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가끔 내가 공대생이었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한국어 다음으로 잘 다루는 언어가 C언어였다. 신봉하는 신은 정보통신이었고 우리 자기 다음으로 사랑하는 자기가 전자기였다. 전공 공부를 꽤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공강에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중도 가서 슈뢰딩거 방정식이나 유도하면서 시간 때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그리고 진짜 했다……. , 젊은 syo. 보고 싶다, 이 미친놈아.

 

졸업 후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열심히 쌓았던 전공 지식은 이제 0으로 처절하게 수렴했다고 봐야지.

 

저랬던 syo가 지금의 syo가 된 것은 대충 서른 줄을 넘어서부터다. 알라딘 공간에 처음 얼굴을 들이민 것은 4년 전이고, 뭔가 써대기 시작한 것은 2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 syo의 서재에 발을 들이는 이웃들은 대체로 syo가 문과일 거라고 추측한다.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봐도 그래 뵌다. 내가 이과생이라고 하기엔 빼어나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고, 이과생들도 잘 쓰는 이들은 응당 잘 쓰지만 그들은 절대 syo처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짧은 문장, 단번에 핵심을 움켜쥐는 문장을 쓰는 그들은 부사를 멸종시킨 것도 모자라 형용사까지 사냥하는 문장의 정복자들이다. syo도 수식을 좋아하고 그들도 수식을 좋아한다. 그런데 내 수식은 덕지덕지 꾸미는 수식이고 그들의 수식은 수가 들어있는 식이라서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죄 휘발되었지만, syo는 자신이 한때 공대밥을 먹었다는 게 남몰래 뿌듯하다. 전자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것을 은근슬쩍 즐기는 허영도 있다. 도서관에 가면 공학 도서들이 꽂혀 있는 서가를 반드시 방문하여 각종 OO이론, OO공학 따위의 제목이 박혀 있는 두꺼운 하드커버 책등을 에로틱한 손길로 어루만지곤 한다. 빌려올 것도 아니면서.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는 것처럼, 공대생일 때는 공대생이란 게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았었는데.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공학할 땐 공학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나는 젊고 전자 공학을 했구우나아~


지금 다시 시켜주면, 정말 재미나게 잘할 것만 같다. 공학 책을 만지는 손길이 자꾸만 야해지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걔랑 동거가 몇 년인데. 몸정이 무서운 법이라 그랬어…….

 

그렇지만 안되겠지. 소년은 쉽게 늙었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기만 하구나.




그때까지 제가 이곳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은 먼 시간을 헤아리고 생각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입을 조금 벌리고 턱을 길게 밀고 사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더 오래여도 좋다는 듯 눈빛도 제법 멀리 두고 말입니다

_ 박준, 〈메밀국수〉부분


영원한 것은 없다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은 결국 과거의 일부가 된다미래가 세련됐다거나 과거는 낡았다는 말이 아니다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뜻이다.

정은우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 마술사인 척하고 놀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기억해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당시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든다든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했다기보다는 마법으로 나 스스로를 변신시키기를 원했지. 그래서 나는 고리를 돌리는가 하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쪼그리고 앉아서 나 자신이 사라지거나 둔갑하도록 주문을 외워대곤 했어. 물론 이불을 걷어냈을 때 원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야 하지. 하지만 기억을 떠올릴 때 더 중요한 건 실제로 그곳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던 짧디짧은 한순간이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런 감정을 단순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기쁨으로 해석하고자 해. 그 미래 속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어. 매일같이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단 하루일지언정 더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난 정말이지 시간이 흘러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얼른 죽게 말이지." 클레어가 말했다.

_ 페터 한트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읽은 ---

+ 소설을 살다 / 이승우 : 95 ~ 248

+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 신승철 : 188 ~ 298

+ 크로스 사이언스 / 홍성욱 : 196 ~ 353

+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 / 이제니 : ~ 93


 

--- 읽는 ---

= 모스에서 잡스까지 / 신동흔 : ~ 143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 ~ 88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 ~ 77

=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주경철 :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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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9-07-1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웃 터뜨리며 읽었습니다. Syo님 글은 내용과는 별개로 늘 재밌어요. 심각한 글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시고. ㅎㅎㅎㅎ

syo 2019-07-14 08:51   좋아요 1 | URL
저로서는 굉장히 애처로운 글입니다만 ㅎㅎㅎㅎㅎㅎㅎ 어쨌든 웃음은 소중한 것이니까요^-^

단발머리 2019-07-14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자기 다음으로 사랑하는 자기가 전자기...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7-14 08:51   좋아요 0 | URL
요런 거 좋아하시는구나? 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7-1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보고 괜히 쫄았지 뭐에요.(이유는 알아서 짐작하세요!) 세상의 큰 틀은 간명한 수식 몇 개가 단단하게 받치는지 몰라도... 덕지덕지가 사람 사이를 잇고 울리고 웃기고 사랑 불쌍함 그리움 같은 마음을 만드는 거겠지요. 그 두 가지에 다 걸쳐 계시니 syo님은 큰 장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읽는 syo님 닮은 syo님이 닮은? 소설가가 장점은 곧 단점이라든데. 그럼 제 단점도 장점이 되려나? 바보 문돌이 인 것도?

syo 2019-07-14 13:02   좋아요 1 | URL
좋은말씀 학원 다니세요?? 요즘 읽고 있는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 칭찬폭격기라는 말이 나오던데, 누가 바로 떠오르더라구요.(누군지는 알아서 짐작하세요!)

그나저나 그 소설가가 누군지 궁금하니까 귓속말로 저한테만 살짝 알려줘봐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07-14 14:13   좋아요 0 | URL
직접 이름 말씀 하시면 쑥스러워서 그러죠? 소설은 작년에 한 권 밖에 안 읽었고 산문집 읽고 있는데 범인은, 이 사람이야! 하는 느낌이 똭- 얼른 다 읽고 리뷰 쓰면 밝혀지겠네요. syo 글을 좋아하니까 이 작가 글도 한 권 말고 더 봐야 될 거 같은 기분입니다. (다 드러내지 말고 감추는 거도 가르쳐 주네요 )
칭찬 폭격은 진짜 제가 해 본 적이 없는 거라 연습 대상이 되어 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열심히 연마해서 복직 후 제대로 써 먹어 가련한 청춘들을 구제해 보겠습니다.

syo 2019-07-15 10:00   좋아요 1 | URL
진짜 모르겠어어서요 ㅋㅋㅋㅋ 열반인님도 꽤 읽으시니까....
리뷰가 얼른 올라오기를 기다려봐야겠네요.

