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동경 품고 도쿄로…“이중적 역할 한계”

김일주 기자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3일


»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펴낸 박선미 교수
 
 


인터뷰 /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펴낸 박선미 교수

일제하 조선인 여자 유학생 행적 연구
여성 지도자 됐지만 식민권력에 이용되기도
“유학도 유행…요즘 미국 유학 열풍도 비슷”


“재주가 있으니, 또 재력도 있으니, 우리보다 못한 집 애들도 가는데 가야 되지 않느냐, 의당히 간다고 생각했죠.”(유학생 ㅇ씨·테이꼬꾸여자의학약학전문학교 1932~42)

 
»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식민지시기 조선여성의 일본유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박선미(44·쯔꾸바 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과 전임강사) 박사는 최근 펴낸 <근대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창비·1만5000원)에서 여자유학생 64명의 구술조사와 일본에 남아 있는 조선인 여자유학생 관련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 여자유학생이 조선을 출발해 귀국한 뒤의 활동까지를 사회문화사·문화교류사·젠더사의 관점에서 밝혀냈다.

1910년대에 유학의 동력은 ‘실력양성론’이었다. 일본이라는 여과지를 거쳐 들어온 서구문명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1930~40년대에 이르면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도입한 근대 교육체제의 피라미드적 구조 맨 꼭대기를 일본 고등교육기관이 점한다. 일본 정부는 조선학생의 유학을 점차 장려했다. 여기에 맞물려 조선사회에 형성된 강력한 성취의식과 상승지향의 학력주의, ‘조선=외부=주변’ ‘일본=내부=중심’이라는 식민지의식이 각인돼 품게된 중심부에 대한 동경이 뒤섞여 일본유학은 근대적 산업이나 근대적 기술·지식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일부 사회계층에서는 일종의 문화적 유행이 됐다.

일본에 간 여자유학생들은 어땠을까? 1920년, 사범학교를 제외한 고등교육기관에는 조선 내의 학생보다 일본유학생 수가 더 많았다. 가령 1929년 조선에 하나뿐인 여자전문학교인 이화여전에 138명의 학생이 다녔고, 일본에서는 21개 여자전문학교에 158명의 조선인 여학생이 다녔다. 숫자도 빠른 속도로 늘어, 1910년 34명에서 1942년 294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일반적인 유학 동기에서뿐만 아니라, 봉건적인 가족제도를 깨고 사회로 진출하고자 일본 유학을 갔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여자유학생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여성운동 지도자가 됐으며, 교사, 의사, 약제사, 신문·잡지 기자, 예술가 등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박 박사는 여자유학생의 역할이 ‘젠더적 이중성’과 ‘민족적 이중성’을 함께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자유학생들은 유학을 통해 학력과 자격을 얻어 사회에 진출했고, 따라서 여성의 영역을 가정에서 사회로 확대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대다수는 사회에 나가서는 현모양처 의식을 보급하고자 노력했고, 따라서 성별역할분담의 젠더시스템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했지요. 귀국해서는 전문지식을 학교나 지역사회에 보급하는 교육자와 여성전문가가 되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식민지권력이 이용하려고 하는 인재가 됐습니다.”

» 도시샤여자전문학교의 조선인 학생(1937년, 기숙사) 사진에서 보듯이 학교나 기숙사에서 조선옷을 입은 예도 적지 않았다. 창비제공
 
 

이들은 일본에서 주로 가정학을 배웠다. 일본이 서구에서 들여온 가정학을 조선유학생이 다시 배운 것이다. 여학교의 가사과 교사가 된 그들은 식민지권력의 요청에 응해 조선가정의 일본화를 지향하는 조선가정개량운동에 협력하기도 했다. 또 1920·30년대에 현모양처론을 전개해온 여성지식인들은 일제말 총력전체제에서 현모양처를 ‘총후의 부인’, ‘군국의 어머니’로 전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의 일본 유학을 지금은 미국 유학 열풍이 대신하고 있다”는 박사의 지적은 흥미롭다. “교육 피라미드는 근대 교육제도의 보편적 특징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일본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는 데 그 식민지적 특징이 있었죠. 조선인들이 도쿄를 문화의 총본산 메트로폴리스로 동경했듯이, 일본의 고등교육기관은 선진학문의 중심지로서 최고학부의 지위를 차지했고, 유학은 일부 사회계층의 사회문화적 행위로 유행이 됐습니다. 제국의 중심으로 가고자 열망했던 식민지적 사회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지요. 해방후 선진학문의 중심지는 미국이 되었고, 교육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을 미국대학이 점하게 됐어요. 이는 우리가 여전히 세계체제의 변두리 문화식민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우리 사회문화적 행위의 식민지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 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석사과정을 시작한 1996년부터 ‘일제하 여자유학생 연구’에 매달렸다. 그때부터 일본어 초보 수준으로 연구를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살을 붙여나간 그의 지난 10년 동안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뒤 한국사회의 성차별 의식이나 성폭력, 가정폭력과 같은 사회문제를 주로 연구해온 그는 ‘현재성의 역사성’에 부닥쳤다고 한다. “근대적 젠더 체제에 들어선 지 100년이 됐고, 1980년대 이후에는 이 체제가 해체되면서 생활양식과 역할이 변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모든 변화를, 실은 19세기 이후 조선이 세계화 과정에 편입되면서 당시의 여성들이 그대로 겪었던 것이지요. 지금의 변화를 그때부터 축적된 변화 속에서 검토할 수 있다는 점에 이 연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책은 2년 전 일본에서 먼저 출간됐다. “어느 일본인 연구자가 서평에서 만약 제가 사회과학적 여성연구 출신이 아니고 처음부터 역사학계에서 출발했다면 전혀 다른 연구서가 됐을 거라고 평했더라고요. 약점이 때로는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구나 싶었어요. 인생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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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제 가족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 일문일답] 김인주 "중앙일보는 도둑놈"

김은성 기자
출처 : <레디앙> 2007년 11월 26일


다음은 김용철 변호사의 일문일답 전문.

   
  ▲ 사진=뉴시스 
- 삼성자동차 파산 서류를 해운대에서 매각했다고 말했다. 삼일회계법인에서 들은 이야기인가, 아니면 삼성에서 들은 이야기인가?

= 당시 어찌보면 제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일을 제가 안 받으니까 재무팀장 최광해가 직접 TF팀을 구성해서 충직한 직원을 이용했는데 매수가 안 된다는 보고를 받고 상당히 몇 차례 시도를 통해 해냈다고 재무팀에 통고했다.

- 김앤장 법률사무소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호사가 에버랜드 소송에 역할했나?

= 삼성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판단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변호사가 주축이 되서 일했다. 대금을 요구하는 것도 경력이 많은 변호사들이 직접 구조본 고위층과 협상해서 한다.

