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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무선) ㅣ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는 동안 저는 행복했습니다. 건널목 아저씨가 정성껏 깔아준 카페트를 즈려 밟고 꼭 지난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자꾸 추억속의 누군가가 떠오르고 어렴풋이 보고도 싶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나요? 더 정확히 얼굴 생김새와 이름이라도 기억해보려 했지만 그저 씨익 웃는 모습만 스쳐 지나가더군요. 이를테면 노란 스쿨버스를 운전해주시던 콧수염 기사 아저씨, 갈 때마다 서비스로 시원한 빙수를 주시던 떡볶이 집 아주머니, 한쪽 얼굴에 큰 화상흉터가 있었던 매점언니, 뭐 그런 분들이 건널목 저편에서 자꾸 손짓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건널목을 건너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쿵쿵거리더니 길을 다 건널 때쯤 되니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여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슬픈 건 아니었어요. 솔직히 이 책이 아니었으면 평소에 생각날 분들도 아니었는걸요. 그치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게 꼭 오랫동안 헤어진 ‘그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처럼 순간 반갑고도 벅차올라 어찌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사람’과 덥썩 두 손이라도 맞잡고 얼싸안은 후 한번 울고 나서라야 말이 터져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촌스럽고 유치해도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마치 ‘그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훌쩍거리며 울었더랬습니다. 오랜만에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보았지만 끝내 달래주는 사람은 없더군요. 예, 저는 어른이니까요. 어른은 스스로를 달래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어쩌면 저는 ‘그 사람’을 만났기에 울었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는 만나기 힘들 거라는 예감에, 아니 ‘그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울음이 터진 것 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 사람’이 더 그리워지는 걸까요?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 다시는 돌아 갈 수 없는 시절들, 다시는 가볼 수 없는 곳, 하지만 너무도 그리워 언젠가는 어딘가에는 꼭 있을 것만 같은 잡을 수 없는 ‘그리운 이야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동화책, 이 한편의 이야기는 얼마나 기특한가요. 혹시 건널목 아저씨는 우리들에게 마법의 양탄자라도 깔아 주신 건 아닐까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훨훨 날아 도착한 곳, 저는 오늘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저는 김려령이라는 작가를 알 지 못했습니다. <완득이>는 귀에 익은 제목이었지만 작가의 이름은 낯설었어요. 동화는 더 이상 동화같은 시간을 잃어버린 저 같은 어른이 집어들만 한 책이 아니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이죠. 제가 무심했습니다. 동화는 동심을 자극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동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동심을 잃어버렸는지 원래 동심이 있기는 했는지 동화를 읽기 전엔 모르는 것 일 뿐이었어요. 저에게 김려령은 낯설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동화작가 오명랑’은 꼭 옛날 옛적에 제가 나경이와 종원이 만할 때 즐겨보던 명랑만화 ‘꺼벙이’나 ‘로봇 찌빠’, ‘강가딘’ 같은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처럼 느껴졌어요. 요즘은 ‘명랑하다’는 말조차 잘 쓰지 않는 단어라 내심 반갑고도 설레었답니다. 오명랑 작가가 ‘문밖동네’라는 엄청 큰 출판사에서 나온 <내 가슴에 낙타가 산다>를 썼다는 분이니 얼추 김려령 작가의 아바타라고 해도 좋을 듯 하군요. 오명랑 작가는(이하 오작가) ‘아직 독자들에게 들려주지 못하고 가슴에 꽁꽁 숨겨둔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했어요. ‘너무 깊숙이 몸에 박힌 말처럼 툭 나와 버리는 문장’인지라 스스로 지어서 쓰지는 못할 이야기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을 이야기라 쓰지 못해도 꺼내어 보고 싶다고 했지요. 그리곤 끝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이 대신 써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래서 세상을 따스하게 하는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네요. 맞아요. 어른들은 누구나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할 가슴속 이야기가 있어요. 나이가 들면 상처도 그리움이 되지요. 작가들은 이 가슴속 상처를 남몰래 꺼내어 때로는 예쁜 포장을 때로는 섬세한 칼질을 하는 분들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작가지만, 아무리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지만 어떤 사무친 이야기는 글로는 적어낼 수 없는 암 덩어리 같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분명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 살 수 있는 거지만 그것을 없애버리면 그 사람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덩어리를 어떻게든 토해내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이야기를 가득 실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지나갈 수 있는 건널목을 설치하는 일은 아니었을까요? 아마도 스스로 이야기의 건널목이 되어 드릴 터이니 자신의 이야기를 통과한 아이들이 더 따스한 사람, 지금보다 더 온정넘치는 세상과 만나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바램은 아주 분명하게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 울면서 건너온 건널목이지만 이렇게도 행복한 기분이 되었으니까요.
