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자러? 별자리러? 별자리어?

 

 

처음부터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syo 역시 남들처럼 그냥 철학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도대체 철학에 대한 관심의 불이 언제 입문서쪽으로 옮겨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syo는 알라딘의 입문서/개론서 덕후가 되어 끈질긴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세상에 입문서/개론서/연구서/원전 이런 식의 계층구조가 선명한 장르는 굳이 왜 존재하여 읽는 이들의 마음을 쓸데없이 아프게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불나방처럼 결국 읽어내지도 못할 책들을 좇아 다시 못 올 귀중한 내 시간들을 활활 불싸지르는 걸까?

 

통상적인 독서루트는 이렇다고 한다.

 

원전에 덤볐다가 얻어터진다 -> 입문서를 한 권 읽어보고 감을 잡는다 -> 다시 원전에 도전해 기어이 읽어낸다 ->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연구서를 읽고 시야를 확장한다 -> 다시 원전을 읽으며 깊이 있는 음미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입문서 덕후의 독서루트는 이렇다.

 

원전에 덤빌 생각은 접고 청소년을 위한’, ‘원숭이도 이해하는’, ‘첫걸음’, 따위의 타이틀이 붙은 책을 읽고 쉽게 이해한다 -> 다른 입문서를 읽는다 -> 또 다른 입문서를 읽는다 -> 또 또 다른 입문서를 읽는다 -> 이 타이밍에 깊이 있는 연구서를 한 번 읽어준다 -> 그리고 다시 입문서를 읽는다 -> 이쯤 되면 슬슬 원전을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면 입문서를 읽는다 -> 이렇게 계속 입문서만 읽어도 되는 걸까 싶다면 입문서를 읽는다 -> 이러다 원전을 읽는 날이 오긴 올까 의심된다면 닥치고 입문서를 읽는다 -> 이제 입문서를 통해서 배울 게 남긴 남았나 싶다면 그걸 확인하기 위해 입문서를 읽는다 -> 원전을 읽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원전을 읽어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는 식의 충고를 만나면 정말 진심으로 공감하는 댓글을 단 다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입문서를 펼친다

 

이쪽 입장에서 보면, 철학자의 사상과 지혜 같은 건 부수적인 문제다. 그냥 읽다 보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지, 그런 훌륭하고 뜻깊은 것을 목적으로 책을 읽어서는 올바른 입문서 덕후가 될 수 없다. 온 세상 말고 이 독서판에서만 보면, 마르크스가 이미 있었으니 마르크스의 생각을 똑바로 이해하는 또 다른 사람의 효용가치는 적다. 도리어 다른 독자가 마르크스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나아갈 수 있도록,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마르크스 입문서/개론서를 섭렵한 후 도전자의 흥미와 배경지식의 정도에 맞춤한 커리큘럼을 설계해주는 쓰앵님이 훨씬 더 쓰임이 있는 것이다,

 

고 생각한다.

 

그것도 포부라면 포부. 실제로 2016년 당시, syo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관한 시중의 모든 입문서와 개론서를 정말 남김없이 싹 다 읽어치운 상태였다. 그리고 그쯤 되니 그 두 냥반에 대해서라면 어디 가서 좀 아는 행세해도 부끄러운 꼴 보지 않을 만큼의 지식이 덤으로 축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지식에 관해 질문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syo에게 마르크스가 뭐래요, 프로이트는 대체 왜 그런대요,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모두들, 제가 이제 프로이트를 읽어보려 하는데요, 마르크스를 읽을까 하는데요, 뭐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와 같은 내용의 질문들을 던져왔다. 그렇게 알라딘 마을에서 syo는 살아있는 원숭이의 화신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뭐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건 참 즐거운 일이다.

 

2016년에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가장 자신있었지만, 실은 그 두 사람 말고 입문서에 발끝을 들이밀었다가 확 데고는 얼른 돌아선 다른 적들도 많다. 플라톤, 공자, 장자,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 후설,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라캉, 레비나스, 푸코, 블랑쇼, 아렌트……. 욕심만 잔뜩 품고 덤벼들었지만, 입문서 별자리 하나 똑바로 그리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게 만들었던 저 수많은 현자들.

 

그리고 요즘은 헤겔이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취업 전에, 헤겔로 별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볼 작정.

 

 


--- 읽은 ---

+ 정신현상학 / 김은주 : 76 ~ 216

+ 처음 읽는 중국사 / 전국역사교사모임 : 269 ~ 386

+ 탈코르셋 선언 / 윤지선, 윤김지영 : 70 ~ 133

 

 

--- 읽는 ---

= 광대하고 게으르게 / 문소영 : ~ 150

= 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 / 이병창 : ~ 168

= 여자와 소인배가 논어를 읽는다고 / 서한겸 : ~ 42

= 가와바타 야스나리 / 허연 : ~ 131

=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알렉스 캘리니코스 : 157 ~ 248

=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장석주 :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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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9-09-01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문서 (....) 원전 위계는
극히 한국적 현상이기도 할 거 같습니다.
글구 이 문제의 한 70% 정도는 번역의 문제, 15% 정도는 우리가 말을 쓰는 방식의 문제일 거 같아요.

번역이 좋을 필요도 없고 정확하기만 해도
이해하고 영향받을 사람은 있게 마련인데
중요한 책들 중 ˝정확함˝ 기준으로 통과할 책들도
희귀했다는 놀라운 일. 정확한 정도를 넘어서 좋은 번역이 다수라면
원전들을 읽는 일이 훨씬 재미있고 보람있다고 공적인 합의.... 있을 거 같아요.
영어권에서는 너무도 당연히 존재하는 합의.

