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여성 작가 빅토리야 토카레바(1937- )의 중편소설 <눈사태>(지만지, 2010)가 번역돼 나왔다. 내가 알기에 토카레바의 작품으론 <러시아 여성의 눈>(경희대출판부, 2005)에 실린 단편 <늙은 개>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전부다(이 단편집에는 바실렌코와 울리츠카야, 페트루셉스카야 등의 작품이 더 실려 있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해설을 보니 현대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세태묘사'의 대표적인 작가로 소개된다. 역자는 토카레바의 중단편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한 전공자이지 않을까 싶다.   

토카레바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역 여성작가로 톨스타야, 페트루셉스카야, 울리츠카야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다. 이 중 톨스타야의 경우는 작품집이 두 권 번역돼 있고,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울리츠카야의 경우도 조만간 한두 작품이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다시 토카레바로 돌아오면, '일상적 휴머니즘' 작가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고단한 일상에 지친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랑의 작용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의 '일상적 휴머니즘'이란다. <눈사태>는 1995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흥미로운 건 2001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는 점. "불륜, 욕망, 이혼, 가족의 해체, 마약, 알코올중독 등과 인간존재의 근원적 질문인 인간의 운명, 삶, 사랑, 행복" 등을 다룬다고 한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고.  

주인공 메샤체프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유년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안정된 가정의 성실한 가장으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나 음악과 가족밖에 모르던 그에게 젊고 아름다운 률랴가 나타나면서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결국 그는 느닷없이 밀어닥친 '눈사태'와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욕망에 휩쓸려 여태까지 쌓아올린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고(가족과 재산은 물론, 심지어 그의 음악적 재능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만을 안고 홀로 남게 된다.

한국형 드라마로도 잘 어울릴 만한 스토리다. 영화로는 어떻게 옮겼을까? 한번 찾아봐야겠다... 

10. 01. 31.  

P.S. 참고로, 내가 기대하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의 책들은 독어와 영어로 다수 번역돼 있다. 영역된 작품으론 <소네치카>,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 <장례식 파티> 등이 알라딘에서도 검색된다. 외모에서부터 지성파 작가란 인상을 팍팍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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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3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동과 이변 그리고 갈등 등이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영미문화권 외로 동아남나 일본문학,스페인 문학, 프랑스와 독일 문학 등을 비롯하여 제3세계 문학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러시의 현대문학은 어떤 흐름인지를 여류작가의 작품으로 알 수 있겠군요.

로쟈 2010-02-01 14:56   좋아요 0 | URL
상대적 덜, 미흡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아쉽습니다...
 
레르몬토프의 고독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내가 강조한 건 소설의 주인공 페초린이 자의식을 가진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라는 점이다(레르몬토프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도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가장 좋아한 작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곧 늙어가면서 그의 고독과 낭만적 환멸에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됐지만, 엊그제 안나 게르만의 목소리로 레르몬토프의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으려니까 다시금 뭔가 아련한 감상 같은 것에 젖게 되었다(http://www.youtube.com/watch?v=Bl9VDbRwOxo). 그녀의 노래는 국내에서 언젠가 TV드라마의 주제가로도 쓰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우리시대의 영웅>의 새 영화 버전도 유튜브에는 올라와 있다(영화는 1966년판, 1975년판, 2006년판 등이 있다). 겸사겸사 어제 강의 자료의 일부와 함께 이미지들을 올려놓는다. 아래 자료는 박사학위논문의 일부이기도 한데(학위논문인지라 말은 좀 어렵게 써놓았다), 논문은 올 하반기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푸슈킨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네긴과 작별을 고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그의 분신적 형상인 페초린과 보다 긴밀한 유대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1인칭 시점하에 페초린의 내밀한 언어로 보다 밀착된 페초린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레르몬토프는 <우리시대의 영웅>(1840)에서 (남편에 대한 지조를 맹세한 타치야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페초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떠나가 버린  베라를 (벼락을 맞은 듯이 서 있던 오네긴과는 달리)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아 가는 페초린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내 말이 10분만 더 달릴 힘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계곡에서 올라와 산에서 벗어나 가파른 모퉁이에 이르자, 말은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뛰어내려, 말을 일으키려고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들릴 듯한 신음소리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몇 분 후에 말은 숨을 거두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채 홀로 초원에 남았다. 걸어서 가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낮의 불안감과 간밤의 불면 때문에 기진맥진한 나는 축축한 풀밭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민음사판으론 217쪽) 

