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지폐
정문후 지음 / 세니오(GENIO)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돈으로 안 되는 일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나는 돈이 좋았다. 실로 오랜만에 돈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이 누구에게도 창피하지 않았다. 책을 덮고는 내가 현재 돈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자각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내게 중요했다. 돈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돈이 있었던 나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의 돈을 통과하는 일은 꼭 가질 수 없는 돈다발로 이루어진 숲을 빠져나오는 것 같았달까. 그 지독한 돈 냄새가 나를 관통한 후 떠오르는 상념들, 돈 나무들이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추는 공간. 폐향(弊香)에 취해 폐목림(弊木林)을 걸어 나오는 시간. 여지껏 살면서 돈을 좇아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돈 때문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돈만큼 귀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한때 남부럽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돈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땐 내가 돈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고 살진 않았다. 그저 여기서 조금만 더 벌면, 조금만 더 모이면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그 행복의 테두리 안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와 빛깔들로만 세속의 소원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을 터이다. 역시, 사람은 돈이 없어 봐야 돈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가 보다. 돈이 있을 땐 마음의 여유가 많을 것 같아도 이상하게도 돈이 지닌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게 질문도 답도 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돈이 보여서 돈을 좇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쉬지 않고 좇아야지만 돈이 보일 것 같은 착각에서 절대 자유롭지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보니 그제서야 지난 시절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누리고 살 땐 몰랐던 돈의 실체와 위력을 절절히 실감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돈이 있다가 거짓말처럼 없어지는 동안 내게 발생했던 일. 돈이 가진 능력과 위안의 실체가 소멸되기까지 내가 머물렀던 장소. 돈이 지탱해주던 나라는 존재가 돈이라는 지지대를 잃고서 허물어지던 시간. 그 지난 시절은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동안 내가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이 리와인드되어 플레이되는 상영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돈의)有에서 (돈의)無로 삶이 전환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기운들이 무엇이었고 그것은 어떤 의미였는지 돈없고 보니 알아지더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특별히 내가 물욕에 눈이 멀었거나 과시욕에 집착하는 인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살다보면 스무 평의 다세대주택 보다는 서른 세평의 아파트가 간절해지고 뒷좌석에서도 열선으로 엉덩이를 데울 수 있는 중형차를 타고 싶어지는 것이니까. 그러다보면 정원과 테라스가 딸린 타운하우스나 그에 걸맞는 분위기의 외제차라도 얼마든지 곧 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문제는 무자각 상태로 이들 욕망이 확장하는 시간과 내 소득이 증가하는 시간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크기의 차를 견디는 일은 바로 기나긴 生의 질병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들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게 되는 지병처럼 익숙하고도 만성적인 고통으로.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비현실과 또 언젠가는 탈피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의 안타까운 간극 차, 여간해선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이 거리는 속세를 사는 우리에겐 늘 공동의 상처이고 시련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커피를 손에 들고 도시 한복판의 다리를 건너면서 돈에 관심이 없다, 돈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 돈만 아는 자들이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웃기고도 우스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는 돈을 밝히는 태도가 부끄러운 행위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 뿐 스스로 돈이 싫어서 필요하지 않아서 도인같이 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돈이 너무 간절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머쥔 사람들이 부럽고 샘난다는 자기방어적 표현에 불과하므로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못난 사람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말은 그만큼 ‘돈으로 되는 일이 많다’는 뜻의 부연이라 느껴진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의 종류를 따져볼까. 가만 보면 돈이 제 아무리 많아도 얻기 힘든 것- 예를 들면 사랑, 우정, 추억, 희망 등등 -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돈으로 구할 수 없기에 더 귀한 것이 아닐까) 억지로 돈으로 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돈 때문에 얻어진 것은 다시 돈이 아니면 사라질 운명이므로 그 절대성과 진실성, 영원성에서는 가치를 비할 바가 아닐 터이다. 사람들이 그나마 비현실과 현실의 간극을 참고 이겨보려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아직은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인지 모른다. ‘돈으로 다 된다’는 주장 역시 돈으로 다 안 되기 때문에 생겨난 반론일 것이니까. 다만 이 믿음의 연대는 돈보다 느리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다같이 믿어 주는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간혹 이 믿음의 연대에서 이탈해 비현실과 현실의 편차에서 탄생한 블랙홀에 빠지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정작 남는 것은 돈이 아니고 황폐해진 육체의 잔재와 돈에 굴복한 영혼의 쓰레기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돈이라는 우주가 생성한 블랙홀에 빠져든 사람들의 거침없는 아우성을 노래한다. 고백하건대 무엇보다 작가가 마련한 돈의 향연, 거짓의 나락에 같이 추락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은 아니었다. 세상에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신난다지만 이번에 돈구경도 그에 못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돈으로 안 되는 일중 가장 힘든 일은 돈 만드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돈이 인간이라는 이 책의 화두를 떠올리면 인간이 되는 길 역시도 돈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돈으로 최고가 되는 일

