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

 

syo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며 걔랑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애정도 없지만, 이런 대화는 어쩐지 익숙하다. , 이놈의 뱃살 정말 죽이고 싶어요. 윗몸일으키기를 하루에 몇 개씩 하면 될까요? 회원님, 뛰세요. 근력은 근력이고 유산소는 유산소. 물론 근육량과 기초대사량의 관계라든가, 아무래도 근육이 있으면 옷 위로 봤을 때 훨씬 탄탄하고 덜 뚱쳐 보인다든가 하는 점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근력운동과 살빼기가 완전히 서로 쌩까고 지내는 사이까지는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배 집어넣을 때는 유산소. 그런데 유산소의 특성은 어느 부위만 집중적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는 것. 온몸이 골고루 빠진다. 고로 배만 집어넣고 싶은 사람은 다른 것들도 같이 집어넣어야 한다. 살 빼는 입장에서 유산소가 이런 고집스런 평등사상을 지녔다는 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글을(비매품, 증정품이지만) 만지는 사람으로서 가장 부럽고 탐나는 능력은 끝내주는 위트도, 화려한 기교도 아니다. 그저 매일 꾸준히 쓰는 힘이다. 매일 써보겠노라 한동안 끙끙대본 사람은 이 일에 이중의 함정이 깔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단 매일 뭔가를 짜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그와 비교도 안 되게 더 어려운 것은 매일의 글을 고르게 써내는 일이다. 짜내려고 들면 포도 씨에서도 기름이 나오고, 여드름을 짜도 손끝에 개기름은 살짝 묻는 법이므로, 짜내는 일이라면 필부필부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포도씨유 한 방울, 개기름 1마이크로그램으로 어젯밤 그 광란의 캠프파이어를 재현하는 것은 범인凡人의 일이 아니다. 내공이 필요하다. 하늘의 뜻도 조금은 필요하다. 하늘의 뜻조차 내 편으로 만드는 내공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쓴다는 마음으로 깝친 것도 어언 3년에 다가간다.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얻은 글쓰기에 관한 짧은 지혜가 있다. 글 솜씨는 서로 독립적인 두 가지 형태로 성장한다.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내가 기어이 쓰고야 마는 가장 후진 문장이 덜 후져진다. 한두 번 쓰고 말 사람에게는 첫 번째 솜씨가, 오래 쓸 사람에게는 두 번째 솜씨가 중요하다. 발로 쓰는 문장의 고도, 글발고도를 높이는 일.

 

어떻게든 매일 뭔가를 쓴다고 밝히는 대작가들의 명단을 나열하는 것은 똥멍청이 인증 받는 고상하면서도 참신한 방식이다. “전 그냥 내킬 때 휙 써버립니다. 그랬더니 퓰리쳐를 받았어요.” 이런 말을 하는 작가의 이름을 쓴 다음, ‘이를 제외한 모든 작가라고 덧붙이는 방식으로 하면 10분 안에 끝날 작업이기 때문이다. syo는 이 방법이 밑바닥을 끄집어 올리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매일 글을 쓰는 김연수의 글발고도가 높다. 그도 사람인지라 사건 사고, 감정 상태에 따라 기복이 없진 않으나 미니멈의 고도는 부러울 만큼이다. 김연수의 발은 syo의 손보다 높은데 있다. , 언젠 안그랬을까마는.

 

 



사진을 읽어 드립니다

김경훈 지음 / 시공아트 / 2019

 

syo에겐 3대 지병이 있었다. 무좀, 복부비만, 그리고 수전증. 지금은 2대 지병이 되었다. 무좀은 일주일 약 먹고 3주 쉬고를 열두 달 했더니 싹 완치되었다. 이렇게 쉬울 것을, 8살 때부터 20년을 넘도록 발바닥 피부 조직이나 흩뿌리며 살았다니. 피부과느님의 막강한 은총. 그 병원은 명동성당 맞은편 YWCA회관 건물에 있는데이 더러운 걸 왜 쓰고 있지?

 

복부비만은 여전히 든든하게 내 핏을 망치고 있다. 미저리 같은 놈,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수전증도 마찬가지다. 국민학교 때던가 초등학교 때던가, 국 먹다가 최초로 발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손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사진 안녕, 의사 안녕, 한의사 안녕, 군인 안녕, 경찰 안녕, 안녕 안녕 수전증 때문에 안녕도 참 많았다. 이 손만 아니었으면 막 막, 허준 되고 슈바이처 되고 막 그러는 건데? (수능성적 인서울 공대 턱걸이)

 

그래서 사진은 일찌감치 이해하길 포기한 예술이었다. 미웠기 때문이다. 사감을 빼더라도 솔직히 저게 왜 예술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카파의 저 유명한 사진을 보면서 위험한 데 가서 이런 걸 찍었다는 용기랄지, 반전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진의 사회적 효용이랄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뜻 인정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syo의 짧은 생각에, 이것이 예술이라면 우리는 저마다의 방법을 동원하여 이것을 읽어야하는데, 피사체를 너무 직시하는 사진 매체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의미가 녹아들어 해석을 기다리는 공간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장미로 사랑을 은유한 문학보다는 물론이고, 장미를 그린 그림보다도 장미를 찍은 사진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추상이나 감정을 지시하는데 품이 많이 들고, 감상자도 그 이면을 읽어내기가 훨씬 어렵다. 사진 찍힌 장미가 사실 그 자체만큼이나 정교하여 감상자에게 물성으로 강력하게 육박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syo에게 사진 읽는 법은 그림 읽는 법보다 훨씬 더 어렵고 정신력 소모가 큰 기술이었다. 사진을 읽어 준다는 꼬임에 금방 넘어간 이유가 이렇다.

 

이 책을 다 읽고, 결국 사진이라는 매체를 협소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임 안의 것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프레임 밖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도 배웠다. 좋은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했다(요건 스포라서 생략). 이 책을 읽고 이런 이런 것을 느꼈다. 참 좋았다.’의 중고등학교식 독후감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글을 남기게 되는, 그런 책이기도 했다.

 

 



기분이 없는 기분

구정인 지음 / 창비 / 2019

 

아버지의 병세 악화 소식을 듣고 10일이었나, 긴 휴가를 나갔다. 휴가 기간 내내 병원에 있지도 않았다. 그냥 며칠 들락날락거렸고, 또 마지막 이틀은 마치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휴가 기간 맞는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가 복귀했다. 그러고 한 주쯤 지났으려나, 나로호를 쏘아 올린 날인가 그 다음 날인가에 부대로 아버지의 비보가 전해졌다. 이럴 때 주는 휴가를 받아서 급히 장례를 치렀고, 뒷일을 마무리하고 여기저기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하느라 말년 휴가를 당겨 붙였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나 울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명확하다. 딱 한 번 울었다. 나처럼 잘 우는 사람이. 아버지가 가루가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공간에서 잠깐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묘지 근처 표식도 없는 나무에, 백부의 결정대로 함부로 뿌려졌다. 그따위 것을 수목장이라고 했다. 나는 화가 났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백부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내 이름으로 들어온 돈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며, 챙겨갔던 부조금을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돌아 나오면서 나는 큰집과 연을 끊어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과정이 내게는 슬픔이나 연민이 아니라 분노의 시간이었다. 부인에겐 평생의 욕지거리, 아들에겐 결혼이라는 제도의 비합리적이고 가학적인 면을 뼈저리게 가르쳐준 교과서, 딸에겐 철들고는 함께 한 기억조차 하나 없는 남 같은 사람, 그게 내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죽음을 코앞에 달고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외면하고 무시하던 형제들은 아버지가 침대에 눕자 그제야 찾아와 눈물로 강을 만들었다. 나는 그 강의 수심이 어이없어 도리어 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당신들이 이 남자를 이렇게 사랑했습니까. 당신들의 사랑은 이 남자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그리도 무력했습니까. 상복을 입고, 처음 보는 아버지의 지인들로부터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허탈하고 화가 났다. 이렇게 수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좋은 사람이었다 증언하는 당신은 왜 당신의 가족에게만큼은 그냥 당신이었나, 당신을 감추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은 왜 가정 밖에서만 이루어지나, 묻고 또 물었다. 영정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만 있었다. 마치 좋은 사람처럼.

