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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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변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와 지금 이곳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는 남자의 손에 지팡이도 물통도 아닌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철물점 집 사내놈이 봤다는구먼.” 사람들은 마을에 하나뿐인 술집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그 멍청한 놈이 아직 글을 못 깨쳤잖아. 그래서 그 나그네가 들고 있는 책이 뭔지, 그 중요한 걸 알아내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거야.” “세상에!” 몇몇 사람들이 동요하며 발을 굴렀는지, 바닥에 짜넣은 널빤지가 끽- 불길한 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무슨 책일까?” “얼마나 중요한 책이면 이 넓은 나라의 끝에서 끝을 가로지르는 내내 손에서 내려놓질 못하는 걸까?” 사람들은 궁금증에 너무도 깊이 매몰되어 제일 중요한 사실, 아직 맥주를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술집 주인마저 그랬다. 때때로 궁금함은 어떤 독주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확실히 사람을 취하게 한다.

 


러시아 작가의 소설이 아닐까? , 전당포 할멈을 도끼로 잔인하게 내리친 어느 가난하고 비열한 겁쟁이가 죄책감과 자기기만 속에서 벌벌 떠는 이야기로 천 페이지를 꽉 채운 그 유명한 책 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목수였다. “책 속의 그놈은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치안의 그물망에 걸려들고 말지. 망설였거든. 멍청하게도. 저 나그네인지 뭔지 하는 작자도 어쩌면 국경에서 사람을 도끼로 쳐 죽이고 끈질기게 도망치는 중인지도 몰라. 그건 정말 좆같이 힘든 일이지.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거든. 거기 서 있는 예쁜 언니가 신은 싸구려 검정 스타킹처럼 말이지. 그래 언니, 거기, 거기 말야. , 하여튼 도망치다보면 말이지,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온다구. 신체의 자유를 팔고 그걸로 마음의 자유를 사고 싶은 약한 마음이 드는 거지. 그럴 때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고는 구두끈을 고쳐 매는 거야. 마음의 자유라는 게 생각보다 꽤 비싸거든. 제 몸을 꽁꽁 묶고, 심지어 전당포 할망구처럼 머리통을 쪼개 도끼를 처박은 채로 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대도, 그 망할 마음의 자유라는 놈을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재수 없으면 몸은 교도소에 처박혔는데 마음도 계속 지옥 불에 튀겨지는 꼴이 나는 거거든. 결국 몽창 꼬라박고 쪽박만 찰까봐 불안한 거지.” 목수가 아이 머리통만한 손을 탁자에 쾅쾅 내리쳐대며 말을 이었다. 마을에 흘러 들어온 게 두 해도 채 되지 않는 그가 그 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마을 사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가 그 크고 투박한 손에 든 연장을 오로지 목재를 다루는 데만 썼다고 보증해줄 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이 목수의 가장 친한 이웃조차 그의 과거를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이유였다. “어쩐지 난 알 것 같단 말이지.” 목수는 두꺼운 목을 세차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책은 아마도 성경이 아닐까 싶은데요.” 다음으로 입을 연 이는 며칠 전에 목사관에 새로 짐을 풀었다는 신출내기 목사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늘지만 깊은 그의 눈, 마찬가지로 가늘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의 목 같은 곳을 훑는 동안 목사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작은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가 흙으로 빚어 입김을 불어넣으시고 직접 그 이름을 지으셨으며 다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지을 위대한 권한을 내려주신 아담이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금단의 과실을 탐하여 낙원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바로 인간이 정처 없이 걸어야만 하는 운명을 받게 된 그 순간을요. 에덴의 출구에 찍혔을 인간의 첫 발자국부터,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땅을 뒤덮고도 모자라 이제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에까지 찍어놓은 인간의 수많은 발자국들, 그 모든 발자국은 추방의 순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려 했던 걸까요?” 목사가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글쎄, 누더기 하나 걸치고 쫓겨났으니 배가 고팠을 테고, 스컹크 한 마리라도 잡아먹으려고 근처 풀숲을 뒤지지 않았을까?” “두고 온 사과 생각이 절실했겠는데?” 사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 아버지, 구하소서. 신앙이 약한 마을이로다. 목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번에는 들으라는 듯이 티 나게 목을 가다듬더니, 외치다시피 했다. “그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죄 사함을 받으러 길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 바로 그렇습니다. 그 모든 여행이 죄의 길이면서 사죄의 길이었고, 반란의 길인 동시에 반성의 길이었으며, 역경의 길이지만 곧 희열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하신 그 길 위에 어리석은 우리가 범한 죄업들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럴 때마다 점점 가벼워지는 우리의 발걸음, 점점 천사와 닮아가는 우리의 웃음을 상상해 보는 겁니다!” 목사는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치켜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행이 그런 것이라면, 그 여행의 길이 길고 길수록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는 바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은 지팡이를 들고 있지 않다고 했지요? 그럴 수밖에요. 그는 그 어떤 지팡이보다 훌륭한 지팡이, 바로 거룩한 성경을 들고 다니고 있으니까요! 한 걸음에 한 구절, 말씀을 짚고 발걸음을 옮기는 그 거룩한 여행자가 목사관 앞을 지나만 간다면, , 내가 바로 뛰어나가 꿀처럼 달콤한 물과 그보다 몇 배는 단 기도와 축복을 그에게 부어줄 텐데!” 스스로의 말에 도취되기라도 한 듯, 목사는 두 손을 모으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도 이런 유형의 인물은 건드리지 않는 쪽이 낫다는 것을 알만큼은 똑똑했다. 그러는 자기는 빈손이구만. 몇 백 킬로미터를 걷는 사람도 들고 다닐 만큼 훌륭한 책이라지만, 목사관에서 이 술집까지 오는 짧은 거리를 걷는 데는 성경이 별 필요가 없었나 보군. 목수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이어가는 목사의 가는 목덜미에 송송 돋아있는 솜털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빈정거렸다.


 

우리 젊은 목사님, 기도하는 목소리는 듣기 좋은데 세상 사는 게 어떤 건지 알려면 앞으로 한참 더 마셔야 되겠어요.” 한 사람이 들고 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맥주잔을 테이블에 소리도 없이 내려놓으며, 여인이 말했다. 여인은 왼손으로 허벅지 근처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맥주를 옮기다 묻은 거품을 닦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스타킹에 나 있는 작은 구멍을 가리는 중이었다. 숭숭 까지는 아니라고, 숭숭 까지는. 여인은 조용히 목수를 흘겨보았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목수는 누구보다 먼저 맥주잔을 낚아채 단숨에 들이켜는 중이었다. “길에 얹혀 사는 인생이라는 게 있는 거라, 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역시 길 위에서 하루를 끝내는 사람들이 제일 욕심내는 게 뭔지 알아요? 그건 바로, 고향이에요, 고향. 그리고 추억이지. 걷고 또 걷는 동안 닳아 없어지는 게 신발 밑창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라구요.” 여인은 허벅지에서 뗀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을 낮은 눈빛으로 훑었다. “신발 안에 자꾸 모래나 돌멩이가 들어온다거나, 재수 없을 땐 피를 보고 나서야 신발 바닥에 구멍이 났다는 걸 알게 되는 거잖아, 인간이란 게. 마찬가지예요. 어느 날 문득,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거지. 태어나 처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곰 인형이었는지 토끼 인형이었는지, 글도 다 못 뗀 코흘리개 시절 혼자 좋아하느라 밤잠을 설쳤던 그 철자법 선생님의 이름이 뭐였는지.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개울에서 헤엄치고 놀다가 바닥에서 뭘 주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살아있는 메기 새끼였어요. 난 그때 내 손에 들어있는 길고 미끈한 그 물건이 너무 징그러워서 얼른 내던져버리고는 엉엉 울었거든요. 그때 사촌 오빠가 제일 먼저 다가와서 세상 모르고 우는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 주고 있었는데, 멀리서 뒤늦게 그 모습을 본 우리 아버지가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오빠의 뺨을 후려치는 거야. 그게 무슨 상황인지 알 턱이 없는 나는 계속 울기만 했고, 아빠는 나를 번쩍 들쳐 매고는 성큼성큼 물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오빠는 너무 놀란 얼굴로 울지도 못한 채 개울 속에 멍하니 서서 뺨을 만지고 있더라구요. 이 모든 그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그때 그 여름날 내가 몇 살이었는지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단 말이죠.” 맥주잔 세 개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여인은 물어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겨 주인의 시선을 끌더니 손가락 세 개를 세웠다. 바 너머에서 주인이 새 맥주잔을 꺼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실내는 조용한 가운데 사람들은 여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이 얼마나 많을 거야. 그걸 서서히 잃어버리는 건, 그러니까 우물에 빠뜨린 설탕 주머니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랑 비슷한 거죠. 돌이킬 수도 없는 거고. , 내가 없어지고 있어, 아아 내가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있어.” 여인은 연극 대사라도 읊듯 텅 빈 눈동자로 공중을 응시하며 말했다. 주인이 새로 채운 맥주 세 잔을 내려놓고 빈 잔을 거둬갔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술집에서 맥주를 나르는 여자도 심심할 때는 책을 읽기도 하죠. 그게 성경도 아니고, 우리 산도적 같이 생긴 목수 씨가 읽었다는 천 페이지짜리 그런 두꺼운 책도 아니고, 그냥 한낱 이야기책에 불과하지만요. 그 이야기책에는요,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 가고 싶어서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를 포기하는 공주가 하나 나와요. 상상할 수 있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라구요.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세상 어느 남자든지 그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런 고운 목소리요.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 목소리를 포기하는 거예요. 놀랍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바로 내가, 이 작고 초라한 마을에서, 밑바닥 판자가 다 꺼져가는 낡은 술집에서 술이나 나르는 하찮은 여자인 내가, 그 공주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글쎄, 내가 눈물이 다 나더라니까요? 여기 누구, 내가 우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당신들이 오늘 마신 맥주는 내가 다 사죠.” 그러나 그럴 일은 결코 없었다. “난 공주도 아니고, 이제껏 몇 놈을 만나왔지만 나한테 들러붙은 것들은 죄다 쓰레기였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가 다 뭐야, 지금 나를 계속 짜증나게 하는 이 구멍 난 스타킹하고도 바꿀 가치가 없는 그저 그런 놈들뿐이었다구요. 그런 내가, 어떻게 겪기는커녕 냄새도 못 맡아본 그 공주의 경험에 공감을 할 수 있었을까?” 여인이 다시 손가락 네 개를 들어올렸다. 목수는 이번에도 새 잔을 받을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게 내가 잃어버린 추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공주가 아니었던 건 확실하지만, 나라고 사랑을 하거나 사랑을 받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닐 거잖아요. 단지 내가 잊은 거야, 기억이 안 나는 거야,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선생님의 이름 같은 거야, 울지 않는 오빠를 울면서 바라보던 꼬맹이의 나이 같은 거야, 그렇게 생각했죠. 그러고 나니까 말이에요, 이 개떡 같은 인생도 조금은 봐줄만해지는 것 같았어요. 언제까지 이 허름한 술집에서 찌든내 나는 맥주나 나를지도 알 수 없고, 당장 이번 주말에 새 스타킹을 살 급료를 받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요,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공주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 주까지 꾹 참고 살아도 되지 않겠냐구요.” 여인은 누구라도 대답해 보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어쩐지 먹먹한 표정으로 먼 데를 응시하거나 자기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아무도 눈치 채진 못했지만 목수는 입술을 닦는 척 슬쩍 눈가를 닦아내고 있었다. “저 불쌍한 나그네가 들고 다니는 것도, 분명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득 찬 책일 거예요. 확실해요. 이야기에 기대지 않고 대체 어떻게 자기를 지키며 끝없이 걸을 수가 있겠냐는 거예요.”


