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제2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러시아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가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작가가 수상을 위해 방한했다.

 

 

관련기사를 보니 25일에 입국하여 기자간담회를 갖고 어제는 고려대에서 특별강연을 한데 이어서 오늘은 오후 3시에 원주 백운아트홀에서 시상식에 참석한다(시간을 보니 얼마 남지 않았군).

 

 

 

사실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어서 수상소식이 좀 의아하긴 했는데, 이번 방한에 맞춰 두 권이 출간됐다. 작품집 <소네치카>(비채, 2012)와 장편소설 <쿠코츠키의 경우>(들녘, 2012)다(<쿠코츠키의 경우>는 2001년 러시아 부커상 수상작이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녀는 러시아어로 번역된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을 읽고서 이런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제 소설(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찾았어요. 미망인이 딸을 하나 키우지만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얘기죠. 다른 시대, 다른 장소를 산다고 해도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마음은 통한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언급한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은 이번에 나온 <소네치카>에 수록돼 있다.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예기치 않은 번역본이 나와 반갑다. 사실 국내 출판계에서 울리츠카야는 낯선 이름이 아니지만 현대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반응이 미지근한 편이어서 계속 보류돼 왔었다.

 

 

울리츠카야와 함께 당대 러시아의 대표적 여성 작가로 꼽히는 타티야나 톨스타야와 빅토리야 토카레바의 작품은 이미 몇 권 소개돼 있다. 극작가이기도 한 페트루셉스카야도 소개되면 좋겠다. 

 

 

 

아무튼 번역된 러시아문학에 한정하자면 올해는 <오몬 라>(고즈윈, 2012)와 < P세대>(문학동네, 2012)가 번역된 빅토르 펠레빈과 울리츠카야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작품만 고르자면 물론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을유문화사, 2012)가 번역된 해로 기억될 것이지만...

 

1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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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날이라(직장인이 아니라면 대개 '재택'한 날일 테지만) 아이한테 저녁을 차려주어야 하는데, 일곱 시에 먹겠다고 해서 잠시 시간이 떴다. 나는 배가 고픈 상태이지만, 허기를 기운삼아 페이퍼를 적는다(당연히 몇자 못 적을 것이다!). 제목은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1891-1938)의 시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의숲, 2012)에서 가져왔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난 하고 싶은 말을 잊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비단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맥락만 닿는다면 우리도 하고픈 말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만델슈탐의 시집이 처음 번역된 건 아니다. 역자인 조주관  교수가 <오늘은 불쾌한 날이다>(열린책들, 1996)란 제목으로 한번 선집을 펴낸 적이 있다. 아마 새로 나온 번역본과 중복되는 시들이 많을 듯싶다. 하지만 당장 내가 손에 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이고 표지도 더 맘에 든다. 만델슈탐에 대해선 아내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 <회상>(한길사, 2009)이 번역돼 있으므로 참고할 수 있다. 가슴 먹먹한 대목이 자주 나오는 아주 유명한 회고록이다. 시인은 스탈린시대 대숙청기에 수용소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는데, 그에 관한 회고를 담고 있다.

 

물론 '번역시'야 언제나 핸디캡을 안게 되지만, 시인의 '시정신'은 우리말로도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집의 말미에는 러시아문학 전공자이기도 한 이장욱 시인의 발문이 실렸다. '나의 사랑하는 적(敵), 만델슈탐'.

 

 

만델슈탐을 떠올린 김에 최근에 번역된 현대 러시아문학 작가들에 대해서도 한 마디. 저명한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1879-1953)의 <가장 중요한 것>(문학과지성사, 2012)이 번역돼 나왔다. 오래전 대학원 시절에 접해본 작가인데, 그동안 잊고 있었다. '러시아의 피란델로'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듯한데, 이번에 나온 작품집에는 '즐거운 죽음', '제4의 벽', '가장 중요한 것' 세 편이 수록돼 있다.

 

더불어,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리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단편집 <예피판의 갑문>(문학과지성사, 2012)도 같은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출간됐다. <코틀로반>(문학동네, 2010)의 번역자 김철균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더 언급하자면, 플라토노프의 단편집으론 <귀향 외>(책세상, 2002)이 번역돼 있다. <구덩이>(민음사, 2007)는 <코틀로반>과 원제가 같은 작품, 하지만 다른 판본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장편 <행복한 모스크바>(지만지, 2009)가 더 번역돼 있으며 대표작 <체벤구르>가 번역중인 상태다. 흠, 저녁 먹어야겠다...