그렇게 울기 시작한 페초린은 한참동안 통곡을 하며,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의연함’과 ‘냉정함’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인용한 대목에서는 페초린의 가장 약한 모습이, 그의 ‘성격갑옷’이 일시적으로 제거된 채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본모습이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현실에서 좌절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정서적인 상관물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다. 그것은 페초린 자신이 곧 자인하듯이, 대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경멸적으로 외면할 만한 모습이다. 때문에 평소의 페초린이라면, 철저하게 가장했을 터인데, 이 문제의 장면에서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여기서 페초린 자신의 분신이자 그의 신체의 연장(extension)으로서의 말은 가파른 모퉁이에서 쓰러지는데(이 말이 쓰러지자 페초린은 더 걷지 못한다), 모퉁이란 두 공간이 서로 이접되는 지점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모퉁이, 즉 전환점에서 시간이 이접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간축 상의 전환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접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예비)어른의 경계이다. 하지만, 페초린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상징계적 차이의 질서를 수용하지 못하며/않으며 상상계적 자아상에만 집착한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왜소함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연후에만, 전능함에 대한 자신의 꿈을 단념한 연후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요구에는 이러한 인정/단념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전부에 대한 요구를 계속적으로 고집하며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이며, 그런 점에서 작가 레르몬토프의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초린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억압돼 있으며, 카프카즈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인 막심 막시므이치는 너무 나약한 권위의 ‘아버지’인데(페초린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만>에서의 얀코가 유일한다), 이것은 레르몬토프적 상황과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레르몬토프적 상황이란 것은 2자적 관계에서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상실하고 3자적 관계에서 그가 이상적-자아로서 지향해야 할 ‘아버지’는 약화/결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낳은 원인은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기도 했고,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부부간의 불화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로 그는 상상계와의 이접 이후에 상징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할당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선 ‘상징적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와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팔루스적인 어머니’ 혹은 ‘남근을-가진-어머니’가 대신한다.  

‘남근을-가진-어머니’란, 성교 중에 아버지의 음경을 ‘잘라내어’ 자기 것으로 만든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팔루스의 상징을 ‘거세’한 어머니이다. 레르몬토프에게서 이러한 팔루스적인 어머니상과 일치하는 것은 외조모 아르세니예바 부인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자신 속에 ‘나’를 다시 집어넣은, ‘나’를 다시 흡수한, 그래서 ‘나’를 자신의 팔루스로, 혹은 무(無)로 환원시켜버리는 ‘어머니’이며, 그것은 행복과 죽음의 현혹이다. 이에 대한 레르몬토프적인 공포는 페초린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반영돼 있다. 그에게 결혼이란 말은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는데, 불가피한 결혼에 대한 연상은 모든 열정에 종말을 가져오며, 그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버리게 만든다. <공작의 딸 메리>에서의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이 결혼만 아니라면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스무 번이라도 내 생명을, 심지어 명예까지도 내기에 걸겠다... 하지만 나의 자유는 팔아넘길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가? 그 속에 있는 무엇이 내게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나는 미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타고난 공포이며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다. 거미나 바퀴벌레나 쥐들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고백해야할까?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한 노파가 어머니에게 나의 대한 점을 쳐준 일이 있다. 그때 노파는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내게 예언했다.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나의 마음에는 결혼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혐오감이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가 노파의 예언이 실현될 거라고 내게 말해주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늦춰지도록 노력할 것이다.(민음사판으론 186-7쪽)