 

이거 뜻밖에 꽤 좋은 이야기를 들었구만.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백발의 깡마른 노인이 역시 백발인 턱수염에 묻은 거품을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다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아마도 그건, 그냥 지도책이거나 도감 같은 걸걸?”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후회되는 게 참 많아. 아직 젊은 우리 마누라 손 놓고 그냥 그렇게 보낸 거, 그러다보니 하나뿐인 자식 놈을 응석받이로 키우게 된 거, 그 응석받이 응석에 못 이겨 결국 새 마누라를 맞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놓쳐 버린 거...... 심지어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달걀을 어제 부쳐 먹지 않은 것도! 오늘 아침에 깨 봤더니 아슬아슬하게 상했더라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이 만드는 안타까운 표정은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진지하기 일쑤라, 마을 사람들은-특히 목사는-노인이 타조알이나 심지어 공룡 알을 먹지도 못하고 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동정어린 표정들일랑 넣어 두게. 아직 가장 후회되는 것은 꺼내지도 않았으니.” 노인은 잠깐 혀를 찼고, 말을 이었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무엇보다 후회되는 건 말일세, 바로 일찌감치 책을 읽지 않은 것일세.” 노인은 지금이야말로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이었다.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과 그 옆에 서 있는 두 번째로 한심한 사람을 쳐다보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젓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세상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해답을 준비해놓고 있더란 말이지. 단지 그 해답이라는 놈을, 문제를 맞닥뜨린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야.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제아무리 운이 좋은 인간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모든 답을 입에 물고 날 수는 없더라 이거지. 그 답들은 우리가 얼른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세상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데 말이야, 내 이날 이때껏...... 근데 내가 이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나? 아니지?” 두어 명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직 이 마을에는 희망이 있군. 목사가 생각했다. “하여튼, 지나고 보니 내가 틀렸던 모든 문제의 답들이 책에 다 들어있더라고. 내 이날 이때껏 살아보니 가장 비참한 순간이 언제인 줄 알아? 그건 바로 아, 내가 이 책을 이십 년 전에만 읽었더라면 오늘 이 모양 이 꼴이 되진 않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며 읽던 책을 바닥에 내던지는 순간이야! 그것보다 더 비참한 순간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똑같은 꼴의 후회를 하되 이십 년 전이 아니라 두 시간 전에 읽지 않은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는 순간이지.” 흥분하여 밭은기침을 내뱉느라 이야기가 자꾸 지연되었으나, 사람들은 아무 내색도 없이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목사는 점점 희망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들고 있는 건 그냥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들이 들어있는 책일 확률이 높아. 그랬으니 그 사람이 이렇게 먼 길을 아무 탈 없이 계속 걸어올 수 있는 거라니까. 알겠으면 다들 책 좀 읽으란 말이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내가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 책과 노인은 그야말로 지혜의 보고라고.” 노인은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듯 손을 들어 테이블을 두드렸지만 그 손이 너무도 가냘파서 테이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우리 집 영감이 책을 못 읽는지 알겠구만. 일단 책을 손에 들 수가 없겠는걸.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노인의 수많은 후회 가운데 하나인 응석받이 아들의 되바라진 아들이었다. “어떤 지혜의 보고에는 내가 이때껏 살아보니 말인데라는 말이 끝도 없이 적혀있나 보네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오셨는지 모르겠지만, 또 술집에 오신 걸 아버지가 알면 잔소리를 세 시간은 쉬지 않고 들으셔야 할 거예요.” “차라리 네 어미한테 말하려무나. 그래도 똑같이 잔소리 세 시간이겠지만 최소한 네 어미는 나를 훌쩍 들쳐 업고 집까지 갈 만한 힘과 배짱은 갖췄잖니? 징징거리기만 하는 네 애비랑은 다르게.” 주점에 웃음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엄마가 됐든 아버지가 됐든, 아마도 두 사람 중 누군가는 할아버지를 잡으러 여기로 오고 있을 거니까, 기다리는 동안 우린 그 책 이야기나 더 하는 게 좋겠군요.” 청년이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 그럴듯하고 또 좋은 말씀들이었어요. 그렇지만 다들 책을 크게 과소평가하고 계신 것 같아요. 책은 그러니까 그야말로 불꽃같은 것이라구요.” 급하게 달아오르는 것은 어느 시대나 청년의 미덕이자 단점이었다. “꼬마야, 네 말대로라면 책 한 권이 다른 책들을 홀랑 다 태워 먹겠구만? 그럼 누가 책 한권만 가지고 와 봐, 나 담뱃불 좀 붙여야겠어.” 목수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럼요! 태우고 말구요. 책뿐만 아니라 사람도, 집단도, 한 나라나 심지어 온 세계도 다 태워버릴 수 있는 게 책인데요. 봐요. 어떤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못한 인간으로 취급하던 관습들이 있었어요. 그 관습들을 싹 불태우는 데 책이 몇 만 권이나 필요했을까요? 아니에요. 몇 권이면 충분했어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할 수 있었던 기생충 같은 무리들을 모조리 화형시키는 불쏘시개로 쓰려고 몇 백 권의 책을 찍어내야 했을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좋은 세상, 모두가 배부르고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열차를 움직이기 위해 몇 권의 책을 태워야 하냐구요? 딱 한 권! 딱 한 권이에요.” 청년은 목이 말랐지만, 어쩐지 아무도 그에게 맥주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책에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래서 책을 읽는다구요. 저는 어쩐지 그 사람이 여행하는 혁명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 먼 길을 그저 걷는다구요?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죠. 그 사람은 지금 어딘가로 가서 그곳의 뭔가를 바꾸려고 걷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런 사람의 손에 들린 책이 뭐겠어요. 그게 뭐가 되었든, 얼마나 크고 위험한 책이겠어요. 나는 우리도 그 책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마을 사람들도 다 그 책을 읽어야 한다구요.” 말을 마친 청년이 주인 없는 맥주잔에 손을 뻗는데 목수가 테이블을 쾅 치더니 맥주잔을 가로채며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가 어디서 헛바람만 잔뜩 들었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개소리야. 떠들 힘이 있으면 손에 연장이나 쥘 일이지.” 목수의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분분한 의견이 주점을 온통 뒤흔들었다. 주인은 조용히 빈 술잔을 세어 보았다.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고, 술은 더 많이 필요할 것이었다. 책이야 어찌 되었건, 주인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다들 그렇게 궁금하면 그 여행자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붙잡고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출입구에 작업복 차림의 여인이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었다. "엄마가 오셨네요. 할아버지, 이제 들쳐 업힐 차례예요." 청년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이 채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작업복 여인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팔에 낀 검정색 토시를 걷어붙였다. "입 닫고 너도 얼른 따라 나오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몇 번을 말해. 이런 데 들락거리려면 넌 아직 한참 더 자라야 된다고, 이 천하에 불효자식놈아." 여인이 옆에 다가서자 청년은 유독 작아보였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아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이, 얼른 데리고 나가서 젖이나 더 먹이라고. 그리고 여긴 어른들 말씀 나누시는 곳이니까 앞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래." 이미 다섯 잔이나 비운 목수의 말이 조금씩 꼬이고 있었다. "지랄하네.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군. 내일도 무사히 대패질 하고 싶으면 입은 맥주 마시는 데나 쓰는 게 좋을걸. 이놈이나 저놈이나 팔뚝이나 가슴팍에 그 징그러운 털만 달면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목수는 딸국질을 시작했다. "여기 있는 당신들, 죄다 똑같아. 술집에 모여 앉아 맥주잔만 비우면 나라에서 남자 자격증이라도 주는 줄 아나 본데, 천만에. 당신들이 진짜배기라면 여기 모여 주접떨 시간에 그 사람 발걸음을 붙잡고 직접 물어봤겠지. 대체 뭐가 겁이 나서 이 음침한 소굴에 모여서 쑥덕공론이야? , 내 말이 틀려?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지금 그 그넨지 나그넨지가 광장 벤치에 앉아서 신발을 말리고 있더군. 오늘은 이 마을에서 묵으려는 모양이지. , 당신네들이 진짜 남자임을 증명할 시간이 앞으로 반나절 정도 남았다는 거야. 내 말 알아듣겠어? 특히 당신, 그 솥뚜껑 같은 손을 달고 다니는 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박차고 일어나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 이 양반아." 여인이 한 손에는 청년의 손목을 쥐고, 다른 한 팔로는 노인을 옆구리에 끼우듯이 들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솥뚜껑 손을 한 목수가 비틀거리며 뒤를 따랐고, 그 뒤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술값을 받지 못한 주인이 바 너머에서 자신도 광장으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고민은 잠시였다.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둑어둑한 광장 한 귀퉁이에서, 여행자는 벤치에 등을 대고 길게 누운 채 책을 잘도 읽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책을 읽는 일에 꽤나 익숙한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그네는 상체를 일으켜 책을 내려놓고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앉았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벤치 아래에 벗어둔 신발을 들고 모래를 털어냈다. 양쪽 신발의 뒤축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를 광장의 바닥돌을 지치는 발소리가 난폭하게 밀고 들어왔다. 나그네는 신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는 당신에게 특별한 것을 원하지 않소." 사람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말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당신이 들고 왔다는 책 말이오, 그게 뭔지 알고 싶을 뿐이오. , 그리고 우리 마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다른 목소리였다. 역시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당신이 읽는 그 책의 제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면, 오늘 밤 우리 중 하나가 당신에게 지붕과 바람 막을 벽, 따뜻한 찌개가 있는 저녁을 제공할 의사가 있어요." 비교적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나그네에게 그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한 덩어리 목소리들의 윤곽을 짚어보려 했으나 그사이 하늘은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광장의 가로등을 켜는 이가 자기 일을 잊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그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세 권의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당신들은 어떤 책을 말하는 건가요?" "오늘 우리 마을에 들어설 때 당신이 들고 있었던 그 책의 이름을 원하오." "다른 두 권의 책은 관심이 없으신가요?" "그건 알려주어도 나쁠 건 없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바로 그 책만큼은 반드시 알아야겠소."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나그네는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보았다. 비로소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었지만, 나그네에게 그들의 얼굴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나그네는 다시 고개를 숙여 광장의 바닥돌을 적시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검은 덩어리였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검은 덩어리였다. "당신들도 책을 읽으시나요?" "그렇소. 즐기진 않소만." 나그네가 벤치 위에 내려놓았던 책을 손에 들었다. "댁에도 책을 가지고들 계신가요?" ". 아쉽게도 큰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가진 사람은 없지만요." 나그네가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오늘도 책을 읽으셨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는 어땠나요?"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번 주 중에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분이 계신가요?" 질문하는 나그네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당신이 들고 다니는 그 책의 이름이라구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칵, 라이터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났을 때, 나그네의 손에 든 책에 불이 붙었다. 가로등 불빛은 비교도 안될 만큼 밝은 빛이 불타는 책에서 뿜어져 나왔다. 광장이 순간 환해졌다. 나그네는 어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손을 뻗는 듯도 했지만 꼭 닿으라고 뻗은 것 같지는 않았다. 책은 금세 재가 되었고, 재는 나그네가 벗어놓은 신발 위로 한들거리며 떨어졌다. 나그네는 신발에 발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제겐 지붕도 바람 막을 벽도, 따뜻한 저녁 식사도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방금 제가 불태운 책의 이름이 당신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요." 나그네는 사람들을 헤집으며 걸어 나갔다. "그 책은, 애초에 별다를 것 없는 책이었어요. 흔한 책이었지요. 어쩌면 당신들 중 몇몇의 책장에도 그 책은 이미 꽂혀 있을지도 모르죠." 나그네는 변경으로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바로 그 속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러 마을 밖으로 길을 잡았다. 나그네의 그림자가 광장 끄트머리를 스치고 사라졌을 무렵,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이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나그네가 불태운 그 책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했다. 단지 그 궁금함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없었을 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다시는 나그네도, 그 책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신의 책장에 꽂힌 책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를 털고, 책등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고, 그러다 때로는 그 자리에서 몇 페이지씩 읽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치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하는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몇 있었으나, 차츰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나그네가 불태운 그 책과 같은 책을 자기들 책장에서 찾아냈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끔 주점에서 마주치면, 답을 알아낸 사람들의 얼굴에는 뭔가 다른 빛이 도는 듯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 빛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우는 모두의 빛이 되었다. 각자의 것이 다 다른 듯 또한 닮아있는 그 빛이, 이제는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몇몇 사람들을 추궁해 마침내 답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인지, 나그네가 불태운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당신들에게 알려주려는 의도로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제 그 답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언제나 정답보다 의미 있는 오답들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굳이 정답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동물이니까. 그래서 이제 당신에게 말하겠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등 뒤에 있는(혹은 옆이나, 다른 방일수도 있겠다) 당신의 책장에 서서 눈을 감아 보라.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을 짚어 보라. 첫 번째 짚은 책은 그냥 넘길 것이다. 두 번째 짚은 책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짚은 바로 그 책을 그대로 뽑아 들라.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 그 책을 펼치라. 지금 당신의 눈앞에 첫 번째 문장을 열어놓는 그 책이, 나그네가 광장에서 불태운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당신이 내가 말해준 정답을 믿건 말건, 그건 내겐 별다른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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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1-2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 공짜로 읽어도 되나 모르겠네요. 숨도 못 쉬고 읽었다구요. 기왕이면 종이에 인쇄해서 예쁜 책 표지까지 달아서 두고두고 책장에 꽂았다 뽑았다 하며 읽고 싶네요. (거기에 자괴감까지 드네요...내 글은 미세먼지 수준이야 공해야....이 글은 청정 고원의 태초의 공기야...너무 좋아서 고산병 걸리겠어 엉엉)

