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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에 실은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60#). 석영중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에 대한 것이다.

시사IN(08. 04. 08) 돈이 필요했지만 돈을 원하진 않았다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표지의 문구가 그렇다. 사실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나 소설을 몇 권 읽어본 독자라면 ‘도스토예프스키와 돈’이라는 주제가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입문서로도 제 값을 할 만한 석영중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펴냄)는 이 주제에 관한 종합 보고서이자 흥미로운 뒷담화이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작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것부터가 이 ‘잔인한 천재’의 앞날을 예고해주는 듯한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읽히는 <죄와 벌>은 가난한 대학생 주인공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돈에 죽고, 돈에 또 죽고’ 하는 이야기였다. 또 만년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호색한 아버지와 불한당 아들 사이의 주된 갈등이 3000루블이란 돈을 놓고 빚어진다. 아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3000루블에 관한, 3000루블에 의한, 3000루블을 토대로 하는 소설”이라고 말해질 정도다.  

그렇다면 이 러시아 작가는 왜 그토록 돈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가? 저자가 작가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여주는 것은 ‘낭비가’의 초상이다. 빈민구제 병원의 의사인 아버지가 근면과 성실을 삶의 보증으로 삼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이었다면 아들 도스토예프스키는 책읽기를 좋아한 조숙한 소년이면서 동시에 부잣집 동급생들의 눈에 혹여라도 가난하게 보일까 봐 ‘과시용 소비’를 일삼은 미숙한 속물이었다. 공병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는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울먹이는 문체’에 담아서 아버지에게 보내며 그렇게 받은 돈은 들어오기가 무섭게 다 써버렸다. 한술 더 떠서 앞으로 들어올 돈을 상상해가며 당겨 썼다. 이런 식의 턱없는 지출 때문에 그는 항상 쪼들렸고 언제나 주변 사람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간청해야 했다.

신문·잡지 열심히 읽어 ‘팔리는 소설’ 쓰다

그런 낭비벽의 소유자가 작가가 됐다. 자기 기질을 숨겨놓을 방도는 없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고 ‘모욕당한 사람들’이며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 같은 귀족 출신의 동시대 작가와는 창작의 명분이 달랐다. 그는 돈을 위해 썼고 생존을 위해 써야 했다. ‘문학은 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원고는 확실히 돈’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고 언제나 의식했다. 때문에 그는 ‘팔리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고 써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신문을 읽었다. 그는 ‘광적인 신문 애독가’로서 당대의 신문과 잡지를 게걸스럽게 읽었다. 대작 장편소설의 아이디어를 대부분 신문의 사회면에서 얻었을 정도다. 그런 탓에 살인과 자살 같은 자극적인 사건과 통속적인 요소가 그의 작품에 많이 포함돼 있다. 그의 궁여지책이 어떤 의미에서는 활로였던 셈이다.   

평생 돈에 쪼들리면서 돈을 위해 펜을 들기는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에 모든 걸 걸지는 않았다. <백치>의 여주인공 나스타샤가 구애자금으로 받은 거금 10만 루블을 벽난로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장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인물들은 돈보다 우선해 자기가 자존심을 가진 인간임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저자가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룬 장의 제목을 ‘돈을 넘어서’라고 붙인 것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잘 이해했고, 돈을 읽었고, 절실히 아주 절실히 돈을 필요로 했지만, 돈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오로지 돈을 필요로만 했지, 원하지도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았다.’

왜 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사람이란 배가 부르면 배고팠던 시절은 떠올리지 않기 때문이다. <미성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족속은 ‘자, 이제는 배가 부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해야 하지요?’라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돈은 그러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해줄 뿐이지 그 질문에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돈’에 대해 배부르게 읽고 나니 이런 질문이 생겨난다. 이번에는 무엇을 읽어야 하지요?

08. 04. 10.

P.S. 기본적인 소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돈'(http://blog.aladin.co.kr/mramor/1990550)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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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보다 전기들이 더 재미있더라구요.문제는 전기를 읽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성이 되게 싫어져서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안나기까지 한다는 겁니다.특히 구제불능의 도박병...