여기서 페초린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댄다. 하나는 사람들이 거미나 바퀴벌레, 쥐를 무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타고난 공포’라는 것이고,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란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각인될 수 없는 것이며, 이 ‘타고난 공포’는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두 번째 이유와 양립되지 않는다. 또한 노파의 예언이 두려워서 결혼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는 것도 사실 <운명론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페초린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것이다. 페초린적인 태도는 결혼이 두려워서 회피하기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나보코프는 페초린의 죽음이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는 도중의 불행한 결혼과 연관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이 두 가지 이유는 페초린의 제2의 본성(second nature)으로서 결혼에 대한 공포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억압되어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란 무엇일까? 레르몬토프의 전기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남근을-가진-어머니’에 대한 공포, 즉 거세 공포이다. ‘본능적으로’란 말은 현대적인 관점에선 ‘무의식적으로’란 의미인데, 거미나 바퀴벌레 등 다리가 많은 동물들의 무의식적인 상징 또한 거세공포이다(다리가 많은 것은 자신의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서 ‘남근을-가진-어머니’는 자궁회귀본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와는 다른 어머니이며, 이 ‘팔루스적인 어머니’로의 회귀가 ‘어린아이’로서는 죽음에의 현혹이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페초린의 경우에 노파의 예언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이 거세 공포에 대한 상징적인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파의 예언은 그의 거세공포에 대한 사후적인 승인에 해당한다.   

결혼의 불가라는 예언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시간은 연속적이며 균질화된 시간이다. 그러한 지평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지 않다. 레르몬토프의 공간적 상상력이 대지와 하늘을 두 축으로 한 은유적인 상상력이었다면, 그의 시간적 상상력은 (페초린의 경우에 미루어서 말하자면) 예언에 속박된 환유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환유적 상상력 속에서 ‘나’는 세계 전체로 확장될 수 있지만, ‘너’라는 타자의 세계로의 비약은 가능하지 않다. 때문에 레르몬토프의 창작세계에서 ‘나’의 고독은 필연적이다... 

10. 01. 19. 



P.S. 2006년작 <우리시대의 영웅>의 하일라이트는 http://www.youtube.com/watch?v=UENblKYDTMY 참조. '공녀 메리'('공작의 딸 메리')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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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9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馬)이라는 상징성에 남성상(男根)까지 비유하는 건 좀 무리겠죠?" -책도 안 읽어보고 페이퍼의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의견-

로쟈 2010-01-19 23:24   좋아요 0 | URL
러시아문학에선 보통 여성을 상징합니다.^^

펠릭스 2010-01-1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단락은 '페티시즘(Fetishism)'과 비슷한데요.

로쟈 2010-01-19 23:26   좋아요 0 | URL
연물주의란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펠릭스 2010-01-20 08:11   좋아요 0 | URL
예,,신체의 특정부위나 특정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인데요.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왜곡현상중에 하나로 일본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에서 뛰어나게 묘사되던데요.

카스피 2010-01-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이 재간되었군요.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21 07:29   좋아요 0 | URL
네, 고전은 정의상 다시 읽는 책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1-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남자배우가 정말 미남이군요.여배우들보다 더 눈에 띕니다.특히 눈썹과 수염이 예술이네요.

펠릭스 2010-01-22 19:43   좋아요 0 | URL
권총든 얼굴이 로쟈님과 비슷(?)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2 23:50   좋아요 0 | URL
그건 좀...
 

극단 전망의 <바냐 아저씨>를 오늘 관람할 예정이다. 어제 프레스콜이 열렸는데, 소개기사를 미리 읽어보았다. 올해는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의 <바냐아저씨>도 5월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http://www.lgart.com/2010/micro_kor/theatre_03.html). 지난 2004년에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작품이어서 감회가 없지 않다. 여러 작품이 한꺼번에 찾아와 '체호프의 가을'로 불렀던 2008년 가을에는 못 미치겠지만, 체호프 탄생 150주년을 맞는 올해는 적어도 공연에 있어서만큼 '<바냐 아저씨>의 해'로 불러도 좋겠다(개인적으론 올해 체호프에 대한 강의 레퍼토리도 <바냐 아저씨>로 바꾸었다). 두 <바냐 아저씨>에 대한 소개를 옮겨놓는다.     

