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 니체의 말 초역 시리즈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 삼호미디어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쓸 때 비겁하긴 하나 유명한 철학자를 인용하면 돌파구나 전환점이 될 때가 있다. 까놓고 말해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젠 체하며 적고 싶을 때 니체만큼 폼나면서 안전한 사람도 없다. 니체는, 니체라면 우리가 니체를 하나도 모르고 자신의 이름을 들먹거려도 어쩐지 용서해줄 것 같다. 니체를 말하면 나만 아는 것을 잘난 체 한다는 느낌도 덜하고 그렇다고 식상하다는 인상도 덜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하나 꼭 인용해야 할 학자가 있다면 니체는 호감도면에서 상위권인 것이 확실하다. 니체라는 브랜드 이미지에 대해 나는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어렴풋이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달까. 날카로운 통찰력이야 철학자들이 가진 공통의 미덕이겠지만 '니체 NIETZSCHE'는 대중성과 신비성을 동시에 지닌 꽤 매력있는 네이밍인 듯하다. 프로이트나 융을 거론하며 심리를 분석하는 건 진부해 보이고 라캉이나 들뢰즈를 언급하며 정신분석학을 가져오긴 지식이 짧게 느껴진다면 분석같은 건 포기하고 그냥 니체의 글 한 토막을 이미지처럼 삽입하면 어떠한가. 좀 더 예술적이고 그래서 더 흥분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절대 사려고 집어 들진 않았다.(왜 변명을 하는 거지? 무엇이 캥기는 것이지?) 그야말로 구경차원에서 페이지를 들쳐보았다. 명언집은 서점에서 오며 가며 들추어 보기 얼마나 적절한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시크하고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불어넣었다.(절대 속지는 않겠다는)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도 좋겠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불현듯 발생했던 것. 그래도 나는 순간의 소유욕에 눈이 멀어 집에 가서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고 눈을 크게 떠보았다. 얼마 전 받아든 러셀꼴이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글씨는 단정했고 종이질은 유연했고 광택없는 채도에 냄새마저 순박한 것이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나는 서점에서 책 살 때 꼭 책 냄새를 확인한다) 그래 나는 아직 이 정도의 니체라야 어울리는 사람일지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엔 한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마치 나 들으라는 듯 첫 페이지의 다음 문장이 흠칫하게 만든다.


자신을 대단치 않은 인간이라 폄하해서는 안된다. 21p


  순간 거짓말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내가 요즘 들어 더욱 눈물이 많아진 것에 나이들면서 생기는 감정의 유연함이 아니라 얼마간 자존심의 훼손에서 시작된 무언가의 상실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문장을 읽자 마자 어쩐지 이 책을 덮고 나면 실낱같은 자존심 같은 게 회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까 (젠장)스스로도 잃어버렸다고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었지 말이다. 나는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니체의 문자에 굴복했고 그 사람을 몰래 집으로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부터 당신을 사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고 봄날은 가고 마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잡지 않아도 오늘만은 당신을 가져 가 보겠어요’... 온라인 서점에서 주로 책을 구입하다 보니 예전처럼 충동구매가 사라진 것 같아도 어쩐지 책의 내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만져보고 사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많았다. 나는 서점에서 확인하고 싶었던 책이 몇 권 있었는데 정작 그 책들은 꼼꼼히 확인하고도 구매의욕이 전혀 일지 않았건만, <니체의 말>, 이 책은 왜 그렇게 강렬하게 나를 끌어 당기던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본능이라고 하는 건데 본능은 가장 지성적인 것이므로 당신의 지성은 나를 원한 것이다. 아... 오월이여. 여인의 변덕을 용서하시라.

