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원조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윌리엄 이스털리의 <세계의 절반 구하기>(미지북스, 2011). 기사에 나오는 대로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 21세기북스, 2006)과 같이 읽어볼 만하겠다..   

연힙뉴스(11. 10. 16) 책상머리 원조 보단 발로 뛰는 원조 하라

"백인의 짐을 져라 / (중략) /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같은 / 당신들의 새 백성을 위해 /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라"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의 시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은 극렬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그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다. 그는 "반은 악마"나 다름없는 야만적인 식민지인들을 돕는 것이 백인의 의무라고 말하는 이 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헌정해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를 찬양하기도 했다.

윌리엄 R. 이스털리 미국 뉴욕대 교수는 키플링의 시 제목을 그대로 빌린 책 '세계의 절반 구하기'(미지북스 펴냄. 원제 'The white man's burden')에서 오늘날 서구의 국제원조 방식이 20세기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유명한 저서 '빈곤의 종말'에서 세계의 빈민들이 부실한 보건과 교육, 인프라 등이 서로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빈곤의 덫'에 걸려있다고 진단하며 이 빈곤의 덫을 제거하는 것이 보기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전세계 부자 국가들이 외국 원조를 대폭 끌어올리자는 것이 그가 제시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이스털리는 이 책에서 빈곤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삭스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빈곤의 덫'이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신화이며, 이른바 '빅 푸시(Big push)'로 불리는 대규모 원조가 가난한 나라들을 성장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빅 푸시의 예상과는 반대로, 통계상 원조를 많이 받는 국가들은 원조를 적게 받는 국가들보다 도약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90쪽) 

무엇이 문제일까. 서구가 지난 50년간 대외 원조로 2조 3천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여전히 수백만 명의 빈곤국가 아이들이 12센트에 불과한 말라리아 예방약과 4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받지 못해 목숨을 잃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구 국제원조가 '계획가'들의 거대한 '계획'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대외 원조에서 계획가들은 선한 의도를 표방하지만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중략) 계획가들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17쪽) 더욱이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것을 전혀 다른 사회에 하향식으로 부과하려는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계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을 새삼 되새기며 굶주리고 있는 세계의 절반을 모른 척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스털리는 '계획가' 대신 '탐색가'적인 시각으로 국제 원조에 나서야한다고 제안한다. 계획가들과 달리 탐색가들은 밑바닥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발견하고 수혜자들의 만족도까지 파악한다. 요컨대 계획가들의 원조는 책상머리에서 나온 '하향식'이고, 탐색가들의 원조는 발로 뛰는 '상향식'이다. 그러니까 이스털리의 견해대로라면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 구제는 나랏님'은' 못한다"는 식이다.

이 책에는 이런 탐색가의 원조가 성과를 거둔 여러 사례들이 제시된다. 탐색가들의 원조에 힘입어 비서구 지역의 빈곤 국가들이 스스로를 도운 사례들이다. 그는 "비서구 지역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동안, 계획가들의 지구적 사회 공학은 빈민 구제에 실패해왔고, 이는 계속 실패할 것"이라며 "계획가들은 지난 60년 역사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은 탐색가들에게 기회를 줄 차례"라고 말했다.(고미혜기자) 

11. 10. 16.  

