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글렌 굴드가 연주를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하게 하는 CBC 스튜디오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 660호 2007년 5월 17일


글렌 굴드 하면 떠오르는 음반이 있다. 1955년, 그를 스타덤에 올렸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그의 인생은 어찌 보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서 이 작품으로 끝났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64년, 콘서트 활동을 중지하고 오직 레코딩에만 몰두하던 그는 1981년 다시 한 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1981년의 레코딩은 그야말로 거장의 비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23살의 천재가 뿜어내는 현란한 테크닉과 비범한 곡 해석 따위, 나이 먹으면 다 부질없다는 듯 말년의 글렌 굴드가 이렇다 할 기교도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다시 한 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다. 아니, 끝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982년, 글렌 굴드는 죽었으니까.

연주를 데이터로 만든 뒤 피아노가 재현

△ 1964년 콘서트 활동을 중지하고 죽을 때까지 레코딩에만 몰두했던 글렌 굴드.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CBC 스튜디오는 그의 연주를 데이터로 만들어 재생시킨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내놓았다.(사진/ 한겨레)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데, 죽은 자가 연주를 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또 한 번 등장한 것이다. 옛날 음원이 발달된 음향 기술로 새롭게 포장되는 경우는 많았다. 최근 화제가 됐던 사례를 꼽아보자면 비틀스의 〈Love〉일 것이다. 모든 레코딩 소스를 전부 디지털로 되살려 최상의 음질로 재조합한 이 음반은 마치 엊그제 비틀스가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준다. 비틀스뿐 아니라 구시대의 음원들이 속속 디지털 리마스터링의 힘으로 새 단장을 하고 다시 발매되고 있다. 놀라운 음질로. 테크놀로지의 힘은 그만큼 놀랍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모두 ‘음원’을 토대로 이뤄진다. 즉, 아티스트가 남긴 결과물에 음향 기술로 계속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본이 존재한다. 아무리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해도 몸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몸통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유는 이렇다. 이 음반은 글렌 굴드가 직접 연주한 게 아니다. 프로그램에 의해 조작되는 피아노의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원리는 간단하다. 프로그램이 글렌 굴드의 1955년 레코딩을 분석한다. 그래서 당시의 레코딩 기술로 녹음된 ‘음원’을 배제하고 스튜디오에서 울리는 그의 연주만을 남긴다. 이를 데이터로 만들면 이 데이터에 의해 작동되는 피아노가 오리지널 연주를 ‘재현’한다. 어떤 건반을 얼마나 길게 눌렀는지는 물론이고,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는 물리적 과정까지 모두 고스란히 이 피아노는 연주한다. 따라서 1955년 뉴욕 CBS 스튜디오에서 울리던 글렌 굴드의 피아노가 2006년 토론토의 CBC 스튜디오에서 ‘원음’ 그대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연주를 녹음한 게 이 음반이다.

이 음반은 듣는 사람에게 혼돈을 준다. 비록 원음을 바탕으로 재탄생한 음반이라지만 정작 CD 안에 담겨 있는 건 가공된 원음이 아니다. 기계에 의해 새롭게 연주된 음악이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이 음악에서 일종의 설계도 구실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음반을 글렌 굴드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앞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건반과 페달이 혼자 위아래로 움직이며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1955년 글렌 굴드가 연주했던 바로 그 소리다. 따라서 이 음악은 글렌 굴드의 연주이자, 연주가 아닌 셈이다.

혼란은 가중된다. 통상,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가 발달한 지금도 결국 붓이 프로그램으로 바뀌었을 뿐, 사람의 손이 만든다. 우연성의 예술이든 해프닝이든 뭐든, 어쨌든 인간의 땀이나 하다 못해 잔꾀가 들어간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골드베르크 연주곡>에는 사람이 없다. 데이터와 프로그램, 그리고 기계장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로 그 소리를 생생한 음질로 듣고 있다. 1955년 레코딩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성한 울림과 공간감, 세밀한 음감의 변화까지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을 이 음반은 재현한다. 그렇다면 이 음반은 예술이기도 하고, 예술이 아니기도 하다.

글렌 굴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말장난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테크놀로지가 보잘것없는 몸뚱이에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몸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이 음반은 시사한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르크 그 자체다. 그것도 원작의 위조와 모방이 아닌, 원작이 소멸된 자리에 독자적인 현실로 존재하는 시뮬라르크다. 만약, 글렌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작품’이란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그는 ‘20세기 예술가에게 필요한 건 익명성’이라는 철학으로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주자로서 절정기이던 32살에 콘서트 생활도 접고 스튜디오 작업으로만 연주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편집’이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여러 번의 반복 녹음에서 좋은 부분만 짜깁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는 예술가를 증발시키고 음악 그 자체만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골드베르크 연주곡>은 글렌 굴드 정신의 절대적 구현이라 부를 수 있다. 클래식 시장의 침체기에서 돌파구로 만든 상업적 기획으로 끝날 수도 있던 한 음반이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원작자의 철학과 맞물리면 해석의 여지는 더 다양해진다. 아이러니하다. 지금,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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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지하실에서 듣는 빗소리
90년대 포크를 대표하는 엘리엇 스미스, 〈New Moon〉의 미발표곡으로 다시 만나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한겨레 21> 제 662호 2007년 5월 31일


1990년대 대중음악을 열었던 화두가 시대정신이었다면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던 말은 ‘취향’이었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음악이 그런지로 촉발된 얼터너티브 혁명이었고, 포크는 취향을 리스너들의 입에서 꺼내게 했다. 전통적인 포크가 아닌, 90년대의 감성을 담아낸 새로운 포크 말이다.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가 선봉에 있었다. 록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순진하게 믿었던 90년대 초반의 소년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에 좌절했다. 청년이 되어 방구석에 틀어박힌 그들의 귓가를 적셔주던 음악, 벨 앤드 세바스천과 엘리엇 스미스는 필청의 리스트와 마찬가지였다.

