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오늘 아침 전철에서 읽은 책의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도정일 교수의 '드문' 신간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생각의나무, 2008)이 그 책이다.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잡지에 발표했던 글 6편을 묶은 것인데, 그나마 책으로 묶인 건 출판사측의 노고 덕분이다. "나는 내가 썼던 글들을 내 손으로 모으고 묶어서 출판을 시도한 적이 없다. 이 책도 내가 내자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게 저자의 변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비유대로 이만한 '냉동고래'도 드물다. 여하튼 그래서 귀하고 드문 책이 나온 셈이니 아껴 읽을 만하다... 

한겨레(08. 09. 20) 시장의 독재에서자유를 선언하라

문학평론가 도정일(67) 경희대 명예교수가 새 저서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내놓았다. 지은이는 여러 매체에 왕성한 필력으로 글을 써왔지만, 그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는 데는 극도로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대담집이나 공저서는 여러 권 있었지만, 단독 저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번에 나온 책은 문학비평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1994년) 이후 무려 14년 만에 펴낸 두 번째 단독 저작이다. 생각의나무 출판사가 기획한 ‘문(問)라이브러리’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이 저서에는 1990년대 후반에 쓴 에세이 다섯 편이 묶였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다시 읽어보니, 이건 꼭 내가 21세기에 부친 영혼의 안부편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썼는데, 그 고백 그대로 이 책은 10년 세월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생기를 발한다. 아니, 세월이 지나 오히려 더 생생한 문제의식으로 빛나는 글이 됐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어휘를 하나만 고르라면, 이 책의 제목으로 채택된 ‘시장전체주의’라는 말일 것이다. 지은이는 문화·교육·대학·문학, 그리고 다른 어떤 것보다 인문의 풍경을 통해 우리 시대를 관찰하고 거기서 시장전체주의의 암울한 징후를 적발해 분석한다. 인문학자의 시선이 미리 포착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살풍경이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말하는 시장전체주의란 “시장 논리의 지배가 확립된 사회”다. 시장이 유일 가치가 된 시장 유일체제가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시장에서 팔리는 것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효용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그 사회다. 시장은, 바꿔 말하면, 돈이다. 돈이 모든 것의 주인, 모든 것의 척도, 한마디로 줄여 절대이념이 된 사회가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그 사회가 ‘전체주의’인 이유를 지은이는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이 사회가 시장 논리, 시장 원리, 시장 가치를 향해 사회 전체를 훈육하고 재조직하며 채찍질하는 ‘동원 체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전체주의의 사회 동원 방법이 강제적·강압적인 것이라면, 시장전체주의의 사회 동원은 자율성과 자발성의 외피를 입고 있다.” 사회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 같은 겉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체제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임을 설득하고 납득시킴으로써 모든 구성원을 체제에 복속시킨다.

둘째로, 시장전체주의는 주민들을 겁주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감시 체제’다. 시장에 적응하고 순응한 자만이 이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 체제는 그런 이데올로기의 반복을 통해 구성원의 의식을 장악한다. 그리하여 “시장 원리를 수락하는 것은 시민의 ‘의무’가 되고 거기 적응하는 것은 시민의 ‘미덕’이, 그리고 그 적응력은 시민의 ‘능력’이 된다.” 여기서 ‘자기 감시’가 발동하게 된다. ‘시장의 신’이 내리는 명령을 ‘자기 자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명령에 따른 의무·미덕·능력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를 자기 스스로 점검하고 감시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시자·통제자·검열자가 된다.” 시장전체주의는 이렇게 작동하는 ‘자발적 감시 체제’다.

지은이가 시장전체주의의 세 번째 특징으로 꼽는 것이 ‘사회적 이성의 마비’다. 시장의 효율·효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모든 이성적·비판적 담론들을 ‘헛소리’로 밀어내 버리고, 도구적·기능적 이성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사회가 시장전체주의 사회다. “과거 정치전체주의가 사회적 이성의 학살을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삼았던 것과 유사하게 시장전체주의에서도 공적 이성은 학살 대상이 되고 그 사용 능력은 마비된다.” 지은이는 우리 시대가 그 ‘광기’의 사회를 향해 반성 없이 맹목적으로 내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인문정신과 인문가치이고, 그 정신과 가치의 담지자인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그 본질적 속성상 인간의 인간다움 실현을 주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인문학은 시장의 효율·경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시장의 신은 인문학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다. 시장의 제국에는 인문학을 위한 자리가 없다. 여기서 지은이는 인문학이 시장과 돈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님을 환기시킨다. “인문학은 돈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돈밖에 모르는 사회를 경멸한다. 인문학은 시장을 과소평가하거나 시장 논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다. 인문학이 문제 삼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전체주의’이고 시장 논리가 아니라 ‘시장 논리의 유일 논리화’이다. 인문학은 돈 버는 사회를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미친 사회를 우려한다.”