아츠뉴스(10. 01. 07) 인생의 아이러니와 닮아있는, 연극 '바냐아저씨'  

2010년 1월 극단 전망이 선보일 연극 <바냐아저씨>(연출 심재찬)는 20세기 현대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리얼리즘 연극의 대가인 안톤 체홉의 4대 작품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중 하나로, 안톤 체홉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첫 공연이자 아르코예술극장의 2010년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되어 관객들에게 신뢰와 기대감을 고조시킬 것이다.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 안톤 체홉의 4대 희극중 하나인 <바냐아저씨>의 이번 연극무대는 탁자2개와 의자3개뿐인 주 공간(사실적 연기 공간)과 8명의 각자 독립된 자아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무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8개의 자아공간은 스스로에겐 자유롭지만 외부와 단절되어있어 마치 새장에 갇혀있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으며 이는 서로간의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작품의 주제를 공간적,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무대 위 주 공간 안의 두 개의 탁자는 각 막마다 그 위치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배우들의 동선은 각 장면이 갖는 메시지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 인물의 감정선 등을 관객에게 뚜렷하게 전달해주고자 한다.

미니멀하고 비현실적인 이번 무대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심리, 이중성)'이 대단한 체홉의 작품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무엇보다 <바냐>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두고자하는 심재찬 연출과 하성옥(무대디자이너), 최형오(조명디자인), 김철환(음악), 김혜민(의상), 이동민(분장)등 최고의 스텝들이 참여해 관객에게 의미를 더 잘 전달해줄 것으로 조명된다.

또한 연기파배우 '김명수, 김수현, 이지하, 김지성, 조한희, 이종구, 전국향, 한성식, 강현우'가 선보일 사실주의적 연기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룰 연극 <바냐아저씨>는 2010년 1월 7일부터 1월 17일까지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김수정기자)  

  

레프 도진&말리 극장: 바냐 아저씨

이 시대 연극이 존재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를 깨닫게 해 주는 연출가, 세계가 사랑하는 연극의 거장 레프 도진. 그가 이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이 2001년 <가우데아무스>와 2006년 <형제자매들>에 이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로 다시 돌아온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유산 위에 실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연극언어를 펼쳐온 레프 도진은 198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모스크바의 하늘>, <집>, <형제 자매들>, <플라토노프 제목없는 희곡>, <체벤구르>, <갈매기>, <바냐 아저씨> 등 주옥 같은 레퍼토리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이름없는 작은 극장에 불과했던 말리 극장을 세계적인 예술극장으로 키워냈다. 레프 도진은 이미 러시아 연극계 최고 권위의 황금 마스크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것을 비롯해 피터 브룩, 하이너 뮐러, 피나 바우쉬, 아리안느 므누슈킨 등이 수상한 바 있는 유럽 연극상을 수상하였고,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 프랑스 비평가상, 이탈리아 UBU등 세계 유수의 연극상을 다수 수상하며, 명실공히 세계 연극계의 거장으로 존경 받고 있다

피터 브룩은 말리극장을 ‘세계 최고의 앙상블’이라고 칭한 바 있다. 레프 도진의 연극이 무대 위의 삶을 실제로 믿게 하는 힘, 배우들의 삶에서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드는 힘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완벽하게 구현된 인물들, 그리고 그 관계 속에 존재하는 뛰어난 앙상블에 있다. 레프 도진은 관객들이 지닌 평가의 잣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생생한 삶의 진실을 마음 가득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레프 도진은 ‘바냐 아저씨’를 체홉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정수)로 꼽는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기를 ‘20년 동안 계속 생각해 왔으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가’ 2003년 드디어 무대화했다. 그의 오랜 기다림과 숙고는 체홉 연극이 담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다각적이고 깊은 통찰을 놀랍도록 디테일하게, 그리고 더할 수 없이 명징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과 상실, 인생의 무상함과 그럼에도 또 다시 견뎌내야 하는 삶. 레프 도진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은 ‘바냐 아저씨’를 통해 우리 각자가 어떻게 그 순간들을 살아내는지 들여다 보게 해 줄 것이다.  