- 고가미술품은 현재 어디에 있고 어떻게 관리했나

= ‘행복한 눈물(구입액 7백19만달러. 65억원)’이 집 벽에 걸려 있다는 것을 이재용씨에게 들은 것 외에는 미국에 있는지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관심갖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공개된 그림도 있더라. 홍라희는 그림을 산 뒤 경매에 내놓은 적이 없다.

다만 이명희가 산 그림은 크리스티 경매소 기록 보면 차후 다시 경매에 나왔다. 해외송금액이 6백억원대인데 그 중 80%가 고가미술품 매입에 쓰였다. 3분의2를 홍라희가 구입했고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저가다.

- 외환관리법 위반이 당시 문제가 됐다는데, 당시 검찰수사 결과 알고 있나

= 홍라희는 직접 조사받은 적이 없다. 이 그림들은 중간상인 대리인 서미갤러리를 통해 크리스티 경매소 등 외국 경매소에서 사오고 대금은 직접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구매대금과 (공개한) 리스트에 나오는 대금과는 차이가 있다. 자료는 해외송금액만 명시했기 때문이다. 이명희, 신영균, 홍라희, 박현주 등은 조사받은 사실이 없다.

- 중앙일보와 삼성그룹의 위장계열 분리에 대해 말해달라.

=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중앙일보의 계열 분리에 대한 대국민 약속을 여러차례 했다. 그런데 이행은 해야하지만 홍석현 회장이 대주주 신분이 되기 위해 지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이건희 회장 자신 명의의 지분, 또는 차명 지분을 홍석현 회장에게 명의만 넘기는 방식으로 형식상 계열분리를 했다.

그 자금은 이건희 회장의 주식매입대금을 지급한 것처럼 처리했다. 이 부분에 대한 계약서는 제가 한 부만 작성했고 삼성이 보관하고 있어서 이걸 밝히려면 자금출처를 검찰이 조사하면 밝힐 수 있다.

- 이건희 회장 등 삼성 일가에게 비자금이 어떻게 전달됐나. 로비 대상 명단을 추가 공개할 생각은 있나.

= 삼성그룹의 재무팀 사람들은 금고 안의 돈은 모두 이건희 회장의 돈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들이 비자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회장 재산은 회장의 것이니까. 재무팀 관제파트에서 공식적으로 비자금을 운용하다가 가족들에게 돈일 필요하다고 연락이 오면 따로 지급한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로비리스트는 수사절차상 공적인 기회에 말하겠다.

- 시민단체에 대한 인맥 관리를 언급하면서 참여연대만 말했다. 다른 시민단체는 없나.

= 우선 명단을 갖고 있는 경위를 말해야겠다. 이 자료는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대외협력 담당자들이 제게 여러 가지를 의뢰하는데 그 중 변호사 중 친기업적, 친삼성적인 변호사, 즉 민변에 대항하는 우군을 구성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제가 몇 년간 꼼짝을 안하니 삼성의 적대적 단체인 참여연대의 변호사들에 대해 가장 친한 사람들, 선후배나 동기, 연수원 동기 등 각 대상자별로 접근할 수 있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제게 전달한 것이다. 제가 이와 관련된 아무 활동을 안하다가 이번 일을 하면서 서류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제가 지시를 받은 문건이다.

- 지시는 누가 했나.

= 이학수, 김인주 두 사람이 했다. 그리고 참여연대 리스트가 나왔는데 이것은 법조인 중심이고 정말 영향력 있는 공무원과 정치인은 삼성 내부 임직원들이 해마다 보고하는 핵심지인 리스트를 토대로 삼성내부 인사들이 접근할 수 있는 리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만든다.

가령 전 검찰총장인 송광수 하면 바둑 1급에 골프를 좋아하니 골프 좋아하는 정연주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이 맡는 식이었다. 가장 긴밀한 접촉 리스트는 따로 만들어 관리한다고 보면 된다.

- 어제 특검팀 리스트 나왔는데 그 중에서 떡값 받은 검사가 있나.

= 이 명단은 나중에 밝히겠다.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 사진=뉴시스

- 일부 언론에서 마지막 기자회견이라고 보도했다. 명단 추가공개 등 추가 기자회견 있나.

= (정종훈 신부) 마지막 기자회견이라고 말한 적 없고 여전히 드릴 말씀 많다. 더 이상 이런 형식의 공개가 불필요 하도록 공적기관에서 잘했으면 한다는 취지만 말했다.

- 분식회계 과정선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 그건 당시 내가 직접 한 일이다. 난 삼성의 기계 관계사 담당이었다. 일하면서 공고 손실을 분기별로 보고 받았다. 한국 현실에서는 이익이 많이 나도 걱정이지만 적자가 나면 금융비용이 올라간다. 당시 IMF 관리체제라서 주식시가가 액면가 이하로 떨어지면 자본시장의 자금조달이 불가능했다. 회사채 발행도 불가능했다.

분식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당시 정상화 과정에서 분식회계 액수가 커서 정상화 방안으로만 10년을 잡았다. 당시는 정상화 차원에서 시작된 분식회계나, 그 이후 상황도 그렇게 돌아갔는지는 모르겠다.

당시의 심각성은 심지어 삼성전자의 임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법인카드를 모두 삼성카드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때문에 삼성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후 일어난 분식회계에 대한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언론사 문제라 질문이 안나오나 본데 중앙일보의 위장계열 분리에 대해 말하겠다. 중앙일보측은 삼성과 분리됐다 생각 안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구조본에 요구해 돈을 가져갔다. 심지어 주차장 보수공사할 비용을 달라고 찾아온 적도 있었다.

김인주 사장 방에서 보면 중앙일보의 'J'가 보이는데 그는 그것을 보면서 ‘너무 많이 뜯어간다. 도둑놈’이라고 욕을 많이 했다. 또한 X파일 문제로 삼성 협박하기 전에 중앙일보에 이걸로 협박하고 사라고 제의가 20억원에 들어왔다.

그런데 중앙일보가 협상을 잘해서 10억에 사기로 하고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왔다. 돈을 주려고 했는데 내가 막았다. 중앙일보에서 이를 복사했을 수도 있고 해서 이를 사지 말라고 했고 얼마 안 있어 일이 터졌다. 최근 3년간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른다.

공적기관이 수사를 철저히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남아있는 것들을 공개할 수 있다. 제가 오늘 말한 것은 지금까지 삼성의 이씨 일가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제 개인에 대한 보도에는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용철 변호사 부부 노래방 퇴폐 불법영업으로 보도한 중앙일간지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많이 보는 신문이다. 거기에도 대응 안했다. 가족들 가슴 아프게 하는 신문보도도 있었지만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진실 규명이 우선이다.

