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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고. 권력은 일종의 마약과도 같아 누구라도 한번 맛보면 그 중독성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과학적인 실험으로 입증된 결과도 있다. 권력은 두뇌에 코카인과 똑같은 효과를 일으켜 중독성 높은 도파민 물질을 상승하게 한다. 동물을 실험하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도파민도 높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도 권력에 취하면 체내에 도파민이 과다 생성되어 오만해지고 공격적이 되며 성적으로도 왕성해 지는 것이다. 기분 좋은 흥분과 그로인한 자신감. 권력은 그것에 취하게 된 순간 흡사 마약주사처럼 체내에 빠르게 침투되는 위험한 약물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어쩌면 마약에 빠져 부모고 부인이고 자식이고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던 중독자들의 일생을 뒤돌아 성찰케 하는 일종의 사후 진단서이다. 그들은 조선조 황금빛 중흥기를 이끈 절대 권력자들이었고 모두 우리의 조상들이다. 우리는 중독자의 유전자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므로 어떤 이는 권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약에 마음을 빼앗겨 평생을 허비할지도 모른다. 유난히 권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집착하는 성향의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혹시 내가 아직 권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주체자의 위치에 서보지 못해서 권력을 돌보듯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나는 마약을 해보지 않았기에 마약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저 피상적으로 주워들은 지식만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물론 마약을 해보았고 권력을 손에 쥐어보았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엇이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약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약을 해 본 자와 권력을 취해 본 자들의 일생을 주도면밀히 분석하고 파헤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왕이 되어보지 못했고 왕의 아들이 되어 본적이 없는 우리에게 그들의 입장을 퍽이나 세심하게 배려한 듯하다. 그런 다음 후대의 사람들이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을 매우 곡진하게 전달하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많아 보였다. 내가 권력자가 되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그들을 연구한 건 아니지만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던 마약관련 지식을 알차게 수정해주고 새롭게 확장해주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영정조 시대를 바로 곁에서 목격하고 취재한 어느 유능한 탐정처럼 사건의 퍼즐을 하나씩 맞추어 마침내 ‘권력과 인간’이라는 전체 그림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도세자를 쌀뒤주에 갇혀 죽은 미친 왕의 아들쯤으로 생각한다. 뇌리에 무엇보다 각인된 상징은 ‘뒤주’라는 엽기성이며 그 엽기적 공간에 아들을 몰아넣은 아버지의 비정함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아버지가 영조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인 것은 역사에 무관심한 독자들에겐 사실 거의 은폐된 역사와 다름없다. 굳이 뒤주와 영조, 정조를 연결시키려면 필연적으로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를 떠올려야 하는데 가장 쉽고 간단한 쪽은 아무래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 만한 잘못을 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즉, 죽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아버지에게)죽었을 것이라 믿는 것이 가장 편안한 방식의 추론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영정조 시기는 최고의 부흥의 시절이며 임금 또한 어질고 현명하기 짝이 없는 성인들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사치에 관심도 없고 친인척 비리에도 깨끗하고 - 외려 척결하였으면 했지 - 불철주야 국민만 생각하며 철저한 자기관리에 학식까지 우러러볼 수준의 대통령이다. 당연히 모두가 존경할만한 인물이었을 것이고 그러한 절대자의 판단으로 실행된 아들의 죽음이라면 아들에게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해와 동정으로 마음이 기울기 때문이다. 모르긴 해도 죽을 짓을 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겠지... 죽을 짓을 안했는데 뒤주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겠지... 오랜 세월 내 머릿속에 기록된 사도세자는 불쌍하고 억울하겠지만 어떻든 당시 죽을 짓을 했기에 죽어야 했던 왕자였다.