P.S. 인도주의 내지 인도적 개입문제를 다룬 책들도 몇 권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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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엊그제 종로에서 사들고 전철에서 읽은 책은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출판평론가 최성일의 <한 권의 책>(연암서가, 2011)이다. 사후에 나왔으니 그의 유고집이고, 서문 또한 아내가 대신 적었다(근래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서문이다). 속표지에 실린 저자 소개를 보니 <베스트셀러 죽이기>(2001)에서 시작해 <한 권의 책>에 이르기까지 그는 5종의 단독 저작과 한권의 공저를 남겼다. 5권으로 출간됐던 대표작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을 1종으로 치면 그렇다. 유고집의 제목이 '한 권의 책'으로 붙여진 건 의미심장하다. "읽기 위해 쓰고, 쓰기 위해 읽었다"는 저자의 삶이 결국엔 '한 권의 책'으로 응축되는 거 같은 느낌이다. 나 또한 얼마를 더 살고 몇 권의 책을 더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한 권의 책'에 이르는 여정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런 운명에 바쳐진 이들을 생각하며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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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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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우리 시대 지성인 218인의 생각 사전
최성일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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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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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의 주인공 마이클 샌델 교수가 세계지식포럼 착석차 방한하여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대담을 가졌다. 신작 <시장과 정의>(원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도 조만간 출간되는 듯싶은데, 11월까진 책이 나오면 좋겠다(12월에 그의 정의론에 대한 강의가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공저를 제외하면) 박원순 변호사의 책을 별로 읽은 게 없는데, 겸사겸사 몇권 골르며 대담 기사를 옮겨놓는다. 기사는 아직 교정이 덜 끝난 듯싶다...

    

매일경제(11. 10. 14) 박원순 - 마이클 샌델 교수 대담 전문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12일 저녁 서울시장선거에 나서는 박원순 무소속 후보와 함께 대담을 가졌다. 박원순 후보는 대담 전에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의 영어원본과 한글 번역본을 준비해 딸과 본인을 위해 싸인을 부탁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권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샌델 교수는 딸이 자랑스럽겠다고 덕담을 했다. 박원순 후보는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 한국말로 질문을 하고 답을 영어로 받았다. 샌델 교수는 한국의 행정가와 무소속 후보까지 다양한 이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박=샌델 교수님께서 학문과 강의에 주제로 삼고 있는 정의는 제가 삶 속에서, 실천 속에서 늘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인권변호사로서 1980년대 독재정권에서도,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가로서 여러 활동을 할 때도 제 삶의 화두는 정의였습니다. 교수님과 저는 일했던 방식과 영역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책이 한국에서 100만권 이상 팔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땠습니까? 다른 나라에서는 어땠나요? 한국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도 수십 권 책을 냈습니다만 1만 권 이상 팔기는 어려웠습니다. 



샌델=이렇게 많은 책이 팔렸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책을 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미국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이런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될 지 몰랐습니다. 철학책으로 이런 반응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반영하는 것이 정의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 더 나은, 더 깊은 공적인 논의(public discussion)를 향한 갈망(hunger) 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반응은 책 만으로는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책이 미국과 한국 두 사회에서 정의 문제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면서도 성찰적으로 논의하길 원하는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랍니다.

박=저도 지금 우리 사회에 샌델 교수님 책이 많이 팔린 것은 그만큼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부동산 투기와 위장전입, 재벌의 편법 승계, 논문 표절, 빈부 격차 등 오히려 정의가 현실 속에서는 이뤄지지 못한 것에 대한, 그래서 더욱 정의를 갈망하는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바람직한 것은 이런 정의에 대한 갈증은 무엇이 구체적으로 정의인가 하는 것들을 찾아보고자 하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행동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은 좋은 시민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책을 보면 좋은 시민(good citizen)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좋은 시민은 어떤 것입니까? 저도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하면서 좋은 시민은 방관하지 않고 늘 참여하는, 구체적으로 공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시민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샌델= 저도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적극적 참여가 요구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좋은 시민에는 2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시민들이 책임감을 갖고 공적인 일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따라가고, 주변 세상에 대한 정보로 무장하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공선을 향한 관심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토크빌은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지역 공동체(local community)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시민이 되는 법과 자치 개념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인들에게 습관처럼 된 것입니다. 그는 이를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라고 일컬었습니다. 그것은 공공선을 위해 배려하는 것을 배운다는 의미였습니다. 개인의 삶과 가족들에 뿐만 아니라 더 큰 공동체에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토크빌이 마음의 습관, 시민의 덕(civic virtue) 배양을 강조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시민의 자질에서 나오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민의 덕을 기르고 공공선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이것은 일생 동안 배양되어야(cultivating) 하는 특질입니다. 우리는 애초에 시민의 자질을 갖추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배웁니다(learning by doing). 그래서 참여가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사회는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의 미덕을 배우고 공공선을 배려할 줄 아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나요? 



