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시간 반

 

 

1

 

긴 수술이 될 거라고 교수는 말했고 딱 그 말만큼만 긴 수술이었으나, 그 사실을 다 알고 맞닥뜨려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아들의 시간은 길고 마음은 위태롭다. 옆 자리에 앉아 함께 기다려준 에세이를 150쪽도 채 읽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는 특출난 독서가까지는 못 된 듯 보인다.

 

 

 

2

 

엄마는 7일에 입원했다. 동생과 내가 하루씩 번갈아 가며 보호자용 침대에서 자고 돌아온다.

 

 

 

3

 

가족 중 누군가 아플 때마다 느낀다. 내 작은 세상은 굉장히 고마운 사람들의 네트워크, 그들이 서로의 팔을 결어 만든 팔 가마위에 올라 앉아 둥둥 떠가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일상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감사할 일 한두 가지씩을 해놓고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나 걱정과 격려를 남긴다. 이 모든 상황이 끝나면 그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내 삶의 백그라운드로 돌아가 자신들의 삶을 살 것이다. 환대는 일상의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비일상의 순간에 선뜻 나타나 세상의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님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아무데나 뿌려놓아도 좋은 마음이다. 여기저기 묻히는 만큼 세상이 조용히 아름다워지는 마술이다. 그 신비로운 기술을 나도 익힐 작정이다.

 

 

 

 

--- 읽은 ---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 136 ~ 229

+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장석주 : 260 ~ 377

+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 오노 후유미 : 161 ~ 374

 

 

 

--- 읽는 ---

= 문학하는 마음 / 김필균 : ~ 165

=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 ~ 149

= 문과생도 이해하는 E=mc² / 고중숙 : ~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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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9-10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얼른 쾌유하시길 바래요.
보호자 침대에서 밤을 보내는 분들도 식사 잘 챙기시구요~~~

syo 2019-09-10 17:16   좋아요 0 | URL
밥 먹기가 제일 불편하네요 ㅎㅎ 병원에서는 급한 불 끄는 식으로 먹고, 집에가면 한상차림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보쌈과 불족발을 먹었네요....
단발머리님 1빠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09-10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의 빠른 쾌유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쇼님 건강도 챙기시기를요. 동생분도.

syo 2019-09-10 17: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야 뜻밖에 제 한몸은 잘 간수하는 녀석이지요. 너무 제 한몸만 챙겨서 이렇게 되었네요. 염려 덕분에 수술 경과도 괜찮고, 통증도 평균보다 빨리 가라앉는 중이래요.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붕붕툐툐 2019-09-1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아플 때 그동안 얼마나 그녀에게 기대 살아왔던가를 알 수 있었어요. 쇼님의 글이 가슴 절절히 다가오네요~
어머님이 다시 쇼님의 백그라운드로 돌아오시길..간절히...

syo 2019-09-10 17:14   좋아요 0 | URL
툐툐님 말씀이 와닿습니다. 응원 말씀 감사합니다. 여러 이웃분들 따뜻한 마음씀씀이에 올라타고 엄마는 얼른얼른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북다이제스터 2019-09-10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쾌차를 기원합니다.
힘 내시구요.

syo 2019-09-10 17:11   좋아요 0 | URL
북다님 감사합니다. 밤에 불 꺼진 병실에서 북다님 글을 읽고 합니다. 그것도 감사합니다 ㅎㅎㅎ

2019-09-10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0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10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족 모두 편안한 일상으로 얼른 돌아오길 기원합니다.

syo 2019-09-10 17:10   좋아요 1 | URL
제가 고생이랄 게 뭐 있겠어요. 환자가 힘들죠. 옆에 앉아 있는 동안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반쯤은 착각이었다는 게 좀 힘들긴 하네요 ㅎㅎㅎ 반님 감사합니다^^

blanca 2019-09-1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 알지요. 저는 그럴 때 글도 읽을 수 없다,는 마음이 뭔지 짐작이 갈 정도로 책도 안 읽히더라고요. 어머니의 쾌유를 빕니다.

syo 2019-09-10 17:09   좋아요 0 | URL
글자가 눈동자를 만지고는 금방 도망쳐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읽은 것도 읽은 게 아닐 것 같아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응원말씀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19-09-1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쇼님의 글에서
지나친 관심은 좀 그렇다는 표현하셨는데
그래도 표현해야겠어요
어머니 수술 결과 좋으면 좋겠고
빨리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저의 지인분은 최근에 암판정을
받았는데 치료법이 없다고 하네요
그래도 수술 받을수 있어서 다행이예요**

syo 2019-09-10 17:07   좋아요 0 | URL
정말 다행입니다. 수술 날짜도 빨리 잡혀서 무사히 수술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 글이 응원 말씀 막으려 쓴 글은 아니었지만, 불편하셨을텐데도 이렇게 힘나는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페넬로페님!!

서니데이 2019-09-1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걸리는 수술, 잘 끝나셔서 다행입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syo님도 고생많으셨어요.



syo 2019-09-10 17:0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얼른 회복 마치고 엄마하고 같이 집에 가면 좋겠네요.

겨울호랑이 2019-09-1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syo님 고생하셨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syo 2019-09-10 17:04   좋아요 1 | URL
호랑이님 감사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계속 호랑이님 글을 읽으면서 다시 알라딘 일상으로 복귀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stella.K 2019-09-1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어떠신가요? 어머니가 어디가 편찮으신지 물어봐도 되나요?
고마운 사람의 네트워크. 맞는 말 같습니다.
가족은 군도와 같다고 누군가는 말했죠.
평소 평안할 땐 조용히 지내다가
가족 중 누가 병들거나 힘들어지면 같이 도와주는 존재라더군요.
살면 살수록 실감하게 되죠. 힘들 때 가족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까를 생각하면
어머니도 스요님을 무척 대견해 하실 겁니다.
고생하시구요, 어머님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syo 2019-09-10 17:04   좋아요 0 | URL
방광암이셨어요. 어제 수술 마치고 지금은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계십니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덕에 수술도 잘 마쳤고, 이제 얼른 털고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스텔라님 감사합니다^^

2019-09-10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0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9-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자분도 환자분이시지만
간호하시는 분들도 건강 유의하셔야
합니다.

시오님 어머님의 쾌차를 기원합니다.

syo 2019-09-12 11:52   좋아요 0 | URL
화장실 다녀올 만한 짬도 잘 안날만큼 붙어 있어야 하다보니 먹기가 쉽지가 않네요.
요령 좀 생기면 나아지겠죠.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2019-09-1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의 곁을 내주고, 마음을 내주는 이런 고마운 사람들의 선한 마음과 환대로 우리의 삶이 유지 될때도 있는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더불어 syo 님의 평온한 일상도..

syo 2019-09-12 11:53   좋아요 0 | URL
힘내서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얼른 이 고비 넘기고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나와같다면 님,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설해목 2019-09-1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페이퍼에 어머니 입원하셨다는 글 봤는데 수술을 하셨군요.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애가 탔을까 싶어 제 맘이 다 짠해집니다.
진짜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것만큼 피말리는 시간이 없더라구요.
수술은 잘 되었다 하시니 어머니 하루빨리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syo님....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요.


syo 2019-09-12 11:54   좋아요 1 | URL
상황이 조금씩 복잡해지고, 입원 기간은 좀 더 길어질 것 같지만
어쨌든 많은 분들의 도움과 응원 덕분에 저희 가족은 잘 해내고 있습니다.