교육이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돈 버는 인간’의 생산을 목표로 할 때, 대학이 학문을 닦는 곳이 아니라 오직 ‘지식 인력’만을 공급하는 훈련소가 될 때, 문학이 시대의 비인간성과 맞서지 않고 시장 논리에 함몰돼 한낱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문화가 인간성의 풍요로운 성찰이 아니라 ‘문화자본’의 상품으로 그칠 때, 그때가 바로 시장전체주의가 도래하는 때다. 시장전체주의는 그 맹목성과 야수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잡아먹게 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문민정부 시절 날이면 날마다 ‘세계화’를 외치다가 결국 외환위기를 맞아 정권이 파산하고 국가가 부도났던 것이 시장의 자기파멸성을 증거한다. 지은이는 이 시장의 광기를 제어할 것은 비판적 이성이며, 비판이성을 가동할 주체는 시민사회라고 강조한다. “21세기를 통틀어 한국인에게 부과되는 중요한 사회적 과제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것은 민주사회의 유지·발전·계승이다.” 그 사회를 감당할 민주시민을 길러내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시대에 대한 6가지 질문과 대답 ‘문라이브러리’

생각의나무 출판사의 ‘문라이브러리’ 시리즈는 도정일 교수의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포함해 모두 여섯 권을 1차분으로 내놓았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정의와 정의의 조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강수돌 고려대 교수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그리고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가 1차분에 포함됐다.

‘문라이브러리’는 1980년대 사회과학출판사들의 ‘신서’ 시리즈와 200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고본을 통합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예리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단출한 문고본 틀에 담아냄으로써, 가독성과 진지함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문라이브러리는 크게 세 가지 하위그룹으로 나뉜다. 1차분으로 나온 것이 인문적 담론의 마당을 펼치는 ‘휴머니티’ 시리즈이고, 예술 분야의 저술을 펴내는 ‘아트’ 시리즈, 문학적 에세이를 펴내는 ‘리터러처’ 시리즈가 따로 나올 예정이다. 문라이브러리는 ‘문’(問), 곧 ‘시대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름의 물음을 품고서 시대와 대화하는 가운데 얻은 답변이 책의 본문을 이룬다면, 그 답변 자체가 또다른 물음을 잉태하고 출산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출판사는 밝혔다.


1차분으로 나온 책들은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의 1급 학자와 논객을 불러내 이 물음과 답변을 들려준다. 시리즈 첫 권인 김우창 교수의 <정의와 정의의 조건>은 이 시리즈의 성격에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화두’인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좋은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극단의 정의가 극단의 손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경우의 수를 찬찬히 따져보는 그의 사유 방식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최장집 교수의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는 지은이가 정년퇴임 후 펴낸 첫 책이다. 최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촛불집회 같은 최근의 사례에 대한 평가를 통해 자신의 지론인 정당 민주주의 강화론을 펼친다. 그는 촛불집회를 민주주의 제도 실패의 결과로 보면서, ‘운동’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와 그 한계를 함께 살핀다.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에서 그의 고유한 생태사상인 ‘온생명 사상’을 풀어놓는다.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낱생명 속에서가 아니라 온생명과 낱생명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새로운 생명 이해에 도달할 때, 인간 중심의 관념에서 형성된 국가관의 제약을 좀더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장 교수는 생태계 파괴의 문명을 극복할 실천방안으로 대안공동체 운동을 제시한다.

강수돌 교수는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에서 상품경쟁·생존경쟁·시장경쟁은 결국 우리를 합리적으로 분열시키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며, 경쟁에서 누가 일등을 하는지와는 무관하게 모두가 권력과 자본의 지배 아래 종속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윤평중 교수의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편향적 사유의 중심잡기’를 시도한다.(고명섭 기자)

08. 09. 19.

P.S. 세기말에 씌어진 첫번째 글 '밀레니엄, 오, 밀레니엄!'(1999)에는 주요 미래소설들, 혹은 반(反)유토피아 소설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첫 타자는 러시아작가 예브게니 자미아친의 <우리들>(1923)이다. '자미아친'은 'Zamyatin'을 읽어준 것으로 보통은 '자먀친'이나 '자먀찐'이라고 읽는다('자먀틴'이라고 읽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1920년에 씌어진 소설이어서 '1923'이란 연도의 출처는 모르겠다.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자미아친이 그린 이 26세기의 세계에는 단 하나의 국가(이름도 '단일국'이다)만 있고, '대시혜자(大施惠者)'라 불리는 단 한 사람의 통치자가 그 거대 단일국을 다스린다."(15쪽)  

이 원조 반유토피아 소설의 국역본을 따르자면, '단일국'은 '단일제국'이고 '대시혜자'는 '은혜로운 분'이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26세기'가 아니라 '29세기'이다. 어차피 미래소설이니 그게 그거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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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9 22:10   좋아요 0 | URL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면서 결국은 연구비를 더 달라고 국가에 요구하는 것도 시장전체주의의 한 모습이 아닐까요?

로쟈 2008-09-20 20:21   좋아요 0 | URL
인문학자뿐 아니라 지식인 일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최장집 교수의 인터뷰에 이런 지적이 나옵니다. "이를테면 학술진흥재단과 같은 국가기관이 많은 학술사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은 거대한 국가기구의 하나의 관료적 고리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시민사회의 자율성, 시민운동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예전에 운동을 실제로 했던 지식인들이 과연 국가로부터 얼마나 자율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도 회의적입니다." 저 또한 회의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0 15:32   좋아요 0 | URL
하기야 이공계를 살리자면서 그 분야도 똑같은 요구를 하더군요.결국은 이런 식으로 하면 국가에 포섭된다는 말씀이지요?

