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넘는 고비에선가 나대로 짠 독서계획에서 '역사'와 '동양 고전' 쪽은 40대가 되면 읽기로 한 분야다. 너무 방대한 분야이기도 해서 시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어느새 40대가 되고도 두 해가 더 지났다. 사실 재작년부터 은근슬쩍 준비는 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중국사와 일본사 책들을 조금씩 긁어모으고 있다. 어디까지나 교양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대로의 안목과 주관 같은 걸 10년쯤 후에는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부분적으론 중국과 일본의 근현대사 책을 몇 권 읽는 것이 올해의 목표이긴 하지만, 그와 병행하여 전체적인 그림도 그려보는 게 유익하면서도 필수적이다. 염두에 둔 책은 '통합적 지구사'를 표방한 신시아 브라운의 <빅히스토리>(프레시안북, 2009), 그리고 남경태의 '종횡무진 세계사' <역사>(들녘, 2008), 최근에 나온 시릴 아이돈의 <인류의 역사>(리더스북, 2010) 등이다. 모두 중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책이다(중학교 때부터 세계사를 배우니까).       

시릴 아이돈은 <찰스 다윈>의 전기 작가로도 유명하다는데, 뜻밖에도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찰스 다윈>(에코리브르, 2004).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 이어 <인류의 약사>(2009)란 책도 최근에 펴냈다. 분량도 비슷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원제는 <인류 이야기>. 곰브리의 <서양미술사>의 원제가 <미술 이야기>인 것과 비슷하다)에 대해서는 아래 소개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세계경제(10. 01. 16) 끝없는 전진? 숨겨진 퇴보!… '역사 발전론'에 경종

인류는 어떻게 진화해왔고 미래는 과연 낙관적인가. 인류가 거센 변화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과거 인류는 어떻게 걸어왔는지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이 책은 15만 인류역사에서 전개됐던 도전과 좌절, 공존과 충돌, 발전과 퇴보의 사건들을 짚어본다. 



인류의 기원, 신석기 혁명, 종교의 탄생, 제국들의 흥망성쇠, 수레바퀴부터 인터넷까지 인간의 발명, 정치사상, 기술혁명 등 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던 주요 장면을 45개로 나눠 인류의 발전사를 추적했다. 전체적인 내용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아시아 역사도 상당 부분 할애됐다. 특히 인간 생존의 물질적 토대가 된 두 가지 변화인 정주농업과 산업혁명을 깊이 다뤘다. 신석기 시대 세계 곳곳에서 등장한 정주농업은 문명의 근원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간은 특정 지역에 정착해 촌락을 이룰 때까지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에 촌락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근원이라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18세기를 전후해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신석기 혁명에 버금갈만한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산업혁명 자체가 순차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행운의 변수를 가진 힘들이 뒤섞여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였다고 파악한다. 단편적인 역사 지식을 하나의 큰 줄기로 엮어냄으로써 독자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는게 저자 시릴 아이돈의 말이다.

저자는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행복과 불행, 진보와 퇴보의 반복된 과정으로 파악하면서 중단없는 전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리라고 믿는 역사 발전론에 경종을 울린다. "역사학도라면 누구나 지난 15만년간 인류가 겪은 퇴보의 횟수에 놀라고,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거대한 힘을 지닌 자연 앞에서 미래를 운운하기 앞서 머리를 낮추는 자세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는 수많은 성공의 역사며 무한질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발상지인 아프리카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인류는 달나라에도 한 발을 내딛고, 복제 동물을 만들어내며,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바로 눈앞에서 현실로 이뤄지고 있고 그 속도는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불어닥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정치갈등, 종교갈등, 환경오염, 각종 범죄, 유행병 등 난제가 숨어있다. 저자는 다가올 미래를 낙관할 수만없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류는 그간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적지않은 실패를 경험했고, 같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군비제한이나 지구 온난화처럼 인간의 힘으로 해결가능 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강조한다. 화산폭발, 지진, 치명적 전염병과 같은 것들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은 불가항력적인 요인이었다면 산업혁명에 따른 부작용,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 두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초래된 비극,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빈부격차등은 그 인위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라는 바이런의 말을 확인하는 작업이다.(정승양기자)  

10. 01. 31.  

P.S. 책은 참고문헌 해제도 포함하고 있어서 유용한데, 개설서로서 저자가 격찬하고  있는 책 두 권이 인상적이다. 하나는 얼마전에 번역돼 나온 <지도로 보는 타임스 세계 역사>(생각의나무, 2009). 리처드 오버리 편집인데, 2004년에 나온 6판을 평하면서 아이돈은 이렇게 적었다.  

"지도와 역사 백과사전의 결합물이라 할 수 있는 탁월한 책이다. 새 책은 새 책대로 비싸기는 해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고, 헌책도 값이 싸므로 횡재를 만나는 셈이다." 

국역본의 경우 두 권의 한정특가가 18만원이니 '비싸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잠자코 '헌책'을 만나는 '횡재'를 기다려야 할까. 보통 이런 유형의 책은 도서관에서도 자료실용이어서 대출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번째 책은 J. M. 로버츠의 <펭귄판 신 세계사>(2004). 2004년에 4판이 나왔고, 2007년에 5판(증보판)이 나왔다. 분량은 1200쪽이 좀 넘는다. "현존하는 세계사 대요 중 가장 우수한 책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라는 게 아이돈의 평이다. <타임스 세계역사>도 나올 정도니까 이 책도 한국어판을 기대해봄직하다...   