소설의 시작은 다분히 자극적이었다. 돈을 똑같이 만들어 내겠다는 한 남자와 취미로 돈을 수집하는 한 여자가 훗날 자신들의 운명적 만남을 위해 돈을 좇아 달려갈 것을 나란히 예고하는 것이었기에. 특이했던 것은 이 두 사람이 후반부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공범자가 되기까지 작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하였다는 것인데 작가의 시점은 변하지 않으면서도 두 남녀가 공평하게 자기 속도로 달려가는 형식이 흥미로왔다. 이 과정은 흡사 (작가의 의도대로)추리소설의 밀도와 긴장을 유발하는 성격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두 사람을 통해 전해진 돈의 유래, 지폐의 제조공정, 위폐의 감별기준 등의 풍부한 텍스트는 이 소설의 구성을 더욱 탄탄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소설 초반부터 시종일관 제시된 돈의 가치와 의미를 질문하는 데 차용된 고시, 중국의 고사성어, 고대 그리스 시인 및 삼국지등의 문헌은 소설을 읽는 동안 피할 수 없이 한번쯤은 진지하게 돈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요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늘 생각하고 살지만 꺼내들고 말해봤자 뚜렷한 해결책은 없어보였던 돈이라는 애증의 대상에 대해 극도로 개인적인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일 테다. 돈의 사유가 나의 자유가 되는 시간, 나만 하여도 내게 있어 돈의 부재가 의미하는 존재가치를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밖으로 ‘넓다’기 보다는 안으로 ‘깊다’고 느껴진다. 황망한 돈의 바다가 아니라 심오한 돈의 수렁이었다고 할까. 인물도 많이 등장하지 않고 상황도 단순하다. 그러나 돈에 대한 깊이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정밀하다. 마치 초정밀 위조지폐를 만드는 매 단계의 복잡한 기술처럼. 인물의 묘사도 주인공이 돈에 집착하게 된 경위에 보다 집중되었고 돈에 다가가는 여정자체가 소설의 주를 이루는 핵심으로 느껴진다. 사실 우리네 인생도 우여곡절 끝에 돈이 생기는 과정은 대개 돈을 쓰는 과정보다 극적이고 그런 만큼 길고 질척할 터이다. 문득 주인공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무한한 열정과 엄청난 노력을 다른 일에 투사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작가의 스쳐 지나가는 말이 생각난다. 무릇 한 사람이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돈이 만들어 지는 과정이 상징하는 ‘인간되기’, ‘인생살기’의 환유이자 알레고리라 할 것이다. 이처럼 결말보다는 전개과정에 완성도가 집중되었기에 이 소설은 자칫 결론없이 장렬하게 막을 내리는 허무한 전투로 보일 수도 있었다. 희망의 완전무결함이 상징하는 절망의 완성유결. 그러나 돈이 완성되어 펼쳐지는 그 절정의 순간을 소설의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바로 돈이라는 블랙홀에 빠지고 난 이후부터는 우리들 독자의 몫이라는 작가의 준엄한 경고라는 생각이다. 돈의 광활한 우주에서 내심 빅뱅같은 폭발이라도 기대했다면 그것은 바위로 계란치기 식의 상투적 유혈혁명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작가가 보여준 무혈혁명은 돈이 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이 돈이 되는 세상은 오지 말아야 한다는, 일인 문학시위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작가가 연출한 시위에 연루된 주인공은 소설적 희생양이 아니었을지.