로쟈 2008-09-20 20:24   좋아요 0 | URL
소위 지식인의 국가비판이 한낱 '행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국가체제 바깥에서 일상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대안이 있을 성싶진 않고, 다만 그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주 중대신문에 게재한 기획서평을 옮겨놓는다.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에 대해서는 한겨레21에 실은 '보편적 보편주의를 향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2293474)에서 이미 다룬 바 있지만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적 검토를 좀더 언급하고 싶어서 추가적으로 지면을 빌리게 됐다(사실 <유럽적 보편주의>에 대한 독후감은 중대신문의 서평으로 먼저 고려됐지만 한 주 연기되는 바람에 한겨레21의 연재가 먼저 나가게 됐다). 분량에 비해 거창한 제목이 돼버렸는데, 여하튼 이행기 지식구조의 변동과 대학의 변화는 지속적인 관심사로 두려고 한다(그런 이유에서 최근에 대출한 책이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와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이다).

중대신문(08. 09. 16) 유럽의 보편주의를 넘어 근대 대학이 나아갈 길은

가을이다. 이 결실과 조락의 계절에 사회과학서를 읽는 일이 분위기에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명한 세계체계 이론가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창비)는 예외라고 해야겠다. 우선은 강연문을 묶은 것이어서 읽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분량이 짧다. 그리고 수십 년간 세계체제이론을 가다듬어온 저자의 핵심적인 사상이 압축돼 있어서 월러스틴 입문서로 유익하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자면 이 또한 ‘가을의 책’이다.



 

 

 

 

 

저자는 이미 소비에트식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던 해 ‘자본주의 문명’이란 강연(1991)에서 “자본주의 문명은 그 존재의 가을에 다다랐다”고 진단한 바 있다.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사회체제가 바야흐로 막바지, 곧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따라서 현시대는 이행기라는 주장이었다. 월러스틴이 16세기(1450-1650)에 형성된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유럽적 보편주의’ 또한 이 종말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비록 구체적 상이 제시된 건 아니지만, ‘보편적 보편주의’이다. 월러스틴은 이 두 가지 보편주의 사이의 싸움이 향후 20년에서 50년 사이에 진입하게 될 미래의 세계체제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라는 편파성을 갖는 근대 보편주의의 두가지 양식으로 월러스틴은 오리엔탈리즘과 과학적 보편주의를 든다. 보다 우리의 흥미를 끄는 쪽은 과학적 보편주의이다. 실상 근대의 학문적 이념이기도 하기에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한 회의는 현재의 지식구조와 대학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적 대학의 출현은 19세기 중반의 일이며 세계전역에 대학제도가 완전한 융성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1945년 이후이다. 물론 이것은 1945년에서 1970년까지 세계경제의 거대한 팽창과 연동돼 있었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제도적인 분화가 이루어졌고 1945년 이후에는 근대세계체제 운용에 새로운 기술개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자연과학이 인문학을 크게 앞지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세계경제가 장기침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세계 대학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약화되었고 변화에 대한 다양한 압력이 생겨났다. 동시에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문화’의 분리도 자연과학에서의 복잡계 연구와 인문학에서의 문화연구 등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 이 두 경향은 모두 사회과학적 성격을 지니면서 전통적인 분과학문의 경계를 지워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인식에 근거하여 월러스틴이 내놓는 전망은 세 가지이다. 근대적 대학이 더이상 지식 생산과 재생산의 거점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지식구조의 새로운 구심적 경향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인식론으로 재통합될 거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모든 지식의 사회과학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지식구조 전체가 근대세계체제와 똑같이 무질서와 새로운 분기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진단에 공감한다면 월러스틴의 전망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곧 ‘겨울’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08. 09. 18.

P.S. 한겨레21과 중대신문에 보낸 원고에는 '장기 16세기'라고 적었는데, 모두 '16세기'로 교정됐다. 1450-1650년 간의 200년을 가리키기 때문에 '16세기' 앞에 '장기(長期)'란 표현이 붙는데, 기사로 나가기에는 번거로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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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9-18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적 보편주의> 읽어보고 싶네요.
사미르 아민의 책은 구하기가 영 힘들더군요.

로쟈 2008-09-18 19:15   좋아요 0 | URL
막상 읽어보면 소략합니다. 대신에 다른 책들을 더 읽게 해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미르 아민은 맑스의 자본주의 이행과는 다른 발전단계설을 제시했을 때부터 서구 자본주의 위주의 근대화론과는 다른 것을 생각했겠지요.그의 변경혁명론도 그런 성격이 강하구요.1985년에 서울대 방문했을 때 기념으로 쓴 논문을 <계급과 민족>뒤편에 실었던데 그때 이미 베버류의 자본주의론이나 맑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과는 결별할 준비를 한 것 같아요.

로쟈 2008-09-20 20:19   좋아요 0 | URL
방한까지 했었군요. <유럽중심주의>는 얇은 책이라 만만하게 생각하고는 있는데, 시간이 잘 안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무렵이 우리나라에서 아민이 슈퍼스타였죠.번역도 하고...90년 이후 갑자기 유행이 뚝!!! 모르는 사람은 우간다의 이디 아민의 동생인줄 알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죠.

로쟈 2008-09-21 09:41   좋아요 0 | URL
전설 같은 이야기로군요.^^
 

엊그제 교수신문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 번역자의 번역기를 옮겨놓았는데, '번역을 말한다' 코너가 계속 연재되는 모양이다. 이번주에는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한길사, 2007)이 다루어졌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810). 필자는 책의 번역자인 이영석 교수이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이 연재는 아마도 계속 옮겨놓을 듯싶다). 

