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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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글씨는 책 속에 등장하는 글귀이거나 그 변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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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78736C14-6736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836.

 

우선 오늘 획득한 음성자료를 첨부한다.

 

(번역 불가) 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라는 짧은 명칭 말고는 남아 있는 개인정보가 전혀 없는 이 불가사의한 문학가, , 킴이라고 부를까요. 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테크놀로지가 오늘날 대부분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대충 비슷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그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서술된 사건들이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어떨까요. (청중의 탄성) , 화면을 보시죠.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자료 중 왼쪽은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 속에서 저희 연구팀이 서치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은 대변동 이전의 전자정보공간지층에 화석으로 남아 있던 데이터 조각들을 복원하여 재구성한 작가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는 서사구조입니다. 마더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은 왼쪽 화면의 실존 인물 사례와 오른쪽 화면의 작품 속 서사가 98% 이상 일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청중의 탄성, 짧은 박수, 잠깐의 정적) , 맞습니다. 인류 구술사 아카이브에는 수십억 인간의 생애에 해당하는 자료가 보관되어 있으니 특정 소설의 서사와 거의 일치하는 인생사가 기록되어 있을 확률이 있지요.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꽤나 많이 닮았고, 대변동 이전에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청중의 웃음) 실제로 구술사 아카이브 자료들 간에도 90% 이상 일치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 단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무궁한 우주의 역사에서 특정 사건을 단 한 사람만이 겪는다는 것이 오히려 참 희귀한 일이겠지요. 그렇지요? (청중의 대답) 그렇습니다. (정적) 그렇다고요. (청중의 웃음) , 제 설명이 부족했나 보군요. 그러니까, 킴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등장하고 구술사 데이터와 98% 이상 일치한 그 서사들은, 지금껏 우주에서 단 한 번,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실현된 희귀한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청중의 탄성)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소설가 킴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오직 한 번만 벌어질 서사를 겪어내는 딱 한 명의 사람들에 관해 미리 썼습니다. 마치 그 일이 그렇게 될 것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청중의 탄성, 장내의 혼란, 변역 불가) 하다는 점에서 우리 연구팀은 오랜 시간 이런 신비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탐색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킴의 기적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아카식 레코드입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군요. 아카식 레코드란 간단히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커다란 책입니다. 그러니까 신비의 킴은 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마치 우리가 정보망을 유영하듯 그 커다란 책을 탐색하다 발견한 특별한 사건들을 소설의 외피를 입혀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죠. 비과학적으로 들린다구요? , 그렇습니다. 비과학적이지요. 현상 자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올라서 있어서 그렇습니다. 과학은 늘 수많은 비과학들을 품어가며 몸집을 키워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수많은 것들이 한때는 기적 또는 마법이라고 불렸지요.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법이지요. 어쩌면 이제, 우리의 과학은 아카식 레코드를 접시 위에 올려 놓은 게 아닐까요? 킴의 기적이라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말이지요. 우리가 더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자료가 책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강연자는 작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하긴, 대변동 이전 자료의 오염 정도를 생각하면 저만큼 접근한 것도 대단한 성취 같다. 이미 죽었겠지만 칭찬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름이 김초엽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자료의 열람 기록 속에서 X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지역 시간대로 30년 전, X는 이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를 신청한 듯하다. 지난 세 번의 탐사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으니 꽤 오랜만에 만난 셈이다. 마지막 발견에서 그와 나의 시간축 변위가 70년이었으니, 우리는 아마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다.

 

X, 당신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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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할머니.

 

저는 지금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에 와 있어요. 맞아요. 그 책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주인공 안나가 찾아가려던 바로 그 행성이요. 이 행성은 아직도 이용할 만한 웜홀이 발견되지 않아서, 블루 다이브가 아니었다면 아마 방문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희소광물 리커다트의 인기가 식고 동시에 매장량도 줄어들면서 이 행성은 이제 한산한 휴양행성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마음씨가 좋고 지구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어요. 편안하게 며칠 묵었다가 가려구요.

 

여기도 책은 없는 것 같아요. 표제작의 행성이라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말이에요. 도서관에서 기록물을 뒤져보니 과거에 이곳에 책이, 최소한 책의 흔적이 있었던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제가 만나본 사람 가운데 몇몇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의 서사와 유사한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 서사가 기록된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요.

 

할머니, 우리는 자주 이야기했잖아요. 안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나는 결국 우주를 멀고 먼 우주를 건너 이곳 슬렌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워프 항법도 불가능하고 웜홀도 열려있지 않은 이곳을, 블루 다이브도 발견되지 않았던 그 시기에? 어릴 적 저는 늘 안나가 어떻게든 이곳에 도착해 남편과 아들을 만났을 거라고 우겼지만 할머니는 한 번도 제게 져주시지 않았던 거, 기억하세요? 고집스럽게 그 대목,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대목을 짚으며 고개를 저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 행성은 공전 궤도와 주기, 자전 속도나 자전축의 각도 같은 것들이 지구와 너무 흡사해서, 저녁이면 지구의 것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져요. 언덕에 올라 해 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려요. 이 노을의 끝자락에 할머니의 도서관이 붉게 서 있을 것만 같고, 사서실에서는 여전히 할머니가, 시력개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시던 할머니가 안경테를 추켜 올리며 창 너머로 타는 붉은 하늘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아서, 그냥 뛰어 들어가 안기면 꼭 할머니와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쁘면서 슬퍼요. 이제 도서관에 할머니는 없고 할머니의 마인드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슬프면서 기뻐요. 얼른 책을 찾아야 할머니의 인덱스를 다시 알아낼 텐데. 언제나 도서관 안에 있는 할머니. 하지만 검색할 수 없는 할머니. 분실된 할머니. 세계 속에서 세계와 분리된 할머니, 우리 할머니…….

 

그냥 내일 다시 노을이 지기 전에 다이브를 할까 봐요.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언제가 되어도 떠날 기약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 . 할머니, 이 행성에서 케빈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그것도 최초의 기록을요. 이 행성 시간대로 150년 전쯤에 케빈이 다이브를 시도한 기록이 남아 있었어요. 150년이면, 그간 찾아낸 흔적 가운데 시간축 변위가 가장 큰 기록이잖아요. 어쩌면 케빈은 이 행성에서 여행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넓은 우주에 같은 책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고, 그 사람과 시간축 레이스를 하며 우주 곳곳에서 스치고 지나간다는 거 말이에요, 할머니.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이에요. 나중에 꼭 할머니를 찾아서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줄이는 기분이거든요.

 

, 정말, 케빈은 누구일까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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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시공간좌표 hXRW6511592C14-67782.

동기화된 현재 시간 0320.

 

감정의 물성은 최초엔 그야말로 형편없는 상품이었다. 마약성 물질을 방출하여 중추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원시적인 작품으로, 신기술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어떤 감정에 물성을 부여했다는 개념 자체로 소비자들에 호소하는 일종의 유행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이므로.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 다양한 색깔의 차돌들은 일종의 감정 냉장고로서 기능하고 있다. ‘즐거움이라는 상품을 예로 들면, 사용자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었을 때 발산하는 특유의 뇌파를 수신한 다음, 저장된 사용자 정보를 검색하여 사용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오감 자극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파장 지문에 일치하는 시그널을 발산하여 신체의 호르몬 기제가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기능도 지니고 있다. 특히 시공간연속체를 서핑하는 블루 다이버들에게는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정교하지 않은 몇 번의 다이브만으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모두 사라진 시간대에 불시착할 수 있는 위험을 항시 감지하고 사는 여행자들의 감정은 정상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상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김초엽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이미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마더 컴퓨터 내러티브 분석 시스템이 실제 인물과의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한 작품도 감정의 물성이 유일하다. 현재 감정의 물성을 제조하는 기업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아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흔적을 찾아 이 행성으로 다이브했지만 기록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X 역시 여기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간 듯하다. 이 지역 시간대로 20년 전.