그런데 과연 사도세자는 죽을만한 짓을 했던 것일까. 사도세자도 뒤주에 갇히면서 자신이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그것이 죽을만한 일이냐고 묻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여지껏 사도세자가 죽을 짓을 했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차기 임금으로 내정된 아들을 꼭 죽여야 했던 영조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죄인이 되어 죽었지만 아들인 정조가 어떻게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끌 수 있었는지도 연결고리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늘 중요 이슈는 과연 사도세자가 죽을 만큼의 짓을 했는지의 여부와 그 죽을 짓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선정성이 남달라 역으로 다른 연계된 인물들의 입장과 당시 배경, 여러 정황들을 가리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미쳤기 때문에 죽었다는 ‘광증(狂症)설’이 진실인지 당시 주도세력인 노론의 반대편에 섰다가 음모에 휘말려 죽었다는 ‘당쟁희생설’이 진실인지 죽음의 이유를 따지는 타당성 연구만이 부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사건의 사인에서 한발 물러나 렌즈를 교환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아닌 절대 권력자와 권력을 위협하고 대항하는 반군의 관계로 피사체를 새롭게 주목했다. 주인공은 영조도 사도세자도 정조도 아닌 ‘권력’이라는 보다 확실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실체였다.
영조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 사람이었고 미친 아들이 급기야 자신을 죽일까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군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사건을 조작하고 자작극은 물론 사기극까지 마다않은 치밀한 계략의 종결자였다. <한중록>을 집필한 혜경궁은 친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단식과 자살기도까지 주저하지 않았던 철의 여인이었다. 이 세 명의 공통점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약은 순간의 행복감과 희열을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초조, 집착과 편집증을 불러오는 영혼의 쓰나미이다. 완벽한 권력자는 완벽한 정신병자이다. 마약과 같이 권력에 중독되면 진실이 하찮게 여겨지고 중요한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진실이냐 뿐이다. 오로지 자기 권력을 잃게 될까봐 모든 신경을 권력보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권력상실에의 두려움은 아마도 마약주사를 끊게 되는 두려움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두려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반응이자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것이다.
영조는 권력을 잃을까봐 그 두려움에 진실을 외면하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정조는 권력을 더 유지시키기 위해 진실을 조작하고 왜곡했다. 혜경궁은 무너진 권력을 복원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 이들이 가진 것은 권력이었고 잃은 것도 권력이었다. 이들이 평생 가장 많은 시간 자기 자신을 투자한 일은 권력을 만들고 지킨 일이었다. 권력은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으나 실행주체는 오로지 자신이기 때문에 궁극에 가장 사적인 욕망의 영역이 된다. 개인의 욕망은 결국 부모나 자식 같은 혈연관계나 부인과 남편이라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뛰어 넘는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그 권력의 크기를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지금처럼 임기 없이 죽을 때까지 권력을 보장받는 절대자라면 그에게 있어 권력은 목숨과 동격일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아들이 다음의 왕이 되는 것이라면 죽기 전까진 그 누구도 왕의 권력에 흠집을 내어선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권력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사도세자 역시 광란의 순간엔 신하들의 두려움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그것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쾌감을 느끼곤 하지 않았던가. 왕실에서의 권력싸움은 곧 피를 부르는 전쟁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핏줄과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권력의 피(皮)는 혈연의 피(血)보다 두껍고 진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덮으며 가장 마음 아팠던 사람은 권력이라는 옷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하고 피를 본 왕자, 가장 끈끈한 핏줄이었지만 가장 처참한 피의 숙청을 당한 사도세자였다. 가끔 드라마에서 완벽한 아버지를 둔 무능력한 아들을 목격할 때가 있다. 권력과 명예, 돈과 인기를 다 가진 아버지는 세상에서 더 없이 평판 좋은 인물이었지만 유독 아들에게만은 혹독하기 짝이 없어 늘 아들이 못마땅하고 꼴 보기 싫은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 노력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버지 앞에서만 주눅이 들고 실수투성이이다.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꼭 아들의 실수를 지적하고 간만에 이룬 성과도 깎아내리고 자신처럼 완벽하지 못한 아들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린 이러한 통속의 드라마에서 아들의 행보가 어떠할지 너무나 잘 학습되어 있다. 아들은 점점 야비해 질 것이며 세상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아들은 필히 사고를 치게 될 것이며 아버지와는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아들의 삐뚤어진 복수와 아버지의 비열한 대응 사이에 아마도 치정과 불륜, 출생의 비밀이라는 자극적 스토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을 터이다. 우리가 쉽게 치부해온 그동안의 막장 드라마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피할 수 없는 유전자의 변형된 모습일지 모르겠다. 부자지간의 갈등과 출생의 비밀, 권력과 재산싸움에 얽힌 통속 시나리오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요즘 재벌에서도 유효하다. 왕실과 재벌, 그리고 드라마의 통속은 한통속이라는 게 새삼 씁쓸해지는 건 왜 일까.