박=이 말씀에 굉장한 안도감이 듭니다. 시민들의 참여, 훌륭한 시민이 결코 하늘에서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양될 수 있다고 하는 점이죠. 특히 우리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 하에서 개인의 역할이니 참여, 책임이라는 것이 전무했습니다. 제가 해온 시민운동은 황무지에서 경작하는 일이었죠. 미국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시민들 속에서 배양됐다는 점에서 안도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리더, 활동가로서 굉장히 힘든 점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의식과 관념을 깨고 시민들에게 역량을 강화해야(empowerment) 하니까. 그런 것이 미국의 경우와 한국은 조금 다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군사 독재, 전근대적 제도와 의식 하에서 힘들었는데. 미국의 시민 정신과 한국의 시민정신을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샌델= 저는 한국 사회와 공적 생활에 대해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사람으로서 말씀 드립니다. 이번이 3번째 방문입니다. 2005년에 처음 와서 철학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발간됐을 때 왔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고 지금 한국과 정치를 배우는 단계입니다. 방문객으로서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은 단기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성취하고 이제 경제성장이나 국내총생산(GDP)를 넘어서는 가치들에 대해 공적으로 토론하고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공정사회의 의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각 정당들은 공정함에 대해, 어떻게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공정함이 뭔지, 정의가 뭔지,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어떻게 정책에 반영돼야 할 지에 관해 진정한 토론이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다른 국가들도 한국 사례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느낌으로 한국인들은 시장이 경제 성장을 위해 가치 있는 수단이지만 시장 그 자체는 정의를 소득과 부를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는 우리가 시민으로서 토론해야 할 정치적 질문들입니다. 한국은 그런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불평등 문제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불평등은 경제성장의 부산물로서 나타났고, 사회가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도전과제를 던져줍니다. 방문객으로서 제가 한국에서 보고 있는 것들이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질 공적인 논의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의미와 공정함의 의미,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식들이 우리 사회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라고 봅니다.

박= 샌델 교수님은 한국사회에서도 시장에서의 정의, 공정성 문제가 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서 다뤄져야 하고 동시에 불평등 문제도 토론을 통해 좀 더 진전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은 이런 것들이 보다 공식적 영역, 특히 정치권에서 다뤄져서 시장에서의 정의를 좀더 강화하고 불평등을 시정하는 정책들이 실시돼야 하는데 사실 유감스럽게도 정치권 영역, 관료사회에서 이런 것이 시민들이 바라는 만큼 안 되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과거의 후진적 요소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을 통해서 하는 일들이 한계에 봉착하고 그래서 제가 (시민운동의) 경계를 넘어가서 시장이 되겠다고 출마를 하게 됐는데, 시민사회의 활동이 시민들의 새로운 요구에 따라 정치권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 자신의 얘기지만 어떻게 보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샌델= 시민사회 혹은 시민운동과 정치 사이에 아주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 둘은 서로 겹치는 영역입니다. 당신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죠. 어떤 이들은 평생을 시민사회에 헌신합니다. 시민사회와 운동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중요하죠. 그러나 정치권에서 정해지는 일은 엄청난 영향을 시민사회에 미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건전한 민주주의는 강한 시민사회가 있고, 그 사회는 에너지와 적극주의를 정치권에 제공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시민사회는 활약하는 사람들은 시민 활동을 추구하고 정치권에 있는 이들은 정부의 일을 맡죠. 그러나 때때로 당신의 경우처럼 양쪽간 연결될 수도 있죠. 제 생각엔 당신이 갖고 있는 시민사회의 경험이 당신이 지금 선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성공적이라면 당신은 이미 기존에 했던 일들이 서울시장직을 수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박= 사실 미국의 랄프 네이더는 이분도 환경운동을 하다가 녹색당 대표로 미국 대선에 나갔는데 그분은 대통령 당선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 이념을 미국시민들에게 알리는 기회로 활용했는데 제 욕심은 사실 그보다 조금 더 넘어서는 겁니다. 상징적인 의미 보다 현실적으로 시장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거든요. 또 사실 많은 시민들이 현재 여당 대표만큼의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우리나라 정당정치나 대의민주주의가 너무 실망스럽게 시민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봅니다. 사실은 저도 기본적으로 정당정치가 정상이 되고 정당인이 정당끼리 경쟁을 통해서 선거가 이뤄지면 좋은데 우리 사회가 그런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제가 균열음을 내면서 하나의 경고와 더불어서 하나의 대안적 흐름을 타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당선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큰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미국도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이 있게 마련이고 시민사회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합니다.