충분히 칭찬에 재능이 있으십니다. 가련한 청춘들이 고공비행하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19-07-15 11:47   좋아요 0 | URL
syo님 발뒤꿈치 겨우 쫓아가는 중인 저보고 꽤 라고 하시면 본인은 꽤꽤꽤꽤꽤꽤래꽤뫠꽤 라고 자화자찬 하시는 건데....그러셔도 됩니다. ㅎㅎㅎㅎ
칭찬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 받은 건 처음입니다. 썩히지 말고 앞으로는 잘 써 먹어야 겠네요.
 

 

오리의 욕심과 너구리의 섭섭함 

 

 

1

 

어물쩡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7급 시험도 어느덧 90일 남짓. 될 리 없다 생각하지만 9급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다 된 건 또 아니어서 부푼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희망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독서를 버려야 한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버려야 한다. 안 그러면 오리도 너구리도 되지 못한다. 오리너구리가 되고 만다……. 잠깐만, 오리너구리라는 게,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 것인가요, 아니면 오리이면서 너구리기도 한 것인가요? 만약 후자라면…….

 

그럴 리가.

 

공부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 했다. 근데 나한텐 그 때라는 게 없었던 것 같다. 나한텐 때가 없어, 그 때는 공부에 다 있지. 이 말장난은 마치, “치킨은 살 안 쪄, 살은 니가 쪄.” 분위긴데, 지금 이따위 쓰레기 같은 말장난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때도 없는 공부를 이틀 연짱 해댔기 때문인 것 같다. syo를 용서 하시옵소서. syo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옵니다…….

 

 

한줄 요약 : 일단 오리가 되어야겠다.

 

 

 

2

 

화요일 밤부터 눈두덩이 어쩐지 무겁더라니, 아침에 거울 속에서 다래끼를 만났다. 안녕, 다래끼새끼야. 또 만났구나. 니가 무슨 올림픽이니 월드컵이니, 왜 이렇게 쓸데없이 주기적이니? 지난 번 다래끼를 잡아 죽이러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 말씀이, 사람의 눈꺼풀 주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거기서 알게 모르게 노폐물이 배출되어야 그게 사람인 법인데, syo의 눈꺼풀 주변의 구멍은 거진 막혀 있는 상태라고.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저는 다래끼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요? , 그렇습니다- 하며 선생님은 칼로 syo의 눈두덩을 찢고 다래끼를 짜내셨다. 마음의 준비는커녕 동의도 없이! 그런 따가운 기억이 남았기에, 이번에는 다래끼새끼가 다래끼어른이 되기 전에 약물의 힘을 빌려 제거하고자 일찌감치 병원에 찾아갔다. 성공적이었다. 3일치 약을 받아왔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다시 방문하세요, 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이목구비는 아무래도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요- 라는 비음성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꼬박꼬박 안약을 넣어가며 5회분의 약을 복용한 시점에서 다래끼는 눈 녹듯 눈에서 사라졌다.

 

대신 찾아온 뜻밖의 손님이 ㅍㅍㅅㅅ였다(이것은 특정 이슈 큐레이팅 사이트의 이름도 아니고, 남정네들이 좋아하는 특정 익스트림 어덜트 스포츠(?)의 초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기후 현상에 가깝다고 하겠다. 천둥소리를 동반하는 갈색 물폭탄……).

 

뭘 잘못 먹은 것도 없다. 심지어 아프지도 않다. 다른 것 없는 순수한 ㅍㅍㅅㅅ. 대체 왜? 달라진 거라고는 안약 넣고 알약 먹은 것 밖에……. 혹시?

 

따가운 응꼬를 어루만지며(진짜 그러지는 않았어요) 욕실에서 뛰쳐나와 바로 약봉지를 낚아챘다. 겉면에 내가 삼킨 알약의 이름과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누가 봐도 아야하는 위장처럼 생긴 쪼꼬미 아이콘(?)이 그려져 있고, 아래에 쓰여 있다. 소화 장애가 있을 수 있어요. 있어요도 아니고 있을 수 있어요인데 그 확률에 덜컥 걸리다니. 이래서 늙으면 서럽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있을 수 있을 수 있어요? 있을 수 있을 수 있을 수 있어요? 그것도 아니면, 있을 수 있을 수 있을 수 ……. (닭똥 같은 눈물)

 

한줄 요약 1 : 요즘 약봉지는 참 친절하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한줄 요약 2 : 또 하루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한줄 요약 3 : 한줄 요약 2는 사실 두 줄 요약이다.

한줄 요약 4 : 한줄 요약 3까지 붙일 거면 차라리 요약이라 하질 마라.

한줄 요약 5 : 그러면서 또 한 줄을 더 썼다.

한줄 요약 6 : 대체 언제까지 이럴 텐가.

 

 

 

3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쥔 팔을 천장 쪽으로 쭉 뻗은 채 읽다가 떨어뜨려서 코끝을 얻어맞음. 눈물이 핑 돌았음. 하드한 커버와 소프트한 코끝. 주르륵 흐르는 눈물.

 


 우리들의 꿈 모리재에서

 우리는 인생이 적인 책을 두터운 밤으로 찢으며 진로에 대하여노동과 혁명에 대하여

 떠들었다단 한 줄로 씌어지는 인생을 갖고 싶다고거기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고공설 운동장 가까운 형의 자취방 막걸리 마시며 배웠던 동지가를 함께 부르다

 이런 고백,

 형그런데 나는 엄마 때문에엄마 때문에하다가 울먹거리는말하자면

 결국 사랑은 문장마다 튀어나온 돌부리 같아서 매번 넘어지기 위하여알지도 못하는

 도착지 따위에 영영 도착하지 않기 위하여,

 픽제 발로 쓰러져 쳐다보면언젠가 퐁당 던져버린 반지의 금빛 테를 가진

 달

 같은 것그저 형형 부르다

 날 밝으면,

 태양이 오렌지색 공을 치고 있는 모리재팡팡 터지면서 그런데도 아무도 모르게

 추위처럼 쉴 새 없이 공은 날아와

 멍든 산에쑥쑥 멍처럼 자라 어느 날 푸른 숲의 서러움이 꼿꼿한 서릿발 나무둥치로 일어서는

 모리재.

 이제 우리의 인생은 멀리 그러나 거기서

 우리는.