 

X., 우리가 같은 책을 찾아 우주를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당신도 알겠습니다. 내가 다녀간 곳에 당신의 흔적이 없다면 그 말은 곧 그 행성에서는 당신의 시간축이 나를 뒤따라오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블루 다이브라는 위험한 기술에 몸을 싣고 우주의 파도를 올라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신과 나만큼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미끄러져 스쳐 가는 이들이 또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쩐지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이 레코드가 당신에게 전달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있다면 그곳에는 기록이 될 테니까요. 어쩌면 김초엽과 같은 사람이 다시 있어, 당신에게 보내는 내 말을 발견해 이야기로 묶어줄지도 모르니까요. 묻습니다. X,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슨 이유로 사라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 이 광막한 우주를 떠돌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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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케빈.

 

매일 할머니에게 보내는 기록을 남겼어요. 오늘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케빈, 안녕하세요. 우와, 되게 어색하다. 하하. 하하.

 

얼마 전 케빈의 행성에 다녀온 것 같아요. 슬렌포니아 행성계 제3행성, 맞죠? 제가 거기 들린 시간대에서 150년 전에 케빈이 다이브한 기록을 보았거든요. 케빈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다이브할 때에 그곳에는 케빈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군요. 딥프리징을 받아 잠들었거나 우주를 다이브하는 사람들을 빼면요. 다이버라면 가장 듣기 싫어하면서도 다른 다이버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바로 그 질문을 케빈에게도 하려구요. 케빈은 왜, 다이브를 시작했나요? 케빈을 아는 사람들, 케빈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 외롭고 아픈 여행의 길을, 케빈은 왜 선택했나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제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우리가 서로 스친 흔적이 케빈에게 알려줬겠지만, 나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찾아서 우주를 떠돌고 있어요. 단순한 수집욕이라면 나도 케빈도 이 미친 짓을 시작하지 않았겠죠. 이러는 게 이 우주에 우리 딱 둘뿐이니까, 나는 케빈 역시 나처럼 이 책 속 일곱 이야기 중 하나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추측해 봐요. 딱 맞췄죠? 케빈은 뭔가요. 나는 관내분실이에요.

 

케빈도 읽어봤겠지만 관내분실은 망자의 시냅스 데이터를 그대로 보존한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예요. 어머니의 마인드에 접속할 수 있는 인덱스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인덱스를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와의 감정적 접속점도 찾는 아름다운 단편이죠. 우리 할머니가 그 도서관의 사서였어요. 물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서는 아니구요. 도서관은 지금도 있어요. 요즘은 마인드를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접속하는 추세라서 도서관 이용객들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납골함을 집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마인드를 가정에 보관하는 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도 도서관은 문을 닫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유족이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마인드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지요. 혼자 있는 마인드들이 외롭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마인드에 접속하곤 했어요. 정작 당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간다는 말을 제일 좋아하셨으면서. 후후. 그러던 중에, 할머니는 어떤 마인드와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존재를 알게 된 것 같아요.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에서 관내분실 사건의 기록을 찾아보고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이 도서관이 생기기도 전에, 마인드 스캐닝이 발전하기도 전에 벌써 관내분실 사건의 전말을 본 듯이 세세하게 서술한 책이 있었다는데. 거기도 도서관은 도서관인지라, 할머니는 사서라는 직업을 최대한 활용해 그 책을 찾기 시작했어요. 30년쯤 책상 앞에 앉아 온 우주를 뒤적이다 마침내 책을 발견했고요. 도서관에 배송된 그 책을 들고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태어났다고 해요. 신기하죠? 그래서 내 이름이 초엽이 되었어요. , 내 이름은 초엽입니다.

 

어린 초엽이는 그 책을 통해 말과 글을 배웠지요. 할머니는 늘 내 방에 와서 책을 읽어주셨는데, 이야기가 끝나면 꼭 다시 책을 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혼자 그 책을 만지게 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울며 떼를 써봐도, 이유를 물어봐도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죽으면 이 책은 초엽이한테 줄게, 그때까지는 할머니 책이야, 하고 타이르기만 하셨지요. 할머니는 그 약속을 지켰을까요?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우주 귀퉁이에서 케빈에게 편지를 남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그 책을 우주 어딘가로 보내버리셨어요. 그리고 당신은 인덱스 없는 마인드가 되어 도서관 안으로 사라져 버렸구요. 왜 그러셨을까요? 알 수 없죠. 듣지 못했으니까. 알고 싶죠. 이유가 너무나 알고 싶어요. 그거예요. 내가 우주를 떠도는 이유. 할머니가 우주로 쏘아 올린 그 책을 찾아서, 할머니의 인덱스를 찾아낼 거예요. 할머니의 마인드를 만나서, 모든 걸 물어볼 거예요. 왜 그랬는지. 강아지가 다시 물어올 것을 알고 던지는 원반처럼, 왜 우주로 책을 던지고 나도 던져버렸는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케빈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엇 때문에 이 차갑고 쓸쓸한 우주를, 영원한 밤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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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시공간좌표 tXRW7761444C14-67993.

동기화된 현재 시간 1700.

 

류드밀라에게.

 

안녕하세요. 케빈입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는 늘 어색하군요.

 

X라는 이름은 당연히 당신의 이름이 아니겠다 싶기도 하고, 어쩐지 그렇게 부르면 영영 당신을 만날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멋대로 당신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류드밀라는 공생 가설의 주인공이죠. 우리 안에 있었던 관대한 공생자의 존재를 잊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들의 소멸된 행성을 그려내고 그들의 소멸을 슬퍼할 줄 안 유일한 사람.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인가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우리를 이 거친 우주로 내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우주 만한 이유가 있어야겠지요. 내 이유는 이렇습니다. 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인 안나의 손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손자의 손자의 손자쯤 되겠습니다. 류드밀라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나가 슬렌포니아에 도착하기를 바랐나요? 아니면 한 줌의 외로움이 되어 우주를 영영 떠돌 거라고 예상했을까요? , 어쨌든 결말을 전해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안나는 결국 슬렌포니아에, 우리의 곁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개의 우연이 겹쳤지요. 일인용 셔틀을 타고 우주로 향한 안나는 그때까지 미발견이던 웜홀을 통과해 완전히 다른 행성계에 도착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동면을 선택했고, 블루 다이브 기술이 발견된 이후 깨어나 슬렌포니아로 다이브한 것이지요. 그녀가 도착했을 때 슬렌포니아에는 그녀의 손자의 손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이미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어요. DNA 매칭이 있었으니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쉬웠지요. 안나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손자의 손자의 집에서 살면서 손자의 손자의 아들이 아들을 낳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저는 안나를 할머니이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머니로 알고 자랐습니다.

 

저는 안나에게 그 책의 존재에 대해 들었습니다. 직접 본 적은 없었고, 안나가 그 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책을 간절히 찾는 지구의 어느 도서관으로 보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가봤을 때는 그곳에도 이미 그 책은 없었습니다만. 안나의 머릿속에는 그 책의 내용이 정확히 들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김초엽 책 속의 일곱 작품을 안나의 구술로 들었습니다. 특히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죠. 지금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알게 되면 정말 놀랄만한 것은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우주 정거장에서 오지 않는 우주선을 기다리는 동안, 안나가 가장 많이 읽은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사실입니다. , 맞습니다. 안나는 그 우주정거장에서 그 우주정거장에 머무는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끝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자기는 일인용 셔틀을 타고 가능성이 없는 우주로 내쫓기듯 걸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나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주로 나가면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는지,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겠지요. 김초엽이 거기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가야만 했답니다. 그녀는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우주로 무모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야기가 끝난 곳에서 다시 이야기를 만들어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내게로 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었지요. 안나는 행복하게 살다 가족의 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제야 안나의 이야기가 끝이 났던 거지요.