샌델= 사실입니다.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미국 정치 제도에서는 아주 어렵습니다. 특히 대선에는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기 힘듭니다. 정당정치가 고안된 형태 때문에 대선에서 지금까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소속 후보는 공화당 출신 (26대) 대통령인 테드 루즈벨트였습니다. 그는 퇴임후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나왔었죠. (당선은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치 구조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의 정치상황은 다르다고 봅니다. 한국의 정치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큰 관심을 두고 지켜보겠습니다. 질문에 답하자면 미국에도 양당 정치의 대안에 대해 논의가 있었습니다. 많은 민주주의 사회에는 정치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있었습니다. 주요 정당들은 자주 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합니다. 기존 정당에 대한 좌절이 전세계 시민들, 유권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창의적인 대안을 모색하게 만드는 현 상황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각 사회들은 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 정당 정치에서 신뢰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거나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대안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박= 한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좌절 속에서 예건대 뉴욕이나 런던의 대규모 시위는 대중의 좌절을 반영한다 봅니다. 한국에도 대규모 시위가 있었지만, 정치적 영역에서도 조직화된 힘으로 나타나면 정당들에 큰 영향을 주고 새로운 대안적 정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는 1000만명이 거주하고 2000만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서울의 시장이 된다면, 참 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충돌도 있고 수많은 사건사고가 있을 텐데요. 저는 샌델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정말 정의롭고 공정한 도시, 지방정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경우 이 거대 도시를 제가 시장으로서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공정함과 정의를 증진시킬 수 있을지 조언을 주신다면요.

샌델= 제가 조언을 드릴 만한 자격이 될 지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저는 방문자 입장이고 한국과 서울의 문제들을 막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정책에 관해 구체적으로 조언할 만큼 제가 충분한 지식을 갖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대 도시가 번영하려면 경제성장과 환경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취약층과 중산층을 모두 포함하는 시민이 경제적 배경에 상관없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평등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이런 것들이 주요 대도시들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운 과제입니다. 불평등을 줄이는 데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겠죠. 경제성장과 경제력을 지키는 것과 함께 건강, 교육, 복지, 환경문제는 모든 도시에 중요합니다. 어떤 정책이 서울에 적절할 지는 방문객인 저는 충분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서울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볼 겁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효과적인 시민들 참여를 독려하고 유지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요구됩니다. 흥미로운 과제로 지켜볼 것은 당신이 당선된다면 당신이 시민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을 지 여부가 건강과 교육, 복지, 경제성장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대단히 흥미로운 과제일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주요 도시들은 시민들을 움직이는 방법을 서로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고 봅니다.

박=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도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샌델= 그럼'런던시티즌스(London Citizens)'이란 시민운동 단체를 아시나요? 그들은 경제적인 약자들을 포함해서 시민들의 능력(civic capacity)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박=네, 저는 런던의 시민단체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많이 배우고 협업하고 있습니다.

샌델= 그 단체 공동체 조직가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커뮤니티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공공선을 위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일합니다.

