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가장 주목한 신간은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치유의 역사학으로>(푸른역사, 2008)이지만 아직 별다른 리뷰가 뜨지 않고 있다. 해서 대신에 리좀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그린비,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이지만 뜻밖에도 북리뷰의 메인도서로 다루어졌다. 독특하게도 프로이트를 통하여 들뢰즈의 시간론을 검토하고 있는 책이라 한다. 리뷰를 보고서 알았지만, 저자 키스 포크너는<싹트는 생명>(산해, 2005)의 저자 키스 안셀 피어슨의 제자이고 책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학술서'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이다.  

문화일보(08. 09. 12)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일 뿐”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고 가정된 순간과 구분되는 어떤 순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간들을 수축하는 현재 그 자체의 차원들을 지칭할 뿐이다.”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는 ‘차이’의 철학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들뢰즈(1925~1995)일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등 인문학 공부모임들에서는 들뢰즈를 ‘독해’하고자 하는 강좌가 연일 이어진다. 들뢰즈는 새로운 철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넘어야 할 ‘벽’과도 같이 막막하고 어렵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이나 그 전에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주로 접해졌다. 이 책들을 주석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끝까지 읽은 독자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철학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을 완독한 독자는 더 적을 것이다. 그 중에도 2장 ‘대자적 반복’은 이 책의 저자도 실토하듯이 “전문가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비의적(秘義的) 지식”으로 가득하다. 이런 불친절한 저자가 다시 없다는 ‘울분’(?)마저 치민다.



이 책은 바로 들뢰즈의 ‘시간론’인 ‘차이와 반복’의 2장을 풀어내고 있다. 영국인인 저자 포크너는 들뢰즈로 생명을 탁월하게 설명한 ‘싹트는 생명’의 저자 키스 안셀-피어슨의 제자로 들뢰즈의 시간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일직선 상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런 시간관은 깨진 지 오래다. 들뢰즈에게 시간은, 짧게 요약하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하며 미래도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기대이므로 미래 역시 현재에 속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을 지칭할 뿐이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들뢰즈의 시간론은 시간을 통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시간적 주체론’이며, 따라서 ‘차이와 반복’은 현대 철학자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존재론’이다. 그의 ‘시간론=주체론’은 ‘반복’과 ‘시간의 수동적 종합’이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칸트가 정초한 세 가지 종합, ‘포착-재생-재인’을 변환시킨 것이다. 이같은 세 가지 종합은 직관, 구상력, 오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포착된 외부 대상은 주체에 의해 구성되고 지성적으로 통합되는 ‘능동적 종합’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능동적 종합’에 ‘수동적 수축’을 추가한다. '수동적 종합’을 알자면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세 가지 층위- 물질적 층위, 수동적 종합의 층위, 반성적 표상의 층위-를 이해해야 한다. 반복의 물질적 층위는 즉자(卽自)의 층위로 물질자체의 반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시간은 계기들의 ‘종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자적 반복이 정신에 의해 대자(對自)적으로 종합될 때 곧 반복을 묶거나 수축할 수 있다. 시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이같은 종합은 칸트처럼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 종합’이다. 즉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주체 아래에 있는 수동적 자아(애벌레 자아)들이 의식 이전의 ‘관조’를 통해 순간들을 수축하여 ‘살아있는 현재’가 종합된다. 이 시간의 정초인 현재가 흐르고 이행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과거가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재가 시간의 정초(시원)라며 과거는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습관’의 형식을 통해 종합되었다면, 과거는 ‘기억’의 형식을 통해 종합된다. 이러한 두 시간의 종합과 달리 시간의 세번째 종합인 미래는 주체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같이 시간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주체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시간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주체가 아니라 시간적 주체인 것이다. “나는 시간이 우리의 감정적인 생활에 추동력을 준다는 것, 항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아’가 잔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거울로서 또는 희미하게 빛나는 반사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수동적 종합의 정신분석학적 맥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프로이트를 전면에 끌어내고 있다. 국내 독자들은 이 점에서 다소 의아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석서 등을 통해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를 잡아먹을 듯이 비판해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논할 때 초점이 되는 흄, 베르그손, 니체 이외에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연관성을 보지 않고서는 즉 무의식적 층위를 중심으로 다른 층위들이 함께 엮이면서 작동하는 복잡한 주체의 형성과 그로 인한 시간의 발생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들뢰즈와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비교, 독해하면서 어떤 면에 프로이트와 들뢰즈 간에 영향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들뢰즈의 시간론을 독창적으로 펼치고 있다.(엄주엽기자)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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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김우창 칼럼'을 옮겨놓는다.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것인데, 지난달 말 방한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인문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강연을 다루고 있다. 고려대에서 있었던 첫번째 강연주제인 '정화된 민주주의'(번역원고에 따라 언론에서는 '순화된 민주주의'라고 표기했었다)에 대한 논평을 겸하여 '나라 사랑'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나로선 '세계시민주의와 애국주의'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 작성하기도 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참고로, 누스바움 교수의 세 차례 강연원고는 원문과 함께 인터넷에서 입수할 수 있다(나는 세번째 강연을 직접 듣기도 했다). 간단한 관련 동영상은 http://app.yonhapnews.co.kr/YNA/Basic/OnAir/YIBW_showMPICNewsPopup.aspx?contents_id=MYH20080825004600355&bandwidth=700 참조.