 

형사로부터 아버지의 고독사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혜진과 아버지의 관계는 나와 우리 아버지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증이라는 말은 그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평면적이고, 모든 애증은 저마다의 굴곡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의 애증과 너의 애증이 겹쳐지지는 않겠으나, 그럼에도 애증을 지닌 이들은 서로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혜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차가 끝난 이후, 끝도 없는 우울에 빠져드는 혜진을 보며, 나는 내가 아버지의 죽음 과정에서 챙기지 못하고 그냥 통과해온 어떤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닌지 기억을 뒤적여보게 되었다.

 

나는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우울은 한 방울도 없었다. 아버지 쪽 핏줄과 연을 끊고 지내면서는 그나마 있는 분노도 사라졌다. 용서하지도 않았지만 뭐 용서할 게 남았는가 싶다. 내 아버지는 먼지처럼 사라졌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특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인생을 망친 주범으로 가끔 밥상 위에서 곱씹히거나, 지랄 맞은 성격의 대명사로 동원되기도 한다.

 

나는 과연 애도를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죽은 이에게 쌓여 있던 감정을 먼지로 만들어 날려 버리는 일이 수월했다면, 이것은 애도를 하지 않은 것일까, 애도를 너무나 잘 해낸 것일까? 내 일상은 이리도 평탄한데, 혜진의 삶은 왜 저렇게 망가진 것일까. 혹시 우리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내게 애도하는 법조차 가르치지 않고 그냥 훌훌 떠나버린 것일까?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

 

역사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역사서를 쓰는 이에게 말솜씨(혹은 글솜씨)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역사가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1558920, 카를 5세는 점심을 먹었다. 1558921, 카를 5세는 죽었다.“ 같은 뻣뻣한 진실들이 그 자체로 보배처럼 번쩍번쩍 빛나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르다. 꾸미고 재간을 부려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는 역사 책이 좋은 책이다. ”1558920일 카를 5세가 점심을 먹었지롱! , 근데 다음 날 갑자기 죽었지롱!“ ……죄송합니다.

 

syo는 죄송하지만 이 책은 하나도 죄송하지 않다. 주경철 선생님이 농담에 능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책이 원체 재미가 없으니까 상대 우위가 있다. 무관심자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데는 왜들 이렇게 관심이 없는지. 주경철 선생님이야 두껍고 근엄한 역사책도 잘 쓰시는 분이니 권위를 의심할 바는 당연히 못 되고.

 

이 책이 다루는 시기는 온갖 몇 세 몇 세()들이 지들끼리 결혼했다 이혼했다 지지고 볶으면서 유럽 역사에 기웃거리는 아마추어 독서가들의 골치를 아프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분탕치는 시기다. 그러다보니 거시적으로 죽죽 설명해나가는 역사책을 보면 도리어 헷갈리고 참다못해 백지를 펴서 프리드리히 3세가 막시밀리안 1세를 낳고, 막시밀리안 1세가 펠리페 1세를 낳고, 펠리페 1세가 카를 5세를 낳았더라- 하고 창세기를 작성하며 읽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이럴 때는 우선 인간별로 각개격파한 다음 전체상을 그리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서 이 책이 방법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 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

 

뜻밖에 둘이 살아본 적이 많다. syo, 전문 동거남. 그리고 그게 다 하숙이고 자취고 고시원 생활이고 그러다보니 좁은 공간에서 살을 부벼가며 이룩한 생활들이다. syo, 부비부비 전문 동거남. 심지어 남녀를 가리지도 않았다(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지만). syo, 바이섹슈얼 부비부비 전문 동거남서너 개쯤 더 할 수 있지만 점점 수렁에 빠지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 둘까. syo, 낄끼빠빠 바이섹슈얼 부비부…….

 

같이 안 살던 사람이 같이 살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공간이 겹쳐진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불편함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하고 내가 같이 살아도 물고 뜯고 싸울 판인데, 남이라니! 그러므로 이런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 모든 불쾌와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메리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과 내 경험을 비교해보니, +남이 챙길 수 있는 거라 해봐야 경제적인 요소를 빼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여의 경우 다방면의 이점이 생기는 것 같다. 특히 멘탈적인 부분에서.

 

"인생이란 멀리서 보며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바꾸어도 말이 될 것 같다.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기 쉽다."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한심하고 웃기는 순간도 목격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동거인은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눈속임이 불가능할 만큼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근면함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생활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낱낱이 동거인에게 목격될 거라는 자각은, 너무 방만하게만 살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준다. 그 증거로 오늘 글 한 편은 쓸 거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미루고 미룬 밤에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편 건 동거인에게 너무 한심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긴장의 발로였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서는 동거인이 역시나 잠옷을 입은 채 연재하는 수필을 위한 삽화를 그리느라 애쓰고 있다. 비염이 심해져서 콧물을 막기 위해, 한쪽 콧구멍에 티슈를 길게 말아 꽂은 채로 말이다. 오늘도 내 동거인은 아주 우습고 또 존경스러운, 딱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 (235-236)


요런 대목을 보면 놀랍다. 경험 범위안에서, +남의 경우 대체로 서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 경상도 마초 새끼들은 그런 거 신경 쓰는 놈처럼 보일까봐 도리어 맘대로 막 하고 다녔는데,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해 준 배려라고는, 방문을 열기 전에 노크하는 것뿐이었다. 혹시 바지 내리고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까봐……. 왜 우리는 저렇게 서로를 발전시키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지 못하고 그저 서로의 욕정만 존중하는 동거생활을 하고 말았던 것일까.

 

아마도 몇 달 안에 새로운 동거생활이 펼쳐질 듯하다. 이제껏 모든 동거 중 가장 경제적 여건이 잘 갖춰진 생활이. 이 책을 꼼꼼하게 읽었으니 앞으로는 서로의 하반신 그 이상을 배려할 줄 아는 슬기로운 동거생활을 꾸며 나가야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

 

이렇게 찬사로 가득한 책도 드물어서 입을 떼기가 더욱 조심스럽다. 반면, 나 하나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해서 이 책의 예비독자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물론 좋은 책이었다. 너무 좋은 책이었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지혜의 꾸러미같은 주인공 한탸가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안에만 행복하다는 점이다.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 그것들은 전부 한탸를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한탸는 세상을 알아챘으니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나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하다. 행복하려고 고독하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도 들리는 소리가 있다. 사랑을 알려주고, 사람을 알려주고, 세상을 알려주겠노라, 그걸로 너의 행복을 앗아가겠노라며 쉬지 않고 내 고독을 두드리는 너무 시끄러운 소리가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래서 한없이 위태로운 인간. 내가 이 역설적인 제목을 읽어낸 방식은 그렇다.

 

 



하면 좋습니까?

미깡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

 

그냥 결혼이라면 무작정 싫을 때가 있었다. 이놈의 제도 나부랭이가 빵틀처럼 사랑을 덮쳐서 귀퉁이들을 다 쳐내고 일정한 모양으로 변형시킨다는 인식이었다. 아나키즘에 환장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고드윈조차 결혼하여(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리 쉘리)을 낳았다는 사실. 허망한데?