전사 커트 코베인, 패잔병 엘리엇 스미스

△ 엘리엇 스미스는 언제나 상처투성이었다. 마지막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달랐다. 벨 앤드 세바스천이 마음 한구석에 사랑과 낭만을 간직한 이들의 음악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사랑과 낭만에 마지막 좌절을 경험한 이들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1969년 스티븐 폴 스미스란 이름으로 태어난 그는 2003년 10월 엘리엇 스미스란 이름으로 자신의 심장에 스테이크 나이프를 꽂았다. 그 순간까지 35년. 그의 인생은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행복해지는 걸 누구보다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때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항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가장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었던 노랫말은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상처투성이였고 상처를 두려워했지만 결국 제 발로 상처 곁으로 걸어가는 게 음악 속에서 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지친 영혼일지라도 안식처로 삼을 법한 가족마저도 그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증’ 쪽이 훨씬 많았지만.

엘리엇 스미스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고 마음속 세상에는 언제나 빗줄기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네가 원할 때 네가 원하는 걸 하라. 비록 그게 아무 의미도 없을지라도. 거대한 허무일지라도’라고 끝을 맺는 〈Ballad Of Big Nothing〉. 음악평론가 성문영이 ‘거대한 허무의 발라드’로 해석한 이 노래의 제목은 어쩌면 그의 모든 노래에 담긴 주제어일 것이다. 사방이 온통 막다른 골목인 궁지의 공간, 엘리엇 스미스는 그곳의 지하실에서 노래했고 이야기했다. 도피할 곳 없어 세상의 틈새에서 방랑하는 이들에게 그의 노래만큼 위로의 담요 구실을 해주는 도구는 없었다. 소통에 힘겨워하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위안을 얻는, 세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억지로 웃음짓는 개인들에게 엘리엇 스미스라는 이름은 가장 강력한 프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994년 커트 코베인의 죽음이 군단을 진두지휘하던 장수의 전사였다면, 2003년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은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나와 몸부림치던 낙오병의 고립된 사망과 같았다. 그와 심정적으로 연결된 개인들만이 조용히 추모할 뿐인 쓸쓸한 죽음.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일반화된 인터넷 때문에 더 이상 ‘모여서 음악을 듣는 행위’가 사라진 이곳에서 그의 죽음은 오프라인 음악 공동체의 부고장이기도 했다.

적나라함 때문에 싣기가 곤란했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허무의 방랑자가 숨겨뒀던 또 하나의 일기장이 공개됐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엘리엇 스미스가 만들었던 노래들 중 미발표 곡을 모은 음반 〈New Moon〉이다. 미발표곡 모음집은 대부분 기대를 배신한다.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음반에 싣기에는 어딘지 함량 미달인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음반 발매 일정이 잡히면 그때부터 곡을 만들고 레코딩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엇 스미스는 일기 쓰듯, 평소에 곡을 만들고 녹음하곤 했다. 그렇게 쌓인 곡들 중에서 추려서 음반을 내곤 했다. 그에게 창작이란 곧 일상이었다. 그의 창작력이 급속도로 치닫던 시기는 1997년에 발표된 〈Either/Or〉 무렵이다. 그리고 이 음반은 그가 남긴 여섯 장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New Moon〉은 전작 〈Elliott Smith〉부터 〈Either/Or〉 사이의 시간 동안 만들었던 노래들을 담고 있다. 최고조로 치닫던 창작의 잉여물들이다. 그러나 잉여라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말이 좋아 음반에서 누락된 곡들이지, 여기 담긴 스물네 곡의 노래는 마땅히 발표됐어야 할 음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음반은 단순한 미발표곡 모음집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정규 음반으로 추앙받아도 결코 손색이 없다. 〈New Moon〉은 어느 음반보다 감성적이고 적나라하다. 그 적나라함 때문에 오히려 정규 음반에는 싣기가 곤란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될 정도다. 서서히 차오르는 센티멘털이 한순간에 폭발한 뒤 모래처럼 바스러진다. 자물쇠로 묶어둔 비밀의 일기장에조차 쓸 수 없었던, 온갖 감정의 본원과 심연을 엘리엇 스미스는 벌거벗긴다. 그리고 노래한다. 시라고 해도 괜찮을, 아니 시 그 자체인 언어로. 음표와 단어와 목소리는 서로를 힘겹게 부축한 채,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이곳으로 뚜벅뚜벅 다가온다. 애도의 감정이 들기 전에, 경이가 밀려온다. 놀라운 재능과 불편할 정도의 진솔함에 대한 경이가.

돌이켜보면 그런 경이가 취향의 시대를 열었다. 네트워크의 힘으로 낙오자들은 그들만의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커트 코베인이 ‘세대’로 90년대를 열었다면 엘리엇 스미스는 ‘취향’으로 그 시대를 마무리했다. 그들 모두 자살했다. 21세기는 20세기를 그렇게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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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은 좌파가 해야 할 말"
[정치와 사람들⑤ 이진경] "국가는 삼성을 통제할 능력 상실"

정제혁/객원기자
출처 : <프레시안> 2007년 11월 28일


  지난 몇 년간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사회학)이라는 이름은 언론사 학술-출판 기사의 소재였다. 1987년, 불과 스물 네 살의 나이에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을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운동권의 이 빼어난 이론가는 동구 사회주의 몰락 이후 새로운 사유의 모험을 시작했고, 그 주요 마디마다 묵직한 저술을 하나씩 내놓았다.
  
  지난해 '미래의 맑스주의'를 통해 새로운 계급과 공동체의 윤곽을 그려내는 데까지 나아간 그의 작업은 추상 수준이 높다. 또 공부와 저술에 매진하는 동안 그는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에는 다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턴가 '발언'을 시작했다. 그의 지적 여정의 한 주기가 매듭지어진 것일까.
  