  

경향신문(08. 09. 11) 나라 사랑과 인간 사랑

지난 8월27일부터 사흘간 학술진흥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시카고 대학의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회가 있었다. 그는 지금 미국 철학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거기에는 철학적 깊이 이외에도 미국 철학을 상아탑으로부터 공공의 공간으로 끌어 낸 철학자라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다. 브라운 대학의 고전철학 교수로 있던 그가 시카고 대학 법학대학원의 교수로 옮겨 간 것도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인문과학이 사회 현실 이해와 실천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학 교육에는 법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인문과학이 제공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건의 구체적 정황의 정확한 파악은 분석력과 함께 감성적 사고의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스바움 교수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다.

이번 방한 중 고려대학교에서 있었던 첫 번째 강연은, ‘정화된 애국주의가 가능한가?’라는 제목이었다. 나라 사랑에는 대체로 남의 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에 대한 규범은 포함되지 않는다. 어떻게 나라 사랑을 더욱 보편적인 인간 사랑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이다 - 누스바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 애국심·인간애 근원은 애향심 -

이때의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적 이권의 맹목적 추구를 옹호하는 체제를 말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민주주의의 이상은 모든 사람의 자율, 동등 그리고 위엄을 신장하고 보장하는 체제이다. 국가는 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지나친 탐욕과 이기주의의 추구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동기의 다국적 기업과 세계시장의 횡포를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인종, 성, 계급에 기초한 차별 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폐지도 국가의 의무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나라에 대한 원조, 인도적 배려, 그리고 평화와 전쟁 방지는 자연스러운 국가 목표의 일부가 된다. 누스바움 교수의 생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애국심은 이 모든 도덕적 규범을 포용하는 것이어서 마땅하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와 이상들이 반드시 나라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각될 필요가 있는가? 누스바움 교수에게 정서적인 것이 짜여 들어가지 않는 이성적 판단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결하게 된다. 애국심은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에는 공동의 상징물과 기억과 시와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크게 작용한다. 이러한 것들이 전통과 문화가 되고 의례(儀禮)로 정립된다. 여기에서 길러지는 애국심에 보편적 인간 가치를 통합한 것이 정화된 애국주의이다.