  술렁술렁 주말의 여유를 즐기며 이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넘겨갔다. 그리곤 주말이 지나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책은 더 이상 넘길 페이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니체는 나의 꿈쩍 않던 이성을, 꿈틀거리던 감성을 적신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무심코 한 두 번 스쳤지만 그러는 사이 그이만의 자연스런 매력을 알게 된 것과 같았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추어 본 만남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니체는 내게 무언가를 회복시켜준 것이다. 나는 니체 사상의 계보와 니체 철학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자랑이다) 그저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에 해당되는 몇 종류의 말들만 (그것도 찾아 내어야)어설프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다 알지 못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듯 나는 니체가 했다는 232 번의 말로써도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은 니체의 저서에서 일본인 ‘시라토리 하루히코’라는 번역자가 명언만을 발췌해 엮은 책을 다시 우리 번역으로 소개한 책이다. 이중번역이라고 하기에 문장은 물 넘어가듯 매끄럽고 상당히 정제된 느낌을 받는다. 고가의 정수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맑디 맑은 생수의 느낌. 일본에서 이미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는 점이 우리 출판계에 그다지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고 얼마 전 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와 비교하자면 발췌된 문단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편집상 인간내면의 성찰이라는 대전제를 계속하여 환기할 수 있도록 앞뒤 맥락없이도 명언 그 자체로 빛이 발한다는 느낌이다. 잘 모으셨고 소중하게 정리하셨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발췌문의 모음집을 단편적으로 읽었다는 공허함보다는 발췌로 이루어진 하나의 명상 에세이를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부분을 모아놓고도 전체로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꽤 진지한 모음집이었던 것이다.

  모아진 글들은 ‘자신’, ‘기쁨’, ‘삶’, ‘마음’, ‘친구’, ‘세상’, ‘인간’, ‘사랑’, ‘지성’, ‘아름다움’이라는 열 개의 카테고리 아래 가지런히 배치되었다. 책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신에 대하여’로 시작하고 그 아래 첫 번째 명언의 제목은 ‘첫걸음은 자신에 대한 존경심에서’였다. 열가지 상위 주제를 주욱 따라가다 보면 결국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존경해야 하며 그러한 자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 자신을 풍요롭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고귀한 자신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존재가 스스로 존경스러워 질 때가 바로 자존심을 찾게 되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살아 오면서 자존감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사람에게 그것의 본질을 알려주며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넉넉한 기회의 시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부분도 ‘자존감’에 대한 인식과 ‘자존심’의 회복, ‘자긍심’의 확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새삼 내 자신이 고상해질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기는데 일본 번역자는 니체를 통해 ‘자존심 회복’을 하게 될(해야 할) 일본 독자들을 겨냥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곧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인식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판단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철학하는 자세의 기본일 것이다. 가령, 니체는 자신의 본질을 알고 싶다면 다음의 질문에 확실히 답하라 주문한다.

- 지금까지 자신이 진실로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 자신의 영혼이 더 높은 차원을 향하도록 이끌어 준 것은 무엇이었는가?
-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안겨주었는가?
- 지금까지 자신은 어떠한 것에 몰입하였는가?

  답을 모아보면 그것이 곧 의심없는 자신이며 그렇기에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질문의 답은 사람일 수도 어떤 행위일 수도 또는 물질이나 무형의 현상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 자로 답하는, (물론 모범답안처럼)내가 지금까지 진실로 사랑한 것은 ‘나만의 시간’이고, 내 영혼의 차원이 높아지도록 이끌어 준 것은 ‘독서’이고, 내 마음을 채우고 기쁘게 해준 것은 ‘지식’이고, 지금까지 ‘글쓰기’에 몰입하였다고 적어보자. 나의 본질은 대체로 고독한 학자를 추구한다는 뜻이렸다. 이런 ‘도식적인 생각하기’에 나는 내 본질이 흥미로와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의 본질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짜릿하게 가르쳐 주는 시원한 해답도 자주 등장한다.

