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도 얘기 안해준 스웨덴 좌파 음악
프리덤 싱어즈 "반제국주의의 노래"


장석원 객원기자
출처:<레디앙(www.redian.org)> 2007년 01월 06일


1968년 해병대를 전역한 척 오난Chuck Onan은 조국인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엘리트 부대인 장거리정찰대LRRP 대원으로 베트남에서 복무한 그는 대신 스웨덴으로 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스웨덴의 사민당 정권은 그를 정치적 난민으로 받아들였고 스웨덴어 교육과 함께 정착지원을 제공했다.

척 오난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탈영하거나 징집을 피해 스웨덴과 캐나다, 프랑스로 망명한 미국인은 3만명에 달한다.

사민당 소속의 총리 올로프 팔메는 1972년 유명한 크리스마스 연설에서 닉슨정권의 하노이폭격을 맹비난했다. 이 연설로 야기된 스웨덴과 미국의 외교 갈등은 1974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포린 어페어즈> 같은 보수적인 저널에는 스웨덴을 ‘사회주의 국가Socialist State’라고 지칭한 대목이 자주 눈에 보인다.

물론 스웨덴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사민당이 정권을 장기독점하긴 했지만 때때로 우파정권이 들어서기도 하는 나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도 있고 또 무시무시한 조직률을 자랑하는 노조도 있다. 다만 좀 특별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영국인들이 독일에 한번 갔다 오면 자기네의 낮은 복지수준을 보고 삶의 의욕을 잃는데, 정작 독일인들은 스웨덴에 한번 갔다 오면 "독일은 참 지옥 같은 나라야"하고 한탄을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럽 안에서도 진보적인 사회문화를 일군 나라가 스웨덴(과 주변의 북유럽 국가들)이다.

북유럽이 얼마나 살만한 동네인지는 지난 수년간 박노자 교수가 생생하게 전해준 '염장성' 현장보고를 통해 익숙하게 들은 만큼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박노자 교수는 이야기한 적이 없는 60~70년대 스웨덴 좌익들의 음악을 앞으로 한달간 소개할 계획이다.

스웨덴의 음악하면 제일 쉽게 연상되는 거야 물론 스웨덴의 국민밴드이자 한 시대를 상징했던 ‘아바ABBA’의 주옥같은 멜로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스웨덴에는 아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 * *

"Antiimperialistiske songar"
Freedom singers
1970년
Side A
1 Wall Street
2 Å Sentab å ja
3 Visan om Gunnar Myrdal
4 Vårt Sagoland
5 Rövarvisan
6 Vi sår vårt ris
7 Visan om Ho Chi Minh
Side B
1 Befria Södern
2 Bläckfisken
3 Hur ser friheten ut?
4 Visa om Olof Palme
5 Kafferepet
6 En liten quisling
7 Richard Dollarhjärta
8 CIA-visan
 
스웨덴의 포크 그룹인 프리덤 싱어즈The Freedom Singers는 두 장의 음반을 남겼다. 첫 번째 것은 1968년에 “68”이라는 단순한 제목으로 발표됐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앨범이 오늘 소개할 “반제국주의의 노래Antiimperialistiska Sånger”이다. 이 앨범은 1970년에 발표됐다.

프리덤 싱어즈는 단일한 밴드가 아니라 스톡홀름과 예텐보리 두 도시에 기반한 음악인들이 느슨하게 결합해 있는 형태였다고 한다. 아마도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구성했던 그룹이 아닌가 이해한다.

정치적인 목적이란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NLF와의 연대다. 프리덤 싱어즈는 60년대 후반 스웨덴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던 베트남연대운동(FNL-rörelsen)의 일원이었다.

투쟁하는 베트남 인민들에 대한 지원과 연대는 60년대 각국 좌익들의 공통된 주제였지만 스웨덴에서는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베트남연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망명이나 올로프 팔메의 연설등도 모두 대중적인 연대운동이 정치권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프리덤 싱어즈가 불렀던 노래들도 모두 ‘베트남’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사실 프리덤 싱어즈는 1962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크 그룹의 이름이다. 흑인민권운동단체의 전국순회에 동행하면서 노래로 운동을 대변했던 유명한 팀이다.

멀리 떨어진 스웨덴이지만 포크와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원조’ 프리덤 싱어즈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다. 음악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계몽을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의식적으로 프리덤 싱어즈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그룹을 구성했던 이들의 명단이나 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반제국주의의 노래”에서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여성 메인 보컬은 마리에 셀란네르Marie Selander이다.

프리덤 싱어즈 이전부터 가수로 활동했고 이후에도 음악활동을 계속한 셀란네르는 70년대 바라빈테르Vargavinter라는 밴드를 통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84년 밴드가 해산한 후에는 공부를 시작해 대학교수가 됐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반제국주의의 노래”에 실려 있는 곡들은 모두 베트남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노래하거나 아니면 미국을 조롱하는 것들이다. ‘호치민의 노래Visan om Ho Chi Minh’, ‘남부를 해방시켜라Befria Södern’ 같은 곡들은 제목만으로 내용이 짐작이 간다. ‘월 스트리트Wall Street’는 펜타곤과 자본의 결합을 풍자한 곡이고 ‘CIA발라드CIA-visan’도 풍자의 대상이 쉽게 짐작이 간다.