로쟈 2008-04-11 22:23   좋아요 0 | URL
작가들의 전기가 모범생 전기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군자란 2008-04-1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히려 돈에 집착하는 도스도에프스키가 더 좋은것 같습니다. 아마 인간중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돈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저는 작년에 츠바이크가 쓴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말이 나온김에 츠바이크의 평전은 정말 일품이라고 생각듭니다.
마치 그시대에 저도 같이 있는 느낌이 들정도 이니까요......

로쟈 2008-04-11 22:24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로 '발자크'과지요. 그를 벤치마킹하고자 했던...


stella.K 2008-04-1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저도 이제부터라도 신문이라도 좀 게걸스럽게 읽어야겠습니다.^^

로쟈 2008-04-11 22:24   좋아요 0 | URL
여차하면 '팔리는' 소설도 쓰시겠는데요.^^

stella.K 2008-04-12 11: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로쟈님! 그게 제 소원인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ㅜ.ㅜ

로쟈 2008-04-12 11:17   좋아요 0 | URL
빚독촉을 받으면 가능하실지도.^^;

stella.K 2008-04-12 18:35   좋아요 0 | URL
오~로쟈님! 입심이 만만치 않으시군요. ㅎㅎㅎ
맞아요. 그 방법이 있었네요.ㅋㅋ

로쟈 2008-04-12 18:47   좋아요 0 | URL
하긴 말로 빚을 갚는다고도 하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전기도 외국처럼 어두운 면도 그렸으면 좋겠어요.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 인물의 문중후손들이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8-04-12 22:59   좋아요 0 | URL
영화나 드라마도 못 찍으니까요.--;

털세곰 2008-04-1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로쟈님 도-끼가 왜 똘스또이에겐 돈 빌려달라는 말이 없었는지 이유 아세요?
똘스또이가 무게는 좀 잡았지만 그래도 나이도 도-끼가 예닐곱살 더 많고 해서는 그냥 누를 수도 있었을텐데... 뚜르게녜프보다 똘스또이를 도-끼가 어려워했서 그랬을까요?

로쟈 2008-04-12 22:58   좋아요 0 | URL
글쎄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톨스토이가 워낙 비사교적이어서 말붙일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네요...

털세곰 2008-04-13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문현답이십니다^^
 

개인적인 관심에다 필요까지 겹쳐서 앤 애플바움의 <굴락>(드림박스, 2004)을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오늘은 아예 원서까지.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굴락)에 대한 이 방대한 저작은 지난 2003년에 출간됐고 이듬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국역본이 나온 게 2004년 12월이니까 분량을 고려하면 초스피드로 나온 셈이다. 역자가 'GAGA 통번역센터'라는 건 그래서 이해할 만하다. 이른바 '집단번역'인 것. 하지만 동시에 '강제번역'이었는지 번역의 수준이 '수용소'만큼이나 열악하다(이미 절판된 책이니 이런 흠을 잡는다고 해서 매출에 지장을 초래하진 않겠군. 혹은 이런 평도 명예훼손감일까?).

 

 

 

 

'당신에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기억에 내가 국역본의 존재를 안 건 마냐님의 리뷰를 읽고서이다(http://blog.aladin.co.kr/goodmom/601472). 너무도 허술하게 번역됐다는 지적을 읽었기 때문에 따로 구입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출간된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조해보니 원서와 같이 읽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누가 그렇게 읽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책의 헌사에서부터 번역은 '번역'이 필요하다.

저자인 애플바움은 "이 책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신 분들께 바칩니다."라고 헌사에 적었다. "This Book is Dedicated to Those Who Described What Happened." '알려주신'이라고 옮긴 단어는 'Described'이다. 이 경우엔 '기록한' 혹은 '기록으로 남긴'이란 뜻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저자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수용소 체험자들의 기록과 증언 덕분이었을 테고 그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노벨문학상 수장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수용소군도, 1918-1956>라는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애플바움은 영역판의 서문을 썼다). 그런데 이 헌사는, 특히 'Described'란 단어는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의 한 서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 사실이 국역본에는 드러나 있지 않은데 옮겨보면 이렇다.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 이후 끔찍했던 몇 년 후 나는 레닌그라드의 수용소 밖에서 줄을 서며 17개월을 보냈다. 어느 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았다. 내 뒤에 서 있던 여자는, 추위로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으며, 물론 이전에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친 마비상태에서 벗어나서 나에게 속삭이며 물었다(그곳에서는 모두가 속삭이며 말했다). "이걸 설명할 수 있나요?" 나는 말했다. "할 수 있어요." 그러자 미소 비슷한 것이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갔다."

