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2학기에 출간될 학술도서 목록을 미리 짚어주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미 몇 권은 출간된 상태인데, 눈길을 끄는 타이틀이 여럿 된다. 참고해둘 만하다.  



교수신문(09. 09. 01) 2학기 학술도서 출간, 무엇이 기다리고 있나 

“인생은 아름다웠고, 역사는 발전한다.” 한 시대의 아포리즘이다. 이 아포리즘이 학술서들에 반영되려면,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야위고 하는 시간들이 필요할 것이다.  

기존 기획서들 꾸준히 발간
열화당의 모색은 흔들림 없다. ‘우현 고유섭 전집’(전10권) 2차분 네 권을 출간한다. 제3,4권『조선탑파의 연구(상·하)』,제5권『고려청자』,제6권『조선건축미술사 초고』등이다. 특히 『조선건축미술사 초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 通史라고 할 수 있다. 한길사의 한길그레이트북스는 최술의 『수사고신록·수사고신여록』(이재하), 레이몽 부동의 『사회변동과 사회학』(민문홍) 등이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19년 전 출간 당시에는 ‘자유의적’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던 부동이 오늘 어떻게 수용될지 궁금하다.   

 

몰입은 계속된다, 고전을 찾아라
철학 전문 출판사인 서광사의 한 우물 파기가 멈출 줄 모른다. 플라톤의 『플라톤의 법률』(박종현 역주)이 눈에 띈다. 헬라스어 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석을 단 책으로, 플라톤 원숙기에 접어든 사상을 보여줄 것이다. 아카넷 역시 딜타이의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건립』을 내놓을 예정. 한길사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심경호 역주)와 타키투스의 『역사』(김경현·차전환 옮김)를 준비한다. 연암의 문체가 당대 조선을 뒤흔들었음을 생각할 때,연암의 빛나는 사유를 어떻게 ‘완전주석’ 해냈을 지 관심이 쏠린다. 도서출판 길에서 내놓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김덕영 옮김)은 200자 원고지 3천매 분량, 전공자에 의한 결정판본 번역으로 기대된다.

국내 필진들의 내공 들여다 볼 기회
국내 저자들의 이론적 내공을 확인해 볼 수 있는 학술서 목록도 두툼하다. 하반기에 만날 수 있는 책들은 문자, 사상, 문화, 역사 등에서 스펙트럼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삼인출판사가 내놓을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하였다』(가제, 김근), 사회평론사의 『안견과 몽유도원도』(안휘준), 『상인과 미술』(양정무), 학고재의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안휘준 외), 『크로스컬쳐』(박준형), 생각의나무에서 준비중인 『크로스 오버 하이데거』(이승종), 『시장과 문화』(여건종), 아카넷에서 출고 대기중인 『중국의 다구르어와 어웡키어의 문법, 어휘 연구』(성백인 외), 서광사의 『기호 유학 연구』(황의동) 등의 리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크로스 오버 하이데거』는 제목 그대로 다양한 관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재해석하는 시도인데, 어떤 접점을 읽어낼 지 기대된다. 지식산업사의 『백제의 사회사상사』(노중국)도 제법 무거운 저작이다. 이 책은 올해 1월 익산 미륵사지에서 「사리봉일기」가 발견되기까지 모든 자료를 동원해 백제의 사회와 사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낸다.   



왕년의 저명 학자들 돌아오고, 현실 더 깊게 읽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깊게 파고들면서 삶의 방식을 개조하려는 노력에 공력을 쏟은 왕년의 스타 저자들의 책도 잇따라 번역된다. 앙드레 고르, 라클라우, 상탈 무페,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름이 눈에 띈다. 중국과 동아시아의 부상을 눈여겨 본 조반니 아리기의 이름도 있다. 위험사회로 잘 알려진 울리히 벡이나, 『상상의 공동체』로 이름 날린 베네딕트 앤더슨의 신간도 과거의 책만큼이나 관심을 끌지 궁금하다.  