 

제가 그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뒤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책 속에서 안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었어요.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생겨나는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해 한탄했지요. 제로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주를 향해 온몸을 내던지는 안나의 모습은 위대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됐어요. 작품으로서는 몰라도, 안나의 이야기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남은 안나의 삶을 그 작품 뒤에 덧붙이려 합니다. 그 이야기는 완결이 나지 않았어요. 안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사랑하며 떠났고, 우리 인류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나는 지금 지구 근처의 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류드밀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10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습니다. 조금씩 우리의 시간축이 가까워지고 있군요. 아카식 레코드가 아니라, 실제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요즘은 잠이 줄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당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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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케빈. ‘마을에 다녀갔군요.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이곳으로 다이브 했거든요. 내 시간축에서는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포뮬러 캘리브레이터에 문제가 생겼는지 이곳 사람들은 13년 만에 나를 다시 본다고 하네요. 꼬맹이들이 어른이 다 되었어요. 이곳 시간으로 3년 전에 당신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당신은 검은 머리칼에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사람이고, 웃을 때 덧니가 보인다고 하는군요. 자기 덧니는 마음에 드나요? ‘마을사람들은 어떤 특징도 그저 하나의 특성으로 볼 뿐이지요. 그들은 서로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고, 때로 어떤 결점들은 결점으로도 여겨지지 않기도 하구요.

 

당신의 다이브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혹은 내 다이브가 조금만 일렀더라면 이번에 우리는 마주칠 수 있었을까요. 이 우주는 도대체 어떤 공간일까요. 아니, 대체 공간이긴 한 걸까요? 내가 이곳에서 당신에 대해 듣는 동안, 당신은 어느 곳 어느 때를 거닐고 있을까요. 닿을 듯 끝내 닿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린 우주의 구조라면, 한 뼘이 우주보다 멀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찰나가 138억년보다 길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케빈, 우주 방향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늘어갑니다. 그곳에 있나요.

 

 

 

*

 

레코드.

시공간좌표 aXRW042젠장.

 

류드밀라. 아니, 초엽. 당신이 지금 내가 있는 이 고서점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고 간 것이 1년 전의 일이랍니다. 포뮬러의 계산 밀도를 고려해보면 이건 시간 단위, 아니 어쩌면 분 단위의 어긋남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다이브 전에 했던 식사를 딱 한 번 거르기만 했어도…….

 

요즘은 내가 이 우주를 떠도는 게 책을 찾기 위해서인지 책을 찾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인지 헷갈립니다. 다이브를 할 때마다 망설입니다. 어쩌면 이곳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안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멈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허접한 셔틀을 타고 우주 끝까지라도 가는 법이라고 나는 배웠습니다. , 그러니까, 이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것은 아닌데, 아니, 또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 그러니까, 나는, 나는 이제 지구로 향합니다. 내 단말기가 예측한 초엽의 다음 동선 가운데 제일 확률이 높은 곳이 거기군요. 내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내 말이 들리지는 않겠지만, 부디 당신이 그곳에 있어주기를.

 

, …….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어색하기도 하고, 타이밍도 아닌 것 같긴 합니다만, ……아름답습니다. 사진 말이에요. 당신…….

 

 

 

*

 

레코드.

 

케빈. 초엽이에요. 저는 지구에 와 있습니다. 약간 지쳤달까요.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며 조금쯤 쉬고 싶어졌어요. 책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일에는 기약도 없고, 우리는 끝없이 엇갈리기만 하는데 이놈의 우주는 생각 없이 자꾸 넓어지기만 하고……. 어쩌면 케빈이 우리 도서관에 들를지도 모르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집에 머물려고 해요. 사실은 내 단말기가 케빈의 동선을 분석했는데 다음 다이브 장소로 지구가 유력하다고 해서…….

 

이곳에 오면 꼭 노을을 보여주고 싶어요. 케빈이 살던 행성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닮았을 거예요. 내가 봤거든요. 어쩌면 그때 노을을 보던 장소가 케빈이 살던 곳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장소가 특별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 있나요? 나는요, 그날의 노을이 떠오를 때마다 이곳의 노을이 좋아져요. 지구 밖을 떠돌면서 고향의 노을을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투곤 했어요. 우주는 사람을 변화시키니까요. 나는 우주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나를 발견했어요. 공간이 구부러지고, 시간이 흩어지는 거대한 수렁 속을 헤매다니는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마음이란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고 약한가요. 위아래도 없는 우주에 매여 둥둥 떠다니는 마음은 작은 슬픔에도 산란하고 흩어져나가요.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분실된 여행자들이 아닐까요?

 

언제부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울적할 때마다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눈은 선명하고, 턱은 단단해 보였어요. 저 무서운 우주가 덮쳐오는데도 망설임 없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갔지요.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다 아는 사람처럼. 당신을 생각하면 든든했어요. 나도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다이브할 수 있었어요. 당신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러면서 점점, 당신이 찾는 책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요. 우습죠. 이 넓은 우주에서 단 한 번 마주친 적 없는 사람의 유일한 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우주를 돌고 돌아 조금씩 자신을 마모시켜가는 가운데에도 단 한 번도 마모되지 않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담은 눈을 하고, 내가 여기 지구에서 당신을 기다려요. 노을이 내리는 저녁이면 언덕에 있겠습니다. 케빈, 노을을 따라, 여기로 와요.

 

 

 

*

 

레코드.

레코드.

 

시공간좌표 eXRW11……지구. 초엽, 나 지금 지구입니다.

케빈.

 

이 작은 행성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같은 대기 아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향인 이곳이 어쩐지 새로워요.

 

당신은 어긋남과 스침으로 이루어진 소행성처럼 언제나 멀게만 보입니다.

알아요. 우리의 그 많은 스침과 어긋남들을 모아 하나의 마주침으로 바꿀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당신을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람들일 거예요.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가 우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하지만 아카식 레코드에 우리의 만남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첫 만남은 이미 두 번째 만남일 것이고,

오늘 우리는 처음인 동시에 두 번째 만나게 되는 셈이잖아요.

동시에 이 우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우주에서 우리와 닮은 만남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김초엽의 소설처럼요.

우리가 찾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들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뒤잇는 여백 속에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마 끝나지 않고

하지만 마지막 마침표가 찍혀도 이야기가 마쳐지지 않듯

우리가 다시 책을 찾아 온 우주를 떠돌게 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우주를 떠돌며 책을 찾아다닐 거라면,

내가 당신의 우주가 되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당신의 책이 되어 드리면 안 될까요.

빛의 속도로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우주지만,

자신의 인덱스조차 찾지 못하고 분실된 사람들의 우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

 

(청중의 박수, 정적) 이제 우리 연구의 초점은 아카식 레코드가 도대체 어디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요.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란 어디에도 없는 동시에 모든 곳에 있다는 주장이지요. 언뜻 들으면 재미있는 헛소리 같지요? (청중의 웃음)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시공간의 최소 단위를 하나의 알갱이라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각각의 알갱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이고, 그 알갱이들의 배치들 또한 하나의 유일한 배열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배열 하나가 하나의 데이터를 의미한다고 하면, 시공간은 무한히 작은 단위로 미분할 수 있으므로 이론적으로는 우리 손아귀에 들어올 한 줌 크기의 시공간 연속체에도 무한에 가까운 양의 자료가 저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이해가 되시나요? (정적) 하하하,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대본이고, 우리는 그 펼쳐진 대본을 무대로 삼아 그 위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연기하는 등장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맞습니다. 말씀하신 바로 그 문제가 사람들이 이 학설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높은 허들로 작용하지요. 얼핏 들으면 이 학설은 그야말로 결정론의 결정판처럼 들립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어딘가에는 이미 당신이 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나 의지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중의 답변, 웃음) 대단하시네요. 맞습니다.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고 모르고가 중요하지도 않지요.