그렇다고 마음의 병이 깊어 정신분열에 이른 사도세자가 모두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좀 더 약삭빠르고 현명했더라면 자신의 아들 정조처럼 자기 이미지를 포장하는데 능숙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에 자기 편을 더 만들고 아버지의 무시를 무시하고 주변으로부터 차근히 신뢰를 쌓아나갔더라면 설사 뒤주에 갇혔더라도 탈출구는 있지 않았을까 싶어 너무나 안타까웠다. 뒤주에 갇히고 난후 일주일 이상 사람들이 세자의 죽음을 방치하였다는 사실이 뒤주에 들어가라고 한 영조보다 더 소름끼쳤다. 세상은 역시 살아있는 권력에만 관심을 가진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들어갈 만큼의 죽을 짓은 안했을지 몰라도 뒤주에서 당연히 나올만한 아니 마땅히 나왔어야 할 죽지 않아도 될 짓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가진 자라면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살아야 할 이유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해온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조와 정조, 혜경궁은 한 평생 지독히도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더 많았기에 그토록 비정한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적당한 위선과 처세술이 곧 권력을 굳건히 하는 기본적 기술이라는 깨달음이 서글프다.
인문서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 넘어가는 줄 모르게 흥미롭고 또 슬픈 책이다. 부록으로 실린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비판은 역사학자로서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그리고 독자 스스로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에 대해 짜릿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권력으로 오만해진 사람들을 목격하는 일은 슬픈 일상이다. 정치인뿐 아니라 재계인사, 유명 연예인, 스포츠 인물 할 것 없이 권력이라는 마약에 대책 없이 빠져든 사람들이 몰락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우울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릇 무상한 삶의 과정이라고 보았을 때 권력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그 무상함을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 심화시키는 결정적 폐인은 아닐까 싶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절대 권력자들은 자기가 쏘아댄 새들처럼 처량하게 추락하지 않았던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영,정조 시대를 촘촘히 둘러본 이 책은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떻게 비굴하고 초라해 질수 있는지 어떻게 잔인하고 교활할 수 있는지 가장 화려하고 막강한 임금의 실상을 통해 진실을 전달해 준다.
앞으로 우린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하는 역사적 광경을 지켜보아야 할 시점에 도착해있다. ‘군주는 대단한 거짓말쟁이이며 위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통치철학을 훌륭하게 준수한 정조처럼 스스로 달이 되어 이 세상을 감시, 조종, 통제하는 통치자를 만나게 될까 두렵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인물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지, 권력을 얻으려고 그 측근이 되고자 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가려내어야 할지 새삼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미 권력의 맛을 본 중독자들일 것이기에 더 강한 약효만을 원할 것이 자명하다. 이 책을 거울삼은 독자로서 나는 그저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 한다는 명언만 기억하시라 조용히 돌아서서 중얼거리고 싶다. 슬프지만 그것이 권력에 집착한 중독자들의 말로일 것이라 혼자 끄덕이며 눈감아 드리고 싶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오늘날 치유가 가능하지만 권력자의 정신병은 불치병임도 함께 알려드리면서.
덧붙임)
![1.jpg 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376/93876/1/20120508_101759_f3ccdd27d2000e3f9255a7e3e2c48800.jpg)
신령스런 칼이 오래도록 땅에 묻혔으나
검광은 북두칠성을 쏘고
붕새가 날자 그 날갯짓 하늘을 덮네
대장부가 뜻을 얻음은 모두 이와 같으니
어찌 산수에서 세월을 보내리
- 사도세자의 문집 <능허관만고>, 아무에게 주다 中, 1758 -
불안한듯 분명한 개성이 있어 보이는 필체가 인상깊었다.
내용상 대장부의 뜻을 펼치지 못한 사도세자가
왕의 아들로 태어났음이 안타까워지는 글이다.
사도세자는 친필로 된 시를 그때그때 곁에 있던 시종에게 주었던 듯하다.
자신의 글에 대한 애착이나 자부심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허공에 띄우는 그의 심경이 기울어진 필체와 함께
새겨졌다.
아무에게나 주었다는 그 아무개는 이 시를 읽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