삼성에서 준 돈에 대해 궁금해 하는데 그 돈으로 세금내고 어려운 학교에 기증도 하고 애들 등록금도 내고 친척 집도 사주고 개인 사치하는데도 썼다. 그래서 다 썼다고 한 것이다. 제가 없다고 하면 돈 뜯으러 나왔다고 할까봐 이런 말 안했다. 사실 무일푼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분보다 조금 낫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가슴이 아프다. 달이 안 보인다고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 안보이면 달을 보려고 노력해달라. 저로서는 저와 제 가족의 운명을 걸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회의 주류세력인 조선일보까지도 소송하겠다고 했다.

언론들은 내가 ‘주장’한다고 보도한다. 주장이 아니다. 난 주장한 것 없다. 사실만 말했다. 이것은 논쟁하자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은 공개적으로 수사를 요구했으니 공적인 수사를 통해 밝혀주고 언론인도 좀 더 취재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이 사회의 주류든 아니든 불의에 야합하는 세력들이 의지가 꺾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최근 전 동료이자 후배가 제가 룸싸롱 마담과 바람이 났다고 소문내고 다닌다더라. 그리고 한밤중에 내게 전화해 괴롭다고 말한다. 삼성 내 호남사람들 다 짤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검찰 출신으로 기업에 간 사람들이 불편해한다는 말도 들었다.

부부 차원에서 30억을 갈취하려 한다고 현직 검사가 이야기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삼성과 현직검사가 하는 이야기가 똑같나. 이런 부분들이 걱정스러워서 오늘 모든 이야기를 다 한 것이다.

또 (삼성 비자금 특검에 대한) 거부권 행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이 정부도 저와 뜻이 같을 것이라고 본다. 제 주장이 아니라 제가 겪은 이야기를 사실대로 의지를 갖고 밝혔고 이 상황을 정리해주기를 바란다. 큰 문제는 다 밝혔고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남았다. 의문사항에 대해선 확인요청 오면 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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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사회에서 '지식인vs비지식인', '지식인vs대중'과 같은 이분법은 쓸모없는 것이다. 누구나가 지식인이고 누구나가 대중이다. 자기가 전공하는 아주 미세한 한 분야에서만 지식인이라 불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과거, 정보와 의사소통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의 지식인처럼 뭔가 심오하고 어려운 것을 발견하여 대중을 계몽시키는 것과 같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과거와 달라진 게 없는 것이 있다면 아는 것을 실천하는 행동으로서의 지식인상일 것이다. 만약 이번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자료와 진술을 토대로 한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에도 불구하고 삼성 문제가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우리나라에 지식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단 것의 반증 아닐까 생각한다. 반찬 다 만들어줬는데, 밥상 하나 못 차린다면 그걸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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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빼서 협박하자 "죽여버릴까"
삼일회계-김앤장 조작 가담 거액 챙겨

[기자회견 전문] '그룹의 여인'들 비자금으로 미술품 사들여

김은성 기자
출처 : <레디앙> 2007년 11월 26일


김용철 변호사 기자회견문을 읽어보면, 아무리 기업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 삼성이 저지른 일련의 행위는 거의 범죄집단 수준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최상층을 구성하며 이른바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집단인 김&장이라는 로펌이 삼섬의 불법을 보호하고 막아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챙기는 대목은 이 사회 상층이라는 곳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와 서민들의 노동과 지출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상당 수준을 비자금으로 만들어, '그룹의 여인'들이 해외에서 최고급 미술품을 사들이는데 사용한 것은 1류, 1등을 외치는 이 그룹이 '가족의 힘'에 의해 전횡적으로 운영되는 전근대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회견문 전문.
<편집자 주>


1. 삼성물산 해외비자금 조성 사례

구조본(현 전략기획실)이 비자금 조성 지시를 하면, 계열사들은 그에 따라 비자금을 각출하였습니다. 삼성물산은 삼성 계열사의 해외 구매의 대행과 그룹 내 모든 공사를 맡아서 하기 때문에 비자금 조성하기가 다른 계열사보다 용이합니다.

실례로 삼성전관(현 SDI) 구매팀장 서준희와 삼성물산의 런던지점, 타이뻬이 지점, 뉴욕 지점과의 사이에 체결된 비자금조성에 관한 합의서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기본계약을 통하여 2,000억원대의 비자금이 조성되었습니다.

매모랜덤(첨부자료1. 삼성물산, SDI 매모랜덤)은 삼성물산 해외법인과 SDI의 장비구매계약인데, 삼성물산의 해외법인과 SDI가 SDI의 장비구매대행계약을 통해서 비자금을 어떻게 조성했는지 그 실례를 보여줍니다.

삼성물산 런던지점의 수수료는 Maker 공급가격 기준 1%이고 Maker 공급가격 기준 19% 부분을 해외비자금으로 조성하였습니다. L/C 개설금액은 Maker 공급가격 x 120%로 하였습니다.

즉 삼성물산이 100원에 사온 물건을 SDI에 120원에 팔아서 1원은 삼성물산이 대행수수료 수입으로 하고, 19원은 비자금으로 조성되는 것입니다. SDI가 삼성물산의 런던지점을 통하여 구매한 장비총액을 계산하면 그중의 120분의 19가 조성된 비자금입니다.

삼성물산 타이뻬이 지점의 경우 Maker 공급가격 기준 2%가 수수료이고, Maker 공급가격 기준 13%가 비자금으로 조성되었습니다. L/C 개설금액은 Maker 공급가격 +15%로 하였습니다. 즉 구매총액의 115분의 13이 비자금으로 조성되는 것입니다.

삼성물산 뉴욕지점의 경우 Maker 공급가격 기준 2.5%가 수수료이고 Maker 공급가격 기준 17.5%가 비자금으로 조성되었습니다. L/C 개설금액은 Maker 공급가격 x 120%로 하였습니다. 즉 구매총액의 120분의 17.5가 비자금으로 조성되는 것입니다. 메모랜덤은 1994년 서류지만 기초계약이고 이후에 이 계약을 유지했습니다.

SDI 구매담당 강부찬이 실수해서 퇴사를 당한 사람인데, 메모랜덤 등 비자금 관련 서류를 복사해서 미국으로 들고 나가서 삼성에 협박을 했습니다. 제가 재무팀에 있을 때인 2000년 경, 김인주 사장이 이 문제를 저에게 의논을 해 와서 메모랜덤 등 관련 서류를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범죄를 저지르면서 근거를 남기냐고 한 마디 했습니다.