 

12.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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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소식을 뒤늦게 알고 어제 직접 서점에 가서 구입한 책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을유문화사, 2012)다.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고 번역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고없이 책이 나와 반갑고 놀라웠다. <롤리타>로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거머쥐기 전까지 이 망명작가는 미국 웰즐리대학과 코넬대학에서 러시아문학과 서양문학을 강의했는데, 각각의 강의록이 책으로 나온 바 있다(<문학강의>는 확인을 해봐야 알겟지만 <러시아문학 강의>는 사후에 나왔다). <돈키호테에 관한 강의>까지 포함하면 나보코프 문학강의 '3종 세트'쯤 된다.

 

 

이 강의들은 물론 모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러시아문학 강의>는 러시아어 번역학 전공자가 러시아어본과 일어본도 참고하여 영어본을 옮긴 것이다. 나보코프의 강의에서 특징적인 것은 톨스토이에 대한 예찬인데, 언젠가 <안나 카레니나>를 다룬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는 톨스토이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는다.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다. 전 시대의 푸시킨, 레르몬토프 등은 논외로 하고,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작가들의 순위를 매겨본다면 이렇다.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호프, 4위 투르게네프. 마치 학생들의 석차를 매기는 것 같다. 지금쯤 도스토옙스키와 살티코프가 내 사무실 앞에서 항의하려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265쪽) 

때문에 그의 강의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작가가 톨스토이이고 작품으론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 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더 다루고 있는데, 그럼에도 <전쟁과 평화> 같은 다른 작품에 대한 해설이 없는 것은 좀 아쉽다. 요컨대 <러시아 문학강의>는 그 자신 러시아문학의 거장이기도 한 나보코프의 개성이 잘 반영돼 있는 '편향적인' 문학강의다. 때문에 러시아문학 독자뿐 아니라 나보코프 독자에게도 흥미를 끌 만한 책이다. 그의 문학관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의에 덧붙여 책에는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와 '속물과 속물근성', '번역의 예술' 같은 글들도 포함돼 있어서 여러 모로 유익하다. 

 

 

 

말이 나온 김에 러시아문학 개설서로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한번 더 꼽자면, 문학사 가운데는 미르스키의 <러시아 문학사>(써네스트, 2008)가 가장 자세하다. 번역본도 여러 차례 판을 바꿔가며 출간된 책이다. 그리고 이젠 절판된 책이 돼버렸는데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도 러시아문학 '깊이 읽기'를 위한 필독서이다. 니콜라스 르제프스키 편, <러시아 문화사 강의>(그린비, 2011)는 좀더 넓은 맥락에서 러시아 문학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입문서이다. 모두 전공서적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수준 높은 독자들에겐 '교양서'로서 손색이 없다. 각 국가별로 이런 '교양서' 목록을 챙길 수 있으면 좋겠다...

 

12.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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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빅토르 펠레빈(빅또르 뻴레빈)의 소설 <오몬 라>(고즈윈, 2012)가 번역돼 나왔다. 1992년에 나온 책이니 소련 해체 직후에 출간됐던 작품. 러시아에서야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미국 잡지 '뉴요커'에서도 '세계의 젊은 작가 6인'의 한 사람으로 꼽은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작가다.

 

 

아마도 <공포의 헬멧>(문학동네, 2006) 정도를 읽은 독자가 있을까(실은 나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이지만). 그것도 작가보다는 출판사 때문에 고른 독자가 더 많을 것이다. 사실 <오몬 라>는 이미 <달의 뒤통수>(경남대출판부, 2000)란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한' 번역으로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본문보다 제목과 표지가 말해주는 책이었다. 새로 번역된 <오몬 라>의 책소개에 따르면 이런 내용의 소설이다.

 

 