생각의나무에서 내놓을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박수현 옮김), 후마니타스에 야심차게 준비한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승원 옮김),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는 유럽 인민인가』(진태원 옮김), 라클라우의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임승준 옮김), 소나무에서 출간할 『우리 종교』(하비 콕스 외, 박태식 외 옮김), 도서출판 길이 내놓을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책갈피를 통해 소개될 크리스 하먼의 『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이정구 옮김), 책과함께의 리스트에 오른 『중국사상문화사전』(미조구찌 유조 외, 김석근 외 옮김), 이후출판사가 소개할 수전 스트레서의 『쓰레기와 필요』(가제, 김승진 옮김) 등이 주목된다. 

좀 더 현실의 문제에 착근한 책들도 예상된다. 진보, 반전 평화운동, 환경, 이슬람, 공화주의, 한국 자본주의 등의 코드가 보인다. 도서출판 길의 예정 신간인 로레르토 웅거의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병천 옮김)는 신자유주의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진보진영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삼인출판사가 내놓을 신시아 콕번의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전쟁, 여성 운동 그리고 페미니즘 분석』(가제, 김엘리 옮김)은 반전 평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활동가들의 인터뷰와 분석을 담는다.  

이후출판사의 『갯벌, 사람과 만나다』(김준)는 ‘갯살림’과 해양문화, 습지문화를 폭넓고 풍부하게 조명한 책이다. 책갈피에서 나올 마리얌 포야의 『이란의 이데올로기와 저항: 여성, 노동, 이슬람주의』(정종수·차승일 옮김)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이슬람, 특히 이란 현대사의 속살을 보여줄 것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마련한 『공화국을 위하여』(조승래)도 최근의 공화주의 논의를 증폭시킬 것으로 보인다. 한길사가 출간할 『한국자본주의의 선택』(백종국)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걸어왔던 자본주의 전체 모습을 조감하면서 한국 자본주의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체제는 무엇인지 논의한다.(정리 최익현 기자) 

09. 09. 03.  

P.S. 참고로, 지젝의 책 가운데는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가 이미 출간됐고, <레닌 재장전> 등도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09-04 12:36   좋아요 0 | URL
2학기 개강과 동시에 입각하셨습니다.
세간에선 "테니스코트에서 야구가 잘 되겠냐"며 묻습니다.
고등학생이 물었습니다.
'총장님, 공부와 독서중에 어떤 것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 개인적으론 '독서'가 먼저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총장님, 다시 공부하시면 어떤 공부를 하시고 싶으신지요?
- 역시 경제학이며, 다음은 철학, 다음은 정치학 입니다.

로쟈 2009-09-05 09:19   좋아요 0 | URL
독서와 공부가 다른 건가 보네요...
 

경향신문에서 김철웅 논설위원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일본 총선 결과(선거혁명)에 견주어 처지가 뒤바뀌어가고 있는 듯한 한국 현실을 짚어보고 있다. 필자의 진단대로 지금은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는 시점인 듯싶다. 물론 '비관'이 뜻하는 바는 일본의 우파 정권 55년보다 더 끔찍한 반공 극우정권의 장기집권이다('극우'라는 이데올로기도 실상은 허울일 뿐이다. 기득권 지배집단의 장기집권이라고 해야겠다). 섣부른 낙관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 만큼 열심히 '학습'하고 열심히 칼을 가는 수밖에...

경향신문(09. 09. 02) 낙관과 비관 사이  

일본의 선거혁명이 우리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장기집권 시나리오에 대한 경고가 우심한 시기에 이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던 자민당의 반세기 집권이 허망하게 끝났다. 반면 한국은 장기집권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관측이 나온다. 마치 두 나라가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한국 진보·좌파 진영은 귀가 솔깃해졌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30여개월 후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희망을 담은 말이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54년 만의 정권교체는 야당들이 54년 동안 정권교체에 실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원인을 찾아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보진영이 일본 선거혁명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야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 반서민, 반통일 행보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요즘은 기만적인 친서민 정책을 펴는 노회함까지 보인다. 덕분에 대통령 지지율이 40%대로 뛰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정권은 총력을 다해 미디어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로써 족벌신문들에 방송을 주고 신문·방송·인터넷 매체들을 장악함으로써 장기집권을 위한 토대를 닦는다는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선거혁명은 훌륭한 타산지석이 된다.  



