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소식을 뒤늦게 알고 어제 직접 서점에 가서 구입한 책은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을유문화사, 2012)다.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고 번역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고없이 책이 나와 반갑고 놀라웠다. <롤리타>로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거머쥐기 전까지 이 망명작가는 미국 웰즐리대학과 코넬대학에서 러시아문학과 서양문학을 강의했는데, 각각의 강의록이 책으로 나온 바 있다(<문학강의>는 확인을 해봐야 알겟지만 <러시아문학 강의>는 사후에 나왔다). <돈키호테에 관한 강의>까지 포함하면 나보코프 문학강의 '3종 세트'쯤 된다.
이 강의들은 물론 모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러시아문학 강의>는 러시아어 번역학 전공자가 러시아어본과 일어본도 참고하여 영어본을 옮긴 것이다. 나보코프의 강의에서 특징적인 것은 톨스토이에 대한 예찬인데, 언젠가 <안나 카레니나>를 다룬 자리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는 톨스토이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는다.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다. 전 시대의 푸시킨, 레르몬토프 등은 논외로 하고,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작가들의 순위를 매겨본다면 이렇다. 1위 톨스토이, 2위 고골, 3위 체호프, 4위 투르게네프. 마치 학생들의 석차를 매기는 것 같다. 지금쯤 도스토옙스키와 살티코프가 내 사무실 앞에서 항의하려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265쪽)
때문에 그의 강의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작가가 톨스토이이고 작품으론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 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더 다루고 있는데, 그럼에도 <전쟁과 평화> 같은 다른 작품에 대한 해설이 없는 것은 좀 아쉽다. 요컨대 <러시아 문학강의>는 그 자신 러시아문학의 거장이기도 한 나보코프의 개성이 잘 반영돼 있는 '편향적인' 문학강의다. 때문에 러시아문학 독자뿐 아니라 나보코프 독자에게도 흥미를 끌 만한 책이다. 그의 문학관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의에 덧붙여 책에는 '러시아 작가, 검열관, 그리고 독자'와 '속물과 속물근성', '번역의 예술' 같은 글들도 포함돼 있어서 여러 모로 유익하다.
말이 나온 김에 러시아문학 개설서로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한번 더 꼽자면, 문학사 가운데는 미르스키의 <러시아 문학사>(써네스트, 2008)가 가장 자세하다. 번역본도 여러 차례 판을 바꿔가며 출간된 책이다. 그리고 이젠 절판된 책이 돼버렸는데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생각의나무, 2008)도 러시아문학 '깊이 읽기'를 위한 필독서이다. 니콜라스 르제프스키 편, <러시아 문화사 강의>(그린비, 2011)는 좀더 넓은 맥락에서 러시아 문학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입문서이다. 모두 전공서적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수준 높은 독자들에겐 '교양서'로서 손색이 없다. 각 국가별로 이런 '교양서' 목록을 챙길 수 있으면 좋겠다...
12. 07.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