10. 01. 08.  

P.S. <바냐 아저씨>의 가장 유명한 영화판은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작(1970)이다(콘찰로프스키에 대해서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린 대담도 참고할 수 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렵지만,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된 적이 있다. 자막은 없지만,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시간을 내보셔도 좋겠다(http://www.youtube.com/watch?v=JkqQXu9T2KI). <전쟁과 평화>의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가 바냐의 친구인 의사 아스트로프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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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숲귀신과 바냐 아저씨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22 00:20 
    안톤 체호프 원작의 <숲귀신>이 이번주 일요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여유가 없다 보니 관람기회는 놓쳤는데, 그래도 리뷰는 챙겨놓는다. 드디어 내달초에 찾아오는 러시아 말리극단의 <바냐 아저씨>공연 안내와 함께.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지만 도진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뉴스컬처(10. 04. 19) 121년 만에 빛을 본 연극 [숲귀신]&#
 
 
sophie 2010-01-08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극장이 한국에서 <벚꽃동산>도 했던 것 같은데 다른 극단이었는지 확실치 않네요. Lg 아트센터는 다 좋은데 관람료가 지나치게 비싼 것 같아요. 오늘 브로츠와프에 있는 그로토프스키연구소에 들렀다가 피터 브룩의 <11,12>를 한다고 해서 살까말까 하다가 샀습니다. 티켓값이 40즈워티(16000원)이던데요? <바냐아저씨>가 무대에 오르신다는 소식은 반가운 소식이네요.

로쟈 2010-01-08 10:31   좋아요 0 | URL
말리극장이 재작년에 <세자매>를 공연했었죠. <벚꽃동산>은 제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러시아에서도 관람료는 저렴한 편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좀 비싸죠. '일상화' 돼 있지 않아서겠ㅈ죠...

sophie 2010-01-09 05:30   좋아요 0 | URL
<벚꽃동산>은 호암아트홀 개관기념 공연이었다네요. 워낙 오래전이라 커다란 벚꽃나무만 기억에 남아있어요. <바냐아저씨>도 오래전에 읽어서 무척 좋았다는 기억만 남아있어서 아마 공연을 보게 된다면 다시 읽어야할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이상한 건 체홉의 대표작들을 읽고 나면 전체가 한 작품인 듯 이 작품이랑 저 작품 같고 저 작품이 이 작품 같아요. ^^;;

로쟈 2010-01-09 09:41   좋아요 0 | URL
체홉을 잘 아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10-01-08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미뜨리 2010-01-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는 모스크바 말리극장이 <세자매>를 선보였는데, 올해는 페테르부르크의 유럽극장이 <바냐 외삼촌>을 가지고 오네요. 한국에서는 도진 선생이 어떻게 상연하련지 매우 궁금합니다. 아무튼 모두에게 유익한 공연되리라 봅니다. 늘 좋은 소식 감사드립니다.

추신: <갈매기>와 더불어 <벚나무밭>에 이르기까지 체호프의 4대 희극이라고 하셨는데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저의 내공으로는 아직 이해할수 없는 점도 많지만 일면 동의하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페테르부르크 텍스트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둔다. 두 주 전 기사인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내친 김에 오래전에 쓴 글도 찾아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한겨레21(09. 12. 04) 환각의 도시를 떠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 

‘성 베드로의 도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업’이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발트해 어귀의 황량한 늪지에 건설된 이곳은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과 유럽의 모더니티가 착종된 이종접합’의 인공도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이종교배’의 문화가 그 도시의 고갱이다. 이덕형 성균관대 교수(러시아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펴냄)에서 그 ‘환영의 도시’에서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몽환의 공간 ‘판타스마고리아’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과 역설, 이율배반과 정신착란,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누구보다도 먼저 민감하게 느꼈던 사람이었다.”