P.S.2. <찰스 다윈>의 저자이기도 하니까 시릴 아이돈이 <인류의 역사>를 쓰면서 염두에 두었을 책은 <인간의 유래>일 것이다(책에서 두 차례 언급된다). 국역본 <인간의 유래>(한길사, 2006)가 나와 있지만,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식도 있어서 나는 구입을 미뤄놓고 있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바다출판사, 2009)는 제목부터 <인간의 유래>를 뒤집어놓은 것이라 나란히 읽어볼 만하다(적어도 나란히 꽂아두어야 한다). 80년대에 범양사에서 출간된 바 있는 책인데, 재미 작가 김은국 씨가 번역에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P.S.3. '인류의 역사'라고 약간 비틀어서 그렇지 '세계사'라고 하면 읽을 책들은 한정없이 늘어난다. <식민주의 흑서>(소나무, 2008)가 나왔을 때 관심을 갖게 된 마르크 페로의 <새로운 세계사>(범우사, 1994), 청소년들에게도 권장할 만한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뜨인돌, 2009), 그리고 최근에 나온 캔디스 고처 등의 <세계사 특강>(삼천리, 2010) 등도 모두 리스트에 포함시킬 만하다. 일단은 갖고 있는 책들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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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2-01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류의 역사를 어디에서부터 읽어야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아프리카역사부터 읽어보는 것이 나을듯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론적인 역사 흐름을 다시 읽고 각론적인 지역과 부분적인 역사를 분야별로 읽어내는 힘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로쟈 2010-02-01 14:55   좋아요 0 | URL
마르크 페로의 책이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요즘 '거대사'들도 보통 그렇고요...
 

러시아의 여성 작가 빅토리야 토카레바(1937- )의 중편소설 <눈사태>(지만지, 2010)가 번역돼 나왔다. 내가 알기에 토카레바의 작품으론 <러시아 여성의 눈>(경희대출판부, 2005)에 실린 단편 <늙은 개>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전부다(이 단편집에는 바실렌코와 울리츠카야, 페트루셉스카야 등의 작품이 더 실려 있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해설을 보니 현대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세태묘사'의 대표적인 작가로 소개된다. 역자는 토카레바의 중단편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한 전공자이지 않을까 싶다.   

토카레바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역 여성작가로 톨스타야, 페트루셉스카야, 울리츠카야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다. 이 중 톨스타야의 경우는 작품집이 두 권 번역돼 있고,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울리츠카야의 경우도 조만간 한두 작품이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다시 토카레바로 돌아오면, '일상적 휴머니즘' 작가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고단한 일상에 지친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랑의 작용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의 '일상적 휴머니즘'이란다. <눈사태>는 1995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흥미로운 건 2001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는 점. "불륜, 욕망, 이혼, 가족의 해체, 마약, 알코올중독 등과 인간존재의 근원적 질문인 인간의 운명, 삶, 사랑, 행복" 등을 다룬다고 한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고.  

주인공 메샤체프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유년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안정된 가정의 성실한 가장으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나 음악과 가족밖에 모르던 그에게 젊고 아름다운 률랴가 나타나면서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결국 그는 느닷없이 밀어닥친 '눈사태'와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욕망에 휩쓸려 여태까지 쌓아올린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고(가족과 재산은 물론, 심지어 그의 음악적 재능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만을 안고 홀로 남게 된다.

한국형 드라마로도 잘 어울릴 만한 스토리다. 영화로는 어떻게 옮겼을까? 한번 찾아봐야겠다... 

10. 01. 31.  

P.S. 참고로, 내가 기대하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의 책들은 독어와 영어로 다수 번역돼 있다. 영역된 작품으론 <소네치카>,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 <장례식 파티> 등이 알라딘에서도 검색된다. 외모에서부터 지성파 작가란 인상을 팍팍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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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3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동과 이변 그리고 갈등 등이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영미문화권 외로 동아남나 일본문학,스페인 문학, 프랑스와 독일 문학 등을 비롯하여 제3세계 문학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러시의 현대문학은 어떤 흐름인지를 여류작가의 작품으로 알 수 있겠군요.

로쟈 2010-02-01 14:56   좋아요 0 | URL
상대적 덜, 미흡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아쉽습니다...
 

매달 한번씩 '의무방어전'을 치르는 기분으로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른다. 벌써 2010년도 달력도 한 장을 넘기게 됐다. 설 연휴가 껴 있어 2월도 바쁘게 지나갈 듯싶은데, 아무려나 고를 책을 골라놓고 본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문학 분야의 책은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문학과지성사, 2010). 원래는 1982년에 나온 작품이지만, 소설 명작선으로 다시 나왔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장난감 도시>는 전후가 배경이다. 1955년경 전쟁이 휩쓸고 간 황폐한 도시의 변두리로 갑자기 이주해 온 한 소년의 영혼이 치러내는 고통스런 통과제의의 성격을 띤 소설이기도 하다. ‘장난감 도시’, ‘굶주린 혼’, ‘유다의 시간’ 이란 제목으로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 장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편의 장편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 책이 첫 출간 된 지 거의 삼십 년이 지나서 이달의 책으로 <장난감 도시>를 추천하는 이유는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 간 듯한 전후시대를 잊지 말자거나 돌이켜보는 것에만 그 의미가 있지 않다. 물론 <장난감 도시>는 전후시대의 궁핍과 빈곤이란 참담한 상황 앞에 선 인간들의 생리가 곡절 있게 펼쳐지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존재론적인 성찰이 깊이 있게 배어 있는 작품으로도 단연 빛이 나기 때문이다.(...) 재출간된 <장난감 도시>를 다시 읽는 동안 이 책의 출간년도인 1982년을 생각했다. 그때 대학 신입생이었던 내가 이 책을 읽고 수혈 받았던 내면의 그 많은 빛과 그늘 들이 2010년인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위력을 느꼈다.

