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손缺損


 

1

 

위안이 필요한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인간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있다. 숨 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는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그렇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위안이 될 만큼 좋은 이들의 부재를 마주하는 날이 더욱 그렇다. 부재 전에 받았던 위안의 부피만큼, 부재 후에 남은 이들은 흔들려 우는 듯하다. 들리는(보이는) 울음과 그렇지는 않은 울음의 총량으로 미루어 부재 전 그 사람의 크기와 질량을 생각한다. 그 언젠가 몇 줄의 글로 주고 받은 짧은 대화, 결국 그저 이름만 주고받은 것과 마찬가지겠으나, 이미 슬픔의 거대한 그물망 안에 들어선 이의 마음에는 이름만으로도 구멍이 뚫렸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분이 떠나셨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며칠, 그 결손의 크기만큼 이 공간이 젖고 굽고 휘었음이 보인다. 얼마나 조용히 큰 분이셨던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인사가 잘 들리는 곳에, [그장소]님이 편안히 계실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지식과 지위가 부여한 인공적 자태보다환경과 행동이 만든 은근한 자태를 가진 이를 사랑하고도 두려워한다그가 가진 평정과 침묵,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얼굴에서 밝고 개방적이며생기 넘치는 기운이 느껴지고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그런 침묵"(<침묵의 기술>)은 공간과 함께 빛이 난다이 침묵을 아는 이라면 건축과 환경의 획일화를 혐오하고물질의 외면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어떤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각자 느낀 진실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말들이 바로 글과 공감의 힘이다그래서 글이 태어나고 음악은 흐르고 건축은 세워진다자신이 느낀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할 때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마음은 일렁거린다.

김현진진심의 공간, 43 

 

 

 

2



문학작품을 읽을 때뿐 아니라 연구나 평론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연구나 평론을 위해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입니다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읽은 것은 전부 '중심사상', '단락의 대의같은 것들이었습니다이런 방식으로는 작품을 훼손할 수밖에 없지요독서는 무엇보다도 뭔가를 느끼는 것이어야 합니다이러한 느낌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즐거운지 안 즐거운지는 다음 문제지요작품을 읽고 나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고즐거움을 가져다주든 분노를 가져다주든 이런 느낌은 전부 중요합니다그 뒤에 우리는 왜 즐거운지왜 분노를 느끼게 되는지왜 마음에 안 드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연구는 반드시 2차적인 것이어야 하고 반드시 독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162

 

요는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라는 말 같다.

 

굉장히 많이 읽는데도 굉장히 안 읽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많이 읽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건 답도 뭣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뭐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계화하면 생산량은 확실히 올라가지만 생산량이 올라가도 기계가 기쁠 일은 아닌지라, 빨간 꽃 노란 꽃이 책장 가득 피었는지, 하얀 나비 꽃나비가 책장 위로 나는지 마는지 나는 모르고 그저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갈 뿐인데......

 

작품을 읽고 나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고라는 대목은 뼈를 때린다. 마련이라는데, 마련일 때가 반이고 안 마련일 때가 반쯤 있었다.

 

느낌 없는 읽기는 읽기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너무 나이브해 보이기도 하고, 자신만의 읽기를 단단히 정립한 사람들이라면 반론의 여지도 있겠으나, 그냥 한 번 믿어보자. 한글을 갓 뗀 꼬꼬마 syo는 책을 읽으면 그 책에 실린 활자보다 더 많은 양의 이야기를 떠벌리는 말 많은 아이였다는 증언이다. 그 꼬맹이도 뭔가를 느꼈던 것 같다.

 

하나만 줘도 안 잡아먹겠다고 해 놓고 떡을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뺏어먹고 결국 엄마까지 잡아먹은 호랑이 놈은 당최 왜 다이렉트로 엄마를 잡아먹지 않았는지, 어차피 엄마를 잡아먹고 나면 주인 없는 떡은 그냥 호랑이 차지일 텐데 왜 굳이 희망고문을 한 건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인 건지, syo(8)이 사촌형(13)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형이 한 대답을 정확히 기억한다. ‘원래 맛있는 거 맨 나중에 먹는 거 아이가?’ 이는 syo의 조숙했음과 형의 되바라졌음을 증거하는 사건으로서, 아직도 명절이면 되풀이되는 레퍼토리의 하나다. 하여간, syo는 예전에, 느낄 줄 아는 꼬맹이였음이 틀림없다. 걔가 자라서 내가 되었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어.

 

, 그리고 위화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신다. 이 말씀도 관절을 격하게 꺾는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어느 셰프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그가 제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나요?"

  제가 대답했지요.

  "좋은 작가가 되고 싶으면 먼저 훌륭한 독자가 되세요."

  그가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독자가 될 수 있나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평범한 작품 말고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으세요오랫동안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은 사람은 취향과 교양의 수준이 높아져서 글을 쓸 때 자연히 스스로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게 되지만오랫동안 평범한 작품만 읽은 사람은 취향과 교양 수준도 평범해져 자기도 모르게 평범한 글을 쓰게 되지요남들의 결점은 나와 무관하지만 남들의 장점은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셰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군요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좋은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저는 종종 제 수하에 있는 요리사들을 다른 음식점에 보내 식사를 하게 해서 각자의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합니다항상 다른 음식점의 음식이 맛없다고 말하는 요리사는 발전이 없고항상 다른 음식점의 음식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셰프는 크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282-283 

 

 

3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125


남을 가르치려 드는 행위가 깔고 있는 전제는 두 가지다. ‘남은 모른다나는 안다’. 이 두 가지 전제 가운데 실제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전자 쪽이겠지만, 사실 자꾸 남을 가르치려 드는 짓 자체를 끊어내는 데는 후자 쪽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런데 관람석에서 지켜보면 링 위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는 명치에 첫 펀치를 세게 얻어맏고 남은 모른다를 수정, ‘너는 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추가타를 맞으면 마지못해 ‘A도 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라운드가 계속 이어지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연속공격에 ‘B도 안다’, ‘C도 안다차츰차츰 시인하게 되는데, 그러다 ‘70억 지구인이 모두 안다까지 인정할 때쯤에는 이미 그는 그로기 상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한 방이 그의 턱을 강타하면,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내가 잘못 알았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 ‘나는 모른다는 말은 청문회장이나 법정 밖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렵지만 들어도 믿기 어려운 말이 되었고, 우리는 그 말을 대신해서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이나 그와 유사하게 변형된 일종의 예비동작들이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여성들은 결국 이런 말을 듣는 셈이다. 당신은 모른다. 당신조차 당신은 모른다. 당신은 내가 안다. 그런데 남자들이 여자들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학문영역에 (의미 있는 수의) 여성 참여가 시작된 것이 기껏해야 100년 안팎이다.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고 돌을 갈아 주먹도끼를 만들던 기술을 학문의 시작이라고 보면, 699900년 동안 학문은 남성이 독차지한 영역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거주지를 자신의 신체 구조와 동선에 맞게 편집하는 본성을 지닌 동물이다. 학문이라는 집이 세워진 이후 오늘까지의 연대표 상에서 99.9857%에 해당하는 긴 기간을 독점 거주했던 남성이, 몇 만 몇 천, 많이 양보해서 몇 백 년 뒤쯤에는 올 수도 있는(그렇게 예측했던 이는 거의 없었을 것 같지만) 여성의 입주를 기다리며 젠더편향 없는 구조로 집을 꾸몄다고 믿는 것이 699900배 비합리적이다. 때로는 편향된 인간이 편향을 만들었을 것이며(기원전의 공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오늘날 ()구글의 제임스 뭐뭐라는 엔지니어에게로 이어지는 끈질긴 계보), 또 때로는 편향이 인간을 편향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에 닭이었는지 달걀이었는지 모르겠지만(사실 닭입니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아주 쉽게 치킨을 시켜먹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학문 자체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편향성은 남자로 하여금 여자들은 모른다고 한 점 의심도 없이 잘못 믿는 일을 어쨌든 돕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 정치, 철학,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예술, 심지어 군사학까지. 다양함을 넘어서 잡다하다 싶을 만큼 많은 분야를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것은, 모든 분야의 학문 속에 숨어 있는 부조리한 편향을 잡아채 뽑아내야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일종의 군대다. 여성학자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개별 학문 안에서 각개전투를 펼치기에 699900년짜리 철옹성은 너무 견고하므로, 그 두터운 성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천막을 치고 연합군을 형성한 것이다. 남자들 주머니를 털어 먹으려고 만든 군대가 아니라.