유럽 열강으로 도약하려던 표트르 대제의 욕망은, 종교개혁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곧추세우기 위해 시작된 서구의 웅장한 바로크 문화로 이어졌다. 이를 단기간에 모방·이식하려는 시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낳았다. 지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와 유럽, 가톨릭의 바로크와 정교의 슬라브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몽환의 공간, 곧 판타스마고리아”라고 지적한다. ‘환영’(幻影)이란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한 ‘판타스마고리아’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명된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를 일컫는다.  



“이 도시에 기하학이 등장했다!” 도시 건설 초기 러시아 정부의 회계 감사관이 도로를 측량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합리적 이성의 은유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등장한 것은 결국 서구 라틴 가톨릭 문화권의 핵심 코드인 ‘합리성’과 ‘이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로 대표되는 비잔티움 정교 문화권에선 합리성과 이성보다 이를 초월하는 ‘침묵’과 ‘관조’를 인식의 기초로 삼아왔다. 이런 이질적인 두 문화의 충돌이야말로 도시를 휘감은 모순과 부조리의 뿌리였다. 지은이는 이렇게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합리적 이성이 도입되자 러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고, 타락한 로마 가톨릭 문화에서 건너온 유클리드 기하학은 적그리스도의 학문으로 비쳤을 것이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세계는, 신은, 인간은 ‘2X2=4’라는 합리성의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2X2=4’라는 상징은 합리적 이성이자 자유가 박탈된 서구 가톨릭 세계의 그리스도교였다.”

그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도박과 현시적 소비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했던 그는 평생 한 번도 그 도시에서 정주처를 갖지 못했다. 지은이는 “마치 환영이나 그림자처럼 그는 ‘집’의 실체를 모르는 부초였고 그 자신이 이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 자체였다”며 “도박에 몰입하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섬망 상태에서 소설을 쓰다가 어슴 새벽의 여명에 겨우 잠드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한 현상이었다”고 표현했다.

스무 번 넘게 이사하며 정주 못 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평론이자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또한 현란한 지적 기행문이기도 하다. “산책자의 눈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구석방과 모퉁이 집들을 바라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었다”는 지은이는 실제 상트페테르부르크란 ‘판타스마고리아’를 일평생 배회한 거장의 흔적을 발품 팔아 더듬었다. 1837년 5월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밤을 보낸 ‘모스코프스키 대로 22번지 네아폴 호텔’에서 출발해, 최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집필을 마친 뒤 탈진해 1881년 2월 숨을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까지 땀으로 그 도시를 주유했다. 이만한 헌사도 드물 게다.(정인환 기자) 

09. 12. 20. 

P.S. 아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은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이다(클릭하면 사진을 더 크게 보실 수 있다).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이다. 5년 전 가을에 가본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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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2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자흐스탄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은게 자랑이에요. ^^ 이 책 보관함에 담아 두었어요. 표지도, 저자도, 컨텐츠도 맘에 쏙 드네요.

로쟈 2009-12-20 21:28   좋아요 0 | URL
테헤란에서 롤리타 읽기만큼 특이한 경우시네요.^^

펠릭스 2009-12-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의적인 아쉬움이라 할까요 '판타스마고리아'적 도시공간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도 5천년의 역사라고 자랑하는데,,있을 법합니다. 미래의 과학 또는 행정 계획도시 조성에 열띤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앞으로 위대한 과학소설가 나타나 이 계획도시을 '판타스마고리 세종시'로 만들면 좋겠는데요.(꿈?)

로쟈 2009-12-20 21:30   좋아요 0 | URL
판타스마고리아적 공간은 역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공간입니다. 요즘의 광화문 광장처럼 갑자기 돌변한 공간이라면 현실인지 환상인지 감이 잘 안 오게 되지요...

비연 2009-12-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언제 한번 꼭 저 곳에 가봐야 할텐데..

로쟈 2009-12-20 22:31   좋아요 0 | URL
비성수기에 패키지로 끊으시면 저렴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sophie 2009-12-21 06:42   좋아요 0 | URL
혹시 비성수기란 겨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콜록!