풍요로움은 스스로에게 있다.
사람은 대상물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 내는 것이다. 결국 풍요로운 대상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능력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요,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즐거운 지식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내 능력이 높아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인생도 풍부해지는 것이라는 세상 당연해 보이는 이치는, 인간은 그 대상물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 내는 존재라는 속성을 파악한 니체이기에 무겁도록 놀라워 보이는 것이다. 쉬운 예로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미션곡을 받아든 참가자들을 떠올려볼까. 참가자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조용필의 노래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에 의해 촉발된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가(사랑, 이별등의)를 찾아내 그것을 끄집어 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임재범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노래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임재범의 노래로 촉발된 우리 가슴속 숨겨진 각자 저마다의 사연이 자극되어 지는 것이기에 끝내 눈물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풍요로우면 그만큼 내 속에서 찾아낼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처가 풍요로운(?) 나는 그래서 그렇게 매순간 눈물이 나는 것이고 복받치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사람마다 자신이 더 보고 싶은 대로 더 듣고 싶은 대로 감동의 위치를 자기위치에 자리시킬 것 같은 책이다. 열 가지 주제하에 전개되는 230여 번의 카드중 분명 심장에 박혀버리는 잊지 못할 패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만으로 볼 때 마지막 장에 위치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번역자의 자의적 해석(과 편집)으로 생각되지만 나는 최종적인 개인의 ‘아름다움’이라는 선택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니체는 지적인 자유를 물론 소중한 가치로 여겼지만 지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부분적인 풍경처럼 한정된 전망에 불과하다 말한다. 광범한 교양도 좋지만 대신 그런 것 보다는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니체가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이상과 꿈을 버리지 마라
이상을 버리지 마라. 자신의 영혼속에 있는 영웅을 버리지 마라. 누구나 높은 곳을 목표로 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과거의 일이었다며, 청춘 시절의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 떠올려서는 안 된다. 지금도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이상과 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어느 사이엔가 이상의 꿈을 버리게 되면 그것을 말하는 타인이나 젊은이를 조소하게 된다. 시샘과 질투로 마음이 물들어 혼탁해지고 만다. 발전하려는 의지나 자신을 이기려는 마음 또한 버려지고 만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이상과 꿈을 버려서는 안된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나이가 되면 으레 꿈은 과거의 일일뿐이고 그것은 지나간 청춘에 불과했다고 꿈을 이루어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꿈을 초월한 사람처럼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과 꿈을 버리는 일이 곧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일이라면 결국 자존심의 훼손은 자기 자신에서 기인한 것 아닌가. 꿈과 포부를 밝히는 청춘을 뒤에서 냉소하고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며 쓴웃음짓는 일이 실은 스스로 자존심을 내팽겨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니체는 과거 ‘어디에서 왔는가’가 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말한다. 화려했던 과거에 집착하면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인간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상투적으로 꿈을 입으로만 내뱉으며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행위는 현재에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와 무엇이 다르냐 반문한다. 이에 우리가 죽는 날까지 노력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보건 말건 자신을 증인삼는 일이며 자기 시련을 겪어 낼 때 비로소 자존심은 바로 서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이 고상한 존재라는 자존심은 곧 자신감이 되며 그것은 자기 시련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자기보상이라는 결론이 나는 미치도록 좋았다. 자존심은 누구를 위한, 누구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내가 수여하는 상장이었다.

  조금은 자존심에 여유를 느끼는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 니체의 간략 독서를 마치고자 한다. 실제로도 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니체를 모르면 또 어떠한가. 내가 초대한 그는 나를 기쁘게 하였으니 된 것 아닌가. 니체는 ‘지성’을 말하면서 ‘너무 힘주지 마라’는 뼈아픈 충고를 잊지 않았다. 너무나 온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긴장과 고통스런 인상을 준다고 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고통스런 불쾌감이 배어 있기 때문에 타자는 부담을 감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 전부가 아닌 4분의 3정도만으로 일과 작품을 완성하면 상대에게 여유감을 제공하므로 쾌적한 기분으로 수용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리뷰 힘빼기를 연습중인 나로서는 천금같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책을 덮으며 알게된 4분의 3의 법칙을 나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최근에 나는 내가 바라는 완성도의 늪에서 완벽함의 벽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번 우연은 꼭 그동안의 필연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최종적 절차, 그 절차의 기념식만 같다.

니체는 어느 봄날의 끄트머리, 행복하고 싶었던 그날 오후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로부터 실컷 행복했다. '니체'때문인지 '나'때문인지 그건 중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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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0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의 철학을 '어떻게 하면 사나이답게 살 수 있을까' 라는 문제의식이다, 라고 평하던 사람도 있던데ㅎ 어째 인용하신 글들을 보니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정말 제 생에서 우울할때 니체의 글을 만났었습니다. 아직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지만요, 풋.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문장의 광기 같은 것에 전염되어서 같이 울기도 했고.. 그러다 꼭 풍선에 바늘로 콕 찌르듯 펑 터진 후에...(뭐라 설명이 어렵네요 ㅎㅎ;) 좀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한사람 2011-06-04 09:16   좋아요 0 | URL

빵빵해지던 풍선이 한순간에 빵터지는 순간을 떠올립니다. 알것 같아요 ~
무릇 남자의, 사나이의 자존심이라는게 대부분 그럴거니까요 ㅋㅋㅋ

하지만 분명 터지기 직전까진 얼마나한 위롭니까?

철학자가 위로주기 힘들어여, 피곤만 가중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