  그는 지난해 4월 '수유+너머'의 동료인 고병권 씨와 함께 '한미FTA 정세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여러모로 지난 시절의 정치 팸플릿을 떠오르게 하는 이 글에서 그는 몰락을 거부하는 제국의 전략이라는 맥락에서 한미FTA를 분석하면서 민중 진영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지난해 5월에는 '수유+너머' 연구원들이 'FTA 반대, 대추리에 평화를, 새만금에 생명을'이라는 주제로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30여 km를 '걸으며 질문하기'를 했다. 그는 "새만금, 매향리 폭격장, 안산의 이주노동자,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이런 문제들이 다 분산되어 있는데, 행진을 하면서 이런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새로운 방식으로 연대를 모색하려는 횡단적 연대의 시도였다"고 했다.
  
  지난 6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이 민주-반민주의 대립에서 다수-소수의 대립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같은 달 말 서강대에서 열린 '맑스 코뮤날레'에서는 "신체를 잉여가치의 창출 대상으로 삼는 생명산업에 대항해 생명권을 지키는 것이 반자본주의 투쟁"이란 요지의 발표를 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발언은 과연 불온한가. 어쩌면 이것을 확인하는 게 이진경(본명 박태호) 교수를 인터뷰하게 된 진짜 목적인지 모른다. 그가 말하는 '탈주'라는 게 평범한 생활인의 대안적 삶의 원리가 될 수 있는가. 그의 사유체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가. 그게 제도정치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게다가 대선이 목전이다. 가뜩이나 재미없는 대선을 놓고 뻔한 말을 늘어놓는 건 지루한 일이다. 정치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해 보는 것도 필요한 게 아닐까. 위기에 처해있는 진보 진영의 경우 더욱 그렇다. 반성이 관성적으로 되는 것을 막으려면 외적 자극이 필요하다. 관성의 켜가 두터울수록 비판은 발본적인 것이 좋다. 이게 이진경 교수를 인터뷰에 초대한 또 다른 이유다.
  

  
좌파들의 '잃어버린 10년'
  
▲ 이진경 교수ⓒ수유+너머

  프레시안 : 우리사회의 변화의 흐름에서 이번 대선의 의미는 뭔가.
  
  이진경 : 이명박이라는 사람의 비리와 단점이 그렇게 많이 드러났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냥 가자고 한다. 이회창 같은 사람이 어이없이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좋아' 그러면서 가고 있다. 사람들의 이런 선호와 취향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오랫동안 있었던 거다. 이회창이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지속적인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는 거다. 이번 대선은 그런 흐름이 한층 노골화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 : 그 흐름의 성격은 뭔가.
  
  이진경 : 한국의 정치체제는 아이러니한 과정을 거쳤다.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씨는 이전의 범주로 구분하면 민주인사다. 민주인사가 대통령이 된 거다. 김영삼 씨는 민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대통령에 올랐다. 그래서 민주적이라고 하는 것의 실질적 의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면 김영삼 씨가 그래도 그런 것을 제일 많이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김대중 씨는 30년 넘게 독재와 싸워온 분이지만 외환위기 직후에 취임했기 때문에 좋건 싫건 IMF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김대중 씨가 갖고 있던 신념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그 양반은 현실정치인으로서 IMF의 요구를 현실로 받아들였다. 민주정부라는 이름은 걸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작됐던 거다. 개인적으로는 이제껏 대통령 했던 분 가운데 김대중 씨가 가장 능력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가장 반민주적인 체제, 신자유주의 체제의 시발점이 됐고 자리를 잡게 했다는 건 굉장한 아이러니다.
  
  노무현 정부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 노 대통령은 대중운동에 의해 대통령이 됐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중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던 계기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반민주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일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새만금 특별법을 반대한다고 했다가 번복했다. 천성산 터널(을 뚫지 않겠다는 것)도 공약이었는데 뒤집었다. 언론하고 싸웠지만 언론개혁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도 뒤집었다. 모든 걸 뒤집었다. 자신은 일관성 있게 했다고 하는데 좌파적인 정책에서의 일관성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우파들의 정책은 대부분 받아들였다. 대중의 힘을 얻고 집권했으면 그 힘으로 우파적인 힘을 제압하고 나가야 마땅한데 대중적인 힘을 좌파들에 대해서만 행사했다. 이 또한 아이러니다.
  
  우파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무엇을 잃어버렸나. 대중은 전부 비정규직이 되고, 아파트 분양가와 전세 값은 올라가고, 농촌은 붕괴됐다. 이런 10년이다. '잃어버린 10년' 맞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10년은 우파들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좌파들이 잃어버린 거다. 우파들은 자기들이 얻었다는 생각도 없이 수많은 걸 얻었다. 반면 좌파들은 두 눈 멀쩡히 뜬 채 수 많은 걸 뺏겼다. '잃어버린 10년'은 좌파들이 해야 할 말인데 우파들이 하고 있다. 반좌파적인 결과들에 의해 좌파 전체가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사태가 발생한 거다.
  
  지금은 좌파라고 공언하면서 실제로는 우파 역할을 했던 정권이 명실상부한 우파 정권으로 바뀌는 흐름이다.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건 (노무현 정부의) 반대중적이고 반민중적인 정책의 일관성이 아닌가 싶다.
  
  "민노당도 뉴라이트가 될 가능성 커"
  
  프레시안 : 신자유주의 정책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었을 거라는 추측이 흥미롭다.
  
  이진경 : 김대중 씨는 박정희와 대결하면서 대중경제론이라든지 통일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들을 내놓았다. 제도 정치권 안에서는 어떤 사람들보다 민중적인 입장에 가까이 있었다. 이게 대선 때마다 운동권이 김대중 씨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놓고 논쟁했던 이유다. 김대중 씨는 현실 정치라는 조건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하나하나 접어왔다. 70년대에 접고, 유신 들어서면서 접고, 광주사태 때 접고…. 접고, 접고, 다 접고 결국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안착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거다.
  
