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이지만 전에 읽었던 하루키 소설의 많은 소재들이 재등장한다.
열일곱살, 순수한 첫사랑, 가슴, 갑작스런 이별, 어긋나는 정상적 어른의 관계, 꿈, 이세계, 그림자, 나의 반쪽, 망령 혹은 유령, 빙의, 구덩이, 굴, 숲속, 갑부집 아들, 혼자 밥하고 청소하기, 무조건 믿기, 중요한 건 내 마음, 난 여기 또 저기, 아니 여기 말고 저기, 그 소녀, 도서관, 책, 시간, 커피, 재즈, 겨울, 달 밝은 밤, 날 가져요, 합체, 이제 다시 시작이다.
첨 보는 대파 두 줄기는 그나마 신선하고 서글펐다.
명절 어르신과의 만남이었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독자를 못 믿는지 자꾸 반복하고 다짐하고, 채근하고 설명하고. 설정에 공들이는 건 알겠는데 예전처럼 휙 넘어가질 못하고 자꾸 주춤거려서 맥이 빠졌다. 같이 벼랑에서 뛸 준비 되있었다고! 그 검은 강에 다이빙 하려던 찰라였어!
어색한 2인칭 '너'를 향한 1부 끝에서 그래, 이제 본격적으로 가보자! 했더만 (제목에서 카프카와 진격의 거인을 상상했던 나의 잘못) 다시 슬로 모드로 돌아왔다. 길고긴 시골에서의 2부의 마무리, 꿈결의 강물 속을 걷는 노년 작가의 진심을 엿보았다. 짠해서 욕을 삼킨다. 3부에서 나약함은 벗고 병렬 혹은 치환의 절정으로 돌진하나 싶었는데….아 … 이렇게 풀어가나요? 소년이여, 초심이여.
늘어지고 반복되는 설정과 순한 맛의 (등장인물들에겐 고통이었겠지만 하루키와 레이먼드 카버의 독자에겐 익숙한) 위기들은 750쪽 책을 여러번 덮고 완독을 할지 말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름과 작가 경력이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주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라면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나눠 읽길 권한다. 편지봉투 받고 세 쪽 동안 뜸들이다 봉투 여는 주인공이라 빠른 전개와 흐름을 바라는 사람은 복장이 터져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