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님께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 인용을 놓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접했다. '전업 블로거'가 아닌 나로서는 모든 이견에 답하고 해명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보충 설명을 해본다. 내가 이해하는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해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사례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만 환원하게 되면 사안은 단순하다.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쓴다. 이것은 부도덕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할까?"가 싱어의 문제의식이고, 그는 적정 수준의 이타심을 발휘함으로써, 구체적으론 기부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간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의의 많은 부분은 그 '적정 수준'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지에 할애된다.   

대략 그 정도의 주장이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바지가 젖고 지각하는 것 정도의 '비용'으로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윤리적 행위란 게 '참 쉽죠'라고 말할 수 있다(불매운동도 바지가 젖는 걸 감수하는 것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연못에 빠진 아이 구하기'가 아니라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아이 구하기'나 '철로에 떨어진 아이 구하기'라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실 테지만, 양의 다소나 일의 경중에 대한 판단은 기본 판단이다). 이런 경우엔 계상되는 '비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나 문제적인 것은 그러한 선택이 제로섬 상황에서의 선택일 경우다(이 글 또한 다른 원고를 써야 할 시간을 빚내서 쓰고 있다).  

싱어는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철학과현실사, 2008)에서 윤리적 선택/결정의 표준적 모델로서 '활차의 문제'를 소개한다. 그의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에 참고해볼 만하다. '활차의 문제'의 표준형과 그 변형은 각각 이렇다.  

<표준형> 당신이 활차를 발견하였을 때 활차는 선로를 따라 다섯 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당신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철도 선로 옆에 서 있다. 만약 선로를 따라 활차가 계속 돌진할 경우 다섯 명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러한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활차가 옆 선로로 이동하도록 전철기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경우 활차는 오직 한 명의 목숨만을 앗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변형> 활차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선로 근처에 서 있지 않고 선로 위의 인도교에 서 있다. 당신은 활차를 다른 선로로 이동시키지 못한다. 당신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에서 활차 앞으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활차를 멈추기에는 너무 체중이 가벼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몸무게가 매우 많이 나가는 사람이다. 활차가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몸무게 많이 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활차 앞으로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린다면 그는 죽게 되겠지만 다른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소 억지스런 상황 설정이지만,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사례라고 하니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답해보시길.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가지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판단한다고 한다. 표준형에서는 비록 한 사람을 죽게 만들더라도 전철기를 움직여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 반면에, 변형에서는 비록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죽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요약하면 우리는 '선로상에서 전철기를 움직여서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관념'과 '우리의 손으로 누군가를 밀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관념'에 대해 서로  다른 정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뇌 활동 부위에 대한 fMRI 영상 촬영을 통해서도 확증되었다. 이 반응 차이는 어째서 생겨났을까? 싱어의 설명은 이렇다.     

인도교의 경우 우리가 진화하고 있던 무한히 긴 시간 동안 있었을 법한 유형의 상황이다. 반면, 표준적인 활차의 경우는 오직 지난 세기 혹은 두 세기 동안에나 가능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하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물려받은 형태의 정서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오직 200년 전에야 가능했던 방식보다는 100만년 전에 가능했던 방식으로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도덕적인 중요성을 부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할 것이다. 

싱어의 공리주의적 입장은 단호하게 한 사람의 목숨보다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본다(이러한 윤리이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은 나치 수용소에서 두 아이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소피의 선택'이다).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계산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 그의 실천윤리학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다(윤리적 판단의 계산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윤리의 실천은 인간의 진화적 본성 혹은 도덕적 직관과 때로 충돌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이 때문에 낙태와 안락사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그의 강연이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모든 사람을 돕는 게 되는 상황'(넌제로섬)인지,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선택적 상황'(제로섬)인지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싱어를 참조하자면, 이러한 판단에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알라딘 불매운동이 단순하게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면 사안은 단순하다. 김종호씨 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은 그런 관점에서 가능할 수 있다. 알라딘 대신에 교보나 예스에서, 혹은 동네서점에서 구입하는 것, 혹은 아예 책을 구입하지 않는 것을 '바지 젖는 것'을 감수하는 선의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의 문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부당해고가 불법행위라면 당사자가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떤 법적 구제/ 보호가 가능한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구두로 알라딘의 인사담당자가 '장기근무'를 약속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 또한 얼마만큼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 당사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항의했기 때문에 대부분 묻혀진 다른 사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적어도 김종호씨는 이 사건에서 사회적 약자이지만 '말하는 주체'로서 행동했다. 외로운 투쟁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투쟁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다.  

알라딘측 해명은 3월과 9월 신학기 특수 때문에 한시적으로 인력 수요가 발생하며 이 때문에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적시 인력 수급이 어려워 인력 도급업체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고, 이것이 인터넷서점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하다면 문제는 그 사실(근무조건)을 피고용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거나 속인 것이다. 법적이건 도의적이건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알라딘측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담당자나 대표가 이런 사정과 함께 개선의지를 밝혔다. 내가 '관망'이라고 표현한 건 그런 의사 표명이 앞으로 어떻게 이행될지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건 당장 올 3월 신학기가 되면 알 수 있을 터이다. 불매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이상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처를 요구하는 듯한데, 그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다른 예이지만, 지난해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은 나름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지 못했다. 불매운동의 가장 심각한 타격을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와 경향이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벌인 일이니까 결과는 할 수 없는 노릇일까? 뒤집어 말하면, 불매운동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아닐까? 광고 비중이 너무 큰 언론시장에서 바람직한 변화라면 광고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대신에 구독자 비중는 늘리는 것이었을 터이다. 대안언론으로서 구독자 중심의 진보언론을 우리가 갖기 위해서는 신문 구독료가 최소 2-3배에서 최대 10배까지도 인상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는가?       

한 대학신문의 대담 자리에서 불매운동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지만, 나는 그런 견해를 노골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사적인 의견으로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대담의 모든 내용이 기사회되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불매운동이 급진좌파적 포지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상식적이지만, 불매운동은 리버럴한 포지션에 더 가깝다). 때문에 그 기사를 옮겨오면서 필자의 확인을 받지 않은 기사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그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내친 김에 나의 '다른 생각'을 조금 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무엇이 불매운동의 성공일까? 알라딘이 '악덕기업'으로 낙인 찍히고 불매운동 가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알라딘이 손실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해 백기를 드는 것일 테다. 그렇게 '알라딘 길들이기'가 성공한다면? 알라딘은 한 사람의 해고자도 없이 모든 직원이 정규직화되는 '이상적 기업'이 될 수도 있겠다(인간의 얼굴을 한 알라딘!). 인심을 쓰는 김에 임금도 동종 업계에선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주기로 하자. 하지만 그 비용은? 조유식 대표가 사재를 다 털어서 마련해야 할까? 그것만으론 턱도 없을 터이고, 아마도 매출이 지금 두 배 정도 된다는 예스만큼 늘어나거나 그 이상이 돼야 할 터이다. 그건 거꾸로 우리가 현재의 두 배 이상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할 용의가 있느냐를 묻는 것과 같다.  

그게 다소 무리하다면, 현행 10%의 신간 할인율을 포기하고 정가대로 책을 구매할 의사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러니까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 운동이 대개 그런 것처럼 다른 서점보다 더 비싸더라도 알라딘에서 구매할 용의가 있는가? 그렇게만 하더라도 마진률이 상당히 좋아질 것이고(내가 알기로 알라딘은 후발업체라서 출판사로부터 예스보다 2% 정도 더 높은 가격에 공급받는다), 직원들의 고용안정과 복지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알라딘측과 이용자(알라딘너) 간에 대타협 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그 가능성에 대해선 물론 낙관하기 어렵다).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포지션은 불매운동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불매운동이 불충분하며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그건 바람이 완력을 발휘했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알라디너로서, 꾸준히 플래티넘을 유지하고 있는 알라딘 고객으로서 나 스스로도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할인 가격에 당일배송 등 알라딘의 서비스가 좋아지는 만큼 근무자들의 노동조건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이제 와서 "알라딘,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고 정색하긴 어렵다. "예스나 교보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라딘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내가 '순수한 가장'이란 말로 가리키고 싶었던 뜻이다.  

