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삶’에서 길어올린 ‘변혁의 꿈’
12세기 성화에서 21세기 현대화까지 150장 도판으로 한눈에
격변의 역사 속 삶 담아내고 바꾸려는 반체제적 특성 돋보여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28


» 러시아 이동파 대가 일리야 레핀(1844~1930)의 기념비적 작품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1873). 레핀은 ‘지혜롭고 강인한 민중의 현자’(왼쪽 두번째), ‘누적된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네번째), ‘미래를 향해 눈을 돌린 소년’(여섯번째)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러시아 민중의 모습을 담았다.

〈러시아 미술사〉
이진숙 지음/민음in·2만2000원


오랜 세월 ‘철의 장막’에 갇혔던 러시아 미술의 놀랍도록 풍요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1년 전 이맘때 나온 미술평론가 이주헌씨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낯선 세계의 장대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미술 연구자 이진숙씨가 쓴 〈러시아 미술사〉는 가장 추운 나라에서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특별한 예술 정신 깊숙한 곳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책이다. 이주헌씨의 책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관을 여행하는 사람의 눈길로 첫 경험의 설렘을 생생하게 전해준다면, 이진숙씨의 책은 12세기 이콘화(성화)에서부터 21세기 현대화까지 두루 아우르며 러시아 미술의 역사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게 해준다.

동시에 이 책은 150장에 이르는 도판을 활용해 각 시대 화가들이 창조한 작품의 풍성하고도 독창적인 세계에 독자를 마주 세운다. 지은이의 문학적 필치는 그 화가들이 품었던 열정을 끄집어내 그 열정의 빛깔과 강도를 생기 있게 묘사한다. 애초 독문학을 공부했던 지은이는 러시아 여행 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그림 작품들에 ‘충격’을 받아, 평생의 업을 등지고 러시아 미술을 새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날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나에게는 신천지가 열렸고, 인생이 바뀌었다.”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강렬한 힘, 러시아 미술 작품들이 뿜어내는 그 힘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은이는 민속학자 니콜라이 르보프의 말을 빌려, 러시아 문화의 핵심을 ‘격렬한 삶’이라고 요약한다. ‘격렬한 삶’은 그대로 러시아 미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러시아 미술은 고통·분노·열정·희구와 같은 ‘격렬한 삶’이 일렁이는 바다다. 삶이야말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이고 목표다. 러시아 화가들의 열망은 삶과 예술의 일치,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한 삶의 구현에 있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러시아 미술의 출발점을 이룬 것은 이콘화였다. “이콘화가 없는 러시아는 상상할 수 없다. 강력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과 늦은 근대화로 러시아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오랫동안 이콘화의 전통이 유지됐다.” 수도승으로서 성화를 그렸던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15세기 러시아 이콘화의 정점을 보여준 사람이다.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걸작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절실하게 그려냈듯이, 루블료프는 러시아 민중의 절절한 소망을 종교화로 형상화함으로써 ‘러시아적 회화’의 한 고원을 이루었다.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러시아 미술은 결정적 방향 전환을 이룬다. 급진적 서구화를 밀어붙였던 이 냉혹한 차르는 이콘화 중심의 러시아 미술 세계를 일변시켰다. 서유럽의 화가들을 초빙하는가 하면 유망한 젊은 화가들을 서유럽으로 유학시킴으로써 러시아에 처음으로 ‘근대적 화가’가 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표트르 대제 이후 프랑스식 궁정문화가 번창하고 로코코풍의 미술양식이 퍼졌다.

