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길에서 전철에서 읽은 책은 새로 창간된 무크지 <담론과 성찰>(한길사, 2009)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그 추모 열기에 대한 좌담의 제목이 '바보의 용기와 눈물의 힘'이다. 분량이 80쪽 가까이 돼 다 읽진 못했는데, 그래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름호로 폐간된 <비평>의 자리를 메꿔주는 듯싶다. 지난주에 나온 소개기사를 옮겨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73718.html).  

한겨레(09. 08. 29) 추모의 종이비행기에 지성의 동력을 달다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희극)으로. 유초하 충북대 교수(철학)는 한길사가 새로 펴낸 무크지 <담론과 성찰> 1호에서 이명박 정권을 이렇게 야유했다. “이 정권이 지향하는 정책목표는 사상·표현의 자유 억압, 공공재의 사유화, 자연환경 파괴의 난개발, 재벌과 부자 편들기, 같은 민족 애먹이기, 외국에 굴종하기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노무현과 우리시대- 눈물에 엉긴 분노를 세상 바꾸는 힘으로’)  

유 교수는 일제의 조선인 창씨개명과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동원 사실을 부정하는 아소 다로 일본 총리와 덜컥 만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에 아리랑3호 위성발사 용역을 맡기고 식민지근대화론 신봉자들인 뉴라이트의 이데올로기 지원을 받는 현 정권을 ‘일본 2중대 정부’가 아니냐고 물었다. 지금 정권이 대표적인 외교‘성과’라고 자랑하는 게 고작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시리아·이란·북한의 지도자들을 만나겠다”고 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서 김정일을 만나지 못하도록 한 것 아니냐고 힐난했다.  



이전 시대를 반복하는 자들은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러내어 자신에게 봉사케 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이명박 정권은 다시 불러낸 3공·5공 군사정권의 망령, 즉 소극(笑劇)적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얘기는 그야말로 비극이자 “웃기지도 않는 개그”를 향한 조소다.

“이미 잊혔던 듯이 보이던 망령들이 무덤에서 깨어 일어나 시대의 공기를 무겁게 그러나 희극적으로 짓누르고 있다. 파시즘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집단 열등의식은 정치적 추동력의 열효율을 크게 높여주는 특급 연료로서 작동한다. 그래서 근대화에 뒤쳐진 사람들이 ‘조국 근대화’에 목을 맨 채 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자들을 따라갔듯이, 금융자본주의에 농락당했던 사람들이 ‘2만 불 시대’에 목을 맨 채 그들에게 당근을 내미는 자들을 따라가고 있다. 저 멀리에서 끌어당기는 목적론의 밧줄에 코가 꿰인 채, 덧없는 희망을 선전하는 얄팍한 미끼를 덥석 문 채.”(‘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관리사회 시대를 헤쳐 나가기’)

이 원장은 예컨대 대운하 구상은 그냥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개발독재시대의 총체적 반복을 어리둥절할 정도로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형상”이라고 했다. 일제 식민지로 귀결된 근대화 실패 집단 열등의식이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떠받친 연료가 됐고, 아이엠에프(IMF)와 월스트리트발 금융자본에 농락당해 소득 2만달러 꿈을 날린 대중의 열등의식이 ‘747’을 내건 이명박 정권의 새옷으로 치장한 개발독재를 밀어주는 동력이 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욕망의 정치’가 던진, 잘 살게 해주겠다는 미끼를 계속 물고 있는 한 희망은 없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반복 등장은 그냥 단순반복이 아니라 ‘차이’를 동반한다. 소극으로 다시 부활한 개발독재는 과거 3공·5공식 억압과 배제의 ‘통제사회’가 아니라 외형상 쿨하고 자유로운 유목사회의 형태를 띤 채 ‘차이배분’, ‘문화적 훈육’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을 ‘화폐회로’ 속으로 거두어들이는 철저한 ‘관리사회’다. 이걸 깨부수는 무기가 ‘소수자(마이너리티) 운동’이라고 이 원장은 생각한다. 소수자는 수적 소수 개념과는 무관한, 주류 다수자의 기득권체제에 구멍을 내고 무너뜨려 바꾸려는 비주류 저항·도전 세력이다. 그들은 소수자‘이기’가 아닌 의식적 소수자‘되기’ 운동을 통해 생성되는 존재이며, 차이를 동반하며 영원회귀적으로 반복되는 다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차이를 동반하며 반복 등장한다. 이처럼 기성체제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면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소수자되기(‘새로운 모습으로의 귀환’), 이것이 바로 진보의 토대다.    