 

하지만 사고의 틀을 조금만 전환하면, 이런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 여기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AB라고 하죠. 그런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사람은 각각 우주의 끝과 끝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빛의 속도로 140억 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는 광대한 우주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잖아요. A가 전하는 사랑의 말 역시 어떤 매질에 실어 보내도 빛의 속도로는 B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럼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청중의 답변, 웃음) 하하하, ,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지요. 슬프지만 그게 제일 현명한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카식 레코드가 없는 우주라면요. A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B의 사진을 어루만진다면 그 사건은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B가 술에 취해 엉엉 울면서 A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면 그 사건 역시 아카식 레코드에 이미 기록된 사건입니다. AB를 향해 남긴 모든 사랑의 말을 아카식 레코드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B가 그 말을 직접 들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미스테리한 킴처럼, 외로운 B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그는 저 우주의 끝에서 역시 외로운 A가 던진 모든 말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꽤 멋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게 우주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하세요. 기록하세요. 닿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우주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쏘아 올리세요. 저 우주의 무한한 공백을, 이미 기록된 여러분의 이야기로 기록하세요. 인류가 이 우주에서 맡은 가장 크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세요.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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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눈물 좀 닦고...일어나서 박수 막 치다가...ㅋㅋㅋ 같은 책 읽고도 산출물 수준차가 은하와 은하만큼 머네요. 저 이 글은 앞으로 한 열 번쯤 더 읽고 싶습니다. ㅋㅋㅋ이 책이 사라지지 않아 찾으러 헤매지 않아도 되고 같은 책 읽을 수 있어 천만 다행인 우주에 살고 있구나 안도 하는 중입니다.ㅎㅎㅎ

syo 2020-01-28 22:34   좋아요 1 | URL
열몇 시간을 이 책 다시 읽고 이 글 쓰는데만 퍼부었어요.
오늘 퇴근하고 회식 있었는데 거기도 안 가고...... 애들이 형은/오빠는 대체 왜 이렇게 비싸요? 막 그러는데, 제가 정말 비싼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책갈피는 손에 쥘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1-28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등상금 30만 원 노리시고 올린 리뷰시죠? ㅎㅎ

글 넘 좋아서요. 1등을 응원합니다. ^^

syo 2020-01-28 22:35   좋아요 0 | URL
30만원 언감생심입니다.

.....5만원은 혹시나 하고 ㅋㅋㅋㅋㅋㅋ

무식쟁이 2020-01-28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야.(반말아님,혼잣말)
쇼님의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올게요.
 


 

 

1

 

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경복궁을 법궁法宮이라 하고 창덕궁을 비롯한 나머지 네 개의 궁궐을 이궁離宮이라 한다. 그 부르는 모양에서부터 벌써 임금이 몸을 오래 두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드러나는 바가 있는데, 실제로 임금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곳은 창덕궁이었다고. 그 사랑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태종에게 경복궁은 아버지나 형제를 겨누고 벌인 칼부림의 무대였다. 광화문에 뿌려진 피 냄새가 탐탁스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은 태어나 자란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그 궁에서 폭정하고 실정하다 쫓겨난다. 왜란 이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을 중건한 선조와 광해군의 심리 속에도 아마 어떤 결락 혹은 정치적 노림수 같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후대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다른 이유를 찾게 된다. 경복궁을 둘러보고 광화문을 되돌아 나올 때면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법식에 따라 배치된 건물, 지나치게 거창한 의미를 두고 획정한 공간 같은 것들은 보기에 장엄하고 시원한 맛은 있지만, 이 공간에 평생을 거처할 것을 상상하면 아찔한 느낌이라고. 창덕궁은 훨씬 숨통이 트인다. 정문에서 정전까지 대로가 트여 있는 경복궁을 궁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에 도착하기까지 우회전 한 번, 좌회전 한 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의아할지도 모른다. 경복궁에 비하면 창덕궁은 지세를 누르지 않고 풍광에 순응하는 자세로 만들어낸 공간 같다. 공간을 둘러보는 관람객의 발길이 직각으로 꺾이지 않고 곡선에 가까이 에두를 때, 그 공간에 어우러진 수목, 연못, 심지어 바람이나 새소리 같은 것들도 둔각을 이루여 관람객을 품는다. 거닌다는 것은 꺾지 않고 두르는 일이고, 모서리가 많은 공간은 거닒에 저항한다.

 

예리하게 꺾여 들어가는 사람이고 싶은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은 때가 있다. 정확하게는,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함께 거닐고 싶은 사람, 그 안을 거닐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사람이 있다.

 

창덕궁을 다녀왔고, 간단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 3권의 책을 빌려다 읽고 있다.


 

 

 

2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그 너른

 풀밭을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거의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송찬호초원의 빛〉 부분 

 

어떤 계절이 사랑에 포개어질 때, 그 사랑은 계절에 영영 포개어진다. 그날의 기후는 시간을 돌고 돌아 늘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고, 나사가 꼭 물리지 않은 책상다리처럼 마음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동할 때, 흘러간 사랑에 물든 계절의 저릿한 습격을 받을 때, 그땐 바람이 불었었지 생각하면 창 너머로 여지없이 바람이 불고, 그땐 비가 내렸었지 생각만 하면 비가 창을 때리지는 않더라도 마음 안에서 빗소리가 나는, 기온을 체온이라 부르고 싶거나 바람결을 체취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슬쩍 밀렸을 뿐인데 온 지구가 덜렁- 하는, 욕조에 띄워놓은 고무공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뗀 것처럼 꿀렁- 하는 요동과 함께 흔들대다 씻긴 얼굴을 쏘옥 다시 내미는,

 

창밖엔 지나가는 1월과 오고 있는 2.

 

 

 

3



교토 바이브란 창을 마주 앉아 목선을 소박하게 드러낸 여성의 뒷모습 같은 것인가요?

 

 

 

4

 

어제는, 이걸 망한다면 당신은 모든 파스타를 멸망시킬 그랜드 똥손입니다- 라는 평을 받는 파스타 계의 만만이, 알리오 올리오를 망했다. 내 똥손에 나도 무척 놀랐다. 그렇게 태어난 아아알리오 엉엉울리오는 생긴 것도 되게 재밌었다. 사진을 찍어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이 똥손이라면 이 정도 코믹한 요리는 앞으로도 종종 만들게 될 것 같다는 확신에 일단 스킵.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던지라 와구와구 쳐먹었는데, 와하하, 정말 맛도 너무너무 재밌어요! 와하하하.

 

폭망의 원인은 조리 단계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로 다양했는데, 무엇보다도 올리브오일이 아니라 카놀라유를 썼다는 데서 팬에 기름을 두른 시점에 벌써 망하고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 그저께 이마트에서 알리오 올리오 재료를 구매하면서 올리브오일을 사야 한다고 말했더니, 三曰, 우리 집에 이미 카놀라유가 있다. 너는 기름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느냐? 심지어 마늘이랑 고추를 볶은 카놀라유와 올리브오일을 구분할 수 있느냐? 하였다. , 졌다. 논리적이야. 그런 이유로 카놀라유로 볶은 알리오 올리오를 꾸역꾸역 먹은 것이다. 아무리 무심하고 알뜰한 놈도 혀는 있는 법. 올리브유의 부재가 폭망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증언을 전달하며, , 알리오 올리오의 올리오가 올리()()이면 어쩌려고 이렇게 만용을 부렸냐?(물론 개소리입니다) 너 카놀라유하고 친하냐? 폰을 꾹꾹 누르며 묵묵히 식사를 마친 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올리브유 주문 했다. 내일 온대……. 사실 syo가 요리를 못해서 망한건데 ㅋㅋㅋㅋㅋㅋ 정말 이맛에 너랑 친구한다.