   
▲ 마리에 셀란네르Marie Selander
 
눈에 띠는 것은 스웨덴 정치인들의 이름이 들어간 두곡 ‘군나르 뮈르달의 노래Visan om Gunnar Myrdal’와 ‘올로프 팔메의 노래Visa om Olof Palme’이다. 뮈르달은 사민당의 경제정책을 정립한 이론가고 팔메는 사민당의 지도자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거목들이다. 우리 현실에서는 그저 부럽기만 한 진보적인 정치인들인데 정작 같은 스웨덴사람인 프리덤 싱어즈에게는 베트남에 대한 입장과 행동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 * *

이 앨범의 곡들은 전형적인 모던포크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프리덤 싱어즈’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60년대 미국 포크부흥운동의 형식까지 고스란히 빌려온 셈이다. 덕분에 언어의 장벽으로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공감대가 형성된다.

모던포크의 장점은 그 보편성에 있다. 각 나라의 진짜 포크, 즉 민속요와 융합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지만 모던포크의 보편성은 기타와 화음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60년대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이유를 설명해준다.

“반제국주의 노래”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악은 서울대학교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1979년도 공연 복각음반이었다. 메아리의 공연은 군가를 연상시키는 노동가요와 북한식 노래들이 도입되기 이전 모던포크의 문법에 충실한 노래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프리덤 싱어즈나 메아리나 지금은 모두 과거의 유산이 됐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운동 자체가 시들해지면 함께 힘을 잃은 반면, 다른 한쪽은 포크가 민중의 삶을 흉내내는 지식인의 형식미학이라는 자기비판 속에서 포기를 강요당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민중가요는 음악이면서 동시에 음악을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광석이 노래모임 '새벽'을 떠나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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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좌파음악이라기보다는 반전음악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김광석이 '새벽'을 떠났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더욱 풍부해진 대중음악을 향유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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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좌파 음유시인의 모든 노래들
모던포크 싱어 필 옥스 "명성의 코드"

장석원 객원기자
출처:<레디앙(www.redian.org)> 2007년 02월 24일


60년대 모던포크운동은 미국의 대중음악 역사에서 정치적 행동주의와 가장 밀접하게 결합했던 분야였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같은 현상은 없었다. 물론 모던포크운동에 몸담았던 음악인들이 모두 같은 정도로 정치적 문제제기에 동참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주제들을 노래하면서도 의식적으로 현장과는 거리두기를 했던 가수들도 물론 있고, 체면치례수준에서 집회나 노래모임에 얼굴을 내비쳤던 가수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크싱어들은 자신들의 노래가 현실을 담아야 하고 현실은 언제나 공연장이 아니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노력했다.

우리에게는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송을 부른 이로 기억되는 폴 사이먼도 무대에서는 '쿠바 예스, 닉슨 노!Cuba Si, Nixon No' 같은 선동적인 노래를 불렀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혁명이 서서히 진압당하기 시작하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파리협상도 진척되면서 '거리'에는 침묵이 번져나갔다. 동시에 그 거리에 기반했던 모던포크운동도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우울한 70년대'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좌파들에게 60년대는 혁명의 시기였다. 반면 80년대는 끔찍한 반동의 시대였다. 반대로 우파들에게 60년대는 혼란과 분열의 시기였지만 레이건의 80년대는 찬란한 승리의 시대였다. 그러나 좌파건 우파건 70년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우울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사실상의 패배는 미국사회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워터게이트 사건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넘어 냉소주의를 확산시켰다. 미국의 노동계급은 부유하다는 신화가 깨진 것도 이 시기였다. 60년대 공동체주의의 실패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불러왔고 가족은 이미 해체됐다. 보수건 진보건 미국사회는 전반적으로 희망을 잃고 방향을 상실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런 시대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필 옥스는 1976년 4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 *
▲ 노래하는 저널리스트 - 필 옥스Phil Ochs
필 옥스는 톰 팩스턴과 함께 모던포크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가수였다. 1964년 음반 데뷔 후 죽기 직전까지 그는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1970년의 음악스타일 변경에도 불구하고 '전쟁', '인권', '노동'에 관해 노래한다는 모던포크의 정신을 고수했던 몇 안 되는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존 바에즈 같은 포크명문가 출신과 달리 필 옥스는 1958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포크에 별 관심도 없었고 정치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청년이었다. 심지어 그는 미국에만 있는 독특한 형태인 군사기숙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립대학 입학 후 사귄 친구들과 미국여행을 통해 '세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옥스는 대학에서 언더그라운드 신문을 발행하고 기숙사 친구와 '싱잉 소셜리스트The Singing Socialists'라는 듀오를 결성하기도 했다. 졸업을 포기하고 뉴욕에 올라와 포크 뮤지션들의 집합소인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가 1962년이었다.

