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

'10월의 읽을 만한 책'의 카테고리로 '중국의 지식인'을 만들어놓고 <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 등을 올려놓았었는데, 마침 관련서평이 눈에 띄기에 한번 더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지식인 문제는 관심을 갖고 있는 아이템 가운데 하나이다. 그간에 서구 지성사에 가려져왔던 '중국의 지식인' 문제가 지식인 문제 일반을 다룰 때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으리란 생각을 해본다. '한국의 지식인' 문제와 견주어볼 수도 있겠고...  

교수신문(11. 10. 04) 그들은 왜 사회의 중심을 세우는 데 실패했나    

이 책의 집필진은 중국의 지식계의 대표적인 지식인들로 구성되어있다. 黃平, 余英時, 杜維明, 徐復觀, 錢穆, 費孝通, 錢理群, 陳平原, 李歐梵, 桑兵, 章淸 등 역사, 철학, 사상, 문학, 문화, 정치, 사회학 등의 다양한 전공자들로 구성돼 있다. 포괄하고 있는 시기는 춘추전국시기에서 1905년 과거제도 폐지 전까지 제왕의 조력자이자 민간사회의 엘리트로 살았던 사대부 중심의 시기. 서양과의 충돌과 서구학문의 유입으로 신지식과 신지식인 집단이 형성된 시기, 사회주의 건설이후 지식인 사상개조로 인한 핍박과 상실의 시기, 개혁개방이후 새로운 지식인의 등장과 활발한 지식담론이 성행된 시기 등이다. 수록된 내용은 주로 지식인의 개념, 범주 및 유형, 고대 지식인의 구조와 역할, 지식인의 역사적 성격과 운명, 지식인의 주변화 현상, 지식인 집단의 몰락 및 도시 공간 속의 지식인 등 20세기 지식인에 대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내용들을 총망라했으며, 나아가 지식인 사회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네트워크, 매체, 사단, 학회 등의 다양한 방법과 주제를 다루고 있다. 

쉬지린 교수가 편선한 『20세기 중국의 지식인을 말하다』는 중국의 대표 지식인들이 바라본 20세기 중국 지식인의 역사를 소개한 책이다. 무려 중국 고대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중국의 지식인 역사를 핵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의 20세기는 그야말로 대변혁의 시기였다. 20세기 중국의 지식인들이 겪은 변화는 그야말로 사상적인 면에서의 가치전환일 뿐만 아니라 사회사적인 면에서의 신분, 지위, 역할의 대변환이었다. 이 책은 후자에 초점을 맞춰 지식사회사 측면에서 이러한 대전환기 사회정치와 문화사상의 상호작용 속에서의 지식인의 역사를 연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쉬지린 교수는 20세기 중국 지식인을 어떻게 엮어나갔는가. 중국의 근대 사상계에서 서구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미친 점은 바로 지식구조일 것이다. 관료와 지식인이라는 이중적 역할에서부터 중심과 주변을 넘나드는 경계인으로서의 중국 지식인은 어떠한 근대 중국의 지적 구조를 형성해나갔는가. 또한 20세기 중국의 지식지형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지식인은 국가,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떠한 관계를 형성해 나갔는가. 이것이 이 책의 초점이다. 쉬지린 교수는 이를 ‘단절된 사회 속의 지식인’이라고 규정한다.