나는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지만 남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어색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그냥 결별을 선택하는 편이다. 오래 참지만 미련은 두지 않는다. 나는 알라딘과 결별할 수순까지는 아직 아니라고 본다.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알라딘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어느 만큼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1/10 정도면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단, 그 경우엔 우리가 '바지가 젖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로쟈님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그래도 '파워 블로거'라는 사실. 방문자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 말고 내가 느끼는 '파워'는 추상적이었다. 한데 이번 일로 '안티 로쟈' 전선까지 생기는 걸 보고서, 또 거기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은 걸 보고서 비로소 그 '파워'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게 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 그렇잖은가. 공연한 오해와 적대감도 만만찮으니 내가 6년간의 블로거 생활로 무슨 덕을 쌓은 것인지 심각하게 회의할 수밖에 없다. nobam님은 이렇게 적었다.  

보통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부닥친 현실에서는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게다가 자기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강박이나 뭐라도 써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을 엉뚱하게 적용하여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가 많습니다.(...) 로쟈님의 이번 글을 읽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계시고 논리적으로도 너무 망가져 있는 게 눈에 띕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저 사태와 동떨어진 푸념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중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이고, "많이 위축되어" 있는 데다가 "논리적으로 너무 망가져 있는" 한심한 모습이 지금의 '로쟈'다. 그런 '로쟈의 푸념'을 한번 더 늘어놓는다. 짐작에, 이번엔 '입원가료 요망'이란 글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10. 01. 02. 

P.S. 새해엔 알라딘 서재에 노출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글은 '응답'의 성격이어서 예외로 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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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님께 2
    from nobami 2010-01-02 19:52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간단하게 쓰지요. 피터 싱어가 공리주의적 입장(공리주의적 근본주의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거칠게 '한 명을 구하기보다는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피터 싱어의 경우를 이번 사태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과연 이 상황이 제로섬 게임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로쟈님께서는 현재 알라딘 불매운동이 제로섬 상황
 
 
비로그인 2010-01-0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책을 그리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고 피터 싱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따라서 피터 싱어가 단호히 한 사람보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라는 입장을 가진 학자라는 것은 로쟈님의 말씀이 옳으시겠지요, 하지만 로쟈님은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관해서는 잘 설명해주셨지만 본인이 인용하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의 일부분이 왜곡되어 해석되었다는 제 의문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인용하신 부분 가운데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제아동기금 자료를 보면, 매년 거의 1천만 명에 달하는 5세 이하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라는 부분의 '하지만'은 앞의 간략한 사례에 비추어 우리는 당연히 위협에 처한 아이를 돕는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당연한 윤리적 의무를 너무나 간단히 도외시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다, 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로쟈님의 해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 기우에서 하나 덧붙입니다. 제 페이퍼를 안티 로쟈 공작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하. 제가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고 든 감정은 그냥 '의아함'이었으니까요.

로쟈 2010-01-03 14:21   좋아요 0 | URL
해석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안티 로쟈'는 아니시라면 다행입니다.^^;

yoonta 2010-0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어보니 두 분 다 맞는 듯해요. 로쟈님은 물에 빠진 열 명의 아이를 구하는게 물에 빠진 한 명의 아이를 구하는 것이 한 명의 아이를 구하는것과 동일한 기회비용이 든다면 전자를 하는것이 낫다는 싱어의 윤리를 설명하기 위해 위 구절을 인용하신 것 같고(불매운동사례에 소급시켜보면 김종호씨 개인을 위한 불매운동을 경계한다는 의미겠지요. 싱어의 책에서는 물에빠진 한명과 열명을 비교하진 않네요) 님은 책의 문맥에서는 싱어의 물에 빠진 한 아이 사례는 구두 한 켤레 사는 비용이면 한 아이 생명을 구할수있는 "물에빠진 아이상황"에서는 당연히 나서면서 왜 비슷한 비용을 들여 저개발국가의 보다 많은 아이들을 위한 기부에 나서지 않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싱어가 그것을 예로 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 같아요. 책의 문맥상 괴물님의 이해가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로쟈님 식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딱히 틀린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싱어는 동일한 비용이 들었을때 최대한 다수에게 돌아가는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있으니까요.

로쟈 2010-01-03 14:22   좋아요 0 | URL
사실 싱어의 주장은 시혜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현실적'이긴 하지만, '기만적'이기도 합니다...

마태우스 2010-01-02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가 누구든간에 비난을 들어먹을 때, 서재질을 확 때려치우고 싶어지지요.
저도 몇번이나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이딴 애한테 이딴 말 듣고 이짓을 계속해야 돼?"라는 생각이 마구 들었어요.
그때마다 전 '서재는 인생과 같다. 다시 태어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하지만 서재를 인생과 같다고 보는 대신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탈퇴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너무도 쉽게 서재를 그만둘 수 있지요.
로쟈님이야 어딜 가셔도 잘 사시겠지만,
저같이 배움에 목마른 중생들을 위해 이곳에 계셔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님을 공격하는 소위 '안티로쟈'들이 알라딘 마을의 주요 멤버들은 아니잖습니까?
그분들이 원하는 게 알라딘이 문을 닫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매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걸 님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계속 응답을 해봤자 끝이 없을 듯하니,
이제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2010-01-0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02 23:4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마태우스님의 이와 같은 감정적인 발언이 서재 동네를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에 대한 의견을 한꺼번에 '안티로쟈'라 지칭하는 표현도 지나치십니다. 또한 '알라딘 마을의 주요 멤버'라는 표현도 도대체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서재에서 눈에 띄게 잘 놀던 사람들을 '주요 멤버'라 지칭한다면, 말없이 알라딘에 좋은 콘텐츠를 보태주고 있거나 가끔이라도 나타나 좋은 말 해주는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알라딘이 그렇게 배타적인 공간이었던가요.
'불매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걸 님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매운동 폄하 발언에 해당되십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이렇게 서로를 폄하하고 배격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과연 로쟈님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시는지요. 제가 불매운동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댓글 역시 마태우스님께 감정적으로 시비 거는 걸로 생각하실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만. 저는 알라디너들 간에 감정싸움 나는 게 가장 피곤하고 괴로운 사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마태우스 2010-01-04 13:50   좋아요 0 | URL
blackone님, 님은 제 분류에의하면 주요멤버가 아닙니다. 궁금해하시기에 답변드립니다

꼼미 2010-01-03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글보다는 이번 글이 훨씬 더 명료하고 로쟈님의 의견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특히,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란 입장표명을 일찍 분명히 밝히신 후에 다른 이야기들을 해왔다면 어땠을까('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처럼 이미 수십번 말씀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예를 들어 로쟈님과 알라딘과 관계) 되면 한번에 내치기 어려운게 사람살이인 것 같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부르조아의 한계니 계급성의 문제니 하는 걸 논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겠지요. 로쟈님 책에 그런 말이 있던데, 러시아도 우리나라도 '적이 분명했던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진보진영간의 차이가 시대가 변하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알력과 갈등들이 불거지는 거다' 이번 알라딘내 논쟁을 보면서 그 말이 떠오르더군요. 그 속에서도 길은 찾아야 하는 거니까. 로쟈님이 계속 고민하고 의견을 밝히는 모습 전 좋습니다.

