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회주의’ 향한 발걸음 뗐을 뿐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② -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③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10-12


» 베네수엘라의 달동네 주민 한 명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주민자치위원회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김수행 교수 제공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③ 판단은 아직 이르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정책을 사회주의 대안으로 볼 수 있는지를 놓고 지난 두 주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가 논쟁을 벌였다.

김병권 연구센터장은 민중참여 권력의 토대라고 할 만한 주민자치위원회와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제도의 심화·확산 등을 예로 들며 이 나라 사회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오 교수는 반미와 민중주의 경향이 합쳐진 차베스주의는 마르크시즘의 기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국제주의와 무관하다면서 차베스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 부르주아지 분파의 생존전술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주 김수행 서울대 교수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견해를 보였다. 김 교수는 차베스 정부가 자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새로운 사회, 곧 ‘21세기형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들을 혁명의 주체로 아직 세우지 못하고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차베스가 노동조합의 경영참가나 자주관리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를 지지하는 노동조합단체조차 그의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계급을 혁명 주체로 끌어들이고 미국 정부의 간섭을 저지할 국제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느냐가 새 사회로의 이행의 관건이라고 김 교수는 봤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지식논쟁의 주제는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는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 이 나라는 극심한 빈부격차로 악명 높다. 빈민의 다수는 ‘바리오’로 불리는 달동네에 산다. 김수행 교수 제공

자본주의서 새로운 사회로 전환 위해
전체인구 60~80% 달하는 “빈민 대변”
전폭 지원 통해 정치·경제 참여시켜
기득권층과의 계급투쟁 예비


차베스 정부는 현재의 베네수엘라 자본주의 사회를 새로운 사회, 곧 ‘21세기형 사회주의’ 사회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새로운 사회에서는 소수의 기득권층(국내외의 독점자본, 국내외의 친자본적 정치세력과 각종 언론 매체들, 친자본적 지식인과 중산층, 어용노동조합,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 대중을 탄압하는 경찰과 군인 등)의 특권이 사라지고, 개인들이 자기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공동체가 모든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의해 사회가 발전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기나긴 이행과정은 기득권층의 권력을 제거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의 계급투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차베스 정부는 이 이행과정에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계급투쟁과정에서 혁명이 왜곡될 수도 있고 좌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행과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이 몇 개 있다.

하나는 ‘참여민주주의’다. 민주행동당(AD)와 기독교민주당(COPEI)이라는 보수 양당이 1958년 푼토 피호(Punto Fijo) 협정을 맺어 베네수엘라를 계속 통치했다. 4년마다 대통령, 국회의원, 주지사, 시장 등을 선거로 뽑지만 빈민은 계속 인구의 60~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석유산업과 석유수익으로 건설한 국영산업들의 이익을 기득권층이 나누어 먹으면서 빈민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거를 하기만 하면 민주주의다’는 주장의 잘못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러다가 1989년 2월 민주행동당의 페레스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정책을 받아들여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버스와 전철 요금을 2배 올린 것에 항의해 빈민들이 봉기했고, 군인들이 달동네 주민들을 무차별 총살함으로써 카라카스에서만 2천 명 이상이 죽는 사건(‘카라카소 Caracazo’)이 발생했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민은 정치에 무관심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투표의 기권률이 60%나 달하면서 ‘구세주’를 기다리는 현상이 두드려지게 되었다.

차베스가 1998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빈민을 대변하겠다”고 공약한 것은 카라카소에 대해 군인으로서 용서를 비는 것뿐 아니라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을 정치에 참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지금 차베스 정부는 빈민들을 위한 교육, 건강, 취업, 문화 프로젝트에 엄청난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특히 달동네의 주민자치위원회는 자기 동네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을 토론하고 해결책을 찾아내어 하나의 프로젝트로 만들어 정부에 제안하면, 정부가 전문가를 보내어 주민자치위원회와 상의한 뒤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필요한 자금을 제공한다. 이처럼 빈민들이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자기들의 능력을 놀랄 만큼 향상시키고 있으며 앞으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물론 차베스의 가장 믿을 만한 지지 세력은 이 빈민들이다.

