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주목한 신간 중의 하나는 유럽 중심주의 역사학자 여덟 명을 호명하여 비판한 제임스 블로트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 2008)이다. <리오리엔트>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랭크에 따르면, "블로트는 마치 사격장에라도 온 듯, 막스 베버의 고전적인 주장에서부터 재레드 다이아몬드와 데이비드 랜디스가 쓴 그것의 최신 베스트셀러 버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 여덟 명의 ‘이론으로 가장한 이데올로기’를 정확히 쏘아 맞출 뿐 아니라 철저하게 해부하여 완전히 무너뜨린다." 거기에 한국어판 서문을 쓴 서양사학자 최갑수 교수에 따르면, "유럽중심주의의 세계이해를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은 그것의 극복을 바라는 이들에게 소중한 입문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적어도 문제의 과녁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줄 듯싶다...

한국일보(08. 08. 30) 유럽문명만이 우월?… '반쪽 사관' 일뿐!

"왜 그 많은 문명중 유럽문명만이 자본주의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이 질문은 역사의 승자인 서구의 역사가들은 물론,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20세기 들어서야 근대국가를 세운 제3세계 역사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많은 서구 역사가들이 제시한 해답은 유럽 사회의 '특수성'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과학은 오직 서구에서만 발전단계에 있으며, 체계적인 신학을 끝까지 발전시킨 종교는 기독교 뿐"이라고 저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서문을 장식한 막스 베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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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명의 '합리성'을 근거로 서구 근대화의 필연성을 주장한 베버 이후 다양한 유럽중심주의 이론들이 등장했다. 삼포식 돌려짓기와 무거운 쟁기사용 등 농업혁명은 오직 유럽에서 성취됐으며 이것이 자본주의화의 길로 이어졌다고 보거나, 야만적이고 약탈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평등주의적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럽에서만 경제발달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이론 등이 그것이다.

남미, 동남아시아 등지에서의 연구를 토대로 유럽 식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평생을 바친 역사가이자 베트남전 반대운동, 푸에르토리코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던 제임스 블로트(1927~2000). 그는 베버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로버트 브레너, 보수주의 역사가 데이비드 랜디스에 이르는 8명의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 역사가들을 호출한다.

그는 유럽인들은 비길데 없이 창의적이거나, 홀로 독창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다거나, 홀로 민주적이고 윤리적이라는 이 지식인들의 역사서술 인식 태도를 협애하기 짝이 없는 '터널사관'이라고 비판한다. 가령 베버는 지중해의 도시들 같은 교역도시가 유럽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블로트는 인도양이나 남ㆍ동중국해에도 큰 교역도시가 있었고, 비유럽의 문명에 대해 무지한 베버는 지적으로 불성실한 논리를 전개했을 따름이라고 공격한다.

저자는 유럽의 환경이 다른 지역보다 더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문화적으로도 우월한 특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유럽발흥의 원인은 오직 다른 지역의 해운 중심지보다 유럽의 그것이 아메리카로 향한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력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독자들은 명쾌하고 다양한 논거를 사용해 세계적 석학들의 이론적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그의 반론에 일종의 통쾌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 책은 저자가 탈식민화된 세계사 서술을 위해 기획했던 3부작'식민주의자들의 세계이해'의 두번째 책. 다음 작업으로 저자는 유럽중심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유럽의 대두와 세계화를 설명하는 저술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완결짓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미국지리학자협회는 2000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임스 M 블로트 혁신적 저작상'을 제정했다.원제 'Eight Eurocentric Historians'(2000)(이왕구기자)

08. 08. 30.

P.S. 비판대상이 된 여덟 명의 역사학자 중에는 '유로 환경결정론자'로 지목된 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주로 타겟이 된 책은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은 <총, 균, 쇠>이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의 역자 박광식씨는 줄곧 <총기, 병균, 강철>이라고 옮겼는데, 따로 이유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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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30 20:54   좋아요 0 | URL
저는 로버트 브렌너를 어떻게 비판했을까 궁금하네요.