꼼미 2010-01-03 04:3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마음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만, 그냥 해오시던 대로 들어오는 사람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하면 어떠신가요. 로쟈님도 알라딘도 글을 읽는 누구라도 부대끼며 조금씩 더 성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 2010-01-03 14:23   좋아요 0 | URL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듯해서요.^^;

바밤바 2010-01-0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에 나오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고사가 생각나네요.
로쟈님은 지금 '덕'을 쌓은게 맞는지 고민하시는 듯 보이네요.
헌데 이렇듯 로쟈님을 아끼는 사람이 많으니 '덕'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합니다.
계속 좋은 글 써주세요.^^ 화이팅이요!

로쟈 2010-01-03 14: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네, 덕과 함께 부덕도 쌓은 듯해요.^^;

2010-01-03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러 모로 좋은 컨디션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년맞이 독서로 뭐가 좋을까 책장을 둘러보다가 조너선 글로버의 <휴머니티>(문예출판사, 2008)를 꺼내들었다. '20세기 폭력과 새로운 도덕'이 부제인 책. 작년 여름에 출간되자 마자 사들었고(원서까지 구했다) 조금 읽어두었지만 완독을 하진 않았었다.책의 5부와 6부는 각각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을 다루고 있기도 한데, 폭력이란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기에 필독해볼 대목이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도 마저 읽어야겠고,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과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도 일별해봐야겠다. 다음 학기에 '현대 사회와 문화'란 과목도 강의할 예정이어서 강의준비차 훑어보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클 셔머의 <진화경제학>(한국경제신문, 2009)도 마저 읽어야겠고,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뿌리와이파리, 2006)와 김용옥의 <논어 한글역주>(통나무, 2009)도 손길 닿는 곳에 있다. 그밖에 강의 관련서들을 제외하고도 맹자와 프롬, 레닌과 어네스트 베커의 책이 책상에 널브러져 있다.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 일단은 생각의 길을 내보기로 한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휴머니티-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
조나단 글로버 지음, 김선욱.이양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7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2009년 12월 31일에 저장
절판
Humanity (Paperback)- A Moral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Glover, Jonathan / Yale Univ Pr / 2001년 8월
27,510원 → 22,550원(18%할인) / 마일리지 1,13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2월 31일에 저장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그린비 / 2009년 8월
35,000원 → 31,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09년 12월 31일에 저장

마음의 사회학
김홍중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0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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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01 00:00   좋아요 0 | URL
신년맞이 책을 고르는 로쟈님, 새해를 맞이하러 떠난 사람들, 종탑앞에서 호호 동동,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인생을 연기한 사람들, 아직도 PC방에 게임에 열중한 친구들, 이 추위에 오갈 때 없는 노숙자들, 설원의 적막을 응시하고 있는 군인들, 뜨거운 용광로에서 쇳물을 응시하는 노동자들, 죽음을 지키는 의료진들, 도시의 밤을 지키는 경찰관과 보안업체 직원들, 방송국의 제작진들, 내년도 선거를 위한 후보자들, 국회안에 국회의원들, 장애시설의 장애자들, 택배기사들, 홀로 책을 읽는 지인들, 다 떠난 연구실에서 홀로 연구에 몰두한 연구자들, 사제와 수녀들, 친구와 열띤 토론중인 청춘들, 홀로 등대를 지키는 사람들, 에너지를 나르는 선원들, 동네 슈파 주인, 가족위한 주부들, 고교 졸업 예정자들, 정치인 등 그리고 아직도 남편을 아버지를 형님를 아들을 보내지 못한 용산 가족에게 "인간성(Humanity)"은 계속됩니다.

로쟈 2010-01-01 10:13   좋아요 0 | URL
새해맞이의 상징성도 고려했지요. 좋은 책인데, 묻혀 있기도 하고요...

Sati 2010-01-01 01:43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펠렉스님도 평안하고 행복한 새해되세요! 인간성이 뭐 대단한 걸까요?.. 인간이 가진 성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을요.

로쟈 2010-01-01 10:13   좋아요 0 | URL
그게 진폭이 너무 넓어서 문제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1-01 14:57   좋아요 0 | URL
로쟈 님! 올해도 좋은 정보 많이 제공해 주세요.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입니다.건강하십시오.

릴케 현상 2010-01-01 18:32   좋아요 0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를 콕 잡는 사진을 일출 대신^^

토탈리콜 2010-01-01 23:18   좋아요 0 | URL
로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님으로 인해 허전하고 부족한 인생에 많은 도음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0-01-01 23:41   좋아요 0 | URL
항상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책읽는아저씨 2010-01-02 10:17   좋아요 0 | URL
로쟈님 새해에는 좋은 일들 많이 생기길.. ^^
 

해마다 이맘때면 올라오는 것인데, 2010년 출간예정 학술서의 트렌드를 미리 짚어보는 기사를 교수신문에서 옮겨놓는다. 관심저자들의 국내서들도 꽤 포함돼 있어서 기대가 된다.    

교수신문(09. 12. 29) 2010년 출간예정 학술서, 트렌드를 읽는다

2010년 경인년이다. 지난해 한국 출판계가 그 어느 때보다 불황에 苦戰했다면, 올해는 정체의 늪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출판계의 약진을 바라는 마음은, 이들 출판사들이 한국 학술서 생산기지 역할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외형적 규모보다 이들이 펴내는 양질의 도서가 한국 지성사회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출간예정 학술서, 트렌드를 읽는다’를 준비하면서 출판사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를 보면, 여전히 의욕적이고, 담론의 생산과 유통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 출판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2009년 출간예정 계획을 훌쩍 넘겨버린 ‘이월 리스트’들 역시 꽤 많았는데, 이는 경기한파 속에 학술출판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음을 거듭 확인해준다.

큰 그림을 그려보자. 2010년 올해 학술출판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역시 국내 저술보다 해외 저작들의 번역이 많다. 특히 일본 저작들이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정치지리학으로부터 공간의 정치학, 공간의 사상사를 읽어내는 미즈우치 도시오 편 『공간의 정치지리』(심정보, 푸른길, 1월)가 곧 선보인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3월)이 전면적인 개정 작업을 마친 정본판으로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 인터뷰를 수록한 『정치를 말하다』(조영일, 3월), 데리다에 관한 독창적 연구서인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조영일, 5월) 등이 도서출판b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일본의 역사의식을 해부한 역사비판서인 미야지마 히로시의 『일본의 역사의식 비판』(창비, 3월), 돈황 연구 입문서로 평가받는 나가사와 가즈토시의 『돈황의 역사와 문화』(민병훈, 사계절, 3월), 국민국가의 주권, 민주주의 문제를 조명한 우카이 사토시의 『주권의 너머에서』(신지영, 그린비, 3월)등이 흥미로울 것 같다. 

둘째, 번역서라 하더라도 특정 저자의 저작이 압도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그렇다. 『불청객: 전쟁[원제는 Umbr(a): War]』(강수영, 인간사랑, 3월), 『이웃』( 정혁연, 도서출판b, 2월.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샌트너, 슬라보예 지젝이 정치신학에 관해 나눈 세 편의 에세이를 수록한 책) 『나눌 수 없는 잔여』(이재환, 도서출판b, 4월), 『지젝과의 대화』(주은우, 한울, 4월),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김성호, 창비, 5월),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쓴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이성민, 민음사) 등이 독자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번역서 가운데 관심이 쏠릴 수 있는 부분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이경덕, 민음사)이다. 난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이 책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하다. 이와 함께 제임슨이 세계 여러 명사들과 나눈 대담을 엮은 『프레데릭 제임슨 대담집』(신현욱·안수진, 창비, 12월)도 곁들여 읽을 수 있다.