 

쓰다 보니 분위기 타서 단언하는 말투가 되었지만, 당연히 제 개인 견해입니다. 제가 혼자 뚝딱 뚝딱 만든 견해는 당연히 아니겠지만요.

 

 

 

--- 읽은 ---

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 / 김민주 지음

철현쌤, 공무원 연봉 진짜 얼마예요? / 조철현 지음

밥보다 일기 / 서민 지음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지음 / 김명남 옮김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 마쓰무라 게이치로 지음 / 최재혁 옮김

 

 

--- 읽는 ---

인생 직업 / The School of Life 지음 / 이지연 옮김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지음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 위화 지음 / 김태성 옮김

진심의 공간 / 김현진 지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용호 옮김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지음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단 하나의 문장 / 구병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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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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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해목 2019-01-1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위대한 작품이란 결국 고전을 말하는 거겠지요.
저 역시 느낌을 잃어버린 채 독서를 해온 것 같아 제 독서행위를 되돌아보게 되네요.
덕분에 올해 독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syo님~ ^^

syo 2019-01-14 10:36   좋아요 1 | URL
그런 것 같죠?? 결국 고전인건가.....
죽을 때까지 욜심히 읽어도 기껏 몇 만권이면 땡이잖아요.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막 읽었다가 후회하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ㅠㅠ
 

 

오프닝 세리머니

  

우선, 차트를 보시죠.

 


, 보니까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일단 지구력이 참 그지같다, 그죠?

 

환자분, 물론 시작부터 바로 딱 끊어내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1월과 2월의 독서량을 보면, 그래도 조금씩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보였어요. 이건 칭찬해드릴게요. 그런데 3월 보실까요? 갑자기 무리하게 딱 끊으셨죠? 이제 조금씩 독서량이 줄어드니까 막막 자신감이 뿜뿜했던 거지, 한방에 딱 끊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거라, 그쵸? 맞죠? 그랬더니 봐봐, 4월 어떻게 됐어요? 보이죠? 금단현상 왔죠? 12월 합친 것만큼 한방에 읽었죠? 어휴.....

 

원래 그렇게 다들 그렇게 무너지는 거예요. 12월 추세 맞춰서 조금씩 줄여나가면 좋았잖아, 우리가 괜히 처방해드리겠어요? 환자분, 저 이래봬도 전문가예요. 제가 봤을 때 환자분이 한 방에 책을 딱 끊을 수 있을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처방을 해드렸죠. 근데 환자분, 딱 봐도 아닌걸. 누가 봐도 아닌걸. 아니라서 점진적으로 가자고 그렇게 처방한 건데, 멋대로 이렇게 하시면 어떡해요. 자기과신하다가 망한 전형적인 케이스시잖아요......

 

5, 6, 7월 독서량 줄인 게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때는 완전히 끊었어야 맞죠. 못해도 6월에 한 자리수 돌입하고 7월에는 무조건 제로 찍었어야죠. 아니, 양심 있는 사람이면 그랬어야지. 남들은 하루 열두 시간씩 공부만 하는데?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쉬울까봐? 아놔, 나 화 날라그러네......

죄송해요, 제가 언성이 좀 높았죠? 허허. 프로가 이러면 안 되는 건데.

 

8월은 작정하고 읽으신 거니까 넘어가구요, 9, 10월은 특별한 게 없네요. 보니까 욕심도 안 내셨고, 그렇다고 부러 줄이신 것도 아니고. . 11. 11월은 이해해드려야죠. 아플 때는 많이 먹고 푹 자는 게 좋잖아요. 마음의 상처는 다독 다치킨으로 해결하는 법이지요. , 12월도 별 건 없네요. 후반기는 그냥 그러네요.

 

환자분, 이제 내일부터 내년인데요. 내년은 어쩌시겠어요? 이제 정말 정체성을 정하셔야 되요. 올해처럼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사셔야 돼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뭐 맘대로 하셔도 되는데, 솔직히 그러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그쵸? 올해처럼 하면요, 내년도 폭망입니다. 뭘 하실 생각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아요, 뭘 하셔도 폭망일테니까요. 아시겠어요? 제가 왠만하면 이렇게 쎄게 말씀 안 드리는데, 환자분은 정말, ,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세요, 환자분은 정말, 정말 개노답이세요...... 제 커리어의 커다란 오점이세요...... 아니, 환자분,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아니구요..... 제가 뭐 쓰레기라고까지는 말씀 안 드렸는데, 아니,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라니까요? 어어, 환자분, 지금 우세요? 아이고, , 환자분 뚝.......

 

 

 

2018 집계

 

01: 022

02: 020

03: 000

04: 044

05: 036

06: 030

07: 016

08: 116

09: 054

10: 047

11: 073

12: 042

----------------------------

: 500권

 

딱 떨어지는 500이라는 숫자 때문에 일부러 맞춰서 저렇게 읽은 걸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정답입니다. 저건 일부러 맞춰서 읽은 거죠. 무심코 저게 되나요. 12월 중순쯤, 갑자기 올해는 몇 권 읽었나 궁금해져서 집계해봤더니 480 살짝 넘더라구요. 29일 오전까지 읽었더니 500권이 딱 떨어져서, 그 순간 바로 올해의 독서를 접었습니다. 딱히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지만, 그땐 왠지 그러고 싶었어요...... 숫자ㅂㅌ......

 

500권은 많은 양일까요? 저는 알라딘을 제외하면 다른 SNS는 물론, 어떤 온-오프라인 커뮤니티에도 속해 있지 않아서 오직 알라딘 공간만이 syo의 판단 기준이 되는데요. , 1년에 1000, 1500권씩 읽고 그 책들의 리뷰를 다 쓰시는 분들이 syo의 서재이웃들 중에서만 해도 세 분이나 계시네요. 책 읽고 닭 먹는 것 말고 딱히 하는 게 없는 백수라는 점도 염두에 두고 보면, 500은 많아 보이긴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양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저 500500인 듯 500아닌 500같은 500이기도 하구요. 만화도 열 몇 권 들어 있고, 전체적으로 100같은 500을 읽었네요. 500같은 100을 읽으신 이웃 분들의 2018 정리 페이퍼들이 속속 올라오는데요, 읽으신 가운데 깊이와 무게를 갖춘 고전의 목록이 즐비하여 syo는 좀 많이 부끄럽습니다.