누스바움 교수의 강연이 말한 애국심과 보편적 가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통합의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제시된 통합 방법이 모순을 충분히 참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대 강연 후 청중으로부터 나온 질문의 하나는 “애국심에 정서적, 상징적 자산이 중요하다면 분단된 나라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질문은 이민자나 이주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있을 수 있다. 누스바움 교수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답변을 생각해 본다면, 소수자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거부하는 정치체제가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답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가 소극적인 의미에서 소수자 문화의 위엄을 보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문화(異文化) 속에 사는 사람의 문제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 평화적 관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라크 전쟁은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전쟁의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또는 어떤 정치 이론가들이 말하듯이, 애국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전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쟁의 상태가 사람들이 가장 애국적이 되는 조건이라는 관찰도 있고, 집단 심리를 동원하기 위하여 가상의 적대국이나 집단을 조작 이용하려는 정치 정략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순은 모순대로 인정하면서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옳을는지 모른다. 2차대전과 독일 점령을 경험한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어떤 사람이 전선(戰線)의 저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가, 국가를 위해서 거짓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은가 -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나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것은 복잡한 현실 여건과의 관계 속에서만 저울질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에 대한 누스바움 교수의 말에는 여전히 경청해야 할 사항이 있다. 메를로퐁티와 조금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그가 구체적 상황과 감정을 중요시한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화된 애국주의론에서는 이 입장을 조금 느슨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좁은 구체성이 관점과 생각을 좁히게 될 것을 우려한다. 그리하여 가족이나 지역 등의 좁은 단위가 마음을 좁히는 데 대하여 나라는 그것을 한껏 넓히면서 실효성을 갖는 테두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는 것이 공간적 확대에 일치해야만 하는 것일까?

- ‘고향파괴’ 새도시 건설 멈춰야 -

영어의 애국심(patriotism)의 어원에 들어 있는 파트리아(patria)는 나라보다는 고향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애국심은 애향심의 확대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내 가족이 나에게 중요하다면 다른 가족도 중요하고, 내 나라가 나에게 중요하다면, 남에게는 그의 나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여기에 관계된다. 자기의 일로 다른 사람의 일을 미루어 생각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구체성의 심화는 마음의 확대 그리고 공간의 확대를 가져 온다.

국가가 실효성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은 그 강제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반성의 능력과 문화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에 토양이 되는 것은 고장과 고장 사람들의 교감이다. 누스바움 교수는 애국심을 말하면서,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그 연설에서 미국의 국토를 - ‘뉴햄프셔의 광막한 구릉들’ ‘캘리포니아의 굽어진 해안’과 같이 -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칭찬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구체적인 사물이고 사건이다. 그러나 이 킹 목사의 언급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수사에 의존한다. 참으로 구체적인 것은 나와 이웃과 선조가 살았던 고장과 그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간 해온 일은 새로운 도시 건설의 이름으로 몸을 두고 살 수 있는 고장과 이웃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새 건설은 마음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지속적인 공동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파트리아의 보존을 생각할 때가 되었지 않나 한다. 마음과 몸과 땅과 사람이 교감하며 정주하는 데에서 나라 사랑도 나오고 인간 사랑도 나온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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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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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1 2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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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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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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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2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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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자음과 모음>(2008년 가을 창간호)에 실린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수잔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에 대한 리뷰를 의도한 글이며 '가상대담'의 형식을 빌렸다(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언급도 일부 포함돼 있다). 아래는 글의 결론부이다.

 

  

 

 

로쟈: 한편으로 지젝 선생님은 정치적 ‘전체주의’에 대한 진부한 비판들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조금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지젝: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좌파들은 정치적 테러의 뿌리가 도구적 이성, 즉 과학기술적 착취의 ‘원리’가 사회로까지 확장돼서 사람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재료로 다룬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정치적 테러는 바로 물질적 생산 영역의 자율성이 부정되고 정치적 논리에 종속됐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데, 발리바르에서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거쳐 라클라우와 무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프랑스제 이론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제영역을 ‘존재론적’ 위엄이 제거된 ‘존재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합니다. 둘 다 볼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축소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의 ‘긴급성’을 의식했다는 점입니다.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과제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레닌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 경제가 핵심이야. 전투는 거기서 결정될 거고,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 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로쟈: 그러니까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식으로 일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덤 앤 더머’식이 되겠군요. 때문에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겠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 곧 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가 제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말씀이시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틀로 보자면 주권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와 비슷할 거 같네요. 가라타니는 국민국가(민족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새롭게 국민국가를 만들어낸 최초의 예로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따른 것인데요, 사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의 국민(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러시아란 국민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가 다루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요. 벅모스 선생님도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주목을 하셨죠?