  프레시안 : 선생은 어느 토론회에선가 한국사회의 주요 모순이 '민주-반민주'에서 '주류-비주류'의 구도로 바뀌었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민주'에서 '주류'로 변신한 사례로 들었는데.
  
  이진경 : 한국사회의 주요 모순과 전선이 달라졌다. 문민정부 이전에는 민주-반민주 구도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노무현 씨도 민주진영에 속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반민주 구도가 소멸했다. 예전에는 민중이라고 불리는 층이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 소상인 등이었다. 그들과 반민주세력간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립하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가 사회의 주류층, 지배층이 돼서 안주하고 있다. 민주노총도 대부분 그렇다. 노동자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사회 전역에서 마이너한 층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고, 주류적이고 안정적인 층들이 생겨났다. 민주-반민주 구도가 메이저 집단과 마이너 집단의 대립으로 바뀐 거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노 대통령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은 자기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전선의 저 편으로 넘어간 거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이 민주주의 진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이 자신이 좌파고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주요 기반이다. 민주노총은 대공장 노조가 주축이다. 선생의 기준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은 메이저와 마이너 가운데 어디에 속하나.
  
  이진경 : 가장 웃기는 코미디가 뉴라이트다. 뉴라이트는 민주진영의 일부였다. 그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메이저 클래스가 되는 거였다. 그런데 보수파가 되겠다고 하면서 기존의 반민주 진영으로 넘어갔다. 이 사람들은 뉴라이트가 아니라 올드라이트다. 정말 뉴라이트라고 할 사람들은 여전히 민주진영에 속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노 대통령이나 민주노총 주류나 정규직 노조 대부분이 그렇다. 민주노동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메이저와 마이너 사이에 걸쳐 있고, 일부는 메이저로 넘어갔다. 노 대통령처럼 과거의 전선에서 자신이 지녔던 위치가 현재 활동의 이유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한 뉴라이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386이라는 말이 싫다. 짜증난다"
  
  프레시안 : 지지 후보는 있나.
  
  이진경 : 없다(웃음).
  
  프레시안 : 투표는 하나.
  
  이진경 : 모르겠다(웃음).
  
  프레시안 : 선생도 386세대에 속한다. 정치권에 진출한 386이 실패한 이유가 뭔가.
  
  이진경 : 나는 386이란 말이 싫다. 짜증난다. 386 정치인들은 과거를 팔아서 먹고 산 사람들이다. 심상정, 노회찬, 권영길 의원처럼 자기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제도권 정치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주류화된 것으로 변형될 가능성이 크다. 그게 지배체제의 힘이다. 그런데 과거를 가지고 제도정치권으로 들어간 386은 그런 일관성마저 포기했다. 정치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과거를 팔아먹고 이용했다.
  
  과거가 그들의 이후의 행동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과거는 새로운 자리를 얻기 위한 담보물에 불과했다. 운동하기 위해 들어간 게 아니라 운동이라는 과거를 팔아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당에 가건 청와대에 가건 기존의 체제 안에 기능하는 하나의 부속품이 된 거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 씨 욕할 게 아니다. 그 사람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견뎌가면서 자기 나름대로 이론적 일관성을 가지려고 했다.
  
  나는 김대중 씨가 386 정치인들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믿는 신념을 계속 가지려고 했다. 북한 문제 같은 것도 자기 나름의 신념을 밀고 나간 거다.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이나 신당, 민주당에 있는 386 정치인들을 보라. 유시민 같은 사람은 새만금에 골프장을 여러 개 짓겠다고 한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다는 게 정치인으로서 이들의 질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거다.
  
  사회의 양극화와 운동의 양극화
  
▲ ⓒ수유+너머

  프레시안 : 큰 틀에서 보면 87년 체제가 해체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포스트 87체제가 어떤 모습을 띨 것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현재 우리사회가 놓인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이진경 : 지금은 개별화된 제국주의가 아니라 몇몇 제국주의 나라들의 기이한 연합체가 가시화되고 있다. EU와 같이 지역동맹체를 형성하려는 시도도 많다. 그런 것을 추동하는 힘은 일국적 스케일을 넘어서 작동하는 자본이다. 여러 국적을 이용하면서 자기 이해에 맞게 대응하는 힘을 가진 자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좀 더 깊은 층위에서 보면 일종의 유연성 체제다. 자본이 흐름의 경제를 형성하게 됐고 흐름을 가속화하고 타고 다니면서 흐름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체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유연성이 필요해진다. 자본도 유연해져야 한다. 국경이고 뭐고 이윤만 있으면 쉽게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생산도 유연화 돼야 하고 고용도 유연화 돼야 한다. 이것은 이전의 포드적 축적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축적체제다. 이런 축적체제가 우리 삶의 기저를 이룰 거다. 이 체제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을 극도로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기 때문에 농업은 전반적으로 몰락할 가능성이 크다. 비정규직은 물론이고 이주노동자나 여성과 같은 소수화 된 노동자층이 장기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프레시안 : 선생은 '사회적 양극화와 사회운동의 양극화라는 이중의 양극화'를 주요 모순으로 꼽기도 했다. 부연해 달라.
  