언어에서 개인의 몫과 사회적 활동. 이 둘 다가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실천될 때만
˝원전˝ 읽고 해석하고 논의하는 문화가 있을 거 같기도 해요. 이것도 영어권에서는
너무도 당연한데, 한국에서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해석의 노고 같은 건 아 몰라 내 맘이야.

syo 2019-09-01 16:52   좋아요 0 | URL
한국어 사용자들의 망탈리테 같은 것에 대한 몰리님의 분개는 익히 만나왔던 터라,
그 바닥 사람이 아닌 제게도 뭔가 문제의식 같은 게 생기긴 했어요.

원전을 읽었고, 또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들의 지혜가 탐나지 않는 수준이거나 혹은 그 지혜랄 것이 거의 엿보이지 않는 때,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알고 느끼기를 바란다는 느낌보다 그저 자신이 원전을 이미 읽은 훌륭한 인물임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때, 그런 때들이 많아서 syo같은 핫바지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원전에서 한 걸음씩 더 멀어져만 가는 것 같습니다.

입문서 말고 <자본>은 읽어보고 떠드는 거냐는 말을 듣고 <자본>을 읽고 오면, 그 <자본> 말고 <Das Kapital>을 읽고 오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오기도 하고요. 만약 내가 마르크스 말고도 반도체 공학도 알고 싶고, 뇌과학도 좀 알고 싶고, 인상주의 화가들과 그 작품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고 그런 사람이라면, 원전 소리 듣는 순간 바로 탈원전 비핵화 선언하고 싶게 되는 거죠.....

2019-09-01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9-01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문서를 읽으면 오래 전의 어떤 사람에다, 그 사람을 위해 인생 또는 최소한 젊음의 한 때를 바친 누군가까지 동시에 만날 수 있잖아요. 원전 한 편에 단 한 사람 만난 누구들보다 n명 만난 syo님이 개꿀 개이득 메롱메롱 하시며..그보다도 이미 죽은 누군가가 남긴 글을 보며 그 사람의 생각을 따라가 보는 것 자체가...사람에 대한 사랑이 팍팍 느껴지네요. 진정 필로소피 필로소피아.

syo 2019-09-03 00:15   좋아요 0 | URL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반님은 뭔가, 칭찬과 비행기태우기의 따라갈 수 없는 지존 같은 느낌이에요.
예전에는 무슨 오구오구 학원 같은 거 다니시는지 궁금했거든요? 이젠 아니에요.
혹시 무슨 오구오구 학원 같은 거 운영하세요?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9-03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문서 덕후되는 과정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입문서를 읽는다 입문서를 읽는다 입문서를 읽는다, 에서 저는 마음이 그만 좋아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뭐랄까, 계속해도 요가 초보자에 머무르는 제 상황과 같다고 할까요..

음..
아닌가??

syo 2019-09-04 09:50   좋아요 0 | URL
비슷한데?? 비슷해요 ㅋㅋㅋㅋㅋㅋ
가끔씩 다음 단계에 도전했다가 쎄게 좌절하고 나여 너는 뭐니 나여, 하는 것도 혹시 비슷한가요? ㅋㅋㅋㅋ

AgalmA 2019-09-0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문서 셔틀러로 살다가 인생 망할 거 같다 싶어서 원서를 읽으려 무진 노력 중이오ㅋㅜ)... 일단 집에 책을 사놓은 것만 해도 어디냐 하며ㅋㅠ)

syo 2019-09-05 11:20   좋아요 0 | URL
아갈마님께서야 이미 입문서에서 깔짝거릴 단계는 훌쩍 넘어서셨지요! 그리고 탈출도 깜냥 되는 사람이나 하는 겁니다. 저는 이미 늦었어요......
 

 

구두를 신고, 군화를 들고, 운동화를 메고

 

 

1

 

내가 얼마나 작고 모자란 인간인지를 자주 생각한다. 나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자란 친구들은 물론, 또래의 사람들 중에도 나만큼 저런 생각을 칭칭 휘감은 채 일상을 풀어나가는 이는 드물 것이다. 어느 시점을 통과하며 형성()한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막을 새도 없이 불뚝불뚝 튀어나오는 내 안의 저 아이가 밉고 애달프다.

 

동전을 던지면 자주 뒷면을 만나서 슬프다. 어떤 인생은 계속 뒷면을 부른다. 뒷면색깔이다. 가끔씩 앞면이 나오기는 한다. 그럴 때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앞면이지만 손바닥에 맞닿은 면은 뒷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픔은 슬픔이고 즐거움은 반전된 슬픔이다.

 

 

 

2

 

보고 싶은 친구를 내가 불러내도 술과 고기는 친구가 산다. 백수생활에 들어가면서 나는 사회가 던질 모진 시선과 보편성 압력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버텨내는 마음만 겨우겨우 예비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맞닥뜨린 적들은 조금도 추상적이지 않았다. 그 수많은 구체적인 것들 가운데 하나가 자존심-친구의 trade-off’였다. 자존심을 지키려면 친구를 버려야 한다. 반대로 친구를 지키려면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 없이 살 수 없는 나는 자존심을 버리는 쪽이었고, 성공적으로 자존심을 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빠져나간 갯벌에는 미안함이라는 새로운 소금물이 밀고 들어온다. 그것들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감정이다. 하나는 얼굴을 붉히고 다른 하나는 얼굴을 숙인다. 그러나 어쨌든 두 놈 다 작은 사람을 더욱 작게 만든다. 월요일 밤이었다.

 

 

 

3

 

나는 한 것이 없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역량이 없어서 당신이 공무원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역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저 뜬구름이나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답이 내 앞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하였지만, 나보다 먼저, 나와 함께, 나보다 늦게 면접관을 만나러 들어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감에 찬 당당한 얼굴로 맞설 수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밝고 힘이 있었다. 그게 젊어서 그런 것인지, 젊은데도 그런 것인지, 나는 그조차 알 수 없어서 그저 스스로의 늦됨이 부끄러웠다. 월요일 오후였다.