신용목모리재〉 부분

 

시인의 말은 우리의 말과 크게 다를 게 없는 말이겠으나, 그 크게 다를 것 없는 말에 시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에겐 그 말이 정확한지 적확한지 정교한지 정밀한지 판단할 자격이 끝없이 유보되는 것은 아닐까. 시가 아닌 것들에 대해 시가 지닌 치외법권이나 시인이 아닌 이들에 대해 시인이 지닌 면책특권 같은 것. 그런 것들을 마주하면 온순한 자세로 가슴을 열고 시가 내 마음에 어떤 불을 붙이는지, 그 불이 또 어떤 나를 만드는지 같은 생각에 그저 몰두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해는 종종 낮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공감은 때로 사람의 일이 아님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게 우선. 시인의 마음을 짐작하기보다 내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게 먼저. 단 한 줄로 씌어지는 인생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문장에 내가 박아 넣고 싶은 단어 역시 사랑인지, 사랑이라면 이 사랑이 그 사랑인지, 혹시 그 사랑이 문장마다 돌부리처럼 튀어나와 알지 못하는 도착지에 도착하는 일을 영영 유예시키는지, 그렇다면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것인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 입과 닮았는지, 그런 것들을 일단. 아니다, 흐르는 눈물을, 아니다, 아픈 코끝을 만져주는 것이 처음.

 

 

 

4


 

며칠 전 재희를 읽지 않았다면 대도시의 사랑법을 구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간되자마자 호평에 혹해 샀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를 아직도 읽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벌써 대충 일 년이다. 어찌 되었건 박상영 작가님의 소설은 나오는 족족 다 사 제끼는 추세. 이걸로 또 묵은지나 만드나요…….

 

 

독서실로…….

 

 

 

 

--- 읽은 ---

+ 나의 끝 거창 / 신용목 : ~ 127

+ 이코노크러시 / 조 얼 외 : 150 ~ 306

+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장 지글러 : 77 ~ 199

 

 

--- 읽는 ---

= 소설을 살다 / 이승우 : ~ 95

= 길 위의 독서 / 전성원 : ~ 80

= 크로스 사이언스 / 홍성욱 : ~ 196

= 자본가의 탄생 / 그레그 스타인메츠 : ~ 171

=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 신승철 : 82 ~ 188

= 데이비드 프리드먼 교수의 경제학 강의 / 데이비드 프리드먼 :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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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7-1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쥔 팔을 천장 쪽으로 쭉 뻗은 채 읽다가 떨어뜨려서 코끝을 얻어맞는...거 저도 해봤어요!!(자랑이다)

오리너구리는 아마도, 오리+너구리 가 아닐까요? 오리이기도 하고 너구리이기도 한. 킁킁.
아무튼, 알라딘에서 쇼님 보는 거 즐거워요! 오리든 너구리든 둘 다이든.

syo 2019-07-12 09:39   좋아요 0 | URL
오리너구리는 난생의 포유류라는 쉽지 않은 포지션이네요.
세상 쉬운 게 없다.....

어쨌든 고라파덕 같이 생겨서 귀엽다, 오리너구리.


단발머리 2019-07-12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언제까지 이럴 텐가...
다음도 막 이어서 써 주고 그럼 막 좋겠어요. 이히히... 재미지다~~~

syo 2019-07-12 09:40   좋아요 0 | URL
쓸 때는 두세 개 더 있었는데 늘어져서 지웠어요 ㅎㅎㅎ
엄마가 너 이러는 거 알고 계시니- 뭐 이런 따위였구요.

단발머리 2019-07-12 09:41   좋아요 1 | URL
그거 좋네요.
엄마가 너 이러는 거 알고 계시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다릴께요^^

2019-07-12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7-1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일! 응원드립니다. 다래끼는 여기서 좀 서둘러 빠져 달라~~

syo 2019-07-12 15: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다래끼 잡아냈습니다. 다래끼 요놈....

cyrus 2019-07-1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일이면 길면서도 한편으로는 짧게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이네요. 7급이면 9급 과목에 두 과목이 추가된 거 맞죠?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데 공부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열심히 준비해서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오길 바랍니다. ^^

syo 2019-07-12 19:23   좋아요 0 | URL
이것저것 하시는 게 많아서 정신없죠? 여름인데 건강 잘 챙겨가면서 하시기를 ㅎㅎㅎ

stella.K 2019-07-1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래끼...!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다래끼에 관한 글을 썼는데.
제가 어렸을 때 다래끼의 여왕이었거든요. 얼마나 괴롭던지.ㅠㅠㅠㅠ
지금은 안 나지만. 스요님 다 커서 이 무슨 부스럼입니까?
뭐 잡았다니 다행입니다만 다시 날 수도 있어요. 조심하시길.
스요님의 새로운 도전에 영광있으라!!!ㅋ

syo 2019-07-12 19:40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이제 정말 간간이 등장하시네요, 스텔라님.
스텔라님의 도전이 의미있게 이어지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저도 스텔라님을 응원합니다 ㅎㅎ

다래끼는 괜찮아요, 나타난다 싶을 때 초장에 때려잡으면 되니까요.

유부만두 2019-07-1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이패드로 전자책 읽다가
.... 소프트한 페이스를 ..., ㅜ ㅜ

syo 2019-07-14 01:21   좋아요 0 | URL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닌데 저는 다음에도 또 그런답니다. 이번만큼은 안 그럴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bookholic 2019-07-12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후배 중에 7급 시험을 여러번 고배를 마시디가
결국 눈을 낮춰 9급에 합격을 했어요.
그리고 이 자신감으로..
다시 7급을 도전해서 한번만에 철커덕...
syo님도 제 후배처럼 연속 철커덕 되시길....

syo 2019-07-14 01: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홀릭님!

응원해주시는만큼 열심히 해야 뭐가 되도 될 텐데,
맨날 책 읽고 노는 모습 보여드려 부끄럽습니다ㅠㅠ

 

 

사전을 만들기 위해 사전을 찢는

 

 