» 부자 동네는 담장 위에 전기철조망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김수행 교수 제공

다른 하나는 차베스가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베네수엘라에는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가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생각은 2002년 12월~2003년 3월에 일어난 자본파업에서 조금 수정된다. 최대의 국영석유회사(페데베사)의 자본파업에 경영진은 물론이고 1936년에 창설된 어용 노동조합연맹(CTV) 소속의 노동자들도 많이 참가했다. 차베스 이전의 정부가 공약한 민영화를 통해 큰 이익을 얻으려 한 경영진과 노동조합이 오히려 국유화를 강화하는 차베스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생산중단 등을 단행한 것이다. 공장을 계속 가동시키면서 생산을 유지하는 작업에 일반노동자들과 퇴직노동자들이 크게 공헌했다. 이 자본파업을 계기로 차베스는 공장을 노동조합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과, 공장을 경영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맡기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 다. 이 두 가지 생각에 의거해 차베스는 노동조합의 경영참가나 자주관리를 꺼려하면서 공장 소재지의 공동체가 공장을 관리하는 것을 새로운 헌법개정안(2007년 12월 2일 국민투표 예정)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파업 계기로 어용노조 불신 커져
경영참가 배제과정서 적대관계 형성
노동계급 혁명 주체로 끌어들이고
미 정부 간섭 저지할 국제연대 맺어야


어용 노동조합연맹(CTV)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고 노동자 이기주의에 빠져 비공식부문(행상이나 소규모의 개인서비스업)의 노동자나 비정규직 등 노동계급 전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공장 경영에 이해당사자들(주주 대표, 노동자 대표, 소비자 대표, 공동체 대표 등)이 모두 참가해야 한다고 차베스는 주장해 왔다. 새로운 헌법개정안에 따르면, 주민자치위원회가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선거위원회, 감사위원회 등과 나란히 하나의 독립권력으로 격상되고 몇 개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코뮌(Commune)을 형성해 이 코뮌이 지역사회를 총괄하면서 그 지역의 공장들도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너무나 획기적인 것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 무어라 논평할 처지는 못 되지만 ‘노동자에 의한 자주관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노동조합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모여 2003년 창설한 새로운 노동조합연맹(UNT)의 최대 정파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를 묘사한 것)을 내세우면서 차베스의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셋째, 미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인 남아메리카에서 차베스 혁명이 얼마나 오래 버틸 것인가가 매우 우려된다. 차베스 혁명이 새로운 사회로 가는 이행기에서 왜곡되거나 좌절될 수 있는 가능성은 미국의 태도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 정부가 이라크 전쟁으로 정신이 없고, 차베스 정부가 모든 정책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수립·실시하며,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석유 수입량의 15%를 공급하고, 볼리비아와 에콰도르 및 니카라과에서 차베스와 비슷한 철학을 가진 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칠레의 아옌데 정부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게릴라 정부를 타도하듯 쉽게 차베스 정부를 타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기득권층이 사회를 계속 지배하면서 차베스의 암살까지 소리 높여 외칠 정도로 계급투쟁의 열기가 치솟고 있다.

» 김수행 서울대 교수
 
결론적으로 말해, 차베스 혁명의 진행 방향과 성공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은 어떻게 될까”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차베스가 용감하게 ‘21세기형 사회주의’를 목표로 혁명을 개시한 것인데, 지금까지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을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인간으로 각성시키면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동참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그러나 앞으로 노동계급을 혁명의 ‘다른 하나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과제와,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간섭을 저지할 국제 연대를 형성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것 같다. 물론 1999년 2월 차베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석유 1배럴의 가격이 7달러였는데 2007년 9월에는 70달러로 올랐기 때문에, 석유로부터 얻는 정부의 세입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 차베스의 활동 여지를 넓혀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수행 교수는 1942년생으로 영국 런던대에서 1982년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과 자본주의 불황이 주요 관심 영역입니다. <자본론>(비봉출판사)을 완역했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서울대 출판부)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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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 혁명’일 뿐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② -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②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05


» 베네수엘라 학생과 반정부 세력들이 지난해 4월 수도 카라카스의 한 도로에 누워 차베스 정부의 치안력 부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평화’라는 단어가 한 시위자의 손바닥에 쓰여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② 왜 대안이 아닌가


지난주 이 지면에서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혁명론을 옹호하면서 역사의 무덤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새로운 모습으로 남미에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대다수 주민이 참여하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중참여 권력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제도’의 심화 확산, ‘협동조합적 기업’을 통한 150만 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 등을 들며 베네수엘라 사회가 ‘실행을 통한 학습’이라는 경로를 통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21세기 사회주의는 없다고 단언했다. 반미와 민중주의 경향이 합쳐진 차베스주의는 마르크시즘의 기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국제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반미는 민족해방투쟁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며, 차베스 집권 이후 실업과 보건, 빈곤 문제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차베스 혁명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오 교수는 주장했다. 때문에 그에게 차베스주의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 부르주아지 분파의 생존전술일 뿐이다.”

