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에서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살림, 2009)에 대해 다룬 걸 보고 청소년잡지인 SEM에 실은 짧은 글이 생각나 같이 옮겨놓는다. 내 글은 다섯 명이 참여한 '책, 내 마음의 길잡이'란 기획특집의 한 꼭지이다(청소년용이라 약간의 '협박'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독서가 일상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이런 특집이 반가운 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뇌가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입증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9. 19) 뇌의 종합예술 '독서'  

뇌는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다. 코가 안경을 받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듯, 뇌가 독서용으로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인간에게 먼저 추상적 사고의 능력이 생겼고,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문자와 문해 능력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독서 능력이야말로 모든 인지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자 총집결이다.

우리에게는 독서 유전자나 독서 중추 같은 것은 없다. 그야 어쨌든, 아니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서는 환상적인 기예이다. 감각 기관들과 뇌가 한치 흐트러짐 없이 손발을 맞춰야 한다. 청각에 문제가 있어 음소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언어 이해가 더디고, 주변 시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빠르게 텍스트를 훑어 내릴 수 없다. 뇌는 시각과 청각 정보를 잘 처리해야 함은 물론이고, 안구가 기민하게 움직이도록 쉴 새 없이 운동 명령을 내려야 한다. 피질 적소에서 기억을 인출해야 한다. 때로는 변연계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소환해야 한다. 그래야 행간을 읽거나 추체험을 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단계단계 짚어가며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복잡다단하고 섬세한 작업이다.

<책 읽는 뇌>는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을 통해 이 경이로운 인간 능력을 파헤치고자 한다. 첫째로 독서 능력의 진화 과정을 밝히고, 둘째로 한 인간이 독서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을 밝히고, 셋째로 독서 능력이 잘못되는 경우를 소개했다. 독서의 계통발생, 독서의 개체발생, 독서의 장애라는 삼 단계 구성은 삼단뛰기마냥 완벽한데, 내용이 다소 난삽한 게 흠이다. 영어를 기본으로 놓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국어·한글과는 사정이 다른 대목이 있는 점, 독서 교육에 관한 조언들이 간간이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맘에 걸린다. 그러나 독서가 뇌의 기본 장착 기능이 아니면서도 이토록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배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의외로 난독증을 다룬 부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독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뇌’는 어떤 형태이고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살펴봄으로써 ‘독서하는 뇌’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독서가 다단계, 다차원 과정이니만큼 난독증에도 서너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일반인은 언어 반구인 좌뇌로 독서를 처리하지만 난독증 환자는 우뇌를 활성화한다는 것, 즉 다른 신경 회로를 쓴다는 점도 재미있다. 사실 ‘환자’라는 말은 틀렸다. 책이 시종 강조하듯, 독서가 선천 능력이 아니므로 난독증은 장애가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중에 공교롭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를 함께 읽었다. 그래서 소설의 등장인물 중 남녀 주인공에 도무지 집중하지를 못하고 난독증 소녀 후카에리에 빠져버렸다. 후카에리는 뭔가 영적인 것을 느끼는 소녀라는 설정인데, <책 읽는 뇌>에서 주장하듯 난독증이 공간감각 같은 우뇌형 재능과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면, 후카에리의 능력도 그런 것일까? 후카에리가 공감각을 지녔다는 암시를 주는 대목도 있던데, 그것도 관계가 있을까? 후카에리는 왼손잡이일까? 아, 내 독서하는 뇌의 난독은 어떻게 해야 하나.(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SEM(09년 9월호) 두뇌에 '파워옵션'을 달자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 매리언 울프에 따르면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 곧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인지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다.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책을 잘 못 읽겠어’라는 투정은 따라서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옵션’이 장착돼 있지 않다는 것뿐이니까.  

인류가 독서라는 새로운 능력을 발명해낸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이다. 이른바 문자와 기록을 갖게 된 ‘역사시대’의 개막이다. 하지만 독서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사고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인류사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독서는 전환점이자 도약의 디딤판이다.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 마나한 장신구가 아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이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와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다른 학생과 구별해주지는 못한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 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아니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의 여정이고 진화의 과정이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힘껏 노력하지만 결과는 다양하다고 말했다. 더러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에, 도마뱀에, 개미에 그친다. 또 더러 위는 사람이지만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미잘에 머물 수도 있고 넙치에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갈망할 수 있으며, 강인한 독서는 우리를 그를 위한 여정으로 이끈다.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은 장기적인 이 여정을 위한 ‘파워 옵션’을 마련하고 장착하는 것이다. 곧 책을 읽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책 읽는 뇌’의 용도를 넓혀나가고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개선해나갈 때 우리의 사고 지평이 달라진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 또한 달라진다. 여러분은 자신의 뇌를 ‘장신구’로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책 읽는 뇌’로 단련할 것인가.   

09.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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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1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의 가소성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독서'다. 황해 홍길주는 '문장은 독서에만 있지 않고, 독서는 책에만 있지 않다' 했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독서의 범주에 둔 것이다. 그중 사유의 정제품인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발명이다.
열반하신 성철스님이나,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 독서가다. 두 분은 배움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조리하게도 스님의 '수자오계'에는 '책을 읽지 마라' 하셨지만 (진리는 문장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있다), 일반 신도에게는 독서를 권장하셨다고 한다.
산업혁명시대 다음으로 정보'제어시대'에 뇌의 신경학적인 연구들이 활발하다.
만약 뇌신경세포중 '성상세포'가 많아진다면 인간의 지적능력과 과학적인 발전은 더 커질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뇌의 가소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지금 그 현장(로쟈)에 와 있다.

로쟈 2009-09-19 17:52   좋아요 0 | URL
뇌의 가소성 이상으로 영양과 휴식도 중요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