박= 한국에서 이른바 보편적 복지에 관한 논쟁들이 심화되고 있는데 그 동안은 성장우선 정책을 정치인들이 택했습니다. 우선 파이를 키우고 배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민들 요구가 점점 커지면서 지금은 성장 못지 않게 배분을 당장 해야 한다는 요구가 정치권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배분적 정의가 따라가지 않으면 성장의 한계로 작용할 것입니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도 배분적 정의의 실현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지금은 이것이 한국에서 큰 분수령적인 논쟁입니다. 아시아노믹스 강의와 관련해 경제성장과 별개로 채워야 할 정의가 있다면. 또 도시 경쟁력 측면에서 특히 서울이 가졌으면 좋을 만한 매력 요소는 어떤 것일까요?

샌델= 마지막 질문에서 서울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경제 성장과 공정성(형평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좋은 사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두가지가 서로 상충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저는 반드시 그들이 상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첫번째 질문으로 이어지는데요. 경제성장이 특정 단계에 도달했을 때 대도시나 국가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의 능력과 기술이 충분히 발휘되야 합니다. 몇몇은 뒤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경제적 배경 때문입니다. 그들의 능력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이 공정함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시 전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 단계에서 혜택을 덜 받은 사람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그들을 사회 안에서 끌어안는 것이 그들만의 공정성 문제일 뿐 아니라 공공선을 위해, 미래 도시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구를 낙오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하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더 강한 사회를 만들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성장과 공공선, 공정성은 함께 갈 수 있고 모든 시민들의 능력이 이에 함께 기여할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벌어질 일들에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박= 교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아주 감동적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들의 삶과 사회 속에서 잠재력을 발휘하고 능력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은 훌륭한 생각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겠습니다.

샌델= 이런 대담을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박= 제가 서울시장이 되면 제 실험과 구상(design)이 발전되는 것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1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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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더십의 진화심리학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소식지 '책&'(399호)에 실린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에 다룬 주제는 리더십, 아니 팔로워십이다. 계기가 된 건 <빅맨>이었는데, 리더십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접근이 눈길을 끄는 책이다.

책S&(11년 10월호) 팔로워십의 형성

송사릿과에 속하는 열대어 거피는 번식력이 좋아서 생물학 실험에 널리 쓰이는 관상어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자들은 한 실험에서 수조 반대편 끝에 놓은 먹이를 향해 얼마나 빨리 나아가느냐를 기준으로 이들을 대담형과 소심형으로 나누었다. 그러고는 대담한 거피 한 마리와 소심한 거피 한 마리를 수조에 한꺼번에 넣었다. 결과는 항상 대담한 거피가 먹이 사냥에 앞장서고 소심한 거피가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담한 거피와 소심한 거피 짝은 소심한 거피 두 마리나 대담한 거피 두 마리가 짝이 되었을 때보다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했다.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거피 세계에서 리더와 팔로워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그러한 행동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적응 행동’이라는 점이다.  

마크 판 퓌흐트와 안자나 아후자가 지은 <빅맨>(웅진지식하우스, 2011)은 리더십의 탄생과 진화를 그러한 적응 행동의 관점에서 다룬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이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생겨났고 그 토대가 인간이 진화하기 훨씬 전부터 갖춰졌다”는 생각에서 ‘진화 리더십 이론’을 제창한다. 즉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 사회에 리더와 팔로워가 자리 잡았고, 그러한 행동의 원형이 우리 두뇌에 ‘내장’되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키 큰 정치인은 존중하고 키 작은 정치인은 얕보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남성 경영인은 포부가 큰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여성 CEO는 폄훼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약 200만년 동안 아프리카 사바나에서의 오랜 진화 기간에 형성된 우리의 ‘원시적 뇌’가 현재의 환경과 잘 맞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로 본다. 이른바 ‘부조화 가설’이다. 이러한 부조화로 인한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리더십과 팔로워십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이해는 필수적이다. 