 

 

 

어쨌거나 2018 syo어워드

 

<< 에세이 >>

1.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2.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 황현산

3. 빵 고르듯 살고 싶다 / 임진아


+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 이슬아

+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 허수경

+ 열다섯 번의 밤 / 신유진

+ 아무튼, 스웨터 / 김현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 이지원

+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 서영인 지음, 보담 그림

 



<< 에세이라해야할지말아야할지모르겠는 산문 >>

1. 존 치버의 일기 / 존 치버

2. 정확한 사랑의 실험 / 신형철

3.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 신용목


+ 한 글자 사전 / 김소연

+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 발터 벤야민


 

<< 읽기 / 쓰기 >>

1. 정희진처럼 읽기 / 정희진

2.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조 퀴넌

3. 책에 빠져 죽지 않기 / 이현우


+ 무엇이든 쓰게 된다 / 김중혁

+ 죽음을 이기는 독서 / 클라이브 제임스


 

<< 만화 >>

1. 내 이야기! 1~13 / 카와하라 카즈네 지음, 하루코 그림

2. 있으려나 서점 / 요시타케 신스케

 


<< 소설 >>

1. 곰탕 1, 2 / 김영탁

2. 왕을 위한 홀로그램 / 데이브 에거스

3. 여름, 스피드 / 김봉곤


+ / 한강

+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 내 이름은 빨강 / 오르한 파묵

 


<< 사회학 >>

1.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뤼트허르 브레흐만

2. 인생극장 / 노명우

3. 과학 같은 소리 하네 / 데이브 레비턴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 로버트H. 프랭크

+ 잃어버린 임금을 찾아서 / 이민경

+ 이토록 두려운 사랑 / 김신현경

+ 아마추어 / 앤디 메리필드

 


<< 시 >>

1. 가재미 / 문태준

2.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유계영

3. 다정한 호칭 / 이은규


+ i에게 / 김소연


 

<< 과학 / 공학 / 수학 >>

1. 수학이 필요한 순간 / 김민형


+ 김상욱의 과학 공부 / 김상욱

+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 옌스 죈트겐 지음,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그림

 


<< 역사 >>

1. 역사 고전 강의 / 강유원


+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 정기문

+ 종횡무진 서양사 1, 2 / 남경태

+ 역사의 역사 / 유시민

 


<< 환경 >>

1.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 요한 록스트룀 & 마티아스 클룸

2. 아무튼, 딱따구리 / 박규리

3.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 박병상

 


<< 철학 >>

1.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 류동민

2.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3. 담론의 질서 / 미셸 푸코


+ 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 발타자르 토마스

+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 모티머 J. 애들러

+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 문성환

 


<< 인문학 >>

1.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 페터 비에리

2. 철학은 전쟁이다 / 베르나르 앙리 레비

 


<< 정치 >>

1. 정치철학 / 스티븐 스미스

2. 정치 / 케네스 미노그

 


<< 2018syo를 가장 많이 바꾼 올해의 책 >>

내 이야기! 1~13 / 카와하라 카즈네 지음, 하루코 그림

 

 

 

<< 그리고 읽겠다고 크게 깝쳤으나 다 읽지 못하고 내년으로 건너간 책들 >>


+ 헤겔 / 테리 핀카드

+ 헤겔 / 찰스 테일러

+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 경애의 마음 / 김금희

+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박상영

+ 국가 / 플라톤


+ 마르크스 전기 1, 2 / 마르크스 레닌주의연구소

+ 정치사상사 / 앨런 라이언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페르난두 페소아

+ 불안의 책 / 페르난두 페소아

 



클로징 멘트 

 

좋은 책 나쁜 책이 있다고 syo는 생각합니다. 이 책보다 저 책이 더 좋은 책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만 깔려 있다면요. 예를 들어서, 사람마다 좋은 책 점수를 내기 위한 내부 채점 기준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내게 좋은 책과 네게 좋은 책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게 좋은 책을 네게도 좋은 책이라 강요할 수 없다는 것 같은 너무 당연해서 두 번 말하기에 입 아픈 전제들이요. 이상형 월드컵 하듯 토너먼트 식으로 줄을 세워서 좋은 책 랭킹을 매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개인적인 랭킹일 뿐, 공신력 같은 건 주장할 수도 없고 주장해서도 안 되겠지만요. 하여간, syo의 내부가 가지고 있는 좋은 책 채점표를 놓고 보면 올해는 좋은 책을 별로 많이 읽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다독과 관련이 없진 않겠지요.

 

매년 하는 약속이고 매번 망해온 다짐이지만, 내년에는 정말 적게 읽고 오래 읽고 다시 읽고 싶어요. 많아야 한 달에 10, 한 해에 100권 정도만 읽으면 좋겠습니다. 매달 두세 권정도, 오래 반복해서 읽어야 될 무겁고 깊은 책을 골라 꼼꼼히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그게 되면 여기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쓸모 있는 글들이 올라오는 공간이 되려나요.

 

하찮고 깊이도 없는 독서의 흔적과 그에 걸맞은 신변잡기 글이나 올라오는 별 거 없는 서재인데다, 누가 원한 것도 아닌 글을 알아서 올리는 syo지만, 항상 과한 칭찬을 받고 그 칭찬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적립금으로 변신하면서 매달 두세 권 정도를 공짜로 얻고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쓰라고 시키지도 않은 글을 쓰듯이, 느끼라고 시키지도 않은 책임감 같은 걸 저 혼자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책임감인가 하면요, ,

 

이웃님들의 글이, 그리고 이웃님들과 나누는 길지 않는 이야기들이 별 거 아닌 syo의 인생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되고 있거든요. 처음에 알라딘은 syo에게 물에 빠진 사람이 잡는 지푸라기 같은 거였는데, 한 몇 년 여기서 놀았더니 어느덧 그 지푸라기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섬을 짓게 되었어요. 그 위에 다시 지푸라기로 집도 지었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둥둥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받은 만큼 뭔가를 돌려드리고 싶은데, 가진 게 온통 지푸라기밖에 없어서요. 지푸라기 밖에 없어서 지푸라기를 드려야 되는데, 기왕 드릴 지푸라기라면 양질의 지푸라기를 드려야지, 하는 그런 책임감이요. 생각해 보면, syo가 사는 꼴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훌륭한 지푸라기가 될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아무래도 여기는 책 읽는 사람들이 책 읽는 공간이니까요. 그래서 2019syosyo를 줄이고 책을 늘리는 syo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어찌되었든 syo2019에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그리고 이웃님들의 2019년이, 읽고 싶은 책이 생기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여유가 생기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나니 만족과 행복이 생기고, 그러고 났더니 읽고 싶은 책이 또 퐁퐁퐁 생겨나 끝없이 행복한, 그런 행복의 무한루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while(read) { read++; your_happiness++; }

 

 


방송 사고

 

좀 오글거리지만, 이런 글로 한해를 마무리 하는 것, 한번쯤 꼭 해보고 싶었다니까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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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1-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독을 실천하시고 계신 syo님에 경외를!
역시 유명인은 다르구나를 느끼네요. ^^
18년에도 syo님의 정성스런 글에 저에게도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올 한해는 작년보다 더 나은 한 해가 되시길 바랄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yo 2019-01-01 19:33   좋아요 1 | URL
유명인이요?? ㅋㅋㅋㅋㅋㅋ 정말 어색한 단어다.....

2019에는 아무래도 블랙겟타님과 몇 권을 함께 읽게 될 모양인데, 저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2019-01-01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1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쟝쟝 2019-01-01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페이퍼를 쓰시는지 ㅋㅋㅋ 찾아읽는 쇼님 글! 올해도 잘 부탁드릴게요 ㅎ~

syo 2019-01-01 22:12   좋아요 1 | URL
여기 찾아오셔도 저는 없을 거예요. 아마 쟝쟝님 서재에 쟝쟝님 글 찾아읽으러 갔을 걸요? ㅎㅎㅎ

로쟈 2019-01-01 21: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직장을 갖게 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네요. 새해에도 클리닉은 꾸준히 다니시는 걸로.~^^

syo 2019-01-01 22:20   좋아요 3 | URL
양을 줄이고 줄여나가다 보면 결국 한 권 한 권을 지금보다 훨씬 신중하게 골라야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로쟈님께 더 많이 기대게 되겠구요.

로쟈님께는 2019년에도 계속 좋은 글 써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굉장히 새삼스럽고 외람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건강하시길 부탁드릴까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1-01 22:25   좋아요 2 | URL
로쟈님 팩트폭격하십니다 이 댓글 알람으로 받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역쉬👍👍👍

독서괭 2019-01-0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렇게 많은 댓글이 달리다니..! 역시 인기쟁이 syo님.. 제가 늦었군요 크흑 ㅜㅜ
지난 한해 syo님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북플에 님이 계속 글을 쓰시는 한 저도 북플에 계속 접속할 것 같아요.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syo 2019-01-02 10:21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은 syo의 하이패스 고객님이시라서 늦고 그런 거 없습니다. syo의 글에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던 시절부터 무플방지위원회로 활동하셨잖아요.ㅎㅎㅎㅎ
올해는 좀 더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 말고 독서괭님 서재에서두요^-^

레삭매냐 2019-01-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독 500권은 되어야 나올 법한
설렉션이었습니다 !!!

