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는(아마 앞으로도?) 아이의 발달검사를 건너뛰기로 결심하고, 또한 작년 이맘때 지능지수를 조금이라도 올려보고자 엄청 빡세게 하던 치료를 대폭 줄인 덕분에, 2차 휴가차(?) 지방에 내려와 있다.(내려놓는 만큼 편하다!^^;)  소위 '맛집' 중 한군데, 이번에도 간다. 하필 손님 넘치는 점심 때. 젊은 부부와 할머니(아마 시어머니)에 덧붙여, 여자 아이 하나가 일을 돕는다. 나중에는 더 어린 아이까지. 얼핏 보기엔 두 세살쯤 차이가 나보이던데 실은 큰 아이는 3학년, 작은 아이는 2학년. 만 나이로 따지면 두 살 정도는 차이날 터. 자매의 일솜씨는 물론 태도와 표정(!)이 사뭇 다르다. 큰아이는 엄마 닮아서 손도 무척 빠르고 눈치도 빠르고("앞접시요?) 일에 적극적이고 보람도 느끼는 것 같다. 표정이 참 밝다. 손님이 쏵 빠지고 상을 치울 때도 "아, 이제 천국이다!"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동생을 가르친다. 그 동생. 자매임에도, 또래임에도 동생의 얼굴은 음울하거나 적어도 차분하다. 이 아이는 이 일이 싫다. 나가 놀고 싶거나 설마 공부 하고 싶을까? 아무튼 음식물 찌꺼기가 가득한 식탁을 치우는 일이 참 싫다. 일은 제법 한다. 남은 음식물 합치고 같은 모양의 그릇끼리 모으고 그렇게 모은 것을 쟁반에 담는 것까지. 국물이 많이 남아 들지는 못하겠다. "아빠 보고 도와달라고 해야겠어." 그러곤 아빠를 부르러 간다.

 

*

 

내 고향에 비하면, 이곳은 대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계속 있었더라면 엄마 말대로 일고여덟살에 가마솥에 밥 하고 (남동생은) 지게 지고 밭 메고(매고?) 모내기 하고 소 먹이고 등등 피할 수 없었으리라. 부전자전은 당연히 불가피. 일찌감치 입양되지 않는 한, '환경' 역시 유전의 일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또, 흥미롭게도, 유전자(!)의 농간이 있다. 즉,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더라도 서로 참 다르다. 큰 아이는 말도 제법 하는 편이다. "어디서 오셨어요? 와, 서울요? 저도 가 봤는데" 그러면서도 상 정리도 참 잘 한다. 이 아이의 미래는...?

 

보통의 초등 3학년이라면 방학 때 식당에서 서빙하고 있지 않다. 그 무렵 내가 시장가는 걸 아빠는 정말이지 무척 싫어했다. 당신은 그런(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식은 그렇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지사. 동시에 우리가 흔히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것. 아빠는 자기 직업이 마뜩치 않았다. '장사하는 나'는 아빠가 사랑하고 존중하는 나가 아니었다. 이 대목이 문제. 여기서 자식의 인성도 문제가  생긴다. 아빠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구나... 아빠는 우리가 자기를 부끄러워할까봐 걱정하는구나... 자신감이 없구나...

 

그 식당의 큰아이 엄마는 그런 게 없어 보였다.(왕년의 나의 엄마처럼.) 큰아이도 그랬다. 엄마한테 일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작은아이는 잘 모르겠다. 손놀림이 나쁘지는 않으나 하기 싫다 보니 일에 몰입이 잘 안 되고 끈기도 부족하다. 그 아이의 미래는...?

 

우리집 삼남매는 모두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내가 제일 멀리 떠났고 둘째는 적당히 떠났고 세째는 못 떠나고 남았다. 촌스러운 질문 하나. 누가 제일 잘사나? 누가 제일 행복하나? 그러게 말이다.

 

*

 

보통의 초2, 3은 전에 썼듯 학교 방과후, 사설 학원, 방문교사 등 정신 없다. 우리 때라고 없었나? 우리 때도  적잖은 아이들이 유치원 다녔고, 가령 사촌 오빠들은 영어도 할 줄 알았다. 사교육의 힘? 그보다 더 무서운 부모의 힘이다. 사교육 하는 것도 부모의 힘이다. 시간, 재력, 열의 등.

 

한 선배의 철학인(입?)문서 원고를 훑어보다가 '원인/이유'의 대목에서 멈칫한다. 내 입장에서 풀어보겠다. 보통 사람들은 장애/질병/사고 등에 대해 "왜?"라고 묻는다. "아이가 자폐(다운증후군)예요." "왜요? 어쩌다가요?" 여기에 '왜'(원인)과 '어쩌다/어떻게'(방법, 과정)가 동시에 다 들어간다. "폐암이래요." "왜요? 담배 많이 피웠어요?" / "교통사고래요." "왜요? 과속했나요? 신호 위반?"

 

이런 식의 경우, 일정 부분 원인/과정을 얘기할 수는 있다. 고령임신이라든지, 출산 중 산소가 어찌 됐다든지, 출산후 산후우울증이라든지, 그 다음,,, 음주에 흡연에 가족력,,,, 그 다음 운전미숙에 판단착오에 등등. 하지만, 하필 왜 그 순간에, 하필 왜 나한테, 이렇게 따진다면 정말로 답이 없다. 다른 아이들은 다 멀쩡한데 왜 내 아이한테만 특정 염색체가 없는가, 혹은 많은가. 다른 아이들은 다 잘 자라는데 왜 내 아이는 소아암에 걸렸는가. 평생 담배 한 대 안 피웠는데 나이 육십에 폐암 말기라니? 고속도로 정속 주행하는데 하필 왜 그 순간 트럭이 내 옆을 지나갔나 등. 그 다음, 비슷한 불행을 겪지 않은 자들은 정녕 손쉽게 질문한다. "아니 왜요, 아니 어쩌다가요?" 때론 이것이 동정과 연민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게, 팔자.

 

 

 

 

 

 

 

 

 

 

 

 

 

 

 

여기서 우리는 '운명애'라는 아름답고 처절한 말을 상기한다. 아모르 파티.

 

*

 

다시금 저 밥집. 두 소녀는 앞으로 어찌 자랄까. 밑에 남동생도 하나 더 있단다. 어쩜, 어릴 때 우리집과 그림이 너무 똑같아, '역사는 (엉뚱한 곳에서도?) 반복된다'라는 진부한 문장이 떠오를 정도였다. 강남의 아들딸들과, 행여라도, 나중에 저 밥집의 아이가 이십여년 뒤 한 공간에 있는 그림을 생각해보자. 소위 '개룡'은 예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로 태어난다. 아무로 개룡의 후일담(?)을 모르는데, 개룡은 어차피 다시 개천으로 돌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혹은 개룡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개천이다. 개룡은 주로 개룡끼리 놀고 그렇게 또 개천이 형성된다. '변/똥' 눈 자리를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는 모두 '개새*', 입이 열 개라도 아무 말 못하지.  어머니(와 누이)를 잡지 않아서, 그대는 참 양심 있는 시인입니다^^;

 

 

 

 

 

 

 

 

 

 

 

 

 

 

 

 

*

 

아홉살이라는 여자 아이의 손놀림과 눈빛, 표정을 보니, 내 아이는...?!