교수신문(08. 09. 16) 역사적 지층의 의미를 찾아서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은 영국사학계에서 역사지리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호스킨스는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성물이라는 전제 아래 잉글랜드의 구릉과 평야, 경지와 목초지, 촌락과 도시 등을 탐사한다. 이 책의 개요는 1970년대 중엽 BBC 텔레비전에 방영돼 사람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존 해리슨의 『영국 민중사(The Common People of Great Britain)』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발췌한 호스킨스의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도 영국사회사를 다룬 책들에서 간혹 그 책을 인용한 구절을 발견하곤 했다. 1990년대 중엽 런던의 한 헌책방에서 펭귄판 책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서가에 꽂아놓았을 뿐 눈여겨보지 않았다.

1990년대 말 근대 영국 사회경제사를 다룬 연구서를 내놓은 후, 나는 자신의 역사 연구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탓이 아니었나 싶다. 우선 무엇보다도 무미건조한 사회사 서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역사서술의 문학성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곳저곳에 눈길을 돌리며 암중모색하던 내게 호스킨스의 책은 한 줄기 섬광처럼 감동으로 다가왔고 새로운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영국에 체류하면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해 내내 나는 호스킨스의 체취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료에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수수께끼처럼 풀어나가는 그의 지혜와 잉글랜드 자연풍경 하나하나에 기울이는 깊은 애정과, 그리고 특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미들랜즈 동부의 시골길을 걷다가, 책에서 읽은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호스킨스의 책은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하려는 시도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의 풍경이 역사적 시간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면 풍경은 ‘거듭 새긴 양피지’(palimpsest)와 같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와 그들이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 선대의 자취를 반쯤 지우고 그 위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덧칠한다.  호스킨스는 바로 이 거듭 새긴 양피지에서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뒤쫓는다. 현재의 촌락과 발굴된 촌락터를 답사하면서 그곳에서 옛날 켈트인들의 정착과 후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이동과 중세 농민의 생활과 그리고 상승하는 부농의 새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되살린다. 말하자면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호스킨스는 자연 모두가 사람의 활동과 관련되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미미한 경관과 풍경 속에도 인간의 삶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풍경이라는 창을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을 되살린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직후 호스킨스를 비롯한 일단의 역사가들이 풍경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움직임은 자연 자체의 위기를 목격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다.

2차 대전의 폐허와, 그리고 냉전기에 군사기지와 군비행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구릉과 경지와 산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잉글랜드 지방 곳곳을 답사했다. 물론 역사적 풍경을 탐사하는 작업은 호스킨스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새롭게 대두한 지명 연구와 고고학과 그리고 무수한 아마추어 지방사가들의 작업에 힘입어 호스킨스와 그의 동료들은 잉글랜드의 역사 속에서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사실 호스킨스의 책은 시론적인 것이며, 그의 책이 나온 뒤에 각 지방별로 풍경의 변화를 탐사하는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2005년판 서문에서 키스 토머스는 호스킨스의 책이야말로  20세기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한다. 사실 호스킨스가 이 책을 펴낸 195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음에 묻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한 세대가 지난 후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증폭되면서 설득력을 얻게 됐다.

호스킨스의 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호응과 관심을 얻고 있다. 특히 근래 영국의 환경과 생태는 1950년대 냉전기의 변화보다도 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오늘날 호스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국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곳곳에서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고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호스킨스가 살아 있다면, 그는 냉전기의 폐해보다도 현재의 변화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5년 판 서문을 쓴 키스 토머스도 두 세대 전 호스킨스가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내비친다. 돌이켜보면, 근대의 지적 전통에서 자연은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 의해 개조되고 변형되는 수동적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리하여 자연은 언제나 사람들의 삶에 걸맞게 변형된 ‘인간화된 자연’이었다. 그 전형이 풍경이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자신의 인간화를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는 풍경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 호스킨스의 작업을 넘어서 인간화된 자연이 과연 앞으로 지속 가능한지 심각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된다.

호스킨스의 책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과 환경만을 뒤쫓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심을 내면화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을 일부나마 다시 되살리며 남아 있는 자연이 우리의 삶과 공존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번역할 때 한 가지 궁금증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동안 우리의 풍경은 어떻게 변했는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 무엇을 얻었는가.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하게 뒤바뀐 우리 풍경에 관해 과연 호스킨스의 작업과 같은 그런 연구와 탐사가 가능할 것인가.(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08. 09. 16.


 

 

 

 

 

 

P.S. 생소한 책이지만 리뷰를 읽다 보니 또 관심을 갖게 된다. 역자의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푸른역사, 2003)이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 얻은 소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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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매혹한 역사가들>에서 호스킨스를 소개하더니 이번엔 번역을 냈군요.영국 사회사가들을 많이 소개하더라구요.