다음 주에는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차베스 혁명의 미래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요지의 제3의 시각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베네수엘라 수년간 물가 치솟고
GNP 증가도 국민 착취 결과
고질적 빈곤·범죄문제도 해결 못해
주변부 자본주의 위기 고스란히


지금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인류 문명을 야만의 시대로 이끄는 쇠퇴의 끝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체제는 전세계 프롤레타리아를 처참한 빈곤과 참혹한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수년 동안 밑에서부터 솟아오른 계급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 투쟁의 주체는 전통적 의미의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가 공격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연금생활자와 예비 노동자(청년·학생)였다. 2006년 프랑스의 ‘최초고용계약법’ 반대 투쟁이나 브라질과 칠레에서 학생들의 투쟁은 “미래가 없는” 사회, 곧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안한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2007년 5월 말에 베네수엘라에서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는 세계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가 처한 위기를 그대로 드러내주었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그저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베스 집권 동안 베네수엘라 사회가 앓고 있는 오랜 병인 실업과 범죄와 보건과 빈곤문제가 조금도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베스 집권 동안 ‘혁명’ 엘리트는 강화되었고, ‘미션’(차베스의 정책 과제)을 통한 공공지출이 늘어났지만, 사회의 빈곤화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아 지난 3년 동안 평균 17%를 기록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올랐지만, 그것은 순전히 식품과 상품과 서비스 가격의 인상 때문이다. 국민총생산도 늘었지만, 그것도 착취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며 특히 협동체와 ‘미션’으로 그럴듯하게 꾸민 비공식 부문의 고용 때문이다. 2006년에 1700명의 빈곤층 청소년 등이 범죄로 죽었으며 말라리아, 뎅기열 등 보건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앞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새로운 혁명 세대인 그들은 한편으로는 실업과 범죄, 버려진 어린이와 어머니, 빈곤에 대한 반대를,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 부도덕, 불관용,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를 뚜렷이 밝히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의 탈을 쓴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 없는 사회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는 “베네수엘라 혁명”이 지닌 뜻은 무엇인가. 2004년 차베스 정권 사회경제 고문을 지낸 좌파연구자 레보위츠는 자신이 쓴 책 〈지금 건설하자, 21세기 사회주의를〉에서 차베스가 메자로스의 〈자본을 넘어〉에 영향을 받았고 2005년 세계사회포럼 연설에서 사회주의의 새로운 유형으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가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논리적 연속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개념을 공동체, 연대, 사회주의 도덕으로 정리하면서 사회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인간 잠재성의 충만한 발전의 과정인 체 게바라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이다.

‘공상적’이고 ‘인본주의적’ 수식어가 붙는다 하더라도, 차베스와 차베스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연결하려는 시도는 딱 잘라 비판받아야 한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없다.’ 마치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대립물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칙인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도 차베스가 계승하고자 하는 볼리바르 혁명, 곧 집합생산자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과 미제국주의 반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 없는 민주혁명, 부르주아 혁명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주의의 원칙을 벗어난 어떠한 민족주의 운동도 앞으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과 양립할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는 제3세계주의와 민족해방 신화의 전성기였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는 베트남 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 투쟁으로, 체 게바라, 카스트로, 벤 벨라(프랑스에 대항한 알제리 독립전쟁 지도자) 등에 대한 숭배로 나아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금시대’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닥치자, 이러한 신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고 빛바랬다. 경쟁하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부르주아지는 세계전쟁으로 내몰리고 사회적 부의 생산자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방어하는 투쟁, 곧 전쟁을 향한 움직임을 막고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간다.

반미·반세계화 결합한 차베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마르크스주의 기본원칙마저 벗어나
민족 부르주아 분파 생존전술일 뿐


세계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독자적 자본주의도 나타날 수 없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이 지난 뒤에도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환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이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반세계화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의 복원을 통한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이다. 그런데 반세계화운동은 “자본주의를 오직 하나의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하나뿐인 대안이다”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선전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은 반미라고 하는 민족주의 정서와 빈곤화되는 농민과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사회 불만을 밑거름으로 삼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주의 경향이다. 바로 이러한 두 흐름의 결합이 이른바 “차베스주의”이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한 레보위츠도 베네수엘라의 국가발전계획(2001~2007)을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모델로 여기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동아시아(일본·한국)의 발전전략과 시장을 결합한 라틴아메리카식의 신구조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는 1999년 제정된 헌법에 나온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조항을 보기로 들면서 베네수엘라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도 말한다.