그러니까 그것은, 모퉁이를 돌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이다. 호숫가를 거닐다 마주치는 새들에게 저마다 이름 하나씩 붙여주려고 맞댄 두 이마다. 가장 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마주앉아 A4 이면지에 그려보는 미래의 타임라인이다. 그 시간의 교차다. 아니면 그것은, 하늘까지 치솟은 아파트 그림자 아래서 잘게 쪼개진 노을의 파편을 빗겨 맞으며 일부러 놓쳤던 버스의 행렬이거나 다음 거 타, 다음 거 탈래, 기약 없이 유예되는 아쉬움일 것이다. 혹은, 아침의 해장국 가게에서 들은 두 사람 잘 어울린다는 뜻밖의 칭찬이거나, 그 가게로 가는 길에 건너야 했던 중랑천 어느 다리 위에서 잡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했던 작고 하얀 손이었거나, 작고 초라한 용기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눈물 흘리는 모습 보이면 이 마음이 아플까봐 얼른 사라진 저 마음과, 돌아봐 눈 마주치면 저 마음 그 자리에 돌처럼 서서 한없이 눈물 흘릴까봐 끝내 돌아보지 않은 이 마음의 대칭적 협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끌어다 잡은 손에 예상치 못했던 온기 같은 것이 있어서 이 손을 잡고 있는 동안이라면 마음이 무너져도 좋지 않을까 품어 본 위태로운 욕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불가능했고 불가능해야만 했던 욕심이 먼지로 바스라지는 동안 그 안에서 발견한 앙상한 자화상, 익명의 공간에서 누리는 비익명적 기쁨의 단맛, 도무지 바닥을 알 수 없는 맹목적 애정, 돌고 도는 시간과 돌고 도는 호변, 제주도의 밤과 풍차와 전기차, 자꾸만 아름다워지는 어느 동거의 기억, 끝없이 기쁜 설거지, 서로 내가 버리겠다고 다투는 음식물 쓰레기, 자꾸만 만지고 싶은 몸, 닿지 않은 순간에도 닿아 있는 입술, , 뒤에서 안아주기, 안기기, 슈만, 쇼스타코비치, 김환기, 이우환, 눈빛, 감아도 떠도 늘 발견되는 눈빛, 눈빛, , , .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무심히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점을명확히 구별되면서도 특별한 순간에 일어난 일과 같은자신의 존재 속으로 파고드는 돌파구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어쩌면 그 기억은 틀렸을지도 모른다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나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는 통찰의 순간눈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는 어떤 급작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어쩌면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절대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페터 회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밤새도록 파고드는 밤섬머리를 들이받아

 가장자리에 아름다운 세모래밭을 만듭니다

 그러면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자욱한 철새들이

 거기에 매서운 첫 획들을 찍는데

 그중엔 아주 작은 아기 것도 섞여 있어

 파도가 다시 와선 뺨 부비곤 했답니다

이시영발자국전문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해'라는 당위나 의무가 아니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라는 경우의 수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그러한 경우의 수가 많을수록 꽉 짜인 일상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지우발성이 더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 말인즉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삶은 문제 제기를 통해 여러 가지 답을 선택하는 과정이지모든 문제가 하나의 답으로 수렴되는 과정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문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만능열쇠와 같은 하나의 정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만약 답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살아온 삶 속에 있을 겁니다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겠지요나는 계속 살아나가는 존재이고 그 답들도 계속 구성 중입니다.

신승철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당신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것이게 기적이다책을 읽고 나니 지금 다른 곳에서 잠들어 있을 사람의 구부정한 등이보고 싶다잠든 등을 사랑하는 것내 취미다.

장석주박연준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 읽은 ---

+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 이시영 : ~ 155

+ 소설보다 가을 2018 / 박상영 외 : 73 ~ 170

+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 그레이슨 페리 : 60 ~ 187

 

 

 

--- 읽는 ---

=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장 지글러 : ~ 77

= 이코노크러시 / 조 얼 외 : ~ 150

=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 신승철 : ~ 82

= IFRS 회계원리 / 최창규 외 : ~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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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7-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좋네요! 난 시간이 많으면 딴 짓하고 책읽을려면 시간이 없고 글쓸려고 모니터 앞에 앉으니 컴터 고장나고 ...결국 a/s맡겨야 할듯 ...이래저래 핑계와 변명으로 하루를 나네요 ㅋㅋㅋㅋ

syo 2019-07-09 12:12   좋아요 1 | URL
밀물이 있으면 썰물도 있고 그런 것이지요. 곧 있으면 다시 돌아와 빠바박 쓰실 거라는 걸 믿고 있습니다.

레삭매냐 2019-07-0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밀라는 예전에 절판되었다가 사람들이
마구 재출간해 달라고 해서 다시 나왔을
적에 쟁여 두기는 했는데 미처 못 읽고
있네요. 아마 두께 때문에?


syo 2019-07-09 12:13   좋아요 0 | URL
잘 안 넘어가는 것도 있습니다. 레삭매냐님처럼 단련된 소설 독자께서는 공감을 못하실 수도 있으나.....

단발머리 2019-07-0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밀라하면 김연수가 생각나요. 얼마나 근사한 책이라 칭찬을 했던지요. 항상 ‘읽어야지’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책이라고 할까요? ㅎㅎㅎㅎ

syo 2019-07-09 12:14   좋아요 0 | URL
엄청나다.... 엄청나... 이런 생각은 하고 있는데, 엄청나게 잘 안 넘어가요......

뒷북소녀 2019-07-0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보고 이러면 안되는데...<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이 책 표지가 좀... 재미없게 생겼네요. 작가는 마음에 드는데요.ㅋㅋㅋ

syo 2019-07-09 16:39   좋아요 0 | URL
저 표지 칭찬하는 사람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왜 저랬는지 모르겠어요......

2019-07-10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2 09: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발전소 옆 발전소

 

 

1

 

자의식을 확립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단 세상과의 다툼이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세상과의 작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함으로써 세상을 점차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가는 인간이 있다. 그리고 패배를 적립하면서 상처 위에 상처를 덮어 두꺼운 갑옷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기는 사람들도 지는 사람들도 영원히 지거나 영원히 이길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공히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마음속에 전쟁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계속 이기거나 계속 지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과의 첫 번째 조우에서 한 방을 먹였거나 먹은 그들은, 자기 안으로 돌아와 그날의 승리나 패배를 반복재생산하며 마음의 벽돌로 자신의 성채를 쌓는다. 그러나 마음이란 취약하고 불균형한 물질이라 내 마음으로 쌓은 성벽의 안에 거주하기 적합한 사람은 대체로 나뿐이다. 마음의 모양새나 온도에 따라 아주 가까운 몇몇 이들을 포용해 마을을 만드는 경우도 있겠으나, 그 마을도 대체로 작고 고립되어 있거나, 그 안에 거주하는 타인들의 굉장한 인내나 이해를 요구할 공산이 크다.

 

문제는 그들이 마음속 섀도우 복싱을 바깥세상과의 싸움이라고 착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실제로는 없었던 승리를 착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여긴다. 충분히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축적되면 내 안에 밀도 높은 분노의 원자력 발전소가 생긴다. 세상엔 그만한 저비용 고효율 에너지원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늘 뜨겁다. 단점이라면 안전 취약성과 붕괴 시 필연적으로 찾아올 치명적인 파국을 들 수 있겠다. 반면, 실제로는 없었던 패배를 착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의 몰가치를 알아챌까 전전긍긍한다. 초과 단련한 겸손으로 상대방의 기대를 끊임없이 낮추고, 예견된 실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핑계거리들을 미리 만들며 자기를 불구화한다. 이 경우는 폐열을 재활용하거나 쓰레기를 태워 에너지를 생산하는 열병합발전소와 비슷한 느낌이다. 저렴하고, 열효율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온도 조절에 실패해 불완전연소가 발생하면 독성이 있는 감정이 배출되어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 멍들게 하기도 한다.