로쟈 2008-08-31 12:04   좋아요 0 | URL
목차에도 있지만, '유로 마크스주의'로 지칭하네요. 내용은 '유럽 확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니까 대동소이할 듯...

노이에자이트 2008-09-01 21:44   좋아요 0 | URL
제2차 자본주의 이행논쟁 때 브레너의 논문이 경제사 쪽에서 꽤 유명해서 번역본을 봤는데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번역자들 중 지금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전제 자체-서구의 근대화 및 합리성-를 의심하는 학자로 바뀐 이가 있더라구요.

로쟈 2008-09-02 08:29   좋아요 0 | URL
'학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변호들도 있었지요...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대부분의 계간지들이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는 다양한 특집을 싣고 있다. 좌담에서 칼럼과 평론까지 스펙트럼도 넓다. 어쩌면 다시 '전면전'을 준비해야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흥분시키고 또 실망하게도 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8. 27) "이제 우리 의식에도 촛불을 밝힐 차례입니다"

졸속적인 쇠고기 수입협상 타결에 대한 반대로 시작된 촛불집회. 두 달 이상 진행된 촛불집회는 촛불을 켠 시민 뿐 아니라 촛불에 반대하는 진영들, 시민단체들에게도 하나의 '사건'으로 자리잡았다. <창작과 비평> <황해문화>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등 계간지들은 가을호에서 특집, 대담, 칼럼 등의 형태로 촛불집회의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 촛불은 자발적인 축제다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에게 '온수, 온수'를 외치는, 폭력을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시위대, "그렇다고 대통령을 바꾸겠습니까" 라는 여당의원의 발언에 "아니, 그럼 국민을 바꿔요?"라고 답한 시민들의 반응 등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보여준 신선한 상상력, 직관력, 표현력, 자발성에 주목해 촛불집회를 주목한 글들이 많았다.

전효관 전남대 교수는 "웃으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10대 여학생들은 이번 집회의 가장 상징적인 특이점"이라며 "새로운 감수성이 가벼움을 키워드로 채택하는 것은 진지함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촛불집회를 정당의 영향력이 전무하고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한 '자발적인 저항'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촛불집회는 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민주화운동세력, 시민운동세력에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과제를 제기했다고 부연했다. 한 교수는 "발랄한 대중에게 운동권은 따분하고 재미없고 판에 박힌 말만 하고 게다가 권위주의적이기까지 했다"며 "자발적 평화시위로서 촛불집회는 지금까지만으로도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촛불은 민주주의의 학습의 장이다
촛불집회를 민주주의 학습의 장으로, 거대담론의 정치 대신 생활정치가 꽃필 수 있는 계기로 해석하는 분석도 나왔다. 이현우 서울대 강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규정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중ㆍ고등학생들, 일반시민들이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며 "직접적인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도 많지만 이 경험 자체는 한국사회가 조금 더 민주화되고 발전해 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문재 문학동네 편집위원도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긍정적 의미에서 정치의식을 갖게 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긍정했다. 오은 시인은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현장을 피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현장으로 나왔고, 과거에 정부의 정책에 군말 없이 복종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뭘 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찾게 되었다"며 촛불집회의 정치적 계몽효과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했다.

■ 촛불집회도 한계있다.
쇠고기 협상의 실패에 대해 정권교체까지 요구하는 촛불시위대의 주장은 참정권에 대한 부정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남재일 세명대 교수는 "정부가 민의를 거스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시민의 힘으로 재협상을 하는 것이 절차적 민주화를 성취한다는 시각은 난센스"라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전면적으로 대의권력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참정권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는 6월 정년퇴임 강연에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대의적 민주주의 체제이며 운동이 항시적으로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라며 촛불집회의 한계를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먹거리 안전확보라는 개인의 '권리 지키기' 문제에 집중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중산층적 문제의식이 비정규직 문제, 사회적소수자의 문제 등 다른 사회ㆍ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연대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도 제기됐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이 운동에서 인터넷에 들어가볼 시간조차 없이 노동에 시달리고 해고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촛불항쟁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했다"며 "촛불항쟁은 비정규직문제, 한미 FTA같은 의제들을 에둘러갔다"고 한계를 지적했다.(이왕구 기자)

08. 08. 29.