설해목님 감사합니다. 그냥 한 번 불러 주셔서요 ㅎㅎ

눈꽃 2019-09-1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 님 글을 읽어보니 제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제 아버지도 폐암 1기 판정을 받은 적이 있어서...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됐고 1년 가까이 건강 관리를 잘 하셔서 지금은 거의 완치에 가까울 정도로 건강이 많이 회복되셨습니다. 정말 남일 같지 않아서 맘이 짠하네요. 어머님의 빠른 쾌차를 기원합니다.

syo 2019-09-12 11:55   좋아요 1 | URL
다행입니다. 눈꽃님도 많이 고생하셨겠어요. 저희 어머니도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니, 이제 건강 관리가 남았겠지요. 응원 말씀 감사합니다^-^

블랙겟타 2019-09-1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syo님도 건강 챙기면서 보살펴드리시구요. ㅠㅠ

syo 2019-09-12 11:55   좋아요 0 | URL
36시간 못 잤더니 12시간을 자게 되더라구요 ㅋㅋㅋ
인간이 수면 시간은 어떻게든 맞추게 되어 있나 봅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랙겟타님 ㅎ

2019-09-10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12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9-09-1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술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걱정 많으셨겠네요 수술 잘 마쳐서 다행입니다 어머님 몸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희선

syo 2019-09-12 11:57   좋아요 0 | URL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엄마 얼른 쾌차해서, 이렇게 신경써주신 분들께 좋은 소식 전해드리면 좋겠어요.

희선님,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 2019-09-11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어서 쾌차하시길 기원합니다.
걱정이 많고 힘드시겠지만 간호해 주시는 분들의 웃음이 어머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않을까,싶기도 하네요.
저는 엄마의 수술날 어땠었나?
간병할때 좀 웃어드렸나?
많이 웃어드릴껄!!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하더라구요.
여튼 syo님과 동생분이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syo 2019-09-12 11:58   좋아요 1 | URL
며칠 더 지나고 나면 많이 웃을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통증이 심해서, 엄마 보고 있는데 도저히 웃음이 안 나더라구요.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기면 책읽는나무님 말씀 꼭 염두에 두고 많이 웃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9-09-1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정어머니가 입원하셨을 때 옆에서 환자를 지켜 보는 일을 많이 해 봐서 이 글을 읽으며 짠했어요.
어머님의 빠른 쾌차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syo 2019-09-12 12:00   좋아요 0 | URL
환자 간호하는 경험이 이렇게까지 공유되는 경험일 줄은,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네요.
세상에 아픈 사람 참 많은 것 같아요.
페크님도 늘 건강 조심하시고, 명절 잘 보내세요^^

jsshin 2019-09-1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쾌유를 빌게요.
지금 이 시간들이 언젠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기를 바랄게요.
간호하시는 분들도 몸과 마음의 건강 잘 챙기시기를.

syo 2019-09-12 12:01   좋아요 0 | URL
열심히 멘탈 부여잡고, 잘 이겨내겠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jsshin님! 명절 잘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9-09-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아요 잘먹어야 간호도 잘하죠 잘 먹어요 화이팅 쇼군!

syo 2019-09-12 12:02   좋아요 1 | URL
엄마한테 여유가 좀 생기면 잘 챙겨먹을텐데, 아직은 좀 어렵네요.
요령껏 잘 한 번 해보겠습니다. 카알님께 걱정 끼치면 안 되지요 ㅎㅎㅎㅎ

추석 잘 쇠세요^-^

카알벨루치 2019-09-12 12:32   좋아요 0 | URL
댓글을 스크롤해야 할 정도네 ㅎㅎ힘내요 홧팅하는 분들이 많으니 힘내시고 굿 추석 되어요~^^

독서괭 2019-09-12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번이나 댓글창을 열었는데 이제야 쓰게 되네요. 위 대댓글 보니 수술 경과가 괜찮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어머님 건강 어서 회복하시길 빌고, syo님은 후회와 자책으로 너무 힘들어하지 않으시길.. 제가 엄마가 되어보니, 아이가 나를 얼마나 서운하게 했든간에, 그걸로 아이가 후회와 자책으로 힘들어한다면 내 마음이 더 힘들 것 같네요.

syo 2019-09-12 12:05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어머니 마음이야 제가 알 수 없는 부분인데,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더 힘이 납니다.
제 멘탈은 괜찮습니다.
회복도 빠르고 어제의 괴로움은 어제의 일, 오늘은 오늘 괴로워 할 일을 괴로워하자- 하는 주의라서ㅎㅎ^^

독서괭님, 즐거운 추석 명절, 독서도 실컷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명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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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1

 

이놈의 집구석은 생겨먹기를 이상하게 생겨먹어서 건물 옥상으로 가는 길이 301호의 내부에 있다. 옥상을 포기하기로 하면 아쉬울 게 없을 것도 같지만, 인터넷 선이 옥상에서 시작해 건너편 전봇대로 이어지는지라, 어쩌다 선 한 번 끊어지면 301호 아저씨한테 사정사정을 해서 옥상에 올라가야 한다. 301호 아저씨는 택시 운전을 하고 그 집 꺽다리(좀 나눠줘) 아들내미는 고등학생이었나 뭐였나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 기사님이 출동할 수 있는 시간대에 301호는 비어있기 일쑤다. 망하는 거다.

 

태풍이 왔다. 창 너머를 보고 있으면 저 물 저게 지금 낙수인지 분수인지 헷갈린다. 야 너네 지구 중심 방향으로 떨어져야지 지금 뭐하냐중력의 법칙 어디 갔어뉴턴 대체 어디 갔어아니, 설마 내가 지금 천장에 거꾸로 붙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인가? , 쟤네 갑자기 또 막 옆으로 가네. 직립보행이네…….

 

이런 anti-자연법칙적 위기상황 속에서, 옥상 쪽에 고정시켜 놓은 매듭이 풀어졌는지 우리 집 인터넷 선이 지금 파도 드센 방파제에 걸어놓은 새마을운동 깃발마냥 펄럭이고 있다. 불안해 죽을 것 같다. , 그야말로 이것은 광케이블의 소리 없는 아우성…… 100Mbps를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다음 주는 연휴고, 월요일 화요일은 엄마 병간호를 하느라 병원에 있을 테니, 저 링링새끼가 인터넷 선을 날름 끊어먹는다면 아, 우리 집은 9월 중순까지 그냥 신석기 시대 되는 거지. 반달돌칼 그거 10만 년 전에 쓰고 나서 어디 놔뒀더라?

 

 

 

2

 

사이러스님과 또 만났다. 그 사람은 참 열정적인 데가 있다. 그 나이 때의 syo와 비교해보면 삶에 대한 확신도 있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행복의 모양새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있는 것 같다. 내부에 단단한 기준을 마련해 두어서, 아닌 것과 맞는 것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한다. , 근자에 보기 드문 청년일세.

 



3


그에 비해 syo란 어떤 인간인가.

 

최근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의 골자는 엄마한테 잘하라는 것이다. 어쩐지 다들 그 말을 해왔다. 다 나를 걱정하는 이야기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이야기인 것은 알지만, syo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짐작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 여덟 명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홉 번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내가 도대체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살았기에 이 정도까지? 싶다. 그리고 열 번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겐 짜증조차 난다. 그 안에는 심지어 술 먹고 전화해서 형 그렇게 살지 마하는 놈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사는지 대체 걔는 어떻게 아는 걸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면 늦다고 말한 친구는 양친이 버젓이 살아계시는 반면 나는 아버지를 보내봤고 걔도 그걸 안다. 도대체.