»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 곧 주변부 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라는 빈민층(비공식부문 노동자)이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고 석유자원 하나에만 의존해 경제를 끌고 나가고 있는 특수한 사회이다. 이 나라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석유 자본을 밑천으로 삼아 다른 제국주의 국가(미국·영국·중국 등)의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인민이 처한 빈곤조차 풀지 못한 무능함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이 주변부 자본주의의 반미 민족주의 세력은 몇몇 좌파 지식인과 혁명가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에 베네수엘라를 ‘21세기 혁명의 상징’으로 추어올리면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 탓에 그들은 또다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투쟁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잘못 이끌고 있다. 똑똑히 밝히지만, 차베스주의야말로 사회주의의 탈을 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 부르주아지 분파의 생존 전술일 뿐이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1943년생으로 산업노동학회장, 사회이론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사회실천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사(특히 유럽)와 세계의 계급투쟁과 혁명전략이 주요 관심 연구 영역입니다. 대표 저서로 <맑스주의, 조직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한국사회변혁>(현상과인식, 1993) <사회주의와 노동자정치>(박종철출판사, 2004)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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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넘어선 21C 사회주의가 뜬다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② -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①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09 28


(지난 번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의 리뷰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 글이지만, 이번에는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논쟁 차원에서 세 글을 순차적으로 옮겨놓는다.

다음에 인용할 오세철 선생 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 슬프다고 해야 하나.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김수행 선생 글은 좀 그렇다. '나쁘다, 좋다'라는 측면이 아니라 뭔가 특별함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뭐, 김수행 선생한테 뭘 기대해본 적도 없지만...)



»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① 왜 대안인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은 사회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가 ‘우리시대 지식논쟁’의 두 번째 주제다.

반미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 석유판매 대금의 극빈층 지원 등 차베스의 정책은 신자유주의 지향과 판이하다는 점에서 대안 모델의 한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말 63%의 지지율로 재선된 차베스는 이런 높은 국민적 인기를 기반 삼아, 그가 명명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 정책들을 강도 높게 밀어붙이고 있다.

높은 주목도만큼이나 평가의 진폭도 넓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시키고 있다는 적극적인 긍정론에서부터 재분배 정책을 통해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있다는 비판론까지 나오고 있다. 그가 연임제한 규정을 없애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점도 의구심을 사는 한 요인이다.

이번 논쟁에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과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참여한다. 김 센터장은 대다수 주민이 참여하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민중참여 권력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제도’의 심화 확산, ‘협동조합적 기업’을 통한 150만개 이상의 일자리 창출 등을 들며 베네수엘라 사회가 ‘실행을 통한 학습’이라는 경로를 통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강성만 기자

유럽 모델을 한국 사회 대안으로 검토하던 진보학계에서도 최근 베네수엘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기 시작했다. 직접 베네수엘라를 찾는 학계 인사들도 자주 눈에 띈다. 베네수엘라의 무엇이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체제를 생생한 현실 속에서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고통이 10년쯤 될 무렵인 1998년, 56.2% 지지율로 처음 대통령에 오른 우고 차베스는 이듬해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헌법’을 제정하면서 새 세기의 문을 열고 헌법에 근거한 합법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 후 지금까지, 2002년 4월 반혁명 세력의 쿠데타, 2002년 12월 석 달에 걸친 자본 파업, 2004년 8월 대통령 소환투표로 이어지는 반혁명 세력의 도전을 극복한다. 지난해 12월 63%의 지지율로 다시 재선된 차베스는 주요 기간산업 국유화, 새로운 정당 건설, 국가권력 재편과 헌법 개정 추진을 비롯한 강도 높은 개혁프로그램을 현재 실시하고 있다.

혁명이 일정한 궤도에 오른 2005년, 차베스는 베네수엘라가 ‘21세기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지향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처음으로 밝힌다. 20세기 사회주의를 국가사회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그는, 21세기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재창조하자고 주장했다. 역사의 무덤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새로운 모습으로 남미에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실험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혁명이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오면서도, 대안모델로 선뜻 수용되지 못하는 가장 큰 장벽은 차베스가 ‘연임제한 철폐’를 하면서 독재자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차베스는 지난 8월에 헌법조항 총 350조 가운데 33개 주요 조항을 수정하는 개헌안을 공식적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여기에 현재의 연임제한 조항 철폐를 제안한 대목이 분명히 들어 있다. 차베스도 독재자의 길로 들어선 것 아니냐는 의문은 당연히 제시될 수 있다. 그런데 개헌안에는 다음의 조항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헌법 70조에서 “민중들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험, 공직 선출, 국민투표, 민중협의, 대통령을 포함한 중앙선출직 관료의 국민소환, 국민발안, 그리고 공개집회를 통해 민중들의 참여와 주인정신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하는 내용을 추가하자는 차베스의 제안이 그것이다. “주권은 민중에게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자본가들의 반발 맞서 초강수 개혁
빈곤의 늪 지나 4년째 두자릿수 성장
대통령 연임 따른 독재 우려도
직선·소환제 등 민중 참여로 근거 잃어