P.S. 개인적으로 현장에 직접 다녀오지 못했으면서도 얼떨결에 좌담에 참여하게 됐는데, 최종 정리된 글은 나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사실 '정리'는 좌담이 끝나고도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가능했지만). 참고로, 계간지 가운데서는 <문화과학>이 촛불집회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08273.html 참조). 이 특집에는 촛불집회의 '스타' 진중권의 글 '개인방송의 현상학'도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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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장집 씨의 지적은 경청해야 합니다.광장의 민주주의에 감격해서 일상적인 정당정치를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했죠.그는 정당정치를 직업적인 정치꾼이나 하는 짓이라는 주장을 진보진영에서조차 하고 있다면서 그런 자세는 국민에게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한다고 경계했어요.교육감 선거에서 한 표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 낮은 투표율을 보고는 그의 경고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더군요.

로쟈 2008-08-30 17:48   좋아요 0 | URL
규칙상 게임은 링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에링 2008-08-3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촛불집회에 여러번 참가해봤고 집회의 한계나 시위대에 대한 실망도 여러번 느꼈습니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비정규직문제, 한미 FTA같은 의제들을 에둘러갔다'고 주장하는 김종엽 교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촛불은 분명 기륭문제와 같은 비정규직 문제나 한미 FTA를 비판하고 참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습니다. 온라인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요.

로쟈 2008-08-31 12:03   좋아요 0 | URL
흔히 '촛불'도 몇 단계를 거쳐서 '진화'해갔다고 얘기하는 부분인데, 비정규직 문제는 박노자 교수도 지적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강준만 교수는 '서울광장'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지적했구요. 계층적, 지역적 '특수성'도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정치한 분석은 나중에 나오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시평이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가 왜 이리 가깝게 느껴지는 요즘인지...

경향신문(08. 08. 29) 망령

도스토예프스키가 숨 쉬었던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의 공기는 이랬다. 1849년 4월23일 새벽 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다. 당시 서유럽의 신 사조에 고취된 젊은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전제정치를 비판한 걸 누군가 밀고한 것이다. 모임에서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것이 28세 신진 작가에게 씌워진 죄목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총살 직전 감형돼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끌려가던 날의 상황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잠결에 샤벨(군경이 차던 칼)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옷을 입는 동안 그들은 방안을 온통 들쑤시며 원고와 책을 끈으로 묶었다. 난로 속으로 들어가 담뱃대로 꺼진 재를 휘젓기도 했다. 탁자 위의 낡은 동전을 경찰관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전(私錢·위조지폐)이라고 생각합니까” “조사해 봐야지” 그는 동전을 중대한 증거인 양 집어 넣었다.’

주동자 페트라셰프스키는 심문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심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고한 한 사람을 벌하기보다 열 사람의 죄인을 방면하는 게 낫다는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말대로다. 다른 하나는 ‘열 마디 말만 내놓으라. 그걸로도 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담뱃재를 놓고 서류를 불태운 증거라며 논죄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옥중 진술서는 펜으로 피를 찍어 쓴 듯 절절하다. ‘어쩌다 엿들은 말을 종이쪽지에 적은 밀고를 바탕으로 가두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 전후 관계를 생각지 않고, 어떤 의도인지 개의치 않고, 조각조각의 말을 임의대로 엮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검열에 대해서도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두운 색채로 정경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작품 발표를 금지당한 경험이 있다. 검열관들은 무해(無害)한 문장에서도 악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위험 사상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선 작품을 매장해 버린다. 밝은 빛깔만으로 된 그림이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셨던 차르 제정의 공기는 100여년 후 솔제니친이 마신 구소련의 공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공기는 21세기에도 망령처럼 지구를 떠돌며 어느 하늘을 암울하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망령에게 시공(時空)은 따로 없다.(김태관 논설위원)

08. 08. 29.