장기집권 도모하는 극우정권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일본 같은 장기집권이 가능할까. 비관적 입장에서는 한나라당의 장기집권 가능성이 개탄스러울 정도로 높아 보인다. 한국은 사회 제분야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을 따라왔다. 신자유주의 수용과 토건국가 지향은 오히려 일본을 능가한다. 우익사회를 키울 토양은 비옥하다. 박노자 교수는 책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에서 “이 사회의 제도적 민주주의 경험이 일본보다 훨씬 짧은 만큼 ‘우경화’도 훨씬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뉴라이트란 이름으로 일제의 ‘근대화’에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면 이해가 쉽다.

일본의 자민당 반세기 집권은 선진국으로는 매우 이례적이다. 미국·영국·독일 등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서는 보수·진보성향의 양대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게 보통이다. 한 정당이 20년 이상 집권하는 것도 드물다. 한국은 어떤가. 김대중, 노무현의 ‘좌파정권, 잃어버린 10년’을 제외하고는 간판만 바꿨지 모두 보수 우파정권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철저한 반공 극우정권이었다. 지금도 이 정권은 잘해야 중도우파인 김·노 정권을 좌파로 몰아치고 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을 탈환한 것에 희희낙락하며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는 모양새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일본의 ‘55년체제’는 개방된 정치경쟁이 만들어 낸 파벌의 연합체로서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에서 완전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선거와 정당간 경쟁을 통해 지배적인 정당의 지위를 확립했다”고 밝혔다. 공산당 등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론을 당이념으로 가진 정당도 제한 없이 선거경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일본보다도 강고한 극우체제의 출발선에 위치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북한의 극우·극좌 세력이 적대적 공존을 통해 장기집권을 도모할 것이란 논리에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비관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룬 민주화의 성과가 쉽사리 허물어질 수 없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발전을 믿는 진보는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다. 조건은 어쩌면 일본보다 열악하지만 우리에게는 일본에는 없는 뜨거운 민주화 항쟁의 역사가 있다. 이명박은 언젠가 1970·80년대 민주화 세력을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라 비하했지만 그 민주화는 박제돼 과거의 벽장 속에 처박힌 게 아니다.

진보 , 기득권 버리고 결집해야
극우 정권의 장기화냐 아니냐의 중대한 기로에 선 진보는 저들의 개과천선을 기대해선 안 된다. 용산참사를 외면하고 공안통치를 일삼는 권력과 정권이 말하는 화해 통합론은 선을 가장한 악일 뿐이다. 진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진보·좌파의 결집만이 미래를 낙관케 만드는 조건이자 관건이다. 야권과 민주세력을 통합하는 일에 알량한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으론 어림도 없다. 극복대상은 이명박 이전에 진보 자신의 지역주의, 기득권주의다. 안그러면 정권은 박근혜로, 또 누구로 계속 계속 이어질 것이다.(김철웅 논설위원)  

09. 09. 02.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9-02 22:19   좋아요 0 | URL
부자 증세, 빈자 감세 등으로 부의 재분배와 금융규제를 강화,
노동자에 대한 기업 이윤 분배, 실업급여 인상, 각 종 수당 인상 등이
세계의 추세인데,,,

우리는 부자감세, 금산분리완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는 신자유주의로 갈까요? 혹시 잃어버린 얘기를
찾고자 해서 일까요, 아니면 불도자 팔기위해서 일까요?

강 건너에서는 폭넓은 중도를 이끌어 내야 한다며, 사회민주주의 원리를
대폭 받아 성찰해야 한다고 합니다. 성찰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는데,
눈치만 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듯 합니다.

열정과 균형을 갖춘 도전자 보다는 기회는 이때다 '승자도식대열'에
끼려는 쌍판들이 넘쳐 납니다. 마을앞에는 현수막이 걸립니다.
"64회 동창 XXX 대표이사 취임"이라며 족보에도 실립니다.

로쟈 2009-09-03 18:38   좋아요 0 | URL
그게 쉽게 바뀌진 않겠죠. 박노자 교수는 동문회 안 나가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펠릭스 2009-09-05 19:31   좋아요 0 | URL
박교수의 글과 의식의 흐름이 제게 불편함이 없습니다.

2009-09-03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3 1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귀가길에서 전철에서 읽은 책은 새로 창간된 무크지 <담론과 성찰>(한길사, 2009)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그 추모 열기에 대한 좌담의 제목이 '바보의 용기와 눈물의 힘'이다. 분량이 80쪽 가까이 돼 다 읽진 못했는데, 그래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름호로 폐간된 <비평>의 자리를 메꿔주는 듯싶다. 지난주에 나온 소개기사를 옮겨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73718.html).  

