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깨끗한 책, 새 책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한 편이다. 물론 누구라도 새 것, 깨끗한 것, 좋은 것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지만 나는 책에 있어서는 약간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아마 이런 생각은, 별로 오래 안 가는 옷이나 화장품 등과는 달리 책은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무를 물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사람들은 보통 서점에 가면 무슨 책을 살까.. 고민하지만 나같은 경우는 서점에 가기 전부터 사야 할 책은 거의 결정이 되어 있다. 따라서 해야 할 일은 여러 권 쌓여 있는 책 가운데서 가장 멀쩡하고 깨끗한 걸 골라내는 것. 다들 알겠지만 똑같은 출판사에서 똑같은 유통 경로를 거쳐 같은 서점에 진열된 책이라 하더라도 한 권 한 권의 상태가 조금씩은 다르다. 어떤 애는 겉표지가 접혀 있거나 쭈글쭈글해져 있을 수도 있고, 속지가 찢어져 있을 수도 있으며, 표지 인쇄 상태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따라서 몇 권, 몇십 권, 몇백 권의 책 가운데서 가장 멀쩡한 애를 골라내는 건 상당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은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큰 서점에서는 그나마 수월한 편이다. 일단 내 이상한 행동(책 무더기를 파헤치면서 똑같은 책을 집어들어 계속 앞으로 뒤로 옆으로 돌려보는 것)을 주목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똑같은 책이 여러 권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으니까. 그러나 동네 책방처럼 좁은 곳이나 넓긴 하되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점원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라면 좀 곤란해진다.. 그럴 때는 일단 손을 대지 말고 눈으로만 쭉 훑어서 후보를 몇 개 골라낸 후 그 중에서 최종 선택을 해야 한다.
사실 가장 고르기 힘든 건 만화책. 커버도 얇고 종이질도 좀 떨어지고 배송할 때도 노끈 등으로 아무렇게나 겹쳐 묶어 놓는 경우가 많아서 어떨 때는 흠 없는 책 한 권 찾으려고 100권 가까이 뒤져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닐 래핑 때문에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흠을 못 봐서 집에 와서 래핑 뜯고 난 후에야 여기저기 흠집이 보이는 것. 포장 뜯었으니 눈에 띄는 파본이 아닌 한 바꿔달랄 수도 없고. 내가 자주 가는 총판점 주인들는 이런 내 성격을 잘 알기 땜에 내가 한참 뒤지다가 그냥 빈 손으로 나오면 "왜? 깨끗한 게 없어? 내일 다시 들어오니까 그때 와봐"라고 말해주기까지 한다. 고맙게시리..
깨끗한 책을 골라서 사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보관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기껏 예쁜 애 골라왔는데 아무렇게나 방치해서 금방 헌책 만들어 버리면 그게 뭐하는 짓이람.. 그래서 내 방에는 아주아주 두꺼운 커튼이 사시사철 쳐져 있다. 책을 잘 보관하는 데 있어 최대의 적 가운데 하나인 직사광선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반짝이는 장정의 새 책이라도 직사광선 아래 며칠만 방치하면 금세 표지는 바래고 책장은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다. 여기에 물이라도 좀 떨어뜨렸다가는 그냥 끝장이고.. 블라인드를 쓰면 좀더 확실하게 빛을 막을 수 있겠지만 너무 심하게 깜깜해서 책 제목조차 안 보이니까, 희끄무레한 빛이라도 들어와 책 제목을 식별할 수 있으려면 두꺼운 커튼이 제격이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도 내 방 창문은 낮에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이렇게 책장 바래는 것도 못 참는 내가 책에 색칠을 하거나 줄을 긋거나 필기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물론 공부하는 책에는 깨알같이 주석도 달고, 자 대고 쭉쭉 줄고 긋고 형광펜도 알록달록 칠해놨지만 그 외의 소장용 책에는 절대, 네버!! -_- 우리나라 허술한 양장본들 혹시 좍 펴놓고 읽다가 책장이라도 쫙 갈라져 버릴까봐 양손으로 꼬옥 움켜쥐고 읽는 판에 색칠이라니.. 에비~
따라서 내 책들은 절대 대출 불가 딱지들이 붙어 있다. 엄마랑 동생이 가져가 읽을 때도 혹시 더럽히거나 책장 벌어지게 하지 않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판에 함부로 밖으로 내돌릴 수 있나.. 엄마 협박 땜에 어쩔 수 없이 엄마 친구분들한테 빌려준 적은 있지만, 그럴 때는 거의 책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내준다. 새 거 하나 사고 말지.. 하는.. 남들은 이런 날 그악스럽다 하지만, 수집가들이 자기 컬렉션을 소중히 하듯이 난 내가 모으는 책을 최선을 다해 보호할 뿐이다. 자주 읽는 책, 가능하면 평생 간직하고 싶은 책들은 그래서 소장용으로 아예 한 질을 더 사서 숨겨놓는(남들이 보면 잔소리하니까)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나중에 더 좋은 판본이 나올 수도 있지만 또 아예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특히 만화의 경우에..