막연히 '하늘에 대한 동경'에서부터 시작한 주인공 오몬의 어린 시절 꿈은 차차 '전투기 비행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다 우연히 '국민경제 달성 박람회장'에서 우주비행사가 그려진 모자이크화를 본 날, '우주비행사가 되어 달로 날아가고 싶은' 꿈을 가진 또래 친구 미쪽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주비행사'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키워 나간다. 이 소설은 일견, 우주여행과 달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품은 소년이 우주비행사가 되기까지의 역경과 시련을 다룬 성장소설 같아 보인다. 하지만 주인공이 살고 있는 시공간은 한 개인의 꿈이, 그리고 그 개인의 성장과 인생 이야기가 오롯이 그 개인의 서사로 포괄될 수 있는 녹록한 시공간이 아니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위세를 떨치던 1960년대 쏘련, 그곳에서는 국가권력과 군부의 가이드라인과 추상적인 구호와 영웅화 작업 등으로 유지되는 국가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운명까지도 공공연히 침식하며, 그러한 침윤으로 인한 상흔을 '숭고한 시대적 과업'이라고 대중에게 주입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 분위기에서 주인공 오몬과 그의 친구 미쪽이 어린 시절부터 품은 '우주비행사 꿈'은 애초부터 개인의 순수한 꿈으로 남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상황은 '소박했던' 꿈에 '영웅적 위업'이라는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일그러진다.

역자인 최건영 교수에 따르면, 러시아 환상문학의 계보에도 속하는 펠레빈은 고골이나 불가코프, 그리고 스트루가츠키(스뜨루가츠끼) 형제의 뒤를 잇는 작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열린책들)의 저자가 스트루가츠키 형제다.

 

 

 

작가 자신은 '터보 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1992년 러시아 SF대회에서 그 자신이 명명한 용어라고. 호프만, 카프카, 고골, 불가코프, 마르케스 등의 작가로 이어지는 환상문학의 유산을 계승한 그룹을 지칭하는 말이라 한다.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면서 환상문학이면서 SF문학이고 터보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것이 펠레빈의 작품세계다. 대표작은 <벌레들의 삶>인데, 놀랍게도 <벌레처럼>(책세상, 1998)이란 제목으로 번역됐다가 절판된 책이다. 그의 신작들과 더불어 이 참에 다시 나오면 좋겠다... 

 

 

12. 05. 20.

 

 

P.S. 표지의 작가소개를 보니 펠레빈은 불교에도 심취하여 이따금 한국의 절에서 동안거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오다가다 혹 이런 외모의 작가를 보시면 이 저명한 러시아 작가에 대해 아는 체를 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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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극단의 <죄와벌> 3부작 중 두번째 작품, <푸르가토리움>이 오늘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작년에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는 작품이다. <죄와 벌>의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원작을 무대에 올리는 건 아니고 재가공했다(공연정보에 대해서는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05628 참조). 공연에 부친 글을 옮겨놓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단테의 「신곡」이 만났다?

명품극단의 <푸르가토리움-하늘이 보이는 감옥(獄)(이하 푸르가토리움)>은 그 컨셉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은 라스콜리니코프이지만, 퇴락한 술꾼 마르멜라도프는 작품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 조연이다.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마르멜라도프 덕분에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딸인 소냐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생 두냐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두 집안의 비참한 가난은 모두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몬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가족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창녀 일을 하는 소냐는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을 넘어선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죄와 벌」은 바로 이 두 사람의 행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빼면 어떻게 될까? <푸르가토리움>은 그렇게 라스콜리니코프가 빠진 「죄와 벌」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이야기의 새로운 중심은 마르멜라도프 가족으로 넘어간다. 배역도 바뀌어 마르멜라도프 가족이 주인공이고 ‘로지온’은 조연이다.

 

「죄와 벌」에서 가난한 법대생은 감옥 같은 현실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살인이라도 해보지만, <푸르가토리움>에서 중년의 술꾼은 현실과 맞설 만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선량하지만 무능력한 그는 직장에서 쫓겨나 아내의 양말까지 전당포에 맡기고 술을 퍼마신다. 결국 마르멜라도프는 마차 사고로 죽고, 아직 어린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내쫓기게 된 폐병쟁이 아내 까쩨리나는 길거리에서 쓰러진다.

 

그런데 과연 이런 비참한 현실이 비단 마르멜라도프 가족만의 비극일까. 19세기 러시아 사회에만 한정된 이야기일까. 물론 아니다. 용산참사의 악몽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바로 지난달에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자신의 임대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21세기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그런데 이 문제적 현실을 연극은 ‘푸르가토리움’, 곧 ‘연옥’이라고 말한다. 모든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단테의 ‘지옥’과 달리 연옥은 ‘하늘이 보이는 감옥’, 곧 희망을 담지한 감옥이다. 과연 하늘은 어디에 있고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그걸 발견하는 일이 관객의 몫이다. 곧 당신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다.

12. 04. 17.

 

 

P.S. 마침 <죄와 벌>(민음사, 2012) 새 번역본도 나온 참이어서 마르멜라도프 가족의 이야기는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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