» 〈러시아 미술사〉
그러나 이런 껍데기만의 근대화는 러시아 민중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낳았다. 이어 1825년 터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이 자각이 사회변혁의 열정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젊은 귀족들이 참여한 이 반란을 통해 러시아 특유의 반체제적 지식인, 곧 인텔리겐치아가 탄생했다. 러시아 미술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변모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도구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화가들의 창작 규범이었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1870년 결성된 ‘이동파’였다.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는 지점이다. 이동파란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동파는 말하자면,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다. 1923년까지 존속한 이동파는 세계 미술운동사에 유례없는 실험이자 성과였다. “이동파는 정치적·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에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이동파가 활동을 시작한 1870년대에 서유럽 미술의 중심지 파리에서는 인상파가 최초로 전시회를 열었다. 많은 러시아 화가들이 파리 유학을 다녀왔지만, 이들은 인상파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빛의 묘사’가 아니라 ‘민중의 삶’이었다. 그러나 이동파의 초기 양식은 아직 회화의 기술적 측면에서 완벽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이동파 운동의 지도자 이반 크람스코이는 인상파와 이동파를 이렇게 선명하게 대비했다. “그들(프랑스 인상파)에게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다. 우리(러시아 이동파)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 이 난점을 해결한 사람이 일리야 레핀이었다. 레핀은 1873년 작 〈볼가 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로 러시아 이동파의 창조성을 극점으로 끌어올렸다. 레핀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이 대작에서 회화의 형식을 일신시킴과 동시에 민중의 강인한 삶을 극적으로 구현했다. 레핀의 풍속화에는 러시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의 꿈이 내장돼 있었다. “레핀의 모든 그림은 레핀 개인만의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미술 전체의 진보였다.” 그 정신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을 통해 20세기로 이어졌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구성주의는 그 정신의 혁명성이 최고의 형태로 드러난 운동이다. 이 전위 운동들은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형식 실험 속에 러시아 혁명의 이념을 담았다. 지은이는 이들의 운동을 이렇게 평가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의 미친 듯한 창조의 열정은 1917년의 혁명 분위기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솟구쳤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보다 더 강력하고 뜨겁게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고 동시에 갱신하려는 열정은 세계 미술사 어디에도 없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
고골·톨스토이 등 유명작가와 작품에서 큰 영향 받아

고명섭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28


»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문학이 모델’

“19세기 러시아 미술가들은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들이다. 러시아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당대 러시아의 삶 자체였다.” 러시아 미술의 이런 특성은 문학에 빚진 바 컸다. 19세기 러시아 문화를 이끈 것은 문학이었다고 이진숙씨의 〈러시아 미술사〉는 말한다. “푸시킨·고골·도스토옙스키(그림 가운데)·톨스토이(오른쪽)·투르게네프·오스트롭스키 등 위대한 작가들이 러시아 지성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엄격한 검열이 이루어지던 이 시기에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도 급진적인 논의들이 문학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러시아 미술은 문학으로부터 ‘이야기 특성’만 빌려온 것이 아니었다. 미술은 문학과 내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고, 작가와 작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그런 영향이 처음으로 나타난 그림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다. 20년 세월을 바쳐 1858년에 완성한 이 대작에 이바노프는 작가 고골의 얼굴을 새겼다. 희곡 〈검찰관〉(1836)에서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했던 고골은 이후 점차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졌다. 현실에서도 예술 속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 고골리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는데, 이바노프는 자신의 그림에서 고골리의 그런 마음 상태를 표현했다.

이동파를 이끌었던 이반 크람스코이(왼쪽)는 체르니??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삶의 모델로 삼았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크람스코이는 이 반란에 가담한 13명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묘사된 혁명가들의 이상적 공동체를 본보기로 삼아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가 이동파의 모태가 됐음은 물론이다. 크람스코이는 레프 톨스토이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어 그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안나 카레니나〉에 감명받아 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를 닮은 〈미지의 여인〉을 그렸다.

이동파의 대미를 장식하는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톨스토이의 소설 주제를 그림으로 옮겼다. 그의 대표작 〈삶은 어디에나〉(1888)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산다고 말한다.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는 죄수 호송열차에 탄 정치범과 그 고난의 길에 동행한 가족을 보여준다.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는 열차가 잠시 멈추어 서 있다. 젊은 죄수의 아기가 호송열차의 창살 밖으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준다. 모이를 먹는 비둘기를 보여 잠시 기쁨의 미소를 짓는 죄수와 아내와 아이는 성가족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승리를 성취했듯 그들은 어디에서나 삶을, 생명을 발견할 것이다. 비둘기들이 모이를 다 먹기도 전에 기차는 유형지를 향해 덜컹거리며 떠날 것이다. 죄수를 싣고 떠난 기차는 더욱 단련된 혁명 전사를 싣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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