나도 그 질문 많이 했다.

"아니 왜요?"(왜 자폐래요? / 왜 유방암이래요?)

심지어 이십대에 암으로 죽은 친구(선후배)도 둘이다. 그들은 왜?   

그러게, 궁극의 원인 '왜'를 알 수 없다.

이미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러게, 팔자. 아모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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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방학이 코딱지만큼 남아서(오호 통재라! ㅠㅠ) 아이의 2학년 2학기를 앞두고 다시금 사교육에 대해 고민해본다. 더 넓게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육아-교육 전반에 대한 고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 번 글에도 썼지만, 나는, 또 내 주변의 많은 가난뱅이-'개룡'은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 조금 위의 선배들은 전두환 때 입시를 쳐서 심지어 과외 금지 세대다. 허용해도 똑같았을 터, 어차피 못 받았을 학생들이다. 과외나 학원 같은 사교육 없이, 대놓고 말하자, 어떻게 서울대 갔나.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의 어느 글에 이 문제가 잘 얘기된다. 심지어 두 꼭지나 됐던 것 같다. 아주 공감하며 읽었다. 나야 지방 여고에, 서울대라고 해도 법대도 아닌, 점수 낮은 인문대(더욱이 비인기학과^^;) 출신이라 법대(=서울대, 전국) 수석(공동수석이었다고^^; 다른 분-학생은 현직 로스쿨 교수)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지만, 아무튼 딱 저런 식으로 공부했다. 학교 - 집,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 문제지, 학습지는 모두 선생님들(특히 영수) 제공, 제일 좋은 교과서는 문자 그대로 교과서, 무조건 반복과 학습이다. 달달 외우다 보면 어느 날 도가 트여서 어지간한 문제는 풀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래도 내 머리의 한계가 있어, 커트라인 더 높은 학과는 못 갔을 거다. 재수 안 했는데, 아마 서울대 영문과/국문과 정도는 간신히(?) 붙지 않았을까 한다. 93년,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데, 당시 노문과는 영문과 다음의 높은 커트라인인을 자랑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문유석 판사도 쓰고 있지만,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사교육 금지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똥멍청이 같은 소리다. 이미 우리는 너무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자기 깜냥껏 자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겠다는데, 그걸 막는 건 헌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럼 일단 받아들이고 주변을 보자.

 

서울이라고 하지만 후진(^^;;) 동네 살고 있는데, 이곳 역시 학구열이 만만치 않다. 아이를 발달이 늦어 놀이학교에 보냈다. 병설유치원으로 옮기지 못한 건, 1)내가 게을러서 2)아이의 발달이 정상에 이르지 못해서 등 다양하다. 놀이학교와 나란히 영어유치원이 있다. 전자의 인기는 좀 줄어드는 것 같고, 엄마들 역시 6-7세가 되면 초등 입학 때문에 유치원으로 많이 옮긴다. 영유든, 일유든. 일유, 즉 일반 유치원 중에서는 사설 유치원 병설 유치원이 있다. 일 하지 않는 엄마라면 일유를 보내면서 여러 사교육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라, 벌써 나온다, 이 사교육^^; 방문교사가 오는 경우, 음미체 학원 가는 경우 다양하다. 

 

초등. 정규 수업만 하면 4교시(약 1시), 5교시(약 2시)쯤 끝난다. 방과후 하나 해도 여기에 1시간 덧붙이면 된다. 이후의 시간, 뭘 하나? 워킹맘이라면 돌봄도 보내겠지만, 전업맘도 똑같다, 학원 보낸다. 집에서 놀면 뭐하나. 차라리 학원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각종 기능(음미체)도 배워라. 혹시 이 쪽을 전공으로 해주려고 해도 재능은 어릴 때 발견, 발굴되어야 하니까. 영어 학원을 계속 다니는 아이도 있다. 초등 2-3. 학원은 계속 가되 학원의 종류가 바뀐다. 음미체에서 학습쪽이다. 국어(논술), 수학(사고력), 영어가 압도적이다. <튼*영어>를 비롯, 국어, 수학 심지어 패키지로  방문교사 시스템도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와서 아이의 진도를 체크한다.(-고 한다.)

 

자, 이거 왜 하는가. 음, 내 생각에 가장 큰 이유는....

 

엄마가 귀찮아서다..ㅠ.ㅠ^^;;

 

 

 

 

 

 

 

 

 

 

 

 

 

 

아이한테 요 정도 문제지를 풀리는데, 채점하기가 귀찮다. 아주 귀찮다. 내숭 떨지 않고 썼지만 나는 공부를 잘 했고 지금도 인간의 여러 활동 중 공부를 그나마 제일 좋아하고 잘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아주 죽을 맛이다! 수준이 점점 높아져서, 답안지를 안 보면 나도 아리송한 문제가 많다. 수학은 풀이과정 쓰기가 많은데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워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어렵다. 국어는 더 하다. 각종 범주, 분류 등에 대한 설명 역시 그대로 써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도 공부를 해야 한다. 적어도, 아이가 읽는 지문과 문제와 선택지(다섯개나 ㅠㅠ) 다 읽고 답을 체크해야 한다. 나도 틀린다. 답안을 본다. 아, 너무 귀찮다 ㅠㅠ 차라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_-;;

 

날도 더운데 이렇게 성가신 일을 하다 보면 당연히 아이에게 짜증을 낸다. 아이가 맞힌 다섯 문제는 안 보고 틀린 한 문제(보통은 더 많다!)에 집중해서 아이를 야단친다. 실은, 야단 맞을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나, 엄마인데, 고생하는 아이가 다 뒤집어쓴다. 이런 경우, 학원/과외를 하면?? 돈을 내는 대신, 학원/과외 선생이 다 해준다. 쌩유~ 대신 엄마는 이들을 관리(?)하면 된다. 내 돈 쓰면서 사람 관리하는 건 쉬운가. 소위 강남 열성맘들에게 한 점 아이러니 없는 찬사와 박수를!^^;;  

 

나의 경우,

아직은 내가 해보려고 한다. 학습지 푸는 건 오히려 쉽다.  독서와 작문이 제일 큰 문제다.

 

무릇 진정한 읽기는 쓰기를 통해 완성되거니와(by 보르헤스^^;;), 문자 그대로 쓰지는 않아도 제대로 읽었는지는,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질의응답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이 고급한 작업을 나는,  남들이 보면, 정말 잘 할 수 있는 엄마이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아이와 양질의 대화를 얼마만큼이나 나누느냔 말이다! 그게 쉽지 않아, 논술 교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일반 아이들도 일단은 개인 논술(독해), 그다음 네다섯명 소그룹 논술로 가는 모양이다. 우리 아이는 아마 그룹 논술은 못 가거나 가더라도 한참 뒤에야 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작문. 아이가 죽도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삼일에 한번씩은 꼭 시킨다. 작문을 하면, 즉 일기나 독후감(혹은 뽀로로 시청 후기)을 쓰면 국어 문제집 풀이를 건너뛴다. "원래 글쓰는 게 제일 힘든 거야, 그래서 다른 건 안 해도 돼~"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글을 쓰려면, 가령 일기를 쓰려면,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김질 해야하고(기억력) 말로 써야 하고(언어 능력, 한글쓰기, 즉 받아쓰기, 띄워쓰기, 문장 부호, 심지어 운필력 등) 구성과 체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날짜, 제목, 있었던 일 - 사실, 자신의 생각과 느낌 등 정리.)