역시나 대단하십니다.

syo 2019-01-02 23:07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솔직히 말햐서 레삭매냐님 셀렉션에 비하면 정말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보면서 질투랄지 열둥감이랄제 그런 기분이 들었었지요.

여름숲 2019-01-0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북플을 알고 대단하신 분들을 뵙습니다. 어쩜 그리도 멋지신지...요즘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곳에서 합니다.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syo 2019-01-02 23:10   좋아요 1 | URL
하림님 환영합니다. 제가 알라딘의 뭐는 아니지만 환영하구요.

조만간 하림님의 활동으로 다른 분들도 행복을 느끼게 될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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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산격동

 

 

1


 

  나는 길을 벗어나기를 좋아하고내가 아는 것 너머로 나가보기를 좋아하고아마 몇 킬로미터쯤 더 걸어야 하겠지만 다른 길을 통해서지도와 다투는 나침반에 의지하여도중에 만난 낯선 사람들이 알려준 천차만별의 방향 지시에 의지하여 돌아오기를 좋아한다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부의 외딴 마을에서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채 홀로 모텔에서 보내는 밤들괴상한 그림과 꽃무늬 이불과 케이블 텔레비전과 함께하기에 나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 되어주는 그 밤들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스스로 어디 있는지 알기는 해도 사실 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 시간들걸어서 혹은 차로 어떤 산마루를 넘거나 어떤 굽이를 돌자마자 '여기는 난생 처음 보는 장소인걸.' 하는 혼잣말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어째서인지 그동안 내 눈길을 벗어났던 건축의 어떤 세부적인 면이나 어떤 경관이 문득 내게 말을 걸어와서그동안 내가 집에 있기는 했어도 사실 내가 있는 곳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알려주는 순간들낯익은 것을 낯설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이를테면 내가 사는 곳에서 지금은 사라진 풍경과 사라진 묘지와 사라진 동식물을 알려주는 이야기들대화하는 사람들만을 남긴 채 주변의 다른 모든 것을 사라지게끔 만드는 대화들온 종일 잊고 있다가 늦게서야 그날 나의 모든 느낌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게 되는 간밤의 꿈들...... 이런 길 잃기들은 원래의 길이나 아예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시작이다이 밖에도 물론 다른 길 잃기의 방법들이 무수히 더 많지만.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28-29

 

어느새 밤이었다. 아이들은 하나둘 걱정을 시작했다. 만화 하기 전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며. 제일 작은 아이가 울먹거렸다. 앞서 걷는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걸었다. 마른 흙과 바스라지는 돌멩이들이 잔뜩 깔린 길은 짐승의 길인지 사람의 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계속 내려가 보자. 내리막길로만 가면 곧 산이 끝나고 집들이 나올 거야. 키 큰 아이의 위로하는 목소리조차 나뭇가지에 걸려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는 어두운 숲이었다. 내리막이 다른 오르막으로 이어지진 않을지, 그 끝에 마을은 나올지, 그 마을이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우리 마을일지, 누구도 확신이 없었다. 소풍 때 와 봤던 산이라며, 좋은 곳이 있다며 함께 오르기를 종용했던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다른 아이들은 묵묵히 뒤따랐다. 앞서 걷는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제일 보고 싶은 것들을 떠올렸다. 벌써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을 아빠와, 저녁상을 보고 기다릴 엄마와, 어제 엄마가 시장에서 사 와 냉장고에 넣어 놓은 소시지와, 칠이 다 벗겨져 녹슨 대문과, 주말에는 대문에 페인트를 칠해야겠다던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집에 가고 싶어요. 제발 집에만 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시면 페인트도 마실 수 있어요. 제가 누구를 찾는지도 모르고 아이는 누군가를 찾았고 빌었다. 그러다 금방 빨강색 페인트는 딸기 맛, 녹색 페인트는 메론 맛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딸기 맛이면 좋겠어. 유독 빨강색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매일 보던 도시의 밤은 푸른색이었지만 산의 밤은 검정색이었다. 검은 산 속에 일렬로 걷는 아이들의 발소리만 저벅거리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아이들은 앞뒤로 손을 잡고 걸었다. 불편했지만 불안보다는 불편을 선택하고 걸어 나갔다. 앞서 걷는 아이는 한 손이나마 자유로웠지만 누구보다 자유롭지 않은 마음이었다. 키 큰 아이가 만화주제가를 흥얼거렸다. 선택하지 않은 불안이지만 불안은 선택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것이어서 키 큰 아이는 노래를 선택했다. 노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남은 선택지는 울음이었을 것이다. 울음 같기도 하고 불안 같기도 한 노래가 금방 끝났다. 산에는 다시 아이들의 지친 발이 내리막을 지치는 소리, 양손이 다 잡힌 아이가 세게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 초여름이 밤을 몸에 발라 열 식히는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형아, 만화 동산 친구들 불러 줘. 작은 아이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키 큰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다른 아이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작은 아이도 뒤질세라 따라 불렀다.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앞서 걷는 아이는 갑자기 이 모든 게 만화 같고, 이 무서운 산이 동산 같았다. 밤과 친구가 된 것만 같았고, 밤과 친구가 된 세상은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만 같았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아이들은 모두 만화동산 친구가 되어 외쳤다. 산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왁자지껄한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눈에 나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 높은 나무들이 아니었다. 귀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 조용한 밤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친구! 만화 동산 친구! 만화는 신나는 우리들의 세상!

 

몇 개의 합창이 끝났다. 아이들이 걸은 내리막은 오르막으로 바뀌지 않는 순하고 착한 내리막이었다. 길이 점차 넓어지다 콘크리트로 거칠게 마감한 길과 맞붙었다. 가로등이 환했다. 도착한 곳은 아이들이 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앞서 걷는 아이가 잘 아는 동네였다. 아이들은 노래를 그치고, 손을 놓고, 자신 있게 콘크리트 내리막을 걸어 내려갔다. 더러 웃는 소리도 들렸다. 앞서 걷는 아이는 나란히 걷는 아이 중 하나가 되었다. 높은 산동네 가파른 내리막이라 정면에 하늘이 있었다. 살짝만 고개를 들어도 별이 보였다. 그제야 하늘도 별도 보였다. 나란히 걷는 아이는 집에 돌아가 아빠에게 혼날 생각을 했다. 회초리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빨강 페인트도 없었으면 좋겠어. 페인트는 맛이 없을 텐데.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지만 딸기는 먹고 싶었다. 소시지도 먹고 싶었다.

 

 

 

2



한국인은 왜 이렇게 '틀리다'와 '다르다'를 혼용할까요이 두 단어를 동의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이는 언어적 오용을 넘어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고 존재합니다언어를 잘못 쓰면 잘못된 사고를 할 수 있지요즉 '틀리다'와 '다르다'를 동의어로 사용하면 차이를 다양성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틀린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자신과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을 틀린 사람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장한업차별의 언어 


이 대목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먼저, 고민 없이 남발하는 예쁜 말이 고민을 없앤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라는 주장은 너무 옳고,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간임을, 다양성을 깨친 인간임을 어필하는데 쓰면 상당히 적은 비용으로 괜찮은 효과를 볼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비용에 비해 편익이 큰 말이다 보니 누구나 기꺼이 사용하고, 결국 실제로는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입에서도 저 말은 어렵지 않게 나온다. 마치 공유지의 비극을 맞이한 것처럼, 저 말은 마침내 껍데기가 되었다.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안다.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라는 걸. 근데 저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다.

 

중요한 것은 뭐가 다르고 뭐가 틀린지에 대한 각자의 견해가 다르거나 틀리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틀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동성애는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라는 주장하는 이에게 동성애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되돌려주는 것은 당신의 주장이 틀렸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주장(동성애는 틀렸다)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라는 역습을 만나면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만 기대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각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안다. 각자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요는 말싸움이 아니라 힘싸움이다. 어떤 가치를 신봉하는 이들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힘이 반대편을 압도할 때, 그들의 가치가 정의도 되고 상식도 되는 것이다. 그런 싸움에서는 전선을 잘 긋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쁘고 헛된 말은 밀고 나가는 힘이 없다.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하는 스스로를 속이는 데 쓰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자위도구로 쓰일 뿐이다.