 


 

4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주민센터 2층에 모여 저녁 도시락을 먹는 중이었다. 옆에 앉은 이가 말을 걸어왔다. 나보다 한두 살이 많았고, 남편이고, 두 살, 여섯 살 난 아이 둘의 아버지인 듯했다. 이야기는 진부했다. 짊어져야 할 무게에 짓눌린 인생사의 괴로움, 가지 않은 길에 남은 미련, 약삭빠른 선택과 행동으로 나보다 저만큼 앞서 나간 이들에 대한 양가감정 같은 뻔하고 흔한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늘 그러듯 나는 역시 진부하고 뻔하고 흔한 태도를 취하는 중이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조롱하는 태도를. 무슨 일 하세요? 아무 일도 안 해요. , 그래요? , 제가 좀 철딱서니가 없어놔서요, 막 마음대로 살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 그러시구나, , 인생은 긴 거 아니겠어요? .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요. . 저도 그냥 가끔은 일 다 때려 치고 제주도 같은 데 내려가고 싶고 그래요. . 근데 이미 묶인 몸이라, 그런 게 안 되는 거죠. 아시죠? . 화요일 밤이었다.

 

 

 

5

 

내 입이 기계처럼 그렇고 그런 대답을 내뱉는 동안, 입을 뺀 모든 기관은 그날 오후에 받은 카톡 메시지 하나에 집중하고 있었다. “크기 4-5센치. 우측 하부 요관에서부터 방광 안쪽까지. 림프절도 의심. 콩팥부터 요관, 방광 위까지 제거. 전이되면 손 못씀. 2기로 보이지만 열어봐야 알 수 있음. 3기면 항암도 필요. 일단 전이는 없음. 수술 이틀 전에 입원할 것.”

 

소변에 피가 비친다는 엄마가 찍어온 CT를 들고 대학병원을 찾은 것이 지난 주 목요일, 교수는 일단 방광암 소견을 냈고, 확진하기 전에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은 다음 화요일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엄마는 다시 피를 뽑고, 소변을 받고, 내시경 카메라를 집어넣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는 동생의 손을 잡고 화요일 오후 3시에 병원을 찾아 4시쯤 방광암 확진을 받았다. 엄마는 애써 담담한 척 하려 했지만 그럴 리가 없음을 나는 안 봐도 알 수 있었고, 동생의 목소리는 떨렸다.

 

나는?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화 끈을 조이고 있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승강기에 올라타 로비층을 눌렀다. 평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보폭으로 주민센터로 걸어갔고, 걸어가는 동안 만난 군복 입은 사람에게 이 동네 훈련은 어떤지 물어봤다. 대기공간에서는 옆 사람과 아무 의미 없는 수다를 떨었다. 연락을 받고 뭐가 달라졌을까? 뭔가 달라졌을 것이다. 근데 그게 뭔지, 얼마 만큼인지, 알 수가 없었다.

 

 

 

6

 

20년 전쯤이었다. 엄마는 이가 아파서 며칠을 제대로 못 먹어 기운이 없었다. 무심하고 버릇없고 가족을 아낄 줄 모르는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대뜸 기운 없음을 호소했다. 나는 가방에서 정석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치과 갔다 오라니까 또 안 갔지? 밥을 똑바로 먹어야 기운이 생기지. 밥을 똑바로 먹으려면 이가 괜찮아져야지. 라고 말했다. 부엌에서 열린 방문을 통해 말을 거는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방문을 닫고 정석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 갔다.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엄마는 외할머니와 함께 치과에 갔다가 거기서 쓰러졌다. 그리고 엄마가 기운이 없었던 이유는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가 아니라 급성 골수성 백혈병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음에 엄마를 봤을 때 엄마가 어느 병실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균실 안에 들어있는 엄마와 전화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은 생생하다. 엄마는 그 안에서도 웃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도 엄마는 울지 않았을까?

 

 

 

7

 

나는 많이 울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어떤 장면을 생각하기만 하면 언제든 실컷 울 수 있었다.

 

여자는 요즘 어쩐지 몸에 힘이 없다. 어지럽다. 밥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 몸으로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를 챙기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그래서 견디고 또 견디지만, 어쩐지 오늘은 너무 힘들다. 저녁,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돌아온 아들에게 엄마가 요즘 너무 기운이 없어, 라고 말한다. 아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제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여자는 열린 방문 너머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아들은 치과에 가라고 한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교복을 벗고,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그러다 돌아본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는 아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아들은 말한다. 엄마, 와이셔츠 빨아야 돼. 아들은 목에 때가 누렇게 끼기 시작한 와이셔츠를 여자의 손에 쥐어주고 다시 돌아서서 방문을 닫는다. 아마 오르지 않는 수학 성적을 올리느라 오늘밤도 낑낑 댈 것이다. 여자는 닫힌 아들의 방문을 바라보고 잠시 서 있다. 그리고 이내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간다. 와이셔츠 목 부분에 비누를 묻힌다. 내일은 엄마를 불러서 치과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며.

 

 

 

8

 

수십 번 리플레이 되면서 조금씩 각색되고 착색되고 탈색된 장면이다. 저 장면을 연출하고 주연했으므로, 나는 죽어 반드시 지옥에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더 괜찮은 아들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과적으로 조금도 그러지 못했다. 20년 전에 저렇게 손 놓고 있었듯이, 10년 전 아버지가 간암에 걸렸을 때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몇 년 뒤 돌아가실 때 역시 나는 병원비 한 푼 내놓지 못하는 밑바닥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다시 지긋지긋한 병마가 엄마를 한 번 더 덮쳤는데, 나는 똑같은 아들이다. 20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_ 문태준가재미」 전문

 

 

 

--- 읽은 ---

+ 헤겔 / 우도 티이츠 : 133 ~ 231

+ 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 / 최영기 : 151 ~ 233

 

 