로쟈 2008-09-17 17:43   좋아요 0 | URL
저는 풍경이라고 해서 '풍경화'만 떠올렸어요.^^;

릴케 현상 2008-09-1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본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애니메이션 대사가 떠오르네요


도시오: 도시사람은 삼림과 숲과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곧, 자연이다. 자연에게 감사하겠죠. 그렇지만, 산은 물론이고 시골의 경치라는 녀석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죠.
다에꼬: 인간이?
도시오: 예. 농부가.
다에꼬: 저 삼림도?
도시오: 예.
다에꼬: 저 숲도?
도시오: 예.
다에꼬: 저 작은 시내도?
도시오: 예. 논과 밭뿐이 아닙니다. 모두 분명히 역사가 있습니다. 어디어디의 증조할아버지가 심 었다든지 개간했다든지, 먼 옛날부터 장작과 낙엽 등과 버섯을 얻어 왔다든가……
다에꼬: 아아……그렇군요.
도시오: 인간이 자연과 싸우기도 하고, 자연으로부터 여러 가지 것을 받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훌륭하게 만들어져 온 것이 경치예요. 이것은.
다에꼬: 인간이 없었다면 이런 경치로 되지 않았다는?
도시오: 농부는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얻음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살 수 없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게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농민 쪽도 여러 가지 일을 해주어 온 거죠. 말하자면, 자연과 인간과의 공동작업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이 아마 시골이라 할 수 있겠죠.
다에꼬: 그렇군……그래서 그리웠던 거였구나…… 태어나서 자랐던 일도 없으면서 어째서 이곳이 고향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계속 생각해 왔었어요. 아……그래서였구나……
다카하타 이사오, 에니메이션〈추억은 방울 방울〉중에서

로쟈 2008-09-18 00:12   좋아요 0 | URL
대사를 다 받아적으신 건가요?^^

릴케 현상 2008-09-1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럴리가요^^

2008-09-23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3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필요 때문에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을 영역본과 같이 좀 보다가 관련자료를 검색해봤다. 동아일보의 기획기사 중 한 꼭지가 <진리와 방법>을 다루고 있고, 교수신문에도 국역본의 역자 중 한 사람인 임호일 교수의 소개가 실려 있다. 현재 나와 있는 국역본은 전체의 1/3 정도인데, 이르면 연내에 나머지 부분도 출간예정이라고 한다(늦어도 내년까지는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기사들을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08. 03. 26) [인문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30선]<18>진리와 방법

《“해석학적 현상에서는 진리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진리의 경험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

‘진리와 방법’은 철학자 가다머(1900∼2002)의 주저(主著)일 뿐 아니라 해석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다머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에 걸쳐 집필한 이 역작은 해석학을 독일 철학계의 중심적인 논제로 대두시킨 계기가 되었다. 워낙 오래된 저서인 만큼 비판과 지적도 따랐지만 아직껏 이 책을 능가하는 해석학 저서는 나온 것이 없다는 게 철학계의 평가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선 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중반 자연주의적 과학주의적 정신의 득세로, 철학의 고유한 연구 대상이었던 인간 정신은 자연과학의 부속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해석학은 철학의 문제 영역인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의 일종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을 염두에 두었지만 출판사 발행인이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낯설게 여겨서 제목을 바꾼 것. 그러나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은 적절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란 자연과학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의도는 과학주의·객관주의의 방법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세계를 찾아, 여기에서도 진리가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이란 자연과학에는 없고 정신과학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를 끌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가다머는 정신과학의 진리의 ‘경험’을 찾아내 고유한 정당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상이한 세 영역의 연구를 이행했지만 이 영역들은 철학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 세 영역이란 예술과 역사, 언어의 철학적 분석을 말한다. 2000년 국내에 번역된 ‘진리와 방법Ⅰ’은 예술 경험의 진리 문제를 탐색한다. 이론을 세우는 게 아니라 경험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논의는 정신과학에 속한다. 해석학에 따르면 예술은 개인의 사사로운 영감에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 ‘경험’, 즉 예술작품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맞서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형성한다.

가다머는 이렇게 예술 경험에 대한 이해 지평뿐 아니라 예술작품의 존재론과 그 해석학적 의미를 물음으로써 예술 경험의 자기정체성을, 나아가 정신과학의 독자성을 규명한다. 가다머는 고대 그리스철학부터 딜타이, 칸트, 후설, 하이데거 등 철학사를 훑으면서 예술의 고유한 인식 방법과 진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텍스트다. 고려대 이길우(철학) 교수, 강원대 이선관(철학) 교수, 동국대 임호일(독문학) 교수, 강원대 한동원(철학) 교수가 이 책의 번역에 함께했다. 역사와 철학에 대해 논의한 ‘진리와 방법Ⅱ’도 번역 중이며 이르면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김지영 기자)

교수신문(01. 05. 28) 가다머를 통해 본 인문학의 이해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기술(과학)문명의 범람으로 익사 직전의 위기에 처한 인문학이 우리의 현실에서 왜 중요하며, 왜 필요하고, 인문학이 왜 복권되어야 하는가를 웅변해 준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사물이 서로 지배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를 이룰 때 진정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문명은 지배욕구를 은폐하고 있다. 달리 말해 기술문명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을 대상화시켜 점령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드는 것이 인문학, 즉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 해석학’이다.