한겨레(09. 08. 29) 추모의 종이비행기에 지성의 동력을 달다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희극)으로. 유초하 충북대 교수(철학)는 한길사가 새로 펴낸 무크지 <담론과 성찰> 1호에서 이명박 정권을 이렇게 야유했다. “이 정권이 지향하는 정책목표는 사상·표현의 자유 억압, 공공재의 사유화, 자연환경 파괴의 난개발, 재벌과 부자 편들기, 같은 민족 애먹이기, 외국에 굴종하기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노무현과 우리시대- 눈물에 엉긴 분노를 세상 바꾸는 힘으로’)  

유 교수는 일제의 조선인 창씨개명과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동원 사실을 부정하는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덜컥 만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에 아리랑3호 위성발사 용역을 맡기고 식민지근대화론 신봉자들인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기 지원을 받는 현 정권을 ‘일본 2중대 정부’가 아니냐고 물었다. 지금 정권이 대표적인 외교‘성과’라고 자랑하는 게 고작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시리아·이란·북한의 지도자들을 만나겠다”고 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서 김정일을 만나지 못하도록 한 것 아니냐고 힐난했다.  



이전 시대를 반복하는 자들은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내어 자신에게 봉사케 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명박 정권은 다시 불러낸 3공·5공 군사정권의 망령, 즉 소극(笑劇)적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얘기는 그야말로 비극이자 “웃기지도 않는 개그”를 향한 조소다.

“이미 잊혔던 듯이 보이던 망령들이 무덤에서 깨어 일어나 시대의 공기를 무겁게 그러나 희극적으로 짓누르고 있다. 파시즘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집단 열등의식은 정치적 추동력의 열효율을 크게 높여주는 특급 연료로서 작동한다. 그래서 근대화에 뒤쳐진 사람들이 ‘조국 근대화’에 목을 맨 채 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자들을 따라갔듯이, 금융자본주의에 농락당했던 사람들이 ‘2만 불 시대’에 목을 맨 채 그들에게 당근을 내미는 자들을 따라가고 있다. 저 멀리에서 끌어당기는 목적론의 밧줄에 코가 꿰인 채, 덧없는 희망을 선전하는 얄팍한 미끼를 덥석 문 채.”(‘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관리사회 시대를 헤쳐 나가기’)

이 원장은 예컨대 대운하 구상은 그냥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개발독재시대의 총체적 반복을 어리둥절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했다. 일제 식민지로 귀결된 근대화 실패 집단 열등의식이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떠받친 연료가 됐고, 아이엠에프(IMF)와 월스트리트발 금융자본에 농락당해 소득 2만달러 꿈을 날린 대중의 열등의식이 ‘747’을 내건 이명박 정권의 새옷으로 치장한 개발독재를 밀어주는 동력이 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욕망의 정치’가 던진, 잘 살게 해주겠다는 미끼를 계속 물고 있는 한 희망은 없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반복 등장은 그냥 단순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동반한다. 소극으로 다시 부활한 개발독재는 과거 3공·5공식 억압과 배제의 ‘통제사회’가 아니라 외형상 쿨하고 자유로운 유목사회의 형태를 띤 채 ‘차이배분’, ‘문화적 훈육’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을 ‘화폐회로’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철저한 ‘관리사회’다. 이걸 깨부수는 무기가 ‘소수자(마이너리티) 운동’이라고 이 원장은 생각한다. 소수자는 수적 소수 개념과는 무관한, 주류 다수자의 기득권체제에 구멍을 내고 무너뜨려 바꾸려는 비주류 저항·도전 세력이다. 그들은 소수자‘이기’가 아닌 의식적 소수자‘되기’ 운동을 통해 생성되는 존재이며, 차이를 동반하며 영원회귀적으로 반복되는 다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차이를 동반하며 반복 등장한다. 이처럼 기성체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면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소수자되기(‘새로운 모습으로의 귀환’), 이것이 바로 진보의 토대다.    



