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두 차례 발간되는 기획회의(265호)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전문가 리뷰' 코너의 인문분야 서평을 한달에 한번씩 연재하게 됐는데, 첫번째로 고른 책이 도널드 폴킹혼의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학지사, 2009)이다. 관심분야의 책이면서도 비교적 주목받지 않은 인문서를 다루려는 의도에서 선택했다. 배송사고인지 잡지를 받아보지 못해서 아래의 글은 편집본이 아닌 최종 원고이다. 편집본을 확인하고 몇 마디 덧붙이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원서는 기한이 다 되어 오늘 반납했다.  

기획회의(10. 02. 05)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

대형서점 서가의 한 구석에서 우연히 건진 책이다. “이 책은 Donald E. Polkinghorne이 집필한 Narrative Knowing and the Human Sciences(1988)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역자 서문’에 적혀 있다. Polkinghorne을 ‘폴킹혼’으로 옮기지 않고 영문 알파벳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짐작에 교육학계의 ‘관행’인 듯싶다. 하지만 본문에서 다른 고유명사는 ‘시모어 사라손(Seymour Sarason)’이란 식으로 병기해주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좀 튀는 관행이다.   

도널드 폴킹혼이란 저자명은 생소하지만,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란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부제는 한술 더 떠서 ‘인문과학연구의 새 지평’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따로 구한 원서에는 부제가 붙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국역본의 부제는 역자들의 기대를 적어놓은 것인 듯싶다. 역자와 저자의 서문을 참고해보면, 이 기대는 어떤 문제의식과 연관돼 있다.  

이 책을 “인간 존재의 문제에 주목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새로운 렌즈로 어떻게 학문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라고 평하는 역자는 지금까지의 인문사회과학이 ‘양적인 연구방법’에 치중해왔으며 ‘연구와 실찬 간의 분리’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것이 “인문과학 연구들의 빈약성 혹은 방법론의 부적절성”을 낳고 있으며 인문과학에 대한 신뢰를 점점 떨어뜨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반면에 심리치료사, 카운슬러, 조직 컨설턴트 등 다양한 실천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어떤 차이 때문일까? 다름 아니라 “실천가들이 내러티브적 지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 곧 ‘내러티브’가 핵심이고 변수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연구와 실천에 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저자 폴킹혼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저자의 강점은 그가 상담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임상의학자라는 데 있다. ‘학문적인 연구자’와 ‘실천적인 심리치료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해오면서 그는 임상의학자로서의 경험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학문적 연구 결과를 찾을 수 없었다는 문제점에 봉착한다. 인문사회과학에 거액의 공공자금이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진전을 보이지 못한 것도 ‘인간에 대한 학문’의 연구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때문에 그는 자연과학의 모델이나 수리적 형식과학의 방법론이 인문과학에 과연 적합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유일한 특성에 대해 좀 더 특별히 민감한, 추가적이고 보완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인간 존재의 유일한 특성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보기에 인간은 세 가지 존재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물질 영역과 유기체(생물체) 영역, 그리고 정신(의미) 영역이 그것이다. 인간의 물질적 속성은 다른 비인간 물체들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가령,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사람은 다른 물체와 똑같은 가속도로 낙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유기체적 기능 또한 다른 생물체와 다른 특별한 차이점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의미 영역만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리고 내러티브는 바로 이 의미 영역의 작용 가운데 하나이다.  

의미 영역과 관련하여 저자는 기존의 ‘의미의 철학’보다 한 단계 진전된 생각을 전개하는데, 그것은 의미의 영역이 어떤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점이다. 의미 영역에 대한 철학적 혼란은 대부분 의미를 실체로서 규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집짓기와 글쓰기가 어떤 수행이지 실체가 아닌 것처럼 활동으로서의 의미 영역도 명사가 아닌 동사의 형태로 기술된다. 그러한 활동에서 “마음의 정신적 영역을 통해 만들어진 의미의 한 유형”으로서 내러티브는 “특별한 성과를 내는 사건들의 기여에 주목함으로써 그 의미를 창안해내고, 그래서 이러한 부분들을 전체적인 에피소드 속으로 잘 배열하여 의미를 형성하게 한다.”  

의미 영역이 물질 영역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면 의미 영역에 대한 연구 또한 물질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차별화될 필요가 있다. 이때 새로운 참조점이 돼주는 것은 역사학과 문학비평이다. 이들 분야는 언어 표현을 통한 의미의 영역, 특히 내러티브를 연구하는 절차와 방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과학은 이제라도 자연과학보다는 그런 쪽으로 더 천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내러티브를 매개로 하여 역사/문학 이론과 인문과학의 만남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이때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문과학은 주로 ‘심리학’이다. 때문에 역사학과 문학이론 분야에서 내러티브 연구의 성과를 개관하는 ‘역사와 내러티브’ ‘문학과 내러티브’ 두 장에 이어지는 것이 ‘심리학과 내러티브’이다. 이러한 검토를 바탕으로 폴킹혼은 인문과학을 위한 내러티브 이론의 종합을 ‘시간성’과 ‘행위’ 그리고 ‘자아’와 내러티브의 관계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며, 심리치료의 이론적 기초를 타진하는 ‘실천과 내러티브’로 마무리한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내러티브 형식의 설명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그것은 구성 구조 속에 시간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을 범주화하는 형식적 구성과는 매우 다르다. 자아 이해를 위한 시간 질서의 중요성은 아직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러티브는 도처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생성하고 구성하기 위한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이제 겨우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문과학연구의 새 지평’을 찾아서 인내심을 갖고 따라온 독자에겐 다소 불만스러운 대목이다. 바로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의 역할에 관한 의식은 최근에야 인문과학에서 부상했다. 이러한 의식은 인문과학이 의미 영역을 향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으며 미래의 연구를 위한 초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히는데, 그 ‘최근’의 시점이 1988년이다! 유감스럽게도 20년도 더 전인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에서건 고전적인 저작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 의의를 갖지만, 어떤 이론서나 학술서가 20년의 세월을 버텨낸다는 건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과연 이 책이 그러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가. 인문과학의 ‘내러티브적 전환’을 가리키는 저작 정도가 아닐까. 참고로, 저자도 인용하는 월리스 마틴의 <내러티브에 관한 최근 이론(Recent Theories of Narrative))>(1986)이 <소설이론의 역사>(현대소설사, 1991)란 제목으로 출간됐던 게 벌써 20년쯤 전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내가 궁금한 건, 그리고 읽고 싶은 건 그 20년 후의 이야기이다. 서사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책이 소개될 때가 됐다.  

