진 역사를 우리는 무수히도 보았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앞도적인 화력의 우위속에서도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쫓겨 났다. 한국과 태국, 필리핀까지 끌어들이면서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쏟아부어서 남베트남정부를 지원했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했다. 미군없는 남베트남정부는 너무도 허무하게 북베트남에 무너졌다. 국민이 지키고 싶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강한 세력이 유지시키고 싶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저자 박태균은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베트남 전쟁에 알토랑같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은 박정희 정권도 결국 남베트남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몇년후에 붕괴된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하는데 누가 날 죽이겠나!"라던 그도 김재규의 총탄에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자들은 역사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배운다. 진정으로 현명한 자라면 역사에서 참된 교훈을 얻어야한다. 위정자들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참된 교훈이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반성과 사과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한 용기가 모여 이 사회를 움직인다면,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신대학교에서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을 때, 박태균 교수를 처음 만났다. 젊고 실력있는 교수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역시나, 그의 책 '베트남 전쟁'은 쉬우면서도 수많은 생각할 꺼리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하수는 쉬운말을 어렵게 설명하고, 고수는 어려운말을 쉽게 표현한다는 말이있다. 학문적 내공이 상당한 박태균 교수는 어렵고 복잡한 베트남 전쟁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과 어떠한 관계를 모색해야할지를 고민하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ps. 한홍구 교수의 책 '유신'에는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위안부를 보내려했으나, 다행히도 보내지 않았다고 씌여있다. 과연 베트남에 한국군이 관리하는 위안소가 있었는지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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