기술문명에 대한 저항의 잠재력
가다머는 무엇보다도 전통을 중요시한다. 가다머에게는 전통이 곧 인문학의 출발점이요, ‘진리의 生起’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그가 의미하는 전통이란 철학분야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철학과 칸트 및 헤겔로 대변되는 근대철학이다. 그밖에도 그는 신화와 예술작품도 이 전통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확장 일로를 걷고 있는 과학의 지배요구에 대한 저항의 잠재력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전통의 이해’를 전통에 무조건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로 파악하거나, 전통의 단순한 습득 및 이해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인간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이해는 반드시 대화와 질문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한 인간의 이해를 통해 우리의 지평을 넓히듯이, 전통의 이해를 통해 ‘새로운 빛’을 보게 된다. 가다머는 특히 예술작품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은 친숙함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알 수 없는 일은, 이 친숙함은 동시에 충격과 익숙한 것의 붕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출발점으로 삼는 가다머의 해석학은 바로 이 전통과 현재의 매개를 제일 과제로 삼는다. 여기서 매개란 곧 대화를 의미하며, 이 대화는 이해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가다머의 이해는 결코 어떤 대상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이해에는 자기 비판이 선행되며,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우월한 지위를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불확실한 진리가 검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입견’이 이해를 촉진
가다머는 “모든 이해는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해는 이해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대상화를 거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항상 역사의 한 가운데 있으며, “매 순간마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로 오는 것, 즉 전수되는 것과 더불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듯 이해에서 자신의 고유한 역사성을 함께 성찰하는 의식을 가다머는 ‘영향사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가다머가 전통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 이래로 박탈당했던 선입견의 권리회복을 역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의하면 이해는 선입견을 근거로 해서 작용한다. 여기서 선입견이란 이해하는 사람, 즉 해석자에게 축적된 모든 정신적 자산 일체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이 ‘선이해’, 즉 ‘현재의 견해’로 작용하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 이 정신적 자산, 즉 ‘기대의 지평을 형성하는 전래된 견해들’이 없는 한 그 어떤 이해과정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된다. 가다머는 계몽주의자들이 ‘고유한 반성적 노력의 결과’로 인정한 ‘판단’을 개인적이라고 폄하하는 반면에, 선입견에게는 ‘비개인적’, 또는 ‘선개인적’이라는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선입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가다머는 개인적 또는 주관적 인식을 경계하는 한편, 공동체적 계기들을 중시한다. 그가 공동체적 계기들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적 계기들을 전통 속에서, 예술작품의 ‘세계’ 속에서 또는 ‘생활세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은 역사적 변화와 더불어 그 존재를 증대시켜 왔으며, 개인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될 수 없다. 그 때문에 가다머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기와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인식한다.

‘방법’으로 파악될 수 없는 ‘진리’
가다머에 의하면 사물을 대상화시키는 진리는 ‘방법’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진리는 계획적이고 통제성을 띤 방법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진리는 ‘현재의 것과 역사적인 것의 존재가 표현되고 이해’되는, 즉 ‘삶의 실행’과 연관된 생기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이 양 존재가 만나는 사건이다. 생기로서의 이러한 진리는 사유의 발전과정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사유의 변화와 무관한 그 어떤 존재’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다머가 그의 해석학에서 언급하는 ‘이해의 역사성’도 바로 이 사유의 변화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가다머의 이해는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의 그것과는 달리 역사적 지평과 현재의 ‘지평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리생기의 한 중요한 계기이다.(임호일 동국대 독문학)

08. 09. 15.



 

 

 

P.S. 중고생을 위한 책으로 <가다머가 들려주는 선입견 이야기>(자음과모음) 같은 책도 나와 있지만 가다머에 관한 본격적인 소개서나 연구서는 아주 빈약한 편이다. <진리와 방법> 국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리처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가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표준적인 입문서 역할을 했었다. 아마도 조지아 윈키의 <가다머>(민음사)가 거의 유일한 소개서였던 듯싶고, <한스-게오르그 가다머>(한양대출판부, 2001)를 보탤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관련서로 가장 인상적인 책은 짱 롱시의 <도와 로고스>(강, 1997)였다). 최근에 나온 책으론 정연재의 <윤리학과 해석학>(아카넷, 2008)이 있는데, '그리스 철학의 수용과 재해석의 관점에서 본 가다머 철학'가 부제이며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한편, 작년 여름 <진리와 방법>을 펴들었다가 맛보기로 쓴 페이퍼로 '파도타기와 공잡기'(http://blog.aladin.co.kr/mramor/1364280)도 참조. '가다머 읽기'를 더 길게 쓰고도 싶지만, 요즘은 파도탈 시간도, 공잡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군. 날씨는 여름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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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줌 경기가 바닥이라는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9월 위기설'이 진정되는 듯하지만 세계경제 자체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한국경제가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해서는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10241.html 참조). 오늘자 뉴스만 하더라도 "전세계 경기의 급속한 위축으로 한국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인 수출이 둔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경제는 이미 침체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유로지역의 2분기 경제성장률은 전기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일본은 같은 분기에 -0.6%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경기후퇴 국면에 집입했다."고 전한다(설상가상으로 우리에겐 7%를 꿈꾸는 이명박정부가 있다!). 상황이 그러한지라 보통 경제서에 눈길이 가는 일은 드물지만 최근에 나온 책 두 권에 관한 기사는 아무래도 챙겨두어야 할 듯싶다. "빈곤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허튼 소리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따로 준비할 것도 없긴 하지만). 

한겨레(08. 09. 13) 한국 경제, 분배로 갈까 성장으로 갈까

‘9월 위기설’의 실체는 이 두 책의 가운데 어디쯤 있을 것이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빈곤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성장과 번영에 대한 기대를 접으라는 이야기다. <거짓말 경제학>은 “비관론을 퍼뜨리지 말라”고 말한다. 여전히 성장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앞의 책은 “분배 중심의 경제정책”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고, 뒤의 책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이 한국 경제의 갈 길이라고 한다.