가난한 시골출신이며 정보 처리학 전공이라는 미모의 컴퓨터 학원 강사 정은서는 소위말해 돈맛은 좀 아는 세련된 싱글족이다. 혼자서 도시생활을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고 ‘돈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돈의 마력에 대한 존경심’ 이 남달라 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미혼여성이었다. 이에 반해 가난한 환경에서 부모와 형제를 잃고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해 중학교시절부터 인쇄업에 발을 들여놓은 김준성은 돈을 존경했다기 보다는 자신에게 패배만을 안겨준 돈을 이겨 보려한 경우였다. 김준성은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예술 ‘창작’이라는 최초의 꿈을 포기하고 진품 ‘흉내’라는 대안적 꿈을 실현하려 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장 고난이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돈을 만드는 것이 곧 최고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들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돈만을 모으기 원하는 ‘수집광’으로서 남자는 진짜와 똑같은 가짜를 만들기 원하는 ‘기술광’으로서 각자 돈에 대한 욕망을 현실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모으고 복제하는 collect & copy 행위가 다름아닌 돈이었다는 것은 행위자체에 진정성을 의심받기 충분하다. 과연 실물화폐를 쓰지 않고 모으기만 베끼기만 가능한 것일까. 불행히도 이들은 모두 우리처럼 돈을 쓸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이 희생양으로서 안타깝게 느껴졌던 건 두 사람이 보여준 행위에의 열정과 그 행위의 목적에 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솔직히 돈 만드는 과정에 간접 참여한 참관인처럼 점점 설레고 흥분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돈을 이렇게 만드는 구나, 돈도 짝퉁으로 유통될 수 있구나 하는 신성불가침의 비밀을 엿보는 심정이었달까. 특히, 은서가 미리 빠져나간 일련번호를 아쉬워하며 번호를 조작해 맨 처음으로 집에서 위폐를 만들어보던 장면은 어쩐지 함께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은서가 취미삼아 재미삼아 위폐를 만드는 시행착오적 과정, 준성이 지폐 인쇄기술을 터득하는 단계별 노력들은 독자로 하여금 관음증적인 쾌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돈을 직접 만들 수는 없지만 그들이 대신해 만들어줌으로써 마치 내가 돈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대리만족을 주었다는 것, 그것은 만의 하나 복권이 당첨되었을 경우를 가정해 하룻밤 상상의 시나리오를 펼쳐보는 기분과 유사했다. 어떻든 (돈좋아하는 같은 인간으로서)이들로 재미를 톡톡히 본 입장에서 그들의 희생을 목격하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던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위조지폐를 제작해 사회에 불법 유통시키고 그로인해 국민의 불안과 위기를 조장하는 국가단위의 범죄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은서는 고교시절 소도둑을 잡아 경찰표창까지 받은 모범생이었고 준성은 어렸을 적 돈이 안 되는 무명화가였던 아버지를 보고 돈이 되는 놈이 되기로 마음먹은 죄밖에 없었다. 작가는 이들이 애초부터 범죄적 성향을 타고났거나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애써 세상에 강조하는 듯했다. 외려 지폐를 수집하거나 인쇄업에 종사했으므로 돈을 그리면 감옥에 간다거나 위폐를 만들면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되는지 누구보다 실감하는 경우였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돈을 만들고자 했을까. 아니 돈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자 했을까. 돈과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짝사랑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 이들은 삐뚤어진 짝사랑의 소유자였다. 돈을 세상과 나누어 돌려 쓰지 않고 자신만이 영원히 소유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운 것이다. 바로 제작 목적에 행사의지를 배제함으로써 위조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는 ‘형법 207조’를 들어서라도 우리에게 묻는다. 아니 설득한다. 김준성은 행사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의 화폐를 위조 또는 변조하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맑고 깨끗한 눈빛’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약물과 노동에 시달린 거친 손’으로 그저 인쇄공으로서 최고의 기술을 증명하려 했을 뿐이라고. 증거 수집을 위해 경찰이 위탁한 은서가 중간에서 진폐를 가로채 자신의 위폐와 바꿔치기한 범죄 역시 열정적인 그녀의 수집욕 때문이었다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위폐조작행위는 자아성취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모험에 불과했다고.