꾸준히 번역되고 있는 해외 저자들에는 펠릭스 가타리(『미시정치』, 윤수종, 도서출판b, 1월), 크리스 하먼(『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 이정구, 책갈피, 1월. 『자본주의의 광기』, 심인숙, 책갈피, 1월.『마르크수주의 경제 위기론』, 이정구, 책갈피, 5월), 제임스 밀러(『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김만권, 개마고원, 2월), 폴 드 만(『독서의 알레고리』, 이창남, 문학과지성사, 2월), 에드먼드 버크(『숭고와 미의 관념』, 김혜련, 한길사, 3월), 테리 이글턴(『이론 이후』, 이재원, 길, 3월), 한나 아렌트(『맨 인 다크 타임즈』, 홍원표, 인간사랑, 3월), 울리히 벡(『글로벌 위험사회』, 박미애·이진우, 길, 4월.『세계화시대의 권력과 반대권력』, 홍찬숙, 길, 5월), 칼 폴라니(『인간의 살림살이』, 이병천, 후마니타스), 지그문트 바우만(『공포와 불안전』, 한상석, 후마니타스) 등이 보인다.

전집과 선집 출간 활발
셋째, 전집과 선집 간행이 눈에 띈다. 먼저 국내 저술을 보자. 국내 최초로 번역되는 초정 박제가의 전집 『정유각집(상·중·하)(정민 외, 돌베개)이 기대된다. 역사학자 이우성의 저작이 전8권으로 소개될 예정이다(『이우성 저작집』, 창비, 1월). 작고한 서동만 상지대 교수가 저술한 북한관계 논문집도 『서동만 저작집』(창비, 4월)으로 출간된다. 이 범주에는 회고록도 포함할 수 있는데, 『강만길 회고록』(강만길, 창비, 2월) 등이 예정돼 있다.

선집의 경우, 해외 저술 번역이 활발하다. 우선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윤여일 편역, 소명출판, 4월)과 이와나미의 ‘1920~30년대 근대일본의 문화사 시리즈’ 번역(『근대 지의 성립』,『감성의 근대』, 『편성되는 내셔널리즘』, 『총력전하의 지와 제도』, 『감정, 기억, 전쟁』)이 한국 독자를 찾아온다. 일본 대역사건의 주인공 고토쿠 슈스이의 삶과 글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고토쿠 슈스이 선집』(임경화, 돌베개)도 눈에 띈다.

넷째, 인문사회과학 고전들의 강세다. 역시 출판사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고전’ 번역이다. 독일 역사학자 마이네케의 주저 『국가권력의 이념사』(이광주, 한길사, 1월)가 곧 나올 태세다. 사회심리학의 창시자인 J.허버트 미드의 『정신, 자아, 사회』(나은영, 한길사, 2월)도 예고돼 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김덕영, 길, 2월)은 지난해 하반기에 출간을 예고했지만, 역자가 현지 독일에서 스승과 동료, 후배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좀더 완벽한 편집 작업을 하느라 늦어졌다. 책 분량은 700쪽이다(문예출판사판이 300여쪽이다). 레이몽 부동의 『사회변동과 사회학』(민문홍, 한길사, 3월) 역시 지난해 출간돼야 했지만 해를 넘긴 책이다. 이미 수차례 번역본이 출간됐어도 여전히 매력의 대상이 되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심경호, 한길사, 6월)도 새 단장을 하고 있다. 120개가 넘는 역사 기본 개념을 정리한 코젤렉의 명저 『개념사 사전(전5권)』(한림과학원, 푸른역사, 6월)도 지적 갈증을 채워줄 것이다. 만프레드 슈미트의 『독일 정치사』(최재한·이선희, 후마니타스), 하이데거의 『사유의 경험으로부터』(신상희, 길, 6월) 등도 예정돼 있다.  

다섯째, 국내 저자들의 내공이 뒷받침된 학술 교양서의 확대다. ‘선비’의 DNA를 되살릴 것을 주문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의 선비문화』(지식산업사, 1월)는 지난해말 출간된 김기현 전남대 교수의 『선비』(민음사)와 겹쳐 읽을 수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수행해 온 현실 재해석 작업을 평가한 다소 도발적인 책 『더러운 직업, 철학』(김진석, 개마고원, 1월), 미국 외교사를 전천후로 훑어낸 『제국의 길-미국 외교의 역사』(권용립, 삼인, 1월), 백제의 사회사와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고찰한 『백제 사회사상사』(노중국, 지식산업사, 2월)도 눈길을 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분석, 프루스트의 예술을 조명한 『예술가의 시선』(유예진, 현암사, 3월), 라캉이 미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했는지를 다룬 『라캉과 미술』(조선령, 경성대출판부, 3월), 조선시대 사진의 도입과 사진가들의 이야기를 다큐식으로 구성하고 근대풍경을 담은 『사진의 시대』(최인진·강응천, 학고재, 4월)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특히 강신준 동아대 교수의 번역본 『자본2, 3』(길, 4월)이 출간됨으로써 마르크스의 대작 『자본』이 전 5권으로 완간된다. 임지현·백영서 등 한국 지식인을 인터뷰해 9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지형과 지식인 문화를 고찰한 『세기말 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김항·이혜령 외, 그린비, 4월), 『서양의 기원-인문정신의 힘』(김헌·안재원, 길, 5월)도 국내 저자들의 분투를 기대할 수 있는 책이다.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을 비교 분석한 『데리다와 들뢰즈』(김상환, 창비, 7월), 1948년 분단체제와 1987년 두 체제를 분석한 『분단체제와 87년체제』(김종엽, 창비, 10월)도 지적인 고민이 기대된다.

국내 저술, 내공 늘고 주제 확대돼
한국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세계사적 흐름을 진단한 저술도 빠트릴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임노동 현장을 탐사함으로써 임금이 얼마나 노동자의 일에 대해 공정하게 보상되고 있는지를 밝힌 『한국의 노동시장과 임금』(신광영 외, 한울, 2월), 한국자본주의의 병리현상을 진단하면서 대안을 모색한 『한국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서동진, 창비, 5월),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문제를 진단한 『금융세계화, 자본주의 모델 그리고 한국경제』(전창환, 후마니타스), 브라질의 신자유주의와 노동 운동을 주목한 『브라질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그리고 룰라』(조돈문, 후마니타스)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관심을 끌었던 공화제논의는 올해 어떻게 반영될까. 공화제 논의는 『공화국을 위하여』(조승래, 길, 1월)와 『공화주의와 정치이론』(존 메이너·세실 라보르드 외 9인 지음, 곽준혁·조계원·홍승헌 옮김, 까치, 1월)에 스며들어 있다. 조승래의 책은 공화주의의 역사적 유래와 변천과정에 주목했다. 곽준혁 등의 번역서는 공화주의 정치이론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책으로, 공화주의의 역사적 가치, 개념적 일관성, 규범적 제안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이다.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성찰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할 것으로 보이는 책도 있다. 『그들이 꿈꾼 나라』(박찬승·최규진, 돌베개)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이들이 주체적으로 구상하고 준비했던 근대 국가의 모습을 정리하는 책이다. 중세 왕조로의 회귀가 아닌 자주적 근대 국민 국가를 꿈꿨던 이들의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대한제국흥망사』(서영희, 돌베개)는 고종시기에 관한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고 대한제국기에 관한 종합적인 상을 그려냄으로써, 병합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제시하려 한다. 이 문맥 안에서 강제병합을 짚어낸다는 발상이다.(최익현 기자) 



0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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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2 20:30 
    이번주 한겨레21의 별책부록으로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 아직 지면으론는 보지 못했는데, 2010년의 인문출판 트렌드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한데 지면 구성을 보니 초점은 '트렌드'가 아니라 '키워드'였다.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역사와 그 반복'이 내가 고른 키워드가 되었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출간예정 리스트를 잔뜩 나열한 건 이미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리스트를 알고 있
 
 
L.SHIN 2010-01-0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다행이다.
맛있는 책들에 대한 소개가 아니구나.

