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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 아버지 ㅣ 한국대표시인 49인의 테마시집
고두현 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10월
평점 :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한국대표시인 49인의 아버지 노래~
아버지를 주제로 한 시집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를 읽으며 지난 번에 읽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시집 〈흐느끼는 밤을 기억하네〉를 서가에서 끄집어냈다. 모두 나무옆의자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대표 49인의 테마시집이다. 지난 번에는 한 권의 책에 어머니를 주제로 한 시집을 만난 기뻐했고 한국대표시인 49인을 알게 된 것에 감사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주제로 쓴 시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여러 감정을 체험할 수 있어서 감사했고 힌국의 대표시인 49인을 만난 것도 행복이다. 아쉬운 점은 이번에는 남성 시인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딸로 살면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아들로 살면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서로 다를진데.
탈관을 하고 삼베에 싸인 당신의 주검이
흙구덩이 속으로 던졎던 그 매장의 기억만큼
강렬한 경험은 아직 없지요.
내 인생을 열어준, 그 열쇠가 형상을 여의고 사라졌을 때
사라진다는 것이 슬픔인 줄은 한참 뒤에 알았죠.
(중략)
깊이 생각해보면, 그래요
이젠 당신이 다른 몸이 되어, 보랏빛 엉겅퀴로 피고
고추잠자리, 혹은 송장메뚜기로 날아다닐 때
출생의 그것은 물론
사라짐의 암흑과 신비마저 이해하도록
당신이 건네준 무형의 열쇠를 나도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야겠죠.
-고진하 '사라진 별똥별처럼' 중에서
한 권에 담긴 한국대표시인 49인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 제각각이어서 서로 달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영웅이나 위인에서 점점 쇠락하는 육신의 늙은이로 그려져 있지만 정신만은 가장의 무게를 진 책임감으로 무장되어 있는 모습이다. 물론 아닌 아버지도 있지만.
시 속의 시인의 아버지들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듯하다. 육신의 껍질이 흙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고, 바람이 된 이후에도 시인의 아버지는 늘 아들 곁에서 생전의 말씀을 녹음기 돌리듯 되풀이 하고 있다. 회한에 젖은 아들의 목소리에 시인의 아버지는 화답한다. 시인들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부재의 슬픔, 투정이나 자책을 할 때마다 아버지는 마치 살아계신 듯 울리는 음성을 들려준다. 점점 희미해지지만 여전히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음성으로.
꽃은 어떻게 해마다
혈색을 기억해내는 걸까?
나는 작약만 보면
속살을 만지고 싶어진다
- 박후기 '작약과 아버지' 중에서
만삭의 하늘이 능선 끝에
제 내부의 붉은 어둠을 쏟아내는 시간까지
나 한 번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그 먼 강의 배후까지를
의심하였다 의심할 때마다
계절이 바뀌어 그 이듬의 나뭇가지
젖은 손끝에 별들이 저무는 지평까지 나는 자라고
풍찬노숙의 세월을 따라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류근 '세월 저편' 중에서
누구나 유한한 인생이기에 언젠가는 죽은 자가 되고 죽은 자의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죽은 자가 간 주소나 연락처를 모르기에 누구나 떠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더욱 절절한 게 아닐까. 형상과 유전자, 삶의 모습까지도 아바타처럼 뿌려주고 가는 아버지이기에 아들 시인은 아버지가 건네 준 손길과 미소, 엄한 꾸짖음까지 기억하며 슬픔과 회한에 잠기나보다.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저자가 남성 시인들로만 이뤄진 시집이다. 아버지를 테마로 쓴 아주 특별한 책이다. 아직 살아있지만 미래체험을 하듯 아버지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셨던 내 아버지도 이젠 뼈가 살을 먹었나 싶을 정도로 말랐지만 아직 눈의 힘은 펄펄나기에 옛말처럼 살아계실 때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 아주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