돈으로 인간이 되는 일

은서와 준성이 작가의 무혈혁명에 표면적인 희생양이었다면 소설 속에서 외롭게 무혈혁명을 마무리한 희생양이 또 한사람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며 고시를 읊조리고 산수화를 그리던 인쇄기술의 전설. 등사원판을 만드는 필경사 출신이면서 직업병으로 납중독을 얻게 된 이 시대 돈의 스승. 그는 자신이 경영하던 제지공장에서 친구에 속아 거액의 달러 지폐용지를 만든 전과자이기도 했다. 작가는 크게 참아야 했기에 스스로 대인(大忍)이 되어버린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피없는 혁명을 연출해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는 대인과 준성이 나누는 공자왈 맹자왈 식의 대화가 아니었을까. 인물중 가장 비현실적이고 영화처럼 느껴졌던 대인은 돈을 만들겠다는 준성에게 연신 돈처럼 버라이어티한 충고를 이어간다. 참다운 마음으로 공경하고 어리석음을 굴복시키는 ‘예배자’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제 5의 원소처럼 ‘돈이 인간’이라는 싯구절, 최초로 통용된 쿠빌라이의 지폐, 바람이 불면 불경을 읊는다는 대나무같은 존재 죽존자,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종잣돈을 대준 위홍등 때로는 직구로 때로는 선문답같이 돈의 인문학을 강연하는 존재였다. 대인을 통해 작가는 부에 의해 통제된 기회의 편재와 빈자에 대한 인권유린이 우리 사회 심각한 문제라는 메시지를 설파하였다. 마침내 대인은 가난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으로 기회를 나누어주는 무상 종잣돈 제작 및 유통자가 되어 이 작품의 진정한 영웅으로 탄생한 것이다. 준성처럼 화가가 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꿈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꿈을 공모하여 그들에게 ‘기회의 분배’라는 잡지를 매개체로 종잣돈을 나누어주다 ! 무엇보다 인상깊었던 점은 이 꿈같은 이야기가 실현되는 생생한 현장에는 대인이 언급한 돈철학이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5장 제목이기도 하며 그리스 격언으로 알려진 '돈이 인간이다(Chremata aner)'는 말은 알려졌듯이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알카이오스의 시 ‘돈’의 한 구절, ‘돈이 인간이네(chrēmat' anēr). 가난한 사람치고 고귀하거나 영예로운 이는 없네’에서 인용된 명언이다. 그 시절 제 5 원소의 하나로서 돈이 인간만큼 중요하다는 뜻도 되지만 어느 시대이고 늘 가난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고상할 수 없다는 그만큼 돈이 없으면 인격도 높아지기 힘들다는 자조적이고 뼈아픈 풍자의 한구절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이 구절이 자꾸 중첩되어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대인이 지폐가 유래된 배경을 준성에게 가르쳐주는 장면때문 일 것이다. 대인은 준성에게 서양에서 근대적 의미의 지폐가 출현하게 된 계기는 중세 페스트로 죽은 시체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준다. 그전까진 고가의 양피지로 책을 만들었기에 책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페스트로 대량의 인구가 죽은 덕에 시체에서 벗겨낸 옷가지인 면섬유를 지폐의 종이로 대중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죽음에서 피어난 꽃’이 지폐라는 교훈이므로 ‘돈이 인간이다’라는 알카이오스의 시는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준성은 돈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기에 죽어서 비로소 돈이 된 준성은 원래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이는 충분히 ‘돈이 인간이다’는 소설논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논리적 서사인 것이다.