이듬해에는 미국 최대의 포크공연인 뉴포트포크페스티벌 무대에 초청될 정도로 포크 팬들과 평론가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1964년에는 첫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이후 1970년까지 매해 한 장씩의 앨범을 선보였지만 그해 3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카네기홀의 공연 이후로는 침체에 빠져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 * *

"Chords of Fame"
Phil Ochs
1976년
Side 1
1. I Ain't Marchin' Anymore
2. One More Parade
3. Draft Dodger Rag
4. Here's to the State of Richard Nixon
5. The Bells
6. Bound For Glory
7. Too Many Martyrs
8. There But For Fortune
Side 2
1. I'm Going to Say It Now
2. Santo Domingo
3. Changes
4. Is There Anybody Here?
5. Love Me, I'm a Liberal
6. When I'm Gone
Side 3
1. Outside of a Small Circle of Friends
2. Pleasures Of The Harbor
3. Tape From California
4. Chords Of Fame
5. Crucifixion
Side 4
1. The War Is Over
2. Jim Dean of Indiana
3. Power and the Glory
4. Flower Lady
5. No More Songs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1976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 후 그의 가족들이 추모앨범의 의미로 편집한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발표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정성들여 제작한 흔적이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특히 서로 다른 두 회사로 나뉘어 있던 음악활동을 하나의 세트에 모았다는 점에서 소중한 음반이다. 필 옥스는 1967년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일렉트라 레이블에서, 이후로는 A&M 레이블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명성의 코드"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발표된 필 옥스의 선집들은 모두 해당 음반사 시절의 녹음들로만 구성됐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그의 데뷔 무렵부터 마지막까지의 음악활동을 한 눈에 훑어볼 수 있도록 구성돼있다. 사망 직후였기 때문에 죽은 가수를 재조명하려는 유가족들의 뜻에 각 음반사들이 쉽게 동의해줘서 가능했다. 그러나 상업적인 이유로 이후로는 이런 기획과 협력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앨범은 같은 이유로 CD로는 제작되지 못했다.

앨범 커버의 안쪽과 뒷면은 동료 음악인이며 역시 사회운동가에 비트족 시인으로 유명한 에드 샌더스가 필 옥스의 일생을 길게 쓴 글이 신문 지면의 형태로 빼곡히 적혀있다. 이 디자인은 이유가 있는데 필 옥스는 자신을 빗대어 '노래하는 언론인troubadour journalist'이라고 불렀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옮겨왔을 무렵에도 필 옥스의 목표는 직업적인 포크가수가 되는 것과 함께 명망있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두 가지를 혼합한 형태를 해결책으로 삼은 셈이다. 그의 첫 번째 앨범의 제목은 "노래할만한 모든 소식들All the News That's Fit to Sing"이었다. 이는 뉴욕타임스의 오랜 사시인 '인쇄할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를 본 뜬 것이다.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두장의 레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레코드는 데뷔앨범부터 모두 3장의 앨범을 발표했던 일렉트라 레이블 시절의 녹음들을 담고 있다. 첫 곡인 '나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으리I Ain't Marchin' Anymore'는 그의 초기 반전노래 중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아직 베트남 반전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발표된 곡이라 '일반'적인 의미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밥 딜런의 대표적인 반전가요 '신은 우리의 편With God On Our Side'처럼 미국의 역사적인 전쟁을 차례로 언급하는 구성이다. 다만 밥 딜런의 노래가 반어법적인 표현을 통해 미국의 뻔뻔함을 드러내는데 비해 필 옥스는 직설적인 가사로 미국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노래하고 있다. 이어지는 '징병기피자 랙Draft Dodger Rag'도 당시 미국의 징병제와 군사정책을 비판한 곡이다.

'리처드 닉슨의 나라에서Here's to the State of Richard Nixon'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자신의 초기 발표곡인 '미시시피주에서'를 개사해 다시 녹음한 곡이다. '미시시피주에서'는 당시 만개했던 흑인민권운동을 지원하는 노래였다.

'종들The Bells'는 에드가 알렌 포의 시에 필 옥스가 노래를 입힌 것이고, '영광을 향한 기차여행Bound For Glory'은 우디 거스리의 자서전에서 모티브를 따온 노래다. 모든 모던포크운동의 순례자들이 그렇듯이 필 옥스 역시 대학시절 만난 우디 거스리의 음악과 글을 통해 포크의 미학과 미국의 역사에 대해 눈을 떴다. '영광을 향한 기차여행'은 신출내기 포크 가수로서의 신앙고백이자 예언가에 대한 찬가에 해당하는 노래다.

'운이 없었더라면There But For Fortune'은 존 바에즈의 노래로 유명하지만 필 옥스가 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부터 첫 번째 레코드의 마지막 노래인 '내가 떠날 때When I'm Gone'까지의 7곡은 모두 그의 세번째 앨범이자 일렉트라 레이블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필 옥스 콘서트Phil Ochs in Concert"에서 뽑은 것이다.