10. 02. 27.  

P.S. 국내에서는 소강상태이지만, 서사학(narratology) 관련서는 영어권에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개인적으론 다윈주의 서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찾아보니 국내에도 소개된 미케 발의 입문서는 작년에 3판이 출간됐다. 번역본이 좀 부실한데, 이 참에 재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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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10-03-0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로쟈님께서 소개해 주시니 반갑네요^^ 몸 담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각 분야에 따라 이 책에 대한 입장이 다를 겁니다. 20년이나 된 책이지만 제 생각엔 내러티브와 인문학의 관계를 이 만큼 포괄적으로 다룬 책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 책 이후에는 내러티브와 개별 학문 간의 각개 전투만이 난무하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 글을 보니 로쟈님의 독서의 폭은 어느 정도일까 가늠이 안 되네요^^

로쟈 2010-03-01 22:39   좋아요 0 | URL
역사학과 문학이론쪽의 서사학을 다룬 장들은 솔직히 식상했습니다. 별로 새로운 게 없어서요.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에겐 그 다음이 궁금한데, 책은 거기까지 다루지 않더군요.--;

비로그인 2010-03-04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다윈주의 서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선생님 글을 읽다보면.. 제가 깜짝놀랄일이 많네요^^ 기상천외한 애니메이션을 오래전에 구상한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다윈주의 서사학이라는 걸 방금 알았거든요..

언제쓰여질지 모르지만 제가 보물로 간직하고 있는 거니까 언젠가는 쓰여질날이 있겠지요..ㅎㅎ^^

그리고 로쟈의 인문학서재 읽고 있는데 선생님 책 세계최고예요^^ 눈이 높은 제가 감동을 받고 있으니까요..

로쟈 2010-03-05 00:39   좋아요 0 | URL
제가 세계최고의 독자를 만났군요.^^
 

어제는 '그 겨울의 끝'이라고 할 만한 날씨였다. 연체된 책들을 잔뜩 양손에 들고 가 도서관에 반납한 후에 다시 강의와 관련한 책들을 가득 담아 나르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는데, 돌아오는 좌석버스 안에서 잠시 에어컨이 틀어질 정도였다(만원 버스이긴 했다). 겨우내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만시지탄이다. 남은 10개월을 위해 구두끈을 조일 따름(일에 관한 한 아마도 가장 바쁘고 중요한 해가 될 듯싶다). 주말엔 연체된 일들 외에도 나쓰메 소세키와 셰익스피어와 소비사회에 관한 강의준비를 해야 한다. 소비사회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윤리적 소비'에 관한 책 두 권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전/현직 기자들이 쓴 <윤리적 소비>(메디치, 2010)와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의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윤리에 대한 의견차가 눈길을 끈다.   

서울신문(10. 02. 27) 쇼핑몰은 중산층의 새로운 ‘성당’

대형마트들이 가격 경쟁을 벌인다. 이른바 마트 전쟁이다. 소비자라면 당연히 보다 싼 가격에 눈길이 가기 마련. 그런데 소비자에게 이로울 것 같은 마트 전쟁이 납품업체의 큰 피해를 부른다면? 축구공 한번 야무지다. 세계적인 브랜드치곤 싸다. 어린이들이 형편 없는 일당을 받고 하루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바느질을 해서 만든 것이라면? 겨울철에 먹는 칠레산 포도. 맛도 나쁘지 않다. 한국까지 오는 동안 냉장 보관을 위해 수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다면?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내 피부에 딱 맞는 것 같다. 사람 눈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토끼를 상대로 실험을 했다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우리는 배웠다. 가격과 품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소의 비용으로 가장 만족도가 큰 제품을 선택하라고. 그게 합리적인 소비다. 그런데 이제 합리적인 소비를 뛰어넘어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를 논하는 시대가 왔다. 생산에서부터 유통, 소비는 물론 이후 처리와 재생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지갑을 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합리적인 소비는 동물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착한 소비는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것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소비는 단순하게 개개인의 착한 소비 생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기업에 윤리적인 변화와 행동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 아동 노동력을 쓰던 나이키도 전세계 소비자들의 압박에 무릎을 꿇고 노동자 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하청 업체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지 않았던가.  

전·현직 기자들이 함께 쓴 ‘윤리적 소비’(박지희·김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는 새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윤리적 소비에 대한 개념과 역사,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공정 무역에서부터 공정 여행까지 우리 삶에 폭넓게 파고든 윤리적 소비를 접해볼 수 있다.

