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날이라(직장인이 아니라면 대개 '재택'한 날일 테지만) 아이한테 저녁을 차려주어야 하는데, 일곱 시에 먹겠다고 해서 잠시 시간이 떴다. 나는 배가 고픈 상태이지만, 허기를 기운삼아 페이퍼를 적는다(당연히 몇자 못 적을 것이다!). 제목은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1891-1938)의 시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문학의숲, 2012)에서 가져왔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난 하고 싶은 말을 잊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비단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맥락만 닿는다면 우리도 하고픈 말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만델슈탐의 시집이 처음 번역된 건 아니다. 역자인 조주관  교수가 <오늘은 불쾌한 날이다>(열린책들, 1996)란 제목으로 한번 선집을 펴낸 적이 있다. 아마 새로 나온 번역본과 중복되는 시들이 많을 듯싶다. 하지만 당장 내가 손에 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이고 표지도 더 맘에 든다. 만델슈탐에 대해선 아내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 <회상>(한길사, 2009)이 번역돼 있으므로 참고할 수 있다. 가슴 먹먹한 대목이 자주 나오는 아주 유명한 회고록이다. 시인은 스탈린시대 대숙청기에 수용소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는데, 그에 관한 회고를 담고 있다.

 

물론 '번역시'야 언제나 핸디캡을 안게 되지만, 시인의 '시정신'은 우리말로도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집의 말미에는 러시아문학 전공자이기도 한 이장욱 시인의 발문이 실렸다. '나의 사랑하는 적(敵), 만델슈탐'.

 

 

만델슈탐을 떠올린 김에 최근에 번역된 현대 러시아문학 작가들에 대해서도 한 마디. 저명한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1879-1953)의 <가장 중요한 것>(문학과지성사, 2012)이 번역돼 나왔다. 오래전 대학원 시절에 접해본 작가인데, 그동안 잊고 있었다. '러시아의 피란델로'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듯한데, 이번에 나온 작품집에는 '즐거운 죽음', '제4의 벽', '가장 중요한 것' 세 편이 수록돼 있다.

 

더불어,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도 불리는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단편집 <예피판의 갑문>(문학과지성사, 2012)도 같은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출간됐다. <코틀로반>(문학동네, 2010)의 번역자 김철균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더 언급하자면, 플라토노프의 단편집으론 <귀향 외>(책세상, 2002)이 번역돼 있다. <구덩이>(민음사, 2007)는 <코틀로반>과 원제가 같은 작품, 하지만 다른 판본을 옮긴 것이다. 그리고 장편 <행복한 모스크바>(지만지, 2009)가 더 번역돼 있으며 대표작 <체벤구르>가 번역중인 상태다. 흠, 저녁 먹어야겠다...

 

12.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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