물론 이를 연임제한 철폐를 무마하기 위한 장식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이 아닌 베네수엘라의 실제를 보자. 현재 2700만 베네수엘라 국민의 대다수를 포괄하는 2만여 개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아래로부터 민중참여 권력으로 창설되어 작동되고 있다. 2004년 소환투표가 이미 실행된 사례를 볼 때 대통령소환 역시 한갓 장식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대통령 견제수단이다. 유신독재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국민투표를 악용해서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사실 자체가 아니라, 유신헌법에서 또 하나의 국민적 투표라고 할 수 있는 직선제를 폐기하고 체육관 선거로 대치한 데 있다. 베네수엘라 헌법은 대통령 직선은 물론이고 지금의 우리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국민소환제까지 포함하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험은 우리에게 연임제한을 민주주의의 절대 조건으로 각인시키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기제가 아니다. 연임제한 철폐를 문제 삼지 않는 베네수엘라 전문가들이 “프랑스나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영국 같은 나라들도 제한 없는 재선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들 나라도 독재국가인가” 하고 반문하는 것이 변명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도 절실한 것은 국민의 실질적 참여와 정치기제에 대한 국민의 직접적 통제이다. 참여정부 아래에서 민주주의의 유린은 어디서 벌어졌는가. 다수 국민의 참여 과정도 없고, 국민의 의사와도 다르게 강행된 국회의 일방적 대통령 탄핵, 정부의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민주주의는 사실상 유린되었다. 이런 면에서, 지금 베네수엘라는 독재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이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다. 주민자치위원회 실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새 정당 건설 실험에서, 기업의 노동자 공동경영 제도에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이 지점이다.

정치와 함께 베네수엘라 모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분야는 바로 경제 시스템이다. 2007년 한국 대선도 경제대통령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절박한 양극화나 비정규직화를 구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파격적이면서도 현실성 있는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 사회 양극화 현상을 능가하는 빈곤과 침체의 경제를 물려받은 이가 차베스였다. 그는 쿠데타와 자본파업이라는 시련을 극복한 2003년 이후, 빈곤층과 실업률을 꾸준히 줄이면서도, 고성장의 중국에 견줄 10% 수준의 경제성장을 4년째 이어오고 있다. 기업 내부도 주목할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노동자 참여하는 경영 확산되고
수년간 일자리 150만개 창출
도그마 아닌 생생한 현실 속 변화
미국식 경제만 좇는 한국에 교훈


기업경영에서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동경영 제도’가 실험·확산되고 있다. 우리 정부가 3만 개 벤처기업 육성을 고창하는 사이, 비록 첨단 벤처는 아니지만 다양한 생산적 산업분야에서 ‘협동조합적 기업’이 베네수엘라에서 수년 간 18만 개 이상 만들어지고 있다. 150만 개가 넘는 일자리를 창출했음은 물론이다. 자영업을 제외한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대략 30만 개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더욱이 이번 개헌안에는 하루 법정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이는 조처가 포함되어 있다. “정규적이고 생산적인 고용을 늘리고 비공식 무문 경제와 실업률을 줄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 개정 목적이다.

물론 이런 실험이 고전적 사회주의의 국유화라는 잣대로 보면 혼란스러울 수 있다. 베네수엘라 경제제도는 ‘사적 소유를 포함해서 다양한 독립적인 경제단위가 공존하는 일종의 혼합경제 시스템’이다. 과거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실행을 통한 학습’이라는 현실적 경로를 통해서 경제구조 전환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21세기 혁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차베스 정부가 전혀 미국과의 교역량을 줄이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차베스의 반신자유주의는 실제가 아닌 레토릭(수사) 수준이라고 폄하하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적인 경제개혁을 착실히 수행하면서도 세계경제와의 교류를 폭력적으로 단절시키지 않고 있는 지점은 거꾸로 높게 평가받아야 할 지점이다.

반신자유주의가 실제가 아닌 레토릭으로 그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집단과 진보학계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실제적인 국민 삶을 한발자국씩 전진시키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대안은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

»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2006년 세계사회포럼에서 차베스는, “우리는 다른 나라 모델을 복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를 따라 모델을 복사하는 것은 20세기 사회주의의 큰 잘못 중에 하나였다. 자주성과 다양성, 모든 공동체와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힘을 통해 21세기에 새로운 경로를 여행할 사회주의 배너를 다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경제는 미국식 모델을 복사해온 과정이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역시 미국식 모델에 더욱 가깝게 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 혁명경험이 진정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 모델을 ‘복사’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김병권씨는 ‘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1964년생이며 대안사회의 주체 형성과 중소기업 역할 재규정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공저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 <베네수엘라, 혁명의 역사를 다시 쓰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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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국도는 달리고 싶다 평화의 강 되어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경기, 1번국도’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1 15


»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경기, 1번국도’
오래 전에 끊긴 길. 이녘 아스팔트길 끝에 한 사람. 저녘 황톳길에 또 한 사람. 하염없이 마주보고 앉았다.(이종빈) 사이의 강물은 작은 유리덮개 나침반들. 바늘이 일제히 남북을 가리키면서 P. E. A. C. E. 라고 쓴다.(김승영)

지난 10일 오후 ‘경기, 1번국도’전(내년 1월23일까지) 개막식. 사제간인 이종빈-김승영 작가는 자신들이 개별 출품한 작품이 한 합동작업처럼 한데 어우러진 걸 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안산의 경기도미술관이 1번국도를 주제로 현장미술 작가 50여명을 호출한 기획전시실은 오랜만에 와싹와싹 흥이 넘쳤다.