저자들은 세계적인 흐름에 견줘 국내 상황도 짚어보며 소비가 더이상 개인의 행복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도구로 바뀌어가고 있고, 더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들이 인용한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쇼핑에 도덕성이 개입되고 있다. 쇼핑몰은 중산층의 새로운 ‘성당’이다. 쇼핑객들의 새로운 종교는 윤리로 무장한 소비자 보호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홍지민기자)   

시사IN(10. 02. 25) 공정무역 실체는 역겨운 장삿속

<녹색평론> 같은 매체를 통해서 천규석 선생의 글을 간간이 읽어온 터이지만, 눈썹에 힘을 주고 저서를 정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자의 강단 있는 언어와 추상같은 비판, 현실과 미래의 문명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제기되는 불편한 진실 가운데 역시 논란이 되는 것은 공정무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생산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기 위해 소비자와의 국제적인 직거래를 통해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식품을 소비하는 공정무역 운동이 우리 사회에도 퍽 낯익은 것이 되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오로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제3세계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의 커피나 설탕산업에 비해, 공정무역의 형태로 생산자의 소득을 더 많이 보전해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여러 형태의 시민단체나 생협을 중심으로 공정무역 상품이란 것이 출시되고, 윤리적 소비를 의식하는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천규석 선생은 그런 공정무역의 확산이 전혀 윤리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공정무역이란 결과적으로 보면 히말라야 오지의 산악국가까지 (자급 대신) 세계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는데 그런 장삿속을 인도적 지원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역겹다는 것이다. 천규석 선생은 다른 제조업도 그러하지만, 커피나 사탕수수 같은 대규모 단작농업에 의존하는 기호식품 생산이 유럽의 식민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 토착 지역의 자급 구조를 붕괴해 오늘과 같은 수탈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일단 토착 지역의 자급자족구조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동시에 국내의 시민단체나 생협이 공정무역에 앞장서기보다는 도농 간의 농산물 직거래라는 원래 취지를 상기함으로써, 농업의 자급구조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도농 직거래가 원거리 거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지역의 마을공동체 또는 농촌공동체와 노동조합들이 노·농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최근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서 시작한 노동자 생협이 그러한 모델에 해당될 것이다.  



자급자족은 ‘민중의 자치’ 가능케 하는 토대
선생은 최선의 윤리적 소비는 자급자족을 촉진하는 소비이며, 자급자족 구조의 내실화만이 생태적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자급자족이 단지 먹을거리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자급자족은 민중의 자치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 토대라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거꾸로 오늘날의 세계분업적 무역체제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가라는 존재는 이 토대를 붕괴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반인간적 체제라는 것이다.

천규석 선생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다만 윤리적 소비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국가와 자본의 가공할 압력을 거슬러 민중이 스스로의 삶과 민주주의를 보존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이 책에는 거듭 제기된다. 혹자는 이 책에서 제기되는 주장들을 현실성 없는 ‘근본생태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곰곰 읽어보면 백척간두에 선 문명의 임박한 파국에 대한 이유 있는 경고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명원_문학 평론가)  

10. 02. 27.  

 

P.S.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에 관한 책들이 부쩍 늘어났는데, 이 또한 하나의 '트렌드'일까?    

도화선이 된 건 작년초 한겨레21의 기사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해본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카카오 농사를 짓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초콜릿은 천국의 맛이겠죠'란 표지기사였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258.html). 공정무역이 어떤 것인가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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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e 2010-02-27 01:32   좋아요 0 | URL
공정무역 좋아요, 라는 댓글을 달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기사를 보니 전혀 다른 견해가 새롭습니다.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 두가지 모두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국내 문제도 많은데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는 뭐하러 돕나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사실 국내 농산물 직거래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보는데 제대로 된 채널을 마련하는게 급선문 같습니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처음 십 년'이라는 생태신문 창간호를 보았습니다. 거기서도 생협 얘기가 나왔는데 소비자가 쉽게 찾을 수 있는 매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창간호 특집 1면 기사는 성미산 마을극장 대표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는데 읽으면서 아무래도 성미산 마을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체 가이드도 있다고 하네요.

로쟈 2010-02-28 12:52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신문도 있군요.^^;

sophie 2010-03-01 01:39   좋아요 0 | URL
아.. 네.. 댓글이 좀 길었죠? ^^;;

노이에자이트 2010-02-27 21:09   좋아요 0 | URL
녹색평론에 실린 글이나 <유목주의~><소농버리고~>를 읽어봤는데 천규석 씨 글은 좋은 주장이구나 하다가도 너무 내치고 까는 글이라서 좀 읽기가...반대진영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찌르는 느낌...특히 명망있는 시민운동가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더라구요.물론 그것도 글쓰는 개성이라면 할말이 없겠습니다만...

로쟈 2010-02-28 12:52   좋아요 0 | URL
꼬장꼬장한 성격이신가 봅니다...

사량 2010-02-28 15:26   좋아요 0 | URL
천규덕 선생의 새 책에 대해선 몇 주 전 <한겨레>에 실린 서평도 한번 보세요. 더 자세하고 인터뷰까지 있어서 유용하답니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4523.html
 

관심을 끄는 철학신간은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음, 2010)이다. 헤겔 전문가에다 공동체주의 철학자 정도로 자림매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그러한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도 흥미를 끈다. 근대의 사회적 상상이라니? 소개글의 일부는 이렇다.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찰스 테일러의 철학적 작업과 정치적 실천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서구 사회가 약 400년에 걸쳐 겪어온 근대성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문화적 변화와 그 상상적 기반을 재구성하고 있다. 찰스 테일러가 이야기하는 ‘사회적 상상’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실존에 대해 상상하는 방식,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가는 방식, 사람들 사이에서 일이 돌아가는 방식, 통상 충족되곤 하는 기대들, 그리고 그러한 기대들의 아래에 놓인 심층의 규범적 개념과 이미지들이다. 사회적 상상은 공통의 실천을 가능하게 만들고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도록 한다. 일단 사회적 상상 안에 안착하게 되면, 그 상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의 토대는 생각보다 연약하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급하게 읽어보고픈 욕구를 부추긴다. 테일러의 책은 그간에 몇 권이 출간됐고, 대표작인 <자아의 원천들>(1983)도 어쩌면 번역본으로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른다. 몇 권의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1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근대의 사회적 상상- 경제·공론장·인민 주권
찰스 테일러 지음, 이상길 옮김 / 이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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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Social Imaginaries (Paperback)
Charles Taylor / Duke Univ Pr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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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of the Self: The Making of the Modern Identity (Paperback)
Charles Taylor / Harvard Univ Pr / 1992년 3월
70,000원 → 57,400원(18%할인) / 마일리지 2,8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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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와 현대문명- 다산기념 철학강좌 6
찰스 테일러 지음, 김선욱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3년 11월
20,000원 → 20,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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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 2010-02-26 03:09   좋아요 0 | URL
듣고 있는 수업에서 찰스 테일러의 A Secular Age를 읽어보라고 해서 조금 읽고 있는 도중에 이 포스팅을 읽으니 반갑네요. 교수님 말로는 최근에 나온 종교와 근대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거의 900쪽에 육박해서 번역본으로는 나오기 힘들것 같네요...