 

허망하긴 하지만 결혼이 사랑에 가하는 압박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결혼에 대해서는 좀 온건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데, 하면 하고 말면 말고라고나 할까.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면 하고 아니면 만다에 더 가깝긴 하다.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긴 한데, 또 굉장히 선명한 저항정신이기도 하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 두루뭉수리하다. 철없다.

 

없는 철을 만들어주기 위해 이 책이 나섰다. 5년째 만났고 동거도 하고 있는 커플. 어느 날 곱창을 먹다가 대뜸 결혼을 청한 남친 덕분에, 앞으로 300페이지 동안 그들의 연애사는 이전에 없었던 국면에 접어든다. 아무래도 주인공은 여성이고, 조언자들도 여성이다 보니 남자 입장에서는 공감보다는 학습이라 부르기에 걸맞은 태도로 책을 읽게 된다. 이건 안 되고, 이것도 안 되고, 이건 오 쉣, 완전 안 되고……. 그들이 결국 결혼하는지(사실 지금 결혼에 골인하는지라고 썼다고 화들짝 놀라서 지웠다. 결혼은 골인, 비혼은 노골? 클리셰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이야기들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오는 길 전체에 알알이 박혀있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건질 것은 남친의 이 대사겠다. 사랑하는 데 써야 할 힘을 다른 일에 소모하지 말고, 행복할 게 분명한 일들에 집중하자.“

 

그리고 뭐 이를테면이라는 말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방의 불은 어두워지고 카메라 렌즈는 뜻밖에 흐릿한 촛불이나 둥근 달을 비추는데……. 얼레리꼴레리, 누구누구는 좋겠네~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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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07-2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비부비 전문 동거남 syo님의 곧 다시 시작될 동거 이야기 기대해봐도 될까요.
마음같아서는 동거이야기 연재해달라고 조르고 싶다는~~ ㅎㅎㅎ
제 주위 기혼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좋다고 하더이다. 옆에서 지켜봐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던데.....-.-
먼훗날의 고독사를 생각하면 아주 쬐금 결혼이나 동거에 대한 마음이 동하는 나이가 되긴 했으나...
암튼 syo님은 새로운 동거 이야기 자주 읽을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

syo 2019-07-25 17:06   좋아요 1 | URL
새로운 동거 이야기를 쓰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다만,
슬프게도(제가) 이번 역시 남+남 동거라, 밋밋한 동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힘과 힘, 고기와 고기가 맞부딪히는 그지같은 동거생활.....

반유행열반인 2019-07-2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시간 공들여 쓴 글 이십 여분 만에 잘 읽었습니다. 여자 둘이는 살아본 적 있는데 그렇게 친했다고 생각한 언니와 확 멀어져버렸습니다. 제가 견디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왜 그리 못되게 굴었나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걸 전할 방법도 없습니다. 이런 후회할 일 없이 사는 게...사랑하는데 온전히 힘쓰고 행복해지는 길이겠쥬. 행복을 기원합니다.

syo 2019-07-25 17:06   좋아요 1 | URL
행복을 위해서는 제가 동거하고 싶은 사람과 동거를 해야 되는건데, 그게 되지 않아서 또다시 진정한 행복은 한없이 유예될 예정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7-25 17:31   좋아요 0 | URL
저는 남 남을 뒤늦게 보고 헛생각(헛소리)만 잔뜩 했습니다. 뭐 그런데 그게 몇 년 후라도 유효할 듯합니다. 누구랑 살든 구박은 한 마디씩 덜하며 예쁜 사랑하세요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7-25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절일기>에 감동받고 <기분이 없는 기분>에 뭉클해서... 그래서.... 좀 진지해지려고 했더니만.
syo, 전문 동거남. 슬기로운 동거생활.
어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7-25 17:08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를 한 자리에서 내리 쓰면서, 무슨 조울증 걸린 인간 마냥......
제가 해온 모든 동거가 다 제가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형식의 동거는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 과연 슬기가 유지될 지 모르겠습니다.
몇 번 살아본 놈인데, 영 마뜩치 않습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19-07-26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절일기 나도 읽어볼까요..

하면 좋습니까?도 봐야겠다. 이건 도서관에 검색찬스!

그리고 이 페이퍼 좋아요, 쇼님.

syo 2019-07-26 12:33   좋아요 0 | URL
7개 던져서 2개 낚았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ㅎㅎㅎ

막시민 2019-07-27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헬스 pt 20회 추천드립니다~ ㅎㅎ

공쟝쟝 2019-08-0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거이야기는 저도 기대됩니다. 남자둘이 살고 있습니다!!

syo 2019-08-04 23:41   좋아요 1 | URL
정확히 언제부터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정사실이라, 쓸 거리가 생기겠네요. 아무래도 두 사람이 사는 것이니까요. ㅎㅎㅎ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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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서실에만 가면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다. 냉방병이라니. 살다 살다 이런 사치스러운 병에 걸릴 줄은. 더운 여름, 새참으로 고봉밥 한 그릇이면 세상 근심 다 잊고 하하하하 소처럼 밭을 갈던 뼈대 없는 상놈집안 우리 조상님들 뵙기가 부끄럽다. 제 몸에 흐르는 상놈의 피를 순수하게 지켜내지 못한 나약해빠진 선비st 돌연변이 후손을 용서하옵소서…….

 

에어컨이 빵빵해서 처음에는 좋았다. 남극마냥 추운 것도 아니었고. 지방사람(fat man)일수록 냉기에 강한 법이므로 나는, 하다못해 오래 축적한 내 배만큼은 냉방에 지지 않으리라 믿어왔는데, 배한테 배신감. 이럴거면 내가 널 달고 다니는 이유가 없잖아. 꺼져 버려, 제발……. 긴 팔, 긴 바지, 담요, 수면 양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한없이 머리가 아프다. 답이 없다. 혹시 지구온난화로 점점 주거지를 잃어간다는 북극곰의 저주는 아닐까? 황제펭귄들이 세종기지에서 훔쳐온 지푸라기로 syo인형을 만들어서 머리에 꽝꽝 못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얘들아 그러지 마요……. 미안해, 인간이 많이 나빴지?

 

머리가 아파서 그런가, 글자는 눈에 안 들어오고, 계속 잔다. 마냥 잔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잔다. 자고 일어나도 어쩐지 피곤하다. 또 잘 수 있을 것 같다. 독서실에서 나오면 냉장 보관된 돼지고기 같이 축 늘어져서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그러고는 이제 더위와 싸워야 한다. 세상에 온통 적이다. 미치겠네.

 

 

 

2

 


한국 SF계를 책임질 새로운 별이라는 평을 주워듣고 김초엽을 샀는데, 어찌하다보니 테드 창과 병행독서 중. 아무리 기대주라지만, 이건 너무 가혹한 짓인가……. 읽은 데까지는 떡발그러나 아직 표제작과 수상작은 읽어보기 전이므로, 기대감을 버리긴 이르다!

 

그러나 테드 창 역시 아직 표제작 등판 전이다…….

 

 

 

3

 

몸이 힘드니까,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은 마음이다. 근데 뭐 하고 있는 게 있어야 때려치우지. 고작 책 좀 읽고, 문제집 몇 권 푸는 게 다거늘, 그것도 못 버틸 거면 때려 쳐, 인마! ! 그럴까요, 그럼!

 

이러고 있습니다.

 

 


4

 

감기약 같은 거라도 먹어야 하나…….

