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가장 주목한 신간은 지성사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치유의 역사학으로>(푸른역사, 2008)이지만 아직 별다른 리뷰가 뜨지 않고 있다. 해서 대신에 리좀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들뢰즈와 시간의 세 가지 종합>(그린비, 2008)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만한 책이지만 뜻밖에도 북리뷰의 메인도서로 다루어졌다. 독특하게도 프로이트를 통하여 들뢰즈의 시간론을 검토하고 있는 책이라 한다. 리뷰를 보고서 알았지만, 저자 키스 포크너는<싹트는 생명>(산해, 2005)의 저자 키스 안셀 피어슨의 제자이고 책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학술서'로 분류할 수 있는 근거이다.  

문화일보(08. 09. 12)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일 뿐”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고 가정된 순간과 구분되는 어떤 순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간들을 수축하는 현재 그 자체의 차원들을 지칭할 뿐이다.”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는 ‘차이’의 철학자로 불리는 프랑스의 들뢰즈(1925~1995)일 것이다. ‘철학아카데미’등 인문학 공부모임들에서는 들뢰즈를 ‘독해’하고자 하는 강좌가 연일 이어진다. 들뢰즈는 새로운 철학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넘어야 할 ‘벽’과도 같이 막막하고 어렵다.

국내에서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이나 그 전에 나온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주로 접해졌다. 이 책들을 주석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끝까지 읽은 독자가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들뢰즈의 국가박사학위 논문이자 그의 철학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을 완독한 독자는 더 적을 것이다. 그 중에도 2장 ‘대자적 반복’은 이 책의 저자도 실토하듯이 “전문가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비의적(秘義的) 지식”으로 가득하다. 이런 불친절한 저자가 다시 없다는 ‘울분’(?)마저 치민다.



이 책은 바로 들뢰즈의 ‘시간론’인 ‘차이와 반복’의 2장을 풀어내고 있다. 영국인인 저자 포크너는 들뢰즈로 생명을 탁월하게 설명한 ‘싹트는 생명’의 저자 키스 안셀-피어슨의 제자로 들뢰즈의 시간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일직선 상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런 시간관은 깨진 지 오래다. 들뢰즈에게 시간은, 짧게 요약하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하며 미래도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기대이므로 미래 역시 현재에 속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을 지칭할 뿐이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들뢰즈의 시간론은 시간을 통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시간적 주체론’이며, 따라서 ‘차이와 반복’은 현대 철학자들이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존재론’이다. 그의 ‘시간론=주체론’은 ‘반복’과 ‘시간의 수동적 종합’이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시간론은 칸트가 정초한 세 가지 종합, ‘포착-재생-재인’을 변환시킨 것이다. 이같은 세 가지 종합은 직관, 구상력, 오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포착된 외부 대상은 주체에 의해 구성되고 지성적으로 통합되는 ‘능동적 종합’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능동적 종합’에 ‘수동적 수축’을 추가한다. '수동적 종합’을 알자면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세 가지 층위- 물질적 층위, 수동적 종합의 층위, 반성적 표상의 층위-를 이해해야 한다. 반복의 물질적 층위는 즉자(卽自)의 층위로 물질자체의 반복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시간은 계기들의 ‘종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자적 반복이 정신에 의해 대자(對自)적으로 종합될 때 곧 반복을 묶거나 수축할 수 있다. 시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이같은 종합은 칸트처럼 능동적이고 의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 종합’이다. 즉 능동적이고 구성적인 주체 아래에 있는 수동적 자아(애벌레 자아)들이 의식 이전의 ‘관조’를 통해 순간들을 수축하여 ‘살아있는 현재’가 종합된다. 이 시간의 정초인 현재가 흐르고 이행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과거가 동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재가 시간의 정초(시원)라며 과거는 현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습관’의 형식을 통해 종합되었다면, 과거는 ‘기억’의 형식을 통해 종합된다. 이러한 두 시간의 종합과 달리 시간의 세번째 종합인 미래는 주체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같이 시간이 종합되는 과정에서 주체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시간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주체가 아니라 시간적 주체인 것이다. “나는 시간이 우리의 감정적인 생활에 추동력을 준다는 것, 항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아’가 잔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거울로서 또는 희미하게 빛나는 반사로서 활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수동적 종합의 정신분석학적 맥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프로이트를 전면에 끌어내고 있다. 국내 독자들은 이 점에서 다소 의아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석서 등을 통해 들뢰즈-가타리는 프로이트를 잡아먹을 듯이 비판해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시간의 세 가지 종합을 논할 때 초점이 되는 흄, 베르그손, 니체 이외에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연관성을 보지 않고서는 즉 무의식적 층위를 중심으로 다른 층위들이 함께 엮이면서 작동하는 복잡한 주체의 형성과 그로 인한 시간의 발생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들뢰즈와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꼼꼼하게 비교, 독해하면서 어떤 면에 프로이트와 들뢰즈 간에 영향관계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분석학의 층위에서 펼쳐지는 들뢰즈의 시간론을 독창적으로 펼치고 있다.(엄주엽기자)

08.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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