 

 

 

 

 

 

 

 

 

 

 

 

 

 

 

이렇게 썼지만 원칙대로 막 잘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런 책이 팔리는 모양이다. 나도 읽고 싶다. 언젠가도 썼지만, 굳이 특정 책을 고집할 필요는/가 없다. 아이가 잡는 책, 아무거나 먼저 읽게,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해의 넓이와 깊이는 다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처럼 수준이 높지 않은 경우에는 끊어서 읽도록 한다. 두꺼운 책은 심지어 두 세 쪽만 읽어도 된다. 그 이야기나 대상에 흥미가 없을 경우에는 훑어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장기적으로, 정독과 통독은 둘 다 꼭 필요한 것이다. 정독으로 가기 위해, 정독할 텍스트를 고르기 위해서라도 통독, 속독은 필요하다.

 

다시 사교육.

아직은... 나도 할 수 있다,

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이의 머리통이 (속도는 늦지만) 계속 커질 때, 이 책읽기 역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과외 안 시킨다고 장담 못하겠다. 어쩌면 우리 아이의 경우, 특수교육학(초등/중등/고등, 다 있다)을 전공하는 대학생을 초빙(!)해야 할 수도 있다. 돈도 더 들 것이다. 치료실의 인지학습치료사보다 이쪽이 나을 것이다. 특수반이 있는 초등/중등으로 가서 특수교육을 받는다고 해도(현재는 일반 교육을 받지만),,, 이렇게 과외를 시키지 않을 수 없을 터.

 

결론이즉, 사교육에 의존하는 첫 번째 이유, 공교육 이후 혹은 바깥의 예습, 복습을 다른 양육자가 해줄 수 없어서, 혹은 해주기 싫어서,이다. 아이가 자율적으로? 앗, 좋지.

 

소녀 김연경은 그런 모범생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 정리하고 숙제부터 하고 콩나물 다듬고 쌀 앉혀 놓고 그런 다음 노는 모범생.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그렇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내 아이는 아직도 엄마가 "알림장! 수저! 영어책!" 언성을 높여야 어기적어기적, 가방 정리를 하는 슈퍼 띵돌이, 제곱근 띵돌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이들의 발달을 놓고 본다면, 가령 9세 중 50프로는 아이큐 두 자리에, 어떻든 아이는 아이다. 모든 아이는 다 놀기를 좋아한다, 공부는 싫다^^;

 

사교육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게 핵심인데,

 

빨리빨리

더 빨리, 더 빨리

최고로 빨리

 

방학을 맞이하여 아이 학교도 공사 중인데, 그 문구에도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공사를 마무리"라는 어구가 들어 있다. '안전'보다 '빨리'가 더 문제인 나라, 우리 나라다. 다른 나라는?? 사람 사는 데 비슷하긴 할 거다. 하지만, 우리 나라 같은 곳은 참 없다! 이웃나라 일본이 비슷하긴 할 거다. 하지만, 가령 내가 3년을 살았던 러시아의 경우, 정말 미치고 환장한다. 그곳은 모든 것이 '빨리'를 엿 먹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세월아 네월아 오월아~ 그럼에도 러시아는, 굳이 강조할 것도 없이, 대단한 문화선진국이다.

 

엄마로서 나 역시 '더 빨리'에 매여 있다. 나야말로 그렇다. 아이가 장애등급까지 있음에도 단원평가 시험지를 가져오면 묻는다. "백점 받은 친구도 있어? 재**이는(짝지) 몇 점이야?" 요컨대, 아이의 95점보다 더 중요한 건 등수이다. 상대평가! 65점 받아왔을 때도 똑같다. "혜**이는 몇 점이야? 너보다 못 한 친구도 있어?" 이렇게 물어보는 나의 옹졸함에서,,, "통시 치고 냄새 안 나는 데 없다고 안 카더나!" 라는 엄마의 심드렁한 한마디를 떠올린다. 65점을 받아도 딱히 좌절도 안 하고 반대로 95점을 받아도 딱히 뿌듯한 줄도 모르고, 이건 뭐냐. "원래 남자애들은 (남들 점수는 고사하고) 지 점수에도 아무 관심 없어, 빨리 놀려고~" 남편의 말이 정답. 하지만 이런 황금시대가 언제까지 갈 거냐.

 

그래서 다시 사교육.

나는 '거북이' 카페를 다니지만, 상위 1% 영재 카페도 왕년의 자갈치 시장 수준으로 북적댄다. 실제 그들이 모두 영재/수재? 이건 불가능하다. 왜냐면 말그대로 이건 퍼센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워너비-영재(엄마들)가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생이라는 전체 그림을 놓고 보면 이 영(수)재성은, 하나의 토대일 뿐인데(아, 물론 토대가 중요하지!) 부모 입장에서는 그럴 수록 아이의 가능성을 더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주고 싶을 것이다. 아주 속되지만,  애 키우는 엄마로서 무척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엄마는 범재, 즉 평민, 민간인인데 아이는 머리통이 수재, 영재다. 어쩌랴? 사교육밖에 답이 없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니 산파술이니 모두, 선생의 기능과 역할에 큰 비중을 둔다. 엄마는 못 해주니, 이 미래의 천재를, 돈을 붙여 선생한테 맡길 밖에. 학교 선생은 내 아이만을 위해줄 수 없으니 당연히 학원으로.

 

그리하여,

오마나, 대치동에는 초등 학원이 정말 있구나 ㅠㅠ

나는 아이의 발달이 늦어 이제야 알게(검색하게) 된 것이고,

그 동네(혹은 언저리) 살거나 아이의 발달이 정상, 혹은 그 이상인 경우 엄마들은 벌써 이리로 갔을 것이다. 아이를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큰 지표가 바로 선행학습이다. 이것도 경주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 race. 경주에서의 등수, 그 격차가 곧 '인종'을 결정한다, 헐. 쓰고 보니 정말 그렇다. racism의 노예들! 골품제도의 노예들! 우리 모두 잘해야 6두품인데 감히 성골, 진골에 끼려고! '성'이 아니라 '뼈'를 갈아야(갈아치워야) 할 판이다.

 

"얘는 2학년 문제 풀어요!"

