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하루 종일 읽던 책 대신에 집어든 게 그레고어 아이젠하우어의 <내 인생의 결산 보고서>(책세상, 2015)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가장 짧은 대답'이라는 부제까지 고려해도 어떤 책인지 구체적으로 가늠이 되진 않는다. 소개를 보니 저자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추모기사 작가'라는 점(독일에서는 업종이 전문화돼 있나 보다). 그리고 그 경력을 살려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열 가지'를 추린 게 이 책이다. '인생 결산용 질문 열 가지'가 컨셉이라고 할까. 저자의 제안은 열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내 인생의 추도사' 곧 셀프 추도사를 써보라는 것. 열 가지 질문은 이렇다.  

 

첫 번째 질문_ 스스로 생각할 것인가, 남에게 시킬 것인가?
두 번째 질문_ 왜 사는가?
세 번째 질문_ 나는 행복한가?
네 번째 질문_ 나는 아름다운가?
다섯 번째 질문_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여섯 번째 질문_ 무엇을 해야 하나?
일곱 번째 질문_ 누구를 위해 해야 하나?
여덟 번째 질문_ 신은 있는가?
아홉 번째 질문_ 내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열 번째 질문_ 죽어서도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다 답하려고만 해도 몇 년은 더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 저자가 '가장 짧은 대답'이란 조건을 내걸었나 보다(저자는 각 질문당 30분씩만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내 인생의 추도사'도 세 페이지만 써야 한다고. 아무도 그 이상은 읽어주지 않아서일까?). 

 

책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첫번째 질문만 컨닝을 했다. '스스로 생각할 것인가, 남에게 시킬 것인가?' 사실 이건 그 자체로 첫 질문이어야 한다.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란 걸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의 요건에 관한 질문은 세 가지다. 1)얼마나 길게 생각해야 할까? 2)어디서 생각해야 할까? 3)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자세로 생각해야 할까? 요약하면, 생각의 분량, 장소, 자세를 정해두라는 것. 그렇게 해서 셀프 추도사를 쓰기 위해 열 가지 질문에 답하는 '30분 철학자'가 돼 보라는 것인 듯하다.

 

 

흠, 당장 실행에 옮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적당한 때 적당한 장소에서 시도해봄직하다는 생각은 든다. 생각도 기력이 있을 때 가능하므로, 정신이 온전할 때 말이다. 찾아보니 저자는 1960년생이고, 원저는 작년에 나왔다. 나도 50대 중반에 가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해볼까. 그래봐야 아주 먼 미래는 아니군...

 

15. 0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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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한번 하는 청소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전에 '이주의 발견'을 적는다. 오랜만에 여행서를 한 권 골랐다. 이원근의 <주말에는 아무데나 가야겠다>(벨라루나, 2015). '우리가 가고 싶었던 우리나라 오지 마을'이 부제다. '주말'이란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의 8할은 여행서로 보이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주말에 아무데도 못 가는 사람들에겐 '그림의 책'. 그나마 '오지'라서 쉽게 갈 수는 없다는 핑계를 대본다. 그렇지만 '눈으로 하는 여행' 가이드북으로서도 쾌적하다. "이 책을 읽고 여행을 가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이원근 작가의 아버지는 하루라도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몸살이 날 정도로 여행을 사랑하는 여행쟁이이다. ‘승우여행사’의 대표로 국내여행을 개척해왔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원근 작가는 ‘여행박사’라는 여행사의 국내여행 팀장으로 17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답사를 했고, 다양한 코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여행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으며, 인솔하고 가이드해왔다. 이 책은 그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온 여행과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오래 전부터 시작된 그들의 동행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손바닥만할 거라고 예단하기 쉽지만 찾아보면 의외의 오지 마을이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절반이 강원도다!).

 

찾아보니 오지만 전문으로 찾는 오지 여행가들도 있는 모양이다. 해외 오지 여행서로서 이정식의 <세상 끝 오지를 가다>(쌤앤파커스, 2010), 박상주의 <세상 끝에서 삶을 춤추다>(북스코프, 2009) 등이 눈에 띈다. 세계의 오지까지 갈 일이 있을까 싶지만, 책으로 둘러보는 여행쯤이야 언제든지, 얼마든지...

 

15.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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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를 다룬 국내 학자들의 책 두 권을 관심도서로 같이 묶는다. 먼저 정병준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돌베개, 2015).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 부제인데, 그 경계인이 물론 제목의 현앨리스이다.

 

일제하 중요 독립운동 인사였던 현순 목사의 맏딸로 제1호 하와이 출생 한국인이자 박헌영, 김단야 등과 독립운동, 재미한인 진보운동에 헌신했던 현앨리스의 비극적 삶과 그 시대를 조망한 책으로, 현앨리스의 개인사에서 출발해 현앨리스와 아들 정웰링턴의 가족사를 거쳐 4세대에 걸친 현씨 집안의 근대사를 다룬다.

'박헌영의 애인'이나 '미국 스파이'이라는 추정만 있었던 한 여인의 삶을 추적하면서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실체적 진실을 복원하려고 한다. '연구'의 성격이 강한 책인데, 문학적 형식으로 푼 책도 나옴직하다는 생각이 든다(어쩌면 영화로도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고).

 

5인의 국내 학자가 공저한 <1970, 박정희 모더니즘>(천년의상상, 2015)는 공저자이기도 한 천정환, 권보드래 교수의 <1960년을 묻다>(천년의상상, 2012)의 속편으로 읽힌다. '유신에서 선데이서울까지'가 부제. "이 책은 박정희부터 이름 없는 장삼이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삶을 통해 유신 시대에 대한 기존 해석이 그동안 조명하지 않았거나 소홀히 다뤘던 부분에 주목하여 문화와 문학, 그리고 역사와 정치학의 사유로 1970년대를 입체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근대화' 같은 용어 대신에 '모더니즘'을 키워드로 삼은 것이 눈에 띈다(첫 장의 제목이 '유신의 모더니즘'이다). 유신의 재구성, 유신의 재조명이라고 할 수 잇을까. 저자들의 의도는 이렇게 요약된다.

