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 참꼬막


 

설날을 앞둔 일요일, 아침을 먹고 드라이브 삼아 나선 길은 고흥 유자밭을 거쳐 벌교에 이르렀다. 벌교 역앞을 들어서자 제철을 맞은 꼬막들이 가게마다 망태기에 가득 쌓여있다. 이곳에서는 이즈음 여느 식당에서나 맛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꼬막이다. 이곳 벌교를 무대로 시작되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이 꼬막맛을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태백산맥>에서 묘사된 꼬막 채취과정은 그야말로 삶의 애환이 그대로 묻어난다. 멋모르는 여행객에게는 카메라 셔터의 대상으로 보일만치 아름다운 보성만의 겨울 낙조 속에 오로지 여인네들의 고된 노동으로 채취되는 과정을 그린 '염상진의 애상'은 수북이 쌓인 꼬막 더미를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만든다.

"꼬막은 찬바람이 일면서 쫄깃거리는 제맛이 나기 때문에 천상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었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도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을 잡아야만 하루 목숨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인네들은 살을 찢는 겨울 바닷바람에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 맨살을 드러낸 채 뻘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소금물을 머금은 뻘의 차가움을 얼음물의 차가움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끈적끈적하고 찐득찐득한 뻘은 장딴지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빠지게 해서는, 그대로 물고 늘어졌다. 뿐만 아니라 뻘 속에는 여러 종류의 조개들이 박혀 있어서 그 껍질들이 예고없이 다리를 긁어댔다. 한차례 뻘일을 하고 나면 조개껍질에 긁힌 상처가 일삼아 바늘로 긁어놓은 것처럼 온 다리를 실핏줄로 감고 있었다. 앞이 휜 널빤지 위에 왼쪽다리를 무릎꿇어 몸을 실리고, 왼손으로 단지오 흰 널빤지끝을 함께 잡고, 오른발로 뻘을 밀며 오른손으로 꼬막을 더듬어 찾는 겨울바람 속의 여인네 모습은 그대로 극한에 달한 빈궁의 표본이었고, 모진 목숨의 상징이었으며,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이었다." - 소설 <태백산맥>4권 중 PP72~73 -



제철인 줄은 알았지만 처음부터 벌교꼬막을 먹으러 갔던 것은 아니다. 고흥 읍내의 식당들이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아서 나오는 길에 점심 해결할 곳을 찾다보니 벌교가 선택된 것 분이다. 벌교역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찾아간 <역전식당>. 꽤나 알려진 곳이다.



벌교 읍내의 식당 대부분이 오래된 한옥을 개조하여 손님들은 방 안에서 상을 받는 구조다. 실내에 자리가 없어서 탁자가 몇 개 놓인 협소한 실외에 가방을 내려놓고, 꼬막정식(만원/일인분)을 주문했다. 찬바람이 불어야 제맛이라지만 계절에 관계없이 벌교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밑반찬으로 꼭 나오는 것이 이 꼬막이다. 이곳은 짱뚱어탕 전문집으로 짱뚱어탕과 전골이 유명한데, 아무래도 제철(여름)이 아니기에 꼬막정식을 시킨 것이다. 유명인이 찾은 식당임을 과시라도 하듯, 벽 곳곳에 다녀간 인사들의 사인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 도배된 인사들의 면면을 구경하고 있는데, 너무 이르다 싶을 정도로 굴과 꼬막이 반반 섞인 해물전과 된장국부터 상으로 배달된다.




연이어 통꼬막, 양념꼬막, 회무침이 차례로 깔리기 시작하면서 금방 상이 가득찬다.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참꼬막을 안주 삼아 고흥에서 사온 유자 막걸리 한 모금을 들이키니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에라, 운전은 모르겠다, 선언하고 차키를 아내한테 인계하고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다. 아내에게도 벌교읍내를 한 두 시간 거닐고 가자며 한사발을 따라주니 좋아라 하며 마신다.



그 재료가 무엇이건 무엇이건 새콤달콤하게 갓 버무려낸 무침의 맛이야 일러 무엇하랴. 더구나 막걸리 식초를 소스로 삼은 초무침이라면 더더욱. 양푼이에 김가루랑 참기름 넣어 슥슥 비벼 먹으면 제격일 것 같은데, 통꼬막과 양념꼬막으로 막걸리 한 통을 비우고 난 뒤라 더이상 덜어갈 여유가 없기에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며칠 뒤, 여수에서 설을 쇠러 상경하는 길에 일부러 벌교시장에 들렀다. 그 일주일 새, 10kg에 사만원이던 참꼬막(새꼬막은 참꼬막의 반가격)이 설 대목을 맞아 육만원으로 올라 있다. 한 망을 사서 서울의 가족들과 먹기에는 많은 양이라 이만원어치만 구입하여 가지고 올라가서 직접 삶아 보았다. 너무 삶아 버리면 말라서 쫄깃한 맛을 잃어 버리기 때문에 몸체가 줄지 않고 탱탱하니 잘 삶아내기 위해 불 앞에서 심혈을 기울인 결과 그런대로 벌교 식당들 흉내내는 수준은 되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아마도 3월 말까지는 꼬막이 제철일 것 같으니, 먹고 싶거든 여수로 오시길. 내 벌교에서 구해다 삶아 놓을 테니....

2007년 2월 21일

여수에서


쇼스타코비치 왈츠 No.2-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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