인간은 본성상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팔로워십은 일종의 디폴트 세팅이다. 리더가 소수인 반면에 팔로워는 다수인 것은 비범한 소수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런 본성이 생겨난 것은 진화적 이익 덕분이다. 팔로워십은 집단을 결속시키고,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었으며 리더를 따름으로써 리더 역할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리더를 따르는 일이 유리하지만은 않다. ‘나쁜 리더’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65년부터 1997년까지 아프리카 자이르를 통치했던 모부투는 통치 기간 동안 대략 5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 소득을 착복했다. 정치적 라이벌들은 탄압하거나 회유하고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강화했다. 그는 자신을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로 지나가는 발자취마다 불을 남기며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며 전진하는 전능한 전사’라는 의미로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은벤두 와 자 방가’로 개명하기까지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런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리더에 맞서기 위한 전략도 진화시켜왔다는 점이다. ‘권력자에게 맞서기 위한 전략’으로 저자들은 험담과 소문, 공론, 풍자, 불복종, 그리고 암살 등을 든다. 인간의 본성이 형성된 장기간 아프리카 사바나의 수렵채집사회에서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체화되었기에 부당한 통치에 대해 분노하는 성향도 우리의 진화적 본성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리더십과 팔로워십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리더십을 강의하는 바버라 켈러먼도 팔로워십에 주목한다. <팔로워십>(더난출판, 2011)에서 저자는 비효율적이거나 비도덕적인 리더를 나쁜 리더로 규정한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리더가 나쁜 리더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일은 팔로워의 몫이다. 우리가 리더뿐 아니라 팔로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팔로워의 유형을 방관자, 참여자, 운동가, 완고주의자로 구분하면서, 켈러먼은 팔로워도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공공부문에서 팔로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저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예로 든다. 그에 대한 지지율은 아주 낮았지만 그럼에도 이라크 침략에 대한 그의 결정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적었다. 다른 선택이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2004년 대선에서 미국민은 부시 대신에 다른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도 있었다. “좋은 팔로워가 되려면 능동적으로 선호하는 리더를 후원해야 하며, 동시에 능동적으로 후원하지 않는 리더와 대립해야 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요컨대 좋은 리더와 나쁜 리더가 있는 것처럼 좋은 팔로워와 나쁜 팔로워가 있다. 좋은 리더를 선택하고 나쁜 리더를 제재하는 것이 좋은 팔로워의 역할이다. 팔로워의 힘을 과대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그것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이 켈러먼의 주장이다.  

팔로워의 역할과 영향력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동양적 전통에서 팔로워십에 대해 이해를 정리해주는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후웨이홍과 왕따하이가 공저한 <노자처럼 이끌고 공자처럼 행하라>(한스미디어, 2011)가 중국식 리더십 교본으로 소개돼 있다. 중국에서도 사회‧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게 되면 팔로우십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게 될는지 모른다. 

1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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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1-10-1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이제야 시험이 끝났습니다...

로쟈 2011-10-13 22:42   좋아요 0 | URL
ㅎㅎ

2011-10-12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3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신문'에서 '독서에세이'를 청탁받고 쓴 글을 옮겨놓는다. 강의차 최근에 조금 들여다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서 썼다. 지면사정으로 분량이 2매쯤 더 늘어났음에도 '서론' 정도에 머물렀다(루카치에 대해서, 혹은 루카치와 벤야민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길게 써볼 생각이다). 

  

대학신문(11. 10. 10)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루카치,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꿈

『대학신문』에서 원고청탁을 받는다고 반드시 대학시절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텐데, 연상효과 탓인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생각났다. 내게 이 책은 80년대 후반 대학가의 풍경과 분리되지 않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학부시절에 읽은 가장 난해한 책 두 권이 『소설의 이론』과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였다. 두 책의 요지에 대해서는 ‘강의’까지 할 수 있게 됐지만, 직접 읽어나가는 건 별개의 문제다. 어느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전망이 어떻다는 걸 다 알더라도 그 정상까지 올라가는 건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읽기’는 ‘인식’과는 종류가 다르며 어쩌면 용도까지 다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읽기는 경험이니까.