쉬지린 교수는 현대 지식인이 처한 사회는 지식인의 중심인 사민사회가 아니라 ‘중심이 없는 단절된 사회’라고 한다. 국가와 사회의 단절인 것이다. 과거의 사대부는 원래 국가와 사회를 일체화하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했으나 1905년 과거제도의 폐지에 따라 사대부 계급은 와해되고 국가와 사회 사이에도 더 이상 제도적인 소통을 수립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단절은 각 계층 간의 단절이다. 각 계층사이에는 공공의 가치관과 제도적 토대가 결여돼 사회에는 더 이상 중심이 없게 됐고 상호 제도화 된 유기적 관계도 결핍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절된 사회의 난국 속에서 지식인은 국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그는 전통사회에서의 사대부계층과 국가, 사회의 유기적 관계는 오늘날도 모두 붕괴했다고 말한다. 과거제도의 폐지는 현대 지식인으로 하여금 국가와의 내재적인 체제관계를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강렬한 소외감을 낳았으며, 또한 지식인들은 전통적인 민간사회에서 벗어나 도시로 흘러들어가 국가로부터 소외됐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유리된 표류하는 지식인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북경, 상해 등의 대도시로 간 지식인들은 현대사회에서 자신들만의 지식공간 즉, 학술 집단과 문화매체를 마련했다. 학술 집단은 지식생산영역의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문화매체는 지식유통영역의 신문, 잡지, 출판업으로 구성됐다.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이 지식공간들은 고대 중국에서는 없었으며, 제도화된 네트워크 규모로 출현했던 적도 없었다. 이는 현대 지식인들이 의지하는 유일한 사회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핵심이 되는 상업사회와 권력이 핵심이 되는 국가체계가 존재함에 따라 자신들의 작은 사회인 학술 집단과 문화매체를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국가, 사회와의 유기적 연계를 상실했다. 현대 지식인은 더 이상 사회의 중심이 아니며, 도리어 ‘단절된 사회’에서 더욱 더 주변화된 존재다.

이는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사회는 새롭게 국가로부터 해방됐으며 지식인 또한 주변에서 중심으로 나아가긴 했지만, 商工社會의 궐기로 인해 지식인은 또 다시 주변화됐으며, 이번에는 국가에 의해 전복당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게 전복당한 것이었다. 시장사회로 인해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그들의 갈망은 멀어져 간 것이다.

2010년 국제학술회의 차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를 방문한 쉬지린 교수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와 유사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전통사대부에서 현대지식인으로 나아가면서 끌어 안아야했던 것은 다름 아닌 현대사회의 公民意識이다. 공민의식은 사민사회에서는 탄생할 수 없으며 단절된 사회에서도 쌓아나가기 어렵다. 그것이 요구하는 것은 건전한 공민문화와 민주정치이며, 이러한 것들은 바로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제도화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내용 측면에서 이후 보완됐으면 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테면,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의 전환에 따른 지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에서 지식인 문제가 본격적이고 활발하게 논의돼 하나의 지식담론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중국 지식계, 사상계의 분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형성됐던 계몽 진영이 90년대에 이르러 사상 면에서 거대한 분화를 보인다. 1990년대 인문정신이 계몽진영을 인문파와 시장파로 분리시켰고, 90년대 상반기 자유주의와 신좌파 논쟁은 개혁진영을 자유파와 산좌파라는 두 극단으로 분열시켰다. 이에 따라 1990년대는 지식담론에 대한 논의는 활발했지만, 중국사상계 내부에는 통일된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고 대립과 분열이 출현했다. 이는 결국 지식의 사상분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분화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지식구조와 유형의 분화이자, 지식(인)의 분열, 사상가치의 분열이기도 하다(쉬지린『중국지식네트워크』). 이러한 1990년대 이후 지식계의 대분화를 통한 중국 지식담론의 계보와 지형을 분석한 논의가 보충될 필요가 있다.(박영순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11.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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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번역자'로 단연 꼽을 만한 이는 사마천의 <사기>를 완역한 김원중 교수다. <본기>, <세가>, <열전>에 이어서 이번에 <표>와 <서>를 마저 번역 출간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할 만한 일을 혼자 힘으로 오랜 노고 끝에 완결지었으니 경의를 표할 만하다. 안 그래도 여름에 <사기>의 앞에 나온 세 권은 구입을 했는데, 이제 마저 짝을 맞춰놓아야겠다.

  

한겨레(11. 10. 08) “14년 걸려 중국서도 드문 ‘표’ 번역까지 했죠”

중국 역사서 최고 고전인 <사기>처럼 유명한 책도 없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52만6500여자에 달하는 <사기> 전체를 우리말로 완전하게 옮긴 번역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추리고 다듬은 편집본들만 접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중문학자인 김원중 건양대 교수(사진)가 최근 <사기 표(表)>와 <사기 서(書)>를 번역 출간해, 14년 동안 이어오던 <사기> 완역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전체 130편으로 이뤄져 있다. 김 교수는 1997년 <사기 열전>(2권)을, 지난해에는 <사기 본기>와 <사기 세가>를 번역했고, 이번에 <표>와 <서>를 출간해 비로소 <사기>의 모든 것을 우리말로 옮겼다.