  이진경 : 사회 양극화와 나란히 운동도 메이저 운동과 마이너 운동으로 분화된다. 대부분의 시민운동은 메이저 운동이 돼버렸다. 주어진 틀 안에서 어떻게 몫을 분배할 건가, 보장된 권리를 어떻게 제대로 보장받을 건가 하는 인권, 시민권의 개념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는 시민권이 없지 않나. 새만금 갯벌에 산 500개를 쑤셔 넣어 메우겠다고 하는데, 산에 사는 생물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개념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야에도 안 들어온다. 환경운동 하는 사람들도 이런 것은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운동의 스타일은 법정의 판결에 기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얼마나 우습나. (생태문제에 대해) 법관이 뭘 알겠나. (법정의 판결이란) 사회의 지배적인 척도 아래 자기를 복속시키는 건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운동이 메이저화 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운동을 함께 할 수도 없고, 이런 운동에 의해 포섭되거나 대표될 수 없는 마이너들이 앞서 말한 유연화체제에서 광범위하게 양산된다. 그런데 이런 마이너한 층을 모아내는 단일 이슈 같은 건 없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각자의 이슈를 갖고 분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예전의 연대투쟁도 서로 연대하고 동맹하는 과정에서 상이한 이슈와 이익을 하나로 결합했던 것이지 그 역이 아니었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연대를 통해 새롭게 묶을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지금 운동하는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귀속시켜서 운동의 전망을 찾아내는 일이 흔해졌다. 이런 게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 이해관계를 가로지르고 계급적 경계를 횡단하는 연대를 통해 공통성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미 갖고 있는 공통의 속성이 공통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이너들 간의) 공통성을 구성해 나가는 연대가 이후 운동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이어도 편하게만 살 수 있다면…"
  
  프레시안 : 지난해부터 진보 위기 담론이 계속되고 있다. 진보라는 관념은 여전히 타당한가.
  
  이진경 : 진보라는 건 새로워지는 거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예전에는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다가서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했지만, 목적론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목적이 없는 진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진보라고 하는 건 지금 현재 상태를 갱신하려는 흐름에 의해 결정된다. 보수라고 하는 건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보존의 벡터에 의해 정의된다. 앞서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의 변화에 대해 말했는데, 누가 진보적인가 하는 것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조건에서) 새롭게 진보를 사유해야 한다. 진보적인 운동이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프레시안 : 현재의 조건에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은 무엇이 돼야 하나.
  
  이진경 : (골똘히 생각한 후)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마이너는 끊임없이 동요하고 불안한 처지다. 이들에겐 불안정성의 체제다. 이주노동자의 경우 존재 자체가 불안정하다. 이들은 항상 불안정에 쫓긴다. 그리고 불안정에 쫓기는 상황 때문에 과잉착취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런 것이 거꾸로 그들로 하여금 안정을 희구하게 만든다. 위협적인 불안정을 어떻게 역동적인 안정으로 바꿀 수 있을까.
  
  나는 그게, 예를 들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하는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물론 정규직화 하는 싸움은 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규직이 되면 세상은 좋아지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데 생활의 기본 수준이 불안정하지 않다면 비정규직으로 사는 게 편할 수도 있다. 나는 비정규직으로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체제, 직업이 없어도 기본적인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체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하지 않아도 기초임금 같은 게 국가에 의해 지급되는 체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도정치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유
  
  프레시안 : 그런 제도 개선은 정치의 문제인데, 선생은 제도 정치를 통한 세상의 변화에 얼마나 기대를 걸고 있나.
  
  이진경 : 기대를 걸만 해요?(웃음). 기존의 여당이나 보수야당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민노당의 경우에는 자기의 위치와 위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민노당은 스스로를 노동자를 대표하는 대의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요구에서 못 벗어난다. 민주노총이나 (민주노총 조합원인) 노동자들이 보수화된 상황에서 민노당이 앞서 말한 시도를 할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민노당은 대의, 대행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너무나 근대적인 개념이다. 오히려 아방가르드주의 같은 게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 필요한 것을 앞서 문제제기하고 치고 나가는 운동방식을 창안하고 실행한다면 민노당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신문에서 들리는 얘기를 보면 절망적이더라. 이런 게 (제도정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이유 같다.
  
  프레시안 : 선생에게 '수유+너머'는 어떤 공간인가.
  
  이진경 : 삶의 공간이다(웃음). 나는 공부, 삶, 운동, 이런 게 분리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삶과 지식, 삶과 자신의 신념의 분리다.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살아야지' 하면서도 몸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다. 그건 아주 고질적인 문제다. 그래서는 아무리 공부해봐야 소용없는 거다. 사람을 바꾸는 공부, 혹은 바뀐 삶에 의해 진행되는 공부가 돼야 한다. 공부와 삶이 같이 진행되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어제 누군가 성명서에 이름 좀 올려달라고 하던데, 그건 쉬운 일이다. 성명서는 70년대에 성명서 하나 내는 것조차 부담이 되던 시대에나 하던 운동방식이다. 파업도 마찬가지다. 나는 민주노총이 총파업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자신이 보수화되어버린 상황에서 보수화된 노동자들의 의견을 모아 총파업을 한다는 게 민주노총이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을 제약하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민주노총이 총파업 생각을 놓고 새로운 활동을 창안하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민주노총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수화된 서유럽의 노동조합이나 미국의 자유노조 비슷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민주노총은 소속 노동자들의 대의기구다. 노동자들의 보수화된 의식을 문제 삼는다면 그들이 결정하는 다른 실천의 방식 또한 보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닌가.
  
  이진경 : 그래서 나는 아방가르드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지독히 보수적이었다가 황당하게 진보적으로 갔다가 어떤 경우에는 아주 반동적으로 가기도 한다. 대중은 그런 흐름이다. 대중이 어떤 상황에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달라진다. 그럴 때 대중들을 대의한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거다. 대중들이 반동적으로 가면 반동적인 걸 대의할 건가. 대중들이 보수화되면 보수화된 걸 대의할 건가. 지금 서구의 노동조합은 보수화된 대중을 대의하는 거다. 그게 노동운동이 가야 될 길인가. 그건 반동이다.
  