 

두 번째로, 저 말 자체가 남발되면 멍청한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점이다. 요즘은 대구 사람들도 다르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쓰지만, syo보다 어른들이 쓰는 대구 사투리에는 다르다가 없다시피 하다. 대구 어르신들은 다른 것도 틀리다고 하고 틀린 것도 틀리다고 한다. ‘다른은 있다. 보통 ’으로 쓴다. 하지만 다르다는 여지없이 틀리다가 대신한다. syo는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쟤는 너와 다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만약 대구 사투리의 어휘 체계에 다르다가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대구에서만큼은 더는 틀리다다르다의 오용이 아니게 되었다면, 어휘 체계에 다르다를 갖춘 말이 표준어라는 이유만으로 대구 사람들의 어휘 사용은 비난받아야 할까? 사투리는 틀린 것이 아니라, 표준어와 다른 것이다. 표준어 구사자에게 다르다는 말을 써야 할 곳이라는 이유로 대구 사투리 구사자에게도 틀리다대신 다르다는 말을 쓰라고 종용하는 일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이용해 다른 것을 틀리다고 주장하는 셈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건 어디건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틀리다를 구분하여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데가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고,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 안에 차별이나 혐오를 품지 않는 방향으로 변해가야 한다. 멍청하게 있다가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빻은 말을 내뱉는 꼴을 보면 말은 무의식의 호구인가 싶지만, 그 무의식을 형성하는 것 역시 말, 남의 입에서 나와서 내 귀가 듣는 말, 내 입에서 나와서 내가 듣는 말, 듣는 말이다. 한 번 뱉고 마는 말은 힘이 없지만, 백 번 반복되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고, 만 번 반복되는 말은 산을 옮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아는 마음은 사실 소통의 기본기고, 모두가 무의식에 그 기본기를 장착하는 날이면 더 이상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당연하고 약한 말은 새삼스러워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니까.

 

 


3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려 든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을 대하는 데 어느 정도의 마조히즘즉 자학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우리의 관심을 끌고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만큼 우리를 좌절시킬 수도 있다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그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든 아니면 우리를 무시하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 매달린다우리를 끊임없이 똑같은 인간관계의 함정과 궁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희망과 좌절 사이의 경계 지점인지 모른다.

외른 회프너카트 읽는 남자, 20-21 


내가 방금 한 말만으로 나를 다 알 수는 없는 거라고 대꾸하는 목소리가 거셀수록, 역설적으로 그 말이야말로 나에 대해 정말 많이 알려주는 말이라는 걸 거세게 자백하는 꼴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내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로 사과한 일이 실은 제일 크게 미안해야할 일이었고, 부끄러움으로 오래 남는 일이었다. 반면, 나를 알려주기 위해 내가 건넨 말들을 모아보면 지금의 내가 아니라 되고 싶은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건 세상에 없는 나였다. 나의 이데아 같은 것.

 

나를 알려주는 일은 이렇게 어렵고 부끄럽고 빗나가는 일이서, 다른 사람을 아는 일은 좀 수월할까 했지만, 세상엔 쉬운 일이 하나 없다.

 

사람에 대해 많이 알고 싶은 욕심은 끊을 수가 없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싶고 미움이 크면 클수록 미운 사람을 알고 싶다. 내게 주어진 파편들을 그러모으고 지성이니 상상력 같은 것들을 접착제로 사용해 나는 그 사람을 내 안에 만든다. 매우 조잡하게. 내 안의 그 사람은 내 밖의 그 사람과 만나면 여지없이 깨어지고 그러면 나는 다시 파편을 주워 모아야 한다. 그 사람이 그대로 내 안에 퐁당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것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는 또 모자이크를 시작한다. 다시 박살날 조각을 맞춘다.

 

이 과정에 너무 지쳐서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늙는 일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제는 큰 덩어리만 대충 모으고, 대충 밑그림을 그리고, 언제 부서져도 상처 나지 않도록 모서리가 둥글둥글한 사람들만 만들어 마음 안에 들여놓고 싶다. 그러면 피곤할 일이 없겠다.

 

그렇지만 늙는 일은 곧바로 죽는 일은 아니라서, 아무리 지치고 속상해도 온전한 전부를 마음에 들여놓고 싶은 사람은 생기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의 지나는 말 한마디를 그저 지나지 못하고, 뿌리는 눈빛 한 줌을 그저 뿌리치지 못하고, 흘리는 웃음 한 조각을 그저 흘려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인간이 마음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아니라 남으로 채우는 것이므로, 그 피곤하고 날카로운 일을 인간은 끝없이 반복할 밖에.

 

 

 

 -- 읽은 --



한강 외, 작별

강민선,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장한업, 차별의 언어

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

시사IN 편집국, 시사IN 588

 

 

-- 읽는 --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외른 회프너, 카트 읽는 남자

김영민, 동무론

데니스 C. 라스무센, 무신론자와 교수

오선영, 모두의 내력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

서영은, 보담,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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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다 타인에 대해 퍼즐맞추기를 하나 봅니다 나도 쇼님에 대해 퍼즐 맞추고 모자이크 만든다오~ㅎ

syo 2018-12-28 18:3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만나면 한 방에 다 허물어질 부질없는 모자이크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8 18:39   좋아요 0 | URL
다 똑같지요 ㅎ

2018-12-29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9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12-2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트 읽는 남자』의 인용문을 읽고 느낌 :
타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기보다 저 자신을 통해 인간을 이해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타인보다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될 때가 더 많고요. 뭐 이건 작가의 솜씨, 통찰력에 기인한 것이겠지만요.
저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은데 내가 누굴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의 속마음도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ㅋ
좋은 밤 되시길...

syo 2018-12-29 19:30   좋아요 0 | URL
음, 저는 저를 통해서는 저밖에 모르겠더라구요 ㅎㅎㅎㅎ 이런 저밖에 모르는 놈.....
타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사실은 포기했어요. 타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세상에 ‘인간‘이라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이라는 게 있다면 참 편할 텐데, 그거 알면 되게 많이 아는 거니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역시 저밖에 모르는 놈 ㅋㅋㅋㅋ

페크님도 따뜻한 밤 보내시기를. 날이 많이 춥습니다.
 


모름을 아는 것은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1



철학하기는 삶과 공동생활에서의 의심스러운 전제와 주장들에 대해 우리의 머리를 깨운다그 목표도 더는 예전처럼 진리가 아니다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가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그 목표란 우리의 생각과 삶의 틀을 넓히는 것이다철학하기란 우리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좀 더 생동감 있게 체험하려는 희망 속에서 우리의 사고 기관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다그게 단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위한 것일지라도.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세상을 알라』 , 20-21 

 

많이 알수록 점점 더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고 또 한다. 그 말을 하는 syo의 모습은 때로 트로피를 높이 든 운동선수처럼 보인다. 잘 모르는데, 잘 모르는 걸 알았는데 어떻게 계속 말을 하지?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쓰는 일도 많다. 써보니 저건 의미는 없고 의도만 있는 말인 것 같다. 겸손해 보이고 싶은 의도. 일단 뱉고 나중에 틀렸다는 게 밝혀질 때 면피하고 싶은 의도. 자체 모순의 말 같기도 하다. ‘아니지만이라는 역접의 말끝은 이제부터 내 주장을 끌어 붙이겠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모순 없이 가능한 말은 오직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라서뿐인 것은 아닐까? 이제부터 당신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말끝.