 

열병합발전 시스템을 오래 운용해온 사람으로서 늘 고민이 되는 부분은, 야생의 syo에게 먹이를 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준다면 얼마나 줘야 그나마 건강한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 따위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구걸하는 말을 선명하게 하고 있진 않지만, 그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아니에요, 별 거 아니에요, 손사래를 쳐대며 겸손의 스탠스를 취하지만 그렇다고 칭찬이 기쁘지 않은 것은 또 아니다. 그건 앞에선 별 거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뒤로는 완전히 별 거 아닌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정말 허접한 글, 자기가 무식한지도 모를 만큼 무식하다는 티가 나는 글을 쓰면서 끝없이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기대를 요구하는, 어디 갖다 쓰지도 못할 생각의 찌꺼기나 계속 만드는 주제에 온 세상 다 밝힐 지혜라도 발굴한 마냥 설교하는,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 못해서 오히려 당당한 그런 사람과 나는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할 수가 있을까? 그저 기교, 지식, 눈치 같은 요소들에서 미미한 차이만 있을 뿐, 최종적으로 그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자신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한다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생김새그리고 등장으로 외부에 분명한 신호를 보낸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주변에서는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사람들은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그렇게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따라서 진실은 이렇다당신은 시도 때도 없이 주목을 받고 있지 않다.

스벤야 아이젠브라운너무 재미있어서 잠 못 드는 심리학 사전 

 

사랑을 받을 만한 마땅한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을 결정하고자 대상에 탁월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 가치가 바로 그 대상의 내부에 있는 올바름 혹은 탁월함의 정도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된다그러면 우리를 속이는 확실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우리는 바로 그렇게 소외된 대상우리가 그것을 사랑한다고 단지 그릇되게 상상하는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사랑의 원인이 그 대상이라고 철썩같이 믿으면서 우리는 그 사랑을 그것에 돌려주려고 한다이때 우리가 아는 것은그 대상이 실제로 불러일으키는 정서가 아니다우리 사랑의 진정한 원인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그것은 단지 그 대상의 현존에 수반되는 감정일 뿐이다.

발타자르 토마스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나는 여럿이면서 하나이고동시에 하나이면서 여럿이지요파도가 조각이면서 더 큰 바다의 일부분이듯이나는 이 세계를 헤매는 자이면서 헤매지 않는 자이지요저 빈 옥수숫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같이만물은 증식하면서 또 다른 부분에서는 잘라내요진짜로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장석주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2

 



혼자서 한 권 분량의 절반을 꿀꺽 삼킨 박상영 작가님. 쉬지 않고 내리 읽었고, 재미있었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거나 무슨 맘인지 짐작할 수 없는 대목도 하나 없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서 써보라고 하면 못 쓰겠다.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종류의 작품이라는 뜻이 아니라 syo가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리뷰가 그렇지만, 특히 소설 리뷰 하시는 분들껜 존경 말고 다른 걸 드릴 재간이 없다. 이웃님들의 훌륭한 리뷰를 읽으며 무릎을 탁탁 타타탁 치고, 너무 세게 쳐서 무릎이 아프고, 그 아픔 속에 소설 리뷰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새겨 넣고, 그렇다면 이다음에 나도 이런 식으로 쓰면 되겠거니 하고 돌아서고, 돌아서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으면 뭐 어떻게 써야하나 다시 깜깜해지고.....

 

 

 

3

 

자료와 통계로 무지와 편견을 조지는 책이라 소개하면 예비 독자들은 응당 딱딱하고 각진 사무실투의 문체를 예상하게 마련인데, 실제로는 이런 문장도 있다. syo는 여기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본다.

 


평일에는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지냈고토요일이 되면 아버지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장난삼아 커다란 원이나 8자 모양을 그리며 병원으로 갔다어머니는 병원 3층 발코니에 기침을 하며 서 있곤 했다아버지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아플 수 있다고 했다병원 밖에서 내가 손을 흔들면 어머니도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다어머니가 뭐라고 말했지만목소리가 너무 작아 바람 소리에 묻혀버렸다내 기억에 어머니는 늘 웃으려고 애썼다.

한스 로슬링 외팩트풀니스

 

반면, 갓 스물을 넘은 나이에 시조로 등단해 그 후 50년을 시작詩作으로 물들인 원로 시인의 시집이라 소개하면, 역시 예비 독자들은 저마다 시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감정(대개는 애증이기 십상인)을 들추어 보며 특정한 형식을 예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도 있다. 시가 걷지 못할 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한 권의 시집 속에 이런 시도 저런 시도 있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다.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 벵가지미수라타베이다투브루크살룸아즈다비야주와라 등이 반정부 시위대의 손에 넘어간 가운데 국영 텔레비전에 나와 시위대를 향해 바퀴벌레” “살찐 쥐새끼라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순교자로서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면서 내가 명령하면 모든 게 불탈 것이다라고 외쳤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24일 다시 텔레비전에 나와 내전에 준하는 이 혼란이 알카에다의 사주에 의한 것이며, “마약과 술에 전 젊은이들 탓이라며 이 모든 상황이 코미디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카다피의 유혈진압으로 최소 230명이 숨지고 1000여 명이 부상한 민주화 시위의 진원지이자 리비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벵가지 광장엔 이날 수많은 시민들이 쏟아져나와 피의 댓가로 얻은 자유에 환호했다벵가지는 이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인민위원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병원과 정부 건물엔 1969년 카다피의 혁명 전 이드리스 왕정 때 사용했던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삼색기가 내걸렸다고 한다. AK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은 곳곳에 플라스틱 폭탄로켓기관총심지어 대공화기의 공격으로 인한 인민 학살의 흔적이 남은 거리를 활보하면서 우리가 큰 싸움에서 이겼지만 아직 전정에선 이긴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시영, 〈2011년 2월 24리비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부분 

 

 

--- 읽은 ---

상호대차 강민선 : 74 ~ 174

+ 혁명 / A. 골드스톤 : 48 ~ 230

+ 팩트풀니스 / 한스 로슬링 외 : 108 ~ 385

+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회계책 / 권재희 : 105 ~ 355

 

 

--- 읽는 ---

= 소설보다 : 가을 2018 / 박상영 외 : ~ 71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데이비드 하비 : ~ 50