지난 5일 만난 김 교수는 “20여년 동안 나름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번역에 매달렸다”며 “끝내고 나니 10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갈 정도로 후련하다”고 말했다. 이번 번역으로 김 교수는 ‘혼자 <사기>를 완역한 학자’, ‘<삼국지>와 <사기>를 함께 완역한 학자’ 등 다양한 수식어를 얻게 됐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홀로 사기를 번역한 사례는 없으며, 중국에서 이 고전을 현대 중국어로 옮기는 작업은 국가 주도로 여러명의 학자가 참여해 이뤄지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특히 이번에 번역한 ‘표’는 ‘본기’, ‘세가’, ‘열전’에 분산된 역사적 사실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로 정리한 기록물로서, 중국에서도 번역된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혼자 번역에 매달려 이 대장정 같은 작업을 마쳤다. 중국 중화서국에서 냈던 <사기> 표점본(고문에 구두점을 찍은 판본)을 바탕삼았는데, 철저히 원전 중심주의를 지키면서도 가독성 높은 번역을 추구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수준에서 번역된 말을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잘된 번역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 또 우리나라만의 번역 정체성을 살리고픈 마음에 중국어·일본어 번역본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번역에 대한 집념은 국내 번역 현실을 우려하고 고민하는 데에서 나왔다. 중국의 ‘24사(史)’ 가운데 현재 우리말로 완역된 작품은 자신이 번역한 <사기>와 <삼국지>뿐이다. 일본에서는 <한서>, <삼국지> 등이 이미 오래 전에 완역돼 있었으며, <표>를 포함한 <사기>의 완역도 지난해에 이뤄졌다.

김 교수는 “국내엔 저보다 높은 실력을 가진 분들이 훨씬 많다”며 “문제는 학자들이 번역에 매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학문적 토양”이라고 지적했다. 아직도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는 등 학문 제도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꼭 필요한 번역본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사기>를 번역하면서 백번도 더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이미 <사기>에 깊이 매혹돼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왜 진시황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형가의 이야기, 곧 실패담을 굳이 써넣었을까요? 아내의 충고를 듣고 태도를 바꾼 안자의 마부 이야기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은 왜 써넣었을까요?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곧 2500년 역사를 통해 인간의 흥망성쇠를 밝히고 만사의 근본과 핵심을 파악하고자 했던 사마천의 뜻을 다시 새길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한 권으로 읽는’, ‘하루 만에 끝내는’ 등의 제목이 붙은 편집본을 봐서는 고전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말한다. 글쓴이의 의도를 생각하며 글 전체를 천천히 읽어내려갈 때 비로소 그 심오한 뜻을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최원형 기자) 

11. 10. 08.  

P.S. 국내에선 <사기> 완역에 도전한 학자가 한 명 더 있다. <사기> 전문가 김영수 교수도 <본기1>(알마, 2010)을 펴내면서 장정에 들어간 상태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또한 완결되기를 기대하면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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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0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도장이나마 다 찍은 줄 알았는데 '표'와 '서'가 또 나왔군요. 저는 책을 읽고 나니 책속의 이야기보다 사마천에 대해 두고 두고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로쟈 2011-10-09 11:54   좋아요 0 | URL
네, 대단하긴 하죠.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써냈으니 말이에요...

미국사람 2011-10-11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중 교수가 사기완역이라는 대단한 일을 해냈군요. 번역을 업적으로 생각해주지 않는 한국의 풍토는 빨리 바뀌어야합니다.

미국에서는 인디아나대학에서 8권짜리 완역이 나와있어요. Ssu ma Ch’ien (1994), The Grand Scribe’s Records (1994 부터 2008년까지 간행) 학술서적이라 가격은 권당 100불 정도이니 일반인이 사서 볼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만 도서관에는 상당히 깔려 있더라구요. 읽어보려했더니 지명과 인명이 중국발음인데다 한자가 전혀 병기가 안되어있어서 두어페이지 읽고 그만두었읍니다. (항우나 유방같은 이름의 중국발음을 알아야 읽을 수 있읍니다.) 다만 주석까지 빼곡히 달려있어서 우리의 일반 번역서와는 비교가 안되는 높은 수준입니다.