작년 말쯤, 같이 그룹 체육 하는 남자아이의 엄마가 자랑한 말이다. 그 엄마는 그 아이 학교의 교사다. 아이는 지적 3급이다. 그 엄마가 허세 부리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또한 지적 3급도 학습이 된다는 건, 물론, 나도 안다. 문제는, 현장에 있는 사람일 수록(초등교사) 더더욱 선행학습에 목매는 이 현실이다.  정녕, 목매자, 목매달자꾸나, 목이 메인다 ㅠㅠ 초등 저학년(심지어 발달지체)이 이럴진대 중고교는? 지난 번 통화한 선배 역시. "이제 많이 따라 왔어, (중3인데) 고등학교 문제 풀어." 헐. "대학은 가야지, 안 가면 이상하게(들) 생각하니까." 화자의 비범함을, 소위 인문학적 소양을 익히 알기에, 더더욱 아빠로서 그의 '범속함'(banality!)에 감동한다!^^;;

 

*

 

다시 시간을 뒤로 돌려 고교 시절.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는 어떻게 했지? 다음 날 담당 선생님한테 여쭤 봤던 것 같다. 국어도 애매한 건 그랬던 듯한데, 큰 체구의 국어 선생님, 눈을 꿈벅꿈벅하더니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라고. 그러곤 교무실 가서 큰 사전을 같이 찾아본 기억이 있다. 무슨 문제였지? 아마 '일반적'과 '보편적', 이 어휘의 차이던가, 그런 것이었던 듯하다.(나는 집에 이런 국어사전도 없었다, 넘 가난했네, 정말 ㅠㅠ) 쭉 읽으신 다음 "이렇다고 돼 있네, 알겠제?"라고. 고3 원서 쓸 때는 따로 불러서 한 말씀해주셨다. "그 척박한 러시아 문학, 우리 나라에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거고, 그거 니가 하겠나? 차라리 국문과 가면 니 소설도 쓸 수 있고..." '워딩'은 다 잊었으나 그때의 분위기, 고마움 등은 생생하다. 그런 선생님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굳이 학원을 왜...ㅠ.ㅠ 혹은 학원 안/못 가고 학교에, 학교 선생님들한테 목매는 나 같은 학생 때문에 더더욱, 선생님들도 가르칠 맛이 나지 않았겠나.

 

왜냐면, 내가 선생이 되어 보니....

선생은 '먼저' 가고 있다 뿐이지, 결코 더 잘/많이, 의 개념은 아니다. '후생가외'라는 말이 정답이다. 공부 많이 하고 질문하는 학생이 무섭고 고맙다. 이런 자극에 무뎌질까봐, 선생으로선, 그게 참 무섭다. 지금도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 느껴져서 말이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 바로 옆에 어느덧 나랑 키 차이가 20센티미터 밖에 나지 않는 아이가 있다. "나는 그저, 내 아들이 내 선생이다, 생각하고 살아요~" 그 엄마도 선생이다. 아홉살 아이, 네가 나의 선생이다, 에효.

 

그 다음, 아이에게는

제발 좀 쉴 자유를, 멍때릴 자유를!

 

 

 

 

 

 

 

 

 

 

 

 

 

 

 

작년 봄, 오후 풍경, 집에 가는 길.

 

- "알림장 가져왔어?"

- "응, 내가 딱 챙겼어!"

- "그럼 학습장은?"

눈을 꿈벅꿈벅, 생각하다가 의구심에 차서 엄마를 올려다 보며

- "엄마, 학습장도 가져와야 해?"

- "아이구, 내가 너 땜에 도 닦는다, 아주!"

옆에 지나간 아줌마-할머니가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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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9-08-1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을 키우며 진정한 나를(부정적인 의미에서) 알아가는 중입니다. 자꾸 저도 나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게 되고 애를 잡게 되네요. 자식 교육에서만큼 인간의 비교의식, 질투가 드러나는 부분도 없는 것 같아요. 너무 공감가는 글이에요.

푸른괭이 2019-08-14 20:29   좋아요 0 | URL
하위 그룹에서는 그 안에서 또 경쟁해요 ㅋㅋ 우리 아이반도 약간 학습부진(제가 보기엔 경계, 평균하 그룹) 아이 엄마들은 자기 아이한테, 우리 아이는 몇 점 받았는지, 구구단은 외우는지 물어봐요 ㅋㅋ
심지어 특수 아동들 그룹 수업에서도 그 안에 서열(?!)이 있어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더라고요 ㅋㅋ
위에 문유석 판사도, 결국에는 아이를 대치동 학원으로 실어나르게 되더라고 솔직히 썼더라고요. 우아하려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배도 고프고 내친 김에 계속 논다.

오늘부터 공부(!)를 해보려고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거의 20여년만인데, 놀라워라, 한때 몰입하여 잊었던 번역이 지금은 서걱거린다. 왜지? 오디세우스를 논하는 첫 장, '손' '나그네' 이런 표현이 굉장히 옛스럽다. 그렇게 느껴진다. 역자가 누구?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던 김우창, 유종호. 과거 시제를 붙이기도 죄송한 것이 두 분은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시고, 유종호의 최근 에세이는 내가 여기에 링크를 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들의 번역조차도!

 

 

 

 

 

 

 

 

 

 

 

 

 

 

(아시겠지만, 김민형은 김우창의 아들이다.)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맨 마지막 표지에 실린 글대로, 번역은 세대/시대가 바뀌면 새로 해야 한다, 라는 의견에 나는 전격 동의한다. 간혹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

 

- 아니, 원전은 그대로인데 번역은 바뀌어야 한다?

 

세상에!!! 번역은, 아무리 좋은 것도, 원전을 대신할 수 없다.

번역은 감히 원전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이 점을 모르는 번역가는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번역가로서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의 심판을 넘어 살아 남는 것은 원전이지 결코 번역이 아니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도-키의 <죄와 벌>은 불멸이라도 내 번역은 한시적인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이 여러 편의상 내 번역을 읽을 뿐이다. 혹은 내 번역을 통해, 건너 도-키의 <죄와벌>로 간다. 요컨대, 다리 같은 것이다. 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마모되고 교체해야 한다. 번역의 명줄은 아무리 길어도 한 2-30년이 아닐까 한다. 내가 내 스승의 번역들을 먹고 자랐듯, 나의 후학 역시 내 번역을 먹고 자라 훗날에는, 미래의 독자의 언어 감수성에 맞는 번역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 신간의 초역이 아니라, 기존 번역이 있는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이전 번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후진(!) 것이라도 그것에 빚을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 후진 번역을 봤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빚이다. 이 점에서 <잃어버린...>의 옛 번역에 감사를, 사의를 표한 김희영 선생은, 그 태도에 있어서도 참 훌륭한 번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예전에 불문과 전공 수업에서(불문과 대학원을 갈 생각이 좀 있었다) 한 선생이 '거의 웬 듣보잡이 이런 소설을 번역했다' 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였다. 아무리 후진 수준이라도(이 번역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정도의 번역에 손을 댈 정도면 '듣보잡'은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 발가락 담그고 있는 많은 '박사-교수' 중에 이런 편견이 많아, 안쓰럽다.  