 

 

 

--- 읽은 ---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 158 ~ 279

+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 49 ~ 142

+ 하면 좋습니까? / 미깡 : ~ 323

 

 

--- 읽는 ---

= 도서관 여행하는 법 / 임윤희 : ~ 77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 98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테드 창 : ~ 55

= 중국 근대사 / 이영옥 :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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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7-2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지마syo. 목도리. 비니. 바람막이 잠바. 핫팩. (이건 좀 오바인가. 삼겹살 굽고 싶은 내 마음인가...)

syo 2019-07-24 21:51   좋아요 1 | URL
빛의 속도로 등판하셨네요. 빛의 속도로 갈 수 있군요.

반유행열반인 2019-07-24 21:53   좋아요 1 | URL
으아니요 그게 아니고 제 리뷰 달고 확인 누르니 syo 글이 떠서 뭐지 내가 먼저 등록 눌렀다 메롱 했네요

북다이제스터 2019-07-2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방병 조심하세요. ~~~^^

syo 2019-07-24 22:04   좋아요 1 | URL
늦었어요.... 먼저 가세요, 전 이미 틀렸어요.

북다이제스터 2019-07-24 22:05   좋아요 0 | URL
???

syo 2019-07-24 22:06   좋아요 1 | URL
걸렸거든요 전 이미... 북다님은 부디 살아남으시길...

Forgettable. 2019-07-2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방 사람.... ㅋㅋㅋㅋ 이런 유머에 터지다니 ㅠㅠ

syo 2019-07-24 22:42   좋아요 0 | URL
저조차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방식인데, 역시 그물은 넓게 던져야 하는 거군요..... 자꾸 배운다.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07-25 07:40   좋아요 0 | URL
뽀 실망이야.....

블랙겟타 2019-07-2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제가 공부하는 곳은 빵빵한 정도는 아니라 괜찮긴 합니다만. ㅠ 아이고 syo님 건강 유의하시옵소서 (˃̣̣̣̣̣̣︿˂̣̣̣̣̣̣ )
이번 글에서 신기하게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이 많이 보이네요. (˘⌣˘*)

syo 2019-07-25 13:4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블렉겟타님은 어디서 무슨 공부를 하고 계실까요. 나도 거기서 하고 싶다..... 이건 안 가자니 더워서 못 하겠고 가자니 추워서 못 하겠으니....

수연 2019-07-2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방병 넘 힘들어요. 아프지 마요 syo님. 근데 다 때려치우고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 저는 수시로 들던데 ㅎㅎ 따뜻한 거 많이 마셔요. 독서실에서 공부 계속 해야하는 거면 보온병에 뜨끈한 물,차,커피 한가득_

syo 2019-07-25 13:44   좋아요 0 | URL
오늘은 날이 좀 궂어서 그냥 선풍기 켜고 집에 앉아있습니다. 뜨끈한 액체가 도움이 되나 보죠?? 다음 번에는 커피 한 도라무 챙겨가야겠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9-07-2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어컨 바람 조심하고 있어요. 에어컨 바람이 뼈를 약하게 만든다고 하네요. 에어컨 바람을 통풍 발병의 원인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syo 2019-07-25 13:45   좋아요 0 | URL
역시 사이러스님의 모든 아픔은 거기로 귀결되는군요..... 고작 머리만 아파도 이렇게 힘든데 ㅜㅜ

stella.K 2019-07-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점 세상에 상놈의 피, 양반의 피가 어딨습니까?
그래도 스요님의 독특한 유머는 알아 드리리다.ㅋㅋㅋ

그래서 저 김초엽의 소설은 별로라는 건가요?
찬사하느라 튄 침이 제 얼굴에 맞을 정돈데...

syo 2019-07-25 15:51   좋아요 1 | URL
그 피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 피는 빼박 상놈의 피, 우리 집은 뼈대 없어..... 이런 마음이요.

몇 작품 더 읽고 마음이 바뀌는 중이에요. 별로 아닙니다. 좋아요.
찬사하느라 얼굴에 맞은 그 침을 인정합니다.
 


방망이와 눈동자

 

아버지라는 인간은 살아생전에 가족 속을 많이 썩이는 인간이긴 했다. 그래도 완전 개차반까지는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한 번씩 깽판을 쳐대도 며칠 지나면 웃으면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어디서 화가 나서 술을 쳐드시고 들어와서는 어김없이 살림살이를 내던지고 있었다. 엄마는 물건들이 개박살날 때마다 울며 비명을 지르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동생은 작은 방에 피신,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아들은 아버지 하지 마세요, 아버지 하지 마세요를 외치며 술에 쩐 몸뚱이를 붙들고 매달렸다. 놔라, 가장을 개떡같이 아는 이놈의 집구석, 내가 다 박살을 내놓고 말지, 아버지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반복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집기를 던졌다. 그때 엄마가 소리쳤다. 경찰에 신고해라. 그건 엄마가 평생 처음 해본 말이었다. 당시 우리 옆집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벌어졌는데, 마침 그 전날도 그랬고, 그래서 그날 아침 옆집 아주머니와 엄마의 대화 속에 경찰, 신고, 이런 단어들이 들어있었던 것이라고 나중에 엄마는 설명했다. 하여튼 엄마의 입에서 평생 처음 나온 말이었으니, 아버지도 평생 처음 들은 말이었을 것이다. 뭐라고! 아버지의 손이 높이 쳐들리더니 그대로 엄마의 뺨을 후려쳤다. 엄마는 집기처럼 날아갔다.

 

우리는 모두 놀랐다. 살림살이 개박살 이벤트야 많을 땐 한 주에 한 번 꼴로도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엄마 몸에 손을 댄 것은 그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놀라 울음도 멈춘 채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더 놀란 것은 아버지 당신이었다. 손을 내리친 자세 그대로 굳어 한참을 서 있었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아들이었다. 에이, 씨발 진짜 더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아들은 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야구방망이를 꺼내들었다. 오빠야, 하지 마라, 동생이 벌벌 떨며 외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다시 안방으로 쳐들어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자세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그렇게 멈춰있을 뿐, 실제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 더 해봐. 등 뒤에서 아들이 외쳤다. 아들은 이상하리만큼 용기가 났다.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떨고 있는 것은 아버지였다. 돌아서기 전부터 떨고 있었고, 돌아서 아들의 손에 쥐인 방망이를 보았다고 더 크게 떤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들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일주일 쯤 뒤, 아버지는 조용히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모든 게 끝났다. 엄마의 몸에 손을 대는 일도, 살림살이를 집어던지는 일도 없었다. 평소처럼 화가 잔뜩 나서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기어를 잔뜩 올리다가도, 어느 순간 알아서 브레이크를 밟는 모습이 보였다.

 

어릴 때는 방망이가 그 폭력의 오랜 역사를 끊어낸 거라고 생각했었다. 살며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타인의 마음에 상처가 될 말이나 행동을 할 때가 많았고, 그러는 중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상처 주는 데만 집중하곤 했다. 그러다 어떤 눈물, 마음의 비명, 너무도 약하여 자신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따로 없는 지렁이들의 마지막 꿈틀거림 같은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그날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지금 내 손을 흔드는 이 떨림이, 그날 엄마의 뺨을 후려친 손을 덮친 바로 그 떨림이었다. 항거불능의 죄책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넘은 지 한참 되어 등 뒤 멀리에 그려져 있는 가는 선. 내가 내 생각 이상의 쓰레기였고, 그걸 눈치 채기 위해서 타인의 눈물이 필요하고,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쓰레기로 살아갈 확률도 높으며, 상대방의 인내와 배려의 크기에 따라서는 영영 내 몸에서 나는 쓰레기 냄새를 맡지도 못하고 혼자 썩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 그런 것들 위에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발밑이 꺼지는 것처럼 아득해지곤 한다. 그리고 그날을 다시 생각한다. 두려운 것은 아들의 방망이가 아니라 엄마의 눈빛이다. 두 번째 만나면 어둡고 깊은 심연으로 떨어져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아픔의 결정 같은 것이다. 두 번은 돌아오지 못할 길, 그런 두려움이 많은 국면에서 나를 그나마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다.