 

살며 많은 딜레마를 만나왔지만 그 중 무엇 하나도 돌파하지 못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는 말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있는지 없는지 가려내지 못했고, 모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주장하는 이가 얼마나 강한지에 달렸다는 주장이 얼마나 강한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말에 모든 사람이 만족해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보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쁜 결과를 빚어내는 국면이 있다는 건 아는데, 간혹 그 국면에 들어설 때면 이 국면이 바로 그 국면인지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나를 위해 철학이 무엇인가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른다. 그걸 알려면 철학을 알아야 하는데 철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모르니 철학을 못하겠다. 그걸 알려면 철학을 해야 하는데..... 대충 그런 이유로 우리는 철학에 손을 대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어렵기도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철학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해 준다는 확신만 있으면 우리도 기어이 철학을 할 것인데 말이다.

 

단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된 스스로를 뿌듯해했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1일 따름이었다. , 인간이란 뭘까, 철학이란 뭘까, 철학하는 인간은 뭘까.


계몽이 자기파괴를 일삼는다는 것은 계몽이 내세우는 '발전'이 진보로서가 아니라 '퇴행'으로 귀착되었음을 뜻한다계몽의 이상이 삶의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계몽의 정신은 계몽의 이데올로기로 퇴보하였다이 이데올로기는 속박을 초래한다그것은 생산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이다이데올로기적 이성은 또 다른 속박의 이름이다그리하여 계몽된 문명은 자기파괴적 이성 아래 야만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광훈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진우니체 

 

사실 모든 사람은 역사의 파편 속에서 작은 맥락을 일구고 살아갈 뿐입니다거시적인 방향성을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당면한 현실 가운데 맥락을 일구지 못하면 모두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할 뿐입니다.

심용환단박에 한국사 근대편

 

 

 

2



2001년 우리가 살던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는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렸다여러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자리를 깐 뒤 채소나 과일이나 접시나 안데르센 동화전집 같은 걸 팔았는데 그 중에 청바지를 파는 천막도 있었다엄마는 장날이면 그 천막에서 싸고 예쁜 청바지를 고르곤 했다부츠컷 청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청바지 가게 아저씨는 눈썹이 진했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친절했다엄마와 아저씨가 계산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코딱지를 파며 서 있었다계산을 마친 엄마는 아저씨에게 상냥하게 인사한 뒤 천막을 빠져나왔고 아저씨도 반가워하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어느 날부턴가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 보였다얼마 후에도 엄마와 나는 장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었는데청바지 파는 천막을 지날 때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아저씨가 다가와 엄마에게 말했다. "제발 이 앞으로 지나다니지 좀 마요...... 미치겠으니까." 그때 봤던 청바지 아저씨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나는 먼 훗날까지 잊지 못했다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뒤 나를 데리고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렸다청바지를 팔던 아저씨는 얼마 후부터 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바야흐로 스키니진의 유행이 도래하고 있었다.

이슬아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17-20

 

이건 완벽하지 않나? 이만큼으로 할 수 있는 최고지 않나?

 

안데르센 동화전집주로 코딱지를 파며 서 있었다라는 도구의 효율적인 역할과 적확한 자리. 그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음질치므로 저런 장치를 추가하면 사족에 불과하거나 몰입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부츠컷과 스키니진. syo라면 부츠컷 청바지가 유행하던 때였다를 맨 앞줄에 넣었겠다. 그랬다면 조금 더 시선을 잡아끄는 첫 문장을 가진 글이 되고, 글의 첫머리와 꼬리가 대응하여 맺히는 글이 될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전체 구조가 좀 작위적이고 기교적이라는 느낌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랬다면 그 작위와 기교가 청바지 아저씨와 엄마의 이미지에 조금은 물들 것이며, 전체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그만큼 줄었을 것 같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슬아의 선택이(선택인지 감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옳은 것 같다. 멋져.

 

이런 좋은 글은 항상 양면적인 기분이 들게 한다. 잘 쓴 글이 주는 기쁨은 예쁜 조각 같지만, 그 조각의 밑면에는 항상 ㅋㅋㅋㅋ넌 이거 안 되지 메롱이라고 쓰여 있다. 특히 이슬아 작가의 경우처럼, 그 예쁜 조각을 만든 이가 syo보다 10살 가까이 어리면 그 놀림은 더욱 크게 쓰여 있다! 게다가 여기에는 옮길 수가 없었지만 저 글에는 syo가 결코 손댈 수 없는 영역인 그림까지 부착되어 있다! 이러면 도리 없이 또 사랑해야지. , 세상엔 사랑할 사람이 너무 많아. 자꾸자꾸 생겨나는 사랑, 이 헤픈 사랑.

 

 

 

 

3



  인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서구 의약품의 전파를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질병 치료도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도 거부할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개선과 함께 출생률 조절이 이루어져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삶의 질을 개선하는 만큼 가족 인구의 제한이 뒤따라야 한다사망률과 출생률을 함께 조절하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은 어두워질 것이다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가톨릭교도가 가장 많은 국가그리고 현대 의학이 등장하는 국가에서 23년 후면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지난 20년간 출생률을 반으로 줄인 일본처럼 효율적인 방침을 택한다면문제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수소폭탄이 최종 해결책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앤서니 스토공격성인간의 재능, 240

 

인간의 일은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앤서니 스토가 이 책을 냈던 1960년대 말엽에 일본의 출생아 수는 최고점을 찍었던 2차대전 종전 직후(약 270만명)에 비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상승하여 75년경에는 210만 명의 새로운 고점을 찍었다. 그리고 그 시기 사망자 수는 역대 최저에 가까웠다. 그 장면을 보면서 앤서니 스토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일본인의 합리성이 금방 무너졌다고 여겼을까? 그러나 이내 일본은 다시 합리적인 기조로 돌아섰고, 현재는 사망자 수가 출생아 수를 훌쩍 넘기고 있다. 앤서니 스토가 아직 살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광경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출생율을 낮추는 일이건 높이는 일이건, ‘효율적 방침합리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이들의 오만한 성정은 맬서스 이후로도 그 명맥을 튼튼하게 이어오고 있지만, 인류는 자신들이 원하는 시점에 딱 변곡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나치게 과밀해지고 나서야 기기괴괴한 정책들을 동원하여 출산율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출산율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으로 국가의 미래가 줄줄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서도 시종일관 멍청한 방식으로 대응하더니, 이제야 일부 선진국에서나마 약발이 좀 서는 신약을 찾아내 임상실험에 들어간 것 같은 모양새다.

 

오늘날 공격성은 인간의 재능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의 재능인 것 같지는 않다. 더는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지 폐허가 될 수 있다우리가 겸손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삶은 언젠가 뿌리 뽑혀 버릴지도 모른다.

최태섭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4



 요즘 나의 대화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와 딸과 남편으로 무더기다

 

 문이 열려서 문을 열고

 열어야만 닫히는 것이 문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리울 수 있어 좋은 나의 집

 

 남편의 목을 조른 손으로 바구미를 골라냈다

 같은 손으로 쌀을 씻고 흰살생선을 구웠다

 

 새벽에 나 혼자 맛이 좋았다

 손이 벌인 일이나 나의 전체가 낳은

 

 딸이 연속극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사랑은 사랑이 바닥나기 전에 끝장나게 하시라......

 사랑이 아직 사랑일 때 바닥나게 하시라......

 죽은 생선을 움켜쥐어본 적도 없이 끝날

 딸의 볼륨 없는 사랑

 

 따뜻했다

 숟가락 위에 올린 흰살생선의 살점

 양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딱 들어맞는 인간의 목

 

 밝은 시그널 뮤직으로 시작했다가

 슬픈 사운드 트랙으로 끝나는 16회 차였는데

 사람이 사람 구실하며 사는 바람에 극은 탄력을 잃고

 

 폐장 이후의 회전목마처럼

 어둠의 선분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나와 딸과 남편이 한집에 잠들었다

 

 개미가 더 큰 죽은 개미를 물고 지나가는 장면이

 꿈속에서 반복되었다

유계영버닝 후프」 전문

 

의미라고도 의도라고도 부를 수 있는 무엇, 혹은 그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무엇인가가 있고, 시가, 넓게는 문학이, 더 넓게는 모든 예술이 그 무엇인가를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 일반적 생각에 기반하여 예술의 독자들은 생각하고 추리한다. 그리고 저마다 결론을 내린다. 그 결론은 시인의, 작가의, 예술가의 결론과 0으로부터 100까지 펼쳐진 닮음의 스펙트럼을 만든다.