벅모스: 네, 프랑스의 역사가 푸레의 말을 빌면, 프랑스인들은 대중을 국가로 통합해서 근대 민주주의국가를 만든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주권체로서의 ‘인민’에 의한 테러의 원형과 그리고 ‘민주주의’ 민족국가에 의한 군사적 침략의 원형, 이 두 가지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대중민주주의의 두 가지 모델인 민족국가(nation-state)와 혁명계급(revolutionary class)의 기원이라는 점이죠.

로쟈: 흥미로운 대목인데, 그 두 가지 모델을 선생님은 ‘정치적 상상계’ 개념을 갖고 비교하셨습니다.        



벅모스: ‘정치적 상상계’는 발레리 포도로가의 개념입니다. 지형학적 개념으로 정치적 행위자들이 위치해 있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장(場)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아이콘이 이 장에는 들어오게 되는데, 공동의 적, 정치집단, 그리고 주권기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주권의 두 모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 정치적 상상계가 다르게 그려져요. 사회주의는 ‘상호 적대적인, 투쟁하는 계급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하며, 자본주의는 ‘상호 배제적이면서,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민족국가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합니다.

근대의 이 두 가지 정치적 비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어떤 차원이 시각적 경관을 결정짓느냐입니다. 시각적 경관이란 적의 본질과 위치,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는 영토를 결정하는 것을 말해요. 민족국가들에서 그 차원은 공간이고, 계급투쟁(계급전쟁)에서 그 차원은 시간입니다. 공간은 민족국가들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는데, 국가가 된다는 것은 영토를 소유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반면에 계급투쟁에서 영토는 일시적입니다. 계급 혁명은 시대를 앞질러 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승리는 영토의 획득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라는 용어로 기술되는 것이에요.

로쟈: 방금 말씀하신 두 가지 정치적 상상계의 구분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공간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전술인 데 반해서, 민족국가에서 시간은 전술에 불과하며 공간이 모든 것이다.”라고 책에 쓰셨는데, 이러한 차이는 소위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구분해서 사고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틀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민족국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구요. 정반대되는 사례일 텐데, 1918년에 레닌은 우크라이나 전체를 독일에 양도하는 브레스트-리토브스크 강화조약에 기꺼이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시대를 얻기 위해서 공간을 양여하고 싶다.”

벅모스: 네,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 양쪽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민족과 계급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습니다. 민족국가 모델에서는 계급적 차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이 계급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부자나 노숙자나 모두 ‘미국’이고 ‘한국인’이고 하는 식이 되죠. 반면에 소련에서는 계급귀속이 민족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민족은 역사적으로 한시적인 정치적 형태로 이해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소수민족에 자율적 주권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민족국가의 경우엔 영토의 경계에 대한 위협을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계급투쟁의 경우에는 민족분리주의의 위협이 역사를 퇴보시킨다고 보았던 것이죠.

로쟈: 그러고 보면, 혁명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덧 저희 대담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젝: 흔히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우리의 과제는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하여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죠.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레닌’은 무엇보다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사고금지’의 상황을 중단시킬 강력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레닌’이란 기표는 우리가 다시금 사유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벅모스: 제 결론 또한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선구자를 자처했던 공산당은 서구의 산업발달에 지속적으로 뒤처진 경제시스템 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리고 민족국가 시스템은 민족국가의 통제를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전지국적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만약 냉전시대가 끝났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이 이겨서라기보다는 각각의 정치 담론의 정당성이 각자의 물질적 발전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국경으로 구획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인 시간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꿈은, 레닌의 말을 빌자면, “현실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급진적(as radical as reality itself)”이어야 할 것입니다...