이젠 40대 중반이 된 '82학번'들에게 특별히 더 의미가 있을 법하다. 그렇게 치면 나같은 87학번은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먼저 떠오르는 건 강석경의 <숲속의 방>(민음사, 1986)이다. 86년에 출간됐지만 내가 대학 1학년이었을 때 단연 화제작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떠오르는 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민음사, 1987). 1979년작이지만, 나는 그해 겨울인가 87년판으로 읽었다. 당시 이문열은 80년대 최대 작가로 꼽히고 있었던 단연 <사람의 아들>의 작가였다. 지나고 보면 그런 시절도 있었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고른 책은 킴 매쿼리의 <잉카 최후의 날>(옥당, 2010). 16세기 잉카 제국으로 안내하는 두툼하고 묵직한 책이다.  

인류학자이자 작가인 킴 매쿼리가 집필한 <잉카 최후의 날>은 이 수수께끼 왕조의 멸망의 날을 잉카와 스페인 양측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새롭게 조명한다. 스페인 인들이 자신들의 견지에서 기록한 잉카사의 한계를 아마존 강 유역에서 잉카 제국을 기억하고 있는 ‘요라(yora)’라는 부족을 찾아냄으로써 잉카인의 시각을 가미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저자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잉카의 어린 황제가 대규모 반란군을 이끌고 스페인 병사들과 맞서 싸웠고 그들을 거의 소탕할 뻔했었으며, 아마존 밀림 속에 비밀의 도시 빌카밤바를 세우고 36년 동안 치열한 게릴라전을 펼쳐나갔다는 새로운 사실들을 발굴해냈다. 새로운 사료 덕분에 스페인군과 잉카군의 전투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살아 꿈틀댄다.

그런 '최후의 날'을 다른 책으로 한 권 더 얹자면 스티븐 런치만 경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갈라파고스, 2004).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에 오스만투르크제국에 함락됨으써 서방 기독교 세계와 단절되고, 기독교의 도시에서 무슬림의 도시로, 유럽의 일원에서 아시아의 일원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 영국의 저명한 동로마사 연구자인 지은이는 이제껏 서로마제국 중심의 역사서술에 묻혀 '잊혀진 제국' 으로 여겨져온 동로마제국을 새롭게 조명하며, 1453년에 벌어진 투르크족과의 공방전과 그 전후의 상황들을 한편의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재현했다."고 평가받는 책이다. 원저는 1965년에 나온 것으로 돼 있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책은 프랑수아 줄리앙의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한울, 2009). 저자는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는 프랑스의 중국철학 전공자다. 중국의 '담(淡)의 미학'을 다룬 에세이 <무미예찬>(산책자, 2010)이 최근에 나왔고, 작년에 <사물의 성향>(한울, 2009)이란 책이 출간된 바 있다. 거기에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한울, 2004),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3)까지 하면 번역된 책은 다섯 권 가량. 이 정도면 드문 경우라 할 만하다.  

그리스 철학과 중국 철학을 전공한 파리 제7 대학의 줄리앙 교수는 원칙과 같은 고정관념의 유용성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동양의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무엇인가에 의존해서 세상을 본다는 것은 편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존재자의 전체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사실 사물을 보고 있는 자신의 눈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떠한 과학기술을 동원해서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자는 어떤 고정관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다. 

'중국철학'이라고 하지만 물론 저자가 주로 다루는 건 중국의 고대철학 내지 고대사상이다. 저자 소개에는 "줄리앙은 유럽 사상 및 철학이 역사 속에서 발전시켜왔던 것과는 다른 길을 극동아시아, 즉 중국의 공자나 장자 및 묵가 등과 비교함으로써 '서양 철학'을 재구성하는 데 주력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 효과로서 두 진영 간에 놓인 간극을 어떻게 하면 좁힐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돼 있다. 그래서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의 부제도 '철학의 타자'다.  

 

그런 시각을 중국 지식인들이 시각과 대비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얼른 생각나는 건 최근에 나온 이중텐 교수의 신작 <백가쟁명>(에버리치홀딩스, 2010). "중국 문화의 무형적인 가치가 2000년 전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등장한 사상가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과 이들이 벌인 논쟁을 압축하여 이르는 ‘백가쟁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역설하는 책이다." 거기에 리쩌허우의 <중국고대사상사론>(한길사, 2005)도 견주어볼 만한 책이겠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박영희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우리교육, 2009). 제목에서 이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책은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 이웃의 삶을 인권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회경제적 인권은 정치적 인권과 달리 가시적인 박해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권이란 추상적 차원에서 교과서를 통해 가르치면, 마치 헌법조문처럼 시험답안용으로 암기되기 십상이다. 오직 살아 있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얘기할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 꽂힌다. 효에 대해서 세 시간 강의를 듣는 것보다는 심청전을 애절한 판소리로 감상할 때, 효의 중요성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꽂히는 것처럼.