나는 ‘돈이 인간이다’는 작가의 소설논리를 보고 퍼뜩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전에는 이 말을 어떤 경우든 사람이 돈보다 먼저라는 뜻으로만 생각했는데 돈이 너무 좋아서 사람보다 돈을 믿어서 끝내 돈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니 옛날엔 ‘사람 나고 돈 났’지만 지금은 ‘사람 죽고 돈 났’다 이거나 ‘돈 나고 사람 죽’는다고 해야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속담이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이 죽어서 돈이 탄생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는 분명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이라는 속깊은 이치가 아닐까. 이렇듯 돈과 인간, 인간과 돈 사이의 인과관계를 그리스 격언과 대인이라는 스승 캐릭터, 주인공의 반전 서사로 잘 결합해 제조한 작가의 재치는 작년에 출간된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춤>을 연상시킨다. <허수아비춤>은 신랄한 이야기로 이야기 바깥을 지시하면서 소설을 통해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대표적인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오랜 시간 우리 문단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성시키는 조정래 작가는 우리 사는 시대를 문학으로 통찰하며 오늘과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역할을 평생토록 자처한 작가이다. 우리조차 망각하고 있었던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역사에 당당한 국민이길 충고하는 멘토형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런 대작가의 작품과 이 작품을 단순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책에서 <허수아비춤>과 같은 사회소설이 가지는 문학위치를 발견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대인을 통해 언급된 ‘기회의 분배’는 <허수아비춤>에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를 연상케 한다. 돈에 굴복한 대기업 임원들이 우리네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위조지폐로 꿈을 실현하겠다는 발상 역시 돈에 굴복하여 돈의 노예가 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에서는 애초부터 돈을 만들겠다는 준성을 비롯해 경찰로는 큰 출세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김형사와 능사로 불리운 교도관, 오로지 수집만이 삶의 행복이라는 은서까지 최후엔 모두 불법을 감당하고서라도 돈에 굴복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돈에 대한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대인마저도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 전까진 준성의 설득에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청렴결백한 고위공직자라도 뇌물에 약해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지 않아도 눈앞에 굴러들어온 돈에 무심할 인간은 없는 것이다. 유일하게 대인이 마지막까지 그리워한 아내 백상만이 돈에 초월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외려 백상이 제일 비현실적인 캐릭터였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트럭에 꽃을 싣고 다니며 어디서든지 화사한 꽃밭을 연출했다는 백상만이 세월가도 돈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백상이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신앙의 대상이기에 작가나 대인, 우리 모두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는 백상같은 사람을 마음의 멘토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국민도 경찰도, 스승도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는 돈도 사라져도 끝내 신적인 존재였던 백상이 가진 순수만은 잊지 말고 모두의 가슴에 새기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돈이 있건 없건 황폐한 도시에 꽃같은 기운을 잃지 않는 사람, 돈을 벌 건 못 벌 건 그 꽃으로 거리를 향기롭게 하겠다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범한 온갖 백상(白狀)일랑은 잊어 버리고 새로운 힘과 생명의 원천으로서 코끼리 같은 넉넉한 백상(白象)을 섬기기라도 하라고.


돈없이 진실이 되는 일

돈이 좀 있다 싶을 때 나는 돈으로 돈을 빌려 제법 큰 규모의 자영업에 도전했다. 좋은 차에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확실히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주유소 알바생들도 90도로 배꼽인사를 한다. 우연하게 돈으로 무언가를 집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경우라면 그 집행자는 더욱 과대평가되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내가 돈이 있을 때 내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들 나와 코드가 맞거나 내 성격을 좋아해서 헌신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돈 때문에 발생한 후광효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돈이 빠져나가면 물거품처럼 사람도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사업이 망하고 나면 금전적인 상실도 충격이지만 그로인해 사람사이에서 발생한 이해관계로 받은 상처가 더욱 사람을 망가뜨린다. 돈을 잃으면 돈과 관계된 사람,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잃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직도 돈이 없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두렵다. 이렇게 돈과 사람을 함께 잃은 내가 이제와 가장 많이 땅을 치는 것은 정작 돈 없어도 소중한 것들, 돈 있을땐 우습게 보이던 것들인데 이 책의 영웅은 이런 내게 보란 듯이 질문한다.

술을 마신들, 바람을 피운들, 도박한들, 외국여행을 한들, 그 어떤 취미생활을 한다 해도 그런 속 깊은 즐거움, 그런 가슴이 벅차오는 행복이 어디에 있겠나. 187p


제지공장 사장까지 지냈다는 대인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준성에게 아이들, 가족들과 나눈 소소한 일상, 진정한 행복에 대해 말한다. 대인은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이 행복을 알고 있기에 그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에드가 앨런 포우의 시, ‘엘도라도를 찾아서’ 홀연 사라진다. 싯구절처럼 말타고 계곡을 달리는 영혼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고 만 것이다. 엘도라도는 어디에 있는 걸까. 대인은 과연 보물이 가득한 황금의 땅, 돈의 이상향이라 불리는 엘도라도에 도착한 것일까. 엘도라도는 원래 스페인어로 ‘황금을 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콜롬비아의 인디언 마을에는 1년에 한번 씩 추장의 몸에 금을 바르고 뗏목에 보물을 싣고 가 그것을 물속에 던진 후 그 물로 금가루를 씻어내는 풍습이 있었다. 16세기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이 추장을 ‘엘도라도’라 칭했던 것이다. 금을 몸에 바르고 씻어 내린 추장이 엘도라도였다면 어쩐지 스스로 불꽃이 되어 돈을 내던진 대인의 결연함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황금인간이 와전되어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가 되었다니 인간을 돈으로 인식한 것이 대략 돈이 인간이라는 고대의 시와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소설에서마저 엘도라도로 다다르는 방법은 자신이 돈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 참 뼈아픈 오늘이다. 엘도라도는 궁극에 우리가 도착하고 이르러야 할 곳이 아니라 영원히 가지 못할 이상향으로 남겨두어야 할 곳은 아닐까.