 

D님이 앉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알라딘 코믹 요리 달인의 옥좌를 단숨에 찬탈한 듯.

 

 

--- 읽은 ---



14.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 60 ~ 132

: 저녁에 돌아오는 것들의 발소리가 차곡차곡 쌓이면 해가 뜨고, 해가 뜨면 눈을 감지 않고서는 마주침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늘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돌아오는 모든 것들이 야옹야옹 느른하게 울면서 사뿐사뿐 가볍게 찾아와주기를.

 



15. 맛있는 교토 가정식 / 정혜인 : 120 ~ 272

: 요리왕이 되고 싶었는데 실수로 요리 선사(禪師)가 되는 책을 빌려 버린 게 아닌지.

 



16. 서울 선언 / 김시덕 : 266 ~ 413

: 서울로 정했다. 근교에 자리를 잡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유동하며 살아가겠지. syo는 이유 없이 서울을 사랑했고 그러다 보니 또 서울을 사랑할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생기기도 했다. 살다 보면 그런 이유는 점점 늘어날 거고, 때로는 반대의 이유도 찾아내게 되겠지. 그렇게 서울을 둘러싼 마음의 세목들이 쌓여가다 보면, 어느 날 서울을 위해 혹은 서울에 반해 무엇인가 선언하고 싶은 날이 올지도 테고. 그날을 미리 생각해 보니, 이 책은 어쩌면 읽을 책이 아니라 써야 할 책이 아닐까 싶다.

 



17. 보고서의 법칙 / 백승권 : 179 ~ 335

: syosyo고 보고서는 보고서다. 오빠는/형은 글을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니까 보고서 걱정 없겠어요- 라고 말하는 동기들이여. 니들이 syo가 알라딘에 써대는 글을 한 번 봐야, 왜 내가 불안에 떨며 손톱을 와득와득 씹다가 이런 책을 자꾸자꾸 읽어대는지 알게 될 텐데…….

 



18. 그놈의 소속감 / 김응준 : 134 ~ 264

: 그래도 선생님은 5급이시잖아요, 나는…… 나는!!! 으아아아아아ㅠㅠ!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진짜 못난 마음일 뿐인가요? 으아아아아아ㅠㅠ?

 

 

 

--- 읽는 ---

실용 커피 서적 / 조원진 : ~ 113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케이시 윅스 : 62 ~ 127

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마즈다 아들리 : ~ 108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하는 창덕궁 / 창덕궁문화재해설팀 : ~ 8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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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1-26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D님은 그 자리에서 진작에 내려와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syo 2020-01-26 12:08   좋아요 1 | URL
으하하하하, 아닐걸요. 딱 어제 내려오신 거예요 그분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0-01-26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순간 ‘3‘ 님의 팬이 되었습니다~~
어느순간 syo 님께서 읽는 책보다 두 남자의 생활일기에 더 관심이 가네요 ㅎㅎ
저는 요리가 젬병인 사람이라서 이것 대신에 저것 보다는 이것엔 이것을 꼭 넣습니다. ㅎㅎ

syo 2020-01-28 20:49   좋아요 0 | URL
역시 이것을 넣어야 할 때는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넣는 것이 초짜 요리의 십계명이지요.....
三은 알라딘 등판의 때를 재고 있습니다.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1-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 좋은 날 궁 거닐고 싶네요. 보고서 쓰느라 독서까지! 무지 열심인 syo님, 따듯한 겨울 보내고 계신가요.

syo 2020-01-28 20:48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김초엽 선생님 책 리뷰 작성하느라 어제를 통째로 날리고 오늘도 썼는데, 제발 책갈피라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8 21:06   좋아요 1 | URL
와 방금 읽고 왔는데 이건 책갈피 정도가 아니라 적립금 30만원 각인데요?

로제트50 2020-01-2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우연이! 저희 가족은 25일에
창덕궁 옆 종묘를 다녀왔고 근처에서
알리오올리오 스파게티를 먹었다죠 @@
눈팅만하다가 반가와서요*^^*

syo 2020-01-28 20:4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반갑습니다 로제트50님!
희한한 우연이 겹쳤네요.
그런데 제가 만든 알리오 올리오는 사실 파스타도 아닌 수준이니까 겹치지는 않은 것일지도.....

Comandante 2020-01-2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서울 매니페스토가 기다려집니다^^

syo 2020-01-28 20:46   좋아요 0 | URL
한세월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서울에 입성한 풋내기니까요.

서울도 아냐 사실......

무식쟁이 2020-01-26 1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쯤되면 삼님께서 알라딘에 등장하셔야할듯...

syo 2020-01-28 20:4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지금 제 앞에서 모니터 잘못 샀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써야하나...
 


1

 

연휴가 시작되었다. 빨간 날들이 주욱 늘어서 있는 배치의 기쁨과 슬픔을 논하려면 우선 빨간 날과 검은 날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는, 그러니까 검은 날 아침에(혹은 그 하루 중 그 어떤 시간이라도) 어디론가 떠나야만 하는, 예를 들면 학생이랄지 직장인이랄지 뭐 그런 신분이어야 하는 것이다. 365일이 휴일이었던 1년과 그 전의 1년과 또 그 전의 많은 1년 들을 거쳐오는 동안 연휴에 대한 개념원리가 흐려졌던 syo였는데, (은 아니고 아직까지는 일 비스무리한 것)을 시작하면서 단숨에 잊고 살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래, 연휴란 이런 것이었지. 아오, 소중.

 

 

 

2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도 그러한가?

 

워낙 일 이슈가 지배적인 이 나라의 담론 구조상, 일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조차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추론할 수 있고, 심지어 어떤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자기가 일을 하며 겪었던 양 호들갑스럽게 묘사하며 듣는 사람을 속여 넘길 수조차 있다. 일에 대한 경험을 얻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일과 일을 둘러싼 사건, 감정, 정치, 관습과 윤리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일이 임금노동과 동일시되고 가정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일은 대표적인 사적 영역과 비교했을 때상대적으로 공적인 것으로 여겨지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여기에 내가 일의 사유화라고 부르는 과정을 일으키는 기제들이 추가로 작동한다. 첫 번째 기제는 물화物化. 오늘날 "생계를 꾸리려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기보다는 자연 질서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진다. 그 결과, C. 라이트 밀스가 썼듯이 우리는 의무로서의 일, 시스템으로서의 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일보다는 특정한 일자리, 혹은 일자리 부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인용구에서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것처럼, 노예가 "처음에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하듯이, 우리는 이런 사장, 저런 사장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뿐 사장에게 그런 권력을 준 시스템에 주목하지 않는다.

_ 케이시 윅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14

  

백수의 왕이라 불리었던 syo의 그 길고도 길었던 제위 기간 동안에 그가 많이 한 생각들은 대충 이랬다. 나는 왜 가난할까? 취직을 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왜 취직을 하지 못했을까? 능력이 없으니까. 나는 어떤 인간일까? 취직을 하지 못한 인간. 취직을 하지 못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가난하고 능력 없는 한심한 인간. 뭐가 뭔저고 뭐가 나중인지도 모를 이런 생각들을 뺑뺑이 돌리며 자아를 돌려깎는 동안, 왜 이런 생각들은 아예 할 수 없었던 걸까? 나는 왜 가난할까? 물려받은 부동산이 없으니까. 나는 왜 취직을 하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노동 말고도 신나고 재미나는 일들이 너무너무 많으니까. 나는 어떤 인간일까? 취직을 하지 않은 인간. 취직을 하지 않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뭐 그게 이런 인간 저런 인간으로 정의할 만큼 특별한 일인가 싶네.