같은 취지의 책으로 잔혹한 진실을 폭로하는 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난장이, 2009), 그리고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 아이린 칸의 <들리지 않는 진실>(바오밥, 2009)도 함께 묶어볼 만하다(<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799374, <들리지 않는 진실>에 대해선 http://blog.aladin.co.kr/mramor/3222336 참조).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고른 경제/경영서는 <컨슈머 키드>(책보세, 2009). 제목 그대로 상업주의에 노출된 아이들, 소비에 탐닉하는 아이들의 문제점을 다룬 책인 듯하다. 그게 이젠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현대 사회에 창궐하고 있는 상업주의는 천진난만해야 할 어린이들마저 물질주의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이 책의 배경인 영국 사회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위시한 전 세계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책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세태를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상업주의의 확산을 더 이상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절박감'은 국역본 표지보다 원서의 표지가 더 잘 드러내주는 듯하다.  



찾아보니 키즈 마케팅을 비판한 책으론 수전 린의 <TV.광고.아이들>(들녘, 2006)이 이미 출간됐었다.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문제는 실천이겠다.  

심리학자인 지은이는 광고가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른에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다고 말한다. 광고와 정규 프로그램을 비교하지 못하거나,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의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믿어버리는 아이들의 경향이 그 이유이다. 책은 이러한 상업주의가 이런 아이들의 취약한 면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인생의 행복을 소비의 여부로 재단하는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주입하거나, 일탈적 행동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이 어른이 된 이후에까지 지속된다는 점.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추천한 과학서는 <20세기 수학자들의 초상>(궁리, 2009)이다. 생각해보니 수학자들의 전기를 읽은 지도 꽤 오래됐다. 아마도 대학원시절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어서 뒤적거렸던 게 마지막인 듯하다. 괴델의 전기도 몇 권 갖고 있었지만, 한권만 읽고 말았다. 다시금 손에 들 수 있을까? 일단 <20세기 수학자들의 초상>은 어떤 책인가? 

이 책에서는 20세기를 빛나게 하였던 선도 수학자 20명의 이야기를, 그들의 공적을, 그들의 왜 20세기를 선도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창의적 경험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을 동원한 소설 형식이라 가상적인 것도 있지만 각각에 대한 중요 업적과 그들에 삶에서의 특별하였던 점등을 이야기 하려는 노력이 있다. 수학은 상상력이며 수학자는 이를 명료하고 분명하게 이해하여 표현하려는 노력자이다. 창의를 가능하게 하는 ‘변환’ 경험을 이 책에서 20세기를 선도한 최고의 수학자들의 이야기와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보탤 만한 책은 핼 핼먼의 <수학자 대 수학자>(경문사, 2009). 수학자들의 불화와 다툼, 그리고 반목을 다룬 책이라 하니 '사극'만큼의 재미를 줄 만하다. 거기에 비하면 <푸앵카레가 묻고 페렐만이 답하다>(도설, 2009)는 긍정적인 사례. 이미 페렐만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 있는데, 좀더 자세히 음미하고픈 독자라면 읽어볼 만하겠다.  

1904년 앙리 푸앵카레가 처음 제기한 이래 100년동안 수많은 수학자가 풀지 못했던 '푸앵카레 추측'에 얽힌 이야기. 100년이 지난 2005년, 기이한 러시아의 은둔 수학자가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해내어 100만 달러짜리 밀레니엄 수학상을 받을 권리를 획득했다. 이 책은 어떻게 페렐만이 선배 수학자들의 어깨 위에 서서 공간의 모양에 관한 수수께끼를 해결했는지 설명하고, 1세기에 걸친 수학계의 역사와 수학자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집착과 열정을 서술한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제리미 시프먼의 <모차르트, 그 삶과 음악>(포토넷, 2010)이다. 이미 여러 종이 소개된 모차르트 전기에 더 추가할 것이 있나 싶은데, 사정을 보니 뭔가 있다.  

모차르트의 삶과 음악은 늘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가 가득하다. 이러한 이야기 거리가 두 개의 CD에 담긴 모차르트의 음악과 함께 하나의 책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봄을 기다리며 음악도 듣고 18세기 주변을 산책하듯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내가 어느덧 유럽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핵심은 '두 장의 CD'!  280쪽짜리 책이 2만원이란 책값도 CD를 고려하면 말이 된다. 그러니까 '음악을 듣기 위해 알아둘 만한 전기'가 컨셉이겠다. 거기에 더해서 읽어볼 만한 책은 인지심리학자이면서 레코드 프로듀서라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 대니얼 레비틴의 책 두 권이다. <뇌의 왈츠>(마티, 2008)과 <호모 무지쿠스>(마티, 2009). 중간에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알마, 2008)까지 얹어놓으면,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3부작쯤 된다. 책상에 세 권이 나란히 올려져 있는데, 표지들만 봐도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윤성근의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 2009)이다. 연초에 저자 인터뷰 기사를 포스팅하려고 하다가 흐지부지됐는데, 이런 기회에라도 소개할 수 있어서 반갑다. 저자는 응암동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젊은 주인장. 뭔가 사연이 없을 수 없다.   

한 젊은이가 있다. 서울 정릉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 젊은이는 초등학교 때 벌써 종로서적의 위력을 알았다. 걸어서 2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종로서적에 있는 수많은 책을 마음대로 읽기 위해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젊은이가 커서 잘 나가는 직장에 취직했다. 10년 이상 안정적이고 돈도 많이 받는 회사를 다녔다. 그러던 그 젊은이는 어느 날 우연히 책 하나를 집어 든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다. 혁명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필’을 받은 그 젊은이는 곧바로 회사에 사표를 낸다. 2002년 무렵의 일이다. 남들은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던 그 때 혁명이라니,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참 철없는 젊은이다. 그 젊은이는 출판사에 취직해 2년 정도 다녔고 책 만들기의 진부함에 진력이 난 그는 헌책방에서 다시 2~3년을 보낸다. 알고 보니 책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2007년 봄 헌책방을 그만둔 그는 직접 헌책방을 냈다. 자기가 읽은 책, 자기가 권하고 싶은 책만 파는 그런 헌책방이었다.