"필 옥스 콘서트" 앨범은 커버 뒷면에 8편의 마오쩌뚱 시를 영역으로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옥스는 '(이런 시를 쓰는) 사람이 우리의 적이란 말인가?'라는 문구를 함께 적어놓았다.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주석과 악수를 나눈 것은 6년 뒤의 일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으로 대중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은 '나는 리버럴이에요Love Me, I'm a Liberal'이다. 이후로 필 옥스의 무대에 가장 자주 등장했던 곡이기도 하다.

케네디의 죽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듯이 흐느끼지만 말콤X의 죽음은 이해하지 못하는, 흑인민권운동에는 열정적이지만 그들이 옆집으로 이사오는 것은 꺼려하는, 사회운동에 참여하지만 혁명에는 거부감을 가지는, 노동조합의 간부직에서 공산주의의자들이 축출되는 것을 지지하고 한국전쟁에서 빨갱이들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하는 자칭 '민주당 진보파'들을 꼬집은 노래다.

필 옥스는 산별노조인 '미국방송예술인연맹AFTRA'의 조합원이었다.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포크가수는 많았지만 조합원증을 바지에 넣고 다니는 가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 1965년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캠퍼스에서 열린 베트남반대집회에서 노래하는 필 옥스(무대 위)
두 번째 레코드는 67년 A&M 레이블로 이적한 뒤의 작품들을 담고 있다. 레이블의 교체는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당시 대부분의 포크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기타와 완성된 밴드의 지원을 받은 음악으로 전환했다.

다소 저음의 목소리로 경쾌하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무기였던 그의 음악은 이제 바로크 스타일의 편곡이 덧붙여졌다. 거주지도 미국 동부에서 캘리포니아로 옮겼다.

두 번째 레코드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베트남 반전가요인 '전쟁은 끝났다The War Is Over'이다. 필 옥스가 활동에 변화를 준 67년은 미국사회운동의 주축이 민권운동에서 반전으로 이전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는 여전히 무대뿐만 아니라 각종 집회와 행진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불렀는데 '전쟁은 끝났다'는 일반 시위대의 입에서도 자주 불리어졌던 노래였다.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기 직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거의 마지막 반전집회에서 필 옥스는 10만명의 시위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불렀었다. 운동의 종결을 상징하는 의식으로는 손색이 없는 무대였다. 그의 마지막 무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앨범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노래 '명성의 코드Chords Of Fame'는 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부와 명예를 위해 노래하는 상업적인 음악을 경계하는 곡이다. '인디애나의 짐 딘Jim Dean of Indiana'은 어린 시절 그의 스크린 영웅들 중 한명이었던 제임스 딘의 무덤을 직접 찾아가서 만든 노래다.

마지막 곡인 '노래는 이제 그만No More Songs'은 사실상의 마지막 앨범인 1970년의 "그레이티스트 힛츠Greatest Hits"의 끄트머리에 실려 있다. 앨범은 제목과 달리 새로 발표하는 곡들을 모은 역설적인 유머였다. 필 옥스는 미국의 구세대와 신세대, 보수와 진보, 과거와 미래가 정면충돌했던 1968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집회장 안으로 진입해 항의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거리에서 체포돼 잠시 구류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를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투쟁의 실패는 그를 극한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1970년 그는 초기 록큰롤을 흉내내는 음악스타일로 대중 앞에 섰다. 낡은 음악방식에 대한 회의와 대중성에 대한 고민, 운동에 대한 부담감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행동이었다. 그의 '변신'에 대해 찬반양론이 일었지만 논란보다는 외면의 비중이 더 높았다.

이런 복잡한 심경과 미래에 대한 불안한 예언을 담은 노래가 '노래는 이제 그만'이다. 이 노래는 이렇게 끝맺는다. "이봐요, 집에 아무도 없는게요? 미안합니다. (...) 목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노래는 없는 거로군요."

* * *

필 옥스에게는 중요한 일화가 하나 있다. 1972년 세게 여행을 떠났던 그는 칠레에서 빅토르 하라와 우연히 만나 몇 일간 함께 여행을 했다. 이때의 만남은 빅토르 하라의 부인 조안 하라가 쓴 전기 "끝나지 않은 노래"에 기록되어 있다.

1973년 9월 칠레 인민연합 정부가 쿠데타로 무너지고 빅토르 하라가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옥스는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었다. 그해 말 귀국한 옥스는 즉시 죽은 친구와 대통령동지를 위해 자선공연인 "살바도르 아옌데와의 저녁An Evening with Salvador Allende"를 기획했다.

1974년 5월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자선공연에는 그를 비롯해 전 법무장관인 램지 클라크와 피트 시거, 밥 딜런, 알로 거스리 같은 이들이 무대에 올라 칠레의 투쟁에 연대하고 쿠데타군을 비난했다. 이 무대를 시작으로 세게 각지에서는 칠레연대콘서트가 개최됐다.