 

 


모이시 포스톤Moishe Postone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와 서비스가 분배되는 구체적 메커니즘은 사회 관습이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임금노동의 사회적 역할은 필수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으며땜질할 수는 있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의 노동이 갖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기능을 명확히 하고동시에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이 노동의 산업적 형태와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이다이렇게 노동을 공적인 것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사적인 것으로개인적으로존재의 조건으로 만들려는 압력그 결과 탈정치화하려는 압력에 맞서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케이시 윅스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열심히 일하는가?, 19


포이어바흐는 헤겔과는 상이한 개념 구도를 통해 헤겔의 곤경을 돌파하고자 했다. '인간' '유적 본질' '소외'가 그것이다그의 비판은 기독교의 본질을 분석하며 제시한 '종교가 인간의 유적 본질의 소외'라는 테제에 가장 잘 드러난다인간의 유적 본질이 소외되어 대상화 된 실체가 종교이며 그것이 다시 우리를 지배하는 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이 종교를 이해하는 핵심이다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인간은 자신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본질을 대상화해 낯선 실체로 투사함으로써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그리고 낯선 존재인 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가 형성된다이로써 이제 종교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이라는 구도가 해명된다이렇게 인간은 본래 자신의 본질이었던 것을 외부로 투사해 낯선 것으로 만든 다음 그 낯선 것의 지배를 받는데그것이 바로 소외이다.

  이러한 종교 비판의 핵심은 '인간을 깨우친다'는 것이다이 소외론의 구도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마르크스의 국가 비판의 틀로 옮겨져 활용된다종교 비판을 통해 '천상에 대한 비판'이 '지상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헤겔의 주장처럼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고그것은 특수한 것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지양하는 보편국가 속에서 그 보편성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이제 종교의 소외 구도처럼 역으로 국가는 오히려 인간 본질의 실현인 시민사회를 억압하고 그 본질을 낯선 것으로 만들어 투사한 외적 실체가 됨으로써 인간들을 지배하는 소외된 대상이 된다이제 과제는 국가를 해체하고 시민사회 속에서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실현하는 일이다.

백승욱생각하는 마르크스』 117-118


천상의 비판을 지상의 비판으로 끌어오고, 노동을 당연한 것, 사적인 것, 존재의 조건으로 만들려는 악독한 놈들의 시도에 맞서서 마르크스는 싸웠다. 그런 그조차 노동 그 자체,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음영에 포획되어 네 가지 방식으로 소외된 노동 너머의 진정한 노동을 어떤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듯한 뉘앙스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노동을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고 자신을 정립하는 필수적 수단으로 보는 헤겔의 후계자로서 당연한 입장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보면, 한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 각각 신봉하는 대상인 베버와 마르크스 사이에, 뜻밖에 닿는 부분이 있는 셈일지도?

 

 


3

 

이 책이 하려는 가장 큰 일은 노동윤리의 폭파인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라는 질문은 겁나 오래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이노무 각박한 세상 ㅈ까라 그래!’하는 자본주의 비판에서 멈춰서는 게 아니라, ‘입에 풀칠하는데 노동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단 말이냐?’하는 식으로 노동윤리 자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작업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기본소득 이야기가 이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못하게 하는 말씀이 세상을 오래 풍미했고, 노동의 대가로서의 소득을 기본값으로 놓는 풍조(따라서 불로소득이라는 말에는 어떤 음흉하거나 비겁한 이미지가 슬쩍 묻어 있기도 하다)는 풍조가 아니라 신조에 가깝다.

 

일하지도 않는 것들한테 퍼주면 무너지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의 역사다. 반상의 법도가 무너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어쩌고저쩌고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당대에는 최고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고,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가장 근접한 인간들이었다. 이런저런 혁명과 진보와 새로운 지식 들이 맞물리면서 새로운 시대가 왔고, 에피스테메가 교체되고 나니 그들이 기반했던 지식과 사상은 더없이 낡은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오늘날 도리어 반상의 법도가 일찌감치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근간이 흔들렸던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늘 그런 일이 벌어진다. 오늘의 도그마dogma가 내일은 독사doxa로 밝혀지고, 후대의 사람들은 전 시대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고 비윤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들을 신봉하고 살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다. 지금 추파춥스를 쪽쪽 빨며 어린이집에서 블록을 쌓고 있는 아이들 역시 나중에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똑같은 표정을 지을 거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syo가 페미니즘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계속 유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저 물결은 신분 철폐, 노예제 철폐, 인종차별 철폐 등 각종 철폐의 성공적 역사(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와 너무도 닮은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건 결국 이렇게 될 일이다 싶어서, 후대의 눈에 이해 못 할 조상님으로 남고 싶지는 않아서.


노동윤리 역시 어쩌면 같은 과정을 밟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며 이 책을 읽어나간다. 기술과 사회제도에 관한 많은 책들을 버무려 읽어야 나올 답이겠지만, 이 책에는 이 책의 역할이 있을 것 같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syo 역시 노동은 해야 하는 한 마리의 슬픈 짐승일 뿐이라서, 며칠 전 연수원 동기에게 마니또 선물로 이 책을 건넸다.



  "지금 뭐라고 했어?"

  "축의금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해그까짓 오만원 내가 내준다고."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그깟 오만원 아끼려고 내가이러는 것 같아?"

  어째서인지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아직도 모르나본데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설거지전 부치기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나는."

  구재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구나그래서 쟤가 화가 났구나,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다는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결혼 준비하는 내내 지겹게 봐온 눈빛이었다.

장류진잘 살겠습니다


 

눈물을 닦고, 아무튼 잘 살자, 동기들아.

 

 

 

5

 

명절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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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1-24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일의 기쁨과 슬픔 저 책, 아직 안봤고 사실 딱히 관심도 없었는데.. 보고싶어졌네요.
연휴동안 완독입니까? 아이참.. 나는 어쩌지..(시무룩)

syo 2020-01-24 11:34   좋아요 0 | URL
연휴동안 완독인 것입니다!!
연휴에 딱 한 권을 목표로 삼아본것도 되게 오랜만이네요....

<일의 기쁨과 슬픔> 괜찮습니다! 다락방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난??

공쟝쟝 2020-01-24 19:29   좋아요 0 | URL
오마맛 이책 정말 재밌다구요! 작가님이 트랜디하셔서 미러링도 있구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2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업인으로서의 첫명절 이겠군요. 압박없는 편안한 연휴 되시길..

syo 2020-01-24 11:3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미리 공부해야 할 게 많네요.... 그래도 지금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압박 적은 연휴겠지요? ㅠ

수연 2020-01-24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미루고 있다가 연이어 올라오는 페이퍼에 결국 아 이제 그만 미루고 읽어야지 하고 얍!

syo 2020-01-24 11:3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저 진짜 드럽게 미루고 있었는데 ㅋㅋㅋ

공쟝쟝 2020-01-2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페미니스트 후대들은 아이를 낳지않아 세상은 종말합니다. 그러니 뒤처진 조상이 될일은 없겠지요. 지금까지 제가 공부한 대안으로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 입니다. 우주와 지구를 위해 사회주의보다 좋습니다.