 

 

 

 

 

 

 

 

 

 

 

 

 

 

 

 

<미메시스>를 이제 막 읽기 시작하여 뒷부분을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오래 전 <이데아총서>에 들어 있던(우리가 이 시리즈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사라져서 슬펐다, 옛 애인의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것을 표지만 바꾼 모양이다. 앞에서 서문 하나 새로 단 정도? 덕분에, 서문-머리말이 세 편이고 내용이 겹친다, 슬프다. 이론서, 학술서는 엄정함이 생명인데. 편집자도 간과한 것인지, 혹은 (필경 젊은) 편집자의 조언을 우리의 스승- 대가들이 고사한 것인지. 이것과는 별개로,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나이가 들면 귀가 먼다, 참 슬픈 일이다. 귀가 '순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다'. 순해지는 것이 머는 것인가? 눈도 먼다. 자연의 이치니 어쩔 수 없다.

 

나야 이미 중년이어서 이 번역이 여전히 읽히지만, 더 젊은 층에서 독자를 만들려면, 아이들 무식하다고 욕하지 말고(이거야말로 제 얼굴에 침 뱉기^^;) 새 번역이 슬슬 나와주면 좋겠다.  음, 그러는 너는 왜 니 번역을 안 하고 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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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도스-키 전공자로서, 또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의 번역자로서, 우리 사회의 일련의 범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악령>의 마지막(별첨^^;), <스타브로긴의 고백>에서 티혼(치혼)은 스타브로긴에게 '아름답지 못한 것'(추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범죄 중에도 유독, 심히 추한 것이 있다는 것. 일반적인 표현으론 '죄질이 나쁘다/불량하다' 정도. 스타브로긴의 범죄 중  마트료샤 사건(미성년자 강간, 자살 방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면, 미적 등급이 높은(?), 정상 참작이 가능한 범죄는 어떤 것일까.

 

우선은 생계형 범죄 아닐까 싶다. 배가 고파 죽겠어서 빵 하나, 은촛대 하나 훔치는 식의 범죄. 요즘은 사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범죄다... 라고 생각하지만, '생리대' 광고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것이지, 지구촌의 누군가, 심지어 한반도의 누군가는 여전히 가난하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참 무심하다. 혹은,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담보해~' 이런 식이다. 이건 인간의 본성인지라(측은지심의 대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가, 사회의 제도적인 개입이 들어가야 마땅하다. 다만, 때 아닌 '감성팔이'를 하는 경우가 있어 속상하기도 하다. 가난한 자들, 괜히 더 비굴해지지 말라. 나와 나의 형제자매, 나의 부모 역시 그토록 가난했지만(지금도 그런가?) 그렇더라도 비굴하지는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리고 내 가난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면 사회보장제도 꼼꼼이 따져서 인간으로서 최소치의 존엄은 지킬 수 있다. 

 

그 다음은 미필적 고의, 부작위의 죄 같은 것. sins of ommission. 즉, 뭘 해서(작위 commission)가 아니라 뭘 안 해서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게 형사적으로 처벌되는 경우는 드물 터이다. 저 사람 구하려다가 내가 죽을 것 같아 아무것도 안 하거나 도망친 사람을 잡아다가 족칠 수는 없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애매한 경우도 있을 법하다. 가령, 주차장에서 꼬맹이들 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교통사고 같은 것. 운전대를 잡아본(헐, 뜨끔! - 운전하지 않는, 운전면허소지자^^;) 사람으로서, 아무리 교통 법규를 잘 지켜도, 즉 서행하면서 전방주시 해도 코너에서 확 튀어나오는 서너살 꼬맹이를 안 칠 도리는 없다. 한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애는 한 순간이에요, 애기 엄마!" 이 말의 무서움 또한 잘 한다. 엄마의 방심이 큰 죄이긴 하지만, 24시간 일년 열두달 아이를 보다 보면 아차, 하는 일이 상당히 자주 있다. '십년감수'라는 말이 실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죄는 있고 죄인은 없는 참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한밤중에 고추 광주리 머리에 이고 고속도로를 건너는 할머니, 인지 기능이 아이처럼 퇴화된 상태에서 차 몰고 나가 고속도로에서 역주행하는 할아버지, 대책 없이 집을 나갔거나 길을 잃은 발달장애 성인들(조은**양의 기적은, 비가 와준 덕분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조용했기에, 운동능력이 낮은 저각성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등. 

 

그 다음은, 흉악, 극악 범죄라도 너무 양해, 이해되는 안타까운 경우. 가령 노모(노부)가 심한 장애를 앓는 성인 아들/딸을 죽인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 같은 것. 다들 혀를 내두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극히 공감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병이나 다름없는, 심지어 그보다 더 한 치매 관련 범죄도 비슷하다. 조금 '마일드'하게는 요즘 연예인들 사이에 나타나는 '빚투' 정도. 설마 가족이? 가족끼리 어떻게 저런 일이? 아니다, 가족이기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다. 조금만 싸납게 했다가는, 니가 부모를 버려? 형제 자매를 버려? 이런 화살이 무서워 자꾸 퍼주다 보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도중에 터져 줘야 그나마 종기-고름 수준에서 멈춘다. 자꾸 가면, 더 극악한 양상의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카라마조프>의 소재-주제가  '아비 죽이기'라는 점은 그래서, 항상 의미심장하다. 스메르쟈코프를 용의선상에 넣고(정확히는 미끼로) 예심판사가 드미트리를 슬쩍 떠본다. 드미트리 왈: "에이, 설마요, 걔는 우리 아버지 아들일 수도 있는 걸요, 소문 들으셨죠?" 대략 이런 식의 말. '아들은 결코 아비를 죽이지 않는다'라는 법칙은, 드미트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는 착하니까, 아비를 죽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반은 다르다. '아들은(도) 아비를 죽일 수 있다'라는 것.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가에 따르면, 드미트리가 아니라 이반이 죄인이다.

 

*

 

자, 다시 반대로, 정녕 '추한' 범죄는 뭐가 있을까. 거론하기도 싫은 각종 범죄들이 있다. 성범죄는 거의 항상 그리 취급되고 그래야 마땅하다. 특이 소아 상대, 또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등. 그런데 최근 들어 '미추'의 범주를 초월하는, 뭐랄까, 굉장히 선진화된, 선진국형 미학적 범죄랄까, 21세기, 심지어 22세기형 범죄랄까, 이런 것이 보인다. 2년전 인천초등생 사건이 그렇고, 얼마전 제주고 고유* 사건이 그렇다.