며칠 전 꼰대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친구의 글을 읽으며 정말 꼰대란 어떻게 판명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사회생활이랄 만한 것을 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보니 실제 유통되는 전형적인 꼰대를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이런 저런 상황을 상상하며 꼰대의 그림을 그려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상상 속에서 나는 늘 나 자신을 꼰대가 아닌 꼰대질 피해자(?)의 위치에 놓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포지셔닝은 나는 꼰대가 아니라는 무의식적 확신의 결과물이고, 꼰대의 가장 명백한 속성 중 하나가 자기 인식의 철저한 결여라는 점에서 미루어 보면, 내 안에도 이미 꼰대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syo는 스스로의 꼰대화를 방지하기 위한 지침으로 먼저 물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걸로는 택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유명한 문장의 힘을 빌려 와 더 세밀한 지침으로 삼으려고 한다. 최소한 알라디너 가운데서는 모를 사람이 전혀 없을 문장을. 그 문장은 나름나름으로 번역되지만, 결국 가정이 행복한 이유는 대충 다들 어슷비슷한 반면 불행한 이유는 독창적인 데가 있다는 내용이다.

 

최소한 가정에 관한 일이라면, 타인의 행복을 격려하고 북돋을 때는 내 행복의 경험을 끌어와 엮어도 좋겠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으니까. 그러나 다른 가정의 불행한 사연을 만났을 때는, 내가 겪었던 불행한 가정사, 공유재의 형태로 세상에 떠도는 당연하지만 추상적인 격언,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과 그 가정의 구성원이 지녀야 할 자세 같은 것들을 기반으로 타인에게 충고하지 말아야지. 불행한 가정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결국 이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꼰대가 되지 않는 길이 이리도 어렵다. 결국 위로뿐인가. 그게 맞나? 아니 그냥 포기하고 그냥 꼰대로 살까? 요가가 힘들어서 차라리 이럴 바에 사유를 포기하고 말겠다던 이병창 선생님의 비명소리가 변조되어 들리는 것 같다…….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계속 질문하는 중이다여자라서아이를 키워봐서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은 될 순 없다배움이 필요하다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남 일에 무관심해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일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자신과의 서먹함이나 관계맺기의 무능함으로 인해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은유다가오는 말들, 128

 

반면세상이 사건의 네트워크라고 생각하면 작동한다아주 간단한 사건이든 아주 복잡한 사건이든 더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으로 분해될 수 있다예를 들어전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들의 총체이다폭풍우도 사물이 아니라 돌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다산 위의 구름도 사물이 아니다공기 중의 습기가 응결된 것을 바람이 산으로 이동시킨 것이다파도도 사물이 아니라 물이 움직이는 것이고이 물은 언제나 다른 모양을 만든다가족도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사건느낌의 총체다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당연히 사물이 아니다산 위에 걸린 구름처럼 음식정보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복잡한 프로세스다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화학적 프로세스의 네트워크 속에자신과 비슷한 타인들과 교환한 감정의 네트워크 속에 있는 수많은 매듭들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카를로 로벨리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07-108


그러니

내가 너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만질 수 있어서 쓰다듬을 수 있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서

 

사람은 그냥 갈 수 있어서

 

남몰래 혼자 떠나려고 하는 세상에

네가 있지 않아서

 

사람이 꽃이 아니길

참 다행이다

꽃이 스쳐가는 바람과 함께 너에게 갈 때

이사라사람」 부분 

 

 

 

--- 읽은 ---

+ 헤겔 / 피터 싱어 : 101 ~ 202

+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 96 ~ 200

+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 191 ~ 341

 


--- 읽는 ---

=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 오노 후유미 : ~ 161

= 세상에서 가장 쉬운 통계학 입문 / 고지마 히로유키 : ~ 55

=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 정기문 : 180 ~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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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9-09-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먹긴 먹었나봐요, 헤어나올 수 없는 꼰대 자기검열...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꼰대의 덫...) 나는 그토록 꼰대에게 당했는 데, 나도 꼰대이고 싶다. 억울하다!!!!!!! -젊은 꼰대 씀-

syo 2019-09-07 11:05   좋아요 0 | URL
슬프다..... 이런 경우에도 위로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꼰대란 아무래도 진화적으로 불리한 개체이므로 두어 세대 지나면 멸종 위기에 처하지 않겠어요.....

힘내세요, 쟝쟝님 ㅠㅠ

2019-09-07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7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0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5살에 동료 대부분이 50대이던 그 때, 절더러 “얘는 말하는 게 인생 다 산 50대야.”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었는데, 알고보니 그건 네 안에 꼰대있다-하는 꼰대들의 동류의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직언 조언이랍시고 있는 말 그대로 해서 상관이던 부장님 울린 기억도 납니다... “너희 부모님 뭐하셔? 엄마는 어디 계셔? 아빠는 어디 계셔? 왜 따로 계셔?” 를 백 번은 뻥이고 열 번쯤 묻는 동료에게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나름의 정공법이랍시고 “우리 부모 이혼했어요. 이제 그만 좀 물으실래요.” 하던 날도 생각해보면 그러다 말 것을 그냥 좋게 넘길 것을...(나중에 그 분은 저만 보면 소녀가장 대하듯 커다란 잔슨빌 소시지 같은 걸 쥐어주곤 한...)
단련은 되었지만 너그러워지는 법은 못 익힌 저라서 내년에는 어떻게 새로운 직장 생활(학교를 옮기거든요) 하게 될지 감도 안 오고 걱정도 되요. 그때는 가시를 좀 덜 세우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컨셉으로 가볼까 생각중인데...한 번 형성된 꼰대이즘이 어디 안 가겠죠? 이렇게 ‘내가 옛날에 말야~’하는 것도 내 안의 또다른 꼰대이즘인 건 아니겠죠? ㅠㅠ무한루프 도는 건 태풍의 영향권이라 그럴지도...(인터넷 선 뽑혀도 옥상 가지 마시어요 석기 시대에도 잘 살았잖아? 안 쥭을거야...)

syo 2019-09-07 22: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사연을 이제 페이퍼로 쓰는 겁니다. 그러면 syo의 잡글을 씹어드시게 되는 거죠.
새로운 직장도 금방 적응하실거지만, 아무래도 조용하고 내성적인 컨셉은 힘들지 않을까요? 반님의 따꼼날콤한 언어역량이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ㅋㅋ

병원에 다녀와도 인터넷 선은 다행이 무사해서, 그 선에 올라타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08 08:06   좋아요 1 | URL
저는 짠돌이라 다른 장르는 안 쓰고 한 장르에만 써 먹을래요. 내성적으로 말로 안 쏟고 글로 쏟을래요. (퍽이나) 태풍을 헤치고 간호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인터넷선아 너도 안 끊어지느라 고생했어.

cyrus 2019-09-0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동네에 비가 많이 내렸어요? 제가 사는 동네는 비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어요. 비가 오다가 그치다가 햇빛이 살짝 뜨다가 다시 비 오고…‥.

syo님도 청년입니다! 30대도 청년이에요.. ㅎㅎㅎ 우리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잖아요. syo님이 헤겔을 알기 위해서 여러 권의 개론서를 혼자서 읽는 건 열정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

syo 2019-09-07 22:51   좋아요 0 | URL
네. 여긴 새벽부터 해서 아침에 비가 승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희한하네요. 대구 제깟놈도 광역시라 이건데.....

