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겨울 <디아스포라 기행> 출판 등의 일로 서울을 방문하기 전 서경식 교수는 돌베개 편집자 김희진씨로부터 기획중인 대담집 파트너로 깁상봉 교수를 만나 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서 교수는 <만남>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 조선민족의 일원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삶의 대부분을 ‘바깥’에서 보낸 나는 인생이 끝나기 전에 언젠가, ‘내부’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나의 희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김희진씨가 김상봉 선생님을 알맞은 대화 상대라며 추천해준 것이다.” 김씨는 “김상봉 선생이 서양철학을 소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사유를 진지하게 전개하고 있는 철학자로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었다는 것, ‘학벌 없는 사회’ 등을 통해 사회적 실천에도 적극적이라는 것,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지나가고 대부분의 지식인이 방관자가 되어버린 현재의 한국에서 보기 드문 참여형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 등을 예비지식으로 알려주었다
김 교수와 서 교수의 인연도 각별하다. 한때 학생운동에도 가담했던 김 교수는 서 교수를 “역사가 남긴 화석”과도 같다며 두 사람의 만남을 한 개인과의 만남이 아니라 “역사와의 만남”으로 고대했다. 당시까지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김 교수가 독일에 유학 중이던 1990년 어느날 <한겨레>에 보도된 서 교수의 둘째형 서승씨(현 리쓰메이칸대 교수)가 19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했다는 기사를 본 뒤부터 시작됐다. 기사엔 체포 당시 서씨가 고문에 못 이겨 죄없는 친구들 이름을 발설할까 두려워 석유난로를 껴안고 분신을 기도해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것은 김 교수에게 “한 시대의 환유로서 마치 심장에 총탄처럼 지나간 역사의 고통을 잊을 수 없도록 내 속에서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는 트라우마”였고 “인간성의 숭고를 증언하는 사건”이었다. 그는 그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대에서 비굴함 외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김희진씨는 돌베개에서 <소년의 눈물> <난민과 국민 사이> <디아스포라 기행>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 이어 이번 책까지 모두 5권의 서 교수 책의 번역판 편집을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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