 

 현재 가장 핫/힙한 고유* 사건의 핵심은, 피의자가 넘나 평범, 평범 이상의 평범이라는 데 있다. 일단 예쁘다. 그것도 눈 돌아갈 미인도 아니고, 정녕 평범 수준의 예쁨이다. 자그마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애교부리기 좋아하고 아마 친구나 연인 관계도 원만했을 법하다. 평범-예쁨 수준의 짜증, 토라짐 등. 아이에게는 어떤 엄마였을까. 크게 차별되지 않았을 법하다. 모든 엄마처럼 아이 예뻐하고 잔소리도 하고 간혹 자기 히스테리도 부리고 그래도 아이 예뻐하고 등등. 그랬기에 소위 뒤통수 치기도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대학원 시절, '초롱초롱빛나리' 사건에 너무 놀란 적이 있다. 이 경우도 범인이 (아마 만삭의?) 임신부였다는 점이 우리를 경악케 했다. 소설에도 쓴 기억이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익히 알면서도 우리는 항상 뒤통수를 맞는다. 혹은 그런 척 으악~ 하고 경악한다. 혹은 경악하는 척 한다. 풀어헤친 머리를 걷어올린 후 나온 그녀의 얼굴은, 여자들이라면 어지간히들 동의하겠지만, 예쁘장한 편이었다. 이후 공개된 그녀의 평상시 사진은 그점을 확증해준다.  그녀는 이토록 '평범'(banal)한 존재인데, 그녀가 이룩한(!) 악은 좋다/나쁘다, 를 떠나 무척 기괴하다. 그로테스크, 라는 말이 딱 맞는다.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살인까지야 그렇다 쳐도 그 다음의 처리 장면은 과연 엽기지만, B급(^^;;) 장르 소설이나 영화에 능한 자라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특히 요리사, 혹은 요리를 담당하는 여자-아줌마의 경우에 죽은 동물 식재료 다듬기 만큼 일상적인 일은 없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낚시를 좋아하셔서, 시어머니는 살아있는 각종 물고기는 물론 심지어 살아 있는 닭도 능숙하게 '처리/처분'하신다. 쓰다 보니 왕룽 일가의 젊은 여자(오란??)가 막 자른 소의 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소설, 요즘 왜 안 읽지?)

 

시골의 여자아이로서 나는 여자어른들이 이렇게 살생하는 것을, 적어도 살생된 것을 처리하는 것을 곧잘 보아왔다. 내장을 상처 내지 않고 분리해내기, 살 별로(?) 가르기, 그거 정리하기, 생선의 경우 배 가르고 내장 빼고 토막 치기, 조개 산 채로 껍질 갈라 꺼내기 등등. 살육의 향연, 홀로코스트다. 말로만 들은 개잡기는, 정말이지. -_-;  "아빠도 내가 키운 돼지나 소는 못 먹겠더라." 그러는 님은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라) 농부?? 글쎄다.  쓰다 보니 이건 육식의 문제와도, 최근의 화두와 연결시키면 '개고기' 문제와도 연결되는 듯하니 패스.

 

다시 고유*로 가면, 이름도 참 예쁘고 참한 그녀에겐 또 다른 평범한 취미가 있다. 사진 찍기, 기록하기, 물건 보관하기. 이 역시 여자들이 넘나 즐기는 취미다. 남친과 주고받은 편지, 어릴 적 사진, 머리카락 등등. 사진 찍기, 블로그나 트윗,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나 같으면 이런 데다 글쓰기, 심지어 가공하고 소설로 쓰기 등. 그녀의 취미가 드러나는 방식이 넘나 평범하고 속돼서 또다시 banality라는 낱말을 떠올린다. 예쁘게 닫은 지퍼백에 속에 든 팥과 소금! 이 정겨움이란, 또한 전통적인 미신스러움이란! 그녀는 여러 모로, 친구 하고 싶고 (아마 남자라면) 한 번쯤 차라도, 산책이라도 같이 하고 싶은 그런 소녀/아가씨/아줌마(아이엄마)였을 법하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소꼬리뼈를 통째로 사와 다듬어 곰국 끓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돼지등뼈로 김치찜을 한 적이 있는데(나도 한 때는 엄청 노력했다오!!!) 뼈와 고기가 같이 들어가는 건 정말이지 넘나 힘들다. 핏물 빼고 삶고 물 버리고 장시간 고우(으?)고 곰국의 경우는 기름도 걷어내야 하고 여기에 채소나 다른 식재료도 함께 넣자면, 손은 두 배, 세 배 간다. 비슷하게 힘든 것이 육개장, 닭개장이다. 고기는 고기대로 삶아서 바르고 채소는 채소대로 준비한한 다음 끓여야하고, 소위 '깊은 맛'을 위해서는 각종 재료를 넣은 육수가 필요하다. 간은 반드시, 주로 국간장이 들어가야 한다. 역시나 '깊은 맛'을 위해서다.

 

 

 

 

 

 

 

 

 

 

 

 

 

(바흐틴/친이 그로테스크 얘기하면서 연구한 라블레의 소설.)  

 

이야기가 왜 이리로 왔나. 그만큼 그녀의 범죄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는 서로 다른, 반대되는 범주가 뒤섞일 때 발생하는 미적 충격이다. 여기서 섞인 범주는 (아름다운 것/추한 것, 높은 것/낮은 것, 죽은 것/산 것 등등) 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어린 아이의 엄마라는 점이, (많은 경우 '엄마'이기에 저질러지는 살육, 살생도 많지만! 왜냐면 엄마는 못 할 짓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무엇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처음에는 사람을 저렇게 잔인하게(이 단어도 별로 들어맞지 않다고 생각될 만큼 그로테스크하다) '처리/처분'하도록 만든 분노의 근원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이 물음 자체도 성립될 것 같지 않은 것이, 다시금, 너무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분노, 증오, 이런 건 일반적인 단어다. 이런 것에 의한 범죄는 그래도, 상식(?)에 들어갈 법하다. 심지어 각종 혐오범죄도, 물론 아주 극악하지만, 또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건 뭐지. 너무 그로테스크하여 여전히 혼란스럽다. 도스-키라면, 해답은 못 내도 놀라운 걸작은 써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저런 소설들이기도 하다.  

 

아무튼 저 범죄의 미적 등급을 매기자면.... 아무래도 ...

등급외,

밖에 안 될 것 같다.

 

 

*

 

논문 수정하기가 싫어서 너무 놀았다. 이러고도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엄마, 내가 생각해도 토나온다. 아이의 할머니에게, 강남 8학군 최선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 변두리의 아이 셋 맘이었던 그녀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는 별로 안 보냈어, 별로 안 시켰어~" 하지만 들어보면 이런 학원 저런 학원 이런 과외 선생 저런 선생.  결론이즉.

 

- "다 소용 없고, 제일 중요한 건..."

 

아이들의 건강이야, 가족의 행복이야, 혹은 어차피 소용 없으니 아이의 뜻을 존중해야~

 

이럴 줄 알았는데....

 

- "수학과 영어다~!"

 

헐 ^^; 역시 님은 최고의 맘인 것이다... 내숭 떨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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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9-08-1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알라딘에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계신 줄 몰랐네요. 세상에 도끼 번역가님이라니... 선생님이 번역하신 까라마조프 제 서재에 잘 모셔져 있답니다. 도 선생을 워낙 좋아해서 각 출판사에서 나온 도 선생 저작들을 사 모았거든요.
정말 영광입니다. 자주 봬요. 좋은 글 참 잘 읽고 갑니다 ^^

푸른괭이 2019-08-12 13:49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는 업계종사자 많습니다. 저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오늘 너무 놀아서 이제부터 일하려고요^^; 아이한테는 한자 쓰라고 해놓고 엄마는 댓글 답니다 -_-;;

라스콜 2019-08-1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김연경 작가님!! 제가 이 책으로(때문에) 도끼님한테 빠져서 지금 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푸른괭이 2019-08-16 09:51   좋아요 1 | URL
흠, 올 여름에는 제 책도 나오는데요^^;; 제가 지금 호가호위하며 사네요 -_-;;

라스콜 2019-08-1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이제 작가님 책에 빠질 준비를 해야 되겠네요. 기대 하겠습니다.답글 감사드립니다.
 

