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두 차례 발간되는 기획회의(265호)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전문가 리뷰' 코너의 인문분야 서평을 한달에 한번씩 연재하게 됐는데, 첫번째로 고른 책이 도널드 폴킹혼의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학지사, 2009)이다. 관심분야의 책이면서도 비교적 주목받지 않은 인문서를 다루려는 의도에서 선택했다. 배송사고인지 잡지를 받아보지 못해서 아래의 글은 편집본이 아닌 최종 원고이다. 편집본을 확인하고 몇 마디 덧붙이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도서관에서 대출했던 원서는 기한이 다 되어 오늘 반납했다.
기획회의(10. 02. 05)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
대형서점 서가의 한 구석에서 우연히 건진 책이다. “이 책은 Donald E. Polkinghorne이 집필한 Narrative Knowing and the Human Sciences(1988)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라고 ‘역자 서문’에 적혀 있다. Polkinghorne을 ‘폴킹혼’으로 옮기지 않고 영문 알파벳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짐작에 교육학계의 ‘관행’인 듯싶다. 하지만 본문에서 다른 고유명사는 ‘시모어 사라손(Seymour Sarason)’이란 식으로 병기해주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좀 튀는 관행이다.
도널드 폴킹혼이란 저자명은 생소하지만, ‘내러티브, 인문과학을 만나다’란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부제는 한술 더 떠서 ‘인문과학연구의 새 지평’이다. 대학 도서관에서 따로 구한 원서에는 부제가 붙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국역본의 부제는 역자들의 기대를 적어놓은 것인 듯싶다. 역자와 저자의 서문을 참고해보면, 이 기대는 어떤 문제의식과 연관돼 있다.
이 책을 “인간 존재의 문제에 주목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새로운 렌즈로 어떻게 학문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작”이라고 평하는 역자는 지금까지의 인문사회과학이 ‘양적인 연구방법’에 치중해왔으며 ‘연구와 실찬 간의 분리’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것이 “인문과학 연구들의 빈약성 혹은 방법론의 부적절성”을 낳고 있으며 인문과학에 대한 신뢰를 점점 떨어뜨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반면에 심리치료사, 카운슬러, 조직 컨설턴트 등 다양한 실천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어떤 차이 때문일까? 다름 아니라 “실천가들이 내러티브적 지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 곧 ‘내러티브’가 핵심이고 변수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연구와 실천에 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것은 저자 폴킹혼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저자의 강점은 그가 상담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임상의학자라는 데 있다. ‘학문적인 연구자’와 ‘실천적인 심리치료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해오면서 그는 임상의학자로서의 경험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학문적 연구 결과를 찾을 수 없었다는 문제점에 봉착한다. 인문사회과학에 거액의 공공자금이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로 진전을 보이지 못한 것도 ‘인간에 대한 학문’의 연구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잠식한다. 때문에 그는 자연과학의 모델이나 수리적 형식과학의 방법론이 인문과학에 과연 적합한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유일한 특성에 대해 좀 더 특별히 민감한, 추가적이고 보완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인간 존재의 유일한 특성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보기에 인간은 세 가지 존재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물질 영역과 유기체(생물체) 영역, 그리고 정신(의미) 영역이 그것이다. 인간의 물질적 속성은 다른 비인간 물체들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가령,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사람은 다른 물체와 똑같은 가속도로 낙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유기체적 기능 또한 다른 생물체와 다른 특별한 차이점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의미 영역만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리고 내러티브는 바로 이 의미 영역의 작용 가운데 하나이다.
의미 영역과 관련하여 저자는 기존의 ‘의미의 철학’보다 한 단계 진전된 생각을 전개하는데, 그것은 의미의 영역이 어떤 사물이나 실체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점이다. 의미 영역에 대한 철학적 혼란은 대부분 의미를 실체로서 규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집짓기와 글쓰기가 어떤 수행이지 실체가 아닌 것처럼 활동으로서의 의미 영역도 명사가 아닌 동사의 형태로 기술된다. 그러한 활동에서 “마음의 정신적 영역을 통해 만들어진 의미의 한 유형”으로서 내러티브는 “특별한 성과를 내는 사건들의 기여에 주목함으로써 그 의미를 창안해내고, 그래서 이러한 부분들을 전체적인 에피소드 속으로 잘 배열하여 의미를 형성하게 한다.”
의미 영역이 물질 영역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면 의미 영역에 대한 연구 또한 물질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적 방법과는 차별화될 필요가 있다. 이때 새로운 참조점이 돼주는 것은 역사학과 문학비평이다. 이들 분야는 언어 표현을 통한 의미의 영역, 특히 내러티브를 연구하는 절차와 방법을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문과학은 이제라도 자연과학보다는 그런 쪽으로 더 천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내러티브를 매개로 하여 역사/문학 이론과 인문과학의 만남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이때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문과학은 주로 ‘심리학’이다. 때문에 역사학과 문학이론 분야에서 내러티브 연구의 성과를 개관하는 ‘역사와 내러티브’ ‘문학과 내러티브’ 두 장에 이어지는 것이 ‘심리학과 내러티브’이다. 이러한 검토를 바탕으로 폴킹혼은 인문과학을 위한 내러티브 이론의 종합을 ‘시간성’과 ‘행위’ 그리고 ‘자아’와 내러티브의 관계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며, 심리치료의 이론적 기초를 타진하는 ‘실천과 내러티브’로 마무리한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내러티브 형식의 설명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그것은 구성 구조 속에 시간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을 범주화하는 형식적 구성과는 매우 다르다. 자아 이해를 위한 시간 질서의 중요성은 아직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내러티브는 도처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생성하고 구성하기 위한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이제 겨우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문과학연구의 새 지평’을 찾아서 인내심을 갖고 따라온 독자에겐 다소 불만스러운 대목이다. 바로 이어서 저자는 “내러티브의 역할에 관한 의식은 최근에야 인문과학에서 부상했다. 이러한 의식은 인문과학이 의미 영역을 향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으며 미래의 연구를 위한 초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밝히는데, 그 ‘최근’의 시점이 1988년이다! 유감스럽게도 20년도 더 전인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에서건 고전적인 저작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 의의를 갖지만, 어떤 이론서나 학술서가 20년의 세월을 버텨낸다는 건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과연 이 책이 그러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가. 인문과학의 ‘내러티브적 전환’을 가리키는 저작 정도가 아닐까. 참고로, 저자도 인용하는 월리스 마틴의 <내러티브에 관한 최근 이론(Recent Theories of Narrative))>(1986)이 <소설이론의 역사>(현대소설사, 1991)란 제목으로 출간됐던 게 벌써 20년쯤 전이다.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내가 궁금한 건, 그리고 읽고 싶은 건 그 20년 후의 이야기이다. 서사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책이 소개될 때가 됐다.
10. 02. 27.
P.S. 국내에서는 소강상태이지만, 서사학(narratology) 관련서는 영어권에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개인적으론 다윈주의 서사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찾아보니 국내에도 소개된 미케 발의 입문서는 작년에 3판이 출간됐다. 번역본이 좀 부실한데, 이 참에 재번역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