syo 2019-01-28 10:42   좋아요 1 | URL
아니, 이거 왜 이러세요.

열반인님이 이러시면 제가 좋아할 줄 아셨어요? 아셨군요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19-01-2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죠?? 이거 책에서 발췌하신 거 아니죠? 단편소설 하나 읽은 것 같네요. 오~~ 넘 좋아요!!

syo 2019-01-28 10:43   좋아요 0 | URL
리뷰라고 올려 놨는데 정작 책에서 한 줄도 발췌하지 않았네요.
저도 가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요.....

다락방 2019-01-2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리뷰 쓰지 말아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것보다 더 재미있게 쓸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아직 안읽었지만.

syo 2019-01-28 11:51   좋아요 0 | URL
아무튼 일단 읽어봐요. 그럼 생각이 또 바뀔 수도 있거든요!! ㅎㅎㅎㅎ

나무처럼 2019-01-2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정말 좋았어요.

syo 2019-01-28 15:2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말씀두요^-^

무식쟁이 2019-01-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있던 내 안의 파란 돌, 개미 눈꼽 만 한 파란 돌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그랬어요.

syo 2019-01-28 15:23   좋아요 0 | URL
궁금하다 그 파란 돌.....
어떤 돌인지 페이퍼로 한 번 써주세요 ㅎ

책읽는나무 2019-01-2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 한 편 본 듯한~~^^
고도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으로 책 제목을 알고 싶어하는 인물들???
재치있는 재능을 겸비한 자!!
역시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어라~~^^

syo 2019-01-28 18:0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별말씀을요. 엉망진창이에요. 다시 볼 때마다 손댈 데가 자꾸 튀어나와서 곤란한 상황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1-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길어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다 발췌를 안했다고 오오~축구하고와서 넘 피곤해서 나중에 다시 읽고 댓글 달아야겠소

syo 2019-01-28 18: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스킵하세요. 피로에 양보하세요ㅎㅎ

cyrus 2019-01-28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나 에세이를 써볼 생각은 없어요? ^^

syo 2019-01-28 18:10   좋아요 0 | URL
없어요.
겨우 이런 거 쓰는 것도 벅찹니다 ㅎ

stella.K 2019-01-28 18:1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내 말이. 그런데 이 양반은 너무 욕심이 없어.
그나저나 너는 출판사 낼 생각없니?
좀 어떻게 해 봐야되지 않을까?ㅎ

syo 2019-01-28 18:22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이 출판사를 열어서 스텔라님 책을 내시는 구도로군요.
윈윈이로다.....

stella.K 2019-01-28 18:2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말이나 못하면...흥!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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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몇 마디만 나누고 돌아올 거니까, 이미 정해진 결론만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며 현승이 등을 토닥여 주었지만 미래의 큰 눈동자는 금방 정돈되지 않았다. 미래가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 “왕복 세 시간 잡고, 세 시간 반 정도면 되지 않을까?” 미래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지금부터의 세 시간 반은 삼 년 육 개월 같은 긴 기다림이 되겠지. 난 그 속에서 끝없이 조바심내고, 불안해하고, 의심할 거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할 테고, 분침이 예정된 시각을 한 칸만 앞질러도 바닥없이 허물어지고 말겠지. “왜 이렇게 불안해 해.” 현승은 품에 안긴 미래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런 문제에서, 정해진 결론 같은 건 없어. 몇 마디뿐일 거라고 네가 자신했던 말은 곧 수십, 수백 마디의 길고 뜨거운 말로 끝없이 이어질 거고, 그 말들이 곧 너희의 추억을 헤집어 놓을 거고, 이루지 못한 많은 약속들을 떠올리게 할 거고, 아마 그 사람은 울겠지. 그렇게 되면 정해 놓은 결론 같은 거, 그거 그 눈물에 녹아 정말 먼지처럼 사라질 거잖아. 나한테 오지 않을 거잖아. 미래의 눈이 그렇게 많은 말을 내비치는 동안, 미래의 입은 딱 한 마디만을 보탰다. “, , 여기로 다시 올 거지?” 현승은 고개만 끄덕였다. 미래는 현승의 턱이 자신의 정수리 근처를 두 번 스치는 것을 느꼈다. 한숨 같아 못내 불안하지만 그래도 따뜻해서 끝까지 믿고 싶은, 현승의 날숨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 시간 반이 시작되었다.

 

 


2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서려 서늘해진 차창에 머리를 대고, 현승은 유진에게 할 말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있었다.

 

네가 시간을 좀 갖자고 말했을 때, 난 분명히 이야기 했어. 네가 원한다면 그러겠지만, 돌아오면 내 옆에 네 자리, 없을 수 있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이건 꼭 이야기하고 시작해야겠어.

 

어차피 어떻게든 한 번 어긋난 인연이면, 다시 이어 붙이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 억지로 봉합하려 해 봤자 금 간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 거잖아.’ 이 말은 저쪽에서 먼저 헤어지자고 할 때도 쓸 수 있겠다. 빠뜨리지 말아야지.

 

난 별로 좋은 사람 아니었나 봐. 이제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네가 정말 많이 희미해졌어.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한테도 잘 된 일이라는 거지, 내 말은.’ , 사실은 사실이니까.

 

이미 난 다른 사람이 생겼어. 지금도 그 사람하고 있다가 여기 온 거고, 너랑 이야기 끝나면 바로 그 사람한테 갈 거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한테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거야.’ 이 말은 하지 말까? 너무 나쁜 놈 같아 보이는데. , 모르지. 저쪽에서도 비슷한 말을 할지도 모르는 건데. 일단 넣어 둬.

 

말은 풍성했지만 대체로 식상했다. 현승은 말의 앞으로 말을, 말의 뒤로 말을 옮겨 붙여가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참 식상한 사랑이었던 거지. 별 거 없는 16개월이었던 거지. 이렇게 끝내는 게, 맞는 거지.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창에 기댄 머리도 함께 떨렸다. 그 진동에 기대어, 현승은 쉼 없이 무언가를 털어내고 있었다. 애정의 잔해, 미련, 좋았던 추억, 좋았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미래, 그리고 죄책감. 죄책감.