<담론과 성찰 1>은 제목 그대로 바로 이 시대 진보를 위한 성찰과 담론 작업을 겨냥하고 있다. 김민웅 편집주간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내면의 근본적 변화”, “우리 정신의 좌표를 바로 세우는 훈련의 장”이라는 말도 했다. 책의 본마당 격인 좌담(사진) ‘바보의 용기와 눈물의 힘’은 수백만을 울렸던 전대미문의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 현상’을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진단했다. 책을 기획하고 대담을 진행했을 때의 상황은 뒤이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로 그 뒤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나 애초의 문제의식은 빛이 바래기는커녕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절실해졌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노 전 대통령 비극을 통해 소극으로 부활한 망령의 본질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태‘역전’에 주목했다. “보수계 인사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천박하다, 품위없다, 천골이다 이렇게 몰아붙였다. 그런데 …지금 형국이 반전돼버렸다. 점잖게 말하던 자들이 오히려 가짜 품격이고 비열한 자들처럼 비치고, 비천하게 말하는 것 같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쪽의 어투와 태도는 오히려 정직하고 솔직했던 것으로 자리가 뒤바뀐다.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것도 그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높은 미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역사학자답게 서울과 봉하의 조문 현장뿐만 아니라 사이버 여론까지 꼼꼼히 살핀 한정숙 서울대 교수는 이를 “정신사적으로 보면 바보가 상징하는 내면의 진실성과 진실의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읽었다. 영결식 사회를 맡기도 했던 도종환 시인은 시민사회가 이끌어가는 민주주의 공동체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해 작은 차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 “영원히 농락당하는 사회”로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상·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정도의 자유민주주의 안착을 보장할 만큼의 단결도 이루지 못해 “이런 지긋지긋한 정권이 연장되도록 허용하면서 진보를 자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 유초하 교수의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사회를 본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비극적 사건의 충격을 통해 비로소 작동되는 게 아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생각하는 사회’” 만들기를 주문했다.

지리학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홍천강변에서 20년- 어느 지리학자의 주경야독 농촌생활기’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내면의 근본적 변화’가 왜 절박한 것인지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는 절창이다.(한승동 기자)  

09. 09. 01. 

 

P.S. 두 번 반복되는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명이 떠올리게 해주는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도서출판b, 2008)과 슬라보예 지젝의 <처음엔 비극으로, 그 다음엔 소극으로>(2009)다. 지젝의 책은 근간 타이틀인데, 96쪽의 얇은 책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출판사(Verso)의 책소개는 이렇다. 

From the tragedy of 9/11 to the farce of the financial meltdown

In this bravura analysis of the current global crisis following on from his bestselling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Slavoj Zizek argues that the liberal idea of the “end of history,” declared by Francis Fukuyama during the 1990s, has had to die twice. After the collapse of the liberal-democratic political utopia, on the morning of 9/11, came the collapse of the economic utopia of global market capitalism at the end of 2008.

Marx argued that history repeats itself “occuring first as tragedy, the second time as farce” and Zizek, following Herbert Marcuse, notes here that the repetition as farce can be even more terrifying than the original tragedy. The financial meltdown signals that the fantasy of globalization is over and as millions are put out of work it has become impossible to ignore the irrationality of global capitalism. Just a few months before the crash, the world’s priorities seemed to be global warming, AIDS, and access to medicine, food and water — tasks labelled as urgent, but with any real action repeatedly postponed.

Now, after the financial implosion, the urgent need to act seems to have become unconditional — with the result that undreamt of quantities of cash were immediately found and then poured into the financial sector without any regard for the old priorities. Do we need further proof, Zizek asks, that Capital is the Real of our lives: the Real whose demands are more absolute than even the most pressing problems of our natural and social world?

“Zizek leaves no social or cultural phenomenon untheorized, and is master of the counterintuitive observation.” — New Yorker

“One of the most innovative and exiciting contemporary thinkers on the left.” — Time Literary Supplement


댓글(4) 먼댓글(1)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9-03 05:58 
    바보의 용기와 눈물의 힘 —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소극으로… (via 로쟈)
 
 
펠릭스 2009-09-01 20:26   좋아요 0 | URL
바보의 용기는 언제나 눈물을 동반합니다.
노을보며 울먹였던 것은 걷는 행인이 바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올바른 절망 탓에,,,,