 

주말즈음인가, 아주 흥미로운 블로그-서재를 발견해서 밤마다 들어간다. (자기 사진도 더러 올라오는데, 자신에 대한 미학화 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과도 비슷할까.) 옛날 글도 막 뒤져 읽다가, 어제도 아주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일일일식'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키가 148밖에 되지 않는 나는, 많이 먹지 않는다, 많이 먹어서도 안 된다. 이 키에 52킬로 나갔던 이력이 있다. 중고 시절인데, 그건 정말 최악이고 대략 48킬로 정도 나갔다.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배가 불러 터질  때까지 먹고(특히 먹기 간편한 빵, 사발면, 과자 같은 거)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책 읽고 공부하고(책 보면서 또 먹는다) 이동은 오직 학교 - 집(기숙사), 그러면 된다. 대학 4년인가를 기점으로 체중이 조금씩 줄었는데, 아마 연애와 담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보다 양질의 음식을 연인과 함께 먹고 사랑하고 산책 하고 그리고 담배를 배웠다. 학령기가 끝난 서른살, 나는 누가 봐도 말라깽이였다. 40킬로를 넘긴 적이 없다. 흡연, 특히 줄담배는 권장할 것이 아니지만, 소식은 무척 권장할 일이다. 고 박완서 역시, 위가 아픈 자, 약을 먹지 말고 음식을 줄이라, 라는 식의 충고를 한 바 있다.  

 

아, 그런데 일일일식이라. 말 그대로 하루에 한 끼만 먹나? 궁금해서 좀 찾아보니 '간헐적 단식' 비슷하게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다이어트의 한 방식인가 보다. 내 입장에서 소식은 그저 생활이다. 아이 낳고 살이 좀 불어 41-42킬로를 유지하는데(아프면 좀 더 빠지고), 여기에는 나잇살도 있겠지만 육아가 우리 아이엄마에게 요구하는 체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모유 수유 기간에는 젖을 만들기 위해(!) 곰국 같은 것도 퍼마신다. 나는 모유가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더 좋은 젖을 만들기 위해(써놓고 보니 왜 그랬지??) 반쯤 억지로 영양식을 먹는 것이다. 삶에서는 어떤가. 말마따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골고루'를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왔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밥상', 덧붙여 '시골밥상'에 익숙한 나는 물론, 그렇게 먹고 자랐다. 단백질(고기)이 턱 없이 부족했지만, 생선이나 두부가 많았던 밥상을 생각하면 그리 불균형은 아니었을 터. 그래도 절대적으로 각종 채소류, 과일(아버지는 과일 도매상이었다)을 많이 먹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처음 시댁의 밥상을 보고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상다리 부러진다'는 말의 실현이었다. 음식의 종류, 양이 너무 많았다. (시)아버지도 대식가, 아들만 셋. 이해 된다. (시)어머니도 어느 순간에는 대식가가 된다. 게다가 워낙에 요리를 잘 하시니, 그냥 먹다가도 과식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걸 먹고 나면, 후식 내지는 간식이 나온다. 옥수수 찌고 껍질콩 삶고 등등. 그러고 한 두시간이면 다음 끼니다. 헉. 뱃속에 음식이 덩그러니 들어있는데, 더 먹으라고?? 명절의 전부치기. 오죽하면, 부치는 건 할게요, 제발 다 먹으라곤 하지 마세요 ㅠㅠ 밥만 먹게 해주세요, 떡국까지는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식사만 할 게요, 간식은 정말 못 먹어요 ㅠㅠ 한번은 이상한 돌게(??)인가를 주문하셔서 먹으라고, 정말 못 먹겠어요 ㅠㅠ 그랬더니 "니가 너무 불쌍해서 하는 소리다, 이 귀한 걸 왜 안 먹니!" 진정한 '식고문'이다.

 

나야 그들 입장에서 남이지만, 손자는 다르다. "니가(니들이) 조금 먹는다고 애(들) 그리 주면 안 된다!"  그렇다. 자라는 아이들은 골고루, 많이 먹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마다 소화력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몸에 맞고 안 맞는 음식이 다 다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 입안에 처넣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학교 급식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집에서만이라도 '안 먹을 자유'를 달라.

 

아이의 식성은 남다르다. 그렇다고 자폐성 기질의 아이처럼 편향적인 건 아니고, 이건 거의 전적으로 엄마 닮은 것 같은데, 나물류, 채소류, 과일류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먹인 탓에 고기도 먹을 줄 안다. '-줄 안다'라고 쓴 건,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라는 말을 절감하는 탓이다. 나는 지금도 소고기와 날생선(회, 스시)을 잘 못 먹는다. 반면, 아이는 이런 것도 어지간히 잘 먹는다. 사탕, 초콜릿, 젤리, 아이스크림 이런 유의 군거짓거리도 별로 즐기지 않는다. 놀라운 건 계란을 안 먹는다. 왜? 알레르기? 그것도 아니다. 계란의 형체를 없애고 요리하면 먹는데, 계란 모양이 살아 있으면 안 먹는다. 뭥미?

 

아마 내가 장어를 곧 죽어도 안 먹는 것과 같을 터. 왜 안먹냐고?? 장어는 너무 징그럽게 생겼다!!! 썰어놓으면 안 보인다고? 상상이 되어서 싫다. 그럼 문어, 낙지, 오징어는? 심지어 해삼, 멍게는? 그건 또 먹는다. 내 맘이다! 게다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 주는 이런 유의 편식은 굳이 억압받을 게 아니다. 아, 보는 사람 눈에 재수 없다고? 그렇긴 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회식을 무척 싫어하고, 회식할 때는 아주 편한 자리가 아니면(그런 자리면 회식이 아니지) 밥을 잘 안/못 먹는다. 그때 많이 먹으면 백프로 집에 와서 토한다. 같은 이유로, 혼밥을 무척 즐긴다. 남의 눈에 처량해보일 테지만, 나는 지복의 순간. 젓가락질도 잘 못하고 많이 묻히고 흘리고(그래서 냅킨이 잔뜩 쌓이고) 무엇보다도 편식에 소식에, 먹는 속도도 무척 느리다. 이걸 맞춰 줄 사람은 애인-남편밖에 없다. 흠, 그런데, 아이는 지금 엄마보다 더 한 것이다 -_-;;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나의 식생활에 반성 아닌 반성을 할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골고루 줘야 하는데, 꼬박꼬박 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간식까지 하루 다섯끼는 먹어야 한다는데 등등. 하지만 나는 사실상 1식 1찬, 그 다음 과일, 이렇게 먹인다, 넘 귀찮아서 -_-;; 1찬은 너무 하고 가끔 뭘 덧붙일 때도 있다. 밥과 빵을 같이 줄 때도 있다. 오직 식판의 칸을 채우기 위해서다.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사와서 속만 삭 발라, '샐러드야~' 이러고 줄 때도 있다. 어쩌랴, 요리는 정말 넘 싫은 것을. 그런데 굳이 '다양'할 필요가 없음을, '골고루'가 능사가 아님을 주장하는 글을 보고서 나름의 희망을(?!) 얻는다. 비단 음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목을 매는 독서, 내 입장에서는 글쓰기도 그렇다. 출처 밝히고 한 번 긁어와본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https://blog.aladin.co.kr/myperu/10569752)