= 처음 읽는 레비나스 / 콜린 데이비스 : ~ 23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68 ~ 88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시영 : ~ 74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 :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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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1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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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1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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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14: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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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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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17: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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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0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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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9-07-1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팩트풀니스』저도 기대 안하고 봤는데 생각보다 좋더라고요. 리뷰 써야 하는데 미루다가 내용이 가물가물해져서 다시 읽어야 할 듯ㅡ.ㅜ 저는 무릎 칠 일보다 이마 탁~하게 되네요ㅎㅎ;

syo 2019-07-12 15:20   좋아요 0 | URL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독서였어요. 내용이야 금방 어딜 가고 없겠지만..... 그럼 담에 또 읽음 되죠 뭐 ㅎㅎㅎ
 
미루기의 천재들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찰스 다윈에서 당신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미루기의 역사
앤드루 산텔라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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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치원 다닐 즈음해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남자아이들은 대개가 공룡 덕후지만, 유독 공룡에 대해 더 잘 아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으로 한 번 스치고 중학교 때 다시 한 반에서 만났는데 여전히 두꺼운 하드커버 공룡 도감을 지참하고 다녔으며, 쉬는 시간이면 짤짤이나 판치기를 하는 아이들의 열기로 교실이 라스베이거스가 되건 말건 책상 위에 도감을 펼쳐 놓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각종 사우루스들을 어루만지곤 하는 조용한 친구였다. 아이들은 그를 사우루스 지니어스라는 4·4조 민요 율격의 라임 쩌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한 번은 그에게 나이 열다섯에 그따위로 불리는 기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싫거나 짜증나지 않느냐고. 그는 이파리 뜯어먹는 아파토사우루스라도 되는 양 특유의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만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공룡에는 꼭 사우루스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우리 시절 남자 중고등학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유형의 천재로는 삼국지 천재를 들 수 있겠다. 세상에는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대체로 삼국지 회독수를 쌓은 사람들은 언변과 지략이 축적되어 있으므로 덤벼봤자 물리치기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듯한데, 실제로 겪어보면 삼국지 빠들은 삼국지에 관한 견해충돌 앞에서는 마더빠더도 없는 독종들이라고 해석하는 쪽이 적확한 듯하다. ‘삼국지연의만 읽고 정사 삼국지를 읽지 않은 인간을 아예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보다 더 하자로 취급하는 이 성골 삼국지 천재들은, 전투 한 번 없이 일주일이 지나면 그게 더 이상한 난세 속 그 모든 크고 작은 싸움의 시간 순서, 지휘관, 참여 병력, 승패를 가른 전술 패턴을 개략적으로나마 숙지하고 있었다. 삼국지가 농구나 축구보다 더 재미있고, 인간은 자신에게 더 큰 효용을 주는 재화를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체육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적벽대전을 논했다. 특히 우리가 와룡봉추라고 불렀던 두 삼국지 천재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면서 황건적의 난을, 준비운동을 하면서 군웅할거를, 벤치에서 삼국정립을, 마침내 교실로 돌아와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진나라의 통일을 복기하며 한 시대를 마무리 짓는 그야말로 삼국지 비르투오소들이었는데, 어느 날인가는 뜻밖에 와룡은 농구를 봉추는 축구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3점 슛을 당연하고도 장쾌하게 실패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와룡을 붙들고 도대체 오늘은 왜 늘 하던 대로 봉추와 함께 난세를 종횡무진하지 않고 코트에 들어와서 민폐질이냐고 따졌더니 분한 얼굴로 대답해왔다. 아니, 봉추 저 새끼가, 장료가 장합보다 훌륭한 장수라고 하더라고. , 정말 상종 못할 새끼 아니냐. , 너야말로 정말 그런 새끼 아니냐. 와룡은 당당하게 두 손으로 드리블을 치면서 또 다른 실점을 이끌어냈지만 막상 본인은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했는지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장룐지 장합인지 하여튼 그 양반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서슬 퍼런 청룡언월도로 뎅겅 네놈의 목을 쳐주면 내가 그걸 주워서 덩크를 넣겠는데 싶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다시는 함께 삼국지를 논하지 않았다. 이후, 와룡인지 봉추인지 둘 중 한 천재가 이제 삼국지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하산을 선언한 뒤 일본 전국 시대에 대해 깊은 연구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걸 끝으로 그들과는 더 이상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2

 

어른이 되기 전까지 syo가 만난 천재란 대체로 저런 귀엽고 무해한 녀석들이었다. 지방 도시의 교육열이 맹렬하지 않은 학군에 모인 꼬꼬마들은 고만고만해서 다정했다. 먹고 먹히는 독한 등수 싸움 없이 학교생활이라는 게 끝났고, 기어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학기 시작 전에 미리 상경해 하숙집을 계약하고는, 땅 위로 달리는 지하철(!!)을 타고, 강인지 바다인지 한참 아리까리한 거대한 한강(!!)을 건너면서 촌놈은 생각했다. 이 넓고 높고 빠른 곳에는 또 어떤 소소하고 다감한 천재들이 있을까?

 

그런 천재들은 없었다. 혹은 숨었거나. 그 대신, 진짜 천재들이 있었다. 재수 없지만 감탄스럽고, 꼴 보기 싫지만 존경스럽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조별 과제는 함께 하고 싶은, 사전적 정의 그대로의 천재들이 서울엔 잔뜩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고, 줄줄 흘리고 다녔다.

 

누가 봐도 파마머린데 그게 제가 타고난 머리라 주장했던 김천재는 분신술이라도 배웠는지, 150명 정원인 동기들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벌이는 모든 술자리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그는 숙취 상태에서 한 과목 중간고사를 뚝딱 해치우고, 비어 있는 한 시간 반 동안 해장국 집에 들러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반을 마시고 돌아와 다음 과목 시험을 치렀다. 그러고도 꽤 잘 본 눈치였다. 다른 아이들은 말아먹은 중간고사를 벌충하려고 기를 쓰는 기말고사 기간에, 김천재는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서 대신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이슬을 맞고 교실에 기어들어와 엎어져 자곤 했다. 넌 공부 안하냐? syo가 물었다. 김천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런 거 안 해. 그랬는데 2학기 개강하고 확인해보니 김천재의 1학기 성적표에는 16학점 A+, 2학점 A0가 찍혀 있었다. 넌 그렇게 술 마시고 PC방 다니면서 무슨 수로 이 학점을 받았냐. syo 카트라이더가 바나나를 슬쩍 흘리면서 물었다. 책 잠깐 봤지. 김천재 카트라이더가 바나나를 회피하며 시크하게 대답했다. 게임속의 syo가 드리프트를 시도하는 동안, 내면의 syo는 주머니 속에서 쟤를 찌를 칼을 꺼낸다. , 너 공부 그런 거 안 한다며. 김천재는 지금 너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노라- 하는 말투로 반문한다. , 물리, 화학, 미적, 논리회로설계, C언어 기초, 그런 과목을 공부라고 할 수가 있어? 걔들은 그냥 소양아니냐? , 제발 장료든 장합이든 누구든 뭐든 좋으니 무덤에서 튀어나와 이놈의 목을 뎅겅 쳐 줘요. 뚜껑 열고 뇌 꺼내서 내거랑 바꾸게...... 그러나 syo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느새 나를 추월해 앞서가는 저 천재의 뒤통수에 물폭탄을 던지는 것 말고는 딱히 없었다.

