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부근.
1.
집을 마련하고 나서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실은 더 가난하게 되었는지 모르며,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58~59쪽)
⇨ 이 글은 오늘날의 ‘하우스 푸어’(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만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를 연상시킨다. 무리하게 은행에서 대출받아 집을 산 사람의 경우 ‘하우스 푸어’가 되기도 한다.
‘그가 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2.
그러면 가난한 소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일부 사람들의 외적인 환경에서는 미개인보다 나은 처지에 놓이게 된 반면에, 그와 똑같은 비율의 다른 사람들은 미개인보다 못한 처지로 떨어졌음이 판명될 것이다. 한 계급의 호화로운 생활은 다른 계급의 궁핍한 생활로 균형이 맞추어진다. 한편에 궁전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빈민 구제 시설과 ‘말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59~60쪽)
⇨ ‘이십 대 팔십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80프로의 빈곤층과 20프로의 부유층으로 사회가 양분된다는 것으로, 상위 20프로가 전체 부의 80프로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이십 대 팔십 법칙’이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소로우가 살았던 시대에도 빈부 격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집트 왕들의 무덤인 피라미드 공사에 동원된 수많은 사람들은 마늘을 먹으면서 연명했으며 죽은 후에는 격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묻혔을 것이다. 궁전의 처마돌림띠를 손질하던 석공은 밤이면 아마 인디언의 천막집보다 못한 오두막으로 돌아가리라. 문명국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여럿 있다고 해서 그 나라 국민 대다수의 사정이 미개인의 사정보다 나으리라고 보는 견해는 옳지 못하다. 나는 지금 영락零落한 부유층이 아니라 영락한 빈민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60쪽)
⇨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피라미드를 노예가 만들었다는 것은 오해이며, 피라미드를 짓는 데 동원된 건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들이라고 한다.(매일경제 2023-03-23) 임금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피라미드 공사를 하기 위해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적지 않으리라 예측할 수 있다.
4.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택이 무엇인지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정도의 집은 나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을 평생 가난에 쪼들리며 살고 있다.(61쪽)
⇨ 자기가 갖고 싶은 집이 어떤 집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남을 따라 해서 집을 장만하느라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는 것도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과 비교하여 자신도 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을 듯하다.
5.
세상에는 남의 말이란 통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때때로 이들은 나에게 채식만 하면서 살 수 있느냐는 등의 질문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기 위해(왜냐하면 핵심은 신념이니까.) 대못만 먹고도 살아갈 수 있노라고 대답해주곤 한다. 그 사람들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들은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101~102쪽)
⇨ 대못만 먹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대답한 소로우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유머인인 듯.
6.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는 그들이 절실히 원하는 바를 도와주라. 비록 그것이 당신이 보여주는 모범이며, 그 모범이 그 사람들이 따르기 힘든 것일지라도 말이다. 만일 돈을 주려거든 그 돈으로 무엇을 해줄 것이며, 돈을 그냥 내주지는 말라. 우리는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가끔 있다. 가난한 사람은 누더기에 지저분하고 괴상망측한 꼴을 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그들이 춥거나 배고픈 것은 아닐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하고 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는 그의 취향 때문이지 단지 불운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준다면 그는 그 돈으로 누더기를 더 장만할 가능성이 크다.(116~117쪽)
세상에는 도끼로 악의 뿌리를 내려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면, 악의 가지를 치는 사람은 천 명이 있다고 하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주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 방식을 통해서 그가 없애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불행을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조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사람은 노예 한 명을 판 대금으로 노예 아홉 명에게 일요일 하루만의 자유를 사주는 경건한 노예 농장 주인과도 같은 것이다.(117쪽)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집 부엌에 고용함으로써 친절을 베푼다. 부엌일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더 친절한 처사가 아닐까? 여러분은 수입의 1할을 자선사업에 바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차라리 수입의 9할을 바쳐 자선사업을 끝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117쪽)
자선은 인류가 평가를 충분히 해주는 유일한 미덕이다. 아니, 그것은 지나친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이기심이다.(118쪽)
⇨ ‘월든’을 읽다 보면 난해하여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자선이나 박애 정신을 언급한 내용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박애 정신’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월든’에서는 ‘자선 사업’으로 해석해 놓았다.) 소로우는 왜 ‘자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자선으로 인한 문제점을 생각해 보았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늘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1) 남에게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2) 남에게 의존함으로써 독립된 삶을 살 수가 없다.
3) 갑을 관계를 형성하여 자존감이 떨어진다.
4) 주체적 자세를 가질 수 없다.
이와 같이 내 생각을 펼쳐 볼 수 있었던 것은 소로우의 글 덕분이다. 소로우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7.
그리하여 나는 나의 청빈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고도 잠시 동안이나마 부자가 된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농장의 경치만은 그대로 소유하기로 했으며, 그 후에도 손수레를 사용하는 일이 없이 해마다 경치의 소득을 거두어왔다. 경치에 관해서라면,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이며,
세상에 내 권리를 의심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127쪽)
⇨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가 될 수 있다고 표현한 것이 신선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될 때 그 순간 ‘아름다운 풍경의 주인은 나다’라고 생각해 봐야겠다. 그러면 그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으리라.
8.
‘아침 공기’에 대하여 쓴 글을 보자.
내가 진정 아끼는 만병통치약은 희석하지 않은 순수한 아침 공기 한 모금이다. 아,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새벽에 이 아침 공기를 마시려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아침 시간에 대한 예매권을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침 공기는 아무리 차가운 지하실에 넣어둔다 해도 정오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전에 벌써 병마개를 밀어젖히고 새벽의 여신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210쪽)
⇨ ‘아침 공기’에 대해 쓴 이 글만 봐도 소로우의 탁월한 문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아침 공기’에 대해 우리가 글을 쓴다면 소로우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