 


 

3

 

죄책감은 지금 어딘가에서 조용히 현승을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여자의 이름에 들러붙은 감정이었다. 유진으로부터 한 달만 시간을 가져보자고 통보받은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까지도 현승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분노했다. 분노로 부끄러움을 덮어 보려 큰 소리를 쳤다.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할 거라고 윽박질렀다.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전철에 올라탔다. 전철의 뒤꽁무니가 희미해져 가는 플랫폼에서 현승은 주먹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그날 밤 현승은 미래를 불러냈다. 미래를 알게 된 지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았고, 같은 인터넷 동호회 회원이었던 그들은 그날 전까지는 실제로 만난 적이 단 한번밖에 없는 희미한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 미래를 불러 술을 마신 것에 의도가 있었음을 현승은 인정했다. 일주일에 열 번쯤 술을 마시는 사내놈들이 현승의 주변에 득시글거렸으므로 그저 술을 같이 마실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었다면 현승은 그 조용하고 아늑한 술집으로 굳이 미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 향초가 있고,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 알록달록한 비즈 커튼이 둘러져 있는 술집이었다. 아른거리는 촛불이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분위기 있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를 표정에 두르고 현승은 실연당한 슬픈 남자 연기를 시도했다. 일부러 슬프게 웃었고, 가끔 먼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초점 없는 시선을 촛불에 던져 넣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짜 눈물이 났을 때, 미래는 놀랐고 현승은 더 크게 놀랐다. 아니, 슬픈 척 하는 건데 왜 진짜 슬프고 지랄이지, 우는 척만 하면 되는데 왜 진짜 울고 지랄이지. 울음은 참으려 애를 쓸수록 자꾸만 덩치가 커졌다. 훌쩍거리다 이내 꺽꺽 큰 울음이 몰아쳤고 현승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펑펑 울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다 망하는 건데. 에이 씨. 현승은 울다 마셨고, 마시다 울었다. 미래는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며 조용히 제 술잔만 비웠다.

 

그리고 현승의 잠을 깨운 것은 미래의 입술이었다. 현승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래의 방 천장이었다. 좁은 미래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은 현승이었고, 미래는 침대 아래에 앉아 상체만 현승의 상체 위로 포개고 있었다. 현승은 생각했다. 미래에게 기대다시피 하여 걸어 온 골목길의 풍경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미래가 라면을 끓여줬던 것 같다. “아니, ......그게.” 침대에 누운 채 현승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 잤어요?” 미래가 현승의 눈앞에 가까이 와 있었다. “, , 잘 자긴 했는데, 이게......” 미래가 웃었다. “라면 먹은 거 기억나요?” “.” “내가 현승 씨한테 라면 먹고 가라고 했었어요. 그게 필요한 것 같아서. 그래서 나 부른 것 같아서. 근데, 현승 씨 정말 우리 집에 오자마자 식탁 앞에 앉더라고요.” “.....” “거기 앉아서, 라면 해준다더니 뭐하고 있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라구요.” “, ......” “그래서 라면을 끓였어요. 라면 먹고 가랬더니, 정말 라면을 먹더라구요.” “?” “현승 씨, 그 영화 안 봤어요?” “? 무슨 영화요?” “......아뇨. 현승 씨가 라면을 되게 맛있게 먹었어요.” “, . 맛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 맛있었나 봐요.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끓인 라면 제일 맛있게 먹은 사람이에요, 현승 씨가.” “......” “그래서 좋았어요. 라면을 맛있게 먹어서요.” “......” “현승 씨도, 내가 좋았으면 좋겠어요.”

 

 

 

4

 

그리고 며칠이었다. 미래의 바람대로 현승 역시 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유진이 던져놓고 간 짧은 시간 안에, 현승은 미래에게 사랑을 말했다. 미래는 울었다. “, 한 달 안에 현승 씨가 그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너무 무서웠어.” 현승이 말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유진이보다 널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어. 오래 만난 사람이고,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넌 그만큼 좋은 사람이고, 이미 결정된 일은 결정된 일이니까.” 믿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기에 미래는 믿었다. 그렇지만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한 만큼 오늘보다 내일 더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불안이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현승이 와서 그 하루를 행복으로 바꾸어 놓고 간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주문처럼 되뇌며 잠을 청한다. 잠들기 전이 가장 행복했다. 행복과 불안 사이의 시공간에 쏘아 놓은 살처럼 빠르게 달력은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현승이 유진을 만나러 갔다. 한 달을 채울 땐 그렇게 미친 듯 달리던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느리게 가는 좁은 방 안에서, 미래는 주문을 외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오늘도 무사하고 행복했어. 제발. 한 달보다 더 긴 세 시간 반을 그저 무사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면서 미래는 기다렸다.

 

 

 

5

 

둘이 자주 가던 공원, 자주 시간을 보내던 작은 벤치에 앉아 유진은 현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승이 오는 방향을 미리 알고 바라보고 있었다. 현승은 언제나 약속 시간에 5분을 늦는 남자였고 유진은 그런 현승을 10분 기다리는 여자였다. 현승이 나타나기 전 10분 동안, 버스 안의 현승처럼 유진 역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대사가 몇몇 떠올랐지만 유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도 잘 할 자신이 없었다. 기쁨이 제가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차피 어떤 말보다 표정으로, 몸짓으로 더 많은 말을 하게 될 테지. 유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승은 한 달 만에 보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한 달 동안 더 많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처음 현승과 단둘이 만났던 그날보다, 유진은 더 많이 떨고 더 많이 설레고 있었다.

 

작은 화단을 꺾어 돌자 현승의 눈에 벤치에 앉은 유진이 보였다. 유진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유진이 벌떡 일어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현승은 준비해 온 첫 번째 말을 버렸다. 저게 내가 사랑하던 미소였어. 한 번 보겠다고 별의 별 애교를 다 부리던 그 미소였어. 저 미소를 앞에 놓고, 이제 네 자리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현승은 쭈뼛쭈뼛 다가가 벤치에 유진의 옆에 앉았다. 유진이 현승의 손을 꼭 잡았다. “오빠, 잘 지냈어?” “, , 그렇지.” “뭐야, 잘 지냈어? 왜 잘 지냈어. 난 오빠 보고 싶어서 엄청 힘들었는데.” 현승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잘 지냈냐면 말이지...... “오빠, 사실 나, 오빠한테 엄청 당당하게 한 달이라 그래놓고, 사실 일주일 만에 두 손 들었었다? 단축번호만 누르면 바로 오빠 목소리 들을 수 있는 거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1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진짜 겨우 겨우 한 달 참아낸 거야. 자존심 지키겠다고.” “그랬어?” “, 근데 지금 오빠 보니까, 왜 그랬나 싶어.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지금 너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됐던 건데. 보니까 이렇게 좋은데. 자존심, 그게 뭐라고.” 부끄러워 살짝 붉힌 뺨으로 또 한 번 미소가 앉았다. 그리고 현승은 두 번째 말을 버렸다. 과연 우리가 어긋난 인연이었던 걸까? 우리 사이에 금이 갔다고, 그냥 그렇다고 내가 오해했을 뿐일지도 몰라. 싫어서 안 본 것도 아니고, 그동안 이렇게 내가 그리웠다잖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웃으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건 아닐까? 수많은 이야기가 쉼 없이 오갔다. 유진과 현승은 떨어져 지낸 한 달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어제 만나 속삭이던 사랑의 다음 이야기를 오늘 이어나가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데, 유진이 흘끗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것 봐, 우리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네.”

 

30! 그때서야 현승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린, 혹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믿고 싶은, 바로 그 한 달이라는 시간을 누구와 함께 보냈는지 떠올랐다. 그 사람에게 무슨 약속을 주고 이 자리에 나왔는지가 겨우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현승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았다.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을 하찮게 여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쉽게 생각했음을 알았다. 그 오만과 방황의 대가로, 이제 현승은 전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에게는 커다란 잘못을 했기에 돌아갈 수 없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깨달았으므로 다른 이에게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망쳤어. 내가, 모든 것을 망쳤어. 현승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유진의 눈에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진이 힘주어 말했다. “오빠, 우리, 오늘 같이 있자. 나 많이 생각했었어. 오빠가 같이 있자고 할 때마다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었지. 나도 그런 맘이 아닌 건 아니었는데,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일까 봐 그랬던 것 같아. 또 그놈의 자존심이었지 뭐. 이제 그런 거 안 하려구. 오빠가 같이 있자 할 때, 나도 같이 있고 싶으면 그냥 같이 있을래. 앞으로 그럴래.” 유진의 표정에 어린 그 감정의 정체를 현승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몇 시간 전에 보고 나온 미래의 표정이었다. 지난 한달 내내 미래가 언뜻언뜻 비추었던 감정의 조각이었다. 지금이 바로, 세 번째 말을 할 때라고, 내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그 동안 네가 얼마나 희미해졌는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헤어지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를 말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현승은 생각했다. 그러나 벌어진 현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온통 울음뿐이었다. 미안함, 자책, 고마움, 한없이 거지같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너무도 명백히 남아 있는 사랑,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이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마음, 그런 감정들이 현승의 안에서 짓뭉개져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벤치에서 한참을 울었다. 현승은 짐승처럼 크게 울었고, 유진은 아이처럼 작게 울었다. 작은 울음이 먼저 여유를 찾았다. 말했다. “, 사실 불안했어. 오빠가 그랬잖아. 한 달 지나면 나 안 받아줄 수도 있다고. 그때, 오빠가 말은 그렇게 해도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었으니까 꾹 참고 돌아섰지만, 내내 불안했어. 한 달 동안 내가 오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만 계속 재확인하면서, 점점 더 많이 좋아지면서, 자꾸 불안했어. 그래서 좀 필사적이었던 것 같아. 오늘 만나서 오빠가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듣기 싫은 말, 들어선 안 될 말이 나온다면, 어떻게든 그 말을 틀어막겠다고. 오빠가 말하기 전에, 내 마음 다 말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 다 해서 덮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왔어. 그랬는데.....” 조금씩 잦아드는 울음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 채, 현승은 생각했다. 지금이 네 번째 말을, 네 번째 말이라도 해야 할 때라고. 말 해. 말 해. 다른 사람 생겼다고, 빨리 말 해. 제발, 너도 인간이라면, 제발 그 말이라도 해.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 정말. 이렇게 됐네. 오빠. 정말, 내 자리가 없어졌어?” 말 해. “다른 사람 생겼어?” 말하라고. “이제, 나 사랑하지 않게 됐어?” 제발...... 현승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울음이 그쳐가던 벤치는 다시 축축히 젖었고, 현승은 울부짖느라 끝내 말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참말도, 이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도.