 


 

3

 

무슨 일인지, 어느 순간 김천재는 학교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이천재는 수능을 다시 봐 의대생이 되고, 노천재는 스위스에 있는 어머어마한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가고, 쟤는 천재라고 부르기는 좀 빠지지 않나 싶었던 홍수재는 카이스트로 적을 옮기고, 하여간 이 좁은 물에서 더는 놀 수 없다며 세상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무수한 천재들이 있었다. 천재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자리에서 syo는 왜 나는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걸까를 고민하면서 그저 syo로 늙어만 갔다. 그러다 인생이 삐끗, 군대가 늙은 syo를 냉큼 삼키고 말았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국방부 시계는 잘도 돌고 돌아갔고, 때가 되자 군대가 이제 더 늙은 syo 너는 필요 없다 퉤, 하고 뱉어냈는데, 그렇게 사회로 돌아온 syo는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천재성도 없다는 슬픈 결론을 등에 얹고 씹어놓은 껌 같은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고, 나는 드디어 내 천재성을 찾아냈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이 천재성.

 

그렇다. syo는 천재였다.

 

미루기의 천재.

 

 

 

4

 

마감이 눈앞에 닥쳐 있을 때 내 아파트는 언제나 최고로 깨끗하고, 내 파일은 가장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고, 냉장고는 썩어가는 음식 없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반드시 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나는 바로 그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용감무쌍하게 해내겠다고 결심한다.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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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패턴은 보통 이렇다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내게 정말 간절히 필요한 건 방금 내린 커피 한 주전자라는 결론을 내린다커피를 내리려면 부엌으로 가야 한다일단 부엌에 가면 싱크대 위의 전구가 나갔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다전구를 갈려면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 가야 한다그러나 새 전구를 사러 모퉁이까지 걸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구를 파는 가게는 정말 훌륭한 베이글을 파는 가게 바로 옆에 있고커피를 내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베이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반박이 어렵다또한 전구 가게와 베이글 가게가 있는 바로 그 블록에는 선집을 훑어보며 약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서점이 있다그래서점이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가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행하고 있는 자기기만을 인식하고 있다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물론 일은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줄 유일한 방법이다하지만 때때로 일은 내가 무슨 일을 해서든 피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59-60) 

  

진짜 난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책을 썼나?

 

  내 낙관주의는 아침에 일어난 직후 거의 정점을 찍는다나는 늘 아침을 사랑해왔다아침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연민과 심술이 덜하다아침에는 모든 게 가능해 보인다아이디어로 넘쳐흐른다가능성타인을 향한 사랑아무도 나를 멈출 수 없다하지만 오후 4시쯤 되면 나 자신과 인류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단념한다그렇게 미루기는 늦은 오후에 정점을 찍는다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루를 내려놓고 모든 걸 내일로 미루는 시간그때쯤 되면 예외 없이 현재에서 빠져나와 내일 아침을 위해 산다.

  내일을 향한 믿음은 일종의 신앙이다내일까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고 희망이 부활할 것이다일을 미루는 사람에게 있어 희망은 언제나 경험을 이긴다내 생각엔 이것이야말로 꽤 적절한 신앙의 의미다. (91-92) 


이제 그만해.....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알려줄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러는 사이 마감은 다가왔고나는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텅 빈 구덩이로 떨어지며 당장 해야 하는 일에서 필사적으로 멀어져갔다갑자기 트위터 프로필 업데이트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업무처럼 보였다그동안 수집한 디지털 음원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요즘은 그런 일을 '큐레이팅'이라고 하던데.

  일을 꼭 끝마치겠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집중력을 잃어갔다일을 못 하니까 우울해졌고(여러분이 아는 그 악순환의 고리가 맞다우울하니까 더욱더 일을 할 수가 없었다업무를 회피하고 다른 자잘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느라 몇 주의 노동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나는 이 책에 넣을 인용문을 찾느라 책장을 뒤지다가 그동안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음악 평론집을 발견했다찾던 책은 전혀 아니었지만 선반에서 그 책을 꺼내 들었고얼마 지나지 않아 1980년대 뉴질랜드의 개러지팝garage-pop을 재검토하는 일에 푹 빠져들었다.

애초에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미루는 짓은 그만두고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또다시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이름하여 메타-미루기라고 부를 법한 행동인데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증발해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스스로의 태도에 다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100-101) 


내 이야기를 이만큼 잔뜩 하려면 뭐 허락이라도 미리 받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5

 

저자는 달인을 넘어, 이미 미루기의 천재다. 심지어 이 책에 실을 인터뷰를 위해 뉴올리언스까지 날아갔지만, 막상 거기에 도착하자 인터뷰를 미루고 관광을 하다 그냥 돌아오기까지 한다.

 

그런데 미루기라면 syo도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리뷰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여러 명에게 알렸다. 그와 동시에 그 리뷰에 대한 생각을 미뤘다. 설국5월에 읽었다. 5151944분에 생성한 설국.hwp 파일을 지금 열어봤는데, “국경의 긴 터널을 빠라고 쓰여 있다. 이게 syo가 두 달에 걸쳐 써 놓은설국리뷰의 전문입니다. 일주일에 한 글자 기세로 썼네요. 인정? 미루기 천재 인정? 이걸로 부족한가요?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월요일에 도서관에서 10권의 책을 빌려온다. 수요일 쯤 되면, 읽은 4권을 다른 도서관에다 반납하고 거기서 다시 10권을 빌려 온다. 그 즉시 월요일에 빌려온 남은 6권 읽기를 미룬다. 새로 빌려온 책부터. 그렇게 금요일 쯤 되면, 월요일 책 1, 수요일 책 4권 정도를 읽게 되는데, 그걸 다시 다른 도서관에 들고 가 반납한 다음 거기도 또 9권을 빌려온다. 그 즉시 남아 있는 월요일 책 5권과 수요일 책 6권 읽기를 미룬다. 역시 새 책 first. 그렇게 두 주가 지나면, 결국 월요일에 빌린 책의 반절은 읽지도 못하고 바로 반납이다. 그럼 수요일 책은 다 읽는가 하면, 금요일 책 때문에 걔들도 대충 그냥 반납이다. 그럼 금요일 책은 읽는가 하면, 천만에요, 그 다음 주 월요일 새로 들고 온 책들 때문에 걔들도 대체로 그냥 반납이죠. 그럼 새 월요일 책들의 운명은 뭐가 다를까요..... 인정? 미루기 천재, 이번에는 인정?