로쟈 2009-12-21 08:36   좋아요 0 | URL
겨울엔 페테르부르크에 직항이 안 다닌 텐데요. 방학을 뺀 하절기가 비수기로 압니다...

sophie 2009-12-23 08:00   좋아요 0 | URL
아 그럼 6월이 되겠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9-12-21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헛헛헛헛 2009-12-2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을 뺀 하절기라... ^^
좋은 정보네요. ㅎ

저도 도스토예프스키 책 한권 껴들고
저 앞을 왔다갔다 해봐야겠어요. '-'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몇년전엔 50만원대 상품도 있었습니다.^^

필로우북 2009-12-2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맨 아래 사진을 올려 주신 걸 보고 참 인상적이다 생각했는데, 로쟈 님께도 각별한 사진인가 봅니다.지하로 난 저 문으로 꼭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진입니다.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그게 구글에 뜨는 사진이 저거밖에 없어서요.^^;
 
고골의 웃음과 공포

이번주 주간한국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다. 보통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슈킨부터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서 불가코프나 솔제니친까지 ‘투어’를 합니다. 이 거장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고골(1809-1852)입니다. 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더더구나 그렇지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편으로만 치자면 고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투>입니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하급관리가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탈당하고 죽은 후에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매년 다시 읽으면서 매번 경탄하게 되는 걸작입니다. 흔히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요. 그만큼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 작품입니다.   

한데, <외투>는 한편으로 자주 오해받는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인도적 박애주의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아카키의 말을 인용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쪽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하급관리로서 아카키의 일이란 문서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쓰는 정서(淨書)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가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자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정서 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글씨들만을 떠올리고, 근무가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음식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에 매달렸습니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페테르부르크에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치자 그의 낡은 옷은 더 이상 바람막이가 돼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없이 새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면서 아카키는 ‘욕망의 주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아카키는 외투 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가 향유하던 모든 즐거움을 유보하고 포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충만한 만족의 세계에서 영속적인 결여의 세계로 옮겨가게 됩니다. 욕망은 언제나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아카키가 새 외투를 마련하고 얼마 안 있어 강도들에게 강탈당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보입니다. <외투>는 저에게 욕망이 몰고가는 파국을 보여주는 섬뜩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고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우리의 파멸 또한 필연적이라구요. 무섭지요?  

09. 12. 1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무성영화 <외투>(1926)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ki-zGGXIbH4&feature=PlayList&p=EC0B7D5C62078945&index=0). 나도 못 봤던 것인데, 감독은 그리고리 코진체프와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이며, 시나리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유리 트이냐노프가 맡았다(원작과는 좀 다르다). 오늘의 서프라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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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1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투>의 마지막 장면은 "마술적 사실주의"<빌러비드/토니모리슨/들녁>라 할 수 있겠는데요.사람마다 하급관리(아카키)의 정서(淨書)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관료적 권력앞에 왜곡되고 맙니다. 권력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감시하고 의심합니다. 개인 또한 입장이 바뀌면 굴림하기도 합니다. 종국에 개인은 조직(관료)에 대항 뿐입니다.고골의 사랑(정서)을 지켜주던 '외투'를 잃어버리고 자존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저마다 하나의 끈을 붙잡고 사는 것처럼요.

로쟈 2009-12-19 23:0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카키에게서 정서와 외투는 다른 성격의 대상으로 봤어요. 먼댓글로 링크해놓은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펠릭스 2009-12-20 07:38   좋아요 0 | URL
재봉사 '페트로비치'에 의해 새 '외투'를 갖게된 '아카키'는 박봉을 절약하며 본연의 업무인 '정서(淨書)'에 충실히 근무합니다. 문제는 '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새 외투를 강탈당하면서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 등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못된 관리의 권위(권력)에 의해 묵살당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스트레스로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나 외투를 뺐습니다. 우리의 '전설의 고향'의 귀신처럼요.

과연, 외투를 찾으려고 했던 '아카키'가 '욕망의 화신' 일까요? 여리고 단순한 영혼의 당연한 권한이 아니였을까요? 저자 '고골'이 '인간 욕망의 허구성' 목적으로 이 단편을 썼다면 그런 왜곡된 의도성이 독자에게 외면당하여 그의 마지막 작품이 실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것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사회구조권력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존재가 무참히 사라지는 형국에서 '아카키'의 행위는 욕망보다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약자의 최후 저항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아카키'의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은 과(소비)욕이 아니라 헤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당연한 소비(구입)의식과 평범한 구매였으며 강탈당한 약자의 억울함이라 생각했습니다.