P.S. 필자가 암시하고자 한 내용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망령에게 시공은 따로 없다"고만 적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징후적 현실이다(올해가 국가보안법 제정 60돌이라 한다. 관련기사는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참조).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분위기를 (웃음까지 섞어가며)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어느 하늘'을 쥐어흔들고 있는 정권의 최대 치적이다. 러시아문학도가 보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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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8-29 18:42   좋아요 0 | URL
로쟈님, 24일 수요일 뵈어요. :)

2008-08-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30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쓴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을 공통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두 사람 다 보수파로 전향했으니까요.차명진 씨는 예전 민중당 출신인데 한때의 동료였던 오세철 씨에 대하여 "국보법을 위반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더군요.

로쟈 2008-08-30 17:47   좋아요 0 | URL
'보수'란 말 때문에 도매급이 되네요. 차씨의 인간이해는 절망스럽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30 20:53   좋아요 0 | URL
로자 님이 소개한 기사를 보니 국가보안법의 초창기 희생자인 백범이 생각납니다.옛 동지인 이범석의 막말...정치의 비정함을 분명히 느꼈을 겁니다.심지어 해방정국의 '반공주먹'김두한도 반공법에 걸려서 졸지에 빨갱이가 되었으니...
 

수전 손택(알라딘 표기는 '수잔 손택')의 신간 소식은 지난 7월에 한번 다룬 적이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173975) 아직도 책은 손에 들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677). 나름대로의 '재촉'인 셈인데,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독서는 가을이 아주 깊어갈 때나 이루어질 듯싶다. 아래 리뷰기사는 이전 기사들에서 읽지 못한 대목들도 포함하고 있어서 요긴하다. '고통학 대학원 과정' 같은 문구나 “유토피아는 공간의 일종이 아니라 시간의 일종이다. 어디에도 아닌 이곳에 있고 싶다고 느끼는 그 짧은 순간, 모든 유토피아들은 너무나 짧은 찰나다.”라는 손택의 언급 등이 그렇다. 죽음에 대한 손택의 태도를 좀더 세밀하게 정리해주고 있다(브레히트냐 손택이냐?).

교수신문(08. 08. 25) '수전 손택’, 명성의 이면

무려 2번의 암과의 투병과정조차 거뜬히 이겨냈던 그녀가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결국엔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는 비보가 전해졌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던 그녀였던지라 그 충격과 허탈감은 더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이민아 역)과 『인 아메리카』(임옥희 역)에는 인생의 마지막 무대에 직면한 ‘인간’ 수전 손택의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