로쟈 2010-02-26 09:26   좋아요 0 | URL
생각했던 것보다 대저로군요. 두 학기 동안 읽으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10-02-27 21:11   좋아요 0 | URL
독일사상 연구가 취약한 영어권에서는 유명한 헤겔 학자이지요.광주 전남대에 강연하러 오기도 했구요(요건 최근에 알았습니다.2002년에 왔더라구요).그의 주저인 <헤겔>이 아직 번역이 안되어 있는 것 같아요.

로쟈 2010-02-28 12:49   좋아요 0 | URL
독일보단 취약하단 말씀인가요?^^ <헤겔>은 분량도 방대해서 나오기 어렵겠죠. <자아의 원천>은 번역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28 15:08   좋아요 0 | URL
<이성과 혁명>은 워낙 독일 관념론에 대해 영미권 지식대중들의 이해가 빈약해서 마르쿠제가 그들에게 읽히려고 집필했다고 나와 있더군요.앨빈 굴드너<두 개의 맑시즘>역자 해설에는 미국사회학자들이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도 소화를 못한다는 일화가 나와 있구요.아무래도 영미권의 철학이나 사상은 유럽대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습니다.
 
윤치호와 친일청산의 방식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대로는 다가오는 3.1절도 고려해서 고른 책이 박지향 교수의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 2010)다. '과거는 낯선 나라'란 말도 있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윤치호의 내면과 우리시대의 많은 초상들이 겹쳐지는 걸 느꼈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은 후기에 덧붙여 놓았다.   

한겨레21(10. 03. 01)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 

<윤치호의 협력일기>(이숲 펴냄)는 서양사학자 박지향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가 ‘제대로 된’ 친일청산을 주창하며 내놓은 저작이다. 기존의 친일청산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족주의 사관’이다.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이젠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범적으로 시도한 것이 ‘윤치호 다시 보기’다. 일제 시기 대표적 지식인이자 사회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친일파의 거두’였던 윤치호(1865-1945)의 사상과 내면을 그가 남긴 방대한 분량의 영어 일기를 통해 재구성하고 재평가하고자 한다.   

윤치호는 어떤 인물이었나? 젊은 시절 오랜 유학생활과 교사생활을 거친 윤치호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국제적 배경에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사상으로 저자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를 꼽는다.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윤치호는 이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인식을 일생 동안 견지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이 세상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쫓아내는 곳이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떠 전사적 정신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에게 어떤 민족이 약한 것은 그 민족의 죄이지 다른 민족의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유와 정치적 독립은 만세운동으로 가능하지 않았고, 제 힘으로 싸워서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회적 다윈주의와는 잘 맞지 않아 보이지만,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문명 수준이 앞선 나라가 뒤진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고, 강한 인종이 약한 인종을 가르치면서 범한 일부 범죄는 ‘필요악’으로 용인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정신의 소유자였지만, 윤치호에게 그 백성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1천 명 가운데 채 한 명도 신문을 읽지 않는 무지한 대중이 ‘강건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윤치호는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에는 첫째로 국민이 지성과 부와 공공정신을 갖추고, 둘째로 국제정치적으로 찾아오는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독립보다는 실용적인 교육을 우선시했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는 너무 엄격한 잣대로 사회발전과 대중의 수준을 평가하였다.” 결과적으론 동족에 대한 불신과 이민족 지배의 정당화로 나아가게 했다.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조선 민족이 살아남으려면 마치 스코틀랜드가 영국에 동화한 것처럼 조선도 당분간은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것이 현실주의자로서 그가 ‘저항’ 대신에 ‘협력’을 선택한 논리다.  

 

협력이란 ‘조국을 배반하고 적과 협조하는 것’을 뜻하지만, 저자는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의 탈신화화와 협력행위에 대한 재평가를 사례로 들어 저항과 협력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협력과 저항 모두 자립을 목표로 하지만 단지 그것을 성취하려는 수단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친일 민족주의자’라는 새로운 범주의 도입까지도 필요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혹 윤치호는 ‘친일 민족주의자’였던 것일까? 

“윤치호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일생 지녔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에필로그에 적었다. 윤치호의 입장을 내재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 접근법의 한계에 대한 고백으로도 읽힌다.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같은 것이 아닐까. 인질로 잡힌 사람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어 오히려 그에게 호감과 지지를 내보이는 심리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10. 02. 24.  

P.S.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이었다. 먼저 민주주의에 대해서.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서양 근대문명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윤치호가 영국과 미국에 실망했으면서도 여전히 영미식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은 해방 후 그가 쓴 서한에서도 드러난다. "듣자니 조선 사람들이 민주정부 출범에 관해 거론한다는 데 내겐 마치 6세 어린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을 거론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영국과 미국 두 나라만이 세계에서 민주주의로 성공한 유일한 나라들입니다."(199-200쪽)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다. 유교 사회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본 것인데(둘다 기생적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점은 음미해볼 만한 게 아닌가 싶다.  