--- 읽는 ---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심보선 : 136 ~ 221

= 처음 읽는 중국사 / 전국역사교사모임 : 131 ~ 269

= 전쟁 말고 커피 / 데이브 애거스 : 106 ~ 279

= 탈코르셋 선언 / 윤지선, 윤김지영 : ~ 70

= 미시경제학 한입에 털어넣기 / 사카이 도요타카 :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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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0 1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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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0 1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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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0 17: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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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0 2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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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2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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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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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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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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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1 2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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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9-03 17: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님,

훗날 또 이런 글 쓰지 않도록 합시다. 이제 그만 ‘무심하고 버릇없고 가족을 아낄 줄 모르는 아들‘ 에서 벗어납시다. 벗어날 때가 되었어요. 결국 사람은 내 주변의 사람, 나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붓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가며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엄마에게 유독 무심하게 구는 건 자식들의 특징인 것 같아요. 연인에게는 최선을 다하면서 왜 엄마에게는 안그러나 몰라. 이제라도 최선을 다합시다, 쇼님. 마음과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쏟아붓자. 그래야 나중에 조금이라도 후회를 덜하게 되죠.

어머님 수술 잘 끝내시고 얼른 회복되시기를 바랄게요, 진심으로요.
 

 

양복은 입고 사복은 메고 군복은 들고

 

 

1

 

그러니까 나는 죽전역에서 출발하는 분당선을 타고 수서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덜컹덜컹 흔들흔들 그렇게 평범한 방식으로 잘 가고 있었는데 뜻밖에 바삭바삭이 끼어들었다. 바삭바삭?

 

고개를 돌려보니 바삭바삭은 내 대각선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성에게서 발원했다. 키는 180, 짙은 눈썹의 호남형 외모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무엇보다 반팔 티셔츠 팔 부분을 확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팽창한 단단한 팔뚝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남성이, 다름 아닌 꼬북칩(콘스프맛)을 먹고 있다. 아르마딜로칩이나 갈라파고스대왕거북칩이 아니라, 귀요미 꼬북꼬북 꼬북칩을…….

 

한 손은 꼬북칩 봉지의 아래쪽을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은 봉지 안과 입 안을 놀라운 속도로 번갈아 드나드는데, 손 크기나 전완근 두께 역시 만만치 않아서 두 손은 봉지에 못 넣겠군 싶을 정도다. 손 두 개를 먹는 일에 쓰느라 손잡이도 잡을 여유가 없지만, 그는 얼른 봐도 정말 튼튼해 보이는 두 다리로 딱 버티고 서서, 전동차의 어떤 진동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평안하고 열정적으로 꼬북칩을 조지고 있다. 덜컹덜컹 바삭바삭 흔들흔들 바삭바사삭.

 

마지막 한 줌을 꺼내 입으로 넣은 그는 봉지를 살짝 흔들어 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혀로 입술을 핥은 다음, 정성을 다해 꼬북칩 봉지를 그 시절 그 쪽지 모양으로 접기 시작했다. 풋풋한 소녀감성이 발휘되는 동안 역시 중심은 든든한 허벅지가 잡아주는 중이었다. 손에 여유가 생기자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웹툰을 보기 시작한다. 크아, 크르륵, 따위는 휙휙 넘기고, 세 줄쯤 되는 긴 대사를 만나면 미간을 오므리고 오래 멈춰 꼼꼼히 읽는다.

 

열차가 수서역에 도착하자, 꼬북칩남이 제일 먼저 내린다. 그리고 한 번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걸어올라 저기 멀리 사라져간다. 저렇게 다부지게 생긴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지만 저렇게 다부지게 생긴 사람이 꼬북칩을 찹찹 먹는 장면을 만나기란 더욱 힘들고, 무엇보다 그 장면을 전철 안에서 목도하는 일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 아닌가? 나는 SRT역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꼬북칩남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전철 속의 다른 승객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닌가, 혹시 나처럼 다들 속으로 놀라고 있었을까? 모른 척 흘렸을 뿐, 바삭바삭의 치명적 습격에 다들 한 대씩 얻어맞은 것일까?

 

그렇게 나는 SRT열차에 올랐고 내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멀리, 내 옆자리에 굉장히 익숙한 뒤통수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엔 마치 운명처럼, 놀라운 기적처럼, 다름 아닌 꼬북……

 

 

 

 

 

 

……칩 맛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2

 

월요일 아침 기차로 서울에 올라가 점심에 면접을 보고 염치도 없이 친구에게 맛있는 술과 고기를 실컷 얻어먹었다. 화요일 오전 늦게 일어나 점심에 용인으로 건너가 닭갈비를 먹고 저녁에는 인생의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 저녁시간까지 스크린골프장에서 알바를 뛰고 저녁에 수서역에서 SRT를 잡아타고 대구로 돌아와, 이렇게 밤이다.

 

3일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밤이 늦었다.

 

 

 

--- 읽은 ---

+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 : 52 ~ 195

+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조셉 추나라 : 105 ~ 224

+ 이별의 푸가 / 김진영 : 116 ~ 250

 

 

--- 읽는 ---

= 헤겔 / 우도 티이츠 : 39 ~ 133

=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 심보선 : ~ 136

= 이토록 아름다운 수학이라면 / 최영기 : ~ 151

= 처음 읽는 중국사 / 전국역사교사모임 : ~ 131

= 전쟁 말고 커피 / 데이브 애거스 : ~ 106

= 스피노자 매뉴얼 /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 ~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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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9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9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8-2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쁜 삼일이네요. 그나저나 꼬북칩 전철에서 먹는 건 민폐....콘스프 냄새랑 소리가 아주....주변에서 얼마나 먹고 싶겠어요.