보수에게 유신 시대(1972-1979년)는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영광의 시기다. 반면 진보에게는 1948년 제헌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가 압살당한 오욕의 시기다. 두 입장은 1970년대 한국 사회가 경험한 근대화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정치·경제 영역에 중심을 두고 유신 시대를 파악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1970년대의 일상을 구성했던 구체적인 장면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니까 문화와 일상에 초점을 맞추어서 유신 시대를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는 것. 그런 의도에 흥미를 느낀다면, 일독해볼 만하다...

 

15.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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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여성 작가 리디 살베르의 산문집 <일곱 명의 여자>(뮤진트리, 2015)가 출간됐다. "글쓰는 일이 삶의 전부인, 불붙은 일곱 명의 여자"를 다룬 책인데, 그 일곱이란 에밀리 브론테, 주나 반스, 실비아 플라스, 콜레트, 마리나 츠베타예바, 버지니아 울프, 잉에보르크 바흐만이다. 주나 반스만 생소한 편. 이 일곱 명의 저자는 "일곱 명의 미친 여자들"이라고도 부른다. 츠베타예바는 이렇게 말했다. "글 쓰는 일을 뺀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미친 여자들이다.

 

 

리디 살베르느는 지난해 <울지 않기>란 소설로 공쿠르상을 수상했는데,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만큼 작가적 역량은 충분히 신뢰해봐도 좋겠다(작품도 번역되면 좋겠고). 기타 여러 작품이 영어로도 번역돼 있는데, 그 가운데 <애완동물로서 작가의 초상>이란 제목이 눈에 띄어 살펴보니 이미 <끝내주는 회장님의 애완작가>(창비, 2010)라고 번역돼 있다.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책이니 그냥 묻힌 작품 같다(번역서 제목도 별로 인상적이지 않다. 원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아무튼 <일곱 명의 여자>가 만족스럽다면, <애완작가> 또한 읽어볼 참이다.

 

 

한편 일곱 명의 여자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는 작가는 단연 버지니아 울프인데, 최근에도 에세이집 <나방의 죽음>(솔출판사, 2015)이 출간됐고, <댈러웨이 부인>(책읽는수요일, 2015)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수전 셀러스의 <그녀들의 방>(안나푸르나, 2015)도 관련서인데, "현대소설의 선구자 버지니아 울프의 미술가 언니 바네사 벨의 시선으로 그녀들의 일생과 시대, 예술 세계를 담은" 장편소설이다.

 

 

콜레트는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를 말하는데, <암고양이, 2013), <방랑하는 여인>(지만지, 2013), <여명>(문학동네, 2010) 등이 번역돼 있다.  

 

 

바흐만의 대표작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삼십세>(문예출판사, 2005)이며, <말리나>(민음사, 2010)와 <동시에>(북스토리, 2006)가 번역돼 있다.

 

 

실비아 플라스의 경우엔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마음산책, 2013)과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문예출판사, 2004)가 나와 있으며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마음산책, 2014)까지 출간됐으니 별로 아쉬울 게 없는 편. 아쉬운 건 츠베타예바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경우는 물론 <폭풍의 언덕> 정도를 챙겨놓으면 되겠다. 더 꼽을 만한 다른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15.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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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리처드 솅크먼의 <왜 우리는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인물과사상사, 2015)를 고른다. 부제는 '욕망과 무지로 일그러진 선거의 맨얼굴'이고 미국의 현실을 다룬 책이지만,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네 얘기다.

 

저자 리처드 솅크먼은 이번 책에서 과감하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도전한다. 그는 9·11 사태 이후 부시 정부의 전횡과, 정부의 선전과 선동에 무방비로 속아 넘어가 전횡을 가능케 한 미국 국민들에 대한 실망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 솅크먼은 ‘대중의 어리석음’이라는 난제에 도전하기 위해 각종 여론조사 자료를 언급함은 물론, 미국의 건국 시대로 내려가 과거 미국의 정치는 어떠했는지까지 살펴본다. 그리하여 그는 유권자로서의 국민은 늘 그르지도 않았지만, 늘 옳지도 않았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국민의 현명한 판단을 가로막는 수많은 우민화 장치(언론 조작, 감정에 호소하기, 우리 내부의 편향성 등)의 범람 속에서, 어떻게 ‘현명한 유권자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기를 호소한다.

정확하게 한국판도 나왔으면 싶은 책이다. 조자는 조지메이슨대학교의 역사학과 부교수로 <미국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를 포함해 다섯 권의 역사서를 썼다고 소개된다.  <미국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미래인, 2003)과 <세계사의 전설, 거짓말, 날조된 신화들>(미래인, 2001)이 오래 전에 번역되었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 너무 일찍 번역됐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한국판 <왜 우리는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가 당장에 나와 있지 않아서, 대체해볼 만한 책을 떠올려봤는데, 국민의 어리석음이 어떤 재앙을 초래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좀 부족해 보이지만) <또, 라이 가카>(책으로보는세상, 2012)부터 <MB의 비용>(알마, 2015)까지 참고해볼 수 있겠다. 아직 전모도 다 드러나지 않은 국가적 재앙을 누군가는 '대통령의 시간'이라고 부른다지만, 말은 바로 하자면 '대국민 사기의 시간'이라고 해야겠다. 그 비용처리가 아직도 까마득한...

 

15.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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