"집단적 망각"의 근원은 국가에 대한 불신에 반작용에서
일어나는 증상라고 생각합니다. 국민(개인)의 세가지 주요
관심은 좋은 일자리 문제, 교육의 문제, 주거의 문제에
대한 상대적 박탈에 극적인 표현(촛불)이지만, 결국은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챙겨주지 못할 것이라는
피해의식이 '집단적 망각'속에 있다 순간 순간 폭발하고
빨랑 제자리로 가는 노하우를 갖고 있는 듯 합니다.
(결국 믿을 놈없다는 불신의 누적과 믿고 따를 지도자 부재)

그 건망증(망각증 대신)을 안아야 합니다.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식인들의 새로운 글쓰기, 관념적 난해성에 대한 반성,
자신들의 삶과 역사에 대한 무책임성 깨기를 병행하겠다고 했다."


로쟈 2009-09-01 20:55   좋아요 0 | URL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몸에 새겨녛기라도 해야 할 듯해요...

게슴츠레 2009-09-02 12:39   좋아요 0 | URL
지젝의 '두꺼운 최근작'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도 번역출간되었더군요.

로쟈 2009-09-02 15:46   좋아요 0 | URL
9월말쯤 나오는 줄 알았는데, 빨리 나왔네요...
 

용산 참사 해결을 촉구하는 젊은 작가들의 릴레이 시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번 '작가선언 6.9'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직접 참석은 못했지만, 온라인에서나마 응원을 보탠다... 


용산참사 221일째인 지난 28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릴레이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작가선언 6·9’의 작가들이 추모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경향신문(09. 09. 01) 젊은 작가들, 펜 대신 피켓을 들다  

용산참사 현장에 작가들이 섰다. 용산참사 221일째인 지난 28일 소설가 권여선·윤이형·황정은·김미월·은승완씨, 나희덕·이영광·김행숙·홍준희 시인, 평론가 권희철씨 등 작가 10여명이 피켓을 들고 거리 위에 섰다. 용산참사 문제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유족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이날은 7월21일부터 시작한 작가들의 1인 릴레이 시위 ‘시즌 1’을 마감하는 날. 2인1조로 진행되는 시위의 이날 ‘당번’ 권여선·이영광씨가 일찌감치 1인 시위에 나섰고, 여러 작가들이 한두 명씩 거리로 모여 들었다. ‘시즌 2’는 2일부터 시작된다.

릴레이 시위는 작가들의 모임인 ‘작가선언 6·9’에서 시작됐다. 용산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각종 시국선언이 잇따르던 지난 6월 온라인 모임을 통해 결성된 ‘작가선언 6·9’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수평적 연대’를 표방한다. 6·10 항쟁일을 기념해 192명의 작가가 ‘한줄 선언’에 이어 용산참사의 아픔을 나누기 시작했다.

현재 온라인 카페에 가입한 작가는 336명. 이들이 펜 대신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1인 릴레이 시위 제안자이며 ‘시즌 1’의 실무를 맡은 반장 은승완씨는 “지난해 촛불집회 때부터 이명박 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았는데 용산참사가 이명박 정권의 친기업적이고 반서민적인 정책을 극명히 드러낸 사건인 것 같다”며 “단식을 제안했는데 토론 결과 1인 릴레이 시위를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은씨에 이어 ‘시즌 2’ 반장을 맡은 윤이형씨는 “작가이기에 앞서 우선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용산참사 문제가 시급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릴레이 시위에 참여한 작가는 모두 50여명. 간간이 방문해 응원하고 힘을 보탠 작가들까지 합하면 60~70명에 달한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꽃을 나눠주고, 개목걸이를 목에 걸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1인 시위를 하고 매일 유족들과 함께 추모미사를 갖는다. 7월에는 유족들과 함께 북콘서트도 열었다. 무관심한 시민들, 툭하면 방해하는 경찰과 역무원들은 이들을 힘들게 했지만, 음료수를 건네주고 격려해주는 시민들은 큰 힘이 됐다. 개인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다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게 된 황정은씨는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호소할 곳이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좁다”며 “용산에서 연대의 힘을 느꼈고, 이런 연대가 확장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오후 7시 추모미사 시간이 다가오자 20여명의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미사 후에는 인근 찻집에서 ‘시즌 2’ 준비회의도 가졌다. 검찰의 미공개 수사기록 3000쪽을 공개할 때까지 릴레이 시위를 계속할 예정인데, 9월 개강 등 회원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2일부터 매주 수요일을 ‘용산 릴레이 실천의 날’로 정하고 주 1회 시위를 이어간다. 용산참사 문제뿐 아니라 4대강 사업, 한예종 사태 등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해나갈 계획도 세우고 있다.