이런 내 모습이 유난스럽다, 징글징글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이라는 물건 그 자체를 좋아하고 신성시하기 때문 아닐까. 비록 그 대상이 몇천 만원, 몇억 원짜리 고서나 희귀본이 아니라 그냥 아무 데서나 몇 푼만 주면 살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베스트셀러라 하더라도 내 책장에 꽂혀서 내 책이 된 이상은 아무리 제목이 같고 내용이 같다 해도 분명 내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요즘에는 예전과 달리 대부분의 책을 인터넷으로 구입한다. 따라서 많은 시간을 들여서 쌓여 있는 책 가운데서 내 것이 될 그 한 권을 골라내는 작업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냥 인터넷 서점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믿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파는 사람들도 책이 좋기 때문에 그 일을 선택한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그래서 이렇게 책 한 권 한 권을 소중히 여기고 애정을 쏟고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자기들과 같은 마음을 가진 독자들을 생각해서, 더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배송 과정에도 신경을 써서 책상자를 열어보는 그 순간이 책벌레들 최고의 환희의 순간이 되게 해주는 걸 당연하다 여길 테니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를 가지고 즐겁게 책을 고르고 돈을 치르고 두근거리며 기다렸다가 드디어 도착한 상자를 열었는데, 고대하던 그 책들이 데친 시금치마냥 쭈글쭈글해져서 상자 안에 뒤엉켜 나뒹굴어 상처 입고 찢어진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속이 상하는지, 정녕 모르는 걸까? 돈 받고 책 보내줬으면 우리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수고와 정성이 고객과 독자를 행복하게 하고 더 큰 신뢰를 준다는 것, 꼭꼭꼭! 알아뒀으면 좋겠다. 찢어지고 더러운 책 교환해 주려면 돈이 더 들 텐데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런 것쯤 무시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인가? 그렇담 그런 분들께 감히 말씀드려 본다. 상태 불량한 책을 받으면 귀찮아도 절대 참지 말고 반드시 교환하라고. 그래야 앞으로 더 깨끗한 책,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참고로 며칠 전에 어떤 인터넷서점에서 전화를 받았다. 주문한 책 잘 받았느냐고.. 책 상태는 만족스러웠는지, 혹시 교환을 원하는 책은 없는가 하고.. 그런 전화를 모든 고객에게 하는지 랜덤하게 골라서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난 거기서 깽판 부린 적 없으니까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한테 한 전화는 아니었을 거다.. 아마도). 특히 '책 상태'에 대해 물어봐준 게 너무너무 고마워서 그날의 우울함이 싹 잊혀질 정도였다. 그런 부분까지 확인해주는 서점에서라면 계속 최상질의 책을 받아볼 수 있지 않을까? 부디 모든 서점들이 본받아줬으면 한다.