강부찬은 미국 샌디에고에 거주하면서 김순택 사장에게 협박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 협박편지도 본 일이 있습니다. SDI에서 차리를 해 보려고 김인주 사장한테 SDI 사장이 와서 보고를 했는데 강부찬이 자신을 삼성전자의 미주재원으로 해주고, 미국 비자와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인주 사장이 답답해 하면서, 협박에 응하다가 보면 끝이 없다. 해결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인주 사장이 저에게 "강부찬, 죽여 버릴까"라고 진지하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SDI가 물품을 공급하면서 비자금을 조성한 내용이 공개되면 아주 곤란하니까 하는 수 없이 끌려갔습니다. 당시 저는 김인주 사장과 이 문제를 몇 차례 의논했습니다. 미국에 사설탐정을 고용해서 강부찬이 몇 시에 숙소를 나가서 뭘 하는지 등등 보고가 들어왔는데 돈이 꽤 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사진=뉴시스
 
2. 비자금을 이용한 고가 미술품 구입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와 신세계 그룹 이명희 회장, 이재용씨의 빙모인 박현주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인인 신연균씨 등이 2002~2003년 비자금을 이용해 수백억원대의 고가 미술품을 구입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미술품 구입 대금으로 해외에 송금된 액수만 600억원대에 이릅니다.

홍라희 여사는 수시로 구조본 재무팀 관재파트에 연락해 미술품 구입대금을 미술품 거래상인 서미갤러리(관장 홍성원) 등에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그 돈은 모두 구조본 재무팀이 관리하는 비자금이었습니다.

이명희 회장이나 박현주씨 등은 각 관련 그룹의 비자금을 이용해 미술품을 구입하였습니다. 서미갤러리는 이 비자금으로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미술품을 구입해 홍라희 여사 등에게 전달했습니다.

홍라희 여사 등이 구입한 미술품(첨부자료 2. 미술품 리스트 PAGE1) 중에는 800만달러(2002년 당시 환율로 200억원대)나 되는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헴 병원'과 716만달러에 이르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밖에 바넷 뉴먼, 도날드 저드, 에드루샤 등 미국 추상파 작가들과 독일작가 리히터의 작품 등이 100만달러 이상의 고가였습니다. 저는 이재용씨로부터 '행복한 눈물'이 이건희 회장 집 벽에 걸려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홍라희 여사 등이 구입한 작품들은 미술사적 평가 등에서 톱클래스에 오른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입니다. 주로 60~70년대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작품이고, 여기에 팝아트, 미디어아트 거장, 최근 유행하는 설치 매체 미술의 중견작가들의 작품입니다. 이들 작품의 특징 등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미술계를 통해 쉽게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첨부자료 2. 미술품 리스트 PAGE2는 대금 지급액 목록의 일부입니다. 미술품 대금 지급금액, 대금 수취인, 수취은행명과 그 위치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대금 지급 시기는 2002. 1.부터 2003. 9. 까지입니다. 대금 수취인은 삼성가의 미술품 구입 독점 창구인 서미갤러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몇몇 인사와 다른 화랑 이름, 조흥은행, 뉴욕 현지은행 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3. 중앙일보 위장계열분리

중앙일보의 삼성그룹 계열분리는 위장분리였습니다. 중앙일보의 위장계열분리는 이건희 회장의 중앙일보 지분을 홍석현 회장 앞으로 명의신탁하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중앙일보가 계열분리 하겠다고 대국민 선언을 여러차례 했지만 홍석현 회장이 대주주 지분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저는 1999년 김인주 사장이 저에게 주식명의신탁계약서를 비밀리에 써달라고해서 써준 일이 있습니다. 그 계약서는 중앙일보 주주명의자는 홍석현 회장으로 하되 홍석현 회장은 의결권이 없으며, 이건의 회장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는 공개할 수도 없는 계약서를 왜 만드는지 물어보았는데, 김인주 사장은 그래도 만들어 놔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계약서는 1부만 만들었습니다.

4. 분식회계와 삼일회계법인

2000. 현재로 삼성중공업 2조원, 삼성항공 1조6,000억원, 삼성물산 2조원, 삼성엔지니어링 1조원, 제일모직 6천억원을 분식회계 처리를 하였습니다.

삼성중공업은 분식 규모가 너무 커서 거제 앞바다에 배가 없는데도 건조 중인 배가 수십척 떠있는 것으로 꾸미는 등 무모하게 처리하였는데, 감리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은 이를 알면서도 룸싸롱 접대를 받는 등 향응응 제공받고 사실과 다르게 적정의견을 주었습니다.

분식회계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주로 삼성전자의 부를 유출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분식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삼성항공이 삼성전자에 기드프레임을 납품하고, 제값보다 올려주는 방식을 사용하여 1년에 400억원 정도 지원했습니다.

   
  ▲ 사진=뉴시스
 
5. 김장 법률사무소의 불법행위

삼성의 불법행위, 특히 불법적인 승계에 관련한 범죄행위에 대하여는 대부분 김&장 법률사무소가 법률 조언자 내지 대리인의 방식으로 관여하였습니다. 김&장 법률사무소는 삼성의 범죄행위를 축소 무마하고 그 대가로 막대한 보수를 지급받았습니다.

김&장 법률사무소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당시 에버랜드 이사회가 아예 열리지도 않았다는 사실 및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등 그룹 차원에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주도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수사 및 형사 재판 과정에서 이와 다른 내용의 허위 사실을 조작하는 것에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또 다시 김&장 법률사무소는 합법적인 변호활동을 가장하여 불법적인 방법으로 삼성의 범죄를 축소 왜곡하는데 앞장 설 소지가 있음을 우려합니다.

김&장 법률사무소는 법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자신의 수익을 챙기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에버랜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발생한 법률비용 수십억원을 김&장 법률사무소가 요구하여 삼성전자의 자문료 형식으로 지급하였습니다.

김&장 법률사무소는 이재용씨의 삼성전자 CB사건에서는 소송 도중에 약정 외의 보너스로 10억원을 요구하여 5억원을 받아갔고 대선자금 수사시에는 약정된 이상으로 거액을 비자금에서 받아갔습니다. 김장 법률사무소는 의뢰받은 사건에 대하여 이재용씨에게 직접 보고하는 등 매우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이종왕 전 법무실장은 김&장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삼성에 입사하기 전에 6개월 동안 태평로빌딩 26층 이학수 부회장의 안가로 사용되는 오피스텔에서 수시로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과 회합하고 대선자금 수사 축소와 무마를 협의하였습니다.

6. 차명자산 보유 및 관리

이건희 회장 일가는 자산 중 상당부분을 타인 명의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차명예금, 차명주식, 차명부동산은 구조본의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최광해, 최주현, 장충기, 이순동, 이우희, 노인식 및 관계사 사장단 대부분의 명의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현명관, 이수빈, 이필곤 등 전 회장단과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의 명의로도 운용되고 있습니다.

차명자산은 각 계열사 재무팀의 간부 명의로도 운용되는데 SDS 자금부장 유태영의 경우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당시 주식 시가 16억원 상당을 자신의 처 명의로 옮기고, 반환을 거절하여 협상을 통해 8억원 상당만 회수한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승렬 전 부사장(전 구조본 기획팀장)의 경우 삼성생명 주식을 차명으로 갖고 있음을 자신이 시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계열사 사장 중 1인은 퇴임 직후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예금 주식 등을 반환하여 애를 먹은 적이 있고, 차명부동산의 경우 갑자기 명의자가 사망하여 상속인 십수명 중 1인이 피상속인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빼앗긴 일도 있습니다.