  대중들은 흐름이다. 이 흐름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건가는 어떤 자극과 촉발, 어떤 환경과 조건이 주어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대중들은 70년대 80년대에도 보수적이었다. 어떤 조건에서 자극이 주어지고 그게 맞으면 스파크가 일어나서 확 진보적으로 갔다가 썰물 빠지듯 빠지고 하는 거다. 그렇다면 활동가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흐름을 어떻게 진보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할 건가를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활동을 창안하고 (대중의 의식이 진보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촉발하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의라는 관념은 스스로 발목을 묶는 거다. 대중들의 뜻을 대변 하겠다? 지금은 대중들의 뜻을 대변하면 안 된다. 그럼 대중의 뜻을 대변하지 않는 것이 대중들에 반하는 건가? 그건 아니다. 대중들의 마음은 계속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민주노동당은 진성당원제를 택하고 있다. '대의'라는 관념에 대한 선생의 비판을 확장해보면, 민노당의 진성당원제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진경 : 그렇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쓰이는 가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운동의 민주성을 보장한다는 것이야말로 부르주아적인 생각이다. 민노당의 민주주의가 뭔가. 표의 수다. 당원들의 투표 수. 이건 정말 부르주아적인 거다. 그걸 자랑거리로 삼는 건 어리석다. 당이라는 게 뭔가. 나는 여전히 아방가르드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하도록 하는 끊임없는 자극과 촉발을 앞장서 만들어 나가는 것, 이게 당이나 정치세력이 할 일이다. 숫자를 집계하는 건 관료들이 할 일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삶을 구성한다면…"
  
▲ ⓒ수유+너머

  프레시안 : '탈주'라는 담론이 우리 사회에 유통되는 데는 선생의 영향력이 컸다. 지식인들은 공부와 삶이 하나 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보통의 생활인들이 택할 수 있는 탈주의 양상이 어떤 게 있을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이진경 : 탈주는 자기가 살아가는 일상과 활동에서 기존의 지배적인 것들, 남들 다 하는 것들, 이런 것들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실행하는 거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새로운 화법을 창안하거나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창안하면 그게 탈주선을 그리는 거다. 일상 생활인의 경우도 그렇다. 아파트에 살면서 중산층 생활하는 사람의 생활이란 게 어떤가. 남편은 돈 버느라 정신없고, 여자들은 집에서 애들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고 뺑뺑 돌린다. 고립되어 있는 한 이런 생활은 벗어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 안에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을 만들어서 돌아가며 공동육아를 하면 애 보는 문제도 쉬워지고 자유시간도 늘어난다. 이게 애들에게도 좋다. 정해지지 않은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접할 수 있게 되고, 자기랑 잘 안 맞는 사람들하고 만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이렇게 거리를 새로운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아파트 부녀회가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는 운동체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훌륭한 탈주선이다. 이런 건 어려워서 못하는 게 아니다. 탈주선을 그린다는 건 일상인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건 그 사람을 정말 편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우리사회가 추구해야 할 국가모델이 뭔가.
  
  이진경 : 어(한숨). 국가가 끼어서 잘 되는 일을 별로 본 적이 없어서(웃음). 나는 국가가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국가에 많이 매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가 확장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잘 못하겠다. 앞서 얘기한 대로 국민들에게 기초생계비 보장해주고, 사람들이 운동 하면서 자본이건 뭐건 서로 부딪칠 일 있을 때 최소한의 공정성을 갖는 조정자 역할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국가의 개입은 적을수록 좋다. 자유주의적인, 시장주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스스로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거다.
  
  프레시안 : 그런 모습에 근접한 나라가 있나.
  
  이진경 : 모르겠다(웃음).
  
  "국가는 삼성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프레시안 :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 영향력을 얻고 있다. 장 교수는 사회적 대타협에 기초한 스웨덴식 모델을 말한다. 장 교수는 또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을 강조한다. 장 교수의 주장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어떤가.
  
  이진경 : (장 교수는) 아마도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해독제로 생각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장 교수의 주장을) 지지하는 분들도 그런 것 같고. 박정희 체제는 자기 나름의 노선을 갖고 있었다. 국가가 중심이 돼서 자원을 재분배해 자본을 축적하는 체제였다. 재벌은 그것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체제는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한계에 이르렀다. 그 한계지점에서 박정희는 죽었던 거고 박정희 체제의 가능성도 그 때 끝났다고 생각한다. 특히 1985년을 전후해서 개방 압력이 들어오고, 개방이 시작되면서 국가는 자본과 재벌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잃었다. 자본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고 외자를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국가가 은행을 중심으로 자본을 분배하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점점 더 자본이 독립성을 갖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고, 그게 97년 이후에는 더욱 확고해졌다. 97년 이후 재벌을 개혁한다고 하면서 채무비율을 낮췄는데, 이건 국가 중심의 은행주도 금융체제로부터 재벌이 독립해서 자기 발로 섰다는 것을 뜻하는 거다.
  
  이런 체제에서 국가가 자본이나 재벌을 통제할 힘이 있는가. 지금 삼성과 국가의 관계에서 삼성이 더 센 것처럼 보이는데 이건 환상이 아니다. 지금은 국가가 삼성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삼성이나 다른 큰 재벌은 국가경제의 틀에서 벗어날 정도의 위치를 가졌다. 여기서 세게 조이면 나가버리면 그만이다. (국가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재벌이 나가버리면) 국가는 파산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재벌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정희 시대의 정책을 염두에 두면서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는 체제를 구상하는 것은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대타협? 재벌이 뭐가 아쉬워서?"
  
  프레시안 :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발상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얘긴가.
  
  이진경 : 그렇다. 타협은 아쉬운 게 있어야 하는 거다. 재벌이 뭐가 아쉬워서 타협하나. 노동력만 봐도 중국에다 공장 세우는 게 더 싸다. 세제도 저쪽이 더 유리하다고 하면 그 쪽으로 빼버리면 된다. 미국 시장 진출이 필요하면 미국지사 만들면 그만이다. 재벌이 여기에서 기면서 타협을 할 이유가 없다.
  
  프레시안 : 재벌은 국경의 틀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힘이 강해진다고 해도 재벌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얘기인가.
  
  이진경 : 훨씬 어려워졌다.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에서 자본에 기대지 않고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다른 힘을 구성해야 한다. 비록 내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대중적인 힘을 이용해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가, 자본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체제를 구성할 수 있는가, 저는 감각 있는 훌륭한 정치인이라면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때만 국가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힘을 가질 수 있다. 지금은 그걸 포기한 상태에서 자본이 하자는 대로 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다.
  