스스로 ‘고령자’라 칭하는 권여선씨(44)가 말했다. “정치적인 요소는 문학 속에 항상 잠복하고 있습니다. 어느 수위를 넘어서면 목소리가 터져 나갈 수밖에 없어요. 1980년대의 형식과 다르게 자기 목소리로 자유롭게 발언하는 젊은 작가들의 모습을 보며 신뢰가 생겼습니다.”

자유로운 수평적 단결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의 목소리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이영경기자) 

09. 08. 3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9-01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선언 6.9'은 위대한 탈고입니다.

로쟈 2009-09-01 20:54   좋아요 0 | URL
책도 구입하셨나 보군요.^^

바람돌이 2009-09-0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산을 잊지 않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로쟈 2009-09-01 20:53   좋아요 0 | URL
네, 적잖은 작가들이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것도 드문 일입니다...
 

이번 학기 강의 시간표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은 월요일 강의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일요일의 뒤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바삐 출근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을 것이다(그런 학기도 있었다).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어제까지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 오늘은 시름이 한가득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과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에는 여유가 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 월요일 오전시간에 바쁜 일을 제쳐놓고 한겨레21의 칼럼을 먼저 옮겨놓는다.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보기 위해서인데, 애당초 내게 '쾌활함'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축 처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한 방책이다(나는 '명랑쾌활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안 갖고 있는 그들의 '명쾌함'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작에 스크랩해놓으려고 했던 것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장의기간과 겹쳐서 '쾌활함'을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칼럼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거쳐 스피노자의 <윤리학>까지를 횡단하며 '쾌활함의 윤리'를 길어낸다. 근래에 읽은 가장 유익한 칼럼이다.  

 

한겨레21(09. 08. 14) 발리, 고원, 쾌활함 1 

마당에서 엄마가 아이를 부른다. 엄마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아이는 엄마 품에 달려와 안긴다. 아이는 엄마의 가슴을 만지면서 자신의 성기를 잡아당긴다. 그런데 아이가 작은 쾌감을 느끼면서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려고 할 때, 엄마는 받아주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이가 엄마의 다른 쪽 가슴을 마저 쥐려고 하면, 엄마는 아이의 뒷머리를 리드미컬하게 쓰다듬는다. 만족하지 못한 아이가 짜증을 내면 엄마는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본다. 만일 아이가 엄마를 때리면, 엄마는 화내는 모습 없이 공격을 가볍게 걷어낸다. 이런 상호 작용이 몇 번 반복되면, 아이는 마침내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면서 스스로 놀게 된다. 

절정의 추구를 회피하다  
이는 1940년경 인도네시아의 섬 발리에서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라는 인류학자가 관찰한 것이다. 베이트슨은 발리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발리의 생활양식이 서양 문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성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에서도, 절정(climax)에 점층적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문화 형태다. 반면 위의 예에서, 아이는 절정에 이르기를 원하지만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제지당한다. 그래도 아이는 마침내 다른 놀이에서 더 큰 즐거움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엄마의 행동이 ‘신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강조돼야 하겠다.) 베이트슨의 보고에 따르면, 발리에서는 이 일화처럼 생활 곳곳에서 절정의 추구를 회피하고 예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트슨은 이 대조를 꼭대기가 있는 산과 높고도 평평한 고원(高原)의 비유를 들어 분명히 했다. “아이가 발리의 삶에 보다 충만하게 적응함에 따라, 연속적인 강렬함의 고원이 꼭짓점(절정)을 대체한다.” 그러니까 발리의 문화양식은 마음과 신체가 고원 상태를 형성하도록 습관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이 짧게 왔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쾌감’이 아니라 길고 강렬하게 유지되는 ‘쾌활함’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외부의 쾌락적 자극을 장시간 유지시킨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습관을 통해 마음과 신체의 경향 자체를 변화시키고 그에 맞게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주저 <천 개의 고원>의 제목을 여기에서 가져왔다. 이 저서는 뾰족한 절정에 집착하게 하는 것들, 어느 하나의 존재에 고착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고발한다. 국가권력, 종교, 화폐, 정신분석학의 기표, 자아의 내면으로 회귀하는 것까지도. 기쁨의 고원 상태는 ‘많은’ 변용과 정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제도들과 맺는 ‘외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감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베이트슨은 자신의 책 제목을 <마음의 생태학을 향하여>라고 붙였다. 이 제목은 흥미롭다. 생태학은 원래 생물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학문인데, 인간의 마음에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의 생태학’을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생태학의 모토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면, 마음의 생태학의 원리는 ‘지속 가능한 기쁨’이다. 