청년이긴 청년이죠. 하지만 반올림을 하면 우리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과학으로부터

 

 

1

 

어떻게 저렇게 말 못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된 건지 모르겠다. 지난 주 면접 때, 생각했던 것만큼 말을 잘 못하고 온 것 같아서 며칠 시무룩한 데가 있었는데, 한 방에 해소가 되었다. 고마울 지경이다.

 

보통 정치인의 이미지 하면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지 않나. 물론 잘 정련된 말은 잘 정돈된 팩트에서 나오는 것이겠고, 그러다보니 어떤 한계지점이 있었겠지만, 아 제발 팩트고 나발이고 그 전에 기본적인 언어구사력은 좀 갖췄으면 좋겠다. 비록 저들이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존재지 시민의 능력을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걸.

 

 

 

2



역사 공부가 힘들다고 생각될 때면 역사의 척추가 되는 중요한 주제들을 정하고그 주제들을 세밀하게 공부하여 기초를 튼튼하게 할 필요가 있다건물을 지을 때 중추 기둥을 튼튼하게 세운 후방을 배치하고 외벽을 칠하듯역사를 공부할 때도 꼭 알아야 하는 핵심 주제를 선정하고 그것들을 깊이 공부한 후거기에 인물이나 사건들로 살을 입혀야 한다.

정기문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8 

 

뻔하고 내실없는 방법론 같은 것들이 알고 보니 정말 위대한 지혜였구나, 하고 깨닫는 사건이 가끔씩 터진다. , 이래서 그렇게 국영수 중심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하라고 했던 거구나, 하나마나한 소리의 대표주자, 비결을 감추기 위한 개수작인 줄만 알았더니! 하며 찬탄하는 순간이 드물게나마 오긴 하더라.

 

그렇지만 그런 순간은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지구는 둥글다는 말에 감동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러나 자꾸 걸어 나가서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온 사람의 입에서 나온 와, 지구는 둥글어! 레알 둥글었어! 하는 감탄사는 지구는 둥글다는 평범한 명제에 찬란한 빛을 불어넣는다.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난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는 빛을.

 

뻔한 방법론이 어쩐지 막대한 질량으로 다가와 쿵쿵 두드릴 때, 책덕후는 이때 얼른 올라타야 한다. 멀리 갈 수 있다.

 

 

 

3



필요한 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양심과 확신에 따라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모든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갖춘 현실 세계인 객관적 세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되지 않는 한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은 법과 도덕과 갈등을 빚을 것이다따라서 기존의 법과 도덕은 그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할 것이다반면에 객관적 세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되면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개인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객관적 세계의 법과 도덕에 맞게 행동할 것이다그러면 주관적 차원과 객관적 차원 둘 다에서 자유가 존재할 것이다자유에 대한 제약은 사라질 것이다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사회 전체의 요구가 완벽히 조화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자유 개념은 현실이 될 것이며 세계사는 목표를 성취할 것이다.

피터 싱어헤겔, 55-57 

 

이런 게 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저 차갑고 딱딱하게만 보이는 독일 철학자들은 뜻밖에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있다.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를 보면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어부, 사냥꾼, 목동,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모두들 아침에 낚시하고 오후에 사냥하고 저녁에 목축한 다음 비평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아코, 하늘 나는 자동차가 타고 싶어떠요? 이런 귀요미. 진지해서 한껏 더 귀요미.

 

요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병창 선생님의 새 번역 『독일 이데올로기』 1, 2권


그 제자에 그 사부인 것인가. 헤겔은 혓바닥이 꼬여서 쉬운 말도 꼬아 하는 눈 세 개 달린 괴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찾아 읽다보니 어쩐지 재미있는 구석도 많고, 왜 그렇게 헤겔, 헤겔 하는지 조금쯤 알 것도 같다. 그렇지만 덕질 리스트에 누구 이름 하나 새로 올리기에 나는 너무 늙어버린 느낌이고, 또 마르크스에 비해 생긴 것도 영 귀염성이 없어놔서 헤겔에 입덕할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vs 

 마르크스 vs 헤겔 외모대결 마르크스 압승


 

4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궤적마다 다른 시간의 기간이 있고장소와 속도에 따라 각각 다른 리듬으로 흐른다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단지 우리가 세부적인 것들은 간과하고 사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양상일 뿐이다이러한 관점에서 우주의 과거는 신기하게도 '특별한상태에 있었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간의 간격(기간)을 결정하는 토대는 세상을 이루는 다른 실체들과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그것은 역동적인 장의 한 양상이다이 역동적인 장은 도약하고 요동치며 상호 작용할 때만 구체화되며최소 크기 아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98 

 

늘 느낀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은 인문학에서 과학 쪽으로 건너와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과학이 인문학을 덮치면서 이루어질 때 훨씬 완성도 있고 인문학적으로도 깊이 있는 울림을 던진다. 어쩌면 이건 이과생으로 살아 온 내 인생 10년 때문에 생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참과 거짓을 명확히(완벽히) 구분할 수 있는 영역에서 닦은 기반을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영역으로 확장할 때, 엄밀성을 최대한 보존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다. ‘시간의 간격조차 다른 실체들과의 어우러짐 속에서 결정되고 구체화된다는 이 인문학적 상상력의 결정판 같은 명제가, 과학의 옹립을 받는 진실임을 수식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능력(물론 이 책에는 수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건 그저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 읽은 ---

+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 오노 후유미 : 278 ~ 528

+ 미시경제학 한입에 털어넣기 / 사카이 도요타카 : 73 ~ 198

+ 광대하고 게으르게 / 문소영 : 150 ~ 282

 

  

--- 읽는 ---

=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 정기문 : ~ 180

= 헤겔 / 피터 싱어 :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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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06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저 헤겔 책은 저도 하나 샀습니다.

읽다가 어디에 내팽개쳐 두었나 봅니다.
다시 찾아서 읽어야 하나요 :>

여의도 모처로 출근하시는 분들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같진
않아 보이는 건 사실이죠 ㅎㅎㅎ

<마르크스> 개설서는 역시나 도서관
에서 빌리긴 했으나 결국 못 다 읽고
반납... 뭐 그렇네요.

syo 2019-09-06 17:2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레삭매냐님조차도 저처럼 다 못 읽고 반납하는 일을 겪으시는군요!!

여의도 그 사람들, 아.....

반유행열반인 2019-09-06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코, 오늘은 작정하고 책 이야기만 하네요? 작심 몇 일할까 옆에서 팝콘 우걱우걱하면서 세어야겠다. 책에 대한 글도 유익하지만 일상 썰도 가끔 말고 자주 풀어주세요...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syo 2019-09-06 17:27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일상에 별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맨날 쓸 만한 뭔가가 빵빵 터지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긴 하겠습니다..... 현기증 치료에 syo같은 돌팔이를 쓰실 생각이세요? ㄴㄴ ㄴㄴ

북다이제스터 2019-09-06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울 선생님의 아래글보다 syo 님의 글이 더 설득력 있고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물리학을 과학이라고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매우 곤란한 발상이다. 물리학 그 자체를 철학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세상에 관한 사유를 하기 원한다면 물리학이나 천문학이나 천체 물리학 같은 학문을 공부해야 한다.

이러한 학문을 통해서 과학적 지식을 획득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현대화된 철학적 지식을 획득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물리학과는 철학과의 상위개념의 철학과다.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우리 주변세계의 원리에 관한 너무도 많은 유용한 정보와 그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심오한 사유를 배울 수 있다. “

syo 2019-09-07 10:51   좋아요 0 | URL
아이구, 그렇지 않습니다ㅎㅎㅎ

도올 선생님의 말씀이야 오랜 사유를 거쳐서 나온 내실 있는 말씀이고,
syo의 말은 그냥 주관적인 감동에 절어서 스르르 흘러나온 한낱 감탄사지요!
 