7. 삼성자동차 법정관리기록 불법폐기

삼성자동차가 파산할 때 종업원들이 회사를 점거하고 서류를 태웠는데 예보 조사단이 재속에서 분식회계서류를 발견했습니다. 그 내용은 삼성상용차 손실이 너무 커서 서울보증의 보증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대형 적자가 난 것을 약간의 흑자가 난 것으로 분식한 것이었습니다.

삼성그룹은 그 서류 때문에 예보에서 조사받을 때 굉장히 고생하였습니다. 당시 삼성상용차의 감사는 이학수 부회장이었는데 분식회계문제가 불거지면 이학수 부회장이 형사책임이 심각하게 대두될 수 있었습니다.

삼성자동차가 파산할 때 예보조사단이 분식회계서류를 발견하여 고생하고난 뒤 최광해가 법정관리 중인 삼성자동차에도 문제되는 분식회계서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특별팀을 구성하겨 파산법원 사무관을 매수하여 심야에 문제되는 서류를 빼내 해운대에서 소각하였습니다. 최광해는 저에게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그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8. 시민단체 등 동향 및 주요인사 인맥 파악

삼성은 정치인, 언론인, 공무원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에 대해서도 항상 동향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유사시 매수, 회유하기 위하여 평소에 중요 인사에 대하여 접촉할 수 있는 인맥관리명단을 작성해 두고 있습니다.(첨부자료 3. 인맥관리명단)

실례로 참여연대 내의 모든 변호사에 대해 인맥지도가 있습니다. 각 변호사별로 핵심지인, 출신학교 및 연수원 동기, 친구 등이 나와있습니다.

9. 고소 및 손해배상소송 제기 예정

저는 허위사실로 저의 명예를 훼손한 조선일보, 연합뉴스, 데일리안 등 일부 언론사와 삼성 전략기획실 임직원 및 전 법무실장 이종왕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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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짐작되고, 다른 기업들도 많이 해오던 수법들이지만, 비자금으로 미술품 구입했다는 건 좀 어이없다. 그럼 이 '썩을' 새끼들은 연말에 배당소득이나 이자소득 수백억씩 받는 건 어디다 쓰나? 혹시 전부 금덩이나 다이아몬드 구입해서 금고속에 묻어두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치사하기 짝이 없는 '생양아치들'이네.

(덧붙임) 홍라희가 구입했다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2,002년 환율로 100억원 가까이 주고 구입한 작품)을 두고 이것들이 이명박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대해 처음에는 "행복한 눈물"은 홍라희 개인 돈으로 구입했다고 발표했다가, 어디서 한소리 들었는지 다시 구입한 적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틀새 25점 1800만달러 쓰기도

어떤 작품 샀나

노형석 기자
출처 : <한겨레> 2007년 11월 26일


» 위에 보이는 표는 크리스티 등의 국제경매에서 서미갤러리를 통해 사들였다고 기록된 삼성가 작품 구입 목록의 첫장이다. 표 옆의 도판 넷은 목록 가운데 높은 값에 낙찰된 작품들(표에서 색칠된 항목)이다.
 
 

‘미술계 최고 권력’으로 통하는 삼성가 사람들의 미술컬렉션이 처음 ‘몸통’을 드러냈다. 김 변호사의 추가 비자금 내역 폭로로 장막에 싸였던 삼성가 컬렉션의 내밀한 구입 과정 등이 일부 밝혀진 것이다.

구입목록 첫장에는 30점의 작품 제목과 20여명의 작가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한겨레>의 분석 결과, 4점을 제외한 26점은 모두 2002~2003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작품들은 대부분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에드 루샤, 피카소, 데이비드 호크니, 스기모토 등 세계적 거장 20여명의 구작 혹은 근작들이다. 현재 서구 경매시장에서 최고 가격대에 거래되며, 60년대 이후 현대미술 역사에서도 중요 기준작으로 언급되는 1급 컬렉션들이다.

 
» 최고가인 800만달러에 팔린 미니멀 작가 스텔라의 <베들레헴 병원>. 사진의 도판은 같은 제목에, 구도가 거의 같은 다른 연작 그림이다.
 
작품들은 2002~2003년 3천만달러 이상(당시 환율로 약 300억원)의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 특히 그 대부분인 25점을 2002년 11월13~14일 무더기 구입했다. 이틀 사이에 1800만달러가 넘는 작품들을 사들인 것이다. 구입은 90년대부터 삼성가의 외국 미술품 구입을 도맡아온 서미갤러리 홍송원 대표가 전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개별 낙찰가는 최소 1만달러 선에서 최대 700만~800만달러에 이른다. 대부분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명품들이다. 유파는 60~70년대 미국을 풍미했던 기하학적 형태와 단색조 추상인 미니멀리즘, 대중문화와 순수미술의 결합을 꾀한 팝아트가 주종이며 포스트모던 계열 작품도 있다.

» 두번째 높은 값인 715만9500달러에 낙찰된 팝아트 작가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영국의 세계적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60년대 대표작 <닉 와일더의 초상>(낙찰가 286만9500달러), 에드 루샤의 대표 연작 <디자이어>(낙찰가 176만9500달러).
 
 

최고가인 <베틀레헴의 병원>은 60~80년대를 풍미한 미국 미니멀리즘 사조의 거장인 프랭크 스텔라가 화면을 검정색 색면과 기하학적 선으로만 메워 그린 대표적 연작이다. 715만달러에 낙찰된 팝아트 작가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기쁨에 겨워 웃으며 눈물 흘리는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을 그렸다. 낙찰 당시 작가의 이전 경매 기록을 깬 작품이다. 대중 만화를 확대시킨 특유의 그림 스타일이 잘 드러나 있다.

‘숭고한 추상 그림’으로 유명한 미국 거장 바넷 뉴먼의 <화이트 파이어>, 도널드 저드의 유명한 상자모양 미니멀 금속 구조물, 에드루샤의 흐물거리는 문자 이미지, 독일 거장 리히터의 <추상> 연작 등도 100만달러 이상의 고액으로 낙찰된 것으로 나온다. 도시인의 내면을 나른한 구도의 일상 그림으로 묘사한 영국 거장 호크니의 <닉 와일더의 초상>(1966년작)은 작가의 연대기는 물론, 현대 회화사상 매우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기괴한 퍼포먼스로 유명한 영상, 설치작가 매튜바니의 ‘크로매스터 사이클’ 연작도 보인다.