 

 

 

6

 

돌아오는 버스에서 현승은 물기 없는 표정으로 밤의 서울을 내다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누구를 불안하게 했는지, 누구로부터 멀어지고 누구에게 가까워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눈은 부었고 목은 쉬었다. 잃어버린 사랑보다, 이래저래 잃어버린 물들 때문에 목이 타고 몸에 힘이 없었다. 소진된 인간은 감정에 소비할 여력이 없으므로 몸뚱이가 그를 지배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현승은 휘청거리며 밤을 되짚어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곳에서 내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류장에 내린 다음 누구의 집으로 향할지, 현승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고, 현승은 내렸다. 그리고 현승의 눈앞에, 정류장의 작은 의자에 미래가 작게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눈을 맞추었다. 둘의 눈이 닮아 있었다.

 

현승이 미래의 옆에 앉았다. “왜 나왔어, 더운데. 집에 있지.” 도로 쪽으로 시선을 두고 현승이 말했다. 같은 곳을 보며 미래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현승 씨가 올까봐 나온 건지, 안 올까봐 나온 건지.” “그랬어?” “. 그랬어. 그래서 많이 생각했어. 현승 씨가 나한테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현승 씨를 기다린다면, 나는 어디까지 마중을 나가도 되는 걸까 하고. 우리 집이야 확실히 내가 당신을 기다려도 되는 곳이겠지만, 우리 처음 그날 같이 걸었던 골목은 어떨까. 그날 그 술집은? 내가 거기까지 가서 현승 씨를 기다려도 되는 걸까? 당신 사는 곳까지는 안 될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좀 마음이 아프기도 했어.” “그랬구나.” “. 그랬어. 그렇지만 용기를 냈어. 여기 이 정류장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만약 현승 씨가 오늘 돌아온다면 여기서 내릴 거고, 내려서 우리 집으로 올지 당신 집으로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서 내릴 거니까.”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어쩌려고 이랬을까.” 미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현승 씨. 혹시 내가..... 내가 주제넘게 너무 큰 용기를 낸 걸까?” 현승은 고개를 돌려 미래를 보았다. 미래는 계속 도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승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미래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미래의 눈이 무거워졌다. 현승은 미래의 눈에 무겁게 차오르는 물을 보았다. 그 물이 다시 현승의 마음을 헤집고, 더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물들을 찾아내 퍼 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밤 속에 오래 앉아 있었다. 많은 버스가 그들 앞에 멈춰 문을 열어보였지만, 끝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조용히 정류장을 떠났다.

 


 

 "보고 싶어."

 이번에는 진지하게 말했다수화기 너머에서 유리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갈게."

 그렇게 말했다대답이 없다언제나 그랬다헤어진 뒤에는 전화를 해도보고 싶다고 말해도유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싱고를 받아들여 주었다기뻐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싱고는 택시를 타고 유리코의 아파트로 갔다.

 평소 같으면 직접 아파트를 찾아갔을 테지만이날 밤에는 한참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찾아가면 유리코가 받아줄 거란 자신은 있었지만지금까지처럼 무신경함을 가장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할 자신이 없었다.

산책길의 작은 광장에 들어가 낙서투성이인 공중전화로 유리코에게 전화를 했다유리코는 바로 받았다.

 "아무래도 너를 좋아해."

 짦은 침묵 뒤에 그 말만 했다마음 한편으로 유리코가 기뻐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난 말이지이제 싱고를좋아하지 않아."

 들려온 것은 그런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지금까지 연락을 하면 만나 주었잖아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만나 준 거야.

 금방이라도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러나 애써 삼키고 "......알아"라고만 했다. "우리이미 헤어졌다는 거."

 유리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태연히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산책길의 작은 광장에 벤치가 있었다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깨를 떨며 앉아 있었다. (5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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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9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5-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 이 리뷰를 이해할 수 있는거지요? 리뷰의 행간 말입니다.

syo 2018-05-29 10:52   좋아요 0 | URL
사실 리뷰도 아니고 행간 없어요 ㅎㅎㅎ 그냥 요런 식의 짧은 이야기들이 몇 개 들어있는 책이에요.

마지막에 인용해놓은 구절을 보고 생각나서 끼적여본 건데 혼란을 야기하고 말았군요.....
 
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누가 뭐래도 노태우는 좋은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나는 다섯 살이었고, 다섯 살은 노태우가 성군인 이유 따윈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나이였다. 정작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사내놈이 분명한 내가 뽀미 '누나''뽀미 누나'라 부르지 못하고 '뽀미 언니'라 불러야 하는 까닭이었는데, 그 건에 대해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대신 노태우가 좋은 대통령인 이유를 알려 주었다. 길고 긴 설명이었지만 한 마디로 줄여보면 결국 노태우가 대구 출신이기 때문에 우린 이제 노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소한 콩고물이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질 예정인 축복받은 계시의 땅, 대구로 가야만 한다고 아버지가 강변했다. 우리 가족은 당시 대구가 아니라 청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저놈의 대처 성애는 불치였고, 가족력이라 나도 물려받았다. 하여간,

 

인간이야 됐건 말건 동향이면 장땡이고 한 번 정해지면 군소리 없이 누나를 언니라 불러야만 하는 그런 맹목적인 시절이었다. 맹목적인 아버지였고, 수동적이었지만 역시 맹목적인 어머니였다.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아 귀찮은 아이였겠지만 아버지는 귀찮은 기색 없이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말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알고 싶은 것은 하나도 모르는 마당에 모르고 싶은 것들만 자꾸 알게 되다보니 나는 별수 없이,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사뭇 자발적으로 독서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노태우와 언니에게 이 영광을.

 

담이 없던 당시 우리 집의 양 옆과 후방으로는 어린 내 눈에 이런 걸 대초원이라 부르나 보다 싶을 정도로 광활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 5일장이 서는 읍내 쪽으로 뻗은 2차선 도로와 우리 집 마당이 그라데이션처럼 이어져 있다 보니 우리 집의 한계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명색이 도로라고는 하지만 그 위로 지나다니는 차는 놀랍도록 뜸했다. 엄마의 제보에 따르면, 어느 날 하루 종일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도로 쪽을 보던 내가 저녁 식탁에서 그날 도로를 지나간 것들에 대한 통계자료를 발표했다는데, 정확한 수치는 이제 남아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날 우리 집 앞을 지나간 교통수단 중 그 수에서 압도적인 1위는 바로 소였다. 어린 내가 살던 곳은 그런 곳이었다. 바람 좋고 물 맑고 산과 들에는 꽃이 지천이며 이웃 간에는 따뜻한 우리네 정이 넘치면서 책 구하기는 눈물 나게 어려운.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 있는 책들만 읽고 또 읽을 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는데, 그게 무슨 책이었는지 다 잊고 말았지만 딱 하나, 삼국지를 30번 넘게 읽었던 것은 아직 기억한다. 삼국지의 수많은 영웅들 중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이는 손권이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나와 같은 손 씨라서. 사실 이건 뭐, 아버지의 노태우 성군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논리였지만, 이것을 굳이 부전자전이라기보다는 당시 내가 계몽에 필요한 만큼의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슬픈 사실의 방증이라 말하고 싶다.

 

 

 

이러구러 세월은 흐르고 우리 가족은 기어이 대구로 흘러들어왔지만 노태우를 향한 아버지의 순진한 기대와는 달리 우리 식구 살림은 여전히 고만고만했고, 노난 놈이라고는 지천에 서점이 깔려 있어 신이 난 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의 독서 동력은 '지식 추구'에서 '칭찬 갈구'로 한두 단계 퇴보하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런 기조를 아직까지 채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슬픔 포인트다. 어쨌든, 대처에 나와 보니 책은 많은데 책 읽는 이는 적었다. 따라서 칭찬받는 것은 참 쉬웠다. 어른들은 "너는 책을 참 많이 읽는구나." 라는 다소 긴 찬사보다 "너는 책을 읽는구나."라는 축약된 버전을 선호했는데, 알고 보니 저것이 일 년에 10권이 채 안 된다는 대한민국 성인 평균독서량의 부끄러운 실태를 예언하는 징후였다니! 그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의 성인이 되었을 테니...... "도대체 너희 집에는 왜 책이 없니?" 나는 책이 없어서 어이도 없다는 말투로 친구 녀석을 힐난했다. 그러자 친구는 엄지손가락으로 책상 서랍중 제일 아래쪽 가장 큰 놈을 가리키며 "저기 다 있어, ." 이라고 대답했다. 놀람 반 기대 반으로 서랍을 열었는데, 맙소사, 그 안에 한가득 들어 있었던 은 바로 '구몬수학'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중 몇 안 되는 진심으로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양질이야 어찌됐건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접받는 지상낙원에 살다보니,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부족하게 읽은 주제에 마치 킹 오브 더 독서라도 된 것 마냥 행동했다. 책을 좋아하는 놈이라는 이미지가 내 머리 위에서 왕관처럼 빛나는 것이 너무도 좋아서, 그저 제목과 작가만 아는 책을 독파한 척 입에 올리고 다녔다. 허세 갑 똥멍청이였던 내게 치료약을 주입해 준 것은 대학이라는 좀 더 넓은 세상이었다. 나와 보니 세상은 정글이었고, 극악무도한 포식자들이 책이란 놈들 눈에 띄는 족족 몽창 다 씹어 먹어 주리라는 기세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는 곳이었다. 나로서는 지금 같은 페이스로 읽어 간다면 1년 뒤쯤에야 띄엄띄엄 소화할 수 있을 만치 어려운 책을 탁 덮으며, ", 오늘로써 이 책은 12번 읽었군. 그리고 내일부터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겠지." 라고 말했던 괴물 같은 남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때부터의 독서는 아마 못난 그간의 자신에 대한 질책과, 남들을 속이면서 스스로 머리에 얹은 짝퉁 왕관을 진짜로 만들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하면 적당할 듯하다. 그 과정이 꼭 지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즐거울 때 즐거운 책을 읽고 더욱 즐거워하며 슬플 때 슬픈 책을 읽고 더욱 슬퍼하는 독서에서 시작하였고, 즐거울 때도 슬픈 책을 읽으면 금방 슬퍼할 줄 알고 슬플 때도 즐거운 책을 읽으면 쉬이 즐거워 할 줄 아는 독서로 나아갔다. 책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가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맹목에 가까운 확신을 장착하고. 여전히 노태우의 그림자가?

 

여차저차 서른 해 넘게 살아오면서 독서의 맛을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알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대부분의, 정말 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고 호언할 수 있는 스스로가 겸연쩍은 마음도 크지 않다. 물론 아직도 이놈의 독서 정글 피라미드에는 내가 올라갈 계단이 별처럼 많고, 층층마다 훌륭한 독서가들이 자리를 선점하여 빛내고 있는지라, 뭐 대단한 진리라도 내놓듯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썩 당당하지는 않지만 정리는 해야 하니까.