 

인마, 읽었으면 읽은 걸 쓰라고

 

 

1

 

요 며칠 쓴 글들을 후루룩 훑어보다가 이것들 속에 책 이야기가 병아리 콧물만큼도 들어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뭐래도(주로 내가 뭐랜다) 알라딘 서재는 책 이야기를 쓰는 공간이다. 글 안에 책을 어떤 레이아웃으로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리뷰, 페이퍼, 리스트로 장르가 나뉜다. 게다가 글에 엮어놓은 책에 내가 쓴 글이 꿰어지므로, 결국 책 입장에서는 내 글이 책을 홍보하고 내 입장에서는 책이 내 글을 홍보하는 공생관계가 semi-운명적으로 맺어지는 플랫폼인 셈이다. 돌려 말하면, 내 글이 잡스러우면 그만큼 알라딘이 앓는다는 이야기겠다. 유별난 악어새가 지금부터 사람고기만 골라서 뽑아 먹겠다고 결심하면 결국 악어 이빨이 차근차근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물론 syo가 글로 징징거리고, 가끔 실화도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요사스런 글로 질척거리는 동안, 오색빛깔의 찬란한 깃털을 가진 성실하고 속 깊은 악어새님들이 양질의 리뷰와 페이퍼를 꽝꽝 올리고 계시므로 알라딘이 틀니를 착용할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분명히 페이퍼에 읽은 책, 읽는 책만 등록하지 그 내용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글은 이 생태계를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 ‘작은 생태계의 꼬마 요정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계속 이러는 건 치명적인 실책이다. , 그렇다면 이제 책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2

 

…….

 

 

3

 

…….

 

 

4 


………………. 

 

 

92958075911578

 

…….

 

 

 

92958075911579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92958075911580

 

syo에게 책 이야기는 되게 어렵다.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려면 스토리에 대해 조금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고 하면 내 안의 무언가가 내부에서부터 멱살을 잡는 기분이다. 이러지 마. 왜뭐왜.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고 말하지 마. 안 해. 아이가 귀신을 본다고 말하지 마. 그것도 하지 마? 하지 마. 그럼 뭘 해? 하지 마. 아니, 브루스 윌리스가. 하지 마. ? 브루스 윌리스 하지 마. , 그래도 브루스. 브루스 하지 마. 미친, 브루. 브루 하지 마. , 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난 널 잘 알아, , 브루 하면 브루스 하고 싶고, 브루스 하면 브루스 윌리스 하고 싶고, 브루스 윌리스 하면 결국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고 하고 말 놈이야. ……맞는데?

 

아주 가끔 리뷰라는 것을 쓰기도 하는데 그 중 절반은 역시 리뷰를 빙자한 일기나 회고담이다. 그리고 남은 절반 가운데 또 절반은 리뷰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후드러 패는 글이다. 남은 반의 반 가운데 또 절반은 함량 미달의 논할 가치도 없는 글이며, 결국 리뷰랍시는(문법파괴범) 글 가운데 반의 반의 반 정도만이 그래도 리뷰라 불러줄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인데, 이런 애들은 일 년에 한두 개 나온다…….

 

 

 

92958075911581

 

그래도 간만에, syo가 할 수 있는 유형의 책 이야기를 몇 개 하고 가야겠다.

 


독일 관념론 철학 / 니콜라이 하르트만

 

피 같은 돈을 주고 책을 사기 전에, 특히 그 책이 3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귀족적인 녀석이라면, 반드시 도서관에서 최소 5페이지를 꼼꼼히 읽어 본 다음 사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고 있다. 이 교훈을 위해서라면 3만원이 아깝지 않다.

 

이 책의 문제는 역자 선생님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모든 질료는 수용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달리 파악되지 않는 한필연적으로 표상의 모든 질료는 동시에 주관적으로 규정된다”. (36)


라인홀트는 애초부터 너무도 연역과 체계를 겨냥했었고전혀 개별 문제의 난점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40)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지만, 앞으로 남은 900페이지를 읽어나가는 동안 마주쳐야 할 심각한 역경의 서곡 같은 느낌을 주는 데는 충분한 문장이다.

 

우리가 헤겔 논리학의 어떤 사변적 감정을 도외시한다면동일한 문제 노선이 강화되고다양하게 변한 형식으로 독일관념론의 전 시기를 통해서 보존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여전히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이라는 이원론으로써 동일한 방침으로 몰고 가고 있음을 발견한다나중에 다른 연속적 문제가 얻게 되는 매우 우월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그럼에도 이러한 모든 사상가가 그들의 이론적 관념들을 주장하게 되는 추진력과 관점상의 예리함은 라인홀트가 칸트 해석에서 불러일으킨 물자체에 대한 논쟁과 가장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상을 우리는 진실로 갖지 않을 수 없다. (32-33) 

 

그러니까 이 문단은,

 

1. 헤겔이 좀 사변적이라서 티가 덜 날지 몰라도, 실은 독일관념론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제 의식이 모양만 조금씩 바꿔가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헤겔이라면 학을 떼던 쇼펜하우어조차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2. 그리고 그 문제의식이란 칸트의 물자체와 관련된 논쟁인데,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라인홀트 철학의 큰 의의라 하겠다.

 

정도로 읽힌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읽으려면 읽힌다. 그렇지만 대체 나중에 다른 연속적 문제가 얻게 되는 매우 우월한 점이 있기도 하지만은 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연속적뒤따르는정도인 것 같고, ‘얻게 되는가진정도인 것 같고, ‘우월한 점은 물자체 논쟁 이상의 논쟁거리가 있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니까, 추후에는 물자체 이상으로 뻑적지근한 한 판이 벌어지는 논제가 등장한다는 말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문제점은 이 책이 다름 아닌 헤겔과, 헤겔까지 도달하는 독일 관념론자들의 그 독해하기 독하다는 사상들을 설명하려고 태어났다는 사실과 맞물리면 걷잡을 수 없는 쓰나미가 되어 독자를 덮친다. 정말 친절한 한국어로, 심지어 귀여운 만화까지 동원해 설명해도 헤겔은 어렵다. 그런데 이런 독해적 불확실성과도 일일이 싸워 나가며 읽어야 한다니. 이런 식이면, 그럼 나는 이제 뭐 그냥 울어야지. 도리가 없네.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따로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이 자리에서는 한 대목만.

 

루저 문화의 한 예로 2009년 11월 KBS2 오락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남자 루저’ 발언을 들 수 있다이것이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그냥 웃어넘겨도 좋은 가벼운 발언이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여대생의 평범한 한마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일파만파 가져온 엄청난 효과다그렇게 민감한 반응 자체가 매우 증상적이었다남자의 사회적 우위가 확고한 사회라면 그런 말이 가벼운 농담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2000년대의 남자들은 그러한 여유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그리고 자신도 외모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 점에서 루저 발언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은 혐오가 아니라 분노라고 말해야 옳다. (170-171)

 

이 문단의 결론은 차치하기로. 인용을 생략한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이 문단은, 이제 남자들의 여유가 예전 같지 않으므로, 오늘날에는 예전처럼 남녀 간 일방적인 권력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증거를 대기 위해 삽입되었다. 물론 저자도 아직까지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젊은 청년 세대에서의 불평등은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실이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견해차이가 있지만, 최소한 나보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나보다 위 세대에서 자행되어 온 불평등보다 심하지 않다는 명제 자체는 진실로 보인다.