윤치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유교사회의 윤리와 공산주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한데 공산주의는 유쿄보다 더 나쁘다. "유교는 구걸하는 것을 용서할 만한 '약점'으로 만들지만, 조선 버전의 볼셰비즘은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에 볼셰비즘이 창궐하는 이유는 기생주의라는 습성 외에 일본 정책이 조선 사람에게서 먹고살 수단을 빼앗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치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상태, 그리고 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143쪽) 

'공산주의=기생주의'라는 주장이라면 크게 놀랍지 않은데, 놀라운 것은 그가 공산주의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보는 이유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상에서 아직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최고 수준의 협조적 문명"을 획득한 국민에게나 가능한 것인데 조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앵글로색슨인들조차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해방후에도 윤치호는 공산주의의 위험을 심각하게 경고하였는데 여기서도 역사발전 단계론에 대한 그의 점진주의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몇몇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영국이 고도의 정치력과 노련한 지혜를 가지고 서서히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유도해 가고 있다 하더라도, 대한조선이 어떻게 진짜 사회주의의 ABCD도 모르면서 인민공화국체제를 경영할 수가 있겠습니까?"(143-4쪽) 

인용문은 모두 해방후에 윤치호가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영문으로 써서 보냈다는 서신 '한 노인의 명상록'에 들어 있으며, <좌옹 윤치호 서한집>(국산편찬위원회 편, 1995)이 출전이다. 절판된 책인데, 기회가 되면 도서관에서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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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2-2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시 정부에 대한 프랑스인의 묵인을 캐내는 것은 레지스탕스를 거국적으로 했다는 신화깨기의 핵심입니다.신화깨기를 자세히 살핀 게 <비시 신드롬>인데 우리가 이 문제를 차분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감정적인 인신공격성 욕설이 난무하겠지요.너 친일파 아니냐 너 빨갱이지...하는 식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흠집내려는 의도가 있기도 하지만 박지향이나 이영훈의 문제제기도 정정당당히 평가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10-02-28 12:45   좋아요 0 | URL
윤치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근대사와 한국사회의 많은 대목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보는데, 무조건 백안시하는 태도가 많더군요...

비로그인 2010-03-04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말을 듣고 보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신채호 전집(전집이 있는지 모르겠네)을 읽어보고 싶어요..

청소년 용으로 나온 책중에 용이야가 나오는 책이 있는데 익숙치는 않았지만 꽤 재미있고 활달해지더라구요.. 제가 무협지를 좋아해서 그런지 어쩐지 엄청.. 배꼽이 아플정도로 웃었다는.. 거기다가 메세지도 만만치 않고..

로쟈 2010-03-05 00:41   좋아요 0 | URL
윤치호와 유길준에 대해 몇 권 읽어보려고 합니다. 나이들면서 왜 점점 읽을 책이 많아지는지 모르겠어요. 체력은 떨어지는데요.^^;

2010-03-05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어제 수유너머N에서 발표한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의 나머지 대목을 마저 옮겨놓는다. '코뮌적' 공간에서 '레닌주의'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한다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밤기차로 지방에 문상을 가야 했던 탓에(오늘 새벽차로 올라왔다) 뒷풀이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발표회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아래의 글은 약간 조정한 걸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이다. 단, 오탈자를 바로잡고 'wholesome terror'의 번역을 수정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는 제가 작년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과 함께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지만, 소위 ‘지젝의 혁명론’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자극적인 책입니다(들뢰즈적 감응(affect)을 불러일으키는 책입니다!). ‘과거로부터의 교훈’은 전체 3부 가운데 제2부에 해당하며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4장), 스탈린주의(5장), 포퓰리즘(6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기에, 저로선 책의 내용을 조금 더 편하게 풀어서 전달하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입니다.   

 

“평화로운 시기 인민정부의 동력이 덕(virtue)이라면, 혁명의 와중에 있는 인민정부의 동력은 덕과 동시에 폭력이다. 덕이 없는 폭력은 맹목적이며, 폭력 없는 덕은 무력하다. 폭력은 즉각적이고 엄중하며 불굴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덕의 분출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가장 절박한 필요에 조응하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특별한 원칙이다.”(<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240쪽)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며 강직한 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포는 미덕의 발현체이며, 구체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이 조국의 절박한 필요에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 13쪽, 231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It is less a special principle than a consequence of the general principle of democracy applied to our country's most pressing needs.”입니다. 요점은 ‘혁명적 폭력(terror)’ 혹은 ‘공포정치’가 특수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일반원칙을 긴박한 상황적 요구에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죠. 더불어, 로베스피에르에게서 혁명적 폭력은 정확히 전쟁과 대립하는 것이었다고 지젝은 지적합니다. 국가 간 전쟁은 보통 개별 국가 내부의 혁명적 투쟁을 봉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죠(물론 이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입니다). 실제로 루이 16세는 체포되기 며칠 전에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프랑스와 유럽 국간들 간의 대전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왕은 애국자연하면서 프랑스 군대를 이끌다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이고 그의 권력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을 겁니다. 즉 ‘평화로운’ 루이 16세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유럽을 전쟁으로 내몰 준비가 돼 있는 군주였던 것이죠. 지젝은 자코뱅의 혁명적 폭력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 법과 질서의 ‘초석적 범죄’라고 절반쯤 정당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것을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참고한 건 엥겔스의 말입니다.