『어머니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저자가 수전 손택의 외아들인 데이비드 리프라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어머니의 사망 이후 3년 만에 그녀가 죽기 전 몇 달 동안을 기록한 책이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유지되는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어머니의 투병 과정을 저자는 “고통학 대학원 과정”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어머니가 ‘죽었다’ 혹은 ‘사망했다’고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어머니는 존재하기를 멈추었다”라는 표현을 굳이 가져온다.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생을, 삶을 갈망한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들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책 속에 묘사된 수전 손택의 생에 대한 집념은 굉장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어렸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썼다. 데이비드 리프는 손택이 항상 미래를 살았다고 말한다. “어머니에게는 미래가 모든 것이었다. 사는 것이 모든 것이었다.” 실제로 손택은 ‘화학적 불멸’을 꿈꿨다.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는 것”, “삶을 지속하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손택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병실에서 자신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던 중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 이제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지저귈 지빠귀의 노래도 즐길 수 있다네.” 이렇듯 브레히트는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손택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는 사실과 화해할 수 없다”던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손택에게 “‘나’를 초월하지 않는 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문제”였다. 브레히트의 죽음은 “예술의 위안이며, 예술의 거짓이다.” 저자는 손택을 옹호한다. “어머니에게는 어머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을 권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손택에게 삶을 향한 저 가열찬 몸짓 외에 또 하나의 거대한 욕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예술이었다. 이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그녀의 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이미 명확히 드러난 바 있다. 손택은 단언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또 어떠했던가.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수많은 강연과 저술 일정 중간에도 짬짬이 연극과 춤, 영화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던 것도 필경 그 같은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것이 문학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손택이 이제는 “자신에게 정말로 소중한 일”을 하고 싶다고, 특히 소설을 많이 쓰고 싶다고 소망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두 번째 암과의 투쟁 당시 손택이 몰두했던 것도 소설인데, 그 책이 바로 『인 아메리카』다. 자궁육종치료까지 뒤로 미룰 정도로 그녀는 이 작품에 적지 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손택으로 하여금 그토록 예술을, 문학을, 소설을 간절히 욕망케 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문학은 자유다」에서 손택은 스스로를 “저는 이야기꾼입니다”라고 선언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인 아메리카』에서 손택은, 작품 속 여주인공의 입을 빌어 “예술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은 특권이자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평론가 강유정은 소설이란 장르가 “대답이라기보다 공모나 위안”이라고, 즉 “소설은 답이 아닌 위안을 준다”고 압축적으로 정의내린 바 있는데, 이 설명이 손택의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실제로 손택은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고 토로하고 있다. 손택은 결코 글쓰기를, 소설을 멈출 수가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가 왜 그리도 생을 갈망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인 아메리카』에서 손택은 ‘민족의 상징’이었던 폴란드 실존 여배우 헬레나 모드제예브스카의 미국 이민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다룬다. 여기서 손택은 “누가 옳고 그른가에 관한 논쟁”에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모두 헬레나가 왜 폴란드를 떠나려 하는지 궁금해 한다. “남들은 이유가 필요하다.” 조국이 서구 열강들에 의해 지배되고 분리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저항 운동에도 참가했던 헬레나가 미국에서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일 수도, 미국 무대에 서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행 직전 헬레나는 푸리에 식의 사회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잊는다. 대신 셰익스피어를 떠올린다. “셰익스피어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녀에게 셰익스피어는 곧 아메리카를 뜻한다. 그렇게 해 헬레나는 아메리카로 갔다.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그래서 미국 내에서 ‘반역자’로 매도되기까지 했던 손택의 입에서 느닷없이 아메리카가 모든 것을 의미한다니, 의아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손택이 가리키는 ‘아메리카’는 과거다. “과거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나라다.” 그 때 “미국은 단지 또 다른 나라가 아니었다.” 그 때 미국은 세계사의 정당한 진로로서 창조된 ‘미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유토피아 공동체 건설에 실패한 헬레나에게서 보듯, 결과적으로 유토피아는 실패했다. 흥미로운 것은, 유토피아를 공간적 맥락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손택의 주장이다. “유토피아는 공간의 일종이 아니라 시간의 일종이다. 어디에도 아닌 이곳에 있고 싶다고 느끼는 그 짧은 순간, 모든 유토피아들은 너무나 짧은 찰나다.” 결국 『인 아메리카』의 ‘미국’은 좋았던 그 때 그 시절의 아메리카로 귀결된다.

‘존재하기를 멈추기’ 얼마 전 손택은 간호조무사에게 몸을 기댄 채 “내가 이제 죽나 봐요”라는 말과 함께 울음을 터뜨리며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실비아 플라스와는 달리 손택은 코앞에 닥친 가혹한 죽음의 현실 앞에서 결코 초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권의 책에서 자연스레 우리는 그녀의 이름 앞에 그 어떤 수식도 붙지 않은, 다만, 그저 ‘인간’ 손택의 모습을 그려내게 된다.(이종찬 객원기자) 

08. 08. 28.