나란히 출간된 두 책은 다르면서도 닮았다. 지은이가 모두 ‘재야’ 경제학자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을 쓴 김재인은 기업·은행 근무를 거친 경제분석컨설팅업체 대표다. <거짓말 경제학>을 쓴 최용식은 21세기경제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경제칼럼니스트다. 기성 경제학자에 대한 비판을 벼리면서 세계 경제의 미래를 암담하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닮았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진단에서도 일치한다.

그러나 두 지은이가 서 있는 인식지평은 다르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앞세운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배타적·이기적·소비적·전투적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한계에 봉착했다.” <거짓말 경제학>은 정확히 반대편에서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를 배척하는 것은 국가경제를 쇠락으로 이끌고 국민들을 경제난에 시달리게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암울한 예측을 도발적으로 내놓는다. “대한민국의 풍요는 끝났다. 지구의 풍요 또한 끝났다. 종말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빈곤을 준비하라. 빈곤이 싫다면 종말을 맞이하라.” 최근의 경기하락은 세계경제의 순환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며 영속적인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신자유주의는 무역을 통해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과 결별한다. “한 국가가 50% 성장 혜택을 본다면 다른 국가는 반드시 50% 손실을 보게 된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제로섬’의 시대다. <빈곤 경제학>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신자유주의 비판이 아니다. 지은이는 식량과 화석연료를 포함한 자원의 고갈에 주목한다.

“지구상의 자원이 고갈되면서 이제 모든 경제활동은 국가적 차원으로 전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자유무역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극단적 신보호주의로 전환됐다.” 지구 차원의 경제성장은 한계에 도달했고, 미국 경제 역시 붕괴 직전에 있다. “이제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바라는 만큼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 어려워졌다. 우리 경제라고 이런 흐름에서 동떨어져 7%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야말로 무지의 소치다.”

<거짓말 경제학> 역시 ‘성장 신화’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지은이가 보기에 1950년대 후반 이후 한국 경제는 “성장 지상주의를 내세우면 위기가 오고, 경제 안정주의를 내세우면 상황이 개선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패착은 “세계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환율 인상 정책 등으로 무리하게 경기를 부양”한 데 있다. “이명박 정권은 김영삼 정권이 외환위기를 일으켰던 길을 비슷하게 걷고 있다. 현재의 경제정책을 유지한다면 파국적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짓말 경제학>의 비판은 ‘반신자유주의’를 향한다. “기업 이익이 사상 최대를 기록해도 투자가 부진한 이유는 한국 경제의 분위기가 극도로 비관적이기 때문”이며 그 선봉에는 민영화·개방화 등을 비판하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나 우석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이 있다. 책 제목이 지목하는 ‘거짓말 경제학’의 주역이다.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배척하고도 경제가 번영한 나라가 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있는가”라고 묻는 지은이는 “신자유주의 배척이 오히려 강자승리와 승자독식을 부른다”고 분석한다. 일자리를 잃어도 가난한 자가 먼저 잃고, 사업이 망해도 영세업체부터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장의 콘텐츠가 없는 진보”는 여전히 무책임하고 무능하다. 지은이는 좌파 경제학자 출신인 카르도주 전 브라질 대통령과 노동당 출신의 룰라 현 브라질 대통령이 개방화·민영화 노선을 채택해 성장을 일군 브라질의 사례를 여러 차례 거론했다. <거짓말 경제학>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진보 노선을 제시하는 셈이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분배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빈곤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거짓말 경제학>은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경제정책으로 선진국 진입의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쪽이건 파국을 면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라고 두 책은 입을 모은다. 형편이 이런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고, 이명박 정부에 묻는다.(안수찬 기자)

“내수시장 안정이 최우선”…대기업 투자 주문도
신자유주의, 민영화, 시장 개방 등에 대한 두 책의 입장은 날카롭게 대치한다. 시각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공통된 점이 없지 않다. 우선 내수 시장 안정이 최우선 정책이라고 제시한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고용시장 안정과 분배 정책을 통해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할 소비자들을 안정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거짓말 경제학>은 “물가 안정이 최우선”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대기업 투자 활성화 문제에 대한 주목도 닮았다. <빈곤의 카운트다운>은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 우선 정책이 대기업 투자 활성화를 틀어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들은 막대한 투자 여력을 설비 투자가 아니라 앞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올 공기업 인수에 쏟아부으려 한다”는 것이다. <거짓말 경제학>은 민영화의 적극 추진을 주문하면서도 “(한국의 기업들이) 미국처럼 영업이익을 금융이익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거나 일본처럼 해외 부동산과 기업 인수에 매달린다면 미국의 악전고투와 일본이 빠진 미궁이 우리 몫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수 시장 안정화의 정부 정책과 재투자를 위한 대기업의 행보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안수찬 기자)

경향신문(08. 09. 06) 한국경제 ‘빈곤의 시대’ 대비하라

‘9월 위기설’이 증폭되면서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실물경제마저 휘청이고 있다. 정부는 위기설이 과장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정말 대한민국에 위기가 닥친 것일까. 정부와 언론, 그리고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한국경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펀더멘털이 튼튼하고 저력이 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 세계 경제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진정되면 1~2년 후에는 성장세로 돌아설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단기비관, 장기낙관’이라는 전망은 수백년을 지속되어온 경제전문가들의 화법이다. 경제는 보통 회복과 침체의 사이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경제가 앞으로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경제학의 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경제학이란 ‘유한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학문’이다. 저자는 자원이 ‘정말로’ 유한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경제학자들은 이르면 30년 내에 고갈될 석유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를 논의하고 있다는 말이다.