syo 2020-01-24 11:37   좋아요 0 | URL
혜안에 그저 탄복합니다, 슨밴님.....🙊

공쟝쟝 2020-01-24 11:42   좋아요 1 | URL
역시 혁명보단 멸망이죠 ㅋㅋㅋㅋㅋ 함께 걸어가 보자요,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단발머리 2020-01-24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햐~ 기다리던 페이퍼 드디어 올라왔군요! 연휴동안 이 책만 읽는다는 거죠?
나 너무 선두라서 여러분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ㅎㅎ

syo 2020-01-26 12:0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연휴가 끝나가는데 1장까지 읽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책 열심히 읽으시며 좋은 연휴 잘 쉬시길 기원합니다. 공동체는 다 무너지고 이해관계로 묶인 도시에서 시장에서 정해주는 임금 받는 노동 외의 생존 대안은 제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좀체 떠오르지 않습니다...그외 먹고 살 능력도 딱히 제겐 없고...그냥 안 짤리고 나랏돈이나 열심히 받으며 노역하다 오년 후에 육아휴직이나 한 번 더 하자 하는 안일함... ㅋㅋㅋ

syo 2020-01-26 12:06   좋아요 1 | URL
요즘 반님이 하시는 양질의 독서가 알라딘 마을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소문이 제 서재까지 도달했습니다. 생존 고민은 생존한테 하라고 하고(?) 반님은 지금처럼 읽고 써서 아름다운 알라딘 생태계를 만드는 데 기여해주시면 저는 행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제가 알라딘에서 월급 받는 인간 같네요. 월급은 나라에서 주는데..... 저는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지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6 14:59   좋아요 0 | URL
보탬은 가계에만 되면 되지 않을까요 ㅋㅋ소문은 앞에 헛자가 붙는 것 같습니다...저도 복직하면 지금보다 훨씬 못할 예정이랍니다. ㅎㅎㅎ

초록별 2020-01-24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마음에 와닿는 님의 글로 위안을 삼아요. 늘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화평하시길 기원합니다.

syo 2020-01-26 12: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록별님.
명절 인사가 늦었네요. 건강은 당연히 가져가는 것이고, 원하시는 바도 한없이 성취하실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4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동자의 입장에서 국가를 억압도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 글로벌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초국가적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국가를 부정하는 측면이 있어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생산의 두 주체인 노동과 자본 양쪽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의 본질과 권력의 활용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syo님 행복한 연휴 되세요!^^:)

syo 2020-01-26 12:00   좋아요 3 | URL
반대로 생각했을 때, 노동이나 자본 한 쪽으로부터 완전하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반대편으로부터 완전하게 부정당한다는 뜻이겠지요. 무조건적인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노동과 자본으로 거칠게 이분했을 때, 현상은 국가라는 기관을 그 양쪽 가운데 어느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올지에 관련된 권력의 줄다리기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모양새에 가깝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냥 그런 줄다리기 경기장 같은 게 국가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님도 남은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블랙겟타 2020-01-25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 syo님의 전철을 곧 밟게 되는건가요? ㅋㅋㅋ

syo 2020-01-26 11:5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syo님의 전철‘ 이런 건 밟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나도 나지만 너는 정말 2

 

 

1

 

지금 syo의 등 뒤에선 이 푸시업을 하고 있다. 12개를 도전한다.

 

10개에서 실패했다.

 

바닥에 엎어져서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이게 다 코어 근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며 갑자기 플랭크를 선언한다. 그렇다면 1분씩 3세트 정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1분은 껌이 아니냐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는 자세를 잡는다.

 

25초에서 실패했다.

 


 

2

 

syo가 뭐라고 면박을 주기도 전에 먼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더니, 이게 다 지루해서 그렇다며 뭔가를 보면서 하면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더니 오늘 빌려와 옆에 쌓아놓은 책 가운데 맨 위의 책을 꺼낸다. 제목 : 어떻게 나를 지키며 살 것인가

 


그건 아니지 않나?

 

 

 

3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아닌가 보다.

 

폰을 가져오더니 유튜브에 접속, 잠깐의 검색 시간을 거치고 바닥에 내려놓은 액정 위에는 펭수가…… 펭수가 면접을 보는 모양이었다. 플랭크를 하고 있는 의 눈 바로 아래에서 펭수는 뽀로로 선배님처럼 되고 싶다며 면접관들을 당황시키고 있었다. 왜요? 펭귄이라서 안 된다 이거예요? 뭐 이런 식의 대사를 칠 때쯤, 은 자세를 무너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4646. 미쳤다. ‘지루해서 플랭크가 안 되는 거다 이론이 참이란 말인가?

 

 

 

4

 

그것도 이내 지루해졌는지 바닥에 앉아 빈둥거리는 에게, 그렇게 갖출 거 다 갖추고 키울 거 다 키워가며 푸시업 할라치면 올해 안에 몇 개 못한다고, 오늘은 총량 30개만 하는 걸로 하자며 설득했더니 뜻밖에 쉽게 수긍한다. 다시 자세를 잡고 9개를 성공한다. 온몸이 다 붉다. 9개짜리 혈액순환이 저 정도라니 믿기 어렵다. 게다가 말이 많아진다. 얘가 뭘 잘못해도 변명하는 애가 아닌데, 운동만 하면 온갖 창의적인 핑곗거리가 샘솟는다. 푸시업과 창의력의 관계란.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syo가 푸시업을 하고, 다시 그의 차례가 오자 그는 온 힘을 다 바쳐 무려 3개를 성공한다. 그리고는 뒤돌아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눈물을 훔치는 눈치다. 기다리는 동안 syo가 푸시업을 하고, 마칠 때쯤 그는 화장실에서 나온다. syo가 말한다. 8개 남았으니까, 니 마음대로 해라. 4개씩 두 번 하든가, 1개씩 8번 하든가. 자존심 그런 거 버리면 편하다. 은 말없이 자세를 취하더니, 믿을 수 없는 스피드로 단번에 8개를 성공한다. 와 미쳤네. syo가 말한다. 니 대체 화장실에서 뭐 했는데. 은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털썩 의자에 앉아 세상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푸시업 30개를 4번에 나눠서 하는 남자의 자신감이 저렇다.

 

 

 

5

 

요약

1. 펭수는 플랭크 능력을 향상시킨다.

2. 푸시업을 하면 푸시업을 못하는 신박한 핑곗거리를 생각해내는 창의력이 고양된다.

3.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면 푸시업 능력이 두 배 이상 증폭된다.

4. 쟨 정말 희한한 놈이다.

 

 

 

6

 

장 보고, 빨래하고, 밥 짓고, 설거지하고, 청소했을 뿐인데 주말이 가루가 되었다.

 

 

 

7

 

연수원에 독감이 돌고 있다. 하루에 한 명씩 친구들이 사라진다. 언제 내 차례가 올지 몰라 두려워하는 중이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어쩐지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심하지는 않지만 감기 하면 떠오르는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는데, 독감일까봐(독감이면 당장 오늘부터 연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부랴부랴 병원에 가보았더니 의사 선생님 말씀이 대충, 이 정도 가벼운 증상 가지고는 독감 검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한 이틀 두고 보고 더 많이 아프면 그때 검사를 해 주겠다, 뭐 이랬다. 일단은 독감이 아닌 것으로.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건지 가벼운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도 컨디션은 좋지 않고, 약을 먹어도 그다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심스레 독감을 의심해보는데, 수요일 쯤 진단받아봐야 그 뒤는 어차피 연휴라서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대체 아프고 싶은 것인가 아프기 싫은 것인가?

 

 

--- 읽은 ---

12.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 / 최재정 : 122 ~ 214

: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이라는 제목의 방점은 아마도 새로운에 찍힐 것인데, 그렇다면 도시를 읽는 낡은시선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최소한 그 낡은 시선이라도 갖춰 두어야 이 책의 시선이 새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syo……. 문외한의 슬픔은 어지간한 수준의 책을 만나면 좋은 책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고, 어지간히 괜찮은 책의 특징은 문외한에게 가치의 유무를 쉽게 파악 당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13. 커피 연구소 / 숀 스테이먼 : 105 ~ 215

: 이건 과학책입니다. 레알 과학책.