베토벤 2010-01-02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크리, 친족의 기본구조, 앙띠외디푸스(재번역)는 아직도 요원한 것인가요.ㅎ
 
무엇이 문제인가

나대로의 입장을 표명한 글을 올렸지만, 역시나 '로쟈씨'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정도로 간주되는 듯하다. 이번에 새삼 알게 된 것인데, 서재 활동이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꼴 사납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지지해준 분들이 더 많은 듯싶지만, '안티 로쟈'도 적잖다. 절충책으로 내년(내일)부터는 쓰는 글들을 나의서재 & 즐겨찾는 서재브리핑에만 노출하도록 하겠다. 애써 서재를 찾는 분들만 읽고 가시면 되겠다.  

세밑에 따로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논쟁을 길게 끌고 갈 생각도 없다. 어차피 평행선을 달릴 테니까. 대신에 5년전 바로 이맘때 쓴 글을 리바이벌해놓는다. 아마 모스크바통신에 '서비스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올려놓았던 듯하다. 모스크바통신을 비공개로 전환한 이후에도 한번 수정본을 올려놓았을 텐데, 다시 찾아보지는 않았다. 비정규직 착취 문제나 인터넷서점의 '착취적' 물류 시스템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 가름한다.   

2005년 새해가 밝았다. 어제의 일이다. 러시아는 어제부터 1월 9일까지가 공식 휴일이다. 연말에 개정된 법에 따라 그렇게 됐는데, 덕분에 다음 한 주 내내 생활이 불편할 듯하다. 일단 휴일이면 기숙사가 있는 본관 건물의 중앙통로를 막아놓는 탓에 전철역이건 인터넷카페건 밖에 좀 나가자면 400미터쯤을 돌아나가야 한다. 게다가 인문대학 구내의 PC방이 놀기 때문에 디스켓을 사용하려면 카페막스(인터넷카페)에 가서 매번 10루블(400원)을 더 내야 한다.

10시간짜리 인터넷 이용료는 이미 지난달에 400루블에서 550루블로 대폭 올랐다(러시아는 인터넷 이용료가 더 비싸지는 드문 나라일 것이다). 그렇다고 1시간 단위로 끊자니 최고 90루블까지 하므로 (왜 이렇게 비싸냐고 따지는 대신에) 결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550루블을 주고 끊는 수밖에 없다(10시간을 한 달 이내에 써야 한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이라는 카페막스도 12월 31일에는 문을 닫았고, 듣기에 어제도 단축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연초인바, 다시금 새겨둘 것은 “착취가 없으면 서비스도 없다”는 문구이다(이건 거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서비스가 없으면 착취도 없다.” 이걸 운동주의적인 문구로 바꾸면, “서비스를 없애야만 착취도 없어진다.”).

자본주의화(민영화) 이후에 러시아 또한 ‘서비스(=착취) 없는 사회’에서 ‘서비스(=착취)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바, 아직은 초보적인 구석이 많아서 어느 상점이나 식당에서건 불친절은 예사로 경험하는 일이다(그러니까 아직도 ‘서비스’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러시아와는 반대로 ‘서비스 사회’에서 ‘서비스 없는 사회’로 얼마간 거꾸로 이행해간 나라들도 있으니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의 ‘선진국’들이다(서로 비슷하게 ‘불편한’ 나라인 영국과 러시아는 둘 다 석유 수출로 먹고 산다는 점에서도 처지가 닮았다).

지난달에, 인구가 고작 100만 명임에도 영국의 제2도시라는 버밍엄에 유학중인 후배가 모스크바에 잠깐 들러서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멀쩡한 지하철이 예고도 없이 안 다니고, 버스 기사가 운전중에 손님들에게 그냥 다 내리라고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일반 시민들은 거기에 익숙해서인지 곧바로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다고 한다(후배의 말이 프랑스는 이런 영국보다도 한술 더 뜬다고). 일반 교통요금이 모스크바보다 10배는 더 비싼 도시에서(전철요금이 모스크바가 400원인 데 반해, 버밍엄은 4,000원이다, 그것도 한 구간이) 그런 불편을 겪으면서도 불평 없이 살아간다는 건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런 식으로 서비스가 없는/부족한 만큼 착취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 ‘인간적’일 거라는 것. 적어도 ‘인간적인 사회’를 ‘착취 없는 사회’로 우리가 정의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서비스’란 무엇인가? 외래어로서 이미 국어사전에도 올라가 있는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먼저, “생산된 재화를 운반/배급하거나 생산/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함”이란 뜻이다. 서비스 없는 사회, 즉 ‘보다 인간적인 사회’는 그런 재화나 노무를 제때에(혹은 아예) 배급/제공하지 않는 사회이다(생산자/노동자에겐 쉴 권리가 있다!). 당연히 ‘인간적인 사회’는 ‘없는 게 많은 사회’이며 ‘줄이 긴 사회’이다(‘인간적인 사회’가 고려하는 것은 인간의 필요(need)이지 욕망(desire)이 아니다). 부족한 재화나 노무를 배급/제공받기 위해서 ‘평등한’ 인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줄을 서는 것밖에 없다. 이 ‘줄 문화’를 전면적으로 다룬 문학작품이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소로킨의 <줄>이다(우리말로는 <세계의 문학>에 전재된 바 있는데, 단행본으로는 출간되지 않았다).  



모스크바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아직도 러시아에는 상점에서의 줄서기 문화가 남아있으며(불과 10년전만 하더라도 모스크바에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는 1시간 이상씩 줄을 서야 했다. 그때 유학왔던 친구는 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한번에 3-4인분씩 폭식을 하곤 했었다. 하긴 지금도 맥도널드에 가면 10-15분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 2004년판 회화교재에조차도 ‘상점회화’의 핵심으로 ‘줄서기’가 다루어진다. 가령, “당신이 (이 줄의) 마지막 사람입니까?”라거나 “제 자리 좀 맡아주세요” 같은 표현이 그런 것들이다. 당신 생각에 이 (인간적인) ‘줄 서기’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왜냐하면, 자기 자리를 맡아달라고 해놓고 한 번에 여러 군데에 줄을 서기 때문이다(물건을 한 종류만 사는 게 아니므로).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줄을 짧게 서기 위해서는 절묘한 시간 계산과 순발력이 요구된다.

오랜 줄 문화의 경험 때문인지 러시아 사람들은 웬만한 줄서기에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걸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욕이 나온다. 가령, 공항 입국장에서부터 짐을 들고 2시간씩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모스크바 국제공항에서의 그런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하는데(거기에 익숙한 사람은 1시간 내로 입국장을 빠져나올 경우 ‘만세!’를 부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국제공항이야말로 가장 ‘사회주의적’이며,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 만하다. 일반적으론, 그걸 뭉뚱그려서 ‘러시아적’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불충분한 일반화이다. 요는 그러한 ‘인간적인’ 태도의 전제인바,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왜 굳이 당신한테 애써 봉사해야 하는가?”이다(“당신이 그렇게 잘났나?”). 인간은 평등하지 않은가?!

거기서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 ‘서비스’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인바, 그것은 “개인적으로 남을 위하여 돕거나 시중을 듦”을 뜻한다. 이걸 달리 ‘봉사’ 혹은 ‘접대’라고 말한다. ‘봉사’란 ‘접대’를 순화시킨 말인바,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서비스가 없는 사회’로서의 ‘인간적인 사회’란 ‘접대가 없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돈만 있으면 ‘서비스 만땅’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다. 예컨대, ‘돈 있는’ VIP는 모스크바 공항도 귀빈실을 통해서 바로 빠져 나간다. ‘자본주의 러시아’에서 2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건 ‘돈 없는 사람들’이지 자본가들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기본 원료는 봉사료/접대료이다(그래서 ‘봉사비/접대비’가 된다). “난 네가 돈을 주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자본주의의 캐치프레이즈다. 이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이현세 만화의 구호이자(‘까치’의 대사) 이장호의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를 패러프레이즈한 것인데, 그러한 패러프레이즈가 암시하는 바는 이 둘이 동형적이라는 것이다. 둘 모두에 걸려 있는 것은 ‘욕망(desire)’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욕망의 무한성에 대응하는 지표이다. 때문에 “돈을 그 정도 벌었으면 됐지”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동형성을 간과하는 태도가 ‘순진한 태도’이며, ‘소녀적 태도’이다. 즉,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에 감동하는 태도가 ‘소녀적 태도’인바, 물론 이것은 곧 ‘아줌마적 태도’로 전화하게 된다. “돈이나 벌어오면서 그런 소리를 해!”