이야기가 그냥 우리사회 흔한 미담같지 않고 더욱 가슴깊이 와 닿았던 건 아무래도 오작가가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생생한 체험담이라 고백했기에 더욱 그랬을까요? 오작가가 어릴 적 꾹꾹 참아버린 눈물이, 쌀과자를 맛보며 엄마를 기다리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생활보호 대상자로 이층집 지하에 오빠와 단둘이 살면서 건널목 아저씨와 조우한 일곱 살의 기억... 살면서 어떤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불행했던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도록 만들지요. 엄마는 돈을 벌러 집을 나가셨고 그 사이 아빠는 병환으로 돌아가셨고 덩그러니 남겨진 태석, 태희 남매의 눈물젖은 라면의 맛은 어땠을까요. 빈병이나 폐품을 줍는 왕거지로 불리우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던 오빠를 바라보던 동생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을까요. 다른 친구들처럼 달려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놀려주는 친구들을 혼내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서럽고 두려웠을지요. 저는 혼자 자라서 그런지 평소엔 티격태격 하다가도 동생이 싸우면 꼭 같은 편이 되주던 언니나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지금까지도 유치하게 무조건 내 편인 사람이 언제나 목마르게 그립기도 하구요. 그래서...책을 반쯤 읽었을 때야 알았어요. 오작가는 건널목 아저씨를 말하려 이야기 교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이야기 교실을 잠시 빌린 것이었다는 것을. 오작가는 건널목 아저씨를 통해 자신의 뭉쳐진 상처를 어른된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고 돌아오고 싶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김려령 작가는 오작가라는 건널목을 통해 우리를 따스한 동화나라에 가닿게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래요. 오작가가 생계방편으로 마련한 이야기 교실은 이야기가 탄생되는 작가의 또 다른 원고지였답니다. 그 입체적인 원고지 안에서 ‘그리운 건널목 아저씨’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나경이, 종원이, 소원이와 함께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 듣기 교실에 수강한 한 명의 어린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에 5시 30분 TV 시작 시간이 되면 모두 모여앉아 만화를 시청하던 그 때 처럼요. 건널목 아저씨는 ‘신호등 안전모’를 쓰고 ‘이동식 건널목’을 배낭에 매고 다니는 이상한 아저씨였어요. 아니 처음엔 만화 주인공처럼 보기엔 남루해도 언젠간 악당이라도 물리칠 근사한 힘을 가진 마법사일지도 몰라 의심을 했지요. 만화에서 보면 고물상이나 실험실 같은 데서 ‘짠’하고 변신하는 정의의 주인공들 있잖아요. 그런데 점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저씬 그런 힘세고 멋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저 아파트 팔각정 뒷길을 따라 만물 고물상에서 쓸쓸히 기거하는 떠돌이 아저씨였어요. 슬프고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거짓말처럼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찻길에 카페트를 깔아 건널목을 만들어 주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비밀스런 아저씨 였으니까요. 저는 그래도 어른이니 그쯤 되면 분명 말 못할 사연이 있을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죠. 오작가와도 어떤 사연이 있는 분이겠다, 그렇다면 건널목 아저씨는 오작가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뭐 이런 앞선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답니다.