 

  

책을 읽는 우리는 우리가 왜 책을 읽는지 때때로 생각해야 한다. 엄밀하게는, '이 책'을 왜 읽는지 따져보자는 것이 아니라, 책을 '왜 읽는지'를 숙고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말하고 싶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전자의 의문은 보통 책을 읽지 않거나, 읽다가 내던지기에 좋은 핑계거리를 찾는 중에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후자의 질문은 최소한 독서가들에게는 '나는 왜 사는가?'에 필적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독서는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여정이고, 여행자는 지도를 펼쳐들면 언제라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가리킬 줄 알아야 하니까. 백 명의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서로 다른 백 가지 삶의 의미가 있듯이, 천 명의 독서가가 있으면 독서의 의미도 천 개가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그 말은 곧, 내 인생의 의미는 남이 아닌 내 손으로 만들어가야 하듯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도 남이 알려주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은 차 한 잔 내려, 딱 그 뜨거운 찻물이 선선하게 식을 만큼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동안만 느긋이 앉아, 당신이 당신에게 책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2년 전에 썼던 글인데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다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싶어서 얼른 지우고 다다다닥 다시 고쳐 썼습니다. 기껏해야 2년 전인데, 뭐 저렇게 못 썼던지......


※ 이전의 글에는 각자의 뽀미 언니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cyrus님과의 훈훈한 댓글대담이 있었습니다. syo의 마지막 뽀미 언니는 얼굴에 점찍고 돌아오는 걸로 이름을 드날린 무시무시한 언니였습니다. 왜 나는 너를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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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2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에 공감됩니다. ^^
제게 독서란... 글쎄요... 뭐랄까...

지금까지 속아 산 삶에 대한 반성...
세상에 눈뜨는 과정...
그렇게 됨으로써 세상에 더욱 무뎌지거나 지나친 현실 적응에서 멀어지는 과정...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책 읽을수록 세상 살기 더 힘들고 어려워진단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ㅠㅠ

syo 2018-04-20 21:51   좋아요 1 | URL
북다님은 알라딘의 글래디에이터 같습니다. 맹렬히 근육 만들며 세상을 뒤집어엎을 날만 노리는.....

북다이제스터 2018-04-20 22:09   좋아요 1 | URL
네, 그러기 위해선 더 빨갱이가 되어야겠죠... ㅎㅎ

몰리 2018-04-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태우, 뽀미언니, 소.
대학과 대학에서 만난 괴물들.

기시감 밀려들던 차
2년 전 읽었던 글이었던 것이었구료. ㅋㅋㅋㅋㅋㅋ

syo 2018-04-20 21:52   좋아요 0 | URL
역시 몰리님. 명불허전....
이런 걸 누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ㅋㅋㅋㅋㅋㅋ
심지어 2년 전 것을 ㅋㅋ

cyrus 2018-04-21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재능교육을 했어요. 수학, 영어, 한문 학습지를 풀었어요. 한문 공부는 좋았어요. 그때 한문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책 읽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거예요. 정기적으로 재능교육 학습지를 다 풀면 스티커를 받아서 붙이는 보너스(?)가 있었어요. 정해진 스티커를 다 붙이면 재능교육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무료로 받곤 했어요. ^^

syo 2018-04-21 17:28   좋아요 0 | URL
추억의 이름이네요. 재능교육...... 그때부터 이미 독서킹의 떡잎을 내보이셨군요.

다락방 2018-04-23 11:01   좋아요 0 | URL
저는 에이플러스요..... (밀려서 처박아 숨겨두었지만...)

독서괭 2018-04-2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쵸?? 저도 읽으면서 응? 노태우 뽀미언니 집앞 도로 교통통계 발표 대학괴물 등 분명 봤었는데 syo님이 소재가 떨어지셔서 재탕을?? 하고 생각했는데요 ㅋㅋㅋ

syo 2018-04-21 21:09   좋아요 0 | URL
사실입니다..... 소재가 떨어져서 재탕.....
근데 이 탕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이야ㅋㅋㅋㅋㅋㅋㅋ
 
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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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똑같이 웃으며 해준 잘 자라는 말이 얼핏 잘 가라는 말로 들렸던 그 밤부터 B는 잠 못 이루고 둘의 끝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한 번 잘못 들었던 말은 아무리 귀 기울여 잘 들어도 저절로 잘못 들리고 저절로 끝을 가리켰다. B는 많은 밤을 혼자서 고민했다. C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비현실적이라 둘은 결국 끝으로 치닫고 말 거라고 불안해하며 B는 잠든 C의 오른손을 좀 더 세게 움켜쥐었다. C는 꼼짝도 않고 잘만 잤다. BC의 손을 놓지 않고 몸만 C 쪽으로 돌려 오른손으로 C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작고 단단하다. 웃을 때 가로로 얇은 주름이 지는 이마. B는 그 주름지는 이마가 사랑스럽지만 주름이 지지 않아도 어차피 사랑스러울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왜 이 아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지를 추리하는 데 몽땅 털어 넣었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C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아이, 치명적인 아이가 되어갈 뿐, 뭐라고 딱히 단정한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아무렴 어때, 좋으면 됐지. C의 이마를 짚는 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점점 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고, 점점 더 좋아졌다. 잘 자라는 말이 허방을 짚었던 그 밤이 오기 전까지는. 그 밤 이후에도 C의 이마는 낮에는 밝고 밤에는 어둡고 웃으면 주름이 졌고 B는 그것이 참 좋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렴 어때, 어차피 끝날 걸,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쫓아낼 수는 없었다. 잠든 숨소리가 무럭무럭 방을 덥히는 사이, 겨울이 가고 그 자리에 봄이 들고 있었다.


 

처음 본 C는 말없고 잠잠한 성격에 눈치도 부족한 아이였다. B가 지시하면 말없이 움직였으나 몸놀림이 재바르지도, 야물지도 않았다.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었으므로, 자연히 B의 일과는 대부분 C를 훈계하거나 질책하는 데 소진되었다. C는 끝까지 묵묵했고, 가끔 웃으면 이마에 주름이 졌다. 억지로 웃어도 그랬다. 왜 그렇게 웃어? B가 물었다. C의 이마에 주름이 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똑같은 주름을 잡으며 C가 대답했다. 좋아서요. BC의 그 주름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C는 웃음을 걷지 않고 B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뭐가? 더 참지 못하고 B가 다시 묻는다. 아니...... 잘 가르쳐 주시니까요. 저 땜에 화가 나실 텐데도...... C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인지 주름이 조금 더 두껍게 잡혔다. 그래서인지 B는 자기 마음에도 재바르지도, 야물지도 않은 줄 하나가 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 BC의 시간이 무채색의 훈계와 질책에서 채도가 있는 질문과 대답으로 조금씩 덧칠되었다. 그러자 시간은 쌓이기 시작했다. 초여름이었다.


 

손을 내 놓으라고 먼저 요청한 것은 B였다. C의 손은 작으면서도 두껍고 손가락은 다섯 개가 모두 짧은 편이지만 특히 엄지손가락은 남들보다 한 마디는 짧았다. B는 우연히 그 손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닁큼 잡고 말았다. 전에 오래 만나던 사람 손하고 너무 닮은 손이야, 네 손이. B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지만 C가 자신의 말을 개수작이라고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CB의 말을 개수작이라고 여겼지만 그 손을 빼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 그렇습니까. C는 웃었다. , 정말 그래. 정말 그렇다. . B는 여기서 쉽게 C의 손을 내려놓으면 자신의 말이 개수작임을 인정하는 꼴이 될까봐 오래오래 C의 손을 만지며 구석구석 살폈다. 그런 시간도 역시 차곡차곡 쌓였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B가 대뜸 손을 내밀면, C가 슬쩍 그 손 안에 자신의 작은 손을 넣었다. B는 이제 C의 손이라면 보지도 않고 그릴 수 있을 만큼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더 뒤질 데가 남은 것처럼 착실하게 그 손을 만졌다. 저는 제 손이 참 싫었거든요, 솥뚜껑 같달 지, 자라 같달 지. 그래? 이 귀여운 손이 대체 왜 싫었을까. , 귀엽다고 한 사람은 좀 있었는데. 내가! ? ......내가 젤 귀여워, 아니, 그러니까, 나한테 제일 귀엽다고, , 뭐냐, , 하여튼 내가, 제일 귀여워한다고. ...... , 그런 것 같아요. C가 웃었다. B는 자기 얼굴이 빨개졌음을 너무도 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얘 앞에서 이러는 게 처음이려나. B는 조용히 C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슬쩍 고개를 들어 C를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여름이 깊어가고 있었다.


 