 

문제는 저 루저예시를 그 징후로 제시하는 게 어디서 나온 해석이냐는 점이다. ‘남자의 사회적 우위가 확고한 사회라면 루저 발언이 가벼운 농담거리로 취급될 것이 분명하다.’ 는 문장이 진실일 때, 다른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노비에 대한 양반의 사회적 우위가 확고한 신분제 사회에서라면 솔직히 소과 이상 급제 못한 양반은 루저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노비를 멍석말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노비의 가벼운 농담으로 취급될 거니까. , 솔직히 박정희 걔 키보면 남자로서 루저 아니냐? 랄지, 전두환 걔 머리 보면 루저 아니냐? 랄지 하는 말들을 종로한복판에서 떠들어도 남산이니 남영동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유를 가진 두 분께서 이를 가벼운 농담으로 취급할 것이 분명하니까.

 

혐오는 약자를 향한 강자의 감정이고, 분노는 강자를 향한 약자의 감정이라는 정의는 표면적으로 보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국면에서 강자인 사람은 드물다. 어떤 강자는 어떤 국면에서 약자다. 따라서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키라는 잣대에 관해 대다수 남자들은 약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약자인 그들의 감정을 혐오가 아니라 분노로 읽어내는 것도 무리한 시도는 아니다. 저자와 부족한 독자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정반대의 감정일 것 같은 분노와 혐오도 공통점이 있다. 두 감정 모두, 표출되고 표현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 여성의 가치가 외모로 정의되고, 평가되고, 비하되고, 혐오되는 사건에 대해 규탄하는 목소리가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리기까지, 무지막지한 세월이 필요했다. 반면 루저 사건이 터졌을 때, 남성의 분노는 즉각 표출될 수 있었다. 저자와 부족한 독자가 갈라서는 지점이다.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어휴이제 쉬었다 가죠우리 사유가 긴장할 수 있는 지속시간은 호흡의 길이와 같다고 누가 얘기하더군요그 호흡이 끝나면 생각은 이미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나요그런데 요가를 하면서 호흡의 길이를 증가시키면 사유의 긴장시간도 확장된답니다.

  그래서 제가 요가를 배웠는데 그것도 요가 지도자 반에 들어가서헬스와 무용으로 단련된 젊은 여성들과 더불어 배웠다는 것 아닙니까그런데 그 여성들이야 굳이 요가를 할 필요도 없어요온 몸이 부드러워서 모든 동작이 저절로 다 되더라고요그들은 단지 자격증이 필요해서 참가했을 뿐이었어요하지만 이미 온 몸이 굳어버린 저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동작조차 따라갈 수 없더군요사유의 고수들은 고행을 하지 않고서도 좌선을 통해서도 호흡을 확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저 같은 사유 초보는 요가의 고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호흡 확장이 불가능하죠그래서 참고 또 참으면서 요가를 배웠습니다오직 호흡을 길게 하고사유를 확장하기 위해서 말이죠그러나 점차 회의가 들었습니다차라리 사유를 하지 말지육체를 고문하는 가혹한 고행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요그래서 요가 지도자 자격증이 멋진 자격증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49-50)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친구 병창이이병창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자꾸만 늘어간다. 이광모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아는이병창 선생님은, 알고 보니 요가 지도자 반에 들어가서 고행도 하셨던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 선생님, 거기 계신 그 젊은 여성분들도 젊은’ ‘여성이라 몸이 부드러워서 그걸 다 하신 게 아닐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까 덜컥 지도자반에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선생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지도하시고 싶으셨어 ㅋㅋㅋㅋㅋㅋㅋㅋ 차라리 사유를 하지 말지대박. 핵공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읽은 ---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248 ~ 392

+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 336 ~ 479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심보선 : 221 ~ 327

+ 이렇게 쉬운 통계학 / 혼마루 료 : 148 ~ 276

 

 

--- 읽는 ---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카를로 로벨리 : ~ 136

=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 ~ 191

=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 오노 후유미 : ~ 278

= 독일 관념론 철학 / 니콜라이 하르트만 :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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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9-0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지도자반은 요가 2년한 저도 엄두를 못내느데 어째서 친구 병창이가... 왜때문에...... 네, 사유를 포기할만 합니다.

저 [독일 관념론]은 ㅋㅋㅋ 저라면 36쪽 읽고 팔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쇼님 화이팅!!

syo 2019-09-05 12:21   좋아요 0 | URL
이병창 선생님 매력 있는 것 같아요.
책 좀 이것저것 읽어봐야지,

했는데 전부 다 철학책이야......-_ㅜ

레삭매냐 2019-09-0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출판사에선가 나온 헤겔의
아주 비싼 책이 있던데...

살 생각도 못하고 언젠가 내가 과연
헤겔을 읽을 수 있을까나 뭐 그런
생각만 잠시 해봤습니다.

리뷰 쓰다 보면 정말 책 야기 대신
다른 이야기들을 줄줄 할 때가 많
은 것 같습니다. 그것도 리뷰의 한
특성이 아닐까요 ㅋㅋ

syo 2019-09-05 12:22   좋아요 1 | URL
저한테 5만원 넘고 1000페이지쯤 되는 헤겔 관련 책 두 권 있습니다.
찰스 테일러와 테리 핀카드가 쓴 책인데, 어쩐지 이 두 권 중 한 권을 말씀하신 것 같다는 예감....

레삭매냐 2019-09-05 13:08   좋아요 1 | URL
찰스 테일러의 책이네요 ㅋㅋ

cyrus 2019-09-0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쓰고 싶은 거 있으면 그대로 쓰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글과 비교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

syo 2019-09-05 12:29   좋아요 1 | URL
역시 사이러스님. 오프라인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더니ㅎㅎㅎㅎㅎ

이렇게 말해도 전 결국 쓰고 싶은 건 다 씁니다.
알라딘 생태계에서 저만큼 장르 내용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는 사람 또 어딨나요ㅋㅋㅋ

너무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면 하고 싶지 않은 건 못하게 되더라구요.
그 결과 이 나이에 제가 못하는 게 얼마나 많게요.
막 딴 데로만 솟구칠 때, 이렇게 한번 내 중심 내가 잡아보자- 하는 작은 마음이지요.

2019-09-05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5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0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가 책의 글을 먹고 글을 배출?하는 거니까 뭘 쓰던 책에 대한 글 인정입니다. 그나저나 삼만원대 해겔책 같은 걸 저더러 읽으라 그러면 아마 막 뜯어먹고 빨간펜으로 여백에 욕써놓고 다 읽지도 않고 별점평 빵쩜 없어서 일쩜 주고 막 발광을 했을 거 같네요. syo님! 이참에 독일어 배웁시다. 배우셔서 역서 내지 해설서 한 번 내주세요. 그게 싫으시면 한국어 산문집이나 시집 한 권도 봐드립니다.

syo 2019-09-05 13:54   좋아요 1 | URL
독일어요? 산문집이나 시집이요?

그냥 공짜로 좀 봐주세요...... 저 그런 거대한 인간이 못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05 13:59   좋아요 0 | URL
저기 절대정신syo가 간다. 몸집은 작아도 정신은 거대했나니...(그리고 밖에는 비가 막 쏟아져서 다 쫄딱 젖음...)

syo 2019-09-05 14:06   좋아요 1 | URL
핵낯부끄럽네요.

대체 나폴레옹은 그런 말들을 어떻게 다 견뎌냈을까요.
진짜 위대한 인간은 그게 되나.
아니면 그게 돼서 위대한 인간인 것인가.