Sati 2009-12-20 20:20   좋아요 0 | URL
요즘같은 날씨에 겉옷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카키의 외투가 욕망의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요, <외투>에는? 자발적 88만원 세대의 한 인물이 있다고 할 때, 그가 어머니의 수술비 5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끼니를 굶어가며 돈을 마련했는데 그 돈을 어이없이 강도에게 빼앗겨서, 어머니는 치료도 못받고 돌아가시고 본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그건 펠렉스님 말대로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만약 내 가족 건사를 위해 88만원 자족생활을 버리고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가, 부도라도 나서 홧병으로 죽는다면 그건 욕망의 희생양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로쟈 2009-12-21 22:04   좋아요 0 | URL
그게 작품에선 아카키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화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전처럼 정서에만 빠져 지내는 게 아니라 길거리를 거닐며 여자의 다리가 그려진 간판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여자를 괜히 쫓아가보기도 하는 식으로요. 외투도 분에 넘치게 고급스러운 것으로 맞추게 되죠. '바람막이' 수준을 넘는 것으로요. 그러니까 저는 외투를 마련하기 이전과 이후의 아카키가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욕망을 가진(갖게 된) 주인공의 파멸은 고골의 작품에서 자주 나옵니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쉰이나 <넵스키거리>의 피스카료프도 모두 자기 욕망(판타지)의 희생자가 됩니다...

Sati 2009-12-20 21: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서재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인걸요^^

펠릭스 2009-12-21 21: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인스 2009-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이히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원제 The Namesake)의 주인공이 '고골리'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된 경위가 주인공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로 이 작가의 이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고골의 <외투> 속에서 잉태된 아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마침 궁금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구해놓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안 보이네요.^^;

Sati 2009-12-1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가 <뉴문> 보러갈까 했는데, <외투>라니, 정말 서프라이즈네요. 오늘은 기쁜 일이 연발로... /^0^/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너무도 가까이에 있더군요.^^;

sophie 2009-12-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재밌어요. 로쟈님한테 듣는 러시아문학 이야기 또 기다려지네요. 그나저나 모자달린 외투를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에궁..

로쟈 2009-12-19 23:03   좋아요 0 | URL
너무 큰돈은 들이지 마시길.^^

페크pek0501 2009-12-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외투>를 격찬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이지요. 전 <외투>라는 작품을 이렇게 읽었어요. 민중의 힘없는 비참한 현실의 이야기이며 그런 가엾은 사람을 도와 주지 못하는 무력한 권력 이야기라고. 멋지게 장만한 외투라기보다는 억울하게 빼앗긴 외투로 봅니다. 외투를 빼앗기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와 주지 않습니다. 순경도, 경찰서장도, 유력한 인사도...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또는 예술)의 매력은 해석의 다양성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는 게 옳은가, 하며 따지는 것보다 그저 많은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흥미로운 작품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요. 우리의 사고영역을 확장시켜 주니까요.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오길 기대하며...

로쟈 2009-12-23 23:48   좋아요 0 | URL
네, 작품의 뒷부분만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한데, 고골 자신이 아카키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서 해석이 복잡해집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아카키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 땐 행복했는데, 그가 외투를 마련하여 세상에 나오자 불행이 시작된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의 영역에서의 삶에선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지만 한 걸음만 내딛어 밖으로 나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면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죠. 혼자 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상과 부딪히며 살기 시작하면 힘든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저도 현재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제게 소송을 걸어 법(세상)과 싸우게 되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식이죠. 힘없는 사람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 - (지금 생각난 것을 적어 봤을 뿐이며, 이런 제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로쟈 2009-12-23 23:49   좋아요 0 | URL
'개인의 영역 VS 세상'은 좀 모호하구요, 저는 '충동 VS 욕망'의 구도라고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