일본쪽 사기 번역은 찌꾸마 문고 쪽이 (史記 全8巻)』小竹文夫・小竹武夫 共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初版1995年)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입니다. 사기 연구서적 쪽으로 가면 한국과 일본은 거의 상대가 안되는 수준입니다. 중국 고전을 교과서로 과거를 500년 이상 실시했던 조선의 후손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개탄할만한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한서도 예전에 번역되어나왔는데 우리는 언제 한서 번역을 볼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동양사하려면 한문 중국어 뿐아니라 일본말까지 필수로 해야 됩니다. 슬픈 현실이지요.


로쟈 2011-10-11 11:02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정보네요. <자치통감>의 경우엔 그래도 얼마전인가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24사가 조금씩은 번역되고 있습니다. 아직 요원하겠지만요.^^;
 

'이주의 학술서'라 할 만한 책은 정연태 교수의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푸른역사, 2011). 소개기사조차도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변증법적 지양'이란 제목을 달았다!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정리하는 데 요긴할 듯싶다.   

  

한국일보(11. 10. 08)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변증법적 지양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반도 근대화에 기여했는가는 국내 역사학, 경제사학계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한국현대사학회가 최근 교육부의 역사 교육 과정 개정 작업에 '일제에 의한 근대적 제도의 이식 과정과 우리 민족의 수용'을 포함시키자고 요구한 데서 새삼 드러나듯 이 논쟁은 한국 사회의 이념 대립과도 오버랩된다.

한국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지만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로 피어나지 못했다는 식민지 수탈론이나, 식민 지배를 당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이식으로 근대화에 진척이 있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일면을 부각해서 보려 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가톨릭대 정연태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둘러싼 최근 10년간 자신의 논문을 엮은 <한국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서 이 같은 논쟁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사 굴절에 대한 책임을 손쉽게 외세 탓으로 돌리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의 주체적 한계를 직시하고 반성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발전 잠재력과 역동성도 동시에 포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거기에 더해 근대 자체를 비판하는 '탈근대론'도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의 쌍생아처럼 취급하여 백안시하거나 민족성ㆍ식민성을 근대성의 묶음 속에 집어넣어 뼈도 없이 녹여 버리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비판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이 같은 학문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19세기 후반 20세기 전반 서양인의 한국근대사 인식이다. 서양인의 왜곡된 동양관 같은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조선과 조선인에 호의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이들은 당시 조선 실정에 대해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발전 잠재력은 풍부하지만 양반ㆍ관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력으로 고갈됐고, 민중은 근로ㆍ저축 의욕 감퇴로 나태와 빈곤의 늪에 빠졌으며, 국가 경제는 후진적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생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당장은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도 대동소이하다.

이 같이 중층복합적인 시대 상황을 조선 후기의 포구 도시인 충남 강경에 대한 미시 연구 등을 통해 재확인하면서 그는 '장기(長期) 근대사론'이라는 새로운 역사상을 제안한다. 한반도의 근대가 해방과 함께 압축적으로 끝났다고 볼 것이 아니라 남북통일까지 미완의 것으로 보자는 문제 제기다. 이론(異論)이 적지 않겠지만 열린 민족주의 등 건강한 민족주의의 실천적 완성이라는 숙제까지 포함한 이 개념이 실익 있는 근대사 논쟁에 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김범수기자) 

11. 10. 08.   

P.S. 기억에 식민지 근대화 논쟁에 새로운 물꼬를 터준 이는 '회색지대'론을 주장한 윤해동 교수였는데, 이후에 논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됐는지 알지 못한다. 정연태 교수의 책이 가이드가 돼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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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만큼 확실하게 관련서가 출간되는 기념일도 드물 것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닌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노마 히데키의 <한글의 탄생>(돌베개, 2011). 책 표지만 보고 주문해서 주중엔가 받은 책인데, 잠깐 펴본 바로는 상당히 학구적인 책이다. 일본의 한국어학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만만찮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11. 10. 08) 동북아 지적 대혁명, 한글 창제

“한글의 탄생과 성장은 지(知)의 혁명이며 문화의 혁명이다.” ‘한글의 탄생: 문자라는 기적’(돌베개 펴냄)은 한글 원리와 탄생 배경, 성장 과정을 ‘언어란 무엇이고, 문자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인 질문을 통해 통찰하고 풀어냈다.