듣기에 따라서 상당히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을 그 말 역시 B로부터 C에게 건네졌다. 마치 저 높은 곳에서 꾸미기라도 한 것처럼 B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던 어느 날, 역시 아무도 없는 둘만의 공간에서 C의 손을 부지런히 만지던 B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 제대로 잠들어 본 게 언젠지 모르겠어. 요즘도 계속 그래? , 진짜 힘들다. 내가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있어, 이 손, 이거 하나만 떼 주라. ? 이거 하나 가져가서 지금처럼 이렇게 잡고 있으면 잠 잘 올 것 같거든. 농담이지? , 그럼 농담이지, 진짜겠냐? 아무리 이게 좋아도, 손을 어떻게 잘라 가냐 가기를. 아니, 자르는 거 말고, 손 잡아주면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말야. 글쎄, 그건 진짜 그럴 것도 같은데. 그럼 오늘 하루만 내가 손 잡아줘 볼게. ? 아니, 너무 피곤해보여서, 그렇게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지금 얼굴이 그래. ......그래, 그럼. 딱 하루만, 신세 좀 지자. 그래, 걱정 마, 손만 잡고 잘게, 오빠 믿지? , 이 새끼는 못하는 말이 없어서 너무 좋아. 늦은 장마가 힘을 다하는 시간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짐작할 수 있듯, 오늘 하루만이라는 말은 귀여운 기만이었고, 그 기만 위로 세상에 어제와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이라는 좀 더 뻔뻔한 기만이 덧뿌려지면서, BC의 손을 잡고 잠을 이루는 날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사실 B를 잠들게 하는 것은 C의 손이 아니라 C의 잠이었다. 잘 자. 한 마디를 남기고 C는 금방 잠이 든다. B는 잠시 C의 이마를 만지며 C의 잠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내 스르르 잠이 든다. 일어나 보면 B의 왼손과 C의 오른손은 여전히 서로 굳게 맞잡고 있다. B는 누군가의 손을 잠들기 전까지 끝내 잡고 있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새로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가끔 C가 늦게까지 일할 때면 BC가 돌아오며 헤집어 댈 밤의 길과 하늘을 머릿속으로 조곤조곤 그려보다 먼저 잠이 들지만, B가 눈을 뜨면 그의 손은 여지없이 C의 작은 손 안에 구겨져 있었다. 그런 소소한 밤들이 쌓여가는 것이 B는 좋았다. 가을이 깊었지만 BC는 서로의 손과 입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는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고, 그런 용기를 어디서 빌리거나 훔쳐와 그 다음을 채울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좋았고 충분했다. 그래도 둘만 있는 공간에서 손을 잡는 일은 조금 진척이 있었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B가 손을 내밀면, C는 그 손을 입가로 가져가 B의 검지를 살짝살짝 깨문다. B는 행복하다. , 꼭 새끼 강아지 같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B의 손가락을 씹으며 C가 대답한다. 귀엽지? 좋지? , 귀여워. 좋아. C가 손가락을 세게 깨물며 말한다. 내가 더 좋아. B는 웃는다. 그리고 창밖으로 멀리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들의 끝 역시 사뭇 진부했다. B의 일과 C의 일이 갈라진 것이 시작이었다. 그들은 더는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손을 잡거나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지낼 수가 없었고, 서로의 부재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네 전화를 얼마나 기다리는 줄 알잖아. 혹시 못 받을까봐 샤워할 때도 욕실에 전화기 챙겨서 들어간다고. 알지.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만큼 전화하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잖아. 알지. 그렇지만 하려고 들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다는 것도 알지. 알잖아, 알지, 알잖아, 알지, 알지. 그런 대화들 속에서 그들은 서로 아직 알아갈 것이 많이 남은 상태였다는 것은 알았고, 상대가 나를 모르는 만큼 나도 상대를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 BB대로 CC대로, 제 나름대로 아팠고 제 멋대로 아프게 했다. B는 한없이 진부했다. 가끔 통화가 닿으면 진부한 추궁의 말을 던졌다. J하고 붙어 지낸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왔어. 그런 일 없어. 대체 그런 소리를 누구한테 듣고 다니는 거야. 술에 취하면 빌기도 했다. 나 버리지 마라. 너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알아, 그리고 안 버려. 누가 버린대. 그치? 안 버릴 거지? 헤헤, . 그러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니가 당연히 나를 버릴 수가 없지!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사람이면! 진부함이야말로 모든 일을 시궁창으로 처박을 최악의 수라는 것을 B도 알았다. 그러나 자기가 이렇게까지 진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껏 몰랐기에 스스로의 실책에 당황만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CB의 진부함이 싫고 때론 경멸스럽기까지 했지만, 근본적으로 둘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었으며, 독특함이 관계의 틈을 메우는 접착제라고 믿었던 적도 없었기에 그저 마음이 식어가는 것이라고, 정해진 수순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B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잘 자라는 말이 잘못 들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잘 가라는 말로 변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온 밤이 이미 꽤 쌓였기 때문이었다. 다시 여름이 돌아왔고,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히 서로를 찾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그나마 이어지던 소식조차 낙엽이 질 때쯤 완전히 들려오지 않았다.


 

둘이 지내던 공간이 여전히 그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렇게 두껍게 쌓아 놓았던 시간의 켜가 속절없이 흩어지는 것을 B는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빈자리는 그대로 흉터로 남았다. B는 말을 잃었다가, 말이 많아졌다. 하루 종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대답 없는 벽에 대고 무한히 많은 말을 지껄였다. 대답을 머릿속으로 구성하며 미친 대화를 나눴다. 울거나, 웃다가 울었다. 즐거운 기억은 즐거워서 슬펐고, 슬픈 기억은 슬퍼서 슬펐다. 고개만 들어도, 작은 방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면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C의 목소리, C의 말투, 그리고 C의 주름진 이마였다.



날마다해마다 이 좁은 장소에서작은 스토브 앞에 팔꿈치를 맞대고 서서 요리하고좁은 계단에서 간신히 서로 스쳐 지나가고작은 욕실 거울 앞에서 함께 면도하고계속 떠들고웃고실수든 고의든육감적으로공격적으로어색하게조급하게화너서든 사랑해서든 서로 몸을 부딪고 함께 사는 두 사람을 생각하라두 사람이 곳곳에 남길 수밖에 없는깊지만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생각하라! (11)



길게 아팠다. 살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하곤 했다.


 

진부한 이별이 다 그렇듯, 몇 년이 지나도 B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조금씩 숨이 트였고, 벽의 말수가 줄어들었으며, 점차 사는 게 쉬워졌다. 지금에서야 B는 생각한다. 사실 정해져 있던 것은 두 사람의 끝이 아니라, 끝이 나도 또 살아야 하고 살아야 하면 또 살아진다는 빤하고 진부한 진실은 아니었을까 하고. 이제 B는 아주 가끔 C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나면 아련하지만 아프진 않다. 그래도 한 때 켜켜이 쌓아놓아 충만하고 충분했던 두 사람의 시간이 흔적처럼 떠오를 때면 생각한다. 잘 자라는 말, 다시 한 번은 듣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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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우주의 건축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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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힘없이 내 손을 부여잡으며 남긴 말씀을 종종 생각한다. 데이비드 오빠의 이름을 따서 네 이름을 짓는 게 아니었는데. 데이비드는 헨리 삼촌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우리 세대가 태어났을 때 삼촌은 이미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지만,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이 콩코드의 아름다운 들과 호수를 이리저리 들쑤시며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에 삼촌의 이름은 데이비드 헨리였다. 엄마 세대는 헨리 삼촌을 데이비드라고 불렀다. 엄마가 다른 누구보다 헨리 삼촌을 사랑했으므로 삼촌의 이름은 나의 이름이 되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어려서 삼촌을 사랑했고, 삼촌이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던 시절이나, 불복종과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세상을-매사추세츠 주를-종횡무진 다니던 시절이나 그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삼촌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을 후회하며 눈을 감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엘리자베스와의 약혼이 깨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파혼의 까닭에 헨리 삼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이미 짐작한 눈치였다. 헨리 삼촌은 엄마에게 자부심과 불안이 한데 엉겨 자라는 선인장 화분 같은 존재였다.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끌어안으면 따가운, 삼촌은 엄마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나는 내 영혼에 칠해진 헨리 삼촌의 색깔을 그저 사랑하며 스물다섯 해를 살아왔고, 그날 애덤스 저택에서의 만찬 이전까지는 삼촌이 내 심장에 부어준 것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족쇄가 될 수도 있음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프게 깨닫고 난 후 이어진 고뇌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끝내 헨리 삼촌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삼촌의 손을 잡고 거닐던 콩코드의 들판에서는 여전히 향기가 피어오르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개울들은 쉼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월든 호수, , 수천만 조각으로 흩뿌려진 햇살들이 조용히 바스러지는 그 찬란한 은반을, 그곳을 둘러싸고, 혹은 그곳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물새들, 양서류들, 애벌레들, 윌귤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비롯한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생물들의 심포니를 어떻게 본체만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법을 내게 알려준 헨리 삼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삼촌이 손수 지은 이 호숫가 작은 오두막에 들어와, 몇 달째 나는 엄마가 남긴 마지막 퀴즈를 풀어내려 애쓰고 있지만, 이 집 곳곳에 깃든 삼촌의 흔적이 끈질기게 방해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엄마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삼촌의 오두막에 가거든 지하실 벽을 두드려보렴. 네 삼촌의 집에, 그 지하실 바로 옆으로 분명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지나갈 거야. 분명히 그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로 실어 나르는 기차에 네 삼촌의 지분이 있을 걸. 지하철도 콩코드 역의 역장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게 네 삼촌이 숨기고 있는 진짜 정체지. 엄마는 생을 마칠 때까지 지하철도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 콩코드의 무른 땅 밑으로 흑인 노예를 잔뜩 실은 기차가 달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다 가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짐작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헨리 삼촌이 책에다 자기가 캐나다로 흑인 노예 몇을 데려갔다고 써 놓았으니까. 실제 지하철도의 콩코드 역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헨리 삼촌은 기인이었다. 남이 보기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쩡한 거주지를 박차고 나와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22개월을 혼자 사는 남자. 완벽한 고립을 추구한 것은 또 아니라, 거의 매일 저녁 친지와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에 끼어드는 객식구. 세금을 내지 않아 유치장에 갇혔는데, 누군가 대신 세금을 내 줬다며 석방을 알려오는 보안관에게 왜 자신의 저항운동을 방해하느냐며 되레 역정을 내는 괴짜 사상가. 집안 내력인 매부리코와 덥수룩한 수염 탓에 다들 접근을 꺼리지만, 한번 말을 트고 나면 도저히 감탄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촌철살인의 재담가. 마치 전설속의 인디언 추장처럼, 말 못하는 무수한 생명들과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그 이야기를 글로 엮어내는 다정하고 마술적인 작가. 헨리 삼촌을 표현하는 이처럼 다양한 이름들이 적혀 있는 명함 맨 아래에 지하철도의 역장이라는 한 줄을 더 붙인들 어색할 게 뭐가 있을까. 사실, 아직 삼촌이 살아 있던 내 어린 시절에, 그 오두막을 찾아가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실에 내려가 이곳저곳을 두드려 보고 귀도 대어 보기도 했으나 역시 경적 소리 같은 건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조카의 약혼이 행복의 꼭대기지점에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데 자신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저 세상의 삼촌이 안다면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날, 나와 엘리자베스를 애덤스 가문의 저택으로 실어간 마차는 부러 멀리 빙빙 돌아 애덤스 가의 흑인 노예들이 목화를 따고 있는 목화밭 사잇길을 밟으며 천천히 달렸다. 마차가 지나가자 노예들은 일손을 멈추고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시선을 마차 바닥에 고정한 채 옆자리에서 엘리자베스가 종알대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마차는 지독히도 천천히 나아갔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비난받는 듯한 시간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그 길고긴 시간을 뚫고 마침내 마차가 애덤스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는데 이미 정원의 모든 흑인 노예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경을 마주하고 나는 발을 헛디딜 뻔 했다. 등 뒤에서 엘리자베스가 높은 음역으로 짧게 웃었다.