P.S. 손택과 외아들 데이비드가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1965년 7월'에 찍은 걸로 돼 있다(그녀의 출세작 <해석에 반대한다>는 이듬해인 1966년에 출간된다). 두 사람은 이후로 40년을 같이 더 살았다. 찾아보니 데이비드의 아버지이자 손택의 전 남편, 저명한 사회학자 필립 리프는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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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8-28 10:19   좋아요 0 | URL
손택이 죽음과 그토록 화해하지 못했다니 의외네요. 물론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명민했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로쟈 2008-08-28 21:32   좋아요 0 | URL
오히려 '인간적'인 듯한데요...

Arch 2008-08-28 11:06   좋아요 0 | URL
전 스콧 니어링처럼 음식을 끊고 천천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보니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질 못했더라구요. 그녀가 몸부림치며 남고 싶어했던 삶을 사는 제가 몸부림치지 않고 있다는게 부끄러웠습니다. 그녀는 스타일 뿐만 아니라 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기관까지 강렬합니다.

로쟈 2008-08-28 21:33   좋아요 0 | URL
마지막 멘트도 강렬하십니다.^^

2008-08-28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연구로 유명한 문학자이자 철학자 미하일 엡슈테인 교수가 지난달 세계철학대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엡슈테인'은 가까이 있는 책장에도 그의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을 만큼 러시아문학도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문학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는 몇 사람에 속한다. 홈피는 http://www.emory.edu/INTELNET/Index.html%20). 발표까지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교수신문에 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683).

교수신문(08. 08. 25) 테크네의 귀환

<교수신문>은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에서 개최된 제22회 세계철학대회에 참관한 모하일(*미하일) 엡슈테인 교수와 조준래 성균관대 선임연구원(러시아문학)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2008년 8월 7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내에서 이뤄졌다.

조준래: 얼마 전 폐막한 세계철학자대회의 의의와 성과에 대해 평가해달라.

엡슈테인: 첫 번째 의의라면, 통산 22회째 되는 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철학자대회가 100년 이상의 명맥을 무사히 이었다는 데 있겠다(웃음). 둘째로,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철학은 고독한 학문인 동시에, 본원적으로 소통과 대화를 요구하는 학문인데, 이런 철학의 특성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비롯해 본 대회의 잘 조직된 운영방식과 조화를 이뤘단 점을 들 수 있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프로그램과 달리 베르나르 앙리 레비, 주디스 버틀러, 장 뤼크 마리옹 등 소위 거물급 철학자들이 대거 불참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양한 사정이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지 동료 철학자들의 큰 행사를 경시하는 것이 좋은 모습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준래: 이번 대회부터 유가, 도가, 불교 철학이 정식분과로 채택됐다. 한국 철학자의 발표에 대한 평을 해준다면. 또 세계철학에서 동양철학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엡슈테인: 20년 전부터 노장 사상 및 도가와 관련된 서적을 접한 뒤 꾸준히 연구하면서  현대 철학에서 서구 철학이 놓친 사상적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동양 철학이 계속 감당할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까지 서구 철학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실재와 비실재의 관계, 비실재의 생성적 힘에 대해 동양 철학은 직관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카오스이론, 복잡성이론, 시너제틱스 등 현대 과학에 의해 그 주장의 타당성이 꾸준히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세계 철학계에서 동북아철학을 위시한 동양 철학의 목소리는 계속 커질 것이란 생각이다. 

조준래: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주요 화두라면.

엡슈테인: 첫째는 2001년 9월 11일 사태를 계기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가 종언을 고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음 단계인 새로운 문화적 지층이 태동했다는 점이다. 스티븐 호킹과 에드워드 윌슨처럼 오늘날을 ‘포스트(post-)’ 대신 ‘시작’을 뜻하는 ‘프로토(proto-)’의 시기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시뮬라크르의 권력에서 벗어난 미래와 현실은 예측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이고 새롭고 진지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식, 문화, 사회의 영역에서 새로이 대두하고 있는, 미궁과도 같은 ‘프로토’의 현상을 진단하는 데에 철학은 경주해야 한다. 둘째는 새 시대의 도래와 관련된 과학기술문명의 역할이다. 캐서린 헤일즈가 말한 ‘포스트휴먼(Posthuman)’은 사실 ‘프로토휴먼’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몸을 변형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의 제거가 아니라 인간성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철학 역시 과학에 대한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통해 이런 미래 문화의 발전을 논해야 된다.

