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시평이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가 왜 이리 가깝게 느껴지는 요즘인지...

경향신문(08. 08. 29) 망령

도스토예프스키가 숨 쉬었던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의 공기는 이랬다. 1849년 4월23일 새벽 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다. 당시 서유럽의 신 사조에 고취된 젊은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전제정치를 비판한 걸 누군가 밀고한 것이다. 모임에서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것이 28세 신진 작가에게 씌워진 죄목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총살 직전 감형돼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끌려가던 날의 상황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잠결에 샤벨(군경이 차던 칼)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옷을 입는 동안 그들은 방안을 온통 들쑤시며 원고와 책을 끈으로 묶었다. 난로 속으로 들어가 담뱃대로 꺼진 재를 휘젓기도 했다. 탁자 위의 낡은 동전을 경찰관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전(私錢·위조지폐)이라고 생각합니까” “조사해 봐야지” 그는 동전을 중대한 증거인 양 집어 넣었다.’

주동자 페트라셰프스키는 심문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심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고한 한 사람을 벌하기보다 열 사람의 죄인을 방면하는 게 낫다는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말대로다. 다른 하나는 ‘열 마디 말만 내놓으라. 그걸로도 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담뱃재를 놓고 서류를 불태운 증거라며 논죄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옥중 진술서는 펜으로 피를 찍어 쓴 듯 절절하다. ‘어쩌다 엿들은 말을 종이쪽지에 적은 밀고를 바탕으로 가두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 전후 관계를 생각지 않고, 어떤 의도인지 개의치 않고, 조각조각의 말을 임의대로 엮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검열에 대해서도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두운 색채로 정경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작품 발표를 금지당한 경험이 있다. 검열관들은 무해(無害)한 문장에서도 악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위험 사상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선 작품을 매장해 버린다. 밝은 빛깔만으로 된 그림이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셨던 차르 제정의 공기는 100여년 후 솔제니친이 마신 구소련의 공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공기는 21세기에도 망령처럼 지구를 떠돌며 어느 하늘을 암울하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망령에게 시공(時空)은 따로 없다.(김태관 논설위원)

08. 08. 29.

P.S. 필자가 암시하고자 한 내용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망령에게 시공은 따로 없다"고만 적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징후적 현실이다(올해가 국가보안법 제정 60돌이라 한다. 관련기사는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참조).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분위기를 (웃음까지 섞어가며)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어느 하늘'을 쥐어흔들고 있는 정권의 최대 치적이다. 러시아문학도가 보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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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8-29 18:42   좋아요 0 | URL
로쟈님, 24일 수요일 뵈어요. :)

2008-08-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30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쓴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을 공통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두 사람 다 보수파로 전향했으니까요.차명진 씨는 예전 민중당 출신인데 한때의 동료였던 오세철 씨에 대하여 "국보법을 위반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더군요.

로쟈 2008-08-30 17:47   좋아요 0 | URL
'보수'란 말 때문에 도매급이 되네요. 차씨의 인간이해는 절망스럽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30 20:53   좋아요 0 | URL
로자 님이 소개한 기사를 보니 국가보안법의 초창기 희생자인 백범이 생각납니다.옛 동지인 이범석의 막말...정치의 비정함을 분명히 느꼈을 겁니다.심지어 해방정국의 '반공주먹'김두한도 반공법에 걸려서 졸지에 빨갱이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