 

독자와 작가의 결론 닮음이 0100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게 지켜봐야 할 부분은, 작가가 독자를 0100 중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가이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독자의 견해가 어느 한 방향으로 수렴하는 사태를 일부러 막으려는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독자의 머릿속에 확정적이고 단정한 이미지가 아니라 생동하고 흩어지는 이미지를 던져 넣으려 하는 작품이 있다. 독자는 전체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지만 그것이 과연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결론짓는 일을 한없이 보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 마치 원자핵 주변의 전체적 전자분포를 확률적으로 어림하여 구름 같은 모형을 그릴 수는 있지만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꿰뚫기는 난망한 것처럼, 어떤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름처럼 번져 있음을 느끼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의 몸통을 꿰뚫고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시,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시가 있다. 마치 한 편의 시에서 짝수 번째 행을 지워버리고 홀수 번째 행만 뽑아놓은 것처럼 행과 행 사이에 간격이 큰 시가 있고, 같은 방식으로 이미지와 이미지의 간격을 벌려 놓은 시가 있다. 그 간격 속에서 독자는 헤맨다. 시와 친하지 않은 독자일수록 더 격렬히 헤맨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축복일 수 있다. 시는 알고 읽을 때와 알려고 읽을 때 각각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는 희한한 장르다.

 

 

 

 

 

5



아름다움과 건강이 하나라면 아름다운 몸매가 건강한 몸매와 무관할 리 없습니다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몸매는 원시시대의 생존과 번식에 적합fit했던 몸매입니다남성은 강인해야 했고여성은 건강해야 했습니다그렇게 환경에 적응했던 남성과 여성이 생존과 번식에 성공했고그들은 그 적합함fitness에 대한 선호까지 후세에 물려주었습니다그래서 여성은 '든든한남성을 좋아하고 남성은 '섹시한여성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러한 몸매는 오늘날 우리가 '피트니스fitness'를 통해 추구하는 몸매와 다르지 않습니다적합함이라는 뜻의 'fitness'가 체형 개선을 위한 운동을 뜻하기도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기원운동 미니멀리즘, 50 

 

이런 글은 취지는 알겠지만 입장이 애매모호하다.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르면 오늘날의 생존과 번식에 가장 적합한 몸매는 재벌총수의 몸매나, 하다못해 건물주의 몸매 정도가 되겠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결혼 상대자로 가장 선호되는 이들의 직업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제 적자생존의 법칙에 가장 들어맞는 몸매는 공무원, 공기업 직원, 교사, 금융직, 의사, 약사 등등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의 몸매일텐데, 그 몸매는 어떤 몸매일까?

 

아 물론 몸까지 좋으면 승률이 더 높긴 하겠지. 하지만 핏한몸매가 오랜 옛날 환경에 적응하여 번식에 성공했던 이들의 몸매와 일치한다는 말을 100퍼센트 인정해도, 그 몸매는 오늘날의 결혼 적자생존의 법칙에서는 부수적, 장식적, 옵션 기능에 가깝다. ‘적합함fitness’에 따라야 한다면, 우리는 원시시대의 피트니스와 자본주의 시대의 피트니스 가운데 어디에 맞춰 핏해져야 할까? 그러니까 syo는 지금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지 근육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 읽은 --



앤서니 스토, 공격성, 인간의 재능

유계영,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린 주안 투안, 마우나케아의 어떤 밤

정용준, 유령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 읽는 --



이기원, 운동 미니멀리즘

이슬아,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듀나, 민트의 세계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김기형 외,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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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4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만치 달려가는 쇼님, 따라갈수가 없네 그냥 맛좋은 커피나마시면서 쉬어가야겠다! 맛난다 ㅋㅋ

카알벨루치 2018-12-2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가 빠졌다요 이때쯤이면 쇼님 글이 올라오지 않을까했는데 역쉬나~메리 클스마스 쇼님! 젊은 친구로 알게되서 감사하고 늘 행복하소서^^

syo 2018-12-24 17:01   좋아요 2 | URL
과연 제가 젊은 친구일까요?!! 이렇게 삭신이 안 쑤신 데가 없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알님도 끝장나는 메리크리스마스 되시구요^-^

카알벨루치 2018-12-24 17:32   좋아요 0 | URL
끝장나믄 안되유, 딸린 식구가 많아서 아직 좀 더 살아야하는디유 ^^

syo 2018-12-24 17:3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끝장나게 웃기시다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8-12-24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넌 이거 안 되지 메롱”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공감의 울림에(허접하네요. 그냥 쉽게 쓰자-저도 딱 그런 기분 느끼는데, 느낀 적 많은데) 무릎 탁 치며 따옴표 치고 갑니다.ㅋㅋ

syo 2018-12-24 17:10   좋아요 1 | URL
˝넌 이거 안 되지 메롱˝ 이게, 안 느끼거나 못 느끼는 사람들 입장에서 느끼는 쪽을 보면 저게 무슨 쓸데없는 열폭이냐 하겠지만, 쓸데 없는 열폭도 열폭은 열폭이라 슬프잖아요..... 열반인님도 아신다니, 진짜 그렇잖아요 저게 ㅋㅋㅋㅋㅋ

syo 2018-12-24 19:54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매번 폐가 많습니다‘ 이거 너무 재미집니다..... 앞으로의 댓글 소통이 너무 기대되곻ㅎㅎ

반유행열반인 2018-12-2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영하 소설 보면 자꾸 눈 앞에 메롱메롱 하는 작가의 얼굴이 어른거리곤 했는데 포기하니 편해유...그래 이 분도 대문호야 하면서 다 대문호로 승격시키면 됨....이슬아님 책은 안 봤지만 이슬아님도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올리시면...그래도 메롱메롱은 슬프네요 ㅠㅠ내 속엔 대문호가 너무도 많아...

syo 2018-12-24 17:37   좋아요 1 | URL
저랑 정말 비슷하시네요! 저는 마음 속에 명예의 전당을 넘어서 아예 판테온을 만들어 놨거든요 ㅋ
어차피 안 될 거 포기를 넘어 숭배하기로 하자......

흥미로운 지점은 제 만신전에는 김영하 작가가 없다는 건데 ㅎㅎㅎㅎㅎ 역시 인간의 다양성이란.

반유행열반인 2018-12-24 18:26   좋아요 0 | URL
만신전쯤 차리려면 독서량이 syo님쯤 되어야...마지막 줄은 ‘난 저 정도는 되지 메롱’의 반증으로 멋대로 해석하는 오독을 하겠습니다...매번 폐가 많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8-12-2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날씨가 차갑지만, 따뜻하고 좋은 일들 가득한 성탄절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

syo 2018-12-25 08:5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어지는 행복한 연말, 또 이어지는 희망한 새해 되시길^-^

cyrus 2018-12-25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크리스마스~ 내년에도 서부도서관을 애용해주시고(응?), 열독하시고 건필하세요. ^^

syo 2018-12-25 09:0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내년에는 어쩐지 서부도서관에서 한 번쯤 마주칠 것 같은 시루스박사님 메리크리스마스^-^

페크(pek0501) 2018-12-2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유의 폭과 깊이는 한 인간의 경험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 그렇다면 저는 힘빠집니다. 제 경험치 이상의 글을 쓰고 싶은데 말이죠. 독서로 보충이 되려나요?

syo 2018-12-25 15:33   좋아요 0 | URL
독서로 될랑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경험한 것은 쥐뿔도 없지만 쥐뿔로도 어떻게든 써나가고 있는데요 ㅎㅎ
뭔가 알록달록한 경험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어요.