그 과정에서 ‘소리가 글자가 되는’ 놀라운 구조를 확인하고, 하나의 글자 체계를 뛰어넘은, ‘말과 소리와 글자’가 함께하는 보편적인 모습인 한글을 그려냈다. 귓가에 들려오는 말소리로부터 ‘음’의 단위를 추출해 내고, 이들을 각각 ‘자모’로 형상화해 설계해 내는 ‘훈민정음’의 탄생 과정을 경이롭게 펼쳐냈다.

일본인 한국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한글 탄생이 단순한 문자 발명을 넘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지(知)’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은 지적 혁명의 과정이라고 지적한다. 한글 창제 이전부터 있어 왔던 수천 년 동안의 문자 생활 및 환경을 꼼꼼이 짚었다. 한자·한문만으로 글을 써왔던 15세기 이전의 한반도와 일본에서, 말과 다른 글을 표현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소개하면서 언어와 문자 관계를 살펴보게 이끈다.

저자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알파벳 로드(road)’, ‘자음문잣길’의 종언이라고 단호하게 정의한다. “아시아를 가로지른 ‘자음자모 로드’의 종착지에서, 어슴푸레한 모음에 단호히 게슈탈트(형태)를 부여한 것이 훈민정음”이라고 강조한다. “훈민정음은 라틴문자처럼 모음자모와 자음자모가 직선상에 병렬된 2차원적인 배열 시스템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입체적 배치 시스템, 동적인 시스템을 확립했다.”고 밝혀낸다.

이런 분석으로 “훈민정음의 성립을 한국어사 및 동아시아 문화사라는 한정된 범위를 넘어 언어학, 문자론 등 다각적인 방면에서 고찰해 보편적인 의의와 가치를 찾아내려고 했다.”는 평도 받았다. 이 책은 훈민정음 창제이후 한글로 쓰여진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세종의 ‘에크리튀르(쓰여진 것과 쓰는 것) 혁명’이 어떻게 내용을 이뤄나가고, 한글의 내용을 담게됐는지를 동국정운, 석보상절, 천자문 언해, 두시 언해 등의 내용을 들어가며 설명했다.

저자는 현대일본미술전 가작상을 수상한 미술작가이기도 하다. 일본어로 쓰여진 같은 제목의 저서를 번역한 것으로 2010년도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받았다. 한국인들에게 이 책은 한국어와 한글을 외국학자의 낯선 눈을 통해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준다. 저자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의지와 실천이 없었다면, 한글은 어쩌면 로마자 같은 문자로 쓰여졌을 수도 있겠다.”는 말로 훈민정음 창제의 무게를 요약하기도 했다.(이석우 편집위원) 

11.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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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0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석영중의 <뇌를 훔친 소설가>(예담, 2011)에 대해 적었다. 마감일에 급하게 보내느라 퇴고를 하지 못했었는데, 편집자가 교정을 보느라 고생을 했다. 한 곳은 더 보태서 고쳐놓는다.  

   

기획회의(11. 10. 05) 문학과 뇌과학, 서로를 비추다

<뇌를 훔친 소설가>. 소설 제목으로 그럴 듯하지만, 뇌과학과 문학을 다룬 인문서이다. 이렇듯 두 분야가 겹치거나 교차할 때는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경우는 저자 석영중 교수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인문학자이기에 ‘인문서’로 분류하고 리뷰를 쓴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문학에 식견을 갖춘 뇌과학자가 비슷한 유형의 책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과학보다 앞서서 인간 두뇌의 비밀을 밝혀낸 여덟 명의 예술가들을 조명한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지호)의 저자 조나 레러는 신경과학 전공자이고 이 책은 ‘뇌과학서’로 분류돼 있다. 그렇게 ‘교양 인문학’과 ‘교양 과학’의 경계가 어딘지 모호하다면 그냥 ‘21세기 교양’으로 묶어도 좋겠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대로 뇌과학 정도는 현대인의 필수교양이니까.   