최근 사회-민주주의적 실리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에 대해 건강한 폭력을 마음속에 떠올리고 있다. 좋다. 신사 양반들, 이 독재가 무엇과 같은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뮨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잃어버린 대의>, 244쪽)

최근 들어 사회민주주의적 속물들이 다시 한 번 이 말을 듣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좋습니다,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럼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습니다.”(<덕치와 공포정치>, 16쪽)

첫 문장의 원문은 “Of late, the Social-Democratic philistine has once more been filled with wholesome terror at the words: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입니다. 요즘 들어 사민당의 속물들이 ‘프롤레타리아독재’란 말에서 공포감을 느끼는데, '독재'라는 말의 어감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두려울 게 없다,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지젝은 엥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적 폭력=비인간적 폭력=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등가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죠. 거기서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중요하지만 오해된 대목이기도 해서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인민의 의지를 수행하는 도구로서 행위하고 있다’라는 도착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고독한 주권적 결정의 영웅적 승인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이뤄진(살인의 결정, 자기 자신의 삶을 상실할 위험을 무릅쓴) 결정. 대타자에 근거하거나 그것에 보호받지 않는 결정이다. 만약 그것이 삶의 유한성을 초월하지 않는다면, 즉 ‘불멸’이 아니라면 그 실행자에게 천사의 무고함으로 살인할 면허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신적 폭력의 모토는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는 세우라’이다. ‘인민’(익명의 ‘몫 없는 자들’)이 테러를 강요하고 다른 몫 있는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정의를 통해서, 정의와 복수 사이의 구분 불가능한 지점을 통해서이다.”(<잃어버린 대의>, 246쪽)
“‘우리는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수단으로서 이 폭력을 사용한다’는 식의 왜곡된 의미가 아니라, 자주적 결정의 외로움에 대한 대담한 가정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위험에 빠뜨리거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결정은 거대한 타자가 떠맡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도덕 외적인 것이라고 해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천사와 같은 무구한 마음으로 분별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도 아니다. 신성한 폭력의 모토는 ‘세상이 무너질지라도 정의를 세워라’이다. 이것은 정의와 복수를 구별할 수 없는 지점에 존재하는 정의를 말한다. 이 정의로움으로 ‘민중’(역할이 없는 상태에서 익명의 역할을 맡은 부분, 즉 비부분의 부분)은 공포를 부과하고, 다른 역할을 맡은 부분이 대가를 치르게끔 만든다. 그때라 바로 기나긴 억압과 착취와 고통의 역사에 대한 심판의 날이다.”(<덕치와 공포정치>, 17-18쪽)

첫 문장에서 ‘고독한 주권적 결정의 영웅적 승인’ ‘자주적 결정의 외로움에 대한 대담한 가정’이라고 옮겨진 것은 “the heroic assumption of the solitude of a sovereign decision”입니다. 저는 ‘고독한 주권적 결정의 영웅적인 수임(受任)’이란 뜻으로 이해합니다. ‘결정’과 ‘수임’의 주체는 동일합니다. “만약 그것이 삶의 유한성을 초월하지 않는다면, 즉 ‘불멸’이 아니라면 그 실행자에게 천사의 무고함으로 살인할 면허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착오에서 빚어진 오역인데, 원문은 “If it is extra-moral, it is not 'immoral,' it does not give the agent the license just to kill with some kind of angelic innocence.”입니다. “이 정의로움으로 ‘민중’(역할이 없는 상태에서 익명의 역할을 맡은 부분, 즉 비부분의 부분)은 공포를 부과하고, 다른 역할을 맡은 부분이 대가를 치르게끔 만든다.”도 부정확한 번역입니다(‘몫이 없는 자(part of no-part)’는 랑시에르가 즐겨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혁명적인 ‘신적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휴머니즘적 동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코뱅의 역사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지젝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혁명적 폭력의 (자주 탄식할 만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오늘날의 전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여 그 현실화로부터 그것의 잠재적 내용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는가?” 지젝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사건을 반복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은 (로베스피에르의) 휴머니즘적 폭력으로부터 반-휴머니즘적(오히려, 비인간적) 폭력으로 이행하는 것”이라는 게 지젝의 주장입니다.

물론 “자코뱅이 급진적 테러에 의존한 것은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동화(acting out)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란 비판은 이미 제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지젝이 보는 자코뱅의 위대함은 테러의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재조직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에 두어집니다. “여성의 자기-조직화에서부터 모든 늙은이가 평화와 존엄 속에서 말년을 보내는 공동체 가족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응축된 열광적인 활동”을 지젝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진정한 혁명의 순간은 1917-18년의 봉기도 아니고 이어진 내전 상황도 아닌, 1920년대 초반에 새로운 일상생활의 의례들을 창안하려고 했던 강력한 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그는 주장합니다. “어떻게 혁명 이전의 결혼 의례나 장례 의례를 바꿀 것인가? 어떻게 공장과 집단 거주지에서 공산주의적 교류를 조직할 것인가?” 같은 문제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상을 재조직하기 위한 ‘구체적 테러(concrete terror)’가 없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충분하지도 완결되지도 않았던 것이죠. 지젝이 여기서 도출하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마오의 모순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모순의 보편성이 내재하는 곳은 정확히 모순의 특수성 속에서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교조적 맑스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마오는 옳았습니다. 또 ‘변증법적 종합’을 ‘대립물간의 투쟁을 포괄하는 고차원적 통합’ 내지 대립물의 ‘화해’로 보는 통상적인 관점을 거부할 때 역시 옳았다고 지젝은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 거부를 정식화하여 ‘대립물이 영원한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우주론-존재론에 따라 일체의 종합이나 통합에 대해서 갈등과 분열의 선차성을 주장할 때 그는 틀렸다는 게 지젝의 주장입니다. 마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엥겔스는 세 가지 범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 범주들 중 두 가지는 믿지 않는다.(...) 부정의 부정이란 없다. 긍정, 부정, 긍정, 부정... 사물의 발전 속에서, 사건들의 연쇄 속의 모든 연관은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노예제 사회는 원시사회를 부정한다. 하지만 봉건사회와 관련해서는 거꾸로 긍정을 구성했다. 봉건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관련해서는 부정을 형성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와 관련해서는 긍정을 구성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사회에 대해서는 부정을 형성했지만 사회주의 사회와 관련해서는 긍정을 구성했다.”(<잃어버린 대의>, 284쪽; <마오쩌둥: 실천론․모순론>, 21쪽, 241-2쪽)