 

데이브, 아버지께 드릴 선물로 뭘 가져왔나요? 흑인 하녀의 손에 머리칼을 맡긴 엘리자베스가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와인이라오.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 오히려 아버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오. 잘 했어요, 데이브. 아버지가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지만 다른 걸 가져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죠. 그게 뭔지 알아요? 그게 뭔가요, 리지? 엘리자베스가 슬쩍 웃더니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건 바로 자유, 평등, 박애랍니다! 항상 아버지는 말씀하시죠. 자유, 평등, 박애야말로 프랑스의 최고급 수출품이라고. , 내 이름도 엘리자마히가 될 뻔 했다는 거, 이야기 한 적 없었나요? 어머, 아자리, 아버지가 새로 사다주신 백금 목걸이 좀 가져다주겠어? 사파이어가 걸려있는 목걸이야. , 아가씨. 아자리라 불린 흑인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작은 방으로 사라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리지, 내게 미리 귀띔을 해줬더라면 자유, 평등, 박애 가운데 하나라도 오늘 가져왔을 텐데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괜찮다니까요, 데이브, 사실 자유, 평등, 박애는 이미 이 집에 넘치고 흘러 더는 필요하지 않거든요. 둘러보세요. 이 영지와 저택의 모든 곳에서 프랑스 최고 수출품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요? 나는 적당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을 하고 맞장구를 치려했으나, 마차를 타고 이 저택까지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갑자기 떠올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목걸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아자리가 역시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아자리? 내 말이 맞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아자리는 잠깐 당혹스런 눈빛을 보이더니, 그 눈빛을 들킬세라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가씨. 아가씨 말씀이 다 맞아요. 맞고 말구요.

 

만찬은 의외로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지는 듯 했다. 애덤스 씨는 내가 선물한 와인을 마음에 들어 했고(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요술 주문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식탁 위의 대화는 암초를 만나지 않고 순항했다. 그랬던 그날의 저녁 만찬이 결국 엘리자베스와 나의 항해를 파혼이라는 기항지로 몰고 간 것은 돌이켜보면 아마도 애덤스 씨의 이 말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매사추세츠 주의 흑인 사업은 전망이 좀 어떤가. 북쪽으로 캐나다 자치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흑인들이 쉽게 달아난다고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애덤스 씨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얼마 전 그곳의 농장주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참 훌륭한 신사인데도 자꾸만 달아나는 흑인들 때문에 정당한 사업을 망치고 있었어. 매사추세츠는 정말 사업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나는 그것이 매사추세츠가 캐나다와 맞붙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네. 자네도 그곳에 산다니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애덤스 씨는 손을 턱에 대고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달리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애덤스 씨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에도 데이비드가 들어가는구먼. 그곳에서는 참 흔한 이름인가보군. 이봐, 자네 혹시, 몇 해 전에 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이름의 선동가를 아는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입으로 대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애덤스 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악마 같은 작자는 흑인들을 꾀어내어 그들이 우리 인간(그는 분명히 인간이라고 말했다)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가르쳤지. 게다가 인간들에게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납부해야 할 세금조차 내지 말라며 선동했다네. 흑인 사업이 옳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정부에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거야! 세상에, 그런 자의 목숨까지 지켜주려고 이 나라가 공정한 사업을 하는 이들의 주머니에서 세금을 걷어가는 거야. 그가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것도 다 공정한 사업을 하는 이들이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불복종이라니. 불족종이라니! 책 이름은 또 얼마나 거만한가. 그 지옥불로 태워 없애야 할 책의 제목은 시민 불복종의 의무라고 한다네. 의무라니. 누구 마음대로 의무야. 그렇지 않은가? 자네도 매사추세츠 사람이니 그자의 더러운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겠지? 나는 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애덤스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쪽 벽 그늘 속에 조용히 서 있던 흑인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 내 집무실에 가서 책을 가져 오도록 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자리에서 태워버릴 수 있도록 성냥도 가져 오고. 주인님, 저는 글을 몰라서 말씀하신 책이 어떤 책인지 찾을 수가.....어디서 말대답을! 이 멍청한 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 글도 모르는 너 같은 짐승이 우리 인간과 같다는 말을 했던 그 악마에게 신의 벌이 있기를! 그 책은 내 책상 한 가운데 펼쳐진 채로 놓여 있으니 그걸 가져 오란 말이다, 이 벌레 같은 놈아! 하인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다 재빨리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헨리 삼촌의 이야기를 했던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했다면, 애덤스 씨는 지금 내가 저 지옥불로 태워 없애야 할 책, 시민 불복종의 의무, 그에 못지않게 사악한 책 월든을 쓴 사람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역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갔을 거네. 주님은 결코 그런 자들을 건져 주시지 않지. 애덤스 씨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뒤에 이어질 그림들과, 지어내야 할 변명 혹은 병명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인이 책을 한 권 들고 돌아왔다. 제발 글을 모르는 그가 다른 책을 가져오기를, 그리하여 주인의 벼락같은 분노를 뒤집어쓰고 새카맣게 타서 죽어버리더라도 제발 다른 책을 가져오기를 기도했지만, 그가 내려놓은 책 표지에는 내가 사랑하는 삼촌의 이름이 대문자로 당당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감했던 시험의 순간이 왔다. 애덤스 씨는 아무 의도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한 번 태워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매사추세츠 사람이 이 책을 태우는 것이 그자를 지옥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겠는가? 그가 내게 성냥을 내밀었다. 나는 성냥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아마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팔꿈치로 건드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잔이 산산 조각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아자리, 이 못된 것, 어디서 이런 미끄러운 잔을 가지고 온 거야. 내 새 드레스에 와인을 흘려 못쓰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 대답해, 어서 대답해 이 벌레 같은 것아! 그러나 쉼 없이 거친 말을 쏟아 붓는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자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빌고 있었지만, 진짜로 사죄하라는 청구서를 받은 사람은 아자리가 아니라 사실 나임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구원의 밧줄을 던진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줄을 잡으라고, 네게 이름을 물려 준 야만인의 시체를 발로 차 지옥 구덩이에 밀어 넣고, ‘우리 인간의 울타리로 들어오라고, 지금 이 손만 잡으면 전부 아름답게 흘러갈 거라고, 이 자유, 평화, 박애가 넘치는 저택에서 정당한 흑인 사업을 통해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지금 그녀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아자리, 너 같은 짐승은 정말 대접받을 가치가 없어. 그렇지 않아요? , , 맞습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말이 다 맞아요. 닥쳐, 너에게 물은 게 아니야. 데이브, 대답을 해 봐요. 이 노예가 내 드레스를 망치려 했다구요. 이 검은 짐승에게 우리가 무슨 벌을 주어야 할까요?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애덤스 씨, 엘리자베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아자리까지. 그러나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은 헨리 삼촌이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삼촌의 책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책 표지에 박혀 있는 헨리라는 이름이 왼쪽 눈이 되고,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오른쪽 눈이 되어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영원의 시간이 찾아왔다. 모든 눈들이 외치고 있었다. 대답해요. 대답하게. 대답하라구요. 대답을 하시게. 대답. 대답. 대답을. 조카야, 대답하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성냥은 나도 모르게 이미 부러뜨린 뒤였다.




 

엘리자베스로부터 긴 편지를 받았다.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글로 안타까움을 말하고,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글로 슬픔을 말하는 긴 편지였다. 그러나 그 긴 편지도 이별을 말하기에는 짧았다. 짧아도 들어 있을 이별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세 번 다시 읽었다. 그러나 그 편지 어디에도 아자리, 흑인, 삼촌의 책,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오늘 밤도 엄마의 퀴즈를 생각한다. 엄마가 후회했던 것은 무엇일까. 내게 삼촌의 이름을 붙이고, 삼촌의 태양 아래 키워내 마침내 삼촌의 이름과 영향력이 내 결혼을 망치게 만들었다는 탄식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세상에 빛을 던지고 떠난 삼촌의 훌륭한 이름을 나 같은 용기 없고 나약한 멍청이에게 붙여 욕되게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이었을까? 나는 오늘도 삼촌의 오두막에 기어들어가 지하실의 벽을 두드려보기도 하며 하루를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버린 날들이 쌓이자, 조금씩 희미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윤곽밖에 드러나지 않아 무엇의 윤곽인지조차 말할 수 없는 그런 징조가. 삼촌은 월든, 어느 겨울 꽁꽁 언 월든 호수의 얼음을 잘라내 가져간 얼음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들이 가져간 얼음은 어디선가 녹아 물이 되었을 것이고, 월든은 제 품에서 그만큼의 물을 도둑맞은 것이다. 그 후로도 겨울이면 많은 물을 잃었을 월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면 충만하게 가득 차 출렁인다. 그 물은 어디서 왔을까. 멀리 떠난 물들이 하늘과 땅을 밟아 다시 월든으로 돌아온 걸까? 헨리 삼촌은 아마 그 대답을 찾으려 이곳에서 22개월 하고도 2일을 보냈을 것이다. 삼촌이 오두막을 나간 것은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일까? 내겐 아직 모든 것이 어렵고 세상은 모를 일투성이다. 나는 저 물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반년을 혼자 지내는 동안, 저 물들이 온다는 것을, 결국은 월든 호수가 다시 가득 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수백 개의 낮과 밤이 월든 호수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22개월 2일을 채우고, 나는 이 오두막을 나설 것이다. 그때 내가 손에 얼마나 많은 대답들을 움켜쥐고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밑천이 될 것이다.



 

나는 삼촌과 나란히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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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1-1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비난받는 듯한 시간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이 문장, 쇼님이 쓴거죠? 와- 진짜 명문장이에요. 이 글도 그렇고요.

syo 2017-11-15 09:59   좋아요 0 | URL
앗, 칭찬 ㅎㅎㅎ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닌 글인데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사실 열심히 썼어요...

다락방 2017-11-15 10:11   좋아요 0 | URL
저는 월든 사놨지만 읽기 싫었었는데, 이 리뷰 보니까 읽어야겠다 생각하게 되네요.

그건그렇고, 그 뭐더라, [우아한 인생]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거기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때문에 월든 을 읽게 되거든요. 여주가 좋아한다고 해서요. 그리고 읽고는 그 책이 너무 좋아서 항상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책 읽고 월든을 샀었어요. 크- 그 생각 나네요.

syo 2017-11-15 10: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그야말로 제 인생책이라, 저는 매년 한 번은 꼭 읽고 있어요. 자꾸 혼내는 데도 어쩐지 힘이 많이 되는 책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1-1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재미있어요^^

syo 2017-11-15 1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재미씩이나!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저랑 독서취향이 비슷하신거죠?

syo 2017-11-15 14:53   좋아요 1 | URL
프메님이랑 인생 행로가 좀 비슷하더라구요. 제가 좀 더 철없이 인생 탕진하면서 살긴 했지만요. 아마도 그래서?? ㅎ

AgalmA 2017-11-19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라 소설이 되자! 제 모토를 만족시켜주는 글이네요^^ 역시 syo님이얌^-^b

syo 2017-11-19 09:46   좋아요 0 | URL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