I Ain't Marchin'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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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양희은 그리고 이명박

<한겨레21> 제683호 2007년11월01일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영웅의 이미지를 조작해서 대중에게 팔아먹는 자들을 떠올리다

대선이 코앞이다. 웬만큼 굵직굵직한 진영의 후보들은 다 확정된 모양이다. 그 후보들 중 아무리 봐도 이상한 사람이 있다. 의혹도 많고 그 의혹이 해명된 것도 아닌데 지지율이 당최 움직이지 않는다. 부동의 1위다. 그 후보를 지지하는 어른들에게 이런저런 의혹이 있지 않느냐, 얘기해봐도 요지부동이다. “지금 정부보다는 낫지” 정도는 양반이다. 아마도 한 드라마를 통해 신화화된 그의 이미지가 지난해의 황우석처럼이나 단단히 박혀 있는 듯싶다. 성장과 발전의 화신이고, 따라서 그가 집권하면 ‘사소한’ 부도덕이나 비리를 무릅쓰고 당장 대한민국이 1970년대처럼 쭉쭉 고도성장의 길을 걸을 거라고, 그분들은 굳게 믿어 의심치 않나 보다.

“난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목동”

△ 밥 딜런은 저항적 포크가수의 이미지에서 탈출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가족과 음악이지, 시대의 선봉에 서는 게 아니었다.

1960년대의 밥 딜런은 이미 저항의 상징처럼 여겨져 있었다. 그의 가사들은 시위대의 피켓에 인용되기 일쑤였고, 그의 노래는 집회 현장에서 울려퍼지며 새로운 시대로 가는 송가처럼 불렸다. 지금도 밥 딜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저항의 음유시인이다. 그러나 당시의 밥 딜런은 그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했나 보다. 자서전인 <바람만이 아는 대답>에서 밥 딜런은 당시를 분노에 찬 태도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새로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노래를 부른 것뿐이었다. 나는 내가 대변하게 되어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 불과 10년 전에 고향을 떠났고 누구에게도 큰 소리로 내 의견을 외친 일이 없었다. 앞날의 내 운명은 삶이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어 있었고, 무슨 문명을 대표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었다. 나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보다는 목동에 가까웠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목동으로 남겨두지 않았다. 아니,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게끔 강요하고 몰아갔다. 그래서 밥 딜런은 밤마다 집 주변으로 몰려들고, 심지어 집으로 ‘침입하는’ 히피들을 ‘퇴치하기’ 위해 라이플총을 집에 둬야 했다. 결국 그들이 집 주변을 둘러싸고 “시대의 양심으로서의 임무를 회피하지 말라”며 횃불 시위를 벌였을 때, 그는 도망치듯 이사가야 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통곡의 벽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자신을 시온주의자로 포장했고, 컨트리 음반을 내며 저항적 포크가수의 이미지에서 탈출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가족과 음악이었지, 시대의 선봉에 서는 게 아니었다.

먼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양희은이 재학 중이었던 서강대에서 집회가 열릴 때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를 어디엔가 격리시켰다고 한다. 학교에서 축제가 열리고 양희은이 무대에 오르면 역시 뒤편에서 ‘맨 인 블랙’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학생들 앞에서 <아침이슬>을 못 부르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양희은은 학교 무대에서 <아침이슬>을 부르지 않았다. 그러면 학생들은 그 자리에 드러누워 <아침이슬>을 부르라고 요구했다. 양희은은 70년대를 회상할 때마다, 자신이 <아침이슬>을 부른 건 그 노래가 좋아서였지 다른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 노래를 만든 김민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투사가 아닌, 뮤지션이라는 요지의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그들을 그런 위치에 올려놓은 건 대중이었다. 대중이란 언제나 신화를 필요로 한다.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을 필요로 한다. 현대 사회에서 신화와 영웅을 만드는 건 매스미디어다. 왜 미디어는 이미지를 조작하는가. 두말할 필요 없이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영웅담을 그럴싸하게 잘 풀어놓는 사람이 저잣거리의 인기 이야기꾼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 조작으로 매스미디어가 이익을 취하고 기득권을 지키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 밥 딜런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곳은 어디였을까. 그의 집까지 찾아가 횃불 시위를 벌였던 군중들? 아니면 그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영웅으로 추대된 밥 딜런? 그렇지 않다. 그의 음반을 찍어 팔았던 레코드사와 사소한 말 한마디를 무슨 경전처럼 취급했던 언론이다. 그에 비하면 김민기나 양희은의 시대야 이 땅의 음악 마케팅이 그리 영민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 누구 하나 큰 이익을 본 사람은 없었겠지만. 아, 그들의 음반은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으니 이익을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었으려나.