 

 

그제야 나는 거울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거울 속에 늙은 얼굴이 있다고 해서 그 거울이 그를 늙게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이 세계는 그 거울과 같다세계는 늘 그대로 거기 있다나빠지는 게 있다면 그 세계에 비친 나의 모습일 것이다.

김연수시절일기

 

길고 어두운 길을 따라 길고 어두운 밤을 지나 길고 어두운 마음에 도착하면너의 낯빛을 맑게 물들이는 오랜 단념이 있었다창문을 조금만 열어줄 수 있습니까불빛을 조금만 낮춰줄 수 있습니까주어 없는 문장 문장마다 너의 그림자가 베여 있었다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게 기뻤다.

이제니너는 오래도록 길고 어두웠다〉 부분

 

진실에 다친 마음이라고 해서 빨리 아무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진실에 다친 마음은 거짓에 다친 마음과 달리 돌아가 의탁할 곳이 없다진실에 등을 돌려야 하니까.

김정선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 읽은 ---

+ 사진을 읽어 드립니다 / 김경훈 : 177 ~ 347

+ 시절일기 / 김연수 : 152 ~ 333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주경철 : 222 ~ 339

+ 기분이 없는 기분 / 구정인 : ~ 203



--- 읽는 ---

= 만화로 보는 맨큐의 경제학 / 그레고리 맨큐 : ~ 77

= 인포메이션 / 제임스 글릭 :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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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9-07-23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글속에는 제가 담겨있군요.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syo 2019-07-23 10:07   좋아요 0 | URL
저마다 아팠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극복하거나 극복중인 저마다의 기억들이겠으나,
카테고리로 보면 꽤 다수가 공유하는 기억인 것도 같습니다.

비극이네요.

독서괭 2019-07-23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신고보다 훨씬 효과적인 브레이크가 되었지만, 온가족 마음에 남았을 상처가 안타깝네요.. 그래도 한번 넘은 선은 두번 넘기도 쉬운 법인데, 그러지 않으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가장이라는 말 싫어하는데, 의무가 아니라 권리로 휘둘러질 때가 많아서요.

syo 2019-07-23 10:09   좋아요 1 | URL
그래도 한번 선을 넘을 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 자체도 용서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상처 안 주고도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재빨리 눈치채는 사람이요.

2019-07-23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3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3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4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4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본가의 탄생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 / 노승영 옮김 / 부키 / 2018

 

농담. 자본가를 식별할 수 있는 21세기적 방법 : 당신은 자본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세요?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변한 사람 가운데 진심인 사람.

 

자본가의 이미지를 둘러싼 전투는 그친 적이 없다. 자본은 정말 가치를 생산하는가? 그들은 노동자의 고혈을 빨아 먹는가? 그들은 정말 그런 어마어마한 대접을 받을 만한 생산성과 창의성을 갖추었는가? 그렇지만 자본가를 옹호하건 비난하건 간에, 그들이 비윤리적 수단 없이 순수한 노력으로 자신의 부를 유지한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 아직 남아 있을까? 그 부가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혐의는 짙다. 이게 다 자본가에 대한 음모라고? 자본가에 대한 경험이겠지. 그리고 그런 경험은 600년 전에도 가능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야코프 푸거라는 거물이 있었다. 쌓아올린 부와 그 부를 헐어 쌓은(혹은 무너뜨린) 것들의 스케일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인 푸거는, 자본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본가로 살다 자본가인 조카에게 자본을 물려주고 자본의 성전에 자본가의 표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아주 명쾌한 사람이었다. 돈으로 가는 길에 늘 해답이 있었다. 광산? 독점하면 되지. 파업? 자르거나 억압하면 되지. 고리대? 성서해석 바꾸게 하면 되지, 돈으로. 황제? 교황? 만들면 되지, 돈으로. 종교개혁? 아니 그럼 어떡해, 대주교 하나 만드는데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루턴가 루튼가 하는 수도사 나부랭이가 그걸 아냔 말이야. 투자금 회수할 수 있게 된다는데 교회가 면죄부를 팔든 면사포를 팔든 내가 알 바냐고 지금.

 

어쩌면 역사의 계보에 신의 시대, 인간의 시대, 과학의 시대 같은 건 사실 찾아온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돈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매개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어진 모든 시대가 돈의 시대였던 걸까. “The Richest Man Who Ever Lived”라는 원제를 버리고 자본가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선택한 한국어판의 과감성은, 야코프 푸거를 어느 한 시대의 숨은 주역으로 보기보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자본가라는 이미지의 원형으로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한다. 15-16세기를 살던 어느 아우크스부르크의 돈 많은 남자 이야기를 오늘날에도 읽어 볼만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중세 유럽의 왕위 계승 방식, 용맹공, 미남왕, 대머리왕, 광녀(…….) 등등의 별명으로 겨우 구분 가능한 루이, 샤를(카를), 필리프 몇 세 몇 세, 뭐 그런 인간들 때문에 복잡하게 꼬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지도층의 막장드라마 급 가정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알려진 역사의 이면 같은 걸 다룬 책이니까요. , 대항해시대나 종교 개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든 알면 좋죠. 그렇다고 필수는 아닙니다. 몰라도 잘 읽힙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책이거든요.

 


 

모스에서 잡스까지 

동흔 지음 / 뜨인돌 / 2018

 

전화기를 발명한 벨은 사실 전화로 메시지보다는 노래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가수가 송화기에 대고 노래를 부르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관객이 수화기에 귀를 대고 그 노래를 듣는 것, 그것이 벨이 생각한 자기 발명품의 참된 쓰임새였다. 반면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축음기를 음악 듣는데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음성 편지를 보내는 물건으로 계획했다. 그러니까 LP판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을 담아서 택배로 보내면 받는 이가 그걸 턴테이블에 올리고……. 오늘날 전화기와 축음기의 후예들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벨이나 에디슨이나 참 재미있는 양반들이 아닐 수 없다.

 

철학책을 읽다 보면, 특히 전공자가 자기가 전공한 철학자의 사상을 개설하는 책 속에서 자주 만나는 주장이 있다. 이 철학자가 등장함으로써 역사는 그 물길을 틀었다, 이 철학자 이후는 결코 그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 이 철학자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 삶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운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썩 납득이 쉬운 것도 아니다. 물론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을 버티지 않았으면 단군할아버지가 없었겠고, 그럼 갤럭시s10도 없었겠지. 그렇다고 갤럭시를 쑥과 마늘로 만든 건 아니잖아, 뭐 이런 심정이 되곤 했으니. 하지만 과학이나 기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 속에서, 과학이나 기술은 자기네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정말 압도적인 설득력으로 설명한다. 보통의 독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철학이나 과학이나 남의 나라 말 같긴 매한가지고, 그렇다면 피부에 와 닿는 결과물을 들이미는 쪽이 더 재미난 것이다.