조준래: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도덕성 역시 제고한다고 볼 수 있을까.

엡슈테인: 얼핏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과학과 기술, 통신수단의 발전은 인간의 도덕을 오히려 향상시킨다고 믿는다. 그것을 ‘테크노모랄’(techno-mor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 간의 거리는 대폭 축소됐다. 이로 인해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와 일방적인 패배는 불가능해졌다. 핵무기만 생각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제 군사적인 위협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어느 일방이 상대방과 동일한 행동준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멸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에서 생겨난 테크놀로지가 타인의 입장을 보다 더 많이 고려하도록 우리를 인도했다는 데에 현대 문명의 역설이 있다.        

조준래: 이번 세계철학자 대회에서 발표한 주제도 앞서 말한 오늘날의 철학적 화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엡슈테인: 윤리학 분과에서 ‘복합윤리학’을 뜻하는 ‘스테레오에틱스(stereoethics)’라는 주제를 발표했다. 인간의 행위를 이루는 선한 가치 역시 상황에 따라 서로 충돌하고 서로 모순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올바른 도덕적 선택을 단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시공간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도덕적 관점의 공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의 시력이 두 눈에 서로 다르게 비친 피사체의 결합을 통해 입체적인 형상을 얻듯이 윤리학 또한 복합적인 행동준칙에 의해 보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즉, 나와 타자의 유사성과 공통적 인간성 뿐 아니라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나와 타자의 차이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현대 윤리학의 과제다. 훌륭한 행위란, 나의 최상의 능력이 타인의 최고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경우의 행위, 나를 포함해 모두가 행하기를 원하고 또 그래야 하지만, 나 외에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행위를 가리킨다. 

조준래: 이런 ‘복합 윤리학’은 당신의 표현대로 ‘프로토-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 현상인 ‘트랜스컬쳐(trans-culture)’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한데.

엡슈테인: ‘트랜스-’(trans)라는 라틴어 접두사는 무엇을 넘어서거나 초월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트랜스컬쳐’란 말은 민족, 젠더, 직업 등에 의해 다양하게 구획된 문화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말한다. 그것은 기존 문화에 대한 낯설게 하기와 외재성의 원칙, ‘자신의’ , ‘본래적인’ 문화에서 벗어나기 등을 전제로 구성된다. 트랜스컬쳐는 한 문화 내의 의미적, 기호적 틈새,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며, 여러 문화의 교차점과 간극 속에서 새로운 상징적 환경을 창조한다. 트랜스컬쳐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고립성을 전제하는 멀티컬쳐(multi-culture)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기를 초극해 자기 밖의 입장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타자와 소통하는 트랜스컬쳐의 관점만이 이념, 종교, 민족 다원화의 시대에 궁극적인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조준래: 오늘날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일상화돼버린 지 오래다.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을 들어본다면.