조작된 이미지는 승리를 부르는가

다시 한국 대선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미지 조작이야 사실 이번 대선만의 일은 아니다. 김대중에게 ‘DJ와 함께 춤을’이란 노래가 없었다면 선거 판세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노무현에게 ‘기타 치는 대통령’ 같은 감성 코드가 없었다면 ‘노풍’이 그리 거세게 불었을까. 이 경우에는 ‘조작’이라는 거센 단어 대신 ‘컨트롤’ 정도의 순한 단어가 무방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 저 부동의 1위 후보의 경우는 단언컨대 조작이라는 말을 써도 거리낄 필요가 없어 보인다. 보수언론에서 거의 올인하다시피 허물은 덮고 장점이라기보다는 위험 요소마저도 모두 입에 침을 발라가며 미화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를 덮고 있는 조작된 이미지가 두려운 건 그 때문이다. 밥 딜런이 그의 지지자들을 향해 엽총까지 쏘고 이사를 다니는 동안 음반사는 앉아서 돈다발을 셌다. 이명박을 둘러싼 이미지 조작이 대선 승리로 실현되는 날 가장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는 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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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개봉을 앞두고 모처럼 모든 언론이 입을 모아 영화소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바로 리안 감독의 <색,계>. 좀 과하지 않은가 싶을 정도인데, 그 소개 포인트도 언론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황색언론 계열은 노골적 정사신에 방점을 찍고 실제인가, 연기인가 같은 가십성 기사를 올리기도 한다. 아래는 리안 감독과 여배우 탕웨이의 연합뉴스 기자회견을 축약한 <한겨레신문>의 기사와 <한겨레21>의 리뷰를 함께 옮겨 놓는다(인터뷰 전문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시켜 둔 <연합뉴스>를 참조하시길)

<인터뷰> `색, 계` 주연배우 탕웨이    2007-10-29
<인터뷰> `색, 계` 주연배우 탕웨이˝다 찍고 나니 배역 캐릭터 이해되더군요˝ (서울=연합뉴스)
 
<인터뷰> `색, 계` 리안 감독    2007-10-29
<인터뷰> `색, 계` 리안 감독˝식민 경험 지닌 한국 관객은 잘 이해할 것˝ (서울-연합뉴스)
 
<영화 색.계 남녀 주인공은 실존인물>    2007-10-29
<영화 색.계 남녀 주인공은 실존인물> (타이베이=연합뉴스)



리안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는 자매 영화”
‘색, 계’ 주연배우 탕웨이와 기자회견
출처 : 인터넷한겨레 / 연합
2007 11 02
 

 
» 29일 오전 신라 호텔에서 열린 영화 ‘색,계(色戒)‘의 기자회견에서 연출을 맡은 리안(李安)감독(오른쪽)과 여주인공 탕웨이(湯唯)가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
 

영화 '색, 계(色, 戒)'로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리안(李安) 감독은 2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주연 배우 탕웨이(湯唯)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브로크백 마운틴'과 '색, 계'는 자매 같은 영화"라고 밝혔다.

리 감독은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의 동성애와 세계 각국에서 화제를 뿌린 '색, 계'의 파격적인 정사신에 대한 질문에 먼저 "아마도 내가 중년의 위기에 봉착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답해 기자들로부터 웃음을 이끌어낸 뒤 "과거에는 사랑에 대해 보수적이고 평범한 관점을 지녀 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젊었을 때 표현하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브로크백 마운틴'의 정사신이 제약이 따르는 아픈 사랑이라 그 괴로운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면, 이번 영화는 '색'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표현했지만 주인공의 사랑을 보여주는 데 꼭 필요했다"며 "두 영화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어 자매 같은 영화"라고 강조했다.

탕웨이도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두 주인공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부분을 몸을 통해 표현하는 상황의 특수한 감정이라고 이해했다"며 "촬영 기간 초반에 11일 동안 촬영해 뒤에 찍은 다른 장면들에도 도움이 많이 됐다"고 말했다.

리 감독은 "베니스 영화제 수상 직전 미국에서 17세 이하 관객은 영화를 볼 수 없는 'NC-17' 등급을 받아 마음이 무거웠다"며 "수상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브로크백 마운틴'처럼 (미 아카데미) 감독상이 아닌 작품상을 받은 터라 스태프들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정말 기뻤다"고 밝혔다.

그는 탕웨이의 연기에 대해 "여배우가 영화를 지고 가는 인물이고 여류작가가 원작에서 여자의 강인함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캐스팅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오디션에서 탕웨이를 처음 보는 순간 바로 그 여주인공이란 생각이 들었고 영화가 완성된 뒤에도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탕웨이도 "왕치아즈는 여배우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역인데 이런 기회를 잡은 것은 행운"이라며 "8개월의 촬영 기간에 마음 속에 숨겨진 것들을 뽑아내 깨뜨려 준 감독에게 감사드린다"고 화답했다.

그는 "리 감독은 배우들에게는 교장 선생님이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표현해 보자'는 내용의 수업을 함께 들었다"고 덧붙엿다.

탕웨이는 또 상대역으로 연기한 량차오웨이(梁朝偉)에 대해서는 "나를 한번도 신인으로 대한 적 없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도록 이끌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조언해 준 배우"라며 "그로부터 진정한 배우의 자세를 배우게 됐고 그는 앞으로도 배우로서 나의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색, 계'는 1930~1940년대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항일운동을 하는 여성 스파이와 첩보 대상인 친일파 고위인사 간의 사랑을 그린 에로틱 스릴러다.