■ 화살과 동심원=1번 국도는 목포와 신의주를 잇는 국도. 본디 파발마가 달리던 길을 일제가 ‘신작로’로 넓혀 1번이라 번호 붙인 것. 그 길은 한반도를 남북 종단하는 대동맥이었다. 신의주는 다시 중국의 단둥, 베이징, 시안을 거쳐 실크로드로 연결된다. 그 길을 따라 동~서, 해양~대륙 문명이 흐르며 교집합을 이룬 것이 조선문명이다. 경기도 1번국도는 평택~오산~수원~의왕~서울~고양~파주~문산. 평택~서울은 넓고 물류가 왕성하지만 서울~문산은 좁고 왕래가 적은데다 흐르느니 군용물이다. 그나마 그 흐름은 철책선 앞에서 뚝 끊긴다.

1번국도가 흐름을 멈춘 데 반해 숨쉬는 가상 동심원이 있다. 타원형 서울은 재물과 서비스가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면서 거대한 호흡이 이뤄진다. 인천, 수원, 의정부, 파주, 춘천, 원주 등으로 이어진 길에 잇대어 작은 실핏줄 길의 끝. 마을들과 사람들이 영양을 공급 받는다. 관가-아파트-공장-농업지대 순으로 엔트로피 현상을 보이면서 동심원을 그린다. 경기도는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두번째 큰 원. 서울의 모든 투정을 받아내고 서울에서 버린 것을 떠안으면서 시선은 항상 서울쪽이다. 정리하자면 경기도는 가운데가 빈 도너츠에 화살이 꽂힌 모양새다.

분단 장벽에 끊겨버린 ‘1번국도’ 날줄 삼고
서울 떠안고 신음하는 지역정체성 씨줄 삼아
현장미술가 50여명이 포착한 ‘경기도의 오늘’


» 고승현의 ‘길’ 경기도미술관 제공
■ 서울 미술-경기도 미술=‘지금, 여기’의 현실에 더듬이를 대고 그 상처를 몸으로 앓는 이가 예술가라면 경기도는 예술인들의 보고일 터. 도시화의 후기에 이른 서울이 단지 짓고 부수는 무의미한 일에 몰두하는 반면 경기도는 생성과 소멸을 오가며 치열하게 투쟁하는 삶의 현장이다. 국도 1번을 따라 분단 문제가 응축돼 있고 동심원 갈피에는 현대화의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철책선, 군부대, 신도시, 이주노동자, 환경오염, 빈부격차 등등 곳곳이 시대의 상처다.

미술 동네 역시 이에 대응한다. 서울은 평면 회화가 중심에 놓이고 다른 장르가 외곽에 포진한 형국이며 소재 역시 비구상이 주류인 반면 경기도는 조각과 설치, 공공미술, 사진·비디오 등 즉응하는 장르가 주를 이룬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현장성이 강하다 보니 회화보다는 전달력이 강한 장르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 작품들의 이야기=경기 북부는 경원선처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노재철) 그곳에는 새가 되고싶은 작가(이반)가 살고 ‘보트 피플’ 같은 실향민(윤석남)이 먼 데를 바라본다. 분단 뒤안에는 미군이 있어, 캠프 험프리에는 종일 비행기가 날고(고길천), 미군기지가 오면서 자기 땅에서 쫓겨난 대추리 사람들의 한은 하늘을 톺아오른다.(이윤엽, 이종구)

1번국도를 더듬으면(박광옥) 서걱이는 갈대숲의 노래도 있지만(김해심) 쓰레기 먹는 말(문병탁)을 풀어놓고 싶은 곳도 있다. 주변에는 모래성 같은 신도시들(강영민). 버려진 가구들(박이창식)은 개발에 밀려난 떠돌이(임승천)의 혼령일 터이다. 한국전 상처가 그대로인 채(임옥상) 지뢰와 철조망 투성이인 디엠지(이시우). 추석 보름달은 경계를 넘어도(박준식) 인간들은 망원경 구멍으로 엿볼 수밖에 없다.(노순택) 1번국도는 꿈꾼다. 언젠가 끊긴 것을 이어(고승현) 실크로드를 달리는 꿈을.(민정기)