일단은 분위기 파악부터 해보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적은 대로 “뇌는 21세기 인류에게 가장 흥미로운 화두 중 하나다.” 과학계에서도 인간게놈프로젝트와 함께 뇌지도 프로젝트는 엄청난 연구역량이 투입되고 있는 초국가적 메가프로젝트이다. 여파는 인접 학문에도 미치기 마련이다. ‘신경문학 비평’이라거나 ‘다윈주의 문학비평’ 따위의 분야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니 조만간 국내에도 소개되지 않을까 싶다. 대체 어떤 분야인가. 신경문학 비평은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거나 창작할 때 “두뇌에서 어떤 뇌세포가 어떻게 활성화되는지를 뇌 스캔으로 관찰하여 독서와 창작의 이면에 있는 생리학적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목적이라 한다. 또 다윈주의 문학비평은 문학을 환경에 대한 적응의 표현으로 보고 “특정 작품의 특정 인물과 플롯은 그러한 생존방식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소개된 책도 없지 않다. 영문학자인 질리언 비어의 <다윈의 플롯>(휴머니스트), 생물학을 전공한 데이비드 바래시와 나넬 바래시의 <보바리의 남자 오셀로의 여자>(사이언스북스) 등이 바로 다윈주의 문학비평에 속하는 책들이다.  

그렇다면 <뇌를 훔치는 소설가>를 통해서 ‘문학이 공감을 주는 과학적 이유’를 밝히고자 한 저자 또한 이러한 흐름에 일조하려는 것일까. 뜻밖에도 그렇진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 문학이론과 신경문학 비평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라고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도 분명하다. 현시점에서 다윈주의적이고 인지적이며 신경과학적인 문학연구 방법은 결국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로 귀착하고 만다는 판단에서다. 문학작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약간은 바꿔놓을지 모르겠지만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서로 도움을 주는 ‘상호조명’은 가능하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책에서는 “문학적 내용과 자연과학적 사실이 서로를 비춰주는 가운데 드러나는 삶의 지혜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그러한 의도 하에 저자는 뇌과학이 밝혀준 네 가지 ‘자연과학적 사실’을 골랐고 거기에 부합하는 ‘문학적 내용’들을 나란히 배치해놓았다. 그것이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변화라는 주제를 다루는 네 장의 구성이다. ‘흉내’ 장에서 다루는 것은 거울뉴런의 발견이다. 1990년대 초 이탈리아의 신경과학자들이 마카크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처음 발견한 거울뉴런은 “누가 몸짓을 하든 그 몸짓에 반응하는 뉴런”이다. 영장류에게도 타인의 시도에 반응하고 느끼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흉내, 곧 모방행동과 감정이입이 신경생리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시사한다. 즉 타인의 마음상태를 흉내 냄으로써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연구자가 보기에 “거울뉴런은 문학작품이 다루어왔던 특정 현상을 신경생물학적으로 증명해준 것이다.”   

그럼 뇌과학보다 한발 앞서서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흉내에 관한 어떤 진실을 말해주었는가. 저자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야나를 일례로 든다.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만을 좋아했던 이 시골처녀가 오만해 보이는 포즈의 도시 청년 오네긴을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지게 된 건 무엇보다도 수많은 연애소설들 탓이다. “수백 권의 연애소설 속에서 수천, 수만 번의 사랑을 읽을 타티야나의 뇌에서는 소설적인 사랑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신경세포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표절의 여왕’이며 그녀가 오네긴에게 보낸 편지는 낭만주의 연애소설의 모사품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타티야나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모방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오네긴과는 달리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몰입’에 관한 장에서는 ‘보상 신경전달물질’로도 불리는 도파민이 소개된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도파민은 “뇌를 각성시켜 집중과 주의를 유도하고 쾌감을 일으키며 삶의 의욕을 솟아나게 하고 창조성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이 도파민과 관련한 사례를 찾자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키티와의 사랑에 흠뻑 빠졌을 때나 풀베기에 몰입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레빈의 모습이 전형적이다. 또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시를 쓰면서 체험하는 희열 또한 몰입의 대표적 사례다. 그는 시대적 혼란과 개인적 역경 속에서도 “시 쓰기에 몰입함으로써 삶도 죽음도 초월하는 창조의 지복을 경험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몰입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몰입과 중독은 같은 상태의 두 가지 다른 이름이기에.    