syo 2019-08-29 09:04   좋아요 1 | URL
되게 이색적이었어요.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헤어나 이목구비, 체격으로 봤을 때는 경호원 느낌이었는데 막 거북이 그림 있는 녹색 봉지를 쉴새 없이 괴롭히고.... 괜히 계속 시선이 가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19-08-29 11:03   좋아요 0 | URL
묘사만 보면 syo님의 근육남을 향한 애정이 느껴질 정도인데요. 집요하게. 성가시고 미운 애를 저렇게 상세하게 그릴 필요가 없잖아...그리운 근육남 박제...죄송합니다.

syo 2019-08-29 11:51   좋아요 0 | URL
성가시고 밉지 않았으니까요. 생각해보세요. ‘지하철‘ ‘분당선‘에서 ‘꼬북칩‘을 ‘초스피드로‘ 먹고는 봉투를 ‘쪽지‘ 모양으로 고이 접는 ‘근육남‘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이색적이에요. 저는 그런 존재들을 애정하고 궁금해하는 편입니다 ㅎㅎ 그 이미지가 기억에서 흐려지기 전에 잡아채고 싶었으니 박제도 맞네요. 열반인님이 모든 걸 제대로 캐치하셨네요.

반유행열반인 2019-08-29 12:1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늘 말씀드리듯 그 배포와 아량을 존경합니다. 저는 갇힌 공간에서 뭘 먹는 사람이 그렇게나 싫어서 예전에 그런 걸 성토하는 글을 썼던 것 같은 기억이 있거든요. 왜 그게 싫을까 평생 고민해 보니...저도 먹고 싶어서 그런게 아닐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다음부터 누가 먹는 꼴을 보고 싫어지면 이렇게 대처하기로 했어요. “저도 한 개만 주세요.” 그런 진상을 피우고 나면 남을 덜 미워하는 법을 배우지 않을지. 아니면 먹을 걸 잔뜩 사 들고 주변 사람 나눠주며 다같이 대중교통 안에서 뭘 먹어보는 상상도 해 봅니다. 아무튼 박애주의자 syo님.

syo 2019-08-29 13:06   좋아요 1 | URL
ㅎㅎㅎ또 이러신다ㅎㅎㅎ 자꾸 위대한 사람 만들면 곤란합니다. 그저 특이한 거 좋아하는 것뿐인데, 박애가 다 뭐예요 ㅎㅎㅎㅎ 바삭바삭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제 귀에 안 거슬려서요. 그렇다는 건 저도 인식없이 타인에게 피해줄 가능성이 있는 놈이라는 거죠. 훌륭하기는 커녕 한참 모자랍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8-29 14:0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위대한 특이 취향 겸손인...더 그레이트 syo

syo 2019-08-30 13:34   좋아요 1 | URL
또 졌네? ㅋㅋㅋㅋㅋ

근데 저한테 하시는 거 보면, 특이취향은 열반인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겠는데요? ㅎㅎ

2019-08-29 0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9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8-2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쇼님!! 아침이에요, 아침!!
못 다 한 이야기 나눕시다요!!

syo 2019-08-29 09:05   좋아요 0 | URL
자다 금방 일어났는데 알 수 없는 두통이......😣

단발머리 2019-08-29 09:07   좋아요 0 | URL
얼른 세수하고 밖에 나가서 꼬북칩 하나랑 콜라 하나 사옵시다!

사실 어제 밤에는.... 로 시작하는 거예요. 너무 평범한가요?
근데 아침이에요, 아침! 얼른 일어나요!!

syo 2019-08-29 09:17   좋아요 0 | URL
으윽..... 5분만....

단발머리 2019-08-29 09:18   좋아요 0 | URL
해가 중천에 떴어요! 저 봐요!! 저기 저, 저!!!
5분이 아니라 3분도 안 돼요. 얼른 일어나요, 쇼님!

syo 2019-08-29 09:24   좋아요 0 | URL
으.... 오늘 학교 가는 날도 아니란 말이에요....😢

단발머리 2019-08-29 09:41   좋아요 0 | URL
어허어허~~~~ 그만 뚝!
얼른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요!
핸폰 놓고 노트북 켜고!
시~~~~~~~~~~ 작!

syo 2019-08-29 09:45   좋아요 0 | URL
...... 역시 학교학원 가기 싫은 애들 거기 보내는 레벨이 장난 아니시다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08-29 09:55   좋아요 1 | URL
학교 보내는 솜씨에요.
우리 애들은 학원에 안 다녀서요 ㅋㅋㅋㅋ
자, 다시 시~~~~~~~~~~작!

syo 2019-08-29 11:52   좋아요 0 | URL
뭐 좀 더 읽구 만나요 ㅎㅎ 아직 키보드를 때리던 손가락이 채 다 식지도 않았어. 쿨타임 최소 20시간을 보장하라, 보장하라!!

:Dora 2019-08-2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져든다 꼬북칩남 설렘주의보 ㅋㅋㅋㅋ

syo 2019-08-29 11: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다음번에는 신분당선에서 시나몬 맛 먹고 있는 꼬북칩남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stella.K 2019-08-2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별 것 아닐 수도 있는 걸 디테일하게 잘 쓰네요.
이런 글이 먹어주는데 전 왜 이렇게 못 쓸까요?ㅠ
민폐인 참 많죠. 전 주일 날 교회 다녀오다 빡칠 뻔 했죠.
길을 건너는데 웬만하면 속도를 줄일만도한데 안 줄이더라구요.
결국 서둘러 건너긴 했지만 잘못하면 내 발 뒷꿈치를 칠 기세더라구요.
지나가면서 그 차에 대고 세번째 손가락 쳐들고 싶었는데
교회 다니는 관계로 참아줬습니다.ㅋㅋ

근데 예비군 훈련을 받으려고 서울까지 상경하셨습니까?
말년 예비군 훈련은 몇 살까진가요?

syo 2019-08-30 13:37   좋아요 0 | URL
저는 꼬북칩남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 민폐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댓글들 읽으면서 제 무심함에 좀 반성하게 되네요.....