마음의 생태학의 원리 ‘지속 가능한 기쁨’
어떻게 높고 강렬한 고원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일반적인 원리를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방법들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막연하다고? 참고할 만한 텍스트는 많다. 우선 문학작품은 변용과 정서의 실험실이다. 문학은 새로운 삶의 요소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면의 기록 또한 중요하다. 반 고흐의 편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세잔의 대담은 구체적인 실험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블로그는 동시대의 경험을 손쉽게 공유할 수 있게 한다. 블로거들은 당신의 실험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한겨레21(09. 08. 21) 발리, 고원, 쾌활함 2  

지난호에 언급한 발리의 일화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두 단어, ‘도덕’과 ‘윤리학’을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의 간단명료한 정식을 빌리자면, “도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관련되고, 윤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도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험적으로 지정해주는 반면, 윤리학과 관련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도덕을 형성하지만, 사회적 규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은 윤리학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종교적 명령이 없는 실천 철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량의 증감, 존재의 확장을 예민하게 느끼길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대될 때 기쁨을 느끼고, 축소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행동의 기준을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전시키기를 제안한다.

스피노자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정도 교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좀더 나아가보자. 아무래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준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기쁨의 추구는 쉽게 쾌락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마약 중독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약이 주는 쾌감을 연장하기 위해 점점 더 중독될 때, 그것이 하여간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이 종교나 법으로 금지됐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차적 구분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다시 하위 단위로 구분한다. 기쁨은 쾌활함(cheerfulness)과 쾌감(pleasure)으로, 슬픔은 아픔(pain)과 우울함(melancholy)으로 나누어진다. 이 구분의 기준은 신체가 변용되는 범위다. 즉, 쾌감과 아픔은 신체의 일부분만 변용될 때이고, 쾌활함과 우울함은 신체의 전체가 변용될 때이다. 마약은 신체의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쾌감일 뿐 충만한 기쁨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쾌감과 아픔에 이중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쾌감은 기쁨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소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픔은 슬픔에 속하기는 하지만 좋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집착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 안에서 봤을 때, 아픔은 쾌활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리학의 목표는 기쁨의 형성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기쁨, 즉 쾌활함의 형성이다.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서
발리의 일화에서 아이의 불만족은 교육적 효과가 있는 아픔에 상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신중한 상호작용 안에서 쾌활함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베이트슨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이러한 문화 형식이 몇몇 사람의 특별한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발리의 음악 또한 점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배제하고, 같은 모티브가 변주되고 반복된다. 발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 한국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최근 10여 년간 절정의 쾌감을 추구하며 급속하게 변형돼왔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렬하고도 평평하게 지속되는 쾌활함을 유지하는 법은 ‘잃어버린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09. 08. 31. 

P.S. 이 칼럼의 기여는 '쾌감'과 '쾌활함'의 의미를 명확하게 분절해놓은 것이다. 혹은 '쾌활함'이란 말의 용례를 새롭게 정의하고 제시한 것이다. 앞으로 '쾌활함'이란 말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전거로서 이 용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얻은 유익함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09-01 08:54   좋아요 0 | URL
그리스 수도원의 본심이 마음의 고원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면
님의 고원(블로거)도 쾌활함의 연대입니다. 지난 10년이 역사의
'쾌감'이었다고 하다면 일본의 오늘은 '쾌감',아니면 '쾌활함'
일까요?

로쟈 2009-09-01 20:53   좋아요 0 | URL
'쾌활함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죠.^^

종이 2009-09-02 10:02   좋아요 0 | URL
제대로 안 읽고 지나쳤던 좋은 글을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로쟈 2009-09-03 22:36   좋아요 0 | URL
네, 챙겨두고픈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