(서울=연합뉴스)


색에 빠진 자, 계를 잃을지니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21> 제683호 2007년11월01일


친일파 대장과 저항군 스파이의 사랑 그린 ‘리안표’ 영화 <색, 계>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대한 오래된 혹은 해묵은 주제다. 이렇게 해묵은 주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데, 리안 감독만큼 적임자도 드물다. 고급스런 대중영화의 장인이자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자인 리안 감독은 오래된 이야기 혹은 통속적 사랑을 사랑이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둔다. 그리고 희열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물의 표정을 날카롭게 잡아내 관객의 마음을 후벼판다. 불가능한 사랑만큼 사랑의 애절함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사랑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는 처연했다. 리안이 이번엔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일본에 점령된 상하이, 친일파 정보부 대장과 그를 암살하려는 여성 사이에 불가능한 사랑이 시작된다. 리안의 <색, 계>(色, 戒)는 서로를 경계(戒)하지만, 서로의 색(色)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본의 침략을 피해서 홍콩으로 피난온 왕치아즈(탕웨이)는 외롭다. 그의 친구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그도 자신의 운명을 저항운동에 맡긴다. 밀수업자의 아내인 막 부인으로 위장해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량차오웨이)의 부인(조안첸)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의 암살. 어렵게 이 부부에게 접근하지만 갑작스레 부부는 상하이로 돌아가버린다. 사실 왕치아즈는 암살의 주모자인 광위민(왕리훙)을 연모해 암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왕치아즈는 상처만 받는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흐른다. 광위민이 다시 왕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또다시 막 부인이 돼 이에게 접근한다.

적을 유인하며 연인을 유혹하는 마음

이제 모든 행위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막 부인의 행위는 이에 대한 유인이자 유혹이다. 적을 유인하는 일이자 연인을 유혹하는 행위다. 막 부인은 어느새 자신이 죽여야 하는 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색(色)은 계(戒)를 무장해제시켜버렸다. 이의 거친 숨결은 막 부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달구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진실마저 모호하다. 나의 편인 저항군은 나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적인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를 이용하는 자와 나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가 모호하다.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영화관이 어두워서 영화를 보러가지 않는다는 이도 외롭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던 이는 의심에 지쳤다. 그래서 이는 막 부인을 “믿는다” 보다는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행위는 역설이고, 모든 말은 모호하다. 막 부인은 저항군에게 당신들이 그를 죽여버리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그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부터 사랑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처음으로 이를 만나고 돌아온 왕치아즈에게 친구가 묻는다. “어떻게 생겼어?” 그는 “상상하곤 다르다”고 대답한다.

적나라한 섹스신엔 체념과 위로가

리안의 영화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색, 계>는 집요한 상반신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감정을 잡아낸다.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집요한 클로즈업을 끝까지 견뎌낸다. 20여 년을 연기한 량차오웨이도, 첫 번째 영화에 출연한 탕웨이도 완벽하게 리안의 인물로 변신한다. 미인대회 출신인 탕웨이는 미모보다는 연기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조연배우 누구나 자신의 연기를 해낸다. 이렇게 완벽한 연기에 담긴 무심한 행동이나 스쳐가는 말들은 영화의 공기를 서서히 물들인다. 어느새 쌓인 먼지처럼 어느덧 켜켜이 쌓인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색, 계>는 ‘리안표’ 영화다. <색, 계>는 스캔들의 영화다. 적나라한 섹스신이 화제를 모았고, 성기와 음모 노출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30분가량 삭제된 채로 상영됐고, 미국에서도 17살 이하 관람금지 등급(NC-17)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제한상영 판정을 받지 않고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세 번의 섹스신은 색에 굴복해 계를 포기한 자의 체념한 표정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쓰다듬는 위로로 남는다.

오늘날 리안만큼 종횡사해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독은 드물다. 서양과 동양, 시대극과 현대물, 이성애와 동성애, 리안은 무엇을 만들어도 대중성과 작품성의 접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왔다. 리안은 뉴욕에 사는 동양인 게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던 <결혼 피로연>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아이스 스톰>에서 1970년대 미국 중산층의 해체를 그렸던 리안은 <와호장룡>으로 홀연히 옛날의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으론 19세기 영국 배경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도 영화로 옮겼다. <색, 계>는 리안이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에 다시 중화권 감독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다. <색, 계>로 그는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2년만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장을 받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색, 계>는 중국의 여성소설가 장아이링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관진펑(관금붕)의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 허우샤오셴의 <해상화>도 장아이링의 소설이 원작이다. <색, 계>는 11월8일 개봉한다.


張學友 - 淹沒 (Lust Caution theme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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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사신 직접 디자인…남녀 역할 고민 힘들었다
영화 ‘색, 계’ 이안 감독
 출처 : <인터넷한겨레> 2007 10 29  김소민 기자  

» 영화 ‘색, 계’ 이안 감독
 
 
‘적’과 사랑에 빠진 남과 여
끌림과 거부사이 갈등 다뤄
말보다 몸이 더 많은 메시지


대만의 이안(53) 감독은 동·서양의 언어로 두 문화권 모두에서 평단과 대중에게 사랑받는 독특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올해 <색, 계>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두 번째 탔고, 베를린 금곰상 2번,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그의 영화들은 매번 새로운 장르로 나아가고 문화적 경계를 넘어선다. <음식남녀> <결혼피로연> 등 초기작에서 아시아인이라면 공감할 만한 전통과 서구 문물 사이 갈등을 코믹하게 잡아내더니 할리우드로 진출해서는 <아이스 스톰> 등으로 서구사회를 탐구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헐크> 다음엔 전혀 다른 중국 무협영화 <와호장룡>이, 그뒤엔 미국 서부를 무대로 삼은 멜로물 <브로크백 마운틴>이 따라온다.