손가락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것도 안 되나요? ㅎㅎㅎㅎ

예비군 땜에 서울 갔다기 보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어서 한 번에 해결하려 했지요.
예비군은 용인에서 받았구요.

예비군 훈련은 나이랑 상관없이 제대하고 그 다음해부터 6년동안 받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제 겨우 6년인건가......

cyrus 2019-08-29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가는 길이 지칠 법한데 돌아오자마자 글을 쓰셨네요. 서울행 기차를 탈 땐 기분이 붕 떠있을 정도로 좋았는데, 대구로 가는 기차를 타면 마음이 무거워져요. 서울에서 보낸 짧은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요? 그 시간이 금방 가더라고요.

syo 2019-08-30 13:38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도 저처럼 서울러버 기질이 있군요.
저는 서울을 너무 사랑해서 아무리 대구로 내려와도 곧 다시 서울로 살러 가게 됩니다. 무슨 부메랑처럼.....

다락방 2019-09-03 17:07   좋아요 0 | URL
쇼님 서울러버... 기질이 있었어요???

syo 2019-09-04 09:52   좋아요 0 | URL
친구들 사이에서는 알아주는 서울러버죠. 산소조차 더 달콤한 서울 O2
 
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증보판
말과활 아카데미 엮음 / 일곱번째숲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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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픈 열대를 읽다에서 양자오는 리스트가 양도할 수 없는 동시에 양도하지 않는 독보적인 역할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베트남전 기념비다이 기념비는 어떤 기념비인가상단에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의 이름이 가득 새겨진 커다란 돌비석이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미국 군인'은 이 돌비석이 기념하는 대상이자 그들의 공통점에 대한 묘사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묘사를 통해 그들이 살아 숨 쉬던 개체였다는 사실은 축소되고그들은 더 이상 진정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하나의 묘사하나의 거대한 분류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개별성을 잃어버린다이에 대한 저항감에서 사람들은 개개인의 이름수십만 개의 이름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리스트를 커다란 돌판에 새긴 것이다.

  이는 리스트의 특수한 의의이자 작용이다그것은 개체와 차이를 보존하는 동시에 두드러지게 한다.

양자오슬픈 열대를 읽다, 178

 

 

2

 

syo는 리스트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에서 역시 그런 어른으로 자라났다. 스케치북 한 장을 북 찢어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앞에 엎드린 어린 syo는 시에 담으면 좋을 것 같은 예쁜 낱말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하늘, , 앵두, 모래, 도랑, 아기, 강아지풀, 순돌이(진돗개)…….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던 고등학생 syo도 있었다. 뜻밖에 공책 한 바닥도 다 채우지 못했던 그 리스트는 평범하고 무난한 희망사항들로 가득한 색채 없는 청소년 인생의 단면이었다. 밤이 내리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이 늘어선 고장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 syo, 남몰래 총구를 내리고 사랑하는 작가들의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주욱 늘어놓은 그들의 이름은 별빛을 받으면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처럼 빛났다. 별 하나에 김연수와, 별 하나에 쿤데라. 별 하나에 문태준과, 별 하나에 장 그르니에. 그리고 그 긴 리스트의 끝자락에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석 자.

 

 

 

3

 

취향과 생각을 드러내는데 리스트만큼 직접적인 장르가 있을까. 리스트를 만들면서 거짓말을 하기란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리스트에는 약간의 거짓’을 아직 달성되지 않았을 뿐인 진실로 바꾸어주는 착한 힘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리스트를 보여 달라는 말에 신이 나서 베르나르 베르베르, 기욤 뮈소,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이름들을 적어나가다, 문득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욕심이 들어 아직 읽어보지도 못한 보르헤스를 슬쩍 덧붙였을 때, 그것은 귀여운 거짓말인 동시에 마음의 짐이 되어 보르헤스를 향해 나를 한 걸음이나마 옮겨놓기도 한다. 아무리 폼 나더라도, 죽는 날까지 평생 읽어보지 않기로 작정한 작가의 이름을 굳이 골라 써넣는 일이 있을까?

 

이미 지나온 것들과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고 믿는 것들의 경계선이 부드럽게 녹아 있는 한 잔의 커피. 세상의 모든 리스트는 영수증이면서 계산서인 셈이다.

 

 

 

4

 

그리고 어떤 리스트를 만났을 때 내가 그것을 사랑할 수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리스트의 주인 역시 사랑할 수 있다고 syo는 믿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리스트가 지니는 가장 매력적인 기능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일단 명함을 교환한 다음(누구누구입니다, 무슨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즉시 무수한 리스트를 교환하기 시작한다(쉬는 날엔 뭐하세요, 영화 좋아하세요, 무슨 커피 드실래요, 패션 센스가 있으시네요.) 그렇게 서로의 리스트를 맞대어보다 덜컥 교집합이 발견되는 순간 대화의 봇물이 터지고 호감의 홍수가 밀려든다


리스트의 교환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미묘한 부분까지 조금 더 상세하게 작성된 리스트를 서로에게 조심스레 내민다(그러면 호퍼 그림도 좋아하시겠네요, 그 가사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그 부분만큼은 혐오 정서가 은근히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대단하지만 어쩐지 하루키의 불꽃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그 대목에서 유채영의 <emotion>을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까요! 완전 대단하지 않아요?) 이즈음에서 우리는 서로의 교집합이 아니라 차집합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신기한 만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그건 결국 모든 게 신기하다는 뜻이다. 즉시 이 순간이 신비해진다. 이 사람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만나 무엇을 함께할지는 확실한 게 없지만, 최소한 서로의 리스트를 열어젖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만하다.