이 소설은 돈처럼 분명하고 돈처럼 아스라하다. 이토록 현실을 극명하게 자각토록 한 이 소설이 어쩐지 오래 기억될 듯하다. 문득 돈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돈을 만들겠다고 하는지 처음부터 독자를 질타하던 소설 속 스승이 그립다. 결국 위조지폐를 계획하고 제작하여 실행하는 모든 과정은 위조된 이야기, 이야기를 위조하는 소설의 창작과정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교한 위조지폐를 ‘슈퍼 노트’라고 하는 것도 어쩐지 정교한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은행자동화 기기를 통과하는 초정밀 위조지폐처럼 누구도 뚫을 수 없는 철벽같은 독자의 가슴을 관통하는 섬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얼마나 위대한 엘도라도일 것인가. 위조지폐의 대량유통은 폭탄 테러보다 무서운 경제 테러라지만 위조이야기의 적법유통은 감동과 교훈의 테러가 아닐까. 오늘 이 작가의 이야기 제조과정과 결과를 마주하고 모방심리가 생겨나는 것은 나로선 꽤 흥분되는 일이다.(위조지폐 모방심리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내겐 은서와 준성처럼 소설이라는 위조현장에서 이야기와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역사적 순간인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0과 1이 반복되는 슈퍼 레이더 시리얼 넘버처럼 소중하고도 유일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 주어진 이야기만 읽다가 내 자신이 이야기를 창조하고 싶다는 욕망이 어쩐지 주어진 돈만 쓰다가 스스로 돈을 만듦으로써 욕망의 공급자가 되려는 이 책의 주인공과 같은 처지인 것만 같다. 그들이 (불법으로)돈을 만드는 일이 결국 (합법으로)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로 전이될 수 있다면 이것은 소설의 시공간에 편입한 독자참여가 아닌 생생한 삶의 참여인 듯 하다.

돈을 따라 만드는 일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부질없는 일이라면 이야기를 좇아 만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 돈이 인간이고 인간이 이야기이므로 이야기가 돈이 된다면 더욱 좋겠지. 허나 언젠가는 나도 돈되는 인간이 아니라 누구보다 인간된 이야기를 제조해 내고 싶다. 돈되는 이야기가 아닌 돈으로 할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돈 없이도 너무나 행복해 그 소중함으로 평생을 견딜 수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했으면 좋겠다. 돈없어도 좋을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현재 돈 없는 나를 조금은 용서하고 위로하고 싶다. 중요한건 오늘 돈이 없어 알게 된 세상의 법칙과 돈이 없기에 발견한 내 본질인 것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돈과 인간의 함수관계, 돈으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의 진실일 것이다. 언제나 내 이야기는 내 돈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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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0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은 정말 말씀 그대로 분명하면서도 아스라하죠.
우리는 항상 돈에 대해 이중적 감정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 듯 해요.
돈이 고민의 80%를 해결해준다죠, 그런데 그게 미국 달러 기준 연봉 15000불 정도까지라네요.
그 이상이 넘어가면, 돈의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아진대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 보니, 돈을 가지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나봐요.
중간에 언급하셨듯이 소설에서 돈을 위조하는 과정은, 마치 돈을 쫒아가는 우리네 인생 같기도 하고
그 자체가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면,, ㅠㅠ

그러게요, 항상 나의 이야기는 돈보다 소중한거죠.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한사람 2011-06-01 10:30   좋아요 0 | URL

예..이 책읽고 돈생각을 좀 오래해보았는데요..
돈있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닌데,
돈없으면 불행한건 맞더라구요
문제는 돈의 양이 아니고
만족도의 기준인것이죠..

살면서 저도 모르게 그 기준이 날로 높아진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슬픔이구요...ㅠ.ㅠ

이 글이 썩 제 맘에 들지 않는데 좋은 글이라 해주셔서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