K옥션 김순응 대표는 “호크니와 리히텐슈타인 등의 현대미술사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작품들이 국내에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다른 미술시장 관계자도 “2002~2003년은 세계 미술시장이 침체기를 벗어나기 시작한 때로, 당시 몇몇 재벌이 국제 경매에서 컬렉션을 집중 매입한 소문을 들었다”며 “목록의 주요 작품들은 지금 시장에서 그때 시세보다 최소 4~5배 이상을 호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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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at jazz movie

래그타임에서 퓨전재즈까지 - 영화와 함께하는 재즈 산책

김동현 기자
출처 : <대학신문> 2007년 11월 24일


   
  그래픽: 차주영 기자  


낙엽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재즈의 계절,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라디오와 카페에서는 귀에 익숙한 재즈 음악들이 흘러나오지만, 막상 재즈 음악을 찾아서 듣다 보면 그 복잡 다양함에 주눅이 들기 십상이다.

재즈가 여전히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라면 재즈를 다룬 영화 쪽으로 눈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재즈와 영화는 그 시작부터 줄곧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1927)를 비롯해 재즈음악·아티스트를 다룬 영화들이 줄지어 제작돼 왔으며, 영화에 삽입된 재즈 음악들은 정규 음반 못지않은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따라서 재즈를 소재로 다룬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재즈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색다른 길일 수 있다.

흘러가는 가을이 아쉬운 지금, 재즈를 좀 더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 재즈 정서가 물씬 묻어나는 영화들을 소개한다.

◆ 래그타임에서 시작된 재즈의 물결

스윙, 블루스, 비밥, 쿨, 핫, 퓨전… … .처음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라면 그 장르의 다양함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특히 극도의 즉흥성과 불협화음을 표방한 비밥재즈나 프리재즈 등은 재즈 초보자에게 ‘난해하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그러나 초창기 재즈는 장르가 복잡하지 않고 연주가 난해하지도 않았다.

재즈 음악이 태동한 곳은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던 19세기 말 미국 남부 지역이었다. 교회나 학교에서 피아노를 배운 흑인 중류층들은 흑인 특유의 리듬으로 클래식 성향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박자가 통통 튀고 리듬의 강약이 자주 변하는 이 피아노곡들을 ‘래그타임’이라고 불렀다. 영화 「스팅」(조지 로이 힐, 1973)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엔터테이너(The Enter-tainer)’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래그타임 작곡가 스콧 조플린의 대표곡이다.

클래식과 흑인 리듬을 접목시킨 래그타임 연주가 대중의 인기를 모으면서 흑인 피아니스트의 인기도 높아져갔다. 그러나 다수의 백인들은 ‘흑인이 백인의 악기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영화 「래그타임」(밀로스 포만, 1981)은 당시 흑인 피아니스트와 백인 사이의 갈등을 잘 묘사해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는 백인에게 탄압받는 흑인 음악가들의 암울한 현실과 이에 대비되는 경쾌한 래그타임 선율이 교차돼 흐른다.

래그타임이 재즈 형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곳은 미국 남부의 해군도시 뉴올리언스였다. 시골에서 상경한 흑인 음악가들은 뉴올리언스 해군 군악대의 연주에 영감을 얻어 피아노 반주에 시끌벅적한 코넷(트럼펫의 전신) 연주를 덧붙였다. 이른바 ‘뉴올리언스재즈’의 탄생이다. 당시 뉴올리언스 주점가에서는 많은 흑인 음악가들이 ‘재즈 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언제 어떻게 재즈(Jazz)라는 명칭이 생겨났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재즈의 물결은 급속히 북서부 대도시로 확산됐다. 뉴욕, 시카고 등 거대 도시의 밤무대 클럽들은 재즈 선율에 취해 춤을 즐기는 백인들로 북적였고, 춤에 취한 백인 손님들은 흑인 음악가들에게 좀 더 빠른 리듬을, 그리고 클럽 전체를 울리는 웅장한 사운드를 연주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스윙재즈’는 미국 전체를 재즈 열풍으로 몰아넣었다.

영화 「스윙 걸즈」(야구치 시노부, 2006)를 봤다면 20여명에 가까운 여고생 밴드가 무대를 가득 채운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1930년대 미국을 휩쓴 스윙재즈 역시 20명이 넘는 거대 ‘빅밴드’에 의해 연주됐다.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등 유명 재즈 음악가들은 각자의 빅밴드를 결성해 클럽 무대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코튼 클럽」(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1984)은 1930년대 ‘스윙재즈 시대’의 분위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의 무대가 된 코튼 클럽은 실제로 뉴욕 상류층 명사들의 단골 클럽이었으며, 유명 빅밴드들이 경쾌하고 웅장한 스윙재즈를 선보이던 곳이었다. 또 영화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주자는 모두 흑인이었지만 정작 흑인 손님의 출입은 금지됐다. 인종차별의 모순이 잘 나타나는 공간이었다.

스윙재즈가 흐르던 1930년대 미국 대도시 클럽에서는 수많은 스타들이 탄생했다. 특히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등 빅밴드 전속 여성 가수들은 국민적인 유명세를 얻으며 재즈의 인기몰이에 한몫했다. 영화 「레이디 싱스 더 블루스」(시드니 퓨리, 1972)는 빌리 홀리데이의 영화 같은 인생을 담은 작품으로, 유명 재즈가수 다이애나 로스가 직접 주연을 맡아 세대를 뛰어넘는 재즈의 매력을 선보였다.

경쾌하고 활기찬 스윙재즈는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모았다. 특히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정권이 사회 전체를 억누르기 시작한 1930년대 유럽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스윙밴드를 조직해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항의 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스윙 키즈」(토마스 카터, 1993)는 나치 정권 아래서 몰래 스윙재즈를 즐겼던 독일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재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오랜 기간 인기를 모았던 스윙재즈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쇠퇴기를 맞는다. 대다수의 재즈 연주가들이 징집돼 유럽과 아시아로 떠났으며, 무수히 많았던 클럽 역시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몇몇 재즈 음악가들은 매너리즘에 빠진 스윙재즈 대신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스윙재즈에 비해 훨씬 변화무쌍하고 전위적인 새로운 재즈, ‘비밥재즈’가 스윙재즈를 대체하며 모던재즈 시대를 연 것이다.

◆ 비밥과 함께 태동한 모던재즈 시대

담배연기 자욱한 재즈바, 화려한 조명 아래 색소폰이나 더블베이스, 트럼펫 등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흑인 음악가들. 오늘날 ‘재즈’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들은 거의 대부분 1940~1950년대를 풍미한 ‘모던재즈’ 시대에 형성됐다고도 할 수 있다.

재즈의 본령 혹은 주류로 불리는 모던재즈는 비밥재즈, 쿨재즈, 하드밥재즈로 구분된다.