자본주의의 기본 원료가 봉사/접대인 한에서, ‘접대 없는 자본주의’란 말은 ‘인간적인 자본주의’만큼이나 모순형용이다. 혹은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아편 없는 아편’ 정도쯤 될까? 그렇다면, 접대의 한 유형이자 대표종(種)으로서의 성접대는 어떤가? 몇 달 전부터 한국에서는 새로운 성매매 방지법이 발효/적용 중인 듯한데, 좌파라면, (개량주의적/타협적 좌파가 아니라) 적어도 자본주의의 타파만이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근본주의적/비타협적 좌파라면 그러한 법안에 대해 반대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존권’을 주장하는 접대여성들(성노동자들)이나 포주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 말이다. 

“우리가 레닌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즉 진심으로 빈민의 곤경을 동정하는 어떤 선한 신부를 동료 볼셰비키가 칭찬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레닌처럼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볼셰비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술에 취해 농민들에게서 부족한 자원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도 강탈하고 그들의 아내들을 강간하는 신부들이라고 논파했다. 그들은 신부가 객관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농민들로 하여금 분명히 자각하도록 한 반면, ‘선한’ 신부들을 그들의 통찰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지젝, <이라크>, 198쪽)

조금 번안해서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타파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연말 보너스를 챙겨주는) ‘선한’ 자본가들이 아니라 (보너스는커녕 월급까지도 떼먹는) ‘악독한/악랄한’ 자본가들이다(다행히도/불행히도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자본가들이야말로 노동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하도록”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사정은 성접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의 표본으로서의, 성의 무한 상품화이고 성노동자에 대한 악독한/악랄한 착취이다(군산에서인가 이리에서인가 시범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한 착취만이 전선(戰線)을 교란시키지 않고 분명하게 해줄 것이기에.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지젝은 금융 투기와 인도주의적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소로스 같은 인물들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시장 폭리자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아이러니컬한 것은 헝가리 출신이자 칼 포퍼의 제자임을 자임하는 그 소로스가 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구 공산권 국가들의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활동을 위한” 재정지원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고, 러시아에서 출간된 지젝의 책들도, 전부는 아니지만, 이 소로스 펀드의 지원하에 출간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지젝이 지난 미대선에서 부시가 당선된 사실에 전혀 유감스러워하지 않은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한 레닌주의적 정신에 충실할 때, 이라크 파병(연장)에 반대하는 것은 개량주의적 좌파들, 혹은 얼치기 좌파들의 행태이다(물론 반대하는 척할 수는 있다). 오히려 적극 찬성해야 마땅하다(그래야지 ‘자본주의와의 전쟁’도 빨리 끝장을 볼 게 아닌가?). 즉, 친미 수구주의자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그건 성매매 방지 법안을 놓고서도 마찬가지이다. 포주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비록 전혀 다른 이유/계산에서이긴 하지만.(해방공간에서 제출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도 ‘반탁’에서 돌연 ‘친탁’으로 돌아선 공산주의자들의 행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적과의 동침’은 레닌주의이건 마오주의이건 간에 A급 좌파의 기본 ‘전술’이다(수단으로서의 모든 ‘전술’을 정당화하는 건 목적으로서의 ‘전략’이다).

반면에, 성매매/성접대에 반대함으로써 ‘접대 없는 자본주의’를 희구하는 태도는 ‘인간적인 자본주의’, 혹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용인하는 태도이다(‘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불가능한 만큼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도 딱 불가능하다). 그것이 소위 개량주의적/타협적 태도이며,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무해한 자본주의’(적어도 ‘덜 유해한 자본주의’)를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량주의적 좌파(가령, 제도권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와 자유주의자(가령, 고종석) 간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가령, 고종석은 ‘마약 없는 마약’ 마리화나의 합법화를 지지하며, ‘섹스 없는 섹스’ 사이버-섹스를 지지할 법하다. 민노당도 마리화나와 사이버-섹스를 지지하나?). 적어도, 근본주의적 좌파나 우파(수구반동)와 비교해본다면 말이다.

이상에서 ‘서비스’ 문제에 대해 덧붙인 몇 마디는 내가 연말에 읽은 몇 개의 글을 따오기 위한 ‘서론’인바 이 또한 일종의 ‘서비스’이기도 하다. 서비스의 세 번째 사전적 정의란 “장사에서, 값을 깎아 주거나 덤을 붙여 줌”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덤으로서의 군말이었던 셈. 헤겔이 이미 지적한 바이지만, 모든 ‘서론’은 완전한 체계로서의 본론에 잉여적이란 의미에서 ‘군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상품의 제값의, 제대로 된 상품이라면 거기에 들러붙는 서비스 상품은 불필요한 잉여이다.(*그 서비스는 서비스하지 않는다.)  

0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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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10-01-0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게 올해 제가 내린 결론이네요. 나이가 드는 건지 상식과 원칙, 예의, 친절 이런 것에 더 공감이 갑니다.

로쟈 2010-01-01 10:12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유토피아도 상식과 원칙,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지요. 대신에 친절은 한 것 같아요. 서비스 정신...

Joule 2010-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세 받으신 걸로 그분들께 장안동식 풀코스 마사지 쿠폰 한 장씩 돌리시는 건 어때요?

로쟈 2010-01-03 14:14   좋아요 0 | URL
쿠폰도 있나 보군요. 글쎄요,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알라딘 불매운동과 관련하여 '로쟈'란 이름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기회주의적 지식인'의 전형이며 '코메디언'이라는 게 내가 얻은 새로운 별칭이다. 생각의 자유가 있고 명명의 권리가 있을 터이다. 사실 이번 사안에 긍정적인 면이 없진 않다. 한 임시직 노동자의 '부당해고'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로 '승화' 혹은 '성체화'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일 것이기에(해고의 불법성 여부에 대해선 아직 모르겠다. 법률적 자문이 필요할 텐데, 알라딘 내부에선 그럴 만한 능력이나 의사를 가진 분이 없는 듯하다. 역시 좁은 동네다). 비록 아직까지는 알라딘 '내부'에만 국한된 일이긴 하지만.  

알다시피 알라딘쪽에선 담당자와 대표가 입장을 표명했다. 알라디너들에게 사과의 뜻도 밝혔다. 물론 충분할 리가 없다. 특히나 '질긴 놈이 이긴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나기나 피하자는 임시방편의 꼼수요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할 것이다(용산참사 합의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해고 노동자에게 백배 사죄하고 당장 정규직으로 채용하거나, 그게 불가하다면 이런 사단이 벌어지게 만든 인사 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어 면직시키는(여차하면 해직시키는) 조치도 고려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유식 대표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니 이왕지사 비정규직 문제가 이슈가 된 만큼 출판계 전체로 문제를 확장시켜볼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로... 그렇게 되지 않고서야 충분할 리가 없다. 아니 충분해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노동자를 해고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장기근무를 약속받고 한달이나 묵묵히 헌신한 노동자를.      

불의를 보고 묵과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는 양심'의 기본일 터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행동하는 양심'은커녕 '양심에 털난 인간'이다.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임시노동직이 한 달을 일하고 해고됐어요. 몇 사람이 이걸 문제로 지적했고 알라딘 불매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저는 불만스러웠던 게, 사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다 그렇게 되어있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놀랍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알라딘에 항의를 하고,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게 웬 순수한 가장인가, 이게 과연 시급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불만스럽다고 한 건 비정규직(임시직)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나 부당한 처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유독 알라딘의 경우만, 그것도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한 사례를 통해서 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가란 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전략적인 판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내지는 이보다 더 중차대한 문제는 없다는 '순수한 가장'을 통해서만.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면, 피터 싱어의 예를 들어보자.  