0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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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차적 관점이 요구하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3 23:50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드팀전 2008-09-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를 썼던 수잔 벅모스지요? 그녀의 '정치적 상상계" 개념은 민족/계급 문제를 유형화하는 또 다른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주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9-11 22:57   좋아요 0 | URL
네, 그 벅모스입니다. 유익한 책인데, 번역은 유감스럽게도 부실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 계급문제,민족문제를 논하는 것을 보니 공간에 집착하는 한 민족주의에 계급문제는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요점입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351.html). 지면의 부분 개편에 따라 '로쟈의 인문학 서재'란 칼럼으로 나가는 글로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타이틀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창비, 2008)을 다룬 글이다. 본래 더 주목하고자 했던 대목은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해 진단/비판하고 있는 3장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아는가'였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더 풀어놓을 지면이 없었다. 새삼 확인한 것인데, 월러스틴은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창비, 2003) 이후 지속적으로 (유럽식)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현재의 이행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왔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그걸 새롭게, '유럽적 보편주의'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압축해놓고 있는 책이어서 '월러스틴 입문서'로도 유용할 듯싶다.

  

한겨레21(08. 09. 22)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

“우리는 현존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부터 또다른 세계체제 혹은 체제들로의 이행기에 살고 있다.”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가능한 대안의 역사적 탐구’란 의미의 신조어 ‘유토피스틱스’를 제안하면서 진단했던 내용이다. <유토피스틱스>(창비, 1999)에서 그는 ‘역사적 사회주의’ 몰락의 교훈을 되새기며 우리가 앞으로 50년 동안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위해서 근본적인 역사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전망한 바 있다.

월러스틴의 신작 <유럽적 보편주의>(창비 펴냄)는 그 문제의식을 그대로 연장하고 있다. 이번에 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현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의 ‘유럽적 보편주의’이다. 월러스틴의 기본입장은 변함이 없다. 지금은 이행의 시기라는 것. 16세기에 형성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하나의 긴 시기가 현재 종말을 고하고 우리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고 있다. 어떤 시기가 될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으며 장담할 수도 없다. “앞으로 다가올 20년에서 50년 동안의 싸움”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싸움의 결과에 따라서 기존의 세계제체보다 더 사악한 불평등의 세계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아프리카 세네갈의 시인이자 정치가 생고르의 표현을 빌면 ‘서로 주고받는 만남의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월러스틴은 이것이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통해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란 강자들의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편주의다. 그것은 인권과 민주주의, 서구문명의 우월성, 시장에 대한 복종의 불가피성처럼 얼핏 자명해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자명하지 않은 관념들로 구성된다. 근대세계체제의 역사는 유럽의 국가와 민족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팽창해나간 역사였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건설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팽창은 군사적 정복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엄청난 불법행위를 수반한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익을 챙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여 보편주의로 포장했다. 어떤 논리들인가?

먼저,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는 논리이다. 개입은 언제나 강자의 권리인바, 유럽인들은 타자의 야만성과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는 관습의 근절, 무고한 양민의 보호, 그리고 보편적 가치의 전파 따위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개입의 권리를 정당화했다. 16세기에는 자연법과 기독교, 19세기에는 문명화의 사명, 그리고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그 구실이고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개입과 제재 조치가 강자들에 정복당한 사람들만큼이나 강자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사담 후세인이 재판정에 서야 한다면, 키신저와 부시도 기소돼야만 한다. 자신들을 열외로 놓는다는 점에서 유럽적 보편주의는 진정한 보편주의에 미달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독창적인 인식론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배세력의 원리를 구현하는 보편주의와 피지배세력의 속성으로 지칭되는 특수주의 사이의 이분법을 근거로 한다. 오리엔탈리즘이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유럽적 보편주의의 중핵을 구성하고 있는 과학적 보편주의는 상대적으로 비판에서 면제되어왔다. 하지만 월러스틴이 보기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현재의 대학제도, 그리고 지식의 구조는 서로 분리되지 않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중세의 유럽대학과는 다른 근대적 대학이 성립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며 세계전역에서 대학제도가 융성하게 되는 것은 1945년 이후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의 팽창에 따른 결과였다. 그리고 근대세계체제 운영에서 고급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자연과학은 인문학을 제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세계경제의 장기침체와 함께 대학제도의 사회경제적 토대는 약화되었고 과학적 보편주의의 권위 또한 도전받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확인되는 것은 과학적 보편주의의 이데올로기성이다. 월러스틴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버리고 대안으로서의 보편적 보편주의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이행의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08. 09. 09.