  프레시안 : 자본에 대한 통제라는 게 어떤 식으로 이뤄질 수 있나.
  
  이진경 : 예를 들어 자본을 다른 나라로 옮긴다고 해도 생산설비를 들고 가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남아 있는 생산시설이 그대로 유지되고 가동되도록 하면 된다. 노동자들이 부도난 기업을 떠맡아 성공적으로 살려낸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이 보여주는 가능성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자본에 제약을 가하고, 그것 때문에 자본이 떠난다고 하면 떠나도록 하면 되는 거다. 자본이 빠져나가면 노동자들이 스스로 운영하게 하면 되는 거다.
  
  "개발주의와의 싸움, 끔찍하다"
  
  프레시안 : 지난 4월 고병권 씨와 쓴 글에서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를 선택한 건 '이념적 선택'이라면서, '구체적 이익'의 문제로 맞서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더 힘이 센 듯하다. 사람들은 왜 '구체적 이익'의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을까.
  
  이진경 : 대중들이 갖고 있는 개발주의가 근본적인 문제다. 박정희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거다. 예를 들면 경주에서 방폐장을 끌어들이면서 '집값 오르고 땅값 오를 것'이라고 한다. 새만금 사업에 찬성하면서도 지역이 개발될 거라고 한다. 관료들의 개발주의와 대중들의 개발주의가 결합되면서 전국적인 개발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거다. 이런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차원에서 개발주의에 반하는 운동이 있어야 한다. 대중적인 수준에서 개발주의에 대항하고 대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프레시안 : 참으로 첨예하고 힘든 싸움이다.
  
  이진경 : 끔찍하다. 싸우기도 힘들다. 대중 자신하고 싸워야 하니까. 끔찍한 대가를 치른 후 반성을 통해 생각을 교정하는 길이 하나 있다. 또 개발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욕망으로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희망이 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개발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투쟁이 아니라 삶을 위해서 삶의 조건을 바꿔가는 운동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개발주의와는 다른 종류의 삶에 사람들이 눈 뜨도록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활자체의 붉은색, 초록색 강조는 전부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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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미등록 이주자의 ‘빵과 장미’
야!한국사회

정정훈 / ‘공감’ 변호사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8일


» 정정훈/‘공감’ 변호사
 
“내일의 빵으로는 나는 살 수가 없다.” 검은 영혼의 시인 랭스턴 휴스는 이렇게 ‘내일’이라는 장밋빛 미래의 약속을 거부하고, 단호하게 ‘오늘의 자유’를 선언했다. 대선 정국이 한창이다. ‘오늘의 자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공약으로 제시되는 ‘내일의 약속’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유독 ‘오늘의 자유’도 ‘내일의 빵’도 없는 예외적 존재들이 있다.

우리가 쉽게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해버리는 미등록 이주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한국에 들어올 때는 ‘외국 인력’이었고, ‘불법 체류자’가 되어 살아가거나 내보내진다. 노동력을 부르면 ‘사람’이 함께 들어오고, ‘사람’ 자체는 합법·불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외국 인력’과 ‘불법 체류자’라는 규정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 숨쉬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보지 않았다.

불법이라는 숙명적 굴레를 딛고 ‘오늘의 자유’를 실천한 이 시대의 전태일들이 있었다. 이주노동자조합을 만들어 ‘우리도 사람이고 노동자’라고 선언했다. 힘겨운 싸움 끝에 고등법원에서도 그들의 조직과 권리선언을 인정했다. 그런데 11월27일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이주노조의 핵심 활동가인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을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단속하여 수용했다. 일상적인 단속활동이었을 뿐 ‘표적’은 없었다는 변명으로는 이 ‘기막힌 우연’이 설명되지 않는다. ‘합법’ 노조에서 ‘불법 사람’들을 제거하여 노조를 빈 형식으로 만들려는 권력의 의지를 나만 보는가? ‘불법인 너희들이 감히!’라고 말하는 권력의 오만함을 나만 느끼는가? ‘빵과 자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권력의 음험한 경고를 나만 듣는가? 이번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표적 단속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살고 싶으면 죽어 지내라!’

‘사람’과 ‘삶’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공권력은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에 대한 권한 행사는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통 버리듯, 다 쓴 건전지 폐기처분하듯 간단했다. 출입국관리소의 권한이 통제되지 않고 ‘천당에서 지옥까지의’ 절대적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지워버린 구체적인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체류’는 ‘불법’이지만 ‘사람’이 불법일 수는 없다. 그들이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고, 아플 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어야 하며, 외로울 때 함께할 친구와 노래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피해를 신고하러 간 경찰서에서 출입국관리소로 인계되고, 체불임금을 받으려면 이 나라를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미등록’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왜곡되는 삶의 조건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함께 살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그 대답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주 한국영사관은 ‘불법 체류자’인 재외국민의 불이익을 해소하고자 ‘재외국민 신분증’을 발급하고 있다. 영사관 신분증은 주 경찰 등의 공공기관에서 인정되고, 전기·수도·전화신청·은행계좌 개설에까지 쓰이고 있다고 한다. 영사관이 그들을 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들이다.

‘불법 체류자’인 재외국민과 우리 안의 이주민들에 대한 가치판단이 다를 수는 없다. ‘공존’의 현실과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살아 숨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살고 싶으면 죽어 지내라’는 권력의 주술을 풀어야 한다. 빵을 구걸하기 위해 오늘의 자유를 포기하라고? 그들도 우리처럼 ‘빵과 장미’ 모두가 필요하다. 함께하는 삶을 위한 제도를 모색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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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학벌사회의 그늘

진중권 /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출처 : <월간 인권> 2007년 9*10월


김대중 정권 때던가? 어느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하다가 답답해하던 기억이 난다. 기자가 던진 질문은 ‘신지식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 이 물음에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명백히 김대중 정권의 지지자로 보이는 기자의 태도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다. 한마디로 지식인이 아닌 이들을 지식인으로 대접해주는 게 지식인으로서 아니꼬우냐는 얘기다.

