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 대한 고명섭 기자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출간된 책이지만, 분량 때문인지 한 템포 늦추어 다루고 있다. 아직 읽을 짬을 못 내고 있지만, 나도 서평을 써봐야 하는 책인지라 요긴한 참조가 된다. 사실 책의 몇몇 부분은 그간에 다른 책들, 특히 '레볼루션 시리즈'(프레시안북)의 서문을 통해서 이미 읽은 것이기도 하다. 분량은 부담스러울 테지만, 놓치면 후회할 만한 책이다. 아래 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재미'라는 척도만 가지고도 책은 베스트셀러감이다. 

한겨레(09. 09. 19) 가난한 이들의 해방은 어떻게 이룰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최근작이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급진적 견해가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과격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머리말에서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주장을 비웃지만, 지젝이 보기에, 후쿠야마의 테제는 지금의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진보·좌파가 저마다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 대안이란 것들이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하려면 ‘신념의 도약’, 다시 말해 그 상식의 지평에서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젝이 이 책에서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발언은 지젝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대중적 규율을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규율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런 재정적·군사적 수단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지닌 것은 규율과 단결력뿐이다.” 지젝은 이런 ‘스파르타적’ 요소야말로 변혁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 안에는 해방적인 고갱이가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연합을 ‘프롤레타리아 스파르타’라고 부른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주장에 당장 ‘전체주의·근본주의 아니냐’는 힐난이 날아들 것이 분명하다. 지젝은 이런 비난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근본적 변혁을 회피해서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에 입각해서 그는 스스로 ‘악몽의 호러쇼’라고 부르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지젝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악몽이라 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적극적 검토의 대상으로 세운다. 그가 보기에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적 일탈이나 변종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핵심 요소들은 좌익 혁명운동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지젝은 벼랑까지 사고를 밀어붙인다. “미친 주장일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연하면,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히틀러는 과격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해서 비난받는다.

지젝은 나치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나치 참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끌어들인다.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나치즘과 무관하다거나, 그가 한때 나치였지만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두었다거나, 처음부터 나치가 아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변호한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는 나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참여했을 때 올바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틀렸을 때, 다시 말해 그가 나치에 참여했을 때, 그는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통한 근본적 변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 변혁의 내용이 좌익적 변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젝은 일화를 들어 말한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대표가 하이데거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는 자신은 학생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이렇게 파시즘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곧 총체성·규율·집단성 같은 것들이 애초에 파시즘과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그것의 본디 창조자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서 자기화한 것이다. ‘원파시즘적’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죽음을 초월한 사무라이 정신’도 파시즘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파시즘적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의 구성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지도자라는 범주도 “대의를 향한 열광을 촉발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파시즘 운동의 특수한 접합이 이 모든 것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비틀었을 뿐이다.  



지젝은 이런 검토 위에서 과거 혁명들이 수행했던 것들, 다시 말해, 진리의 정치, 당-국가-지도자 정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과감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지젝은 우고 차베스(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목한다. 차베스의 정치는 여러 가지 약점과 결점이 있지만, ‘자기 몫이 없는 자들’ 곧 빈민들과의 특권적 연대라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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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9-09-1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요구해도 다시말해 노동계급의 규율성과 단결을 이야기해도 당과 (중앙집권적) 국가는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아나키스트들은 뭔가요?

2. 지젝이 이야기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변혁을 복지시스템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서유럽의 사람들이 원할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즉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물론 베네주엘라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빈곤층이 혁명을 일으켜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차베스가 인기있는 곳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고..차라리 제도적 틀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발리바르식 접근법이 서유럽이나 자본주의가 발달한 여타 국가들에서는 더 가능성있는 변혁의 방법은 아닐지.

3. 아무리 "대의"가 본질적 변혁을 위해서 필요하다고는 하나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자유나 생명 혹은 인권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마치 "주체"라는 대의를 추종하는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지.

윗 서평을 읽고 드는 몇가지 궁금증을 적어봤습니다.


로쟈 2009-09-19 21:42   좋아요 0 | URL
지젝의 요지는 서문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삼는 것이다." 소련(북한)이 미국(남한)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북한)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진지하게 일독해볼 시간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9-09-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와 단절하는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는 소위 낭만적인 "아름다운 영혼"보다는 강철같은 규율이 필요다하는 이야기였었나요? 그러기 위해서 참조하는 것이 스탈린, 레닌이고 혹은 히틀러라는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구사회주의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규율을 강조했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권력의 집중 혹은 관료화라고하는 회피하기 힘든 문제인데 이것 때문에 결국 구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원인이기도 하지요.

결국 노동자나 피억압계층/계급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권력이 당이나 관료시스템에 돌아가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규율"이나 "대의"가 근본적 변혁을 위해 올바르게 작동될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권력의 집중과정에서 발생하는 혁명의 아포리아와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지젝에게는 있는지요? 만약 없다면 이것이 없이 어떻게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만.

로쟈 2009-09-19 22:34   좋아요 0 | URL
yoonta님은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걸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습니다.^^; 지젝의 입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구요. 바디우를 인용하면, "탈존재보다는 재앙이 낫다"는 게 이 '전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입니다...

yoonta 2009-09-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한다는 것이지요.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나 지젝의 헤겔주의 혹은 라캉주의는 저도 상당부분 동의하고 긍정합니다만 현실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은 이런 원칙적 대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없이는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극단적 테러가 되거나..얼마전 본 <바더마인오프>라는 독일적군파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대의"가 올바르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을 다수 대중이 수용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테러가 될 뿐이다라는 것을 말이지요. 알카에다와 같은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는 것이겠고요. 똑같은 정치적 폭력이더라도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된 프랑스 혁명때의 자코뱅파라던지 러시아 혁명에서의 볼세비키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대중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그것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의를 위한 동의를 획득할 것인가가 되어야 겠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반복하지만 구체적힌 현실과의 접점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지젝식의 레닌주의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고 외치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대의"로서는 원칙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더라도요. 오늘날 소위 좌파진영에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대부분 이런 지점에 있는 것이겟지요. 원칙이나 대의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현실을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을수 없다는 현실. 그래서 정치는 때로는 정치적 반대파와 타협하기도 해야하는 기술이라고도 이야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다 거세하고 지젝은 때로는 뭐랄까 너무 나이브한 원론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젝의 비판이 포스트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컨대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은 될수 없다고 그래서 저는 생각한 답니다.

2009-09-20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9-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은 첨병-담론(제가 만든 말)을 이끌어 내려 합니다.
이즘의 원형을 내재한 역사의 건에서 재사용(reuse)이 아닌
순도 높은 재활용(recycle)의 가치를 찾자고 합니다.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라는. 즉 역사적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함인데, 역사의 인큐베이터 밖에서 쉽지 않는 접점(실전부대)을 찾아야 합니다.

예로, 우울증 환자을 위해 항우울증치료제가 시판됩니다.
뇌의 행복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 재활용(recycle) 유도 보호제입니다.
부작용은 적지만 극심한 우울증 환자에게는 3주이상 투약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배설물에서 물을 재흡수합니다.
소장의 경우는 80% 물을, 대장은 물 이외를 재흡수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역사는 대장안으로, 그 안에서 생명수를 재흡수하자 합니다.

로쟈 2009-09-20 23:4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비유십니다.^^

펠릭스 2009-09-27 22:32   좋아요 0 | URL
레닌의 아버지는 장학사이자 대지주였군요.
빈권층과 특권층의 연대, 즉 지젝은 NGO운동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