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대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괌은 계속 비. 아침에 제법 내리던 비가 조금 잦아들고 있는데 대략 세 시간 간격으로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하는 모양이다. 이곳 우기의 전형적인 날씨 패턴인듯(오래전 기억에 모스크바의 봄날씨가 그랬다. 봄비가 자주 내렸다가 그첬다가). 날씨와 현지사정으로 미리 계획한(내가 계획한 건 아니고) 일정을 계속 변경하고 있는데, 오늘의 일정은 수영이라고 한다. 딱히 내키는 일은 아니어서 나는 먼저 책을 보다가 내려가기로 했다.
오늘 읽을 책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다. 강의준비차 다시 읽는 것인데, 사실 나보코프의 소설들 가운데 여러번 읽기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기도 하다. 시와 주석을 왔다갔다하는 과정이 독서의 경로라면 이론적으로는 무한에 가까운 경로의 독서가 가능한 것이 <창백한 불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독서가 장소의존성을 갖는 것은 아니어서 한국에서 읽는 것과 괌에서 읽는 것이 차이날 이유는 없다. 시칠리아에서 읽는 것과 뉴욕에서 읽는 일이 별차이가 없을 것처럼.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날이 개는 중이다. 괌의 와이키키로 불린다는 투몬비치의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눈길을 침대 하얀 시트 위에 놓인 <창백한 불꽃>으로 돌린다. 이제 보니 지난봄(4월초)에 강연회를 갖기도 했다. 4개월 만에 다시 손에 드는 셈인데 장소가 괌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