‘부정의 부정’에 대한 마오의 이러한 부정은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일까요? 지젝은 “혁명적 부정성을 진정으로 새로운 긍정적 질서로 이동시키는 시도의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봅니다. “모든 혁명의 일시적인 안정화는 결국 낡은 질서의 복권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그래서 혁명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이라는 ‘가짜 무한성’으로, 이것은 결국 거대한 문화혁명에서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입니다. “문화혁명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길과 공간의 청소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성에 대한 무능의 지표라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혁명이란 ‘혁명고 함께 하는 혁명’, 혁명과정에서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전제 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이지만 마오는 그 ‘부정의 부정’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죠(<터미네이터2>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T-101)가 스스로 용광로 안으로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혁명적 시도의 문제는 ‘너무 극단적’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충분히 극단적이지 못했다’는 데, 그리하여 혁명적 시도 자체를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 지젝의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는 무엇일까요?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지젝은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합니다. 그 창안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정신분석에 대한 참조를 통해서 지젝이 말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문화혁명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에서 실패했다고 그는 보는 것이죠. 물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실행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지젝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뒷담화도 들려줍니다. 문화혁명의 마지막 시기에, 마오 자신에 의해서 소요사태가 봉쇄되기 전에 ‘상하이 코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합니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마오가 충분히,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폭발을 위한 공간을 연 것이라는 게 지젝의 평가입니다. 그리하여 마오의 사례에서 얻는 교훈은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베케트)입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스탈린의 공포정치도 보도록 합시다. 참으로 대단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는데, 1937-38년 2년 동안에 이루어진 결과만 보아도 이렇습니다.  

“다섯 명의 스탈린 정치국 동료들이 살해되었고, 139명의 중앙위원 중에서 98명이 살해되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 중앙위원 200명 중에서 오직 세 명이 살아남았고, 93명의 콤소몰 조직 중앙위원 중 72명이 죽었다. 1934년 제17차 대회에서 1,996명의 당 지도자들 중 1,108명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385명의 지방 당 비서 중 319명이, 2,750명의 지역 비서들 중 2,210명이 죽었다.” (<잃어버린 대의>, 376쪽) 

이 대숙청은 네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933년과 1935년에는 무력한 하급 당원들을 체로 숙청하기 위해서 모든 계층의 노멘클라투라를 동원합니다. 이때 지역 지도자들은 자기 조직을 강호하고 ‘불편한’ 사람들을 쫓아내는 데 숙정작업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모스크바의 노멘클라투라가 지역 엘리트를 숙청하기 위해 하급 당원들 편을 듭니다. 그리고 1937년에는 노멘클라투라에 대항하는 당 대중(party masses)을 동원합니다. 이로써 당 엘리트들을 초토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1938년에는 지역 노멘클라투라의 권위를 강화함으로써 숙청 기간 동안 무너진 당내 질서의 회복을 꾀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초자아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공산당에 의해 공산당원들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이 폭력은 체제의 극단적 자기-모순을 증명한다. 즉, 그것은 체제의 기원에는 ‘진정한’ 혁명적 기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끝없는 숙청은 체제 자체의 기원적 흔적을 지우는 것일 뿐 아니라 일종의 ‘억압된 것의 귀환’ 속에서 체제의 중핵에 있는 근본적인 부정성의 잔여물이기도 하다.”(<잃어버린 대의>, 379쪽)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 시대는 노멘클라투라가 지배한 사회가 아니었으며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탈린체제는 효과적인 ‘관료조직’이 결여된 체제였습니다. 노멘클라투라가 사회적으로 안정화되는 것은 브레주네프 시기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현실 사회주의’라는 것이 출현하게 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체제가 자신의 공산주의적 전망을 포기하고 실용적인 권력 정치에 안주한다는 징표입니다.       

포퓰리즘에 대한 지젝의 시각도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을 때로는 실용적 타협의 일부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 개념 차원에서는 비판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입니다. 2005년 유럽 헌법 제정안에 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부결을 사례로 들면서 지젝은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의 교훈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은 한물 간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로부터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신비화시키는 것에 대칭적으로 ‘아이 씻은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듯이,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은 은폐하고 그것을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에 대한 단순한 주장은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이다.”(<잃어버린 대의>, 402쪽)

두 번째 문장 이하의 원문은 “the lesson the Left should learn from it is that one should not commit the error symmetrical to that of the populist racist mystification/displacement of hatred onto foreigners, and to "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 water," that is, to merely oppose populist anti-immigrant racism with multiculturalist openness, obliterating its displaced class content - benevolent as it wants to be, the simple insistence on tolerance is the most perfidious form of anti-proletarian class struggle...”입니다.   

여기서 ‘its displaced class content’를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이라고 옮겼는데, ‘populist anti-immigrant racism’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the most perfidious form of anti-proletarian class struggle”을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으로 옮긴 것은 착오로 보입니다. <레닌 재장전>에서 같은 문단을 다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이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좋은 사례다. 여기서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 즉 다문화적 개방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에 대해 그 전치된 계급적 내용을 간과하고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호의적 의도에서라 하더라도 단순히 다문화주의적 개방만을 고집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가장 기만적인 형식이다.”(<레닌 재장전>, 132쪽) 

포퓰리즘이 갖는 이러한 ‘계급적 내용’ 때문에 지젝은 거기에서 ‘네오-파시즘’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자유주의적 태도에 반대합니다. “새로운 포퓰리즘적 우파와 좌파가 공유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본래적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인식 말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점입니다.  