가장 난해했던 책이란 인상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읽어보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생각만큼 빨리 재회하게 되지는 않았다. 『소설의 이론』에 한정하자면 학부시절에 읽은 것과는 다른 번역본이 그간에 새로 나왔고, 그 또한 바로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뒀지만 진득하게 손에 들 기회는 내지 못했다. 아마도 단순한 책 한 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가 아닌가도 싶다. 가볍게 손에 들기에는 너무 무겁고 묵직하달까? 거창하게 말하면 『소설의 이론』은 그냥 ‘이론서’가 아니라 한 세대의 ‘청춘’이고 ‘역사’다. 하다못해 내 경우만 해도 그렇다. 언제나 플래시백을 동반하는 청춘의 역사.

남학생의 경우 대학시절은 학부생시절과 복학생시절로 나뉜다고 억지를 부린다면, 내게 학부시절은 2학년까지였다. 5공화국 시절의 대학 2년을 용케 버티며 다니다가 3학년에 올라와서는 한달만 강의실에 고개를 내밀다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 끌려간 건 아니고 자발적으로 갔다. 그게 89년 봄이었다. 그리고 복학한 게 91년. 보통은 동기들이 아닌 후배들과 강의를 듣게 되니 복학생에게 대학생활은 또 다른 풍경이고 또 다른 생활이다. 하지만 내 또래 학번에겐 ‘또 다른 역사’이기도 했다. 이 경우는 스케일도 커서 ‘세계사’다.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연이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됐다. 곳곳에서 레닌동상이 철거되고 끝내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세상이, 아니 역사가 일상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바뀌어갔다. 어쩌면 사회적 격동이란 게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오히려 예외에 속했는지도 모른다. ‘기적적인 일상’이란 것 말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사이 꽃잎에 이슬이 맺히는 기적!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동기들과 소련의 ‘젊은’ 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희망처럼 보였고 더 강력해진 사회주의가 곧 우리 눈앞에 등장할 것처럼 여겨졌다. 착각이었다.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소련이란 나라는 ‘적성국가’였다. 동창회 자리에 나가 전공이 ‘소련’이라고 결연하게 얘기하면 박수를 받던 때였다. 하지만 학부를 졸업하기도 전에 소련이란 나라는 말 그대로 과거, ‘역사적 과거’가 됐다. 자칭 스탈린주의자였던 이들조차도 소련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향수의 대상이거나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고는 다들 곧 무관심한 표정이 됐다. “역사는 끝났다!” 모두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그렇게 가을이 저물어갔다.

돌이켜보니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 마당이었으니 학부시절 강의실과 과방에서 명예롭게 울려 퍼지던 루카치란 이름이 퇴물의 대명사가 된 건 당연하다. 그는 교조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이었다. 하기야 “최악의 공산주의라 하더라도 최상의 자본주의보다 더 낫다”고 단언한 골수 공산주의자가 루카치 아니던가.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에서는 세계의 본질이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으로 ‘소설적’이고, 진리에는 소설적 계기가 있는 듯하다. 역사의 종말과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포장되던 신자유주의의 치세도 지난 2001년 9.11 테러와 함께 종언을 고했다. 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현실 사회주의의 종언’에 뒤이은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종언’이다. 죽었다던 역사는 다시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건재를 확인시켰다. “나 아직 안 끝났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점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그렇게 다시 길을 묻는 시대에 루카치를 손에 든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고 그는 『소설의 이론』 서두에 적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즉 지금은 복된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토피아를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면? 다시 회복해야 한다면? 어쩌면 인류의 위대한 망상 혹은 오랜 망집일지도 모르는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복창하며 ‘황금시대’에 대한 열망이라고 불렀다. ‘진정하고 조화로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하고 조화로운 관계’가 가능한 시대다. 혹은 문화와 문명이 인간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꿈을 포기할 수 없다고 루카치는 말했다.