» 경기도미술관 기획전 ‘경기, 1번국도’
■ 기획자 가로되=경기도의 상처와 염원이 모인 전시장은 고통스런 신음소리, 또는 한풀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시를 기획한 김종길 큐레이터는 “그런 느낌이 날 것이다. 주제 자체가 강렬하고 현장성이 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 전시를 대안공간 아닌 제도권 미술관에서 포섭한 것을 의미있게 봐 달라고 주문했다. 또 흔적처럼 남은 1970~80년대의 민중미술과 요즘 현장에 진입해 활동하는 젊은 현장미술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다고 말했다. 실제 작품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60대 선배작가와 20대 젊은작가의 훈훈한 만남이 있었다고 전했다.

12월 8일 오후2~4시 경기도미술관 강당에서 평화를 주제로 강연회를 연다. 강사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와 서경식 연구교수.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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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서해안에 새우가 풍년이란 소식이다. 그래서인지 어제 수원성을 돌아보는 길, 팔달문 가는 길에 있는 지동시장 난전에는 생새우가 넘쳐나는 것 같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소래포구에 새우 사러 갈 때 경기도미술관에 한번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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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신화’ 넘어 국경없는 ‘계급연대’로 가자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④ -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②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1 16


 
» 국내 최초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가 하나의 노조를 꾸린 대구 삼우정밀 노동자들(맨 오른쪽).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집회(가운데)와 이주 노동자 합법화 기자회견 때 잡힌 장면들(맨 왼쪽).
 
 

2. 유효하지 않다

지난 주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세계화 시대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으로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오랜 세월 유지해 온 공동체적 유대관계야말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런 유대관계는 민주화 운동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반세계화 시위의 중심에 한국 민중을 위치짓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안 교수는 또 20세기 한국 사회가 겪어낸 파괴적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외세가 지금도 “기득권층을 숙주로 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민족이 진보 진영에서 중심 구실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에 대해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조선 말기 한국 사회는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동질성보다는 다양성이 강했다면서, 동질적인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교적 문약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그 대체물로서 부강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면서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 주에는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학계나 진보 운동계 일각에서 ‘탈민족’의 조류가 감지되긴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민족’만큼 신성화돼 있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국민’/‘민족’ 담론에 호소하는 일이야 어디를 가나 흔하지만, 한국의 경우 보수와 진보 양쪽은 아직까지도 ‘민족’에 대한 일종의 충성 경쟁을 하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예컨대 지난달 필자가 평소 지지하는 민주노동당은 개천절을 맞이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평을 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으로 이 땅 위에 나라를 세운 지 반만 년의 세월이 흘렀다 (…) 하늘은 아직 다 열리지 않았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돌을 놓으시고 우리가 열어야 하는 하늘이다. 민주노동당은 인간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이롭게 하는 홍익의 정신이 충만한 세상을 열어 나가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을 다짐한다.” ‘반만년의 역사’와 ‘단군 할아버지’의 역사성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계급 모순을 부정하는 ‘홍익’과 같은 수사를 노동계급의 정당이 이용한다는 것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는 우리 현실 그대로다. 1993년부터 단군을 실재 인물로 선전함으로써 과학적 근대 사학 자체를 폐기했다 싶은 이북(북한)과 달리 적어도 이남(남한)의 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신화와 역사를 구분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국사 교과서에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배워야 할 만큼 ‘민족’의 신화는 여전히 사회 일반에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 발원지인 유럽에서 이미 우파의 구시대적 전유물로 전락해버린 ‘민족’ 담론이 한국에서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한국에서의 ‘민족’의 불로불사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은 근대에 접어들기도 전에 이미 고려·조선 왕조에 의해 천여 년 동안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가로 운영돼 왔다. 그만큼 어느 전근대 사회보다 국가의식과 내부 동일성이 높았다. 거기에다 일제에 의한 식민화가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자기방어적·해방적 민족주의 담론은 사회의 통념이 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세계에서 동질성이 가장 높은 민족인 우리를 미·소 양국이 강제로 분단시켰으니 자연히 분단 극복 지향의 민족주의 담론이 진보적 사고의 중추로 굳어졌다.”
이런 설명은 꼭 틀리지는 않지만 오늘과 같은 ‘민족’의 위력을 과거에 무비판적으로 투영시킴으로써 한국 역사가 마치 ‘민족’의 중심적 자리매김을 늘 그 전개 목적으로 삼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동시에 ‘민족’과 무관하거나 ‘민족’을 초월했던 부분들은 배제되고 만다.