책은 그 헌책방 이야기이면서 헌책방 주인장의 독서록이다. 책의 부제는 '어느 지하생활자의 행복한 책일기'. 여기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도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로 엮어놓는 명분이 생긴다. 사실 레닌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서로 안 어울리는 궁합이긴 하지만...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고른 실용서는 오츠 슈이치의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21세기북스, 2009).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말하는'이 제목 앞에 붙는다. 그럼 대략 견적이 나온다.   

저자 오츠 슈이치는 말기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마지막을 배웅하는 의사다. 그는 호스피스 전문의답게 넓은 귀를 가졌다. 육신에 이어 정신의 고통을 겪는 환자들 앞에 같은 한 명의 인간으로 마주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가 만난 인물은 1000여 명에 이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고 싶었던 첫 번째 후회부터 신의 가르침을 알았더라면, 하는 마지막 스물다섯 번째 후회까지 인간 내면의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있다. 사실 이런 유형의 책이 신선한 것은 아니다. 내용은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한번씩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 일상에서 늘 만나고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실천에 인색했던 항목들이다. 그러나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는 임상경험에서 건져 올린 사례들을 담아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

요즘 부쩍 굿긴소식이 많은 탓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책. 죽음과 죽어감을 다룬 책은 예전에 한번 다룬 듯싶어서 이번엔 '죽기 전에 꼭' 시리즈를 검색해봤다.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역사 1001 Days>(마로니에북스, 2009) 등은 많이 보던 타이틀인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여행 1001>(마로니에북스, 2010)은 '기획작품'이다. 여행을 즐기진 않더라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면 좋겠다.    

      

10. 하워드 진 

아동서 대신에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의 주제는 '하워드 진'이다. 이유야 알다시피 며칠 전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언젠가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은 적은 있지만,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골라놓은 기억은 없다. 대표작인 <미국 민중사>(이후)는 열외로 하고 세 권을 고른다. <하워드 진, 역사의 힘>(예담, 2009)는 가장 최근에 나온 에세이집이고,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는 유명한 그의 자서전, 그리고 <오만한 제국>(당대, 2001)은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은 누구인가'를 알게해준 책이다. 참고로, 하워드 진의 사진 가운데 가장 정겨운 것은 우리 인디고 아이들이 찾아가서 같이 찍은 사진이다. 한번 더 옮겨놓는다.



10. 01. 30. 

 

P.S. 2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역시나 며칠전에 작가가 세상을 떠났기에 '추모특집'으로 고른 것이다.   

작년 가을에 작품 읽기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때 덜 읽은 자료들을 좀 챙겨놓아야겠다. 언젠가 본격적인 작품론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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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2-0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둔 작가 '샐린저'도 세상을 떠났군요. 작년 가을에 로쟈님 덕분에 읽었는데요. 자신이 감명깊게 읽은 책의 저자(존경한)가 세상을 떠나면 믿기지 않군요.

로쟈 2010-02-01 14:57   좋아요 0 | URL
사실 하도 오래 절필했기 때문에, 작가로선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그람 2010-02-0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더러움" ?

이문열과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이름 보면서
갑자기 "더러움"이 떠오르네요.
안티조선운동과 함께.

더러움을 넘어서 "추악함"이 더 어울리나 ?

로쟈 2010-02-01 14:57   좋아요 0 | URL
사람은 그래서 오래 두고 봐야 합니다...
 

이번주 역사서 가운데 눈길을 끄는 책은 나가미테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탄생>(푸른역사, 2010). 관심분야의 책이라 바로 입수했는데(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저자가 도서관 사서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구체적으론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도서실'에 근무하는 걸로 돼 있고, 이미 <잡지와 독자의 근대>(1997)란 책으로 일본출판학회상을, <모던도시의 독서 공간>(2001)이란 책으로 일본도서관정보학회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독서국민의 탄생>(2004)까지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의 경우와 비교도 해봄직한, 그런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다. 소개기사를 챙겨놓는다.   

국민일보(10. 01. 30) 100년전 일본엔 ‘책 읽는 국민’이 있었다… ‘독서국민의 탄생’ 

책에는 인류의 지혜와 각종 정보가 담겨 있다. 지식을 축적하고 전파하는 주요 수단이다. 따라서 책을 많이 읽을수록 그만큼 무형의 자산을 많이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국가적으로도 독서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독서는 다른 오락거리에 밀려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08년 국민 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3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대표적인 독서강국으로 꼽힌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승객들이 무언가를 읽고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초등학생의 연간 도서관 대출 건수가 1인 평균 30권이 넘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어려서부터 독서문화가 형성돼 있다. 이는 일본이 경제는 물론 문화에서도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됐다. 일본의 독서문화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일본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독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도서실에서 근무하는 나가미네 시게토시가 쓴 ‘독서국민의 탄생’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독서국민’을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습관을 가진 국민으로 정의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대 초기에 형성된 독서 문화에서 독서국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활자미디어의 전국 유통,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 다양한 독서 장치의 보급 등이 어우러지면서 독서문화는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19세기 말 대량수송수단인 철도의 출현과 신문 판매업자나 서적·잡지 중개업자의 등장은 활자미디어의 전국 유통망을 구축했고, 이것이 독서의 대중화를 이끄는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철도망의 확대로 철도 여행자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차내 독자’라는 근대의 새로운 독자 유형과 여행 독서 시장이 생겨난 것도 특징이다. 일본의 철도 승객은 1880년대 수백만명에서 1907년 1억43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했다. 독서는 철도 여행의 무료함을 해소하는 수단이어서 승객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다. 당시 차내에서 독서하는 모습은 문명국민의 상징이었다.