 

 

 

호반정경湖畔情景 2

 

 

1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그 얘기가 좋았다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다귀여운 병아리들이 무서운 닭이 되어 제멋대로 마당을 뛰어다니다 도살되는 것처럼그날의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가 없어져버리는 게 좋았다먹다 남은 케이크처럼 바글대는 불개미처럼그날의 이야기가 처음 만났던 날을 깨끗하게 먹어치우는 게 좋았다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혹한의 공원에 앉아 떨고 있을 것이 좋았다우리가 그곳에서 손을 꼭 잡은 채로 영원히 삭아갈 것이 좋았다.

김소연다른 이야기」 전문 

 

조용히 부를수록 더 좋은 이름이 있어, 두 작은 목소리는 나란히 앉아 조용히 조용히 점점 더 조용히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불렀다. 이름이 작아질수록 세상이 커지고, 세상이 커질수록 들리는 것이 많아져 두 작은 목소리는 조용한 표정으로 열심히 열심히 더 열심히 자신의 이름을 듣고 또 들었다. 부르는 이름이 조용히 조용히 멀어지고 불리는 이름이 조용히 조용히 가까워지더니 가운데에서 딱 만나 이름이 이름으로서 이름을 휘감고 이름이 되어 다시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이름은 열심히 작아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모든 것이 들렸고, 두 목소리는, 어느덧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있던 두 목소리는 이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고 알 수 없이 좋았다. 세상이 열심히 작아져 하나의 이름으로 수렴하였다. 목소리는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 무엇의 이름인지 이 세상의 이름인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이제 말할 수가 없었고 말할 수 없이 좋았다.

 

 

 

2


 

 ”책이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럴 겁니다.“ 입에서 이 말이 새어나왔을 때베케트 박사는 좀 더 완곡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잠시 후회했다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바람이 새는 소리는 내도 고래고래 화를 내기에는 공기가 충분치 않은 폐로 마르크스는 으르렁거렸다. ”객관적인 학문적 사실을 제시하는데 셰익스피어나 하인리히 하이네의 언어는 필요 없소.“

일로나 예르거두 사람, 136

 


 ”정말로 제 책을 읽으려고 해 보신 것이오?“ 마르크스의 기분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시도해 보았습니다실패했지만요.“

 ”선생이 말한 것이 정말이라면그건 내게 수수께끼요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셨다고요?“

 ”케임브리지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사람이 내 분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요도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어쩌면 선생에겐 인내심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겠어요영국인 벌레 수집가가 심지어 독일어로 읽고도 이해한 책이란 말입니다!“

같은 책, 137

 

조금 똑똑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 약간 불안하기도 하다. 실은 그저 내 설명이 후진 것은 아닐까? 알고보면 내 말솜씨가 물솜씨는 아닐까? , 이 내가 여기다가 설명까지, 말까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하는 생각. 그런 경우, 136쪽의 마르크스처럼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하지만 정말 드물게 진짜 천재들을 만나면, 그들이 범재들의 범재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니, 이게 어렵다고? 이 명백한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 도대체 왜? 천재들은 137쪽의 마르크스처럼 대응한다. 어려운 게 아니라 당신이 들을 마음이 없는 거라고. 136쪽의 마르크스는 분노하지만 137쪽의 마르크스는 좌절한다. 범재가 천재를 이해하지 못하듯, 천재도 범재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국인 벌레 수집가는 찰스 다윈을 말하는 것인데, 실제로 마르크스는 <자본> 1권을 다윈에게 보냈다. 당시는 새 책의 낱장이 붙어서 출간되는 시절이라, 읽는 이가 도구를 이용해 직접 책장을 갈라야 책을 읽을 수 있었는데, 다윈의 서재에 꽂힌 <자본>은 다윈의 사후까지도 104쪽까지만 책장이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다윈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syo처럼, <자본>을 읽다가 집어던진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 사실을 끝내 모르고 죽었다.

 

이 오해는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한다. 첫째, 다윈이 마르크스의 혼란과 좌절을 부추겼다. 마르크스는 당신 생각에 조금의 노력만 투자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본>이 읽히지 않는 것을 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력이 아니라 의지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건 혁명가에겐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어느 한 분야에서 역사의 물길을 뒤바꿀 정도의 천재이더라도, 다른 분야에선 서글픈 범재일 수가 있다. 뒤집어 말하면, 만사에 범재거나 둔재로 보이는 syo조차 어쩌면 어딘가 천재적인 구석을 지니고 있으며, 단지 발견을 못해 비루해 보인다는 것! 와아.....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힘이 나네..... 힘이..... 와아.....

 

 


  전개된 가치형태에서는 '교환 가능성'이 '등가성'을 나타내지만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성'이 '교환가능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전자에서는 한 상품이 다른 상품으로 교환된다는 사실이 두 상품이 등가적임을 말해주지만후자에서는 일반적 등가물로 표시될 수 있어야 해당 상품이 다른 상품과도 교환될 수 있는 상품임을 인정받는 것이죠도시에서 어울려 살다 보면 시민이 되는 줄 알았는데시민권이 있어야 시민으로서 도시에서 어울려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이런 게 바로 표상권력대표권력입니다대표를 통해 내 의사를 표현한다고 생각했는데이제는 대표가 표현해주지 않으면다시 말해 대표를 통해 표현할 수 없으면내게는 의사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음을 알게 된 거죠상품들은 상품어로 말한다고 했는데요이를테면 저고리는 아마포로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그런데 이제 이 언어구조가 그 자체로 권력구조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상품은 자기 가치를 말하기 전에 사회적인 것에 순응해야 합니다일반적 가치형태는 상품에게 '상품으로 인정받으려면 순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가치형태는 주권형태입니다그것은 복종과 순응을 요구하는 명령체계입니다나는 앞서 '가치를 가진 사물'을 상품이라고 불렀는데요이제는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치를 인정받은 사물'이라고요가치를 주장하기 이전에 가치를 '인정받아야합니다상품이 된다는 것은 순응을 강요받는 것복종해야 한다는 것즉 폭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병권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121-122

 

친절함을 모르는 남자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상품들이 가치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가치대상성)은 순전히 이 물건들의 '사회적 현존'에 의거하기에, ...... 결국 상품들의 가치형태는 사회적으로 타당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걸 고병권 선생님은 저렇게 풀어낸다. 이러니 syo가 입문서 빠돌이를 벗어날 수가 없다.

 

 

 

3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시인으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한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백석에게는 더 시급했다해방 이후 백석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예술성을 망각하고 시를 정치도구화한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당의 지도 아래 놓인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도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안도현백석 평전, 413

 

오늘이라는 것은 언제건 어디서건 육박하는 물건이고, 그 속에서는 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운 물건이고, 언제나 내일에게 논박당하는 물건이다. 주어진 오늘을 살아야 했던 백석은 어떤 백석일 수 있었으며, 어디까지 백석일 수 있었으며, 또 어디까지 어떤 백석이어야 했을까. 하물며 syo는 어떤 syo일 수 있으며, 어떤 syo여야 할까. 오늘의 syo는 어디까지 syo일까. 세상은 어느 언저리까지 syo를 침투하고, syo는 어디까지 양보하는 척 양도하며 살고 있을까.

 

흰 바람벽을, 치고 싶다.

 

 

 

-- 읽은 --



고병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안도현, 백석 평전

김소연, i에게

일로나 예르거, 두 사람

 


-- 읽는 --



앤디 메리필드, 아마추어

앤서니 스토, 공격성, 인간의 재능

오은, 나는 이름이 있었다

찰리 맥도넬, 웃기는 과학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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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syo 2018-12-19 22:02   좋아요 1 | URL
앗! 진짜네요 ㅎㅎㅎㅎ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립니다! 언제나 알라디너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이신 서니데이님 매일 쓰시는 글 보며 올해는 따뜻하게 잘 넘겼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2018-12-19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9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해목 2018-12-19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어떤 분야의 천재일까. 오늘은 이 생각으로 잠 못들 것 같네요. ㅋㅋ
눈감기 전에 나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싶다아~~~~~~~~~


syo 2018-12-19 23:46   좋아요 1 | URL
저는 요즘 잠들기 천재......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