 

모쓰에서 잡쓰까지, 쩌는 라임의 제목을 단 이 책은 전신에서 시작해 스마트폰까지 이어지는 20-21세기 통신혁명의 역사를 개괄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통신이라는 말이 너무 좁은 것 같아서 백스페이스를 자꾸 기웃거릴 정도로, 통신혁명은 곧 생활과 인간의 혁명이다. 그 혁명의 기본토대는 어쩔 수 없이 딱딱하고 건조한 과학기술이겠지만, 표면이 우리의 생활과 직접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리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진 않았다. , 이런 장르의 책을 읽겠다고 손을 내밀면 이상하게 N극과 N극처럼 자꾸 미끄러지는 분들께 희소식, 저자 신동흔 선생님은 문과입니다…….

 

파동과 전자기파에 관한 첫 페이지 급 기초지식이 있으면 수월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대항해시대의 탄생

송동훈 지음 / 시공사 / 2019

 

삼국지를 이미 읽은 syo에게 진짜 삼국지를 가르쳐준 것은 게임 삼국지였다. 일목요연하게도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대항해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제대로 가르쳐준 것은 책이 아니라 게임 대항해시대였다. 방향타를 돌리는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돌린 것인 만큼 소소하고 쬐끄만 짝퉁스케일이었지만, 어쨌든 제 발로 희망봉을 돌아보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꼈다. 동남아에서 후추를 잔뜩 실어와 유럽의 항구에 내다팔며, 옛다 고기에 후추 처먹어라 미개한 르네상스 유럽 것들아, syo 없으면 대체 어쩌려고 그러니 늬들은, 하며 내면으로 위세 부릴 수도 있었다. 모니터 속 2D syo는 거친 파도를 헤치며 지도의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위대한 항해사였다. 각 대륙 주요 항구의 경도와 위도를 반자동으로 외우고, 지역 특산품의 시세를 간파하여 무역로를 짜고, 삼각돛과 사각돛의 차이를 몸으로 이해했다. 이건, 책은 줄 수 없는 배움이다.

 

그렇지만 책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어쨌든 게임은 게임이고, 예전에 나온 게임일수록 고증이 약한 법. 무엇보다 syo라는 놈이 종횡무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그런 세상은 실제로 없었잖아.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뭔가 많이 배웠는가? 하면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고 말해야겠다.

 

주제가 대항해시대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미시사라고까지 할 것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거시 세계사에 비해 더 세세한 내용과 정밀한 관점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저 시기 유럽사를 다루는 두꺼운 책들에 비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왜 이 책이어야 하는지를 이 책 스스로가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다.

 

머리말에서 이 책은 스스로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정하고 있다.

 

대항해시대는 왜 중요할까대항해시대를 왜 알아야 할까그 시대가 낳은 결과가 너무나 심대했고아직까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이때 역사의 주도권을 차지한 서구 국가들과 그 후예 국가들이 여전히 선진국으로 인류의 문명을 이끌고 있다그들의 도전과 욕망에 희생된 문명들은 대부분 중후진국에 머물고 있다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2의 대항해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이다대상은 우주다바다와는 비교가 무의미한 광활한 공간이다인류의 미래다.

 

뒤이어, 미국과 중국, 일본, 인도의 우주개발 진도와, 유명 기업가들의 우주관련 사업 전개를 설명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이 나라 현실이 안타깝다며 개탄한다. 현실이야 현실의 몫이고, 이 책의 구실, 대항해시대를 알아야 하는 이유에 우주를 갖다 댄 것은 허망할 정도로 옹색하다. 작가 선생님도 그걸 아는지 우주는 바다와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말을 스스로 하고 있긴 하다……. 다 인정하고, 대항해시대의 역사가 우주를 개발해나가는 과정에 지침이 된다고 치자. 그럼에도 이 책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이 콜럼버스의 업적을 설명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찬사 일색이다. 선견지명, 추진력, 리더십……. 말년에 망한 것은 총독으로서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하고 이내 콜럼버스와 이사벨 여왕과의 만남이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동안 영원히 회자될 것이라 말하며 꼭지를 닫는다. 그런데 다른 책을 통해 콜럼버스의 개인사를 들여다보면 정말 본받을 데 하나가 없다. 대서양 항로를 예측하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뒤져보기는 했는데, 일단 된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걸 옹호하는 데 유리한 자료들만 연구하고 주석을 달았다. 반대의 경우는 스킵. 전형적으로 제 생각에 갇혀 남의 말 듣지 않는 스타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산이 완전 틀려서, 죽기 직전에 운 좋게 아메리카를 발견해서 겨우 목숨 부지할 수 있었다. 원래 아시아 가려고 출발했던 거니까 우연히(?) 거기에 아메리카가 없었으면 우리 역사는 쪼다의 긴 목록에 또 한 명을 더 추가할 뻔. 갔다 오고 나서는 대놓고 욕망에 불을 켠다. 자기 자리는 물론 지인의 인사까지 청탁. 근데 에스파냐는 얘가 욕심만 많고 깜냥 안 되는 걸 벌써 캐치하고 팽. 그렇게 그의 말년은 허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원주민과 조우하는 대목이다. 그는 원주민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언어가 없다고 단정한다. 그들의 행색이나 천진함을 보고 그들은 유럽으로 데려가 일을 시키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결론. 새로 발견한 이 땅의 이 인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동물들은 노예. 그리고 그 놀라운 추진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현실화시킨다.

 

우리는 대항해시대의 신민이 아니고 우리가 열어나가야 할 우주도 15세기의 우주가 아니다. 우리가 그 미지의 공간에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15세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상식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도가 무진장에 이른 지금 우리가 콜럼버스의 행적에서 배워야 할 게 있다면 추진력이랄지 모험심이랄지 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콜럼버스가 하지 않은 것들, 콜럼버스가 해서는 안 되었던 것들에 대한 공부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것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우주시대를 말하면서, 19~20세기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차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 말하지 않겠다.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로버트 파우저 지음 / 혜화1117 / 2019

 

도시란 무엇인가? 시골의 반대말. 그러면 시골은 뭔데? ……도시의 반대말.

 

, 저러면 이제 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참 망하기 쉽다. 내가 사는 공간은 마치 공기 같아서, 매일 보는 거리, 매일 걷는 산책로, 매일 사는 물건들,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도시를, 이 도시의 매일 매일을 나는 잘 모르기 십상이다. 오래 살았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도시는 다채롭고 중층적인 자신의 단면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지 않는다. 좋은 눈, 지치지 않는 다리, 그리고 약간의 사랑이 필요하다. 로버트 파우저 선생님이 가진 그것들이.

 

눈과 다리, 사랑 말고 도시를 알아채기 위해 그가 더 가진 것은 무엇인가. 없다. 이 책이 뜻깊은 이유다. 저자 로버트 파우저는 도시 전문가가 아니다. 그저 도시에서 생활을 이어나가는 사람일 뿐. 이 책 역시 도시정책이나 기술적, 경제적 문제를 다루는 마음 아프고 골치 아픈 책이 아니다. 그저 에세이일 뿐이다(이 책에 나오는 모든 도시가 젠트리피케이션을 앓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긴 한다). 그렇다면 저마다 도시생활자인 우리도 꿇릴 게 없다! ,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두리번, 밖으로 나가보자구요. 그리고 돌아와 알라딘 서재에다 쓰자구요. 내가 사는 이 도시는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도합 25년을 넘게 살아도 나는 아직 대구를 잘 모른다. 게다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모를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럴 때도 역시 이 책이 필요하다. syo는 대구가 이렇게 가능성으로 충만한 곳인지 처음 알았다. 읽고도 믿기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봉가 하는 중이다…….