 

 

 

 

P.S.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 구성소로서의 지식구조와 그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한 비판이 개인적으로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인데, 국내에 이미 적잖은 책들이 소개돼 있다.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사회과학의 개방>,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지식의 불확실성>, <유럽적 보편주의>가 모두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문제의식과 주장들이 중첩돼 나타난다. 필요에 따라 한권의 책을 숙독하고 나머지 책들을 훑어보는 게 효과적인 독서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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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0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10 0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서점에서 며칠 전 강철구<역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봤는데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이더군요.저자는 제임스 브로트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썼네요.또 저자는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역사를 읽고 이런 유럽중심사관이 퍼지는 데 우려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어요.서점이라 자세히는 못 읽었는데 이런 책을 우리도 냈다는 데 기분은 좋았습니다.

로쟈 2008-09-13 08:55   좋아요 0 | URL
네, 월러스틴도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계속해 왔는데, 이번엔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새롭게 명명했더군요. 강철구 교수의 논문은 저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침에 읽은 문학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얼마전 창간호를 낸 계간 <자음과 모음>(이룸)에 관한 것이다. 비평특집으로 '내러티브의 미래'를 주제로 한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기사는 그에 관해서 간단히 스케치하고 있다.

경향신문(08. 09. 08) 2000년대 소설 주인공은 ‘상상력’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자는 모험의 항해를 떠났다 되돌아오는 오디세우스보다 옷감을 짰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페넬로페 쪽에 가까워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손정수씨가 최근의 한국 소설에 대해 내린 진단이다. 가을호로 창간된 계간문예지 ‘자음과 모음’(이룸)의 특집기획 ‘내러티브의 미래’ 중 ‘변형되고 생성되는 최근 한국소설의 문법들’이라는 글에서 손씨는 한국현대문학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로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요즘 작가들은 자신의 삶, 사회적 현실 등 존재하는 사실을 소설 속에 재현하지 않는다. ‘상징적 상상’ 혹은 ‘상상적 상징’ 등 전혀 다른 차원의 소설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근현대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렸다면, 최근의 소설들은 가볍지만 삶의 진실을 다른 방식으로 내포하고 있다. 자아의 경계는 옅어지고, 인간이 아니라 동물과 사물, 유령과 좀비, 사이보그와 합성인간 등이 소설의 주체로 등장한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 또한 변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아버지를 해석하는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2030세대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없다. 때로는 성가시고 무력한 존재로 표현되다 못해 사물화되는데 여기에 동화적인 환상이 개입된다. 박민규씨는 아버지를 기린(‘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으로, 황정은씨는 모자(‘모자’)로 변신시키고, 김애란씨는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서 뛰쳐나가 방황하는 대신 아버지를 상상 속에서 달리게 만든다(‘달려라 아비’). 카프카의 ‘변신’에서 화자가 벌레로 변했던 것과 대비된다.

평론가 심진경씨는 특집기획의 ‘자기보다 낯선’이라는 글에서 소설가 권여선씨 작품을 분석하며 2000년대 한국문학의 특징을 ‘탈내면의 상상력’으로 규정한다. 속물화된 개인들이 현실세계와의 정면충돌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방어적이고 현실도피적인 행위를 보이며 또한 현실과는 무관한 자기 유희에 몰두하는 주인공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설명이다.

