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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평점 :
십 년 정도 전에 읽었는데 이번에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것을 보고 재독했다. 책구매를 알라딘에서 하면 좋은 점 중 하나가 이 책이 집에 있는지, 언제 샀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보다 비스콘티의 영화를 먼저 보았던 것 같은데 이건 선후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소설도 영화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다.
나는 왜 이 소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시칠리아, 1860년대, 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 이탈리아 통일기라는 오래 전 시간이 배경이며 계급적으로도 귀족 신분인 영주가 주인공이다. 이러한 작품이 나에게 무슨 이유로 마음에 오래 남는 소설이 되었을까. 처음 읽었을 때는 살리나 영주의 입체적인 면모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주는 자신이 속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과 새로운 계층이 부상하는 것을 바라본다. 귀족적 우아함을 타고난 이 인물은 봉건 구조 속에서 영주로서 가장으로서 거칠 것 없이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리고 있으며 동시에 천문학자이기도 하여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에도 익숙하다. 그는 다가온 변화를 이해하고자 탐색하고 사유하고 판단한다.
변화에 대처하는 이 인물의 유연함에는, 어떤 우둔함이나 자기 계급에 대한 퇴행적인 고집이나 심지어 자기 핏줄을 우선하는 맹목도 비켜서 있을 수 있는 자기 객관화가 바탕이 되어 있다. 이런 점에 상당히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물러나는 한 세계의 장엄한 퇴장. 장엄함만큼 깊게 느껴졌던 쓸쓸함. 이런 부분들이 소설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에 남았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계층의 성쇠 부분 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소설은 내용상으로 계급의 몰락과 영주의 죽음이 조화롭게 잘 물려 있다. 파브리초가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부분과 그가 맞이하는 죽음의 장면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고 그러자 시간이 흘러도 이 작품의 생명이 끈질기게 유지되는 힘을 알 것 같았다.
파브리초는 구세대의 몰락과 새로운 계층의 대두를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변화의 중개자로 역할한다. 그 변화는 역겨운 어떤 것(두꺼비를 삼켜야 하는)을 포함하고 있으며, 세상의 악화일 수도 있지만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이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인다.
파브리초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로 생각을 이어가는데, 나는 31페이지 분량의 6장 전체를 차지하는 무도회 부분이 이 소설 전체의 축약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무도회장에서 인간 군상을 보며 영주가 느낀 피로와 혐오감과 흔쾌함과 잠깐의 열기, 새로운 세대를 위한 배려와 적절한 퇴장에 이르기까지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고, 서재에서 홀로 휴식하며 임종의 그림을 보는 장면은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했다. 무도회가 파하고 모두 지쳐 귀가할 때 영주는 마차를 거부하고 새벽별을 보며 홀로 걷는다. 거리에는 도살된 소를 싣고 가는 수레가 지나가고 있다. 영주는 별을 보며 위안을 느끼고 언제쯤이면 별과의 만남이 허락될 것인지 생각하면서, 기꺼이 그 품으로 가길 희망한다. 죽음은 별들의 품으로 가는 일, 그 역시 우주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기꺼운 일이다. 6장에 이 소설이 말하는 바가 다 담겨 있음을 깨달으며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에 무도회 장면이 그렇게 인상적으로 유려하면서 긴 분량을 차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한 무도회를 마치고 홀로 걸어가는 영주의 뒷모습으로 영화를 끝낸 것이 영화적으로 무척 적절한 선택으로 느껴졌다.
소설의 첫 장은 1860년, 영주의 가족이 모여 기도를 드리는 일과로 시작한다. 기도하는 홀의 천장과 바닥에 그려진 신화를 소재로 한 벽화와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이 집안의 웅장한 규모와 품격을 드러낸다. 기도 시간이 끝나면 문밖에서 기다리던 사랑받는 영주의 개 벤디코가 안으로 들어오고 자부심으로 빛나는 거구의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1910년, 1883년에 죽은 영주의 저택을 소유하고 관리하던 딸 콘체타가 오랜 세월 모으고 지녀왔던 유물들을 교회의 냉담한 기준 하에서 정리하고 버린다. 그리고 사십 오년 동안 박제되어 있던 벤디코를 내다 버리는 장면으로 끝난다.
죽음을 자연의 일부가 되는 일로, 변화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른 품에 대한 부러움을 가진다. 나도 콘체타처럼 과거에 연연하며, 변화를 두려워하고, 붙잡고 살 소품들에 의지하는 인간이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어 있는 손을 보며 그나마 찾아 가는 것은 책읽기의 장소이다. 언제쯤, 어느만큼 그런 유연함은 가능할 것인지 알 수 없다. 기꺼운 죽음의 한 모습을 반복하여 읽으며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