애초에 『소설의 이론』 자체가 도스토예프스키론의 서론격으로 쓰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본격적인 도스토예프스키론은 쓰이지 않았다. 그건 제1차 세계대전에 직면해 무엇이 파국에 직면한 서구 문명에서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를 고민하던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적 세계에 대한 전망으로 나아가기 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근대 러시아문학 전체는 1917년 혁명에 수렴된다고까지 그는 적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자리는 ‘1917년 이전의 루카치’고, 우리가 다시 읽는 루카치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루카치’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지지와 옹호도 지금에 와서 다시 읽으면, “최상의 자본주의보다 못한 공산주의라면 공산주의도 아니다”란 뜻인가도 싶다. 현실사회주의를 ‘현실과 타협한 사회주의’란 의미로 이해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우리에게 꿈이 있는가.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사무엘 베게트)란 경구를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생각과 함께 『소설의 이론』을 다시 펼친다. 

11.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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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10-0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소설의 이론>을 읽어본 건 99년이니까 로쟈님하고 대략 10년정도 차이가 나는 셈이네요.^^; 추억을 되새기는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 <청년헤겔>도 구비는 해 놓았는데, 엄두를 못 내고 있네요. 로쟈님의 루카치 / 벤야민론도 기대하겠습니다. 중간고사 바쁘시죠?^^

로쟈 2011-10-09 23:49   좋아요 0 | URL
학부시절이라고 확장해놓긴 했는데, 대학1-2학년때 읽은 듯해요. 중간고사로 제가 바쁠 일은 전혀 없는데요.^^

빵가게재습격 2011-10-10 09:12   좋아요 0 | URL
아, 네.^^ 근데 시험 안 치시나요? 문제내시고, 채점...?^^;

로쟈 2011-10-11 11:04   좋아요 0 | URL
문제내는 건 너무 간단하구요, 채점은 기말에 몰아서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0-0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카치의 저작은 어렵지만 그의 생애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두툼한 전기가 한권 번역되면 좋겠습니다.리히트하임이 쓴 전기는 너무 얇아서...루카치가 지지했던 임레 나지를 다룬 영화가 있었는데 그의 최후를 보니까 그럭저럭 루카치는 임레 나지보단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로쟈 2011-10-09 23:51   좋아요 0 | URL
자전적 기록이 <맑스로 가는 길>로 나왔던 적은 있습니다. 두툼한 평전은 저도 아쉽습니다...

olikim 2011-10-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글 잘 읽었어요..안 그래도 오늘 수업 준비 때문에 벤야민의 The Storyteller를 읽다가 루카츠가 나오길래 찾아보려던 참이였는데 마침 선생님이 루카츠 관련 글을 올렸네요^^ 아 전 올가에요~ 선생님 블로그에 종종 들리곤 했는데 흔적은 처음 남긴 거 같아요..

로쟈 2011-10-11 11:00   좋아요 0 | URL
강의준비? 반가워, 오랜만이네.^^

미국사람 2011-10-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영역본을 구한 뒤 복사를 떠서 읽으려했다가 두페이지 쯤 읽고 도저히 못 읽겠어서 그만두었는데 그리고 십몇년 지난 뒤 영역 불역을 모두 다 구했는데 읽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

그 이후 10년이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책장에 그냥 있읍니다. 영어 좀 한다고 읽을 수 있는 책은 전혀 아닌 듯.. 죽기 전에 읽어보고 죽을지 모르겠네요.

로쟈 2011-10-11 11:01   좋아요 0 | URL
네, 독일 정신과학 전통에 익숙치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으로 돼 있어요...

msjpolitics 2011-10-13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부때 루카치 책만 들었다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 교수님중에 한 분도 쏘련의 농업정책쪽으로 박사논문을 끝내자마자 소동구가 무너져서 참 난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네요.

로쟈 2011-10-13 22:42   좋아요 0 | URL
논문 주제를 바꾼 사람들도 꽤 됐었지요. 그때로선 세상이 바뀌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