모던재즈 시대를 연 비밥재즈는 재즈 본연의 특징이 옅어진 스윙재즈에 반발해 창시됐다. ‘비밥의 선구자’로 꼽히는 찰리 파커의 일생을 그린 영화 「버드」(클린트 이스트우드, 1988)는 비밥재즈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색소폰 연주자 파커는 빠른 손놀림으로 음의 높낮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즉흥연주를 즐겨 했다. 영화 속 파커의 연인 챈은 “당신의 음악은 익숙해지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지금은 항상 좋아해요”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비밥재즈가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한 사실을 암시한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파커가 더러운 여인숙을 전전하며 동료들과 순회공연을 하는 장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결혼식 연주 아르바이트 등으로 연명하는 장면은 비밥재즈 음악가들의 어려웠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비밥재즈가 음의 높낮이를 쾌속으로 넘나들며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핫재즈였다면, 이후 등장한 쿨재즈는 느긋하고 편안한 선율로 비밥의 열기를 식혔다. 영화 「리플리」(안소니 밍겔라, 1999)에서는 쿨재즈의 선구자 마일즈 데이비스, 쳇 베이커 등 유명 재즈 음악가들의 쿨재즈를 들을 수 있다. 리플리가 감미로운 음색으로 부르는 쳇 베이커의 명곡 ‘마이 퍼니 발렌타인(My funny valentine)’은 쿨재즈의 서정성과 부드러움이 물씬 풍긴다. 재벌 2세 행세를 하는 리플리에게 쿨재즈는 자연스럽게 듣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외우고 공부해야 하는 신분상승의 도구다. 이는 도회적이고 지적인 쿨재즈가 백인 상류층의 감수성과 맞아떨어져 그들 문화의 일부를 이뤘던 당시 상황을 보여준다. 한편, 백인 취향의 쿨재즈가 탐탁지 않았던 흑인 재즈 음악가들은 거칠고 폭발적인 음향의 하드밥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비틀즈 등의 록밴드가 인기를 끌었던 1960년대에는 재즈 음악가들이 상대적으로 설자리를 잃었다. 이 때 록음악의 영향을 받은 재즈 음악가들은 1970년대에 록과 재즈를 결합해 퓨전재즈를 만들어냈다. 퓨전재즈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영화로는 샐러리맨들의 치열한 경쟁을 그린 「글렌게리 글렌 로스」(제임스 폴리, 1992)가 있다. 이 영화 전반에는 퓨전재즈의 거장 웨인 쇼터의 ‘인 더 카(In the Car)’, ‘유 멧 마이 와이프(You Met My Wife)’ 등 경쾌하고 가벼운 퓨전재즈가 흐른다.

1980년대에는 록과 어우러진 퓨전재즈가 재즈 본연을 잃어버렸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1940~1950년대의 모던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고전주의재즈가 등장했다. 영화 「모베터 블루스」(스파이크 리, 1990)에서 주인공 블릭과 여러 재즈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즉흥적이고 빠른 음악은 영화 「버드」에서 느낄 수 있었던 비밥재즈의 격정을 다시 불러온다.

현대에는 댄스파티를 위해 재즈·힙합·펑크을 적절히 섞은 ‘애시드재즈’, R&B(리듬앤블루스)에 소울·팝·월드뮤직·클래식을 융합한 '크로스오버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재즈는 숱한 변화를 거치며 그 모습을 바꿔왔다.가을의 끝무렵에서,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재즈 정신을 다양한 영화들을 통해 느껴보는 게 어떨까?



영화를 보면, 재즈 음악가가 보인다

노승연 기자
출처 : <대학신문> 2007년 11월 24일


   
  왼쪽부터 찰리 파커, 버드 파웰, 레이 찰스  
 
재즈 음악가 중에는 탁월한 음악적 재능 외에도 파란만장한 일대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인물들이 많다. 재즈 음악가의 삶이 진솔하게 녹아있는 영화들을 만나보자.

◆「버드」(클린트 이스트우드, 1988)=‘버드(Bird)’는 비밥재즈로 한 시대를 풍미한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의 별명이다. 스윙재즈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던 1940년대에 등장한 찰리 파커는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비밥 혁명을 이뤘다. 그는 ‘버드’라는 별명과 같이 새처럼 높고 낮은 음을 즉흥적으로 넘나드는 연주를 즐겼다.

찰리 파커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즉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이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밤중에 디지 길레스피의 집에 찾아간 주인공 찰리 파커는 느닷없이 연주를 시작하며 “이봐! 이걸 받아 적어, 어서!”라고 말한다. 막 자려던 참이었던 디지는 “내일 하면 안 돼?”라고 묻지만 찰리는 대답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내일은 다 까먹는단 말야.”

◆「라운드 미드나잇」(베르트랑 타베르니에, 1986)=1950년대는 비밥재즈에 반기를 들고 쿨재즈, 하드밥재즈 등이 발전했던 시기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 데일 터너는 끝까지 비밥재즈를 고수하며 파리로 건너가 음악활동을 펼친다. 데일 터너의 실제 모델은 바로 ‘피아노의 찰리 파커’라고 불린 버드 파웰. 그는 피아노의 왼손 연주를 줄이고 오른손을 짧고 강렬하게 혹은 웅장하고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모던 재즈피아노 연주법의 새 장을 열었다.

「라운드 미드나잇」에는 버드 파웰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음악가로서의 정체성 갈등이 담겨있다. 그뿐만 아니라 허비 행콕이나 웨인 쇼터, 토니 윌리엄스 등 1950년대 당시 활동했던 여러 재즈 음악가들의 대역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레이」(테일러 핵포드, 2004)=하드밥이 발전하던 1960년대, 록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재즈는 쇠퇴기를 맞았으나 R&B는 계속해서 인기를 얻었다. 이 영화는 당시 활약했던 R&B의 거장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레이 찰스는 가스펠과 블루스를 결합해 새롭고 흥분된 리듬의 R&B를 만들어냈다. 그의 독특한 R&B는 음악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가스펠을 성스럽게 여겼던 남부 흑인들에게는 ‘불경스런 음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도 독실한 한 흑인이 레이의 음악을 듣고 “신의 음악을 모독하지 마!”라고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았던 레이 찰스는 탁월한 청각과 음악적 감수성으로 신체적 결함을 극복해냈다. 그의 인간승리 드라마를 영화에서 어떻게 실감나게 묘사했는지를 눈여겨 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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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들을 위한 애도


계약서 없다더니 회사 만든 것까지는 사실이라 그러고,
만난 시점도 2000년이라고 우기더니 1999년의 입국기록 나오자 꼬리내리고,
만난 지 한달만에 회사만들 수 있냐니까 프로들이니까 가능하지 않냐고 하고,
(아래 < YTN 돌발영상 >의 내용이다.)
한글계약서의 도장은 김경준이 위조했다고 어제(11/24) 당대변인이 발표해놓구선
오늘(11/25) 그 도장이 이명박 대표이사의 사용인감이 확실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보도가 나오자 앞으로는 BBK 관련해서는 일체 대응을 하지 않겠단다.

오늘, <한겨레신문>과 <리서치플러스>의 여론조사를 보니 아직 이명박의 지지율은 37%(이회창 18%)로 나온다. 결국 한나라당 지지율이 55%라는 이야기다.