예상대로 아저씨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분이었어요. 원래는 자동차 제조회사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아저씨 부인은 쌍둥이를 낳다가 돌아가셨고 그렇게 아프게 얻은 쌍둥이들이었지만 어이없게도 무단횡단으로 그만 잃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자식을 해치게 된 간접 범인이 된 것이죠.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요.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을 앗아가면서까지 탄생한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마저 아저씨 곁을 떠났으니 멀쩡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요. 아저씨는 더 이상 쌍둥이 자식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쌍둥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위험을 알리고자 건널목이 없는 차도를 찾아 다니신 거여요. 위험한 곳에서 온몸으로 건널목 설치를 건의하는 아름다운 일인 시위자를 자청하신 거랍니다. 저도 부모의 한사람이기에 그것은 자식을 죽게 한 가해자로서 스스로 내린 형벌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저씨는 쌍둥이 형제가 너무나 보고파서 쌍둥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경비직도 선뜻 받아 들이셨대요. 그렇게 해서 진짜 건널목이 생기면 아저씬 그 동네를 떠나곤 했답니다. 세상의 모든 건널목이 다 설치되는 그 날까지 아니 죽는 그 날까지 아저씬 가짜 건널목으로 사실 생각이었겠죠. 건널목이 없었기에 쌍둥이를 잃은 아저씨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건널목이라도 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곳도 건너진 못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쌍둥이들에게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인 건널목을 마련해주지 못한 것은, 설령 건널목이 없더라도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늘 바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어른들 일테죠. 하지만 그런 어른들은 보기에 누추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냉소를 던지고 반대로 겉모습이 화려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겁쟁이들 아닌가요. 어른인 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가슴이 답답해져 한숨이 멈추지 않았어요. 우리같은 어른들에게 이 모든 걸 배운 아이들이 바로 건널목 아저씨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어요. 쌍둥이 형제의 돈을 뺏으려던 중학생 아이들에게 아저씨가 사정없이 두들겨 맞을 때 저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인 제가 벌을 받아 실컷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많이도 아팠습니다.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하지만 ‘많은 걸 잃고도 많은 걸 주었던’ 건널목 아저씨에게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만약 근사하게 차려입고 좋은 차에 좋은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였다면 절대 쌍둥이 아이들이 돈 뺏기는 현장같은 건 발견할 수도 없었을 거 잖아요. 세상이 야속하다지만 이럴 순 없는 거 잖아요. 자식같은 아이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며 맞아야 했던 아저씨의 서러움이 복받쳐서 저는 그만 목울대가 울렁거렸습니다. 그 순간 왜 꼭 맞고도 가만있어야 했느냐 아저씨에게 묻고 싶었지만 저는 입술을 꼭 깨물었어요. 어쩐지 아저씨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거든요. 아저씬 맞으면서도 도망가는 쌍둥이 형제들을 보고 자신의 쌍둥이 자식들을 떠올렸을지 모르잖아요. 자식 먼저 보낸 아비가 잘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 맞아야 한다면 자신이 대신 맞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잖아요. 아니, 아이들에게 차라리 맞기라도 해야 쌍둥이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는 건널목 아저씨는 바보 아저씨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얼굴이 퉁퉁부어 돌아가던 아저씨 뒤에서 소리치고 싶었어요. 그치만 ‘바보’라고 부르고 나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어쩐지 더 화가 났습니다. 아저씬 그런 제 목소리에도 ‘괜찮다’ 끄덕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셨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런 바보를 알아주는 똑똑한 이웃들이 있었다는 거여요. 이 책에서 복숭아할머니와 경비아저씨, 반장 아주머니, 그리고 15층의 도희 학생이 없었다면 저는 세상을 한없이 원망했을 테니까요. 다시는 이런 나쁜 동화책은 보지 않을 지도 몰랐어요. 바보 아저씨와 똑똑한 이웃들이 사는 그리운 그곳이 우리 사는 같은 아파트 인 것도 저는 좋았어요. 사실 부끄럽지만 어른인 저만해도 옆집 이웃과는 겨우 얼굴인사만 나눈 것이 전부이거든요. 그거 아세요? 저는 아직도 한 달 전 이사 온 옆집 새댁이 건넨 사과주머니에 무엇도 채워 보내지 못했답니다. 이곳 아파트에선 다들 그렇게 서로 바쁜 척 하는 것이 아무런 흉이 되지 않잖아요. 옛날에 저 어릴 적에 서울 아파트에 처음 이사왔을 땐 아랫집 현옥이와 매일 서로 집을 오가며 쥐포도 구워먹고 핫케잌도 태워먹고 그랬는데... 엄마들은 매일 아침 모닝커피 타임을 가지셨고(그때 옆에 있다가 마지막 한 방울을 얻어먹던 재미를 아시나요?) 그러고 보니 그땐 전화도 같이 쓰고 그랬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주차장에서 서필로 땅따먹기 하다가 이집 저집에서 고등어니 된장찌개니 하는 저녁반찬 냄새가 흘러 나오면 엄마들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때 배는 엄청 고파도 친구들과 헤어지던 게 얼마나 아쉬웠던지 지금 생각하니 콧잔등이 다 시큰해지네요. 그랬어요. 건널목 아저씨가 지켜주던 아리랑 아파트 105동은 옛날에 저 어릴 적 살던 아파트의 풍경처럼 그렇게 아스라했습니다.