 

 

 

5

 

직접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즐거운 만큼, 타인이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정성스레 옮겨 적는 일 역시 사랑할만하다. 두 시간에 걸쳐 찬찬히 옮겨 적어보니, 이 리스트는 12개의 테마와 부록까지 포함해 247권의 도서목록402권의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들 목록을 제공하고 있었다. 10권 남짓의 중복이 있었다. 옮기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리스트를 열어준 이를 위해 가장 알맞은 보답은 이쪽의 리스트를 열어주는 것이다. 내가 연 리스트는 아직 공백으로만 가득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우리의 행복한 시간을 위해 모든 리스트는 끝없이 채워져야 한다


연필로 그대로 옮겨 적은 리스트 속 이름들을 지울 수 없는 볼펜으로 하나하나 덧칠하는 일이 기다린다. 그렇게 내가 리스트를 제대로 만드는 동안 아마 새로운 책들은 또 나오고, 어쩌면 새로운 리스트가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새로이 스케치북을 찢어 방바닥에 놓고 엎드려 새로운 책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다. 아름다움이 될 낱말들을 고르느라 행복한 고민에 빠진 아이처럼.

 

아마도 이런 지난한 순환이 끝도 없이 이어지지 않을까. 리스트는 늘 열려있으므로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은 독서의 본성이다. 끝내 물은 고이지 않겠지만, 항아리 주변에 깔린 잔뿌리들이 몰래 그 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작은 꽃대가 올라오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잠깐 꽃이 피었다 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늘 그럴 수는 없더라도, 신비롭고 충만한 순간을 가끔씩은 만나게 되지 않을까.

 

 


000. 12개의 테마로 읽는 페미니즘 도서목록 / 말과활 아카데미 / 일곱번째숲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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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9-08-2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열대의 저 인용부분은 얼마 전 읽은 손탁의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사진을 두고 이야기한 것과 비슷해서, 마치 외지에서 아는 사람 만난 양 반갑(?)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syo 2019-08-24 09:51   좋아요 1 | URL
바로 이 맛에 알라딘 하는 건가 봐요 ㅎㅎㅎ 반갑습니다 메모수첩님^-^

북다이제스터 2019-08-23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섬의 장 그르니에...전 중학교 때 엄청 좋아했는데요. 그때 이후 첨 들어보는 이름이라 넘 반갑습니다.^^ 추억도 덕분에 새록새록...^^

syo 2019-08-24 09:52   좋아요 1 | URL
장 그르니에 이야기 나올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청하판 장 그르니에 전집의 부활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2019-08-26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6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6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7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9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곳에 여름이 있었다 

 


1

 

열대야가 물러가고 있다. 복숭아도 함께 물러가겠지. 시원하고 섭섭하다. 여름을 보내는 마음이 늘 그렇다. 지옥으로 좀 꺼졌으면 싶다가도 막상 밤이 서늘해지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방 안으로 들어서면 먹먹해지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고 다투던 친구가 전학가고 나면 일상이 지나치게 조용해져 가끔 그 친구와의 시끄러웠던 시간이 그리운 것처럼, 여름의 몸통과 부대끼며 흘렸던 땀의 양만큼 떠나가는 여름의 뒤통수를 보는 눈이 아련해진다. 이제 얼음을 얼리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긴바지를 입을 것이다. 노동의 강도가 낮아진 선풍기가 한숨 돌릴 것이다. 밤은 조금씩 빨리 찾아와 한소끔씩 오래 머물다 돌아갈 것이다.

 

여름은 무엇을 하기에도 적당한 계절이 아니었다. 선선히 강변을 걷기에도, 열 권 넘는 책을 가방에 넣고 이곳저곳의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뿌리기에도, 그리고 사랑을 나누기에도. 뜨거운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뜨거워지는 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여름은 뜨거움의 과잉이어서 도리어 상성이 좋지 않았던 것일까. 사막에 숨겨놓은 폭탄처럼, 용광로 옆에 둔 선인장 화분처럼, 더위를 탓하며 하려던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마다 오히려 나는 내가 더운 인간이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런 인간은 가을과 겨울에 힘을 낸다. 이 여름이 끝나면 아마도 나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아침이면 출근이라는 것을 하고, 일터에선 집을 생각하며 하루를 버티겠지. 고단한 하루의 증인처럼 구겨진 옷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 앉아 혼자서 맥주 한두 캔을 마시며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이 책들은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를 잠깐 걱정하다가 이내 밀린 빨래를 하겠지. 달력을 보고 재활용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를 내놓는 날을 가늠하겠지.

 

삶의 2막이랄까, 후반전이랄까. 어떤 의미에서 이번 여름은 마지막 여름이겠다. 사실 모든 여름은 저마다 마지막 여름이지만. 모든 여름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여름이지만.

 

비가 많이 나린다. 여름의 끝자락이 녹아난다.


 

정말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저녁에는 보통 늘 혼자 지내베를린에 가면 물론 네게 편지할게지금은 그 일과 나에 대해서 어떤 것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구나나는 말하는 것과 달리 쓰고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하고생각해야 할 것과 달리 생각하고그러다 보면 끝을 모르는 어둠으로 한없이 빠져들게 돼.

프란츠 카프카카프카의 엽서


우리가 어떤 시점을명확히 구별되면서도 특별한 순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자신의 존재 속으로 파고드는 돌파구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어쩌면 그 기억은 틀렸을지도 모른다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나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는 통찰의 순간눈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는 어떤 급작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어쩌면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절대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페터 회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어떤 경우에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다만 그 모습을 바꿀 뿐이다현실 속에 자기 집을 짓지 못하거나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사람은 허구 속에라도 자기 집을 지어야 한다적응하라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그 체제에서 기회가 없어진 사람은 다른 체제를 찾는다희망이 없으므로 희망하는 것이다허구이야기그 이야기의 형식인 책들에 대한 탐닉.

이승우소설을 살다

 

 

 

2



새벽 두 시주방 식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 어머니가 실크 소재의 잠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대리석 바닥에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걸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어머니는 잠에서 덜 깨 반은 감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안 자니차 한 잔 마실래?"