1940년대 친일파 정보부 고위직 이(량차오웨이)와 그를 죽이려는 스파이 왕치아즈(탕웨이)의 사랑을 다룬 <색,계>는 그가 이제까지 그린 적이 없는 수위의 정사 장면을 담은 격정적인 멜로물이다. 29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항전 시기 여성의 강인한 사랑, 여자 주인공이 자기와는 다른 인물로 가장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며 “색, 계는 원하는 대로 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물리치려는 마음을 뜻하는데 이 두 가지는 복합적으로 얽혀있다”고 설명했다.

<색, 계>에서는 말보다 몸이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사 장면에 대해 설명하며) 내가 심각한 중년의 위기에 봉착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웃음) 옛날엔 굉장히 보수적이고 평범한 생활을 했다. 젊었을 때 표현하지 못햇던 것, 경험하지 못한 것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색, 계>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억압됐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격정적인 정사 장면이 필요했다.” 주연여배우 탕웨이는 “모든 동작은 감독이 직접 디자인했고 각 동작은 왕치아즈와 이 선생 사이 감정의 발전 과정을 드러낸다”고 덧붙였다.

<색, 계>는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과 닮은 점이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동성애 연인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서로를 향한 강렬한 끌림과 거부를 반복한다. <색, 계>는 시대적 상황과 처지가 사회적 편견을 대신한다. 그리고 두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는 깊은 상실감이다. 이 처연함을 표현하는 데 배우 량차오웨이의 저력이 큰 구실을 한다. “악역, 중년, 베이징어로 말하는 이 선생 캐릭터는 그가 처음 도전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는 보다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했다.”

여주인공 탕웨이는 <색, 계>가 데뷔작인데 량차오웨이에 비해서도 기울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공개모집 때 1만명 넘는 배우들이 오디션을 봤다. 탕웨이는 겉으로는 부드러웠지만 강인한 내면을 지녀 주인공과 비슷했다. 탕웨이는 강한 훈련 과정을 잘 따라와줬다.”

갖가지 장르를 넘나들지만 그의 영화에는 대부분 흔들리는 정체성 문제가 어렴풋이 스며있다. “정체성이 불확실한 왕치아즈는 (스파이라는) 배역을 맡아 자신을 찾으려 한다. 좋은 여자 왕치아즈는 배역을 통해 나쁜 여자도 되고 싶었던 거다. 왕치아즈는 영화에서 여러 장르를 빌어와 이야기를 하는 (감독으로서) 제 모습을 닮은 것이다. 실제 나는 왕치아즈에게 불씨만 던져준, 부끄러움을 타고 무능력한 꼭두각시 영웅 광위민(왕리홍)을 닮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명령하며 연출할 때는 이 선생과 비슷하다. 나의 두 분신 사이 정사 장면을 찍을 때는 남자 역할 여자 역할 다 고민해야 해 너무 힘들었다. 량차오웨이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많은 분신을 가진 당신에게 굉장히 동정이 간다’며 위로해줬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올댓시네마 제공


내오랜꿈 -----------------------------------------------------------------

이안 감독. 도대체 그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센스 앤 센스빌리티>에서 <음식남녀>로, <아이스 스톰>에서 <와호장룡>으로, 다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색, 계>까지...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존경스럽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래 글은 <씨네21>에 실린 <색,계>의 제작노트이다. 영화의 줄거리가 상세히 언급되고 있으므로 스포일러의 위험이 있으니 '클릭'은 심사숙고해서 하시도록...

http://www.cine21.com/Movies/Mov_Movie/movie_detail.php?s=note&id=2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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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0-3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색깔을 알 수 없는 감독. ㅎㅎ 그래도 저는 결혼피로연이 제일 좋던데요.
잘 올라갔어요. 저녁에 올줄 알았더니 끝내 안나타나더만....

내오랜꿈 2007-10-31 10:25   좋아요 0 | URL
갔으면 니네들이 얼마나 피곤했을까? ㅎㅎ

위의 기사에서 언급되지만 이안 감독은 동서양의 문화적 '경계'를 넘어선 감독 같애. 아마 주류 미국인 감독한테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연출하라 해도 제대로 만들기 힘들기 힘들텐데 말이야. 그래서 당시에는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이안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엠마 톰슨의 영화라는 뒷담화가 많았었지. 물론 엠마 톰슨이 영국의 인텔리 출신 배우니까 그런 소리가 나왔겠지만...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엠마 톰슨의 영화라는 말은 틀린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