지금 사는 우리 아파트 501동에 건널목 아저씨 같은 분이 계시다면 세상엔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도 많구나 그래도 한번 살아볼만한 거구나, 싶어질 텐데요. 건널목 아저씨는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 귀찮고 더러워서 하기 싫은 일은 알아서 미리 해놓는 분이셨어요. 부모님이 싸우기만 하는 도희의 카운슬러가 되어주기도 했구요. 오작가 남매인 태석과 태희는 바로 건널목 아저씨를 통해 훗날 한 가족이 되는 도희를 만나게 되었다네요. 건널목 아저씨는 말 그대로 사람사는 소중한 인연의 건널목이 되어 주셨네요. 그뿐인가요. 건널목 아저씨는 오작가 남매의 지하방에 이불대신 푹신한 건널목을 깔아주고 또 한번 최소한의 안락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런 건널목 아저씨 때문에 태석오빠와 도희언니, 그리고 오작가까지 이들 모두는 건널목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응어리도 건널목 아저씨가 내민 손길 덕택에 그리운 상처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 작품을 읽고 살면서 누군가에게 건널목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답니다. 건널목 아저씨처럼 가진 게 많지는 않지만 그냥 곁에 있어도 포근한 에너지를 전해주는 사람. 누군가의 무단횡단과 어떤 이의 신호위반을 지켜주는 반가운 하얀 善의 마음. 생각해보니 세상에 그런 건널목의 손길과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는 저 건너편의 세상에 도착하기에는 언제나 두렵고 외로우니까요.
그러니까,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도착한 그곳, 동화나라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나라가 아니었어요. 오작가로 분한 김려령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동화지만 우리 사는 세상에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말해주는 듯해요. 그렇죠? 지금 건널목 아저씨는 사라졌지만 우리도 건널목 아저씨가 되어 줄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것 같아요.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 하나만 데워지면 얼마든지 위험한 그 곳에 건널목이라는 마음을 깔아 줄 수 있다고 말이어요. 그렇담 우리 ‘그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우리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건 어때요? 우리 모두는 어디선가 언제라도 다시 보고 싶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 당신은 나의 ‘그 사람’이 되고 나는 당신의 ‘그 사람’이 되어 드리는 거여요. 생각만 해도 행복해져요. 그럼 길을 가다 건널목을 발견해도 내가 먼저 건너가려 뛰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은 이 건널목을 발견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일랑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이제부턴 우리 아이들에게도 건널목 같은 사람이 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보다 더 근사하고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래요.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은 되기 쉬워도 건널목이 되어 주는 사람은 쉽지 않을 거여요. 건널목을 건너기만 하는 사람은 언제나 급하게 건너고 나서 혼자 도착한 그 곳이 무지 외롭고 재미 없을 거여요. 설령 그곳에서 친구를 만났어도 늘 그렇듯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을 거여요. 세상의 위험을 혼자서 보란듯이 뛰어 넘는 것만이 生의 목표는 아닐 거여요. 누군가에게 안전하고 튼튼한 바닥이 되어 주는 일, 작지만 포근하고 따스한 천장이, 언제나 그립고도 보고픈 길이 되어 주는 일. 그것이야 말로 우리 生을 더욱 아름답게 살찌울 테죠. 모르는 친구도 내가 놓아준 다리를 통해 건너갈 때 그 행복감은 더 커질테죠. 그렇게 아름다운 건널목, 이토록 든든한 건널목을 통과해 ‘그 사람’과 재회할 수 있는 나라, '그 사람'이 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 곳에서 우리 만나요. 그곳에서 서로가 ‘그 사람’을 본적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해요. 그땐 다시 ‘그 사람’을 못 볼까봐 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같은 ‘그 사람’ 이었다는 것에 우리 서로 마음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손잡고 울어요. 우리 그렇게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살아요. 마법이 아닌 진짜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양탄자를 날게 해요. 동화나라가 우리의 오늘이 되는 그 날을 같이 기다려요. 그때까지 모두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