<담론과 성찰 1>은 제목 그대로 바로 이 시대 진보를 위한 성찰과 담론 작업을 겨냥하고 있다. 김민웅 편집주간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내면의 근본적 변화”, “우리 정신의 좌표를 바로 세우는 훈련의 장”이라는 말도 했다. 책의 본마당 격인 좌담(사진) ‘바보의 용기와 눈물의 힘’은 수백만을 울렸던 전대미문의 노무현 전 대통령 ‘조문 현상’을 현장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진단했다. 책을 기획하고 대담을 진행했을 때의 상황은 뒤이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로 그 뒤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나 애초의 문제의식은 빛이 바래기는커녕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절실해졌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는 노 전 대통령 비극을 통해 소극으로 부활한 망령의 본질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태‘역전’에 주목했다. “보수계 인사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천박하다, 품위없다, 천골이다 이렇게 몰아붙였다. 그런데 …지금 형국이 반전돼버렸다. 점잖게 말하던 자들이 오히려 가짜 품격이고 비열한 자들처럼 비치고, 비천하게 말하는 것 같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쪽의 어투와 태도는 오히려 정직하고 솔직했던 것으로 자리가 뒤바뀐다. 많은 국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것도 그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속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높은 미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역사학자답게 서울과 봉하의 조문 현장뿐만 아니라 사이버 여론까지 꼼꼼히 살핀 한정숙 서울대 교수는 이를 “정신사적으로 보면 바보가 상징하는 내면의 진실성과 진실의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읽었다. 영결식 사회를 맡기도 했던 도종환 시인은 시민사회가 이끌어가는 민주주의 공동체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해 작은 차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 “영원히 농락당하는 사회”로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상·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정도의 자유민주주의 안착을 보장할 만큼의 단결도 이루지 못해 “이런 지긋지긋한 정권이 연장되도록 허용하면서 진보를 자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 유초하 교수의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사회를 본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는 비극적 사건의 충격을 통해 비로소 작동되는 게 아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생각하는 사회’” 만들기를 주문했다.

지리학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홍천강변에서 20년- 어느 지리학자의 주경야독 농촌생활기’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내면의 근본적 변화’가 왜 절박한 것인지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는 절창이다.(한승동 기자)  

09. 09. 01. 

 

P.S. 두 번 반복되는 역사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명이 떠올리게 해주는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도서출판b, 2008)과 슬라보예 지젝의 <처음엔 비극으로, 그 다음엔 소극으로>(2009)다. 지젝의 책은 근간 타이틀인데, 96쪽의 얇은 책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출판사(Verso)의 책소개는 이렇다. 

From the tragedy of 9/11 to the farce of the financial meltdown

In this bravura analysis of the current global crisis following on from his bestselling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Slavoj Zizek argues that the liberal idea of the “end of history,” declared by Francis Fukuyama during the 1990s, has had to die twice. After the collapse of the liberal-democratic political utopia, on the morning of 9/11, came the collapse of the economic utopia of global market capitalism at the end of 2008.

Marx argued that history repeats itself “occuring first as tragedy, the second time as farce” and Zizek, following Herbert Marcuse, notes here that the repetition as farce can be even more terrifying than the original tragedy. The financial meltdown signals that the fantasy of globalization is over and as millions are put out of work it has become impossible to ignore the irrationality of global capitalism. Just a few months before the crash, the world’s priorities seemed to be global warming, AIDS, and access to medicine, food and water — tasks labelled as urgent, but with any real action repeatedly postponed.

Now, after the financial implosion, the urgent need to act seems to have become unconditional — with the result that undreamt of quantities of cash were immediately found and then poured into the financial sector without any regard for the old priorities. Do we need further proof, Zizek asks, that Capital is the Real of our lives: the Real whose demands are more absolute than even the most pressing problems of our natural and social world?

“Zizek leaves no social or cultural phenomenon untheorized, and is master of the counterintuitive observation.” — New Yorker

“One of the most innovative and exiciting contemporary thinkers on the left.” — Time Literary Supp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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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9-03 05:58 
    바보의 용기와 눈물의 힘 —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소극으로… (via 로쟈)
 
 
펠릭스 2009-09-01 20:26   좋아요 0 | URL
바보의 용기는 언제나 눈물을 동반합니다.
노을보며 울먹였던 것은 걷는 행인이 바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올바른 절망 탓에,,,,

"집단적 망각"의 근원은 국가에 대한 불신에 반작용에서
일어나는 증상라고 생각합니다. 국민(개인)의 세가지 주요
관심은 좋은 일자리 문제, 교육의 문제, 주거의 문제에
대한 상대적 박탈에 극적인 표현(촛불)이지만, 결국은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누구도 챙겨주지 못할 것이라는
피해의식이 '집단적 망각'속에 있다 순간 순간 폭발하고
빨랑 제자리로 가는 노하우를 갖고 있는 듯 합니다.
(결국 믿을 놈없다는 불신의 누적과 믿고 따를 지도자 부재)

그 건망증(망각증 대신)을 안아야 합니다.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지식인들의 새로운 글쓰기, 관념적 난해성에 대한 반성,
자신들의 삶과 역사에 대한 무책임성 깨기를 병행하겠다고 했다."


로쟈 2009-09-01 20:55   좋아요 0 | URL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몸에 새겨녛기라도 해야 할 듯해요...

게슴츠레 2009-09-02 12:39   좋아요 0 | URL
지젝의 '두꺼운 최근작'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도 번역출간되었더군요.

로쟈 2009-09-02 15:46   좋아요 0 | URL
9월말쯤 나오는 줄 알았는데, 빨리 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