인용문의 출처는 아흐마토바의 연작시 '레퀴엠 1935-1940'의 서문이다. 국역본에는 "서두 해설 대신 진혼곡 1935-1940"이라고 돼 있는데, "Instead of a Preface: Requiem 1935-1940"을 옮긴 것이고, '서문을 대신하여'는 이 연작시의 서문격으로 1957년에 붙인 에피소드다(시의 전문은 http://www.wikilivres.info/wiki/index.php/Requiem_%28Akhmatova%29 참조, 영역으로는 http://www.poemhunter.com/poem/requiem/).

그런데, 이 인용문 번역의 첫문장, 첫단어부터 국역본은 잘못 옮겨놓았다.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 이후 끔찍했던 몇 년 후 나는 레닌그라드의 수용소 밖에서 줄을 서며 17개월을 보냈다."의 원문은 이렇다. "In the terrible years of the Yezhov terror I spent seventeen months waiting in the outside the prison in Leningrad." 

여기서 'Yezhov terror'를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라고 옮겼는데, '예조프'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다(설사 인명인 줄 모른다고 쳐도 단 몇 초만 검색해보면 알 수 있건만!). 니콜라이 예조프(1895-1940)로 KGB의 전신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총수였고 악명 높았던 1937-8년의 대숙청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물론 이후에 그 자신도 숙청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쓰는 스탈린 시대'란 페이퍼 참조(http://blog.aladin.co.kr/mramor/1745168). 그러니 'Yezhov terror'는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가 아니라 '예조프의 테러'를 가리킨다. 거기에 '몇 년 후'란 번역은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지 알기 어렵다. 첫문장을 다시 옮기면, "예조프의 테러가 판을 치던 끔찍한 시절 나는 17개월을 레닌그라드 감옥 바깥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보냈다." 

 

누굴 기다리며? 짐작엔 아들 레프 구밀료프를 기다리며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레프는 남편인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이다. 그는 나중에 부모 이상으로 유명한 역사학자가 된다). 스탈린은 유명시인이었던 어머니를 직접 핍박하는 대신에 아들을 체포하여 '볼모'로 삼았고 때문에 아흐마토바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까지 써서 바치기도 했다.

여하튼 그런 곡절 때문에 수용소 밖에서 기다리던 아흐마토바를 어느 날은 한 사람이 알아봤다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 아흐마토바의 이름을 부른 것이겠다. 그리고 그걸 들은 뒤의 여자가 굳었던 입을 열고 이 '시인'에게 속삭였을 터이다. "이걸 기록하실 수 있겠어요?(Can you describe this?)" 물론 '이것'이 가리키는 건 이 '말도 안되는 사태'이겠다. 그에 대해서 아흐마토바는 이렇게 답한다. "할 수 있어요.(I can.)" 그때 스쳐간 희미한 미소라는 건 이 터무니없는 역사적 수난이 그래도 기록(의미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작은 위안의 표시겠다. 아흐마토바의 '레퀴엠(진혼곡)'은 바로 그 '기록'인 것이고.

해서 나는 애플바움의 헌사 "This Book is Dedicated to Those Who Described What Happened."를 "이 책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기록해준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앤이 쓴 건 '히스토리'이고 안나가 쓴 건 '레퀴엠'이지만 두 여자는 현대사의 한 비극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서로 교신하고 있다...

08.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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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2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03 22:37   좋아요 0 | URL
아흐마토바의 책들이 좀 소개되면 좋을 텐데요...

수유 2008-04-04 09:26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녀의 저 우아한 프로필과 더불어 그녀의 시를 올려놓고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이 사실상 지금은 러시아 민족주의자가 되어버린 지금 자신의 저작인 수용소 군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요.그 책이 서방진영에서 소련을 씹을 때 많이 이용되었잖아요.서방진영에서 나온 30년대 소련의 대숙청을 다룬 로버트 콘케스트의 책은 이제 오래되어 아펠바움의 책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아펠바움이나 콘케스트나 강경한 보수주의자들인데...솔제니친은 이 책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소련 수용소를 직접 체험한 이들의 회고록 풍 글은 우리나라에도 꽤 많이 번역되었더라구요.

