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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 - 암을 치유하며 써내려간 용기와 희망의 선언
이브 엔슬러 지음, 정소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펼치는 엔슬러의 암 치유기~
소리 없이 찾아오는 암이지만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에서는 하나같이 건강한 먹거리, 좋은 물과 공기,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이 암 예방을 돕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언젠가는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건강한 먹거리로 편안하게 살고 있다면 암과 친해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크다면 이후에라도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브 엔슬러는 전 세계 6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폭력과 고통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는 극작가이자 봉사를 하는 활동가다. 그녀는 이슬람 지역에서 부르카를 입고 매질 당하는 여성, 부엌에서 산을 뒤집어 쓴 여성, 잠자리에서 들볶이는 여성, 반송장이 된 채 내버려진 여성을 만나 고통의 소리를 듣고 피해 여성들을 위해 봉사를 해왔다. 아프리카에서는 강간당한 여자들, 나이든 남자에게 성적 고통을 받는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도 해왔다.
그러다가 2010년 3월 저자는 자신의 몸에 자궁암이 생겼음을 알게 된다. 이후 암은 간, 직장 등에까지 전이되었기에 결국 수술을 받게 된다. 직장과 결장 일부분, 자궁, 난소, 나팔관 등을 도려내는 큰 수술을 받은 후 인공 항문을 달고 두 개의 주머니도 차고 암 치유를 위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 책에는 그 7개월의 암 치유여정을 담았다.
저자가 암을 치유하면서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되짚어 보는 장면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어린 시절 아빠에게서 시달린 성추행의 어두운 기억이라니, 근친상간도 모자라 폭력을 행사하는 아빠, 이후 도벽과 마약, 술, 난잡한 성관계로 이어지다니. 그 상황들이 너무나 참담하다. 아빠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가장 악독한 상황을 직접 접했던 그녀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페샤와르, 프리스티나, 앨라배마, 포르토프랭스, 사라예보 등에서 심각한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직접 접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니, 자신의 어릴 적 고통이 떠오르진 않았을까. 나이 든 남자의 성폭행으로 오줌을 흘리고 다니는 어린 여자, 군인에게 강간당해 다리가 부러진 노파, 여성들을 향한 폭력을 보며 분노하고 분개하고 고통스러워하던 것이 암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어른 남자라는 이름으로 폭군이 되는 모습을 직접 경험했으니, 자신이 하는 일이 암에 영향을 미쳤을 것도 같은데…….
그녀는 암 수술 후 화학치료, 미술과 수공예를 통한 소통, 정신과 상담 후 친구가 된 정신과 의사 수의 위로 등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하게 된다. 몸에 투입한 인공물을 빼내고 주머니를 없애고 다시, 콩고로 봉사를 떠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암 판정을 받은 후 7개월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를 만나니, 진통제 없이 사는 게 얼마나 행복인지,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종교적인 폭력이든, 개인적인 폭력이든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버자이너 모놀로그들이 있을까.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브 엔슬러는 우피 골드버그나 수잔 서랜든 등이 공연하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알려진 작가다. 버자이너(vagina)는 질 또는 음부를 말한다. 버지니아 모놀로그는 금기시되는 여성의 비밀스런 부위가 폭력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막기 위한 운동인 ‘브이데이’를 창설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부끄러울 수도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용기, 성폭력으로 시달리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봉사하는 열정이 모두 대단하다. 그녀의 이야기는 용기를 내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치유의 모놀로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