반유행열반인 2019-09-05 14:08   좋아요 0 | URL
걔들은 다 죽었으니 현재로선 살아 있는 우리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죽고 나면 뭐 다 똑같으니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낫다...(이런 비약을 하다니...저도 위대해지려나 봅니다...)

syo 2019-09-05 14:10   좋아요 1 | URL
저기 절대정신 반유행열반인이 간다. 댓글은 짧아도 비약은 거대했나니.....

반유행열반인 2019-09-05 14:15   좋아요 0 | URL
절대정신 뒤에 병이 생략되어 있거나 절대등신 오타라고 하면 납득이 되네요.

syo 2019-09-05 19:20   좋아요 1 | URL
처음부터 이렇게 대응하면 깔끔한 거였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stella.K 2019-09-05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가지고 리뷰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서평하고는 차이를 두는 것 같은데.
리뷰에서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자기 생각을 쓰면 되는 거지.
그래서 이달의 당선작 적립금도 챙기면 일석이조 아니겠슴까?
난 이거 받아 본지가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후드러 팬다는 말이 웃겨요. 후들겨 팬다 아닌가?
암튼 아무도 쓰는 사람 없으면 스요님 사전에 등재시켜요.ㅋㅋ

아, 근데 92958075911578~...80 이 숫자들은 뭔가요?

syo 2019-09-05 19:24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차이를 두는 건 ‘리뷰 vs 서평‘이 아니라 ‘리뷰/서평 vs syo의 잡글‘이라서요......

후드러팬다는 말을 일상 속에서 자주 쓰다보니 ㅎㅎ 당연히 표준어는 아닐 거구요. 뭐 어딘가 기원이 있겠죠.

그 숫자는 문단 번호지요.
1. 2. 3. 에서 시작한 게 거기까지 간 거랄까요.

Jason 2019-09-0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 독일에서 유학까지 하신 분들이 큰 공부하고 번역하시는 건데,, 좀 심각하긴 하네요. 한국어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데 무슨 사상을 할까요,

syo 2019-09-07 22:55   좋아요 0 | URL
신경을 조금만 더 써주시면 해결이 될텐데 말이지요.
역량의 문제라기보다 태도의 문제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한 권씩

 

 

갑자기 기분이 그랬다. 빗방울도 떨어지고, 바람이 창으로 드니 커피는 더 맛있고, 책상 위에는 읽을 책이 쌓여 있고, 엄마는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조국은 부지런히 이야기를 하고, 친구는 읽던 책에 감동을 받아 말을 걸어오고, 저녁은 새우볶음밥이고, 아래층 사는 내가 그걸 퍼먹는 동안 위층 아이는 유튜브에서 먹방을 하고 있는 듯하고, 고개를 들어 달력을 보니 엄마가 나 모르는 사이에 자기 수술 날짜를 내 방 달력에 표시해놨고.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에버노트에 들어가서 그간 옮겨 놓았던 인용문들을 통째로 다 지워버렸다. 수백 개의 책 이름이 휴지통 폴더로 쏟아졌다. 다시, 처음부터 읽고 옮겨놔야지


갑자기 기분이 그렇다. 엄마 입원 물품들은 하나하나 택배로 도착하고, 그 상자들 사이에 내가 새로 산 <독일 관념론 철학>도 들어 있고, 같이 사지 못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장바구니에서 아쉬운 내색을 하고 있고, 오늘을 재활용 쓰레기 내 놓는 날이고, 그 쓰레기에 실어서 같이 내 놓고 싶은 마음 있고, 여자친구는 다른 지붕 아래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고, 일기를 쓰다가 하루가 바뀌고, 나도 어떻게든 바뀌고 싶고.

 

 

 

--- 읽은 ---

+ 전쟁 말고 커피 / 데이브 애거스 : 279 ~ 430

+ 가와바타 야스나리 / 허연 : 131 ~ 297

 

 

--- 읽는 ---

=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 168 ~ 336

=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장석주 : 130 ~ 260

= 혐오 / 김종갑 : ~ 96

= 이렇게 쉬운 통계학 / 혼마루 료 : ~ 148

= 한번은 경제 공부 / 로버트 하일브로너 외 : ~ 107

= 왜 칸트인가 / 김상환 : ~ 93

 

 

 

 

이 아래를 읽는 일은 허망한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


스와로브스키와 57분 교통정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저 그런 인간이다.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사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그저 그런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혹은 되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착각이다. 몹쓸 착각.

 

그저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선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뭐든지 적극적으로 못해야 한다. 타고난 소질이 없거나 있더라도 천하에 쓸모없는 것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은 바로 시대를 잘못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호날두나 메시처럼 공 하나 잘 차서 수천억을 벌어들이는 재능을 타고날 수는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14세기 봉건왕국에 태어나야만 한다. 드리블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도록, 트래핑을 과도하게 잘했다가 적그리스도의 졸개로 몰려 화형당할 위험이 있으니 최대한 몸을 사리도록, 옐로우 카드도 오프사이드도 없는 그런 험한 시대에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 끼 때울 빵 쪼가리나 이웃 나라를 덮쳤다는 흑사병 같은 것들을 걱정하며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저 그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까딱 시대를 잘 만나면 모조리 끝장이다. 나는 그저 그런 인간으로서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매일 노력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소질이 보이면 무슨 일이던 즉시 때려 칠 각오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뭐, 그럴 일은 없었다. 이렇다 할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천운이다.

 

그렇지만 이런 스스로가 처음부터 마냥 당당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내게도 철모르는 어린 시절이라는 게 있다. 그때는 내 자신이 참 많이도 부끄러웠다. 그저 그런 내 외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오래 짝사랑한 여자 대신 괜히 그 옆자리 앉은 여자에게 들이대는 일도 있었다. , 기억난다. 옆자리 그 여자는 콧구멍이 가로로 넓었는데, 사실 내 이상형은 짝사랑 그녀와 같은 세로로 긴 콧구멍이었다. 그렇지만 그땐 내 와꾸가 그저 그래서 긴 콧구멍은 가질 수가 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다고 오래 꿈꿔 온 콧구멍을 간단히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낸 방법이 바로 내 고개를 왼쪽으로 꺾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왼쪽 귀를 왼쪽 어깨에 붙인 것이다. 나는 내 눈이 세로로 서면 세상 가로들이 세로로 보일 줄 알았다. 인정한다. 그게 쉽진 않았다. 게다가 짝사랑 그녀가 이런 나를 보더니 스티븐 호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잔뜩 나서 미친 듯이 소주를 들이켰다. 고개를 꺾고 마시려니 절반은 입에 들어가고 바닥으로 흘렀다. 그러자 짝사랑 그녀는 종업원을 불러 저 스티븐 호킹이 우주를 멸망시키기 전에 얼른 빨대 하나 갖다 주라고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한테는 몰라도 최소한 스티븐 호킹 박사한테는! 위대한 호킹 박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미안해서 눈물이 다 고였다. 그런데 그 김에 한 두어 병 쯤 더 먹었을까, 나는 기어이 가로 콧구멍을 세로 콧구멍으로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건 곧 세로 콧구멍이 가로 콧구멍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 더는 슬프지 않았다. 세상에 술이 해내지 못하는 일이란 없구나. 어깨에서 고개를 떼는 순간 지금 이 회전감각이 물거품처럼 흩어지기라도 할까봐 굉장히 조심스레 의자를 돌려 그녀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눈을 두세 번 비비고 다시 봐도, 이제 가로가 세로였고 세로가 가로였다. 그 순간 내 짝사랑이 끝났다. 짧은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 술자리가 파했을 때, 어떻게 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를 내가 살던 오피스텔에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청춘 남녀가 술에 잔뜩 취해 침대가 하나 뿐인 방에 들어섰으니, 그 뒤에 생겼을 뜨겁고 끈적한 사연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착각이다. 슬픈 착각…….