출근길마다 작은 연못가를 지난다. 날씨가 더울 때면 가끔 연못에 들어가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겨우 무릎까지 물이 차이 염려는 없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춥고, 시간도 이르다. 그런데 연못에서 첨벙거리는 아이가 있는 게 아닌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 어린아이다.(...) 아이는 물 밖으로 겨우 몇 초 동안만 고개를 내밀 수 있는 모양이다. 뛰어 들어가 구하지 않으면, 빠져 죽고 말 것이다. 물에 들어가기란 어렵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새 신발이 더러워질 것이다. 양복도 젖고 진흙투성이가 되리라. 아이를 보호자에게 넘겨주고 옷을 갈아입고 나면, 틀림없이 지각이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21쪽.

물론 당연히 물로 뛰어들어야 옳다. 이것이 아마 불매운동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시는 분들의 입장일 것이다. 적어도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을 갖고 있다면, 신발이 더러워지고 양복이 젖고 하는 건 핑계가 될 수 없다. '양심에 털난 인간'은 이러한 구호의 요구를, 연대의 손길을 외면하는 인간일 터이니, 그러면서도 인문학을 떠들어댄다면 낯짝도 두꺼운 사이코패스라 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적 상황에서 아이가 둘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오직 한 아이밖에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혹은 정말 불운하게도, 아이들이 떼로 빠져 있다면? 싱어도 자신의 가상의 사례에 이어서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제아동기금 자료를 보면, 매년 거의 1천만 명에 달하는 5세 이하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그러니까 한 아이가 빠져 있는 게 아니라 1천만 명의 아이가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에 가깝다. 한국 실직 노동자만 하더라도 최소 수십 만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측은지심에 의해 발동한 즉각적인 행동의 효과에 대해서 재고해보도록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의 도덕감정은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을 동정하도록 이끌지만, 차가운 이성은 기회비용을 고려한다. 10명의 아이가 빠져 있는데, 10명이 달려가 가까이에 있는 한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다면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한 사람이 아이를 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다른 아이를 구하거나 다른 방도를 찾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실직이 문제가 되는 건 보통 빈곤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알라딘에서 해고된 김종호씨는 현재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까 최악이라고 볼 순 없다. 요즘엔 가족을 부양하면서 자신의 학비까지 벌어야 하는 대학생들도 드물지 않다). 다시 싱어를 참조하면, 세계은행의 절대 빈곤 기준은 매일 1.25달러이며, 그 이하의 수입밖에 없는 사람의 수가 지구상에는 14억명 가량이 있다. 반면에 10억명의 인구 정도는 "오늘날 일찍이 없었던, 있었더라도 왕이나 귀족들 정도나 누렸을 법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다른 게 '풍요'가 아니라 냉난방이 잘 갖춰져 있어서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정도면 '귀족적 호사'다.   

문제는 이 '귀족들' 또한 이 정도의 풍요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데 있다. 하여 '사람사는 세상'이 되려면, 14억의 빈곤도 해소해야 하지만, 10억의 욕구불만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전선은 이중적이다. 부당한 사회적 관계도 철폐해야 하지만, 동시에 가치있는 삶의 모델도 새롭게 주조해야 한다. 단지 빈곤층이 중산층이 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가 같은 TV드라마를 보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늘씬한 아이돌들을 보고 똑같이 므흣해한다면, 그들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한국사회에서 '먹고사니즘' 이데올로기의 극복 없이는 대안도 진보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배부른 소리 하는 게야"라는 말들이 먹고사니즘의 구호다("책이 먹고 사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라는 물음도 그 변이형이다). '생존' '생계'라는 프레임에는 진보/보수, 좌파/우파가 따로 없다. 한쪽에서 '생존권 투쟁'을 말하고, 다른쪽에선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한다.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모두가 '생명정치' 패러다임 안에서 움직이며, 그런 점에서 적대적으로 공모한다. 물론 생존이 중요하고 먹고 사는 일이 소중하다. 하지만, 가치있는 삶, 품위있는 삶이 생존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이곳이 절멸수용소가 아니라면. 아니 절멸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은 의미를 찾고자 했다). 먹고 살 만해야 책도 읽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편견이다(그래도 책을 읽는 노동자가 무식한 자본가보다야 우월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생존에의 욕구뿐만 아니라 가치있는 삶에  대한 욕망 또한 갖고 있으며 이것은 언제 어디서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런 욕망을 안 갖고 있다면 배워야 한다. 욕망하는 법을... 

뭔가 충분히 '해명'하려고 했지만, 끝도 없는 일일 듯싶다. 그간에 나의 생각과 편향에 대해 '적게' 말해온 편도 아니건만, 오해와 오용은 불가피한 듯하다. 그러한 오용이 몇몇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면 말리지 않겠다. 나는 다만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 정도를 말하고 싶다. 물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하는 것, 부당하게 모욕받은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 당연히 가치있는 일이다. 하지만 길은 여러 가지다. 그리고 노자의 말대로 길흉화복은 길게 두고 봐야한다. 화 속에 복이, 복 속에 화가 엎드려 있다고 하니까. 좋은 괘를 얻었다고 희희낙락하지 않고 나쁜 괘를 얻었다고 하여 좌절하지 않는 것이 <주역>의 독법이라 한다. 이 또한 기회주의적 독법일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기회주의에 대해서도 연구해봐야겠다. 우선은 점심을 먹고서... 

0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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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하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31 19:29 
    나대로의 입장을 표명한 글을 올렸지만, 역시나 '로쟈씨'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정도로 간주되는 듯하다. 이번에 새삼 알게 된 것인데, 서재 활동이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꼴 사납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지지해준 분들이 더 많은 듯싶지만, '안티 로쟈'도 적잖다. 절충책으로 내년(내일)부터는 쓰는 글들은 나의서재 & 즐겨찾는 서재브리핑에만 노출하도록 하겠다. 애써 서재를 찾는 분들만 읽고 가시
  2. 로쟈님께
    from nobami 2010-01-01 23:04 
    가끔 들러 고맙고 유용한 정보도 얻어가고 책구경도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알라딘 블로그 생태계가 제 서식처는 아닌지라 로긴하는 일도 거의 없지요. 알라딘 문제는 레디앙에 실린 김종호 씨 투고를 통해 처음 봤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이구 알라딘에서도 이제 책 못 사겠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만 했습니다. 김종호 씨 글만 읽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대형 인터넷 서점들이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거나 거기서 불거질 수 있
 
 
Mephistopheles 2009-12-3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상 이 페이퍼 때문에 점심식사 시간이 늦으신 듯...맛나게 드세요.^^

히드라 2009-12-3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로쟈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동감합니다. 세상은 넓고 싸울 것은 많은데, 왜들 자기가 싸우는 대상이 우선적이고 자신의 싸움 방식만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로쟈님이 근래 얻은 유명세의 질곡인 듯....^ ^ (저한테는 아무도 알라딘 불매운동에 대한 입장을 묻지 않으니, 아주 편안~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3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저도 '인터넷 서점이 물류를 외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자들이 몰랐고 이제와 새삼 깜짝 놀랐는가' 하는 점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런저런 궁금한 것이 많은데, 가장 크게는 내게는 알라딘이 진보(?)기업이 아니고 별로 독점적으로 책을 구매하는 곳도 아니라 그런듯도 싶어서 그저 조용히 있으려고 합니다.