사실 ‘신지식인’이라는 말은 민중의 지위를 드높인다는 가상함 밑에 민중에 대한 더 강한 차별적 의식을 담고 있다. 왜?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농공상이라는 조선시대의 신분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채, 농▪공▪상의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도 제 영역에서 역량을 보여주면 선비(士) 계급으로 신분을 상승시켜주겠다는 얘기다. 이는 봉건적 신분제 의식 철폐가 아니라, 그것을 시대에 맞게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상인이든, 모든 직업은 고귀하고 신성하다고 했다. 지식인이 별것인가? 그저 하는 일이 다르고, 먹고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지식인을 존경해야 한다면, 그와 똑같은 정도로 노동자가 하는 일, 농민이 하는 일, 상인이 하는 일에도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농민과 상인과 노동자는 왜 그냥 제 직업 그대로 존경받으면 안 되고, 존경을 받기 위해 굳이 ‘지식인’으로 직업을 바꿔야 하는가?

이는 이른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는 이들의 머릿속까지도 철저하게 봉건적 신분제 의식으로 물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아예 보수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은 오죽 하겠는가? 신분 차별을 철폐하자는 캠페인에까지 신분제적 의식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나라의 불행이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걸까?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뿌리 깊은 역사적 이유가 있다.

서구에서 신분제 철폐는 귀족계급을 평민으로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한국에서는 모든 평민이 가짜로나마 귀족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양반계급은 인구의 4%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라. 그 중에서 자기 집안이 양반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집안 내력을 물으면 100% 다 족보를 들이대며 양반계급이라고 주장할 게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근대적 평등은 귀족적 특권 철폐가 아니라, 그 특권의 ‘가상적’ 일반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가상적’이라 함은, 특권을 돈 주고 사거나, 혹은 가짜 족보를 만들어 혈통을 꾸몄다는 의미다. 특권은 소수만이 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이 누리는 것은 더 이상 특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전 인민의 양반화가 결과적으로는 전 인민의 평민화로 이어진 것이다.

경로는 다르지만, 어차피 신분은 철폐되었다. 하지만 결과가 같다고 경로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는 신분제적 ‘현실’의 종언과 더불어 신분제적 ‘관념’도 사라졌지만, 한국에서는 신분제적 현실의 폐지와 더불어 신분제적 특권의식이 외려 모든 계급, 계층의 의식 속으로 더 일반화, 보편화한 것이다. 유난히 학벌을 따지는 이 사회의 습속은 여기서 비롯된다.

요즘 학력을 위조한 사람들을 적발해내느라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내 경우에는 외려 반대의 경험을 한다. 나는 열심히 진짜 학력을 밝히고 다니는데, 사회가 그것을 애써 감추어두고 자신들이 내 학위를 위조해준다. 강연 가서 늘 듣는 소개 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그때마다 나는 명예박사 학위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라며 농으로 받아넘기지만, 솔직히 속으로는 매우 짜증난다.

얼마 전 한국 학벌주의의 폐해를 논하는 방송사 토론에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보내준 패널 소개를 읽어보니, 이번에도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란다. 황당해서. 도대체 학벌주의를 철폐하자는 프로그램에서까지 굳이 학력을 밝히려 한다. 그냥 ‘중앙대 겸임교수’라고만 하면 안 되나? 도대체 내가 어느 대학 나와서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 그게 도대체 토론과 무슨 관계인가?

대개 강연을 하면 주최 측에서는 자신들이 부른 강사를 대단한 사람으로 부풀린다. 실제로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적 없다고 수정해주면, 청중 중에는 실망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잡지사에 글을 기고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잡지사 측에서는 자신들의 기고자에게 되도록 좋은 학벌의 후광을 뒤집어씌우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런 일 당할 때마다 모욕을 느낀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끔 교회에 가면 신도들 역시 내게 학위를 못 줘서 안달이 났다. “진 박사님.” “저, 박사 아닌데요.” “에이, 박사보다 유명하신데 박사나 다름없지요.” 이렇게 일상에서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박사 학위는 수정조차 안 된다는 고약한 특성이 있다. 아무리 교정해줘도, 여전히 “진 박사님”이다. 이런 종류의 ‘박사’는 분류적 개념이 아니라 평가적 개념이니, 아예 수정 불가능하다.

교수 자리 줄 테니 박사학위를 받으라고 한다. 하지만 그저 교수가 되려고 학위를 받는 것은 내 삶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 굳이 정교수 자리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데 큰 불편을 못 느낀다. 학위를 따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있다면, 차라리 미국 가서 조종사면허장(PPL)을 따고 곡예비행을 배우는 게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사회적으로 학력을 차별한다고 굳이 사회의 요구에 맞춰 학위를 딸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조선시대 상민들이 신분제를 철폐하기 위해 스스로 양반이 되려고 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실력을 갖고도 학력이 없어 인정을 못 받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쪽의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마냥 사회만 탓하는 것도 그리 생산적인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개인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는 그런 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개인은 학력을 위조하는 위법이나 차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회와 적당히 타협하는 편법이 아니라, 정공법으로 그런 차별의 벽을 돌파해 나가는 존재미학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힘들게 얻어낸 명예는 힘든 만큼 더 고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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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읽다보니 문단 몇 개가 겹쳐있는데 퍼오실 때 잘못 붙이신 듯해요. 가져가려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여쭤봅니다.

내오랜꿈 2007-11-28 18:41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국가인권위원회 홈피에서 관리하는 "웹진 인권"에서 가져왔는데, 확인을 못했군요.

아프님 댓글 보고 <월간 인권> 찾아서 확인하고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