‘기억과 망각’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뇌과학은 기억이 부호화, 저장, 인출, 망각이라는 네 단계의 과정을 밟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 바로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면밀한 관찰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를 통해서 주인공의 과거 기억이 환기되는 장면은 신경과학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라고 한다. 물론 프루스트가 보여준 건 병적일 정도로 섬세한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과 중첩되는 기억이며, 이러한 통찰은 현대 뇌과학의 발견과도 일치한다.   

끝으로 ‘변화’ 장에서 저자가 다루는 건 뇌의 ‘가소성’ 문제다. ‘신경가소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뇌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가소성 역시 좋은 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의 뇌를 풍부하게 하는 한편, 외부 영향에 취약하게도 한다. 저자는 유달리 범속성과 범속한 삶을 자주 모티브로 삼았던 러시아문학, 특히 고골의 작품들과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 그리고 체호프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예로 들어서 가소성이 갖는 역설적 이중성을 짚어준다.  

뇌과학이 계속 발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문학과의 접점은 더 많아지고 깊어질 것이다. 문학이 얼마나 많은 뇌를 더 훔쳐다놓을지 궁금하다.  

11.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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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11-10-0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지시학을 지난학기 박사 마지막 수업에 들어서 뇌과학과 문학의 접점에 대해서 공부했었습니다. 로쟈님의 소개해 놓은 부분만 보면, 위 책은 문학 연구에 대해 새로운 빛을 준다기 보다는, 뇌과학을 문학을 통해 소개해놓은 것처럼 보이네요. ^^

로쟈 2011-10-08 08:21   좋아요 0 | URL
인지시학 소개한 책은 저도 구입해놓았는데, 강의도 있다니 놀랍네요. '새로운 빛'을 경험하셨는지요?^^

2011-10-08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8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2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2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qualia 2011-10-26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시점에서 다윈주의적이고 인지적이며 신경과학적인 문학연구 방법은 결국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로 귀착하고 만다는 판단에서다. 문학작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약간은 바꿔놓을지 모르겠지만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서로 도움을 주는 ‘상호조명’은 가능하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위 인용글이 석영중 교수 생각의 (혹은 『뇌를 훔친 소설가』의) 정확한 요약이라면, 석영중 교수 생각은 지극히 “나이브”하다고 할 수 있다. 『뇌를 훔친 소설가』 또한 (아직은 안 읽어봤지만) 범작일 가능성이 크다. 논문으로 치면 단순한 총정리 논문쯤(사실 총정리가 아닌 부분적 정리겠지만) 될 것이다. 위 서평만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무리지만, “흉내, 몰입, 기억과 망각, 변화”의 뇌과학적 사실과 (러시아) 문학 작품에서의 그 대응적 사례를 골라 짝지어 설명하는 것으로만 그쳤다면, “그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란 뜨악한 핀잔은 석영중 교수 자신이 듣게될 가능성이 더 크다.

어떤 연구 주제/설명 대상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문학 작품에서 이것 저것 뽑아와 대응시키고 (중언부언 동어반복적으로) 부연 설명하는 것이 문학과 학부생이나 초보 대학원생의 가장 흔한 논문 유형이다. 『뇌를 훔친 소설가』가 위 서평에서 요약한 대로만 했다면, 혹은 저런 식의 단순 정리 논문의 문학(비평)적 수식에 그친 것이라면, 그저 범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위 인용문에서의 발언 내용은 “그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에 그치는 단순 사례 수집/설명에서 한두 단계 더 나아가 심층적 통찰이나 독창적 사유를 제시하지 못했다는/않았다는 자기고백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석영중 교수께서는 마음철학/심리철학이나 인지과학철학 쪽은 과연 들여다보셨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저런 말씀 하실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이미 영미권에서는 『뇌를 훔친 소설가』 류의 신경소설, 신경문학, 신경비평, 인지비평 관련서들이 숱하게 출간된 것으로 안다. 이쪽 방면의 학부 초월 융합적/통섭적 연구 붐과 성과는 석영중 교수의 인식과는 전혀 달리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국내의 한 교수님은 “인지혁명” 혹은 “패러다임 전환”까지 거론하신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뇌를 훔친 소설가』 류의 저작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는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뇌과학, 인지과학, 문학, 인문학과의 만남이 풍성해지리라 기대하게 한다.

(2011-10-26 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