라주미힌 2009-12-3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직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닥 모아진 의견도 없어보이는데
(어떤(?) 기준으로) 다른 의견(?)들에 대해서는 몽둥이질을 하는 것이 놀랍네요.
알라딘에 제대로 타격하지 못한 화풀이를 '기회주의적인 알라디너들' 찾아내서 푸는 걸로 밖에 보이질 않네요.
알라딘 서비스에 불편함 없이 잘 사용하던 사람들끼리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그들의 순수함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큰 벽을 느끼고 있기에, 계속 구경꾼 노릇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9-12-3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할 때는 도대체 얼마나 강도가 강해야만 합니까? 알라딘 외주업체에서 한달 일하고 잘린 김종호씨는 강도가 너무 약하니 최소한 수십명 정도의 집단해고라도 발생해야 그때서야 문제 제기가 가능한겁니까?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는데 강도를 따지고 게다가 비정규직 이라도 실직자에 비하면 '호사'다 라는 식의 논리(?)까지 피시는데,, 입장표명이 변명에서 자꾸 궤변으로 변질되는거 같아 좀 안타깝다는..(푸하님 의견에 따라 댓글 약간 수정했고 추가의견은 제 서재에 올렸습니다.)

푸하 2009-12-31 14:45   좋아요 0 | URL
(제가 볼 때는) 로쟈님의 주장과 충돌하는 선명한 논점을 말씀해주셨습니다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공격성은 낮추고 좀 더 건조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키보이 2009-12-3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불매운, 이것도 소위 말하는 윤리적 소비로군요.

불매운동자체는 무척 정당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에 동조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다를 테고, 그걸 빌미로 피아를 나누고 비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다른 곳도 아닌 '알라딘' 불매운동인가에 대해, 이것이 어떤 개별적인 사건으로서 완결적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가는 고민해봐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라도 철저하게 윤리적이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고민하고픈 사람이 있는거 겠죠.

방향은 같아도 길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알라디너분들은 부디 두루 살필 수 있길 바랍니다.

biosculp 2009-12-3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이나 행동의 강도가 다를수 있을텐데요.
이론을 가지고 강하게 토론을 할수 있겠지만
정답이 없는 현실의 문제에 대해 서로 상처를 피할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합니다.
원샷에 해결될 세상사도 아니고,
더 고민하고 더 얘기해야 될 문제들, 그리고 쉽게 해결될수 없는 문제를 강하게 얘기하면 너무 힘들어지죠.

마태우스 2009-12-3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불매운동 관련 페이퍼를 쭉 읽어왔는데요
왜 갑자기 로쟈님이 타깃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로쟈님 때문에 불매운동이 잘 안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루체오페르 2010-01-01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이런 때는 법대로 하는것도 필요하고 전문가, 공인노무사같은 분들의 의견이 아쉽네요. 어디 안계신가요? ^^;
2.일단 불매운동에 대한 제 의견을 밝혀야 한다면 정말 간단하게 결과만 말한다면...
'중립' 입니다. 뭐,속에서야 이생각 저생각 나름 정리돼고 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공식적으론요.^^; 여튼...불매운동이란 방식에 긍정을 합니다만,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에게 너무 거친것같네요.
볼테르의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네가 비난을 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너를 위해 싸우겠다' 는 정신은 참 어렵군요. 여전히 불매가 진행되는 사태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인데 이렇게 불매운동의 방식에 대해 불편해하는 의견을 밝혔단 이유로(제게는 처음으로) 단지 반대편으로 단정지어지고 평가를 받는다면 어쩔수없죠,뭐.
3.2009년 덕분에 많이 배우고 즐거웠습니다. 로쟈님,2010년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로쟈 2010-01-0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적인 책임을 묻을 수 있는지, 아니면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아니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사회변혁의 단초로 이슈화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씩 정리해볼 수 있을 텐데, 진전이 없는 듯해요...

nanousee 2010-01-0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가끔씩 들러보는 로쟈의 서재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접한 느낌은 무척 씁쓸하네요.
잘 모르지만 제겐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여정에 손안에 쥘만한 나침판과 같은 곳이었는데 맥락을 무시하고 상식도 없이 불한당 같은 목소리로 깃발을 휘두르며 다함께 나아가자 외쳐대는 모양새여서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으로서 비정규직 노동자 관련, 부단한 투쟁을 해나가야 겠지만 저같은 사람에겐 위축된 로쟈의 서재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더 큰 슬픔입니다. 로쟈님을 기회주의자다 뭐다 라고 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제겐 그 분들이 완장찬 깡패들로 밖에 안보이네요..그 분들이 저같은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계신다는게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구요...진전없는 슬픔만 또 하나 덧붙여서 연초부터 죄송합니다. 로쟈님, 이견이 없는 블로그를 꿈꾸신게 아니라면 무심히 큰 그림을 보시면서 제 손 안에 쥐고 가끔씩 펼 수 있었던 나침반을 닫아주지 마시길 빕니다.

토탈리콜 2010-01-01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b를 대통으로 뽑은 나라에서 이모든 얘기가 씨나락 까먹는 얘기가 아닌지..ㅋㅋㅋ

책읽는아저씨 2010-01-0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래 폭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위 국가권력이 남용하는 공권력도 문제지만, 약자들의 대변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폭력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게 정당한걸까요?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권력자가 남용한 폭력은 정당한걸까요? 아니면, 국가의 공권력 남용에 맞섬으로 발생된 사회적 약자들의 폭력은 정당한걸까요? 정말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둘 다 폭력이라고 볼 겁니다. 오히려 저는 가끔이지만, 정말 그들이 약자들을 대변하고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그들은 무서운 자기 확신을 가진 자들이 아닐까 하는.. 여하튼, 로쟈님을 아끼는 사람으로써, 블로그를 계속 볼 수 있게 되기를...

푸하 2010-01-02 21:47   좋아요 0 | URL
지금 이 상황이 사회적 약자들의 폭력이라고 보시는데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세세하게 보지 않으시고 말을 하시는 것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브릿슬코파인님의 말씀이 폭력일 수 있습니다. 좀 더 상세히 상황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책읽는아저씨 2010-01-03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먼저 이 상황을 폭력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폭력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낸것 뿐입니다. 기업이 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단순한 말이었고, 그 개인이 저항하는 가운데 기업에게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한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는 말이었죠.

사람은 생각이 다르니 건설한 이야기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매도하거나 공격하는건 온당치 못합니다. '내 생각은 이러한데, 당신의 생각은 이러하구나..' 이렇게 접근해야지, 누군가를 계도할 대상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고, 소통이 가능합니까?

그리고 상대방의 글이 의미를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읽는 이는 더더욱 다르게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그런 걸 다 감안하고 상대방과 이야기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무작정 단정짓고 이야기하다 보면,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오해하신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저는 생각이 다 다르다 해도, 이 세상은 함께 살아가나는 곳이라 여깁니다

푸하 2010-01-03 05:29   좋아요 0 | URL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을 드린 점 죄송합니다.

로쟈님의 페이퍼 내용과 브릿슬콘파인님의 댓글 내용에서 나타나는 맥락(제가 이해한 바로는)에서 저는 브릿슬콘파인님의 '단순한 의미에서의 폭력'이라는 말씀과 엮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판단이 맞다면 제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로쟈님과 의견이 다른 몇 몇 서재인들이 '매우 심한 분'도 있지만 대부분 상대의 글을 열심히 읽고 그 뜻을 정확히 헤아려 의견을 내시는 분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런 점에서 몇 몇 분들이 그 내용과는 다르게 매우 공격적인 언사로 로쟈님에게 말하는 것에 대해 '이러면 안되는데...'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저기 위에 제가 단 '정군'님에 대한 댓글에서도 나타날 거에요. 여튼 저는 그런 '공격성'은 폭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좀 더 깊은 곳에서는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려는 욕구도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욱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상황이 복잡하고 현실이 애매하지만 저는 현재 로쟈님과 다른 분들의 다툼이 깊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의견교환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여튼 제가 짧은 글로 말을 함부로한 점 사과드립니다. 제 과제가 끝나면 좀 더 정돈된 생각으로 글을 쓰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