달라지는 것은 소설의 화자뿐 아니다. 독자들도 변하고 있다. 평론가 정여울씨는 특집기획 중 ‘원 소스 멀티 유스 시대의 소설 읽기’에서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를 분석했다. 정씨는 독자 리뷰가 ‘유희’ 차원에서 이뤄진다고 진단했다. 평론가들의 완곡어법 대신 직설화법으로 핵심을 찌르는 북로거들의 리뷰는 때로 소설을 매개로 한 별개의 에세이가 되기도 한다. 정씨는 “ ‘마이리뷰’를 논픽션 문학에 포함시키고 싶을 정도이다. 독자 리뷰를 통해 만날 수 없던 타인의 삶을 들어가는 열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소설과 영화, 드라마를 동일한 문화상품으로 취급하는 독자들을 지켜보며 더 이상 “문학이 단지 문학에만 갇혀 있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며 “문학이여, 다채로운 얼굴로 대중 앞에 서라”고 주문한다.(윤민용기자)

자금과 모음? 장편소설 부흥 위해 창간된 계간지

문예계간지 ‘자음과 모음’은 기존 문예지와 달리 장편소설에 비중을 둔다. 단편 중심인 한국 문단에서 장편소설의 부흥을 위해 소설 형식을 경장편과 픽스업(pix-up) 등으로 구분한다. 경장편은 단편보다 길고 일반 장편보다 짧은 300~700장 사이의 분량이다. 픽스업은 SF 등 해외 장르 소설에서 유래한 형식으로 개개의 단편소설이 묶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소설 형식이다.

첫호에는 경장편으로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을, 픽스업으로는 SF소설가 겸 영화평론가인 듀나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를 실었다. 또 단편 위주의 기존 문예지와 달리 장편 연재에 비중을 두어 소설가 하성란·김태용씨의 연재소설을 선보인다. 잡지의 3분의 1이 장편연재 혹은 경장편으로 채워진다.

08. 09. 08.

P.S. 기사에 "평론가 정여울씨는 특집기획 중 ‘원 소스 멀티 유스 시대의 소설 읽기’에서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를 분석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인터넷 서점'이 지칭하는 건 알라딘이다. 평론가가 직접 쓴 문장은 이렇다: "비평가에게도 네비게이션이 있었으면 할 정도로 읽을거리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시대, 비평의 방향타를 잃을 때마다 나는 인터넷서점 알라딘(www.aladin.co.kr)의 독자 리뷰를 탐독하곤 한다." 이하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리뷰들은 모두 알라딘의 리뷰이다. 덕분에 개인적으론 리뷰의 '성격'이 다양하고 '수준'도 높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됐다. 알게 모르게 자신의 리뷰가 인용된 알라디너분들도 글을 읽다보면 슬며시 미소를 지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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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8-09-08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로쟈님 리뷰 인용된거 아니에요?^^
근데 인용하려면 본인의 허락 받아야 하는거죠? 상업적 이용이니까요

로쟈 2008-09-08 23:58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를 쓴 게 없어서요.^^; 상업적 이용은 아니라 허용됩니다. 논문에서 인용하는 것처럼요...

마늘빵 2008-09-0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분의 글이 궁금해지는데요. ^^ 젤 아래 정여울 평론집을 들추면 볼 수 있으려나요?

로쟈 2008-09-09 09:42   좋아요 0 | URL
이미지가 첫 평론집입니다. 다른 책들도 이미 냈었지만...

Arch 2008-09-0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로쟈님 소개글 듣고선 자음과 모음 창간호를 주문했어요. 김연수님과 듀나님의 글을 보고싶었거든요. 저 평론집도 읽어보고 싶은데요. 제 보기엔 바람구두님이랑 드팀전님, 파란여우님이 언급 됐을 것 같은데^^

로쟈 2008-09-09 09:41   좋아요 0 | URL
한국 소설 리뷰들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8-09-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9-12 11:13   좋아요 0 | URL
스무 고개 같네요.^^ 직접 확인해보시길.^^

메르헨 2008-09-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디너의 리뷰는 참으로 탁월하죠...^^대단한 분들이라고 속으로 생각코 있었는데 비평가들에게도 먹히는(?)군요. 유후~~~어깨가 으쓱으쓱 올라갑니다.^^

로쟈 2008-09-10 07:14   좋아요 0 | URL
남들이 알아주는 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