일본의 독서국민 탄생에는 정부의 역할도 컸다. 정부는 신문종람소와 도서관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독서국민을 이끌었다. 신문종람소는 역 구내나 주변을 중심으로 여러 신문이나 잡지를 모아 무료나 혹은 싸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독서시설로 1880∼90년대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설치된다. 또 호텔이나 여관, 기차 대합실, 열차 안 등 곳곳에 독서공간을 마련해 독서 환경을 조성했다.

도서관의 활성화는 독서국민 탄생의 기폭제였다. 일본 정부는 전 국민의 의식 함양을 위해 일찍부터 지방에 작은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 결과 일본의 도서관은 1912년에 540개나 됐고, 총장서도 275만권에 달했다. 도서관은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나 26년에는 4000개에 달했다.

1880년대 도서관 이용자들은 주로 도시의 중산층 지식인과 그들의 자제인 학생들이었으나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도시의 하층계급 뿐 아니라 지방 군 지역 주민들로까지 확대됐다. 도서관 이용자는 도서관에서의 독서체험을 통해 근대적인 독서 습관을 몸에 익힌 독자로 성장해 독서국민의 중핵을 형성하게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912년 도서관 이용자는 전국적으로 연간 395만명에 달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독서국민을 형성하려면 읽고 쓰는 능력과 독서습관의 보급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서 습관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읽어야 할 독서 재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을 독서국민 형성의 둘째 요건으로 꼽았다. 일본에서는 20세기로 넘어가는 그 즈음 이 두 가지 요건이 적절히 갖춰지면서 독서 습관이 몸에 밴 국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독서는 국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독서가 개인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세기 전 독서국민의 시대를 연 일본의 사례는 문화강국을 꿈꾸는 우리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라동철 기자) 

10. 01. 30. 

P.S. 기사에도 일부 인용돼 있는데,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적은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이렇다(미리보기를 참고할 수 있다).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국민 의식의 형성에 '독서'가 담당한 역할의 중요성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전국 방방곡곡에 유통되는 신문이나 잡지, 서적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가 형성되지 않았을 경우 국민국가의 형성은 불가능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온 '식자율'의 문제, 즉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활자미디어를 읽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독서 습관'의 문제, 즉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독서습관을 가진 독자층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국민의 탄생'입니다. <독서국민의 탄생>에선는 이 문제를 활자미디어의 유통,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 독서 장치의 보급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다뤘습니다.(5쪽) 

요점은 독서국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국민국가 형성도 불가능하다는 것. 중앙집권국가의 기반은 활자미디어의 중앙 집중체제였다는 주장이다. 일찍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한데(저자가 머리말에서 가장 먼저 거명하고 있는 것도 앤더슨이다), 저자는 이를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던가란 사례를 통해 실증해보인다.    

한편,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한국에서도 동일한 관점의 연구가 이뤄진다면"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으리란 바람을 피력한다. 이미 천정환 교수의 <근대의 책읽기>(푸른역사, 2003)가 나와있다는 걸 알았다면 반가워했을 법하다. 비록 <근대의 책읽기>는 '독서국민의 탄생'이 아니라 '대중 독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국민독자의 탄생>과 비교하자면, '독서 장치의 보급'이란 면도 자세히 다루어지진 않았다. 나가미네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읽었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디에서' 읽었느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의 책읽기>와 더 닮은 책은 마에다 아이의 <일본 근대 독자의 성립>(이룸, 2003)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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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2010-01-31 20:02   좋아요 0 | URL
예전 이승연씨 사건관련한 글을 잠깐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역사라는 것이 왜곡되는 순간이 언제일까요..해석가들의 눈이 어떤 사건을 분석하기는 이미 늦은 시간일까요..기계로 사람이 움직여지고 의사가 왜곡되고 사람의 입술이 이미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말을 해석하고 사건을 해석하기는 이미 늦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건가요..어떤 이의 일을 해석하고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후분석되고 사후진행되는 진실규명이 어떤 죽음을 막는다면 그래도 나은 일일까요..어떤 이들의 행위가 어떤 의도로 왜곡되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기술이 이제 문자나 책이 아니라 음성이 되어야 할 지경이고 그것보다 더하게 음성이전에 어떤 전파 기술이라면 ..역시나 역사는 없는 자에게는 가혹하네요. 기술을 쥔 권력의 입술을 막아설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삽니다. 어떤 정부가 거짓을 감아 두고 목숨을 연명하려고 한다면 역사는 유죄를 선택하겠죠 그때가 언제가 되던...그들은 단죄되어야 하고 단죄될겁니다..
가장 빠른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된다..이것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역사적 해석이겠죠..언젠가 하신 말씀이던가요??
오늘 장의차를 봤습니다. 서동시장 우수학원이란 간판 아래서요. 이말 언젠가 한것 같은데..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들었습니다. 그 기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흐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배후를 밝히고 그들을 단죄해야 겠죠..
무고한 목숨이 갔습니다..
알고 계신가요??그들의 이름을??기억하셔야 할텐데요...