“BBK, 땅투기, 위장전입, 선거법 위반, 자녀 위장취업, 맛사지 등 수없는 의혹에도 국민의 50%가 넘게 지지하고 있어요. 국민이 원숭이 지능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지지율이잖아요.”(<미디어다음>, ‘이방인’, 2007-11-11)

대한민국은 앞으로 '원숭이'들이 지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혹성탈출'이 공상과학소설만은 아닐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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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터넷한겨레>(원출처는 YTN의 "돌발영상") 2007년 11월 24일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politics:001001&uid=221174)



정치언론이 외면해도 네티즌군단이 찾아낸다

BBK 관련 속속 드러나는 새로운 사실들이 연일 지면을 가득 채우며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대선 후보등록일 겨우 3일 앞둔 정치권은 한산하다 못해 스산한 느낌까지 들고 어느 네티즌이 말했듯이 '마땅히 찍을 후보도 없는 대선전보다 이게 더 재미있다'는 것이 현재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대선도 바쁜데 왜 BBK냐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BBK는 맥주 한잔에 BBQ 통닭 씹듯이 안줏거리로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그 논란 깊숙이 개입한 당사자가 2007대선의 유력후보이고 새롭게 드러나는 진실에도 조작으로 몰아붙이며 부인하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자칫 국민들이 오판하면 BBK가 진짜 BBK(Big Bang Korea)를 만들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구정치언론들이 아무리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호도해도 이미 그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 활약을 하고 있는 '네티즌 군단'은 불철주야 정보의 바다에서 끊임없는 새로운 정보들을 찾아내며 개미군단의 손과 마우스를 통해 진실의 단초를 광속으로 전파시키고 있습니다.

서프라이즈는 네티즌 여러분께서 발굴하신 새로운 자료들을 비중 있게 다루며, 조그만 단락에 지나지 않은 정보라도 소중하게 편집하여 중요한 정보로서 활용될 수 있도록 잘 편집하고 배치하겠습니다. 네티즌 여러분께서는 그러한 정보가 많이 노출될 수 있도록 점수로 추천으로 그리고 퍼나르기로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중앙일보 정경민 기자 (jkmoo@joongang.co.kr)

- '現代 신화' 이명박씨, 증권사 대표로 변신 ( 2000-10-14 )




체크포인트 :
(1) 미국에서 배운 선진금융기법이란 것의 실체
(2) e-Bank증권중개의 모기업이 LKe-Bank이며 이미 설립되어 있다는 것
(3) LKe-Bank 아래 종합자산관리 전문회사인 BBK가 자회사로 영업중이라는 것.
(4) 이들 회사에서 이명박 전 의원이 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2. 동아일보 김승련 기자, 홍찬선 기자 (hcs@donga.com)
- 경제계로 복귀한 李明博씨 ( 2000-10-15 )



체크포인트 :
(1) 사이버금융의 기본틀을 확 바꾸겠다며 증권중개회사 e-Bank를 설립
(2) 한국에 없는 새로운 시스템과 기법을 제시
(3) 이 대표의 첫 목표는 '사업 첫해부터 이익내기'
-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꼽는 일 ( 무리수를 동반 )
(4) 감독당국에 '첫해 흑자'를 근거로 사업계획서 제출
- 감독당국에서는 '현실적인 계획'을 내라고 함
- 감독당국에서 볼 때 무리한 사업계획은 무리한 추진방법을 동원할 것
(5) 이명박 "2001년 말이면 누가 맞는지 드러납니다."
- 결국, 폐업으로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끝났으므로 거짓말을 한 셈
(6) 새로운 패러다임사업 : 아비트리지(차익)거래
- 결국, 무수한 피해자 양산
(7) 미국계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김경준 BBK투자자문 사장(34) 영입
- '영입'이라는 말은 월급쟁이, 즉 경영 CEO를 말하며, 바지사장을 뜻함

3. 중앙일보 정선구 기자 (sungu@joongang.co.kr)
- 외국인 큰손 확보 - 첫해부터 수익 내겠다 ( 2000-10-16 )




체크포인트 :
(1) 회사설립 첫해부터 수익을 내겠다.
- 회사설립 첫해부터 수익을 내려면 얼마나 CEO를 닥달을 했을까.
- 수익 내는 것이 목적인 만큼 수단이나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임.
(2) 국내 증권사는 사이버트레이딩에 몰두하는 경향, 나는 첨단 기법의 증권업무를 보여줄 작정
- 결국, 폐업. 수많은 피해자 양산
(3) 이미 새로운 금융상품 소프트웨어 개발하는 LKe-Bank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한 바 있다. e-Bank증권중개는 이 두 회사를 이용해 탄생하게 되는 것.
- 결국 LKe-Bank, BBK, e-Bank증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
- 세 회사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전체가 돌아가는 구조라는 것
- 마치 핸들과,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가 있어야 차가 가는 것과 같은 원리.
(4) BBK를 통해 이미 외국인 큰 손들을 확보해 둔 상태
- 투자자를 다수 확보해 두었으니, 수익만 내면 된다는 뜻.
- 수익 내는 방법은 한 번도 국내에서 한 적이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기법
- 결국,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겨주고 폐업
(5) 미국국적을 가진 코넬대. 시카고대. 와튼스쿨 출신 한국계 금융공학 전문가 18명을 확보해 놓은 상태
- 18명의 미국국적 한국인을 고용한 사람은 이명박.
- 김경준은 그 18명 중에 한 사람.
- 사업의 주체이며 주인은 이명박, 김경준은 CEO

4. 언론인(言論人) - 정경민, 김승련, 홍찬선, 정선구 기자께

지금이야말로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과거의 취재수첩을 다시 열어볼 때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취재하기 위해 신발끈을 다시 묶어야 할 때입니다. 바닥에 추락한 귀사의 명예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년 11월 24일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ht_politics:001001&uid=22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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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데도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는건 가장 큰 비극이에요. -_-

내오랜꿈 2007-11-26 16:52   좋아요 0 | URL
너도 나도 '돈'이죠.

속마음을 드러내놓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머 까짓 거 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 이거죠...

서울지역 7개 대학(고려,서울,성균관,연세,이화,중앙,한양)에서 설문조사한 결과 이명박이 47.8%의 지지를, 한나라당이 41.8%의 지지를 얻었다고 합니다.(<대학신문> 11월 12일)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이러니 뭘 더....

마늘빵 2007-11-26 20:36   좋아요 0 | URL
사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기에' 그런건지도 몰라요. -_- 요새 대학생들은 토익과 주식을 가장 사랑하잖아요. 언제부터 20대가 이렇게 됐지. 그래도 나 때까진 안그랬던거 같은데... 하긴 졸업하기 전부터 이런 분위기는 느꼈어요. 대략 한 01년도부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