로쟈 2008-04-07 00:47   좋아요 0 | URL
'서재 투어'를 하시는군요.^^ 솔제니친은 요즘도 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자이면서 (러시아식) 공산주의자의 포지션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펠바움의 책은 시각보다는 자료 집성에 의의가 있는 것 같고요...

Sati 2011-08-08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에 조예가 없다보니, 저는 다른 것보다 prison을 수용소라고 번역한 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
 

오늘이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생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어머니>를 다루고 있다. 못본 체할 수도 없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8. 03. 28) [오늘의 책 <3월28일>] 어머니

1868년 3월 28일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가 태어났다. 1936년 68세로 몰. “그는 러시아 고전 문학과 소비에트 문학을 잇는 ‘살아 있는 다리’다.” 선배 작가인 톨스토이의 말이다. “과거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해 왔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은 <어머니>를 읽고 있다.”

고리키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레닌이 그와의 대화 중에 한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고리키는 위대한 19세기 러시아 문학 최후의 작가이자 20세기 소비에트 문학 최초의 작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불린다.

 

 

 

 

<어머니>(1907)는 그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다. “…진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천벌을 받을 어리석은 놈들, 진리가 네놈들 머리 위에 떨어질 날이 있을 게다.” 노동운동을 하다 법정에 선 아들이 당당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한 말을 유인물로 만들어 길거리에 뿌리다 붙잡힌, <어머니>의 주인공 파벨의 어머니가 소설 마지막에서 절규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어머니>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자신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인식한 노동자계급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무기력한 연민의 대상, 수동적 인간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스스로도 변혁을 꿈꾸는 존재로 거듭나는 어머니의 의식 변화, 모성애가 인류애로 발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어머니>는 살아있는 문학이 됐다. 이 소설이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이유다. 세상이 변해 문학으로 읽히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 소설은 한때 ‘이적 표현물’이었다.

고리키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글을 쓴, 온갖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자살을 기도했던 자신의 운명을 혁명이라는 이상과 결합시켜 문학으로 빚어낸 작가다.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 고리키라는 필명은 ‘견디기 어려운’ 혹은 ‘비참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막심 고리키는 ‘최대로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뜻이 된다.(하종오기자)

08. 03. 28.

 

 

 

 

P.S. 고리키의 전기로는 니나 구르핀켈의 <고리키>(한길사, 1998), 앙리 트루아야의 <소설 고리키>(공동체, 1994) 등이 소개됐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다. <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 같은 자전 3부작도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고리키 연구서로는 이강은 교수의 <혁명의 문학 문학의 혁명 막심 고리끼>(경북대학교출판부, 2004)가 거의 유일하다. 관련서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한편,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6)의 마지막 장면은 http://youtube.com/watch?v=KI3jZtruxv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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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네이버 메인에 뜬 게 이 때문이군요.

로쟈 2008-03-28 23: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돈' 얘기를 꺼낸 김에 러시아의 '졸부' 얘기도 옮겨놓는다. 러시아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리는 아라즈 아갈라로프가 이 졸부의 이름이다. 찾아보니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와는 사돈간이다. 아래 기사는 돈과 야만이 결합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러시아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실을 배제하고는 현재의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사진들은 아갈라로프의 영지).

Agalarov2006.jpg

한겨레(08. 03. 18) 러시아 ‘졸부’의 도넘은 오만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인근 보로니노 마을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괴전화에 시달린다. 잦은 방화에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주민 알렉산더 모로조프는 마을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위한 의도로 살해된 개 두마리가 발견됐다며, “이곳은 지옥이 됐다”고 말했다.

AgalarovEstatesTrees.jpg

마을에 재앙이 닥친 것은 지난해 러시아 최대 부호 가운데 한명인 아라즈 아갈라로프가 마을 바로 옆에 초호화 주거단지 개발 계획을 발표한 뒤부터다. <포브스> 추정 자산만 12억달러(약 1조2100억원)인 아갈라로프는 ‘세계 최고 부자들을 위한 마을’을 표방하며, 집 150채와 인공 해변, 인공 호수 14개, 18홀 골프장 등을 건설 중이다.