  "고마워요." 나는 계속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머니는 쿵쾅거리면서 물 부은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비스킷을 찾느라 선반을 뒤졌다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정적을 뚫고 삑삑 소리가 났다어머니는 찻잔 두 개를 들고 내 옆에 앉았다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실비아가 안됐구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 내가 건성으로 물었다.

  "기껏 가족끼리 연휴를 즐기러 왔는데 엄마는 코빼기도 못 보잖니." 어머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식탁에 놓여 있는 신문을 뒤적거렸다.

  나는 자판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피로로 따끔거리는 눈을 비볐다엄마가 농담을 하는 건가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갑자기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위험할 정도로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실비아가 안됐잖아별 뜻은 없어." 대답하는 어머니의 눈은 여전히 신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실비아가 널 그리워하는 게 느껴지더구나."

  어머니에게 비수 꽂을 말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전투적인 마음이 싹 가셨다우리 대화가 사실은 실비아에 대한 것이 아닌 나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함께 해 주지 못한 시간들을 간접적으로 사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나도 자길 그리워한다는 걸 실비아도 알아요." 어머니는 내가 기사를 마무리할 때까지 조용히 신문을 읽으며 옆에 있어 주었다그리고 우리는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250-251)

스테파니 슈탈빨래하는 페미니즘

 

가족은 짐이라고 생각한 시간이 남들보다 길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은 아버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어머니. 그런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 불가능하게 박살났을 때쯤 겨우 말이라는 걸 하기 시작할 만큼 나와는 터울이 많이 져서 동생인 동시에 딸이었던 여동생. 그리고 태생이 고집 세고 잔정도 없으며 가족이건 결혼이건 사람을 한 공간에 묶어두는 모든 제도가 감정의 결핍이나 과잉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 것들인지 오래 보고 자란 나. 스무 해 넘게 쌓아놓은 사회적 기반을 깡그리 잃고 시골에 은거한 아버지와, 완치 판정이 내려진다는 수술 후 5년의 기간을 아직 다 못 채운 어머니와, 이제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동생을 다 버려둔 채 대학에 간답시고 혼자 서울로 올라갈 때, 솔직히 홀가분했다. 어차피 내가 돈을 벌어 줬던 것도 살림을 했던 것도 아닌데, 나 없어도 알아서 잘 굴러 가겠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새로 만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새로 만난 과목들을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시를 쓰고, 연애를 했다. 꿈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집에는 아주 가끔 전화를 했다.

 

이제 아버지는 없고, 동생은 혼자서도 잘 자라 나보다 훨씬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 가족에 대해서라면 멍청한 아이로 태어나 멍청하게 자랐으며 그 멍청함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나는, 여전히 가족이 서툴다. 특히 엄마가. 우리는 늘 서로의 대화에서 어떤 행간도 읽어내지 못한다. 엄마에게로 가는 내 말의 표면은 유난히 거칠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고 싶은 욕심과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싶은 욕심 사이에서 내가 늘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게 내 탓임을 느낀다. 배우지 않았고 배우려 하지 않아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한 사람에게만 모질다면, 거기엔 다른 이유가 없다. 태만과 성급함. 다정하기를 태만하고 성급하게 모질기. 그게 다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질 때만 기다린다면 그건 얼마나 형편없는 짓인가.

 


 

멸치 상자에서 작은 새우를 몇 개 골라낸 일로 기뻐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약한 불로 볶아내면 비린내가 가신다 거처를 뒤집을 때마다 나는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연민과 자생과 녘이라는 말을 자주 골랐다 천식약을 늘 챙겨 먹던 당신은 이가 무를 것이고 내일은 온종일 바닷바람을 맞다 방으로 돌아오겠다 잔기침이 나오려 할 때마다 목을 가다듬어 당신이 내던 기침 소리를 흉내 내보면 곧 돌아올 메아리가 반갑기도 할 것이다

박준멸치」 전문

 

시간은 흐르는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는커녕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까 봐 겁난다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일단 멈춘다면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게 뻔하니까시간은 순환한다는 말은 위로일 분이다시간은 앞으로 간다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조경란소설가의 사물

 

그녀는 언젠가 내게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어떻게 마음을 다독이며매일 그런 슬픔 곁에서 지낼 수 있느냐고. "당신은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지 않아?" 그녀가 언젠가 내게 물었다.

"아뇨." 나는 말했다. "오히려 반대예요그건 나를 행복하게 하지요."

앤드루 포터머킨

 

--- 읽은 ---

+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파니 슈탈 : 276 ~ 442

 

 

--- 읽는 ---

=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비밀을 밝히다 / 조셉 추나라 : ~ 105

= 이별의 푸가 / 김진영 : ~ 116

= 정신현상학 / 김은주 :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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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과 물질>은 재개정판 출간 기념으로
예전에 나온 책을 지난 봄에 다시 읽었
네요.

전설의 <스밀라>는 어디선가 사서 쟁여
두긴 했는데 두툼한 두께에 아직까지도
읽질 못하고 있네요. 언제나 읽게 될런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도서관에서 며칠
실컷 책이나 읽으면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syo 2019-08-22 16:02   좋아요 0 | URL
스밀라는 뜻밖에 지지부진하여 저도 100여쪽 읽다가 한달 넘게 묵혀놔서 이제 주인공 이름이 스밀라라는 것 말고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상태입니다..... 역시 전설의 스밀라로군요.

2019-08-22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2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2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2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3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8-23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스밀라 두 번 읽었지롱-

syo 2019-08-23 13:32   좋아요 0 | URL
우와 막, 스밀라 킹이시다. 스밀라 킹.
스밀라 킹.
스밀라 킹......



저런 비슷한 이름의 딸기음료수 파는 데가 생각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