엡슈테인: 인문학, 특히 순수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일차적 원인은 현실과의 끈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순수 인문학이든 모두 연구대상과 실용성의 두 측면을 갖고 있다. 여기서 실용성이란 학문이 연구대상과 접촉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상부구조와 같은 것인데(예를 들면 자연과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인 자연과 접촉하여 빚어낸 상부구조인 테크놀로지, 사회과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접촉해빚어낸 상부구조인 정책이 그렇다), 다만 순수인문학은 이들과 달리 어떤 상부구조, 어떤 실용적 측면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핸디캡으로 안고 있다. 이제 실질적인 대안으로 첫째, 인문학은 자신의 연구대상인 언어, 문학, 예술 등 문화 전반을 변형시켜야 한다. 이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학문을 저는 또 다시 ‘트랜스인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가령 ‘트랜스언어학’은 인공언어를 생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언어의 수준을 제고하는 학문이 될 것이며, ‘트랜스미학’은 시학과 미학을 통하여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예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학문이 될 것이다. 둘째, 자연과학에서 전용돼 왔으나 본래 인문학의 용어였던 ‘테크네(techne, 예술, 기술)’를 인문학에로 되돌려 기존 인문학의 성과를 반성, 재가공하는 단계로 옮겨 가야한다. 인문학은 그 개념 자체에 내포돼 있듯이 과학과 예술의 종합적 형태로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활로는 문화를 변형시키는 예술, 즉 ‘테크노-휴머니티’(techno-humanities)로서 인문학이 거듭날 때에 발견될 것이다.

미하일 나우모비치 엡슈테인(Mikhail Naumovich EpshteIn)

전공분야 러시아 출신의 철학자, 문예학자.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최초로 연구. 미국과 서유럽의 슬라브학을 비롯, 러시아학계 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최초 도입.

주요 저서  『잠재성의 철학』(2001), 『父性의 의미』(2003), 『여백의 기호: 인문학의 미래에 관하여』(2004), 『러시아 문학의 포스트모던』(2005), 『새로운 종파: 1970년~1980년대 러시아의 종교적, 철학적 지적 경향』(1993, 2005) 등.

주요 논문 「새로움의 역설: 19~20세기의 문학 발전에 대하여」(1988),「자연, 세계, 우주의 은신처: 러시아 운문에 나타난 풍경 이미지 체계」(1990),「전체주의 사유에서 상대주의적 모델: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언어 연구」(1991), 「문화의 경계선: 러시아와 미국과 소련」(1995)외 다수.

08. 08. 27.

P.S. 엡슈테인의 책으로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되는 건 <새로운 황야에서의 외침>(2002)이 유일하다. 하지만 보다 유명한 책은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1999) 같은 연구서이며, 그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은 <미래 이후(After the future)>(1995)이다(*<미래 이후의 미래>(한울, 2009)로 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과 현대 러시아문화'가 책의 부제. 구글에서 찾은 아래 이미지는 뜻밖에도 국내 중고서점에 나와 있는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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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의 불참은 이미 대회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장-뤽 마리옹의 육성을 듣고 그의 모습을 보러 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엡슈타인이 말하는 저ㅡ슬쩍 냉소가 섞인ㅡ대회 의의에 대한 평가가 더욱 가슴에 다가옵니다. 대회에 참석한 동료 철학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저 같은 '일반 청중'에게도 실로 큰 결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개인적으로는 뷔넨베르제와 회슬레의 참가 정도가 그래도 철학자 대회의 '명맥'을 살려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저로서는 '세계 철학'이 봉착한 어떤 '피곤함'과 '노회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음도 지나가는 길에 첨언하고 싶고요(그 피곤함과 노회함이 '포스트'를 '프로토'로 치환하는 개념적 작업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지도 살짝 의문입니다^^).

로쟈 2008-08-28 08:26   좋아요 0 | URL
네, 약간 김이 빠진 편이죠. 그만큼 언론의 관심도 줄어든 듯하고...

푸른괭이 2008-08-2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덕, After the Future의 저자를 볼 기회를 놓치다니...! 지난 여름 최대의 실수..-_-;; 그 동안 로쟈님은 뭐하셨어요...? ㅠ.ㅠ

로쟈 2008-08-28 08:26   좋아요 0 | URL
알다시피 바빴습니다.^^;

2008-08-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8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세곰 2008-08-29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악구를 떠나자마자 이런 빅이벤트가 벌어지고 거물이 오고갔을 줄이야...

로쟈 2008-08-30 21:25   좋아요 0 | URL
러시아 학자들이 200여명이나 들렀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