 

 


새로운 세상을 공부하는 시간

손승현 지음 / 더난출판사 / 2019

 

들어본 만큼 알게 되어 있다면 온 국민이 그에 관한 세세한 것 하나하나까지 줄줄 꿰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시는 분?

 

그런 분이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 그게 몇 차인지조차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명망 떠르르한 사람들은 아직도 싸운다. 그 싸움 속에서 뭔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의 점점 높아지는 명망뿐, 구름 아래 사는 우리들은 여전히 4차 산업혁명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뭔지도 모를 것들이 떼로 밀려와 내 일자리를 쓸어갈 것만 같아서 불안하기만 하다. 언론 놈들도 뭔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어느 기사를 보면 법조인이 제일 빨리 없어질 직업 탑 5안에 들었는데, 다른 기사에는 죽어도 안 없어질 5대 직업 안에 그게 들어 있다. 뭐지, 이 혼란의 구렁텅이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렇게 되지? 젠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난 당최 뭘 해야 하지?

 

일단 긴장을 풀라고 이 책은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빅 데이터는 굉장히 4차 산업혁명적이다. 그래서 저자는 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4차 산업혁명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구글 트렌드 빅 데이터를 이용한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4차 산업혁명92번 검색하는 동안 영국인들은 8, 캐나다인들은 6, 미국인들은 고작 5번 검색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뭐야, 얘 우리나라에서만 핫해? 실체 없어?

 

그렇지도 않다. 저자는 이번에 아마존과 교보문고를 검색해 관련 도서가 얼마나 출간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4차 산업혁명(아마존에선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을 때려 넣으니 교보에서 657권의 책이, 아마존에서는 꼴랑 22권의 책이 검색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점점 얘가 한국에서만 뜨겁다는 혐의가 짙어진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는 기술들을 검색창에 때려 넣은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빅데이터(Big Data)를 검색하자 아마존에서는 3000, 교보에서는 673권이 찾아진다. 인공지능의 경우 아마존에서 2만 권이 잡히는 동안 교보에서는 645권의 책만 찾아볼 수 있다. 로봇은 3000 486, 사물인터넷은 610 321, 3D 프린팅은 557 120이라는 검색결과를 보인다. 즉 우리나라는 이놈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붐을 일으키자 벌떼같이 책을 내놓은 반면, 그 기반기술에 대한 정보축적량은 현저할 정도로 적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이 주제는 자기계발서, 힐링 도서를 뒤이은 출판시장의 새로운 먹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말의 거품을 걷어낸 다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이 책이 드디어 말하기 시작한다. 그게 뭐냐면 바로…….

 

- 끝 -

 

끝이래놓고 덧붙이는 잔잔한 오류. 166쪽에서 18세기 말 19세기 중반의 산업혁명 시대의 인클로저를 이야기하며, 토머스 모어가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개탄했다고 언급합니다. 그렇지만 토머스 모어는 16세기 사람입니다. 인클로저는 역사를 통틀어 한두 번 띡 벌어지고 끝난 일은 아니었지만, 크게는 두 번으로 보는 듯합니다. 그 중 첫 번째가 토머스 모어가 저 말을 하던 시대였고, 두 번째가 산업혁명 시절이지요. ‘당시의 상황은 마르크스가 지탄할 수는 있어도 토머스 모어가 개탄할 수는 없었겠네요.

 

 


길 위의 독서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

 

진부한 것들은 멸종이 답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식상함은 한없이 죄악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하나의 길로 비유하는 오래된 클리셰가 여전히 생명력을 뽐내는 것은, 길과 인생 사이에 진부함이 도저히 오염시킬 수 없는 거대한 유사성이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정말로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가 적합하지 않은 정박의 인생만 살아온 사람도 있다. syo가 그렇다. 인생길이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쓰지만, 사실 내가 있는 곳은 늘 거기서 거기였다. 세상이 흔들 때 인생을 걸고 충분히 흔들려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세상이 부를 때 응답하면 좋았겠지만 역시 그러지 못했다. 결국 길 위에서 무엇을 만나왔고 무엇이 되어 왔는지를 상상해보면, , 이 빈곤함. 차라리 나는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라고, 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싶다. 그 빈곤함 속에서도 적지 않은 책들을 읽어왔지만, 나는 내가 길 위의 독서를 했다고 우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내가 부러운 것은 저자의 독서보다 그가 걸은 길이다. 나도 읽었고 그도 읽었다. 하지만 그것이 길 위의 독서임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은 독서가 아니라 삶에 달렸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책을 읽어도 같은 독서를 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설령 그가 읽고 설명하는 책이 이미 내게 익숙한 책이더라도, 내 길 위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읽은 책과 다른 책이다. 독서 뿐 아니라 쓰기에서도 그렇다. 생의 밀도가 옅은 사람이 읽다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묵직한 글들이 이 책 안에 있다. 그 무게는 표현이 아니라 저자가 걸어온 길이 증명한다.

 

문장의 질량이 발원하는 곳과 독서의 깊이가 발원하는 곳이 같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해답을 준다. 살아내라. 삶에 집중하라. 그러나 이것은 알아도 답안지에 옮겨 쓰기가 쉽지 않은 답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이고 싶다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

 

나는 내가 조망하고 싶은 것들을 다 풀어헤친다. 그게 그대로 시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는다. 그게 그대로 시다.

나는 내 말을 내 뜻대로 조탁한다. 그 말과 뜻이 그대로 시다.

나는 시가 뻗어나갈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형식적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실험을 한다. 그러면 그대로 시다.


나는 오규원이다. 시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

 

구조는 무섭다. 아무것도 안한다고 그냥 내버려두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더욱 그렇다. 구조 아래에서는 숨만 쉬어도 구조에 복무하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다. 우리의 들숨이 누군가에겐 이데올로기고 우리의 날숨이 또 누군가에겐 억압일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일단 그걸 알아야 한다. 지구는 돈다. 태양 주위를. 엄청난 스피드로. 초속 30km. 전력을 다해 달려도 시속 15km가 나오는 인간의 7200배 스피드. 그러나 우리는 모른다. 구조가 그렇다. 러닝머신처럼, 구조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달리지 않는다면 구조가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끝에서 아마도 넘어지겠지.

 

제목에 달린 감수라는 말은 부족하다.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할 뿐더러, ‘용인한다.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한다. 이 책은 그 알게 모르게 가운데 모르게알게로 바꾸는 일을 한다. 알면서 감수하거나 용인하는 것은 윤리의 문제다. 진선미 가운데 책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바로 이다. 책은 윤리에 대해선 수적으로 많을 하지 못한다. 적은 수의 인간을 질적으로 크게 바꿀지는 몰라도. 그러나 자신의 역할이 이라면 책은 당당히 어깨를 편다. 그래서 이 책이 당당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사람의 몫이고, 그 사람을 위해 책이 할일을 한다.

 

우리가 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은 몇 가지 전제들을 증명도 의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깔고 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신자유주의가 봉헌한 그 네 가지 신비로운 공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 경제성장이 세계의 진보를 보장한다. , 소비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한다. , 경쟁은 반드시 필요하며 인류의 발전을 보장한다. , 그 결과 불평등은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저자는 이 신성불가침의 도그마에 한 발 한 발 총알을 박아 넣는다.