 

 

먹는 것,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절실한 것이 읽고 쓰는 것이다. 나는 발자크보다 더한 속물이지만, 게다가 아이 엄마로서도 결코 극성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높은 것'에 대한 지향(^^;)이 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읽고 쓰느냐, 방법론인데, 이제 와서 내가 나를 바꿀 수 없다.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기와 쓰기 역시 기존의 방식을 취하되 보다 더 현실적인 길을 찾아봐야 한다. 새로 나올 책에 다루는 책이 몇 십권이다. 이런 식의 읽기 대신, '덜-골고루'로 가려고 한다. 내 몸에, 마음에 맞는 음식-책을 꼭꼭 씹어서 열심히 먹으려고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이다, 한 권 읽는 데. 소위 '돌려막기' 독서를 하지 않으련다.  그 다음.

 

소설가로서 내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경험의 부족이다. 과연, 그럼, 경험 많은 니들은 나보다 잘 쓰냐?? 니들의 경험은 과연 그토록 유의미한 것이냐?? 많은 경험으로 더 잘 썼던 자들이 있다. 우리가 손쉽게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 개인의 경험이 사회, 국가의 보편적 경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 무엇보다도, 작품이 좋았던 덕분이리라. 이 점에서 '미메시스'는 우리가 여전히 숭상해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미메시스'(모방, 재현)가 그 대상으로 삼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결코 단답일 수 있다, 주관식, 서술형, 논술이어야 한다. 

 

 

 

 

 

 

 

 

 

 

 

 

 

 

 

 

조이스는 일찌감치 더블린(아일랜드)을 떠났으나, 그의 문학 속 공간은 항상(어쩌면 유일?) 그곳이다. 그가 문학화한 경험은 극히 '편식', 심지어 '일식'에 '일찬'이라고 할만하다. 모더니즘의 특징일까? 프루스트도 많이 다니지 않는다. 많은 사람을 만나나? 그래본들 가족과 몇몇 벗, 연인(레오니 할매, 프랑수와즈 하녀, 부모, / 첫사랑 질베르트, 그녀의 부모 스완과 오데트 / 그 다음 참사랑 알베르틴, 그 주변 사람들, 블로크, 예술가들 등등)에 한정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선 지극히 개인적인 시공간, 그런 체험이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으로 거듭난다. 소설가는 오지를 떠도는 여행가가 아니다!!! 헤밍웨이 같은 소설도 있지만, 다 그런 모험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쓸 수도 없거니와.

 

 

 

 

 

 

 

 

 

 

 

 

 

 

 

이제 막 한숨 돌린 나의 장편을 보니, 사람도 많고 에피소드도 많다. 아주 시끌벅적하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자의식 충만한(그런가?) 내 소설과 아주 차별되나? 그런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웃기지만, 내가 뭘 쓰는지도 모르고 쓰는 거다. 뭘 쓰는지 알면 잘 안 써진다. 막 써놓고 다시 보면 뭘 썼는지 보여서 초난감하다. 어쩌지? 일단은 막간의 여유를 누리고 나중에 가서 생각하자. 이런 식으로, 논문 쓰는 자, 즉 학자-평론가 모드로 돌아가면, 나는 아주 오만하게 거들먹거릴 수 있다. 심지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씹고 있다. 썩 괜찮은 비평서-연구서를 내고 싶은 욕심이 여전히 있지만, 내 나이와 내 능력을 응시하면, 너무 아뜩하다. 

 

그래도 기죽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아, 내가 머리카락이 여기 좀 많이 안 났니? 내 생각에는 얼굴에 침을 맞고 잔대 달인 물을 꾸준히 먹고..." 님의 그 낙관주의와 신심이 님의 머리카락을 돋게 하리라...^^;; 또한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머리카락이 나든 말든, 배가 나오든 말든 거의 '달관'의 포즈다. 불충한 며느리(들)를 꾸짖지 않고 감싸안음으로써 덕/득 보는 건 며느리(들)이 아니라 결국 시어머니다. 그녀는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우월하다. 

 

*

 

다시, 아이의 식단. 일일일식, 일일일찬까지는 아니지만 더 '골고루' 해 줄 여력이 없다. 그래도 나는 편의점 표 도시락을 주는 엄마는 아니다 -_-;; 과거에도 '본죽'표 이유식 대신 엄마표 이유식을 만들었다. '마음의 양식'은 어떡할 것인가.

 

 

 

 

 

 

 

 

 

 

 

 

 

 

 

"오늘은 할머니 집에서 문어를 먹었으니까 <문어>책을 보자."

유치원생들 보는 수준이지만(프뢰벨 과학책 -_-;;) 초등에게도 그리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아이와 같이 읽는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문어는 '알'에서 '아기 문어'가 되는데 2개월이 걸린다. 많나, 적나? 오징어는 겨우 5일이 걸린다! 즉, 한 마리의 문어가 태어나는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함은, 응당, 개체수도 적다는 것이고, 살아남은 놈들의 수명도 길다는 거다. (인간이라는 종을 생각하면 된다.) '문어'의 '문'자는 '글월 문'이라고 한다. 헐, 똑똑한 물고기^^;; 저 비싼 연체류는 제사상에만 올라왔던 것인데, 그래서 나는 문어보다 오징어를 더 좋아하거나 더 쉽게 먹는다. 물론, 아이는 그 무렵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으니 문어, 주꾸미, 낙지(얘네들 다 문어과, 라고 한다), 오징어, 갑오징어, 한치 등 모든 연체류를 다 섭렵하고 있다. 아이도 문어와 오징어 이야기를 재미있어 한다. 혹은 그런 척 한다. 그래야만, 아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_-;;

 

강화제 없는 독서-공부가 가능한가.

남들의 눈에는 소위 '공신/책신'에 가까운 나에게 먼저 물어보자.

아니다. 단 5분을 쉴 지라도, 강화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지금도 '강화제' 맞고 있는 중?)

하물며 아이(들)의 경우에는, 물론.

 

*

 

- "엄마, 그런데 나는 장애인이야?"

(아마 어제 할아버지가 자기 어릴 적 친구 '장애인' 얘기를 한 탓인듯 한데, 그는 자신의 아내와는 참 정반대의 캐릭터라, 이 대조가 놀라울 따름이다.)

- "왜 물어? 니 생각은 어떤데? 니가 장애인인 것 같아?"

- "음, 엄마 생각은 어떤데? 엄마 생각에는 내가 장애인이야?"

아, '진격의 거인'이 아니라 '반격의 거인'!^^;;

엄마가 너를 감동시킬 멋진 (음식은 안 되겠고) 논리-답변을 만들어주마! 하고 다짐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엄마-나도 니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붙는 아이인지 어떤지 잘 모르니까. 요즘은 더더욱. 너는 그냥 나의 아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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