아갈라로프는 개발에 ‘방해’가 되는 보로니노 주민들에게 이사를 종용해 왔다. 그러나 34가구 가운데 11가구만 이사에 합의했다. 갖은 으름장과 노골적 폭력에 맞서 마을 사람들은 소송을 제기했고, 이 과정에서 아갈라로프가 건축 허가조차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에도 전과가 있는 아들을 둔 한 집이 ‘아들을 다시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에 못이겨 고향을 떠났다.

AgalarovEstatesHouse.jpg

<모스크바타임스>는 18일 빈부 격차가 더욱 심각해지는 러시아에서 부유층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민들의 땅을 빼앗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보로니노 마을의 사연을 소개했다. 2년 전에도 모스크바 외곽 부토보에서 땅과 집을 몰수당한 마을 사람들의 시위에 전투 경찰이 파견돼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야당 소속 모스크바 시의원인 세르게이 미트로킨은 “우리는 범죄적 사유화라고 부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거세게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가속화할 전망이다. 러시아 정부는 2014년 소치 겨울철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의 토지 수용을 더욱 손쉽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은 앞으로 기업 등의 개발사업에도 확대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서수민 기자)

08. 03. 18.

P.S. 관련 페이퍼로는 '러시아 억망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ttp://blog.aladin.co.kr/mramor/1091634), '러시아 백만장자들의 사치'(http://blog.aladin.co.kr/mramor/989306), '모스크바의 계급전쟁'(http://blog.aladin.co.kr/mramor/1023542) 등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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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9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9 17:06   좋아요 0 | URL
좋은 활동을 하시네요. 도움이 되신다면 저로선 다행한 일이지요.^^

고니 2008-03-1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2월 10일은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의 기일이(었)다. 구력으로는 1월 29일이지만 신력으로 환산하면 2월 10일이고 공식적인 기념행사는 이날 행해진다. 푸슈킨에 대해서는 예전에 몇 차례 다룬 바 있고 새로 무얼 쓸 형편은 아니어서 관련자료나 검색해보다가 옥사나 체르카소바의 애니메이션 <당신의 푸슈킨>(1999)을 발견했다(http://www.youtube.com/watch?v=WZB6oQVZMrM).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듯한 9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간단한 설명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시인과 관련한 자신에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시인의 전기적 에피소드들이 거기에 결합되어 그려진다고. 더불어 나탈리야 본다르추크(<전쟁과 평화>를 찍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딸이다)의 영화 <푸슈킨. 마지막 결투>(2006)도 눈에 띈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0VysCTzuBJA). 영화의 스틸사진 몇 장을 옮겨놓는다.

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Кадр из фильм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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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은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는 푸슈킨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래는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함께 한 푸슈킨. 두 사람은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으며 둘 사이엔 2남 2녀가 있었다.

바실리 곤차로프 감독의 <푸슈킨의 삶과 죽음>(1910)은 이번에 발견한 '희귀자료'다(http://www.youtube.com/watch?v=8gbVw1yk3gA). 시인의 전기를 주요 에피소드를 따라가면서 요약하고 있다...

08. 02. 11. 

 

 

 

 

국내에는 두 종의 작품 선집이 출간돼 있지만 소개된 푸슈킨의 전기로는 구드룬 치글러의 <푸슈킨>(한길사, 1999)이 거의 유일하다. 쯔베또바의 <푸슈킨>(건국대출판부, 1997)은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한 간결한 소개이다. 알라딘에서 구할 수 있는 영어본 전기로는 비뇬(Binyon)과 드루주니코프(Druzhnikov)의 것이 있다. 러시아문학 연구자들이나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필독서에는 "The Pushkin Handbook'(2006)이 있다. '푸슈킨학'의 현재를 가늠해볼 수 있는 책이다...

Анри Труайя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PouchkineЛеонид Гроссман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Биография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전기 가운데 가장 두툼한 책은 저명한 망명 저술가 앙리 트루아야(Henri Troyat)의 <푸슈킨>이다(국내에는 그의 <고리키>가 번역돼 있다). 원래 불어본 저작을 러시아어로 옮긴 것인데 무려 1056쪽 분량이다(영역본은 발췌본이다). 레오니드 그로스만(1888-1965)의 <푸슈킨>은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 하나인데 소비에트 시절 시인의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여 쓰여졌다. 분량은 480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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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1 19:59   좋아요 0 | URL
애니매이션이라고도 적었는데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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