최근의 유가상승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1999년에 배럴당 20달러에 불과했던 원유가격은 2006년엔 60달러, 2007년엔 80달러, 올해엔 130달러를 넘어섰다. 원유는 2010년 즈음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고갈될 것이란 게 상당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석유는 자동차를 굴리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료를 만들고 플라스틱을 제작하고 컴퓨터를 켜는 데도 이용된다. 현재와 같은 소비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원유가격은 계속 오를 수밖에 없고 이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을 동반한다.

달러화 가치의 하락도 위기의 징후다. 미국은 달러화를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 만듦으로써 엄청난 부를 누렸다. 세계 각국이 달러화 보유에 힘쓰는 상황에서 미국은 그저 달러를 찍어내고 다른 나라의 물건을 사오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미국정부의 누적적자 규모는 9조달러에 이르렀다.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낸 것이다. 달러화를 찍어낼 수 없게 되자 미국경제가 위축됐고 이는 미국에 소비재를 공급해온 중국이나 한국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은 이미 붕괴상태이며 실업률도 높기 때문에 내수경제를 살릴 방법이 마땅치 않다.

문제는 한국경제가 어느 나라보다 미국과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다는 점이다. 에너지 자급률은 3%대에 불과하며 경제는 물론 정치·문화·사회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내수 경제를 살려야 하며 자원 수급의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민 절반이 한 달 117만5000원(2007년 기준)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서비스분야에서의 비정규직은 더욱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됐다. 이미 거품이 낀 부동산을 통해 내수 경기를 진작하려 하고 환율을 상승시켜 내수보다 수출중심의 경제를 지향했다. 국민이 통합해 위기를 헤쳐나가도 부족한 마당에 종교간, 계층간 갈등을 유발하고 민영화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심화시켜 사회안전망을 파괴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에 마지막 남은 희망은 북한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북한은 산업화가 덜 이뤄져 매장된 각종 천연자원이 남한의 수십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관계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중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북한을 원조하면서 각종 자원의 발굴권을 가져가는 동안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솔직히 조언한다. 빈곤을 준비하라고. 자동차의 크기를 키워서도 안 되고 넓은 집을 탐해서도 안 되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난 뒤 러닝머신 위에서 운동하는 삶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불황은 경기사이클에 의한 일시적 빈곤이었다면 앞으로의 빈곤은 상시적인, 절대적 빈곤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너무 우울한 전망이기에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까워 보여서 더욱 암담해진다.(김준일기자)

08. 09. 15.

 

 

 

 

P.S. 기사를 읽으며 떠올린 건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득실표(대차대조표)이다. 그라면 문제는 '대한민국 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문명' 자체라고 진단할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에서 그는 자본주의가 누구에게 득이 되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전체 가운데의 비율로 보아 특권계층의 규모가 역사적 자본주의하에서 상당히 커졌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확실히 더 잘살게 되었으며, 건강이나 삶의 여러 기회들이나 소수 지배집단에 의한 자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도 더 나아졌다. 이들이 정신적으로 더 나아졌는가 하는 데에는 다분히 의문의 여지가 있겠으나, 아마도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146쪽) 하지만, 이 특권계층이 세계인구의 다수는 아니다.

"그러나 스펙트럼의 다른 한쪽 끝에 위치한 사람들, 다시 말해 특권의 수혜자말고 세계인구의 50-85%에 해당하는 이들의 경우, 그들이 아는 세계는 이전에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이 알았던 세계보다도 확실히 더 나빠졌다. 기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질적으로 더 빈곤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 문명의 세계는 양극화된 그리고 양극화해나가는 세계다. 그런데도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제까지 이 체제를 유지시켜주었던 것은 개혁이 증가되고 결국엔 격차가 메워지리라는 희망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은 비단 성공적인 문명이었던 것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문명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희생자들과 반대자들까지도 매혹시켜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현혹/매혹의 약발이 다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끄트머리에 있는 선택지는 ('빈곤의 종말'이 아니라) '빈곤이냐 종말이냐'다. 월러스틴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모든 역사적 체제들이 예외없이 제한된 수명을 누리며 끝내는 뒤를 이을 다른 체제에 길을 터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세계체제 또한 영속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일단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생전에 '역사적 자본주의'의 종말/파국과 함께 '자본주의 이후'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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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7:01   좋아요 0 | URL
역시 신자유주의 비판은 비교우위론 비판을 기본으로 하는군요.공병호도 장하준을 비판하더군요.역시 두 개의 경제학은 화합할 수가 없군요.저도 어제 맨큐어 올슨<국가의 흥망성쇠>를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시장주의를 택하는 것이 국부에 좋다는 책이죠.마지막 장에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도 있고 해서 구입했어요.이미 소장하고 있는 셔먼<스태그플레이션>이 급진경제학 쪽 시각이라서 시장주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해서 올슨 것을 샀지요.
이번 리먼 브라더스 파산을 봐도 역시 세계경제는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로쟈 2008-09-17 17:37   좋아요 0 | URL
듣자하니 그 금융자본이 결국엔 사고를 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