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극단의 <죄와벌> 3부작 중 두번째 작품, <푸르가토리움>이 오늘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별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작년에 초연돼 호평을 받았다는 작품이다. <죄와 벌>의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원작을 무대에 올리는 건 아니고 재가공했다(공연정보에 대해서는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12005628 참조). 공연에 부친 글을 옮겨놓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단테의 「신곡」이 만났다?

명품극단의 <푸르가토리움-하늘이 보이는 감옥(獄)(이하 푸르가토리움)>은 그 컨셉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은 라스콜리니코프이지만, 퇴락한 술꾼 마르멜라도프는 작품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 조연이다.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마르멜라도프 덕분에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딸인 소냐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생 두냐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두 집안의 비참한 가난은 모두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몬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리 가족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창녀 일을 하는 소냐는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을 넘어선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죄와 벌」은 바로 이 두 사람의 행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빼면 어떻게 될까? <푸르가토리움>은 그렇게 라스콜리니코프가 빠진 「죄와 벌」이야기라고 해도 좋다. 이야기의 새로운 중심은 마르멜라도프 가족으로 넘어간다. 배역도 바뀌어 마르멜라도프 가족이 주인공이고 ‘로지온’은 조연이다.

 

「죄와 벌」에서 가난한 법대생은 감옥 같은 현실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살인이라도 해보지만, <푸르가토리움>에서 중년의 술꾼은 현실과 맞설 만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 선량하지만 무능력한 그는 직장에서 쫓겨나 아내의 양말까지 전당포에 맡기고 술을 퍼마신다. 결국 마르멜라도프는 마차 사고로 죽고, 아직 어린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내쫓기게 된 폐병쟁이 아내 까쩨리나는 길거리에서 쓰러진다.

 

그런데 과연 이런 비참한 현실이 비단 마르멜라도프 가족만의 비극일까. 19세기 러시아 사회에만 한정된 이야기일까. 물론 아니다. 용산참사의 악몽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바로 지난달에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자신의 임대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21세기 한국사회의 현주소다. 그런데 이 문제적 현실을 연극은 ‘푸르가토리움’, 곧 ‘연옥’이라고 말한다. 모든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단테의 ‘지옥’과 달리 연옥은 ‘하늘이 보이는 감옥’, 곧 희망을 담지한 감옥이다. 과연 하늘은 어디에 있고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그걸 발견하는 일이 관객의 몫이다. 곧 당신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다.

12. 04. 17.

 

 

P.S. 마침 <죄와 벌>(민음사, 2012) 새 번역본도 나온 참이어서 마르멜라도프 가족의 이야기는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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