어떤 배우의 죽음을 목도했고 그것은 살해였습니다. 그들의 목숨과 연결된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총맞았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압니다. 가상의 총이라더군요.
가상의 죽음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누군가 총맞았다는 말을 조심해서 들으셔야 할테입니다. 가짜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정부가 있습니다..
노라는 정부의 수장이 갔습니다.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역사라는 이름이 어떤때에 누군가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도 그런 반복이 진행된다면 반복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증오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행위자라는 ...주체라는 이름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그것은가해자의 이름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곰곰 2010-01-31 20:04   좋아요 0 | URL
역사와 전쟁을 치르는 한정부가 있습니다. 그 정부의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이름 뒤에 어떤 누군가의 이름이 더 올려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이..라는 이름을 쓰던 한 사내가 그의 운명을 다하여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그는 역사의 이름으로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목숨을 쥔 자들은 자유롭습니다...역사가 그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이제 역사가 그들을 데려갈 시간입니다.

펠릭스 2010-01-31 22:40   좋아요 0 | URL
전통적으로 종이에 씌여진 글자를 읽는 독서에서 음성으로 읽은 녹음도서를 편안했습니다. 최근 애플의 아이팟용 전자도서도 종이로된 책을 읽은 느낌같습니다. 플레쉬리뷰로 책 미래보기 역시 글씨크기를 확대할 수 있어 읽기 좋았습니다. 독서 인구가 선진국보다 낮다고 탓하기 보다는 독서할 수 있는 환경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2-01 14:58   좋아요 0 | URL
독서인구도 그렇고 독서열도 낮은 편이죠. 요즘은 대학생보다 직장인들이 책을 더 읽는다고도 하고요...

펠릭스 2010-02-07 05:5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의 청소년기의 강요된 독서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찜질방이란 곳에 다녀왔다. 수건으로 양머리를 하진 않았지만 먹고 자다 때밀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었다. 방학이 끝나가는 아이의 소원이 '온가족 찜질방 가기'여서 결단(?)을 내린 것인데, 이런 정도의 '소원'만 계속 가져주면 아빠로선 소원이 없겠다. 눈을 붙이기 전에 습관처럼 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니 대부분은 안면을 튼 책이다. 몇 권의 예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조철수 교수의<예수 평전>(김영사, 2010). 성서 해석에 신기원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성서학계에 이미 알려진 견해인지 저자의 독자적인 주장인지 궁금하다), 그냥 번역학적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한겨레의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1810.html). 책은 저명한 종교학자 크로산의 <하나님과 제국>(포이에마, 2010)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승리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로마의 제국신학과 '정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제국을 꿈꾸는 미국과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책"으로 소개된다.
 

  

한겨레(10. 01. 30)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신약성서>의 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 믿기 어려운 기적의 진실은 무엇일까?

1976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고대 셈어,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을 공부하고 수메르어로 학위를 받은 뒤 10여년간 히브리대에서 가르쳤던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 조철수(60) 교수의 <예수 평전>은 눈이 번쩍 뜨이는 설명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먼저 마르코 복음서 6장의 이 기적 이야기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동료들끼리 풀밭에 앉게 했다. 백 명의 동료지간의 백부장과 오십 명의 동료지간의 오십부장이 끼리끼리 자리잡았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축복하고 빵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며 그들 앞에 나누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는 이 가운데 ‘백명의~’ 부분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마태오나 루가 등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예 없다. 이 표현의 차이에 주목하라.   



조 교수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 내용은 자신이 따로 번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게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원본 자체가 번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복음서나 사도들 편지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고 적어도 그 수십년 뒤에야 그리스어 본들이 만들어졌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리스어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다. 따라서 아람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자신이 직접 번역한 조 교수의 인용문이 당시 이스라엘(유대)의 언어행위 실상과 사회상에 더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조 교수는 1947년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 등의 옛 전적들을 성서와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예수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서 ‘오천 명’이라 옮긴 단어는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아메쉐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쉐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의 바꿔 읽기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종종 활용됐다. 따라서 오천을 오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 명씩 오십 명씩’은 백부장, 오십부장으로 옮길 수 있다.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다섯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천부장들은 당시 예수가 한때 소속돼 있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에서 재판관들과 사제장들, 부족장 등과 함께 그 조직 주요 구성원이었다. 

사해 문헌 중의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천명의 장과 백 명, 오십 명, 십 명의 지도자와 재판관” 등이 재판 청문회에 참석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나중에 에세네 공동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떠나간 예수의 공동체 역시 성찬의례를 통해 다섯 천부장을 뽑고 그들이 열두 제자들 모임에 합류하는 좀더 발전된 상부조직을 갖게 된다. 열두 광주리의 12라는 숫자도 이스라엘 12지파, 12제자처럼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고,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러 각지에 파견한 72제자의 72라는 숫자도 당시 천문관념에 따라 지파당 6명씩 배치한 결과로 읽힌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외딴곳 그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제자들 질문이나, 다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복음서들 얘기는 오역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날 성찬의례 참석자, 빵과 물고기를 단합과 사명과 정체성 확인 차원의 의례행위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의 소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마르코 8장의 일곱개 빵으로 사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일곱명의 원로들 모임에 합세할 네명의 천부장을 선출한 것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루가 6장의 “가난한 자는 복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은 마태오 5장에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으로 돼 있다.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다. 그런데 레브는 특정 맥락에서 모세 오경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토라 공부 때문에 가난한 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아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게 조 교수 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로 옮기는 건 의역이란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들의 갖가지 치유기적의 의미, 두드리면 무엇이 열린다는 것인지,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이 첫째 된다는 게 뭔지, 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모두 같은 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유다는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입 맞췄는지 등 성서 속의 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헌 근거들을 토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사해문헌 중의 <하박국서 해석>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린 사제가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떠났으며 재산 때문에 법규들을 배반하고 반동폭력배와 백성들의 재산을 훔쳐간 ‘악한 사제’로 로마 법정에 선동 혐의로 넘겨져 사형당한다. 조 교수는 그 사나이가 바로 예수라고 본다. 그를 악한으로 묘사한 하박국서 해석은 예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본 이 해석서의 작성 주체인 에세네파의 시선이다.