예컨대 조선말기에 팔도 기층민중의 문화나 언어는 전혀 ‘동질적’이지 않았다. 충남 천안 출신인 조병옥(1894~1960)이 1911년에 평양숭실학교로 유학 갔을 때 이북 지방의 언어를 거의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지역적 언어 차이가 심하게 나타나는 등 전통시대 말기의 한국 사회는 ‘동질성’보다 ‘다양성’이 강했다. 국가의식이 비교적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한 의병장 이인영(1867~1909)이 일본군과의 전투 도중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의병 진영을 떠나 낙향했다는 것이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질 만큼 가족 윤리는 국가윤리에 우선되기도 했다.

‘동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지배계급의 성리학적 세계관이었는데, 조선 왕조의 멸망으로 성리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유교적 ‘문약’(文弱)이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돼 규탄 대상에 오르자 성리학의 대체물로서 ‘부강’(富强)을 우선시하는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가 수용됐다. 민족주의가 성리학이 비워준 자리를 메운 것이 민족주의 위력의 근원이 됐다.
일제 식민화의 충격이 저항 담론으로서의 민족주의의 위치를 굳히게 했다는 것은 맞지만, 민족주의적 저항 운동 이외에도 민족 문제 해결과 계급적 혁명 노선을 병행하려 했던 국내 공산주의 운동 세력들이 식민지 시기 해방 전선의 주축을 맡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국내에서 ‘국제 노선’을 지켜온 공산주의 계열 투사들이 1946년부터 이남에서, 그리고 1953년부터 이북에서 각각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기에 우리가 지금처럼 저항 담론으로서 민족주의의 위치를 과장되게 평가하게 된 것이다. 분단 극복이 1945년부터 지금까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도 맞지만, 과연 1990년까지는 옛 소련, 그 뒤에는 중국의 지원으로 경제를 꾸려온 이북의 지배계급이나, 금융·기술·수출·시장·문화자본 그리고 석유공급의 안정성 등의 차원에서 미국과 일본에 여전히 의존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이남의 지배계급이 진정한 분단 극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계급 갈등이 해결되는 길로 나아가는 것만이 남북한 양쪽의 민중에게 유리한 통일 전망을 열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계급 모순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이다.

보통 탈민족주의적 입장에 서는 이들을 공격할 때에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그러면, 대안이 무엇이냐, 민족이 용도폐기되면 진보의 구심점이 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곤 한다. 필자로서는 그 답이 분명하다. 국제주의적 계급 노선, 가깝게는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의 ‘피해자 연대’가 진보의 거시적 담론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일차적 모순과 분단의 이차적 모순 극복에 가장 도움이 된다. 지금 세계 자본주의의 ‘커다란 착취공장’으로 떠오르는 광역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들을 집중적으로 내포한다. 삼성이나 도요타의 중국·동남아 저임금 노동력 착취, 남한이나 중국에서 ‘정규직 노동’의 치명적 위기, 이민 노동자의 살인적 수탈, 황사처럼 국경을 모르는 환경 인재(人災)들…. 이 문제들의 해결에는 ‘민족’이 백해무익일 뿐이다. 그리고 만약 북-미 관계, 남-북 관계가 계속 개선돼 남한 등 외래 자본이 이북으로 대량으로 침투돼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한층 거대하게 벌인다면 ‘분단’과 ‘통일’ 사이의 모순이 결국 ‘남·북한의 피해 대중’과 ‘남·북한 지배자 연합’ 사이의 모순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15~20년 만에 현대와 삼성이 평양 주위에 공장을 세워 이북 노동자들에게 10만원 이하의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북한 권력자들의 대리인들이 남한에서 은행계좌를 열기도 하고 주식 투자를 하기도 하는 시대는 얼마든지 도래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의 착취자들이 하나가 되는 상황에 대비해서 남한 민중을 대변한다는 진보도 ‘남·북한 경협’에 대한 무비판적인 민족주의적 환희심을 버리고 북한 민중과의 연대, 공동의 계급 투쟁을 벌일 자세를 곧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를 두고 벌이는 논쟁 소리가 요란하지만, 해답은 이미 현장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2007년10월18일치 〈한겨레〉에서 ‘하나로 뭉치니 마음은 하나, 힘은 두배’라는 제목의 기사를 봤는가? 이 기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들이 함께 하나의 노조를 만들어 ‘국내외 출신 가릴 것 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라는 중요한 양보를 쟁취한 대구의 삼우정밀이라는 부품업체를 다룬다.

» 우리시대 지식논쟁 / 박노자교수
 
 
피부색과 온갖 편견들을 넘어선 자본 피해자들의 연대, 이것이야말로 모든 노동자가 평화롭게 같이 잘살 수 있게 해주는, 미래로 가는 길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박노자 교수는 가야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등 처음에는 주로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했지만, 최근에는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1), 〈우승열패의 신화〉 (200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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