 

 

 

--- 읽는 ---

맛있는 교토 가정식 / 정혜인 : ~ 120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 ~ 60

서울 선언 / 김시덕 : 122 ~ 266

세상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331 ~ 489

그놈의 소속감 / 김응준 : ~ 134

보고서의 법칙 / 백승권 : ~ 179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 케이시 윅스 : ~ 63

 


--- 도착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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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1-21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아플 수 있어요. 저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지난주 이틀 동안 오한과 근육통에 시달렸어요. 그 당시에 저도 독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통제 먹으니까 증상이 사라졌어요.

syo 2020-01-21 09:01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전 아무래도 감기 같긴 한데, 이게 몸이 괜찮아졌다 말았다 해서 골치가 아프네요.
사이러스님 어떻게, 잘 지내시나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건강 조심하세요. 자꾸 삼님 놀리는데 본인 몇 개 하는지는 안 알려주는 syo님...저는 윗몸일으키기 빵 개 하는 사람이라 못하는 사람한테 공감...ㅋㅋㅋ

syo 2020-01-21 09:02   좋아요 1 | URL
결과적으로는 저도 고만고만합니다만.....
그래도 쟤 하루치를 한 세트로 치고 몇 세트 하긴 합니다.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1-21 09:26   좋아요 1 | URL
우와아아아아아 경이로운 눈빛으로 보는 중입니다. ㅎㅎㅎ

2020-01-21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1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1-21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나는 대체 아프고 싶은 것인가 아프기 싫은 것인가? 고것이 문제로다!
아픈 건 좋은데 아프지만 않으면...말 되나요?ㅋ
암튼 애매할 땐 차라리 확 아파버리는 게 낫긴 합니다.
그래야 스요님의 면역병들이 싸워줄 텐데.
걔네들도 고민 많이할 것 같아요. 싸워 말아 하면서.
암튼 몸 잘 보존하시길.^^

syo 2020-01-21 22:0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그냥 감기였던 것 같습니다. 컨디션이 확 좋아지네요. 스텔라님의 응원말씀 덕분일까요? ㅎ
스텔라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Angela 2020-01-2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소한 지나치는 일들을 이렇게 스토리로 만드는 syo님 클라쓰 ㅋㅋㅋ

syo 2020-01-24 10: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안젤라님, 명절 잘 보내세요^-^

공쟝쟝 2020-01-24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감기 독해여 ㅠㅠ 오래가요 ㅠㅠ 감기야 물러가라 훠어이~~~~~~~

syo 2020-01-24 11:33   좋아요 1 | URL
다 나았어요 ㅋㅋㅋㅋ 독감아니라 평민(?)감기.
 


나도 나지만 와 너는 정말

 

 

1

 

지금 syo의 등 뒤에선 이 푸시업을 하고 있다. 15개를 도전한다.

 

실패했다.

 

바닥에 엎어져서 숨을 몰아쉬고 있다.

 

 

 

2

 

5분이 지났다. 다시 시도한다. 10개를 도전한다.

 

실패했다.

 

아 나는 왜 안 되지? 라고 말하고 있다.

 

 

 

3

 

다시 5분이 지났다. 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유튜브를 켜고 푸시업을 때려 넣은 모양이다. 목소리만 들어도 어쩐지 몸이 좋을 것만 같은 목소리들이 푸시업의 장점, 방법, 잘못된 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한 개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게 잘못된 방법으로 여러 번 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다고. 이 말한다. 나는 제대로 한 개를 하겠다.

 

쟨 정말 대책이 없다.

 

 

제품과 서비스를 개선하려면 많은 돈이 들고조직이 재편되는 데는 희생이 따른다물론제품과 서비스가 개선된 것처럼 보이게 하기는 무척 쉽다.

이지원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4

 

영상은 끝없이 재생되고 있다. 그만 좀 보고 바닥에 엎어지라고. 은 고개를 젓는다. 매일 푸시업 100개씩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며, 그런 제목의 다음 영상을 이어 재생한다. 자기 몸으로 할 30초의 푸시업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영상을 30년 동안이라도 보고 앉았을 태세다. 그런 식으로 30년을 넘게 살아서 오늘날 우리 육신이 이 모양 요 꼴이다.

 

 

 

 

5

 

그는 말한다. , 운동을 너무 쉬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쉬고 있다.

 

 

 

6

 

아무래도 우린 망한 것 같다.

 


나의 몸은 지극히 작다숨을 쉬거나 멈추고몸을 굽히거나 펴고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는 것을 내 뜻대로 하는 일은 아주 쉽다그러나 내 몸 밖 세상 모든 사물은 제각각이어서 그 많은과 적음강함과 약함이 같지 않다비록 온 힘을 쏟아 내 명을 따르게 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다그러므로 내 몸부터 처치하고 안배하는 데 힘을 다해 각각 알맞게 하여 훗날 해로움이 없게 하는 것만 못하다.

이덕무이목구심서 3

 

 

 

--- 읽은 ---


9. 사랑을 위한 되풀이 / 황인찬 : 122 ~ 173

: 이번만큼은 쉽게 사랑에 빠져버리지 않으리라 잔뜩 각오하고 덤벼들었지만 예상대로 헛됐다. 1부까지는 억지로 버텨보았으나 마지막 시를 지나 [시인의 말]까지 읽고 나니 나는 이미 모든 걸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동안은 습작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겠다.

 


10. 150년 하버드 글쓰기 비법 / 송숙희 : 135 ~ 303

: 중언부언. 하버드를 나오지 않았다고 하버드 글쓰기 비법을 알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하버드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과연 다른 문제다.

 


11. 대한민국에서 공무원으로 산다는 것 / 이진수 : 151 ~ 278

: 공무원으로 어떻게 살아볼까 싶어 빌렸으나 개인적 삶의 방향보다는 거대한 관료집단 전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책에 가까워서 이제 막 스타트라인에 선 꼬꼬마 syo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건질 만한 것이 없었다.

 

 

--- 읽는 ---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 / 최재정 : ~ 122

세상을 알라 /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331 ~ 489

서울 선언 / 김시덕 : ~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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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쟁이 2020-01-17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쇼님은 운동을 하셨어요안하셨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01-18 03:26   좋아요 0 | URL
하셨어요안하셨어요?2222

다락방 2020-01-19 08:31   좋아요 1 | URL
하셨어요안하셨어요?3333

syo 2020-01-19 09:48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이런 관심쟁이들.
했어요, 했다구요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19 11:37   좋아요 0 | URL
꺅. 알라딘연예인님들이 꼬리에꼬리를...
사두용미

2020-01-18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9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0-01-18 0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푸쉬업 10개 할 수 있어요 =3=3

syo 2020-01-19 09:4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룸메 놈에게 각성을 요구하겠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1-18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내가 물어볼 거 위에 어떤 님이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물어봄...이쯤 되면 무섭다... ㅎㅎㅎ

syo 2020-01-19 09:4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요즘 두 분, 소울메이트가 따로 없다는 소문이 돌던데,
syo가 질투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돌구요.....

반유행열반인 2020-01-19 10:22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그냥 제가 일방적으로 친한 척...제가 초심대로 댓글 발사 많이 할 수 있게 서재글 많이 남겨주세요.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19 11:38   좋아요 1 | URL
우린 서울메이트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1-19 11:47   좋아요 0 | URL
네 쏘울쌀람ㅎㅎsyo님은 써울 언저리 쌀람ㅎㅎ

Comandante 2020-01-2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선언 어떤지요? 읽을까 말까 고민중인 책이었는데...

syo 2020-01-20 22:04   좋아요 1 | URL
읽고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만이 지니고 있는 특출난 매력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서울에 대해 이것저것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네요 ㅎ

2020-01-2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