 

그녀는 말했다. 57까지 세었어. 내가 대답했다. 안 싼 거 아냐? 취해서 하다가 잠든 건데 너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어. 넌 분명히 쌌고, 싸고 난 다음 후레이! 라고 외치며 콘돔을 벗겨서 저쪽 벽으로 집어던졌어. 나한테 몇 방울 튀더라. 으웩. 저기, 보이지? 보였다. 내가 저걸 집어 던졌다고? 정말 내가? …… 후레이? 아놔, 난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담담했다. 네가 던졌어. 로데오를 마친 카우보이처럼 당당하게. 좋았었나보지. 너라도 그랬다니 참 다행이지. 나는 다시 물었다. 네가 57까지 세었다고 꼭 57초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냐? 네가 무슨 스톱워치는 아닐 거 아냐. 너 술도 꽤 마셨고……. 미안, 그럴 리는 없어. ? 내 고등학교 때 별명이 뭔지 알아? 뭔데. 스와로브스키. 스와로브스키? . 스탑워치로봇새끼라는 뜻이지. 3분 내라면 오차범위 0.5초의 정확도로 시간을 잴 수가 있어 나는. 너는 정확히 57초짜리였어. 그 점에 대해서라면 넌 스와로브스키의 정품 보증서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나는, 네가 콘돔을 까는 순간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그건 네가 57초를 풀로 다 쓴 게 아니라는 뜻이야. 나는 고개를 양손에 파묻었다. 그만 해. 이러다 나 울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야…….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다. 나는 인간은 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말인데. 하지 마. 너 말야. , 하지 말라고! , 콘돔 까서 한 번에 못 끼우더라. 안쪽이랑 바깥쪽을 잘 모르더라고. 24초쯤 걸렸어. 그런 시간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넌 애가 왜 이렇게 잔인해……. 울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울었다, 확실히. 그러자 그녀가 선심 쓰듯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 안 한 걸로 쳐 줄게. 안 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 됐지? 우리 안 한 거다? 그리고 그녀는 테이블에 던져놓은 가방을 손에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수치심에 침대에 몸을 던지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래, 꺼져, 꺼지라고 이 나쁜 년아. 어차피 네 콧구멍은 가로였어! 가로였다고!

그 순간 내 두 번째 사랑이 끝났다. 역시 짧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순간이 바로 내 마지막 사랑이 끝난 순간이었다.

 

그녀가 안 한 걸로 쳐주는 바람에, 내가 과연 해 본 놈인지 안 해 본 놈인지 나조차 헷갈리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으로 해 본 놈으로 결말이 나게 되었다. 남자들끼리 술 마시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서 남자들은 늘 자신의 섹스능력 프리젠테이션 대회를 열곤 하는데, 주요 채점 항목은 사이즈(추호도 알고 싶지 않다), 테크닉(무협지가 따로 없다), 횟수(내 알 바냐), 상대 여성의 반응(알고 보면 착각일 확률이 높다. 여자들 연기력 만만치 않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속력……. 한 놈인 듯 한 놈 아닌 한 놈 같은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생이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제발 내겐 물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앉아 있는 그 자리가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불똥은 나에게 튀었다. , 솔직히 45분 저 말 믿냐? 무슨 AV배우냐? 안 그러냐? 나는 가만히 있었다. 넌 왜 가만히 있냐, 뭔 말을 해 봐. 나는 소주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어쭈, 폼 좀 잡는데? 너도 그 정도는 한다는 뜻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 아니야! 57? 5757? 57! 나는 분명히 분이 아니라 초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57분을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우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 봐봐. 이렇게 얌전한 애들이 보면 진짜배기 정력가라니까! 진짜배기 아니었다. , 쩔지 않냐? 쩔지 않았다. 상황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 놈이 야, 난 정말, 언젠가 얘가 해낼 줄 알았어. 해낼 줄 알았다니까…… 라며 눈물을 훔치는 바람에 티슈를 뽑아주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내게는 57분 교통정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영광이라면, 모든 영광을 스와로브스키의 가로 콧구멍에 돌리고 싶다.

 

그저 그런 놈으로서의 인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저거 다 부질없는 짓이고, 진실이 57분이든 57초든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로 1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저 진실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찾아올 혹시 모를 기회를 위해, 나는 늘 지갑에 콘돔을 챙겨 다닌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끝난 콘돔을 이용해, 안팎을 착각하지 않고 단번에 착용할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 지금은,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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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9-03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왜 ㅋㅋㅋㅋ57이죠? (이런 거만 궁금해.) 교통방송 때문이면 싱거워요. 저는 오늘 자의는 아니고 타의로 기기 안에 글 파일과 메일앱까지 싹 비워야 했는데 머리로는 클라우드에 있어, 사라진 게 아냐, 하면서도 막 심란했거든요. 그런데 클라우드를 다 비워버리시면....설사 인용문일지라도 한땀한땀 적은 걸...syo님 괜찮아요?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져서 잠이 안 오는데.

syo 2019-09-03 10:11   좋아요 0 | URL
싱거운 맛을 떠먹여드려서 어쩌죠? 57분 교통정보 때문에 57로 한 거 맞는데 ㅋㅋㅋㅋㅋ
56? 57? 58? 이러다가 골랐어요. 단지 57분 교통정보가 존재한다는 이유에서.

저야 원래 책을 재독 삼독하는 스타일이라서요. 다음 번에 다시 읽을 때 또 쌓아놓으면 되죠.
어차피 제가 인용을 따는 게, 나중에 써먹으려고 그러는 것보다, 일종의 필사 개념이거든요.
좋은 문장을 천천히 옮겨적으면서, 부디 내 개똥같은 문장을 조금이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시옵소서- 하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독서괭 2019-09-03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은 진지한데 아랫글은 ㅋㅋㅋ 그사랑이 마지막이었다는 거 보니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 같은데, 왠지 박민규가 떠오르네요. 재밌어요~~^^

syo 2019-09-03 10:06   좋아요 0 | URL
네. 에세이 아니구 앉은자리에서 만든 100% 개소리입니다.
박민규 ㅎㅎㅎㅎㅎ 100년 쯤 연마하면 초창기 박민규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당^-^

로쟈 2019-09-03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그런 소설보다 재밌습니다. 지방가는 시외버스에서.~

syo 2019-09-03 10:02   좋아요 0 | URL
이 태풍 속에서도 아침부터 열일하시는군요.
칭찬 말씀 감사합니다. 환절기 감기조심하세요ㅎㅎ

다락방 2019-09-0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8년 개봉한 영화 [데스티네이션 웨딩] 에서는 키에누 리브스가 위노나 라이더에게 ‘나 2006년에 한 게 마지막이었어‘ 라고 합니다. 네, 뭐, 그렇습니다.

syo 2019-09-04 09:45   좋아요 0 | URL
키에누 리브스도 12년을 못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에 사는 거니까 매사에 조심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2019-09-03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3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9-0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 보고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주섬주섬하다가(아니 내 주제에 누굴...) 아랫글 보고 뭐야, 살아있네~ 하고 갑니다. 흣.

syo 2019-09-05 11: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반전이 또 쫄깃쫄깃한 맛이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