바리새, 사두개는 물론이고 한때 자신이 그 사제요 교사로 복무했던 에세네파의 한계까지 과감하게 뛰어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900쪽의 두툼한 <예수 평전>은 당대의 문헌자료들과 문화적 배경설명을 토대로 그 생애를 치밀하게 재해석한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1. 30.  

P.S. 찾아보니 저자는 이미 <유대교와 예수>(길, 2002),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2003),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김영사, 2003), <랍비들이 풀어 쓴 창세신화>(서해문집, 2008) 등 다수의 저술과 주해서를 펴낸 바 있다. <유대교와 예수>는 <예수 평전> 입문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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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30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기에 그 글자 하나 하나가 틀림이 없으며, 역사와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서읽기방식이 축자 영감설입니다.특히 미국을 근간으로 한 청교도 계통에서 이런 주장을 하며,미국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내 기독교 교단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지요.축자 영감설은 주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이 있는데“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로쟈님 글처럼 성경은 필사에 필사를 거듭한 책이라,그러다 보니 필사하다 오류가 생길수도 있고 필사자의 생각이 들어갈수 있는데다 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영어등 유럽어로 번역되면서 원래 의미와 달라진 부분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선지 우리 나라 성경도 원래 희브리나 그리스 성경과 비교해보면 틀린 부분이 다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부정확한 부분을 가지고 제 맘대로 해석하다보니 이단이다 뭐다가 많이 나온다고 하네요.

로쟈 2010-01-30 10:10   좋아요 0 | URL
축자 영감설은 전혀 영감을 주지 않는데, 성서 번역 문제는 흥미롭습니다. 예전부터 '젊은 여자'를 '처녀'로 오역하는 바람에 '처녀수태설'이 잉태됐다는 얘기는 있었죠...

2010-01-30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1-3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동 기자의 책소개는 늘 신뢰성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 들고 자신의 편견에 따라 마음대로 왜곡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평전>을 직접 읽어 봐야 알겠지만, 이 기사의 내용도 역시 한 기자 마음대로 곡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한 기자는 <성경>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인의 경전이고 신약은 기독교인의 경전인데, 기독교인은 가능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정통' 유대인은 신약을 부정합니다. 한기자는 사해문서에 마치 신약성경도 포함되어 있는 양 기사를 쓰고 있는 데, 사해문서는 주로 구약과 유대인의 종교 문헌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해문서에서 예수의 행적을 구성한다는 부분 자체에 의심이 갑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신약은 애초에 희랍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독교는 헬레니즘 세계에 전파된 종교이기 때문에 바울 서신과 복음서들은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의 공용어였던 희랍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기자는 페시타(시리아아, 아람어) 판 신약성서도 사해문서에 포함된 것인양 혼돈을 주는 방식으로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페시타 판본은 사해문서와는 전승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텍스트 역시 희랍어 원본을 번역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학자들이 원래 시리아어로 기록된 단편을 참고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는 있으나 '시리아어로 기록된 원래의 단편' 자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페시타 본으로 신약성서를 재해석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소수의 의견을 따른 것일 것입니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이런 기본적인 사항들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물론 책을 봐야 알겠지만 책의 두께로 보아 아마 이러한 부분도 섬세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전 기자의 책 내용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로쟈 2010-02-01 15:01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전체적인 건 책을 봐야겠어요. 한데, 워낙 두꺼워서...

펠릭스 2010-01-3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성경)학자들의(?) 몫이군요. 믿음을 갖는다는 것과 성경 문구의 신뢰성은 다를듯 해요. 서품을 받은 신부들 중에는 유럽(독일 등)으로 신학공부를 떠나죠(보통 7~8년정도). 신학 공부가 끝나 한국에 입국하면 3년정도 일반 본당(성당)에서 주임(보좌)신부로 근무하다, 대개는 카톡릭신학교 교수로 발령나 가르칩니다. 저도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해 궁금했죠. 문제는 요술처럼 갑자기 불어나 다 먹었다는 것은 아니고요.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음식을 이웃(옆사람)을 위해 내놓아 서로 배불리 나누어 먹었다로 설교하던데요. 하지만 신학적인 논리와 사실성의 입장에서 근거는 번역의 오류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깊이 신학공부하신 신부님 외 전문가에게 알아 보고 싶습니다. 기부금 명칭중에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도 있습니다.

로쟈 2010-02-01 15:00   좋아요 0 | URL
성서학자들이 그토록 오래 과문했다는 건 잘 믿기지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3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은 빼고 마태 마가 누가만 가리키는데 한승동 씨가 잘못 알고 있군요.

로쟈 2010-02-01 14:5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단비스 2010-02-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것만큼 힘들다는 표현도
사실은 낙타와 밧줄이라는 단어가 유사해서 오역이 된거라고 하던데,
그러한 부분들이 여러군데 있나보네요...

로쟈 2010-02-04 11:35   좋아요 0 | URL
웃지 못할 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