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267호)에 실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레이몬드 고이스의 <공적 선 사적 선>(기파랑, 2010)을 다루고 있다. 짐작엔 이 책에 대한 유일한 서평일 듯싶은데, 책에 대한 평가보다는 내용을 간추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책의 의의는 공과 사, 곧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해 한번 다시 생각해보도록 한 데 있다.  

기획회의(10. 03. 05)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인문서에 대한 관심은 보통 저자에 대한 관심이거나 책의 주제에 대한 관심이다. 레이몬드 고이스의 <공적 선(善) 사적 선(善)>의 경우는 후자인데, 책을 읽고 난 감상으론 전자로 이행해도 좋겠다는 쪽이다. 얇은 분량이지만 여러 모로 유익했다는 판단에서다. 얇다고는 해도 저자가 일반 독자들을 고려한 것 같지는 않다. 학술서의 문체에다 많은 각주를 거느리고 있어서 예상보다는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책의 맨 앞에 배치된 ‘옮긴이의 말’이 일단은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준다. 저자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정치철학이 전문분야라는 것과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교리나 이데올로기들을 해체하는 데 주력했다. 니체에게 그것이 기독교였다면 고이스에게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다.” 말하자면 ‘자유주의라는 교리’의 비판과 해체가 저자의 주된 관심분야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교리는 무엇일까? 공과 사, 곧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 아닐까? 거기에 덧붙여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최대한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한데 “고이스는 이 책에서  이러한 우리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타인을 경쟁자로 인식하도록 요구하는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그리 깔끔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도 저자의 주된 논지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입장은 이렇다. “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으며, 일련의 대조적인 사항들이 중첩되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은 생각과는 달리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공과 사의 명확한 구분이라는 환상을 해체하기 위해서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니체식 계보학이다(실제로 그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초기 유고>의 비평판 편집에도 관여한 바 있다). 미셸 푸코도 방법론으로 이용한 적이 있지만, 계보학적 고찰이란 어떤 사상이나 관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며 역사적 우연이라는 걸 보여주는 식이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기독교적 선/악이라는 것이 나쁨/좋음이라는 귀족적 윤리가 전도된 것에 불과하다고 폭로한 것이 좋은 예이다. 고이스는 공(公)사(私)구분의 역사성과 우연성을 드러내주기 위해 세 가지 인물의 사례를 검토한다. 디오게네스와 카이사르,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들이다.  

 

기원전 4세기 사람인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의 시장 한복판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아테네는 그런 행위가 통제되지 않는, 문화적 진화의 수준이 낮은 사회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디오게네스의 행위에 불쾌감을 느끼고 그를 비판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디오게네스 자신은 그러한 행위가 배가 고프면 배를 쓰다듬어서 허기를 달래는 것처럼 단순한 행위일 뿐이라고 답했다 한다. 여기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못 본 체함의 원리’의 적용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즉 공적 공간은 못 본 체함의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고, 사적 공간은 반면에 사적 공간은 못 본 체함의 원리를 어겨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당시 아테네에는 공적/사적이란 개념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었지만, 디오게네스는 사적으로 해야 할 일을 공적으로 행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테네인들과는 달리 로마인들은 공적인 것(Publicus)과 사적인 것(Privatus)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구분을 갖고 있었다(영어의 구분 자체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로마 공화국 말기였던 기원전 50년 말 원로원은 갈리아(골)의 총독 카이사르를 소환했다. 여러 정치적인 변칙행위를 문제삼은 것인데, 만약 지휘권을 후임자에게 넘겨주고 ‘사적인 시민’으로 돌아와 재판을 받지 않으면 카이사르는 ‘공공의 적’으로 선포될 처지였다. 이때 ‘공공의 것’을 뜻하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란 말이 흥미롭다. 오늘날 ‘공화국(republic)’이란 말의 어원이기도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공동선에 대한 관념만 있었지 추상적 권력구조로서 국가라는 개념은 없었다(즉 ‘로마 국가’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일단 publica는 populus(인민)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수액이 풍부한 나무처럼 활기찬 성인 남자와 소년, 곧 군대에 갈 수 있었던 남자를 가리켰다. ‘군단을 형성할 남자들’ 혹은 ‘무장할 수 있는 남자들의 집합’이 인민이었다. 그리고 공적인 것이란 ‘전체 인민에게 속하는 것’이란 뜻이었다. 거기서 차츰 ‘공공의 것’이 갖는 다의적 의미가 형성되는데, 저자는 네 가지로 간추린다. (a)군대의 재산 (b)로마인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현상유지 (c)로마인의 공동관심사 (d)로마인이 공동선.  

  

여기서 공동관심사라는 것은 군대 모든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집단에도 영향을 미치는 걸 뜻했다. 그리고 공동선은 각각의 시민이 소유한 가축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원과 교량의 수가 늘어나는 걸 의미했다. 공동의 관심사가 존재한다면 특수한 개인이나 집단을 지명하여 그 문제에 전념하도록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런 공직을 맡은 사람을 ‘정무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적인(priuatus)’란 단어는 그런 정무관직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공적 권위나 권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였다. 원로원의 소환에 맞서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내가 이 강을 건너지 않는다면, 나는 곤경에 처한다. 내가 이 강을 건너면, 세계가 곤경에 처한다.” 그는 공동선에 앞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선택한 것이었다.   

한편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사적인 것은 내면의 삶을 뜻했다. 디오게네스의 경우에 사적인 것이란 다른 사람들을 역겹게 하지 않기 위해서 피해 들어가야 할 장소였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자기 마음에서 찾아낸 존재론적으로 특권적인 장소였다. 카이사르에게서 지위가 공동선과 갈등을 빚어내는 사적인 내용을 품고 있었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성과 같은 의미에서의 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내 은행 잔고”이다. 요컨대 공과 사에 대한 단 하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계보학적 고찰을 통해서 현대 자유주의가 사적 영역의 핵심으로 침해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유재산권 등을 상대화한다. ‘민주공화국’에 사는 시민으로서 숙고해볼 만한 문제다.  

10. 03. 12. 

 

P.S. 저자의 책으론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비판이론의 이념>(서광사, 2006)이 먼저 출간돼 있다. 'Raymond Geuss'가 '레이몬드 게스'라고 표기됐고 얼추 그렇게 읽음 직한데, '레이몬드 고이스'가 맞는 표기인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리뷰를 기획하면서는 미조구치 유조의 <중국의 공과 사>(신서원, 2004)도 같이 읽어보려고 했지만, 사정의 여의치 않았다.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의 <중국의 '자유' 전통>(이산, 1998)까지 관심권에 두었지만 책을 구해놓는 데 그쳤다. 실상은 마감에 쫓겨 쓰느라 <공적 선 사적 선>의 문제제기도 충분히 다룬 건 아니다(마지막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란 주제는 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음, 2010)에서도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기회를 보아 한번 더 '공부'해볼 참이다. 게스/구이스와 같이 읽을 저자는 같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정치사상사를 강의하는 퀜틴 스키너이다. 그는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2007)에서 이사야 벌린 등의 '자유주의 자유론' 대신에 '공화주의 자유론'을 옹호하는데, '자유주의 비판'이란 점에서 게스/구이스와 입장을 같이한다(역자도 같다). 두 사람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나오는 '정치사상사' 시리즈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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