 

모든 가치관은 중립적이지 않다. 저자는 저 네 가지 전제가 필수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고 말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저 중 한두 가지, 많게는 저 모두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가치관은 살아온 궤적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인 동시에 궤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 없이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관이 급선회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미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고 있던 사람들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영역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그게 무엇이건 간에) 아무도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달콤한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만이라도 눈치 챌 수 있다면, 이 얇은 책은 충분히 제 할 몫을 다한 것 같다. 다음 스텝을 기다리는 책은 많고, 현실은 더욱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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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7-2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 권도 못 읽고 있는 동안 8권이나 읽고 이렇게 논리정연하고 비평다운 비평을 쓰시다니. 게다가 한 권만 시집이고 대부분 비문학 신간 골고루 분야 지식 서적...이 더운날 독서력 무엇...
개돌이 중돌이 syo말고 한 명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똑돌이(똑똑똑똑똑똑한 syo돌이) 출동한 덕에 통찰력 샘솟는 글로 한 주를 시작하네요.
길 위의 독서는 아니라 하셔도 syo님이 열심히 읽고 글로 나누는 독서의 길은 갈래도 무궁무진하고 같이 걷는 사람들도 편히 걷도록 잘 다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길 좇아 게으름 그만 피우고 독서에 정진하겠습니다.ㅎㅎ

syo 2019-07-22 16:23   좋아요 1 | URL
무슨 댓글을 syo에 대한 리뷰처럼 쓰셨어요. 그것도 주례사리뷰.....

시간 있는 사람은 읽고 바쁜 사람은 바쁘고 뭐 그런 것이지요. 인생이란.... 이번 주에는 제가 바빠 볼 테니 열반인님께서 팍팍 읽고 퍽퍽 써주세요^-^

반유행열반인 2019-07-22 16:52   좋아요 1 | URL
무플방지위원회 입금 들어왔나보죠... 바람 잡는데 너무 알바 티났나보다..아무도 후속 댓글을 안 달아...다음에는 분량 조절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보니 입금 안 들어와서 원수 갚는 듯...)

독서괭 2019-07-2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수는 줄었지만(?) 길고 세세해진 감상평!! 좋아요 좋아~^^

syo 2019-07-24 21:4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이것이 새로 추구하는 방향성인 것입니다.....
 


조율

 


잘 모르는 어떤 아이가 피아노 치는 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어찌나 잘 치는지, 겨우 숨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면 끝날 만한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펼쳐 놓은 악보 속 모든 음표를 예쁜 소리로 바꾸어놓고 얼른 한 쪽을 넘긴다. 소리를 만드는 것은 작은 손이지만, 그 손을 만든 것은 시간일 것이다. 처음에는 건반 위를 뒤뚱뒤뚱 옮겨 다녔을 그 손이 빛나는 날개가 되어 음률 위를 날아다닐 때까지, 아이가 피아노에 주었던 것은 아마도 시간.

 

그런 것들이 있어서 세상은 아름답다. 내가 내준 시간만큼, 딱 그만큼만 내게 내어주는 것들. 속일 수 없고 속이지도 않는 것들.

 

50초 남짓 되는 영상을 500초 동안 보면서, 매일 글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결코 쉽지 않을 그 고단한 작업에 대해서. 둘러보면 세상을 아름답게 밝히는 문장들이 저마다 꼿꼿하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건대,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장을 연주하는 일 또한 에누리도 덤도 없는 교환이겠다. 한결 나은 연주자가 되는 방법은 어쩌면 간단할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이들을 시샘하기보다는, 오늘의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문장에 내어줬을 내일의 나를 부러워하는 것. 내일의 나는 내일에서야 오기 때문에 오늘의 나는 끝내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자꾸 쓰는 것.

 

시간의 공정함을 믿고, 거대한 항아리에 문장을 계속 붓자. 눈을 감고 붓자. 안은 들여다보지 말자.

 

넘치면 젖겠지.

 

 

 

십여 년 전나는 두어 권의 책을 펴낸 삼십대 초반의 젊은 소설가였다그즈음나 역시 내 재능이 모두 타버리고 난 뒤의 그을음을 보고 있었다하지만 서가를 다 뒤져도 그 그을음에 대해 말해주는 책은 없었다그러다가 우연히 노란색 표지의 파리 리뷰 인터뷰라는 책을 발견하게 됐다거기에는 내가 열광했던 소설가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그리고 그들은 육성으로 자기 직업에 대해그리고 스스로 터득한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그들에게서 나는 허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들은 마치 매일 아침 작업장으로 나가는 시계 기술자들 같았다늘 실패한다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점만 다를 뿐그제야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소설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단 한 번의 불꽃뒤이은 그을음과 어둠그리고 평생에 걸친 글쓰기라는 헌신만이 나를 소설가로 만든다는 것을그게 바로 소설가의 운명이라는 것을.

김연수시절 일기, 53-54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대장장이의 망치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밤에는 밤을 맞자.

김훈연필로 쓰기, 11


글을 써도 고통스럽고 글을 안 써도 고통스럽다그러면 쓰는 게 낫다뭐라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니까슬프지만 일을 하고슬픈데도 밥을 먹고슬프니까 글을 쓴다그렇게 하루를 보냈으면 내일도 살 수 있다서툴더라도 자기 말로 고통을 써 본다면 일상을 중단시키는 고통이 다스릴 만한 고통이 될 수는 있다그러므로 우리 뭐든 써보자고 하며 저마다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은유다가오는 말들, 6 

 

 

--- 읽는 ---

= 시절일기 / 김연수 : ~ 152

= 너무 시끄러운 고독 / 보후밀 흐라발 : ~ 49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주경철 : 92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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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9-07-20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아름답네요. 저도 늘 그렇듯이 피아노 세 시간, 오르간 두 시간 쳤습니다. 머릿 속에 있던 것을 이토록 정갈하게 표현하시다니요! 속이 다 후련하네요. 왜 밤에는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칠 수가 없는지 괴로웠는데, 이제는 못치는게 아니라 안치고, 밤을 맞이하겠습니다.

syo 2019-07-20 23:07   좋아요 0 | URL
다섯 시간을 악기와 같이 보낸 클래비스님이 훨씬 더 아름다운 일을 하셨네요.
저는 이렇게 말해놓고는 고작 몇 분 쓰고 두어 시간 읽고 말았어요.

편안한 밤 보내시고, 해가 뜨면 다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9-07-2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치면 젖는다 overflow....좋아요👍👍👍

syo 2019-07-20 23:59   좋아요 1 | URL
카알님 요즘 뜸하셔.
치열한 일상을 살고 계신가요.
자주 글 써주세요 ㅎ

감은빛 2019-07-2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도 글도 그리고 운동도 투자하뉴시간만큼 무조건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바로 재능이라는 놈과 능률이라는 놈 때문인데요. 재능이 없는 사람이 능률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투자대비 결과를 바라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래전 글 쓴다고 골방에 처박혀서 지낸 적이 있었죠. 많은 시간을 투자해 내 기준으로 그럭저럭 읽을만한 글이 나왔는데, 같은 시기에 문창과에 재학중인 어린 분의 글을 읽고 좌절하게 되었어요. 세상은 시간에 있어 공평하지 않구나! 제가 골방을 나온 이유입니다.

syo 2019-07-21 20:29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도 공평하지 않더라구요.
결국 천재의 한 시간이 범재의 열 시간, 백 시간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세상에 눈 감고,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는 조금은 더 잘 쓰겠지- 하는 것만 보려구요.
뭐 내가 어차피 글밥 먹는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아에 취해서 흥청망청 살아야겠다- 이런 마음도 좀 있고 그렇습니다 ㅎㅎㅎ

독서괭 2019-07-21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공정함을 믿고~ 넘치면 젖겠지. 밑줄 쫙입니다!

syo 2019-07-21 20:30   좋아요 0 | URL
글은 이렇게 써놓고 바로 배깔고 드러누워서 네이버 뉴스 뒤짐.....
나라는 인간은....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