반면에 “다문화주의적 관용에서 가장 웃기는 점은 물론 계급 구별이 그 안에 기입되는 방식이다. 상층 계급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개인들은 그런 다문화주의적 관용을 이용하여 하층 백인 노동자들의 ‘근본주의’를 꾸짖는데,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에 (정치 경제적인) 모욕까지 더하는 꼴이다.”(<지젝이 만난 레닌>, 278쪽)  

마지막 문장은 “adding (ideological) insult to (politico-economic) injury”를 옮긴 것으로 앞뒤가 전도돼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상류계급 사람이 다문화주의적 관용을 말하면서 하층 백인들의 ‘근본주의’(혹은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경제적) 상처에다가 (이데올로기적) 모욕까지 더하는, 말하자면 상처에다 소금까지 뿌리는 짓이라는 것이죠(우리 같으면 빈곤층의 부도덕과 무교양에 대한 비판에 해당할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훈은 분명하다고 지젝은 말합니다.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이 좌파적 꿈의 부재한 공백을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퓰리즘은 제도화된 탈정치의 어두운 분신으로 출현하고 있지만, 그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지젝의 주장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에 기반한 현상, 심지어는 무력함의 암묵적 승인이다. 우리 모두는 가로등 아래 흘린 열쇠를 찾는 한 남자에 대한 오래된 농담을 알고 있다. 어디서 잃어버렸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캄캄한 구석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는 왜 여기 불빛 아래서 찾고 있는가? 왜냐하면 여기가 훨씬 더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포퓰리즘에는 항상 이런 종류의 속임수가 있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오늘날의 해방적 기획이 기입되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의 해방적 정치의 주된 임무는 - 그것의 생사를 건 임무는 - (포퓰리즘처럼) 제도화된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포퓰리즘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정치적 동원의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제안해야 한다.”(<레닌 재장전>, 152-3쪽)

10.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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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풍경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5 23:55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빵가게재습격 2010-02-2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로쟈 2010-02-24 18:34   좋아요 0 | URL
고생이랄 건 없는데, 다른 일들이 밀려서 문제지요.^^;

2010-02-24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4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4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2-27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도 생각보다 번역이 좋지 못한가 보군요. 역시 꼼꼼히 독해하려면 원서와 대조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글을 읽으면서 생각난점 몇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위에 문화혁명당시 소위 상하이코뮌에 대한 마오의 대처를 보면 마치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레닌의 대처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마오나 레닌은 혁명이 인민 스스로에 의해 급진화되어 당의 통제를 벋어나는 시점에서 일종의 반혁명?을 통해 당에 의한 통제력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젝의 말대로라면 마오나 혹은 스탈린의 문제점은 혁명을 오히려 충분히 급진화시키지 못했다고 말하고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레닌의 전략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좀 모순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관되게 급진적이려면 레닌이나 마오 혹은 스탈린등이 주장한 당 주도의 혁명이 아니라 인민의 코뮌적인 직접지배를 목표로하는 그런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레닌이나 스탈린 혹은 마오식의 당주도에 의한 혁명이 될 경우 위에서 예로든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에 대한 숙청도 그리고 마오의 문화혁명도 결국은 스탈린이나 마오의 개인숭배나 독재를 위한 통치전술의 일환으로서의 폭력일 뿐이 라는 해석도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민주주의"를 위한 신적 폭력이라기 보다는요.

따라서 지젝이 간과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당주도에 의한 혁명이나 권력의 속성이 가진 치명적 문제점을 과소평가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고 또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급진적인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레닌이나 마오적 혁명전략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스트적인 코뮌적 권력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지요.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이와같은 실패를 반복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될것은 비록 권력투쟁과정에서 일종의 권력의 공백상태를 허용하게 되어 실패하기 쉬운 혁명인 일종의 코뮌적(혹은 아나키즘적) 혁명전략이 오히려 더 필요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파리코뮌이 러시아혁명보다도 더 인민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라는 점에서는 시사점이 많은 사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로쟈 2010-02-28 14:49   좋아요 0 | URL
지젝의 주장은 레닌이 실패한 자리에서, 하지만 그가 열어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레닌 이전'이나 '레닌 말고'가 아니고요. '아나키스트적인 코뮌적 권력'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레닌주의와의 거리는 분명해보입니다...

yoonta 2010-03-01 21:01   좋아요 0 | URL
코뮌적 권력이라는 건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주도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레닌이나 스탈린이 열어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시작하자는 이야기도 여기에 마찬가지로 적용시킬수있는 것이지요. 레닌이나 스탈린 혹은 마오가 실패했던 방법들을 반복하지 않기위한 것이므로.

로쟈 2010-03-01 22:37   좋아요 0 | URL
그렇담 '소비에트'도 그런 '코뮌적 권력'이 아니었던가요?..

yoonta 2010-03-02 00:21   좋아요 0 | URL
어떠한 소비에트인가에 따라 다르지요. 10월혁명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소비에트냐 아니면 10월혁명의 추동력이 되었던 자발적 저항조직으로서의 소비에트냐. 10월혁명이후의 소비에트를 본래적 의미에서의 노동자나 인민의 평의회로 보기는 힘들죠. 어디까지나 볼키를 위한 조직이 되었으므로. 따라서 레닌이 4월테제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을때의 그 소비에트는 10월 이후에 볼셰비키주도로 운영되는 소비에트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러시아아나키스트들은 10월 혁명이후 볼셰비키로의 권력집중현상을 이런 시각으로 비판하였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로라는 표어는 아나키스트들에게 결코 전적으로 수용뢸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월봉기 이전까지는 그래도 행동을 촉구하는 '진보적 '외침이었다고 그는 (그리고리 막시모프) 설명했다. 그 당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진영에 몰려들었던 자위주의자들이나 기회주의자들과 달리 혁명세력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러나 10월의 일격이후 레닌과 그의 무리들은 혁명적 역할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적 지배자가 되었으며 소비에트를 국가권력의 저장소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소비에트가 권력의 매개체로 남아있는 한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그것에 항거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러시아아나키스트 1917> 101~102쪽)

이처럼 문제는 어떠한 소비에트냐 즉 파리코뮌적 소비에트냐 볼키라는 국가권력을 위한 소비에트냐를 구분해야 하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