 

 

 

6

 

좁은 의미의 천재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유해할 때가 있다. 그들이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가끔 그들은 그냥 숨만 쉬는데도 저도 모르게 주변 범재들의 가슴을 할퀸다. 내 무딘 손이 아무리 애를 써도 가 닿지 못하는 것들을 숨 쉬듯 당연하게 움켜쥐는 이들을 볼 때 마음은 비가역적으로 멍든다. 오랜 열등감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저 인간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조차 부러워진다.

 

최초로 만난 천재들이 공룡이나 삼국지 천재였다는 것은 사실 내가 제대로 찾아먹지 못한 엄청난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촘촘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으면 뜻밖의 천재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그랬다면 날카로운 천재들을 만났을 때도 찔리거나 베이지 않았을 텐데. 지금 돌아보면 그냥 숨만 쉬어도 아름다웠던 그 좋은 시절을 열등감과 자괴감으로 오염시키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풀꽃 천재라든지, 정량 배식 천재라든지, 제설 작업과 눈사람 만들기의 천재, 알람 없이 제 시간에 일어나기의 천재, 이에 팥 끼지 않고 팥빙수 빨리 먹기의 천재 같은, 무해하고 크게 부럽지 않은 수많은 천재들이 발견되지 않은 채 조용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해독하는 사람들이다.

 

미루기의 천재란 어쩌면 한낱 말장난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무해한 천재라는 사실이 기껍다. 장난의 경계선에 아슬아슬 서서, 소소하다 못해 하찮아 보이는 특징에다가도 천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증거가 되서 뿌듯하다. 뭔가 더 좋은 사람, 한줌이나마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서 기쁘다. 진부하고 뻔한 결론이겠지만, 나는 내가 좀 좋다.

 

 

 

7

 

이런 이유로, 앞으로도 꾸준히 미루겠습니다. 서른 해 넘게 살며 하나밖에 못 찾아낸 천재성인데, 꽉 잡아야죠.


다른 사람의 미루는 습관을 얼마나 나쁘게 보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일을 미뤄야 하는 그럴듯한 이유는 언제나 찾아낼 수 있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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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7-05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제 안에 천재성(?)이 있을거라고는.;;
근데 그거 진짜 천재성 맞을까요.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syo 2019-07-05 23:4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뭐 어때요. 여기서 우리가 이게 천재성이 아니라고 한들, 앞으로 안 미룰 것도 아닌데요 ㅎㅎ

서니데이 2019-07-05 23:47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거 하나는 너무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2019-07-06 0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9-07-06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진정한 미루기의 천재는 바로 저라고 우겨보고 싶습니다.
아마 syo 님은 제게 상대도 안될거라 자부합니다. ㅎㅎ

저는 본문에 나오는 김천재 같은 인물은 절대 아니었지만,
늘 시험기간만 되면 술을 마시러 다녔고(세상에 시험 기간만큼 술 마시기 좋은 때는 없죠!),
술을 먹다가 시험을 후다닥 치루고 다시 술 마시러 가기도 했지요.
물론 성적은 학사경고를 받기도 하고, 선동렬 방어율이 얼마인지 궁금한 이들이 찾아볼만한 수준이었지만요.

그랬어도 항상 저만 보면 ˝공명아, 너는 어찌 세상을 잘 못 만나 이러고 사느냐?˝라고 안타까워 해주신 선배도 있었답니다.

덕분에 한참 옛날 생각에 빠져봅니다. 고맙습니다!

syo 2019-07-06 07:52   좋아요 0 | URL
미루기에 대해서라면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을 거라고 짐작해보았습니다.
감은빛님의 과거사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면 감은빛님은 음주천재이시기도 한 듯.....ㅎㅎㅎ
감은빛님의 페이퍼를 읽어보면, 마시고 계시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술에 대해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언급이 등장하잖아요^-^

별 거 아닌 글인데 슥 지나치지 않으시고, 늘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07-06 0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6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9-07-0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패턴은 보통 이렇다.- 로 시작되는 이 부분 인용, 저 syo님이 본인 얘기 쓰신 건 줄 알았잖아요 ㅋㅋ
미루기의 천재들 이 책, 너무 찔려서 못 읽는 사람 많을 듯요..

syo 2019-07-06 22:30   좋아요 0 | URL
보세요. 독서괭님조차 syo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계신거라구요 ㅋㅋㅋㅋㅋ

AgalmA 2019-07-12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었고 리뷰 쓰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도서관 반납 기일 왕창 밀리고 리뷰 못 쓰고 울면서(얘 때문에 다른 책도 같이 보내려고 반납을 못하고 있었는데ㅜㅜ) 왕창 대출 정지 10일 먹은... 저도 미루기 대천재에 비비적...할게요.

syo 2019-07-12 15:21   좋아요 1 | URL
미루기천재들의 천재성 간증 사례가 폭주하고 있네요. 아 아름다운 세상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7-12 16:26   좋아요 1 | URL
하하하! 아갈마님 10일~전 일주일 지나고 있습니다 ㅜㅜ내일은 꼭 반납하리라~ㅋㅋ공감 꾸욱 눌르고 갑니다 동질감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세상! 쇼님 나 지금 페이퍼 쓰다가 또 미루는 중~ㅋㅋ

카알벨루치 2019-07-12 16:27   좋아요 1 | URL
참고로 전 연체먹어도 가족카드가 있어 애들껄로 또 빌리고 연체먹고 또 빌리고 연체먹고 그래요 ㅎㅎ

syo 2019-07-12 19:28   좋아요 1 | URL
다같이 미루고 또 미룹시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고 죽는 것도 미루고 계속 미뤄서 우리 영생을 노려요....

AgalmA 2019-07-13 03:38   좋아요 1 | URL
한 달 동안 책을 못 빌려서 신간 책을 열심히 산